승강기에 나란히 올라탄 세헌과 윤신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동승한 다른 환자가 있었던 탓이다. 세헌은 처음 일반 병동에 윤신을 데리러 왔을 때처럼 정갈한 슈트를 갖춰 입었다. 표정도 완고한 무표정의, 언제나의 그였다. 단지 이튿날 출근용으로 가져온 새 옷을 걸쳤다는 게 몇 시간 전과 달랐다. 옆의 윤신은 예의 병원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둘만 있게 되기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다른 환자가 먼저 내려 주어서 주차장에 당도하기 전에 도로 둘이 되었다. 방해꾼이 사라지고 양문형 문이 닫히자마자 윤신이 곧장 말문을 열었다. 일부러 꾸며 낸 무덤덤한 어투였다.
“가는 거 아니라더니.”
“욕실로는 되돌아갔으니까 아주 거짓말한 건 아니지.”
“차라리 저 퇴원시켜 주면 안 돼요? 출근은 양보할게요. 집에서 푹 쉬면 되잖아요.”
“집에 데려다 놓으면 너 가만히 안 있을 거잖아. 아냐?”
아니진 않아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 쪽이 침묵하는 사이 그가 덧붙였다.
“너 고삐 풀려서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동안 내가 받을 스트레스가 벌써 그려져. 안 돼. 퇴원하고 싶으면 손가락 건강까지 완벽하게 회복해.”
“……이거요? 진심이에요? 강세헌 씨?”
오른쪽 검지의 깁스를 보여 준 윤신이 그의 코앞에서 좌우로 흔들며 눈으로도 진심이냐고 물었다. 그는 뻔뻔한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보호다. 그걸 그도 알고 저도 알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는 건 세헌이 자신을 싸고도는 상황이 솔직히 그렇게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또 자신이 다친 일로 그가 내심 많이 놀랐던 것 같아 그게 해소될 때까지 어지간한 건 다 따라 주고 싶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기미를 숨기지 않은 윤신이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여 세헌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손을 뻗어 왔다. 목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는 몸짓을 통해 느꼈다. 굳이 설명하진 않지만 이 강제 작별이 그도 아쉽긴 한 모양이다. 그래서 또 마음이 풀렸다.
왜 퇴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사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윤신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가 굳이 설명하지 않는 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짐작건대 들어 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일일 것이다.
세헌이 윤신을 지분거리고, 윤신이 그에게 더 몸을 비비면서 뭉그적대는 동안 승강기는 착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눅진한 바람이 한 차례 휭 불었다. 병동 내부는 온도 조절을 해 서늘한 공기가 흘렀으나 주차장은 외부와 연결돼 있어 묘하게 후덥지근한 공기가 맴돌았다.
VVIP 병동 전용 주차장으로 가는 긴 복도를 두 사람이 가로질렀다. 한데 여기까지 내려왔는데도 어째 기사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따로 없었다. 이제는 세헌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출퇴근하는 일이 꽤나 어색해진 상태라 윤신의 고개가 갸웃했다.
“기사님은요? 안 불렀어요?”
“근방인데 뭐 하러.”
“펌에 가는 거잖아요. 송 대표님이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어요?”
“나 원래도 송 대표 말 잘 안 들었어. 이젠 더 안 듣지.”
그건 그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윤신이 세헌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퇴원하면, 출근할 때 제가 운전해 드릴까요? 가격 저렴하게 해 드릴게요. 운전 1회당 자기야 한 번.”
그는 일말의 고민조차 해 보지 않고 거절했다.
“사양할게. 가뜩이나 송 대표, 탁 비 다 너랑 내 사이 아는 척 못 해서 난린데 스캔들까지 나긴 싫어.”
“튕기기는.”
“튕긴 게 아니야. 계산을 한 거지. 운전을 해 주는 것도 네가 원하는 거고, 그 호칭으로 너를 불러 주는 것도 네가 원하는 건데 내가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닌가?”
“운전에 자기야 1회면 내가 진짜 얼마나 후려친 건데? 대가로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하면 안 해 줄 거잖아요? 충분히 양보한 거라고요.”
“왜 내가 안 해 줄 거라고 생각해. 물어보기나 해 봤어?”
어라?
깊이 숨을 삼킨 윤신이 폭주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억누르면서 세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가 거기다 대고 탄산음료를 붓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 감각이 이상해 가던 걸음을 멈추기까지 하자, 관성으로 걷던 세헌도 덩달아 멈춰서 한 걸음 뒤의 자신을 돌아봐 주었다.
그들은 마주 선 상태로 서로를 어이없어했다.
“해 달라면 해 줄 거예요? 진짜로?”
“당연히 아니지.”
몇 초 사이에 천국과 지상을 오간 윤신은 기가 막혔다.
“……뭐야. 갖고 노는 거야?”
“난 너 운전대 잡으면 극도로 스트레스받아.”
“왜요. 남들 다 하는 거.”
“걱정돼. 원래도 싫었는데 이번 일로 더 끔찍해졌어. 그리고 난 그런 기분이 싫어. 도련님은 가능한 한 위험한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
“운전기사를 가끔 쉬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지. 나도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는 건 좋으니까. 물론 운전은 내가 하고. 추가 질문?”
“……이치에 맞는 이유에 적절한 대안까지. 매우 완벽한 대답이었어요.”
“알아.”
익숙해진 건지 사실은 천성에 다정함이 있는 건지 의외로 그는 저를 달래는 데 선수였다.
진짜 교활한 데가 있다니까. 보내 주기 싫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한 표정이 된 윤신이 뺨을 슬쩍 붉히곤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도 세헌이 조용히 보폭을 맞춰 걸어 주었다. 둘은 느릿느릿 춤을 추는 것처럼 로비를 걸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여서 둘 모두 그 순간의 적막을 즐겼다.
세헌은 어떨지 모르겠다. 다만 자신은 금세 이 평온한 시간의 끝이 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고요를 지속하고 싶은 기분과 뭐라도 더 말하고 싶은 기분이 함께 들었다. 결국 후자의 손을 들어 준 윤신이 정적의 장막을 거두어 내고 그 안에 소리들을 채워 넣었다.
“일 끝나고 전화해 줄 거죠?”
이 밤, 이대로 그가 가 버리면 최소한 내일 비슷한 시간이 될 때까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세헌은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왔던 길을 거슬러 가야 할 정도의 중차대한 사유일 텐데 아까 통화하고 났을 때의 반응으로 추측건대 반가운 상황은 아닌 듯했다.
무슨 생각으로 꺼낸 말인지 그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란히 걷는 동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이 볼 수 없도록 최대한 인적 없는 길을 찾아 윤신을 인도한 그가 통유리로 된 중문 앞에서 동작을 그쳤다. 그는 이따금 윤신이 거추장스러워하는 앞머리를 넘겨 핀으로 고정하듯이 터럭들을 움켜쥐어 걷어 올리곤 수줍게 드러난 매끈한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댔다.
“그거면 돼?”
“어…… 영상 통화로 걸어 주세요.”
“정말 그거면 돼?”
“어…… 두 번 걸어 줄래요?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고작 그거?’라고 묻듯 세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게 다야? 사실 난 몇 번 더 옆구리 찌르면 출근을 허락해 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지레 포기하고 조르지 않기에 의아하다는 걸 눈짓과 표정으로 표현했다.
가뜩이나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윤신이 사실관계를 확인하듯 몇 번이고 안면 근육으로 질문했다. 세헌이 별 웃기는 표정을 다 보여 준다는 양 피식 웃었다. 미소 짓는 그로부터 지금 발언을 철회할 만한 기미는 전혀 안 비쳤다. 윤신의 안색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죠?”
“퇴원 수속 밟고 다음 주부터 다시 출근해. 대신 담당 의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네 상태가 완벽하게 괜찮다는 걸 근거를 들어 내게 입증해야 하고, 네 컨디션도 사고가 있기 전과 같아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당분간은 출퇴근 시간마다 경호를 붙일 거야. 참을 수 있겠어?”
“걱정 마요. 몸 열심히 사릴게요. 저 팀장님한테 제 사건 도로 달라고 얘기해요? 어? 해요?”
“마침 펌으로 가는 길이니까 내가 얘기 남겨 두지.”
신이 나서 씨익 웃은 윤신이 사방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뺨에 열심히 입 맞췄다.
쪽쪽쪽. 쪽. 쪽쪽. 규칙 없이 엉망진창으로 온 얼굴에 뽀뽀해 주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밝은 미소와 젖은 입술, 안달 난 눈빛과 발그레해진 뺨. 언제나, 어느 때나, 도윤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세헌을 마주한다는 거였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든 그가 입을 떼려는데 마침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인기척을 포착한 윤신이 능청스럽게 바로 떨어져 나갔다. 웬일로 이런 일에 냉정하게 대처하는 세헌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어서 덩달아 속상해진 윤신의 입꼬리가 금세 살짝 처졌다.
그들은 서로를 관통하는 미묘한 이해의 메시지를 공유하며 다시 걸었다.
이윽고 주차장으로 나오자 멀리서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뭔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둘이 나란히 그 방향을 응시했으나 금세 쥐 죽은 듯 조용해져서 곧 관심을 거두었다.
이 시간이 오지 않기를, 꼭 와야 한다면 최대한 늦게 오길 고대했지만 시간은 그들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다. 결국 세헌의 차량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걸음을 중단했다.
운전석의 문을 연 세헌이 발이 안 떨어지는 듯 윤신을 복잡한 시선으로 직시했다.
“나는 이런 기분에 익숙하지가 않은데.”
“어떤 거요?”
“출근하기 싫다.”
결국 참다, 참다 터진 윤신이 울상이 됐다.
“오늘 진짜 왜 이래? 보내 주기 싫게…….”
부디 저를 철없는 연인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눈으로 간절히 애원한 윤신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순순히 밀려나 준 세헌이 승차하려다가, 승강기 방향을 손으로 척 가리켰다.
“네가 먼저 들어가.”
“가는 거 볼래요.”
“그거 보여 주기가 싫어서 그래.”
세헌은 대체로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윤신에게만은 이상할 정도로 그러기 싫어했다. 단순히 저를 등지고 가 버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윤신은 그게 다는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만이 그의 다른 모습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권위, 능력,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이 아니라 가슴속에 꾹꾹 눌러 숨겨 두었던 것들을 찾아내고, 끄집어내고, 어루만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윤신은 고집 피우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그의 옷깃을 펴 주는 것으로 답하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방금 세헌이 했던 말이 너무 그답지가 않았던 터라 마음에 많이 걸렸다. 이 순간 꼭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걸 덧붙였다.
“힘든 일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요. 선배 옆에 나 항상 있잖아요. 요즘 하기 싫은 일 하느라 마음이 많이 고단해 보여요.”
언제나 의연한 강세헌을 잘 알았다.
여태 어떤 난관 앞에서도 군색한 변명을 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게 모든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간단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크게 믿음직스럽진 않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제 몫은 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가끔은 저를 좀 의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세헌은 물 밑에 감춰 둔 모든 말들까지 전부 이해하고 있을 터다. 역시나.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이 그걸 증명했다. 그걸 마주 본 윤신은 기운을 얻어서 대답을 보탰다.
“저 믿죠?”
“똑바로 걸어. 그러다 다쳐.”
“사랑해요.”
“그래. 알아.”
일단 그가 올라가라고 하니 발걸음을 떼긴 했는데 막상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이 영 편친 못했다. 윤신은 뒷걸음질 치며 걷다가 그의 말에 정면을 보더니 또 금세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걸려 하며 뒤를 연신 돌아보았다. 계속 지켜봐 주던 세헌은 병원복 차림의 연인이 손을 흔들다가 로비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라야 웃는 낯을 서서히 거두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윤신을 마저 씻기고 내려오느라 예정보다 시간이 다소 지체됐음을 인식하고 급히 차에 타려 했다. 그러다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아까 기척이 들렸던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그 자리는 언제 소음을 빚어냈느냐는 듯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잠잠할 따름이었다.
그는 매우 감이 좋았다. 촉이 이상했다. 확인을 해 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소리가 있었다면 형체도 곧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수상쩍었다. 단순히 일상에서 일어난 소음일 가능성도 있지만 속에서 괜히 걸린다면 점검해 보는 게 옳았다.
그가 차 문을 도로 닫고 그쪽으로 걸어가려던 차였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걷다 멈춘 세헌은 이를 갈며 전화를 받았다.
“왜. 또 무슨 일이야.”
- 대표님 탁 비입니다. 출발하셨습니까? 빨리 와 주셔야겠는데요. 위독하대요.
하아. 한숨 끝에 미간을 구긴 그는 손아귀에 쥔 휴대폰을 힘주어 움켰다.
“송 변 어쩌고 있어. 움직였어? 아직 가면 안 돼. 스크럼 짜서 움직일 거니까 기다리라고 해.”
- 예, 아직요. 그런데 완전히 패닉 왔어요. 여기서 강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세요. 기자들 벌써 냄새 맡은 거 같은데 어떡하죠? 올해 우리 펌 무슨 마가 낀 걸까요?
“입조심 안 해? 송 변한테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고 전해. 곧 가지.”
통화를 마친 그는 기둥 뒤를 힐끗 살폈다. 여전히 잠잠한 바다처럼 아무 기척 없는 걸 눈으로 확인하곤 차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었다. 차체에 탑승한 그가 유려한 솜씨로 운전해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끼익. 타이어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점점 사라졌다.
째깍, 째깍.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지리멸렬할 정도로 긴 수 초가 흘렀다.
그 순간.
고요한 VVIP 전용 주차장 한구석에 사람이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세헌이 소음을 의식해 확인하려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기둥을 등지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경이 땅으로 힘없이 내려앉았다. 채신 같은 건 찾을 엄두도 못 내고 무너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터질 듯한 안색을 한 채였다.
윤신을 위해 직접 끓여 온 수프가 담긴 보온병을 더듬더듬 주워 든 그녀는 의도치 않게 열려 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이제라도 닫으려고 끊임없이 애썼다.
그리고 동시에 기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절망했다.
* * *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에 걸터앉은 세헌이 접견용 소파 팔걸이에 앉은 미희를 응시했다.
내내 정신없이 상황을 파악하던 그녀는 이제야 겨우 그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꽤 끈질긴 시선을 느끼곤 슬며시 고개를 드는 안색이 피폐했다. 심지어 영 마음이 불편한 모양인지 양손을 겹치곤 손톱 주변의 있지도 않은 거스러미들을 열심히 찾아 뜯고 있었다. 끝내 울분을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그를 향해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음성이 히스테릭했다.
“그렇게 보지 마. 진정해야 되는 거 나도 알아! 안 되는 걸 어떡해?”
세헌은 시니컬하게 응수했다.
“어떡하긴.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왜 하필 이때! 지금이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긴데 하필이면 이때 내 발목을 잡느냔 말이야! 그딴 것도 후배라고……. 공동 대표 체제 이제 겨우 자리 잡아 가. 내가 뭘 더 어째야 했다는 거야? 내가 저 왕따 시켰어? 업계 1위 탈환 코앞인데 이 자식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차분히 듣고 있던 세헌이 팔짱을 척 끼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였다.
“뭘 어쩌라는 게 아니야. 변호사 경력이 몇 년인데 이럴 거 모르고 그랬겠어? 개망신당해서 엿 먹으라는 거고, 우린 당한 거야. 지금 우리 입에 엿 물려 있으니까 정신 좀 차려.”
“나도 그러고 싶어!”
도국 소속 주니어 변호사 한 사람이 자살을 시도했다. 자택에서 발견된 건 고작 몇 시간여 전이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에 경찰이 도국 사옥으로 연락했고, 펌 내부에서 뭔가 대처를 해 보기도 전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환자는 그예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이런 경우는 어느 정도 이례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유일무이하게 특별하진 않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도국도 다수가 근무하는 직장이니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언론사에서도 잠깐의 지면 기사 정도로 다루고 넘어갈 정도의 사건이었다.
다만 이번 사건은 변수가 존재했다. 자살한 변호사가 자극적인 언어를 총동원해 인터넷상에 유서를 공개적으로 남겼다는 사실이었다.
변호사의 글답게 장황한 유서에는 여러 가지 하소연들이 담겨 있었다.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둥, 강세헌 대표를 동경해서 들어온 도국인데 너무 무관심해서 몇 달간 말 한 번 섞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둥,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용기 내 찾아간 송미희 대표가 구제해 주긴커녕 도리어 불을 지폈다는 둥, 도국이 도저히 책임 소재에서 피해 갈 수가 없는 문장들의 향연이었다. 가뜩이나 윤신이 피습을 당한 일로 언론이 펌을 괴롭히고 있어서 여러모로 시기가 나빴다.
“걔가 집단 따돌림당하고 있다면서 송 변한테 면담 신청한 적 있었어?”
“있었어.”
“뭐라고 했는데. 기록 남겨 놨나?”
“아니. 그런데 기억나. 그때부터 편애 소리 나올 만큼 케어했어. 혼자 있으면 부르고, 걔네 팀장한테 넌지시 챙기라고 지시도 했어. 대표가 주니어 만나는 게 흔한 일이니? 팀장급이 주최하는 회의 아닌 이상 말 섞을 일이랄 게 없는데도, 일부러 불러다 가끔 가르치기까지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네.”
“내 말이 그거야. 이 이상 뭘 어떡해. 내가 지 엄마야?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동기, 동료 다 불러 따돌리지 말라고 호통 칠 순 없잖아. 백번 양보해서 내 방법이 틀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렇게 뒤통수 맞을 만큼 잘못한 건 아니지 않니? 도 변은……!”
버럭 소리치던 미희가 이내 숨을 골랐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은 창 너머로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강제 밤샘을 하게 생긴 몇 비서들이 다들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세헌의 말대로 진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그녀는 후욱,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진지하게 마저 대꾸했다.
“……도 변은 혼자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걔의 반도 못 챙겼어. 너 그런 거 안 하는 사람이니까 나라도 했어야 했는데,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안 그랬다고.”
“…….”
“와, 나 아까 기자들이 카메라 들이대는데 그 앞에서 표정 관리가 안 되더라. 넌 이따 카메라 앞에선 슬픈 표정 꼭 지어.”
잠자코 그녀의 말을 곱씹던 세헌이 의아해했다.
“안 슬픈데 어떻게 슬픈 표정을 지으라는 거야?”
“대표가 둘 다 사이코패스 취급 받을 순 없잖아!”
“별일 아냐. 타이밍이 나빴을 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자살한 변호사가 업계 최초도 아니고, 우린 사회복지사도 아니야. 유난 떨면 진짜 잘못해서 제 발 저려 하는 사람 같으니까 해야 되는 것만 해. 괜히 선 넘지 말고.”
침착한 성격의 그녀는 도저히 진정이 안 되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럼 네가 어떡할지 좀 알려 줘. 나 지금 너무 열받아서 머릿속이 백지야!”
“의료 기록 확인해 보니 우울증으로 약 탄 기록이 한 차례 있었어. 술도 좋아하는 편이었다니까 두 가지를 엮어. 불안, 우울, 망상장애, 자살, 다 알코올중독 부작용들이야. 평소 만성 우울증이 있었다고 최대한 강조하고. 사망 원인을 본인에게 돌리면 돼.”
언제나와 같은 태도의 세헌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경계하며 그의 처방을 귀담아듣던 미희가 일순 기막혀했다. 든든하게 옆을 지키는 공동 대표가 상당히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어느 순간 남자의 차가운 총구가 저를 겨냥할 수도 있다는 걸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한번 약 탄 게 어떻게 만성이 돼? 좋아하는 게 어떻게 중독이 되냐고.”
“왜. 없는 얘기 부풀리려니 양심에 찔려? 그거 말곤 답 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싫으면 그냥 침몰하든가. 그사이 도국은 내가 혼자 다 먹을게. 고마워.”
“말을 해도.”
“식장엔 따로 가지. 내가 이따 아침에 갈 테니까 송 변이 나중에 가. 당장은 내가 시선 몰이를 한 다음, 우리 쪽 기자들 세팅해 둔 저녁쯤 가서 유족들 위로하는 모습 보이라는 뜻이야.”
지금으로선 세헌이 제시한 방법이 가장 최선이었다. 이런 일은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는가.’가 제일 중요한 쟁점이었다. 법적으로 질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인 비난은 가능한 사안이었던 탓이다. 이제 와서 사실 관계를 짚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유서 속 자극적인 언어들에 면역이 된 사람들은 도국의 정제된 해명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정적인 부분에 치우쳐 분노에 함몰되어 있던 미희의 이성이 제 역할을 되찾았다. 그녀는 세헌을 어떤 의미에서는 경이로워하는 눈치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너 돌게 할 수 있니? 도 변 가출하면? 그럼 천하의 강세헌도 돌겠지?”
이런 대화 중 윤신을 은근슬쩍 끼워 넣은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예민하게 그녀를 직시하며 그 부분을 지적하려던 세헌이 불현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확신에 찬 어투로 대꾸했다.
“걘 가출 안 해.”
“뭐, 같이 살긴 하나 보다?”
“그럴까 생각 중이야. 담배 좀 피운다. 창문 열어 줘?”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미희는 일순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삼켰다. 세헌이 골치 아플 때 담배를 피운다는 걸 잘 아는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으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어머 웬일이니. 진심이야? 지금도 사택 두 동 간에 거리 멀지 않잖아. 갑자기 왜?”
세헌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내쉬는 호흡에 매캐하고 흐릿한 담뱃잎의 기운이 뒤섞였다.
듣는 입장에선 갑자기일 수 있지만 말하는 그의 입장에선 갑자기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 고민했고, 그런데도 여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거였다.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그는 윤신은 믿지만, 사랑의 영속성을 믿진 않았다. 그걸 순진하게 믿기엔 자신이 인간의 밑바닥을 너무 많이 본, 닳고 닳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갈등했다. 만일 훗날 관계에 위기가 온다면, 도윤신은 극복할 수 있을까. 자신은 그런 윤신을 속박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지금은 독립적인 서로의 공간이 존재하고, 그걸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황이라 도망칠 구석이 있었다. 하나, 같은 지붕 아래 살게 되면 그럴 수 없게 될 터다. 윤신에게 바로 그 여지를 남겨 주고 싶었다. 최소한의 숨통 트일 곳을 만들어 주려던 것이다.
이제 자신은 영영 윤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저를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아직은 숨을 곳이 남아 있는 도윤신이 이별할 생각 같은 건 꿈에서조차 하지 않도록.
일종의 배려인 척하는 이기심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고 이후, 도윤신을 제가 아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 고이 붙잡아 두지 않으면 당장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닿아 마음을 정했다. 물거품처럼 함부로 사라지면 안 되니까.
“갑자기 아냐. 아무튼. 사택 두 채 연달아 비울 거니까 알아 둬. 입은 맞춰 두는 편이 낫겠지.”
미희에게 있어 세헌이 사생활 상의 안정을 찾는다는 건 도국에 더 오래 머물 거라는 방증이었다. 공동 대표 자리까지 줘 놓고도 언제든 그가 떠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놓지 않고 있던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일이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반색하다가, 지금 이런 일에 관심 둘 때가 아님을 인지하곤 기막혀하며 얼굴을 굳혔다.
“너 일부러 이때 말하는 거지? 내가 이거로 감 놔라 배 놔라 못 하니까?”
“뭐 놓으라고 해도 송 변이 놓으란 데엔 안 놔. 그리고 일부러 지금 말하는 거 맞아.”
“이 와중에 좀 기쁘네. 나도 쓰레기 다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던 건지.”
이번엔 그 쪽에서 기막혀했다. 길고 곧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흰 담배마저 어이없어 보였다.
“……나‘도’?”
“그렇잖아. 예전 같았으면 너 이해 못 했을 텐데 나 지금 너 이해돼. 안 슬프고, 골치만 아파. 후배 변호사가 날 저격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속상한 것보다 내 리더십이 의심받을 게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큰 내가 싫다. 나 왜 이렇게 됐니? 내가 강세헌보단 그래도 인간미가 있었거든.”
로펌은 원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감옥 같은 곳이다. 언제나 스스로 탈출할 수 있지만 도망쳤다는 꼬리표가 업계에서 평생 따라다녔다. 비단 도국뿐만이 아니었다. 업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대형 로펌들은 대부분 자살한 소속 펌 출신 변호사 한두 명쯤은 보유하고 있었다.
위기는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다. 차분하게 상황을 해결할 게 분명한 세헌을 보며 정신을 다잡은 미희가 이 소식을 듣고 난 이후로 처음으로 여느 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녀는 천천히 팔걸이에서 몸을 일으켜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블라우스의 밑단을 정리하며, 장초를 비벼 끄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악역 맡겨서 미안하고. 강 변 네 입으로 들으면 내가 조금은 나은 사람인 거 같더라.”
“더 징징거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여차하면 쫓아내려고 했거든.”
“정신 차렸으니 제 발로 나가 준다, 내가. 회의 때 봐. 아, 파트너들 도 변 여론전에 이용하잔 얘기 필히 할 텐데. 어떻게 깔 생각이니? 같이 알자.”
그녀가 나가려는 듯하자 마찬가지로 책상에서 일어서던 세헌이 멈칫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우뚝 서서 미희에게 꽤 집요한 시선을 던졌다.
어떤 유의미한 비난 여론이 생기기 전에 중역들이 윤신을 볼모로 선수 치자고 할 건 충분히 예상됐다. 안 그래도 피습 사건이 터진 후 윤신이 최소한의 입장 표명조차 하지 않고 얌전히 병원에 머무르는 중이어서, 혹여 도이경과 연관된 보복 사건은 아닐지 그녀의 전 남편과 엮고 싶어 하는 황색 언론들이 많았다.
워낙 윤신의 대외적 이미지도 긍정적인 편이니 도국을 위해 적당히 피해자 이미지 형성을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은 반드시 탁상에 올라올 터다. 여론은 만들려면 시간이 걸렸다. 지금으로선 윤신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세헌이 방어적으로 나올 것을 미희도 예상하고 미리 언급한 게 아닐까 했다.
“송 변, 나 도윤신 내 뒤치다꺼리 하게 만들기 싫어.”
“나도 도 변 방패막이로 쓰기 싫어. 그래서 묻잖아. 노인네들, 우리가 도 변한테 해 준 게 얼만 줄 아냐면서 난리 피울걸?”
“도국이 걔한테 대체 해 준 게 뭔데? 내가 모르는 새 걔한테 대출이라도 해 줬어?”
“너한테 당장 뾰족한 수 없는 거면 그 악역은 그냥 내가 할까 싶어서 꺼낸 얘기야. 찜찜해할까 봐 말해 주자면 이건 무상이야. 너 말고, 도변 위해서.”
“선배가 걔의 뭔데 도윤신을 위해서 악역을 자처해.”
“너의 오랜 친구.”
일순 멈칫한 그는 실소를 터트렸다.
“대체 이 알고리즘이 어떻게 되는 거야?”
“허락한 걸로 안다, 이따 봐.”
클리닝을 맡겼던가. 그녀가 가끔 상복용으로 쓰는 검은 옷을 어디다 뒀는지를 궁리하며 혼잣말을 하더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방 주인은 바람 빠지는 듯한 숨을 내뱉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도윤신은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그의 삶에서 바꿔 놓았다. 조금 전 그는 미희에게 ‘걔가 죽은 건 선배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화를 내는 걸로 죄책감을 덜고 싶어 하는 게 훤히 들여다보여서였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던 자신이 우정과 선의로 서로를 배려하는 선후배 관계라는 걸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간지러웠다.
조용히 혀를 찬 그는 서 있는 위치에서 그대로 몸만 틀어 책상 위의 내선 수화기를 들었다. 꼭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탁 비가 득달같이 응답했다.
- 예, 대표님. 송 대표님 지금 나가시네요. 얘기 잘 끝내셨나요? 저흰 뭘 하면 될까요?
“자세한 건 이따 중역 회의 해 보고 알려 줄 거야. 일단 펌 차원에서 수선스러운 액션은 안 보이는 걸로 기조 정할 거니까 전 직원들, 특히 천지 분간 못 하는 주니어들 입단속 잘하라고 해. 따돌림 직접 가해자들, 방관한 간접 가해자들, 똑바로 주의시켜.”
- 펌이 정한 대외적 창구 외로는 이 사건 언급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맞아. 죽은 직원 동료랍시고 인터뷰 같은 거 하는 날엔 싹 다 모가지야. 변호사는 많고, 싸구려 입 대체할 변호사는 더 많아. 확실하게 전해.”
- 예, 알겠습니다. 강력하게 고지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대병원 VVIP 병동 내빈용 주차장 CCTV 좀 은밀하게 복사해 와. 시간은 어젯밤 11시 38분, 분량은 그때부터 한…… 10분 정도면 될 거 같다.”
이는 오늘 로펌에서 터진 사건과는 적잖이 동떨어진 명령이었던지라 탁 비서가 의아해했다.
- 영상요? 거기 VIP 병동이면 모를까 VVIP 병동은 진짜 거물들만 들어가는 데라 빡세게 관리해서 안 보여 주려고 할 텐데요. 누가 열람했단 소식 퍼지면 사생활 침해 어쩌고 하며 난리 나요. 그러다 저 소송 걸리면 어쩝니까.
“그러니까 은밀하게 따 오라고 하잖아. 이건 사적인 용건이니까 펌 끼지 마. 구역은…….”
아까 소음을 인식했던 장소를 머릿속에 그린 세헌이 위치 좌표를 계산했다.
“B19. 네 번째 칸. 기둥 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방향으로 카메라 있어. 통유리로 된 로비 중문이 옆으로 보이는 자리야. 뭐가 있었다면 분명히 찍혔을 거야.”
- 하아. 소송 걸리면 제 변호사 돼 주시는 겁니까?
“그거 들킬 정도로 사람들 입 관리 못 하는 비서는 필요 없어. 로펌 대표 비서가 처신 잘못해서 소송에 연루되면 넌 해고야. 꼰대들 반대 무릅쓰고 최연소 비서실장으로 승진시켜 줬으면 너도 그 정도 보은은 해야지.”
탁 비서가 뭔가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세헌이 먼저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창문 너머에서 전화를 받던 예의 비서실장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되겠냐는 의미의 수신호를 보냈다. 세헌은 안 된다는 의사를 전하듯이 블라인드를 척, 내려 거부했다.
지난밤 사옥에 되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계속 누군가와 함께였던 그는 처음으로 홀로 남았다. 이제야 편안하게 제 자리로 돌아가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한숨이 절로 샜다.
“하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터졌을 때 세헌의 역할은 다른 파트너들처럼 적당히 한 다리 건너 일을 관망하는 거였다. 미희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제공하지만 굳이 일부러 나서진 않았다. 그런 자잘한 대외적 이미지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으니까. 그럴 시간이 있다면 일을 했다. 한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바쁜데도 펌의 온갖 내·외부 일들까지 그의 소관이 되어 버렸다.
매일매일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일과 정치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달까.
이런 자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윤신은 덩달아 위태위태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까 고단해 보이니 기대라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
윤신이 제게 했던 위로를 속으로 곱씹어 본 그는 음절들을 한 자, 한 자, 집어삼켰다.
한 시간 뒤 회의에 들어가면 또 시간이 한참 걸릴 듯했다. 휴대폰을 꺼낸 그가 최근 통화 목록에서 익숙한 연락처를 찾았다. 걸어서 목소리라도 들을까 하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것을 수긍하고 기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따 득달같이 출근하겠지.”
다음 주부터 나오라고 분명 충고했으나 지난밤 자신이 그렇게 떠나왔으니 도윤신이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출근하면 안 된다는 경고는 철석같이 지키지만, 허락이 떨어진 순간 마음대로 해 버릴 게 훤히 보였다. 솔직히 그쪽의 알고리즘이야말로 전혀 모르겠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아마 윤신도 그럴 터였다.
심리적으로 지쳐 있을 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 늘 그렇듯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다.
보고 싶다.
보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왠지 멋쩍어 마른세수한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 * *
새벽녘 시작된 회의는 이른 아침까지 이어졌다. 안건들은 많지 않았으나 갑론을박이 길어진 데 대한 여파였다. 개중 두 명의 대표가 예상한 대로 윤신의 이름이 화두에 오른 때도 있었다. 미희는 훌륭하게도 온갖 선방으로 그 모든 공격들을 막아 냈다. 다시 생각해도 송미희의 방어력은 감탄스러운 수준이었다. 아까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세헌이 복도를 걸어왔다.
마침 일찍부터 나와 있던 직원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 도열했다. 부고 소식을 들은 듯했다. 대기하고 있던 탁 비서가 얼른 집무실의 문을 열어 두고 빠르게 달려와 그를 뒤에서 쫓았다. 두 사람 다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탁 비서는 검은 타이를 하고 있었고, 세헌은 아직 노타이였다.
“대표님, 차 대기하고 있습니다. 방금 회의록 전달받았고, 내부 공유용으로 비서실 기획팀이 정리 중입니다.”
“파트너들 준비시켰어?”
“예, 인원을 송 대표님 쪽이랑 반반 나눌까 싶은데요.”
“아니. 전부 나 따라와. 송 변은 혼자 갈 거야. 진정성은 조용히 혼자 가야 있어 보여. 아침부터 시끄럽게 만들어서 이거로 면피하려는 거 아니냐는 원망은 내가 듣고, 송 변은 유족을 위로한 다음 충분한 지원과 섭섭지 않은 배상을 하겠다고 해야 돼.”
“엄부자모, 뭐 그런 작전인 건가요? 그럼 언론은…….”
“어차피 종일 진 치고 있을 거야. 송 변 갈 때 세팅 꼼꼼하게. 아까 인터뷰하면서 표정 관리를 못 했다니까 이거 제대로 수습해야 해. 방문했을 때 슬픔에 젖은 사진으로 싹 다 덮어. 아. 차 국산 중형 세단으로 바꿔 태워 보내. 꼭.”
“그래도 국내 최대 로펌 대표님이신데 본인 차 타고 가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품위라는 게.”
걷다가 멈춰 선 그 때문에 뒤에서 탁 비서도 덩달아 멈춰 섰다. 아울러 그가 집무실로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근처의 임직원들 모두 일시 정지 상태에 돌입했다.
“탁, 너 송 변이 늘 타고 온 차 얼만 줄 알아?”
“글쎄요? 송 대표님 비서실에서 관리한 건이라……. 많이 비싼 건 압니다. 강 대표님이 선물하셨죠? 지난번 인수 건 도와주신 대가로요.”
“역시 모르는군. 기어이 장례식장에 몰고 가게 한 다음 기사로 확인하면 알 수 있게 되겠네. 다들 번쩍번쩍한 신차 값에 대해서 떠들 거야. 그 차는 국내에 몇 대가 들어왔는지, 그걸 누가 선물했는지, 내가 증여세를 얼마나 냈는지도.”
“……예비용 국산 세단이 있을 겁니다. 출발은 언제쯤 할까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그제야 사무실로 들어선 세헌이 무심코 창문 너머를 내다봤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청소를 한 건지 아까 내렸던 블라인드가 다시 걷힌 채였다. 필연적으로 건너편 방에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미희의 강권에도 방을 기어이 바꾸거나 재단장하지 않은 건 사실 이 풍경이 좋아서였다. 가구 배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통화 중인 윤신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가, 또 서류를 마구 뒤적거렸다가 하면서 뭐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됐다. 저런 행위를 할 때 윤신의 눈은 가장 반짝거렸다. 그 분주한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그가 다시 블라인드를 내려 버리곤 탁 비서에게 넌지시 물었다.
“쟤 얼마나 일찍 나왔지?”
“출근하신 지 40분쯤 됐습니다.”
결국 잠을 설친 모양이다. 내심 그러지 않을까 짐작하긴 했다. 그래도 잘 잠들어 좋은 꿈을 꾸길 바랐건만. 종종 도윤신은 예상대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예측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내 발등을 내가 찍었지. 출발은 30분 뒤. 도윤신 저 통화 끝나면 내 방으로 좀 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딸칵.
인사하고 돌아선 탁 비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세헌은 뚜벅뚜벅 집무실 한편의 기다란 옷장을 향해 걸었다. 이 사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다수가 사무실 옷장 한편에 대소사 전용 슈트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안에서 암흑처럼 그저 어둡기만 한 검은색 넥타이를 꺼내 온 그는 책상에 그걸 올려놓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얼마쯤 흘렀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직이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윤신이 반쯤 벌어진 문틈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타이밍 적절하게도 통화가 금세 끝난 모양이다.
“대표님, 저 찾으셨다고요.”
“출근하셨네요, 도윤신 변호사님. 병원에서 오시는 길인가 봐요?”
싱긋 웃은 세헌이 그렇게 되묻자 윤신은 어색한 미소를 내비쳤다. 말도 아주 조금, 더듬었다.
“어…… 어제 허락하셨…… 하셔서…….”
“말은 왜 더듬어. 찔려?”
“변호사님의 빈정거리는 존댓말은 상당히 타격이…….”
“다음 주에 하랬지. 이번 주와 다음 주가 혼동되는 거 같은데 이건 단어 공부를 다시 시켜야 돼, 시제 공부를 다시 시켜야 돼?”
“……걱정돼서요.”
“그래, 내가 널 너무 간과했다. 들어와.”
정상적인 반응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손가락을 오만하게 까딱, 한 세헌이 시선을 돌렸다. 얼른 문을 닫고 들어온 윤신이 책상 위에 걸치듯이 놓인 넥타이를 발견하곤 눈치껏 그걸 집어 들었다. 그들 사이에 별 대화는 없었다. 둘 모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없이 조용히 몸만을 움직였다.
윤신이 세헌의 의자와 책상 사이에 쑥 끼어들더니 그를 책상에 걸터앉게 했다. 얌전히 따라 준 세헌 덕분에 둘의 시야 높낮이가 뒤바뀌었다. 한결 편해진 자세로 그의 목에 타이를 매어 주는 윤신의 손길은 다감했다. 열심히 두 팔을 움직여 가면서 질 좋은 천의 매듭을 짓는 눈매는 엄숙했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펌 분위기가 좀 뒤숭숭해요. 왜 말 안 해 주고 갔는지 오자마자 알았어요.”
“어차피 들을 얘기니까, 오늘 밤은 잠을 좀 제대로 자라고. 그런데 못 잔 거 같네.”
“특별한 일도 아니에요. 요즘 계속 별로 못 자요. 옆에 선배 없어서…….”
“도윤신,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뭔데요?”
“나 요즘 자다 깨서 괜히 침대 옆자리를 한 번씩 만져 봐.”
진중한 눈길이 윤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탐색했다. 덕분에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순도 높은 진심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절로 느껴졌다.
‘나도’라는 그 단순한 말을 이런 식으로 로맨틱하게 해 올 줄이야.
기분이 들뜬 윤신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애정 표현을 늘 갈구하고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종종 그가 진짜로 이렇게 나오면 어찌할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다. 놀란 기색을 감추는 대신 애꿎은 그의 넥타이를 제 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수줍은 미소는 덤이었다. 웃음은 꽃씨처럼 번져 세헌의 입가에도 다정한 열매를 맺었다.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려 마주 웃어 준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선 윤신의 입술에 뽀뽀했다.
떨어져 나가는 살결을 아쉬워하던 윤신이 이번엔 제 쪽에서 고개를 조금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타이 매듭을 마무리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희도 팀별로 조문 가려는 모양이에요. 못 가는 분들은 부의금 모으고, 갈 사람이 전달하기로 정책 통일했대요. 좀 전에 회의록에서 읽었어요.”
“못 가는 건 분이고 갈 건 사람인 거 보니 귀하는 가실 건가 보지?”
“이상해요? 실은 고인하고 일면식이 없긴 하거든요.”
펌이 워낙 규모가 큰 데다 업무도 체계화돼 있어서 팀이 다르고, 또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있지 않은 한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네 오지랖을 누가 말려. 하고 싶은 대로 해.”
기뻐하는 얼굴이 완연해진 윤신이 애써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아 내곤 물었다.
“선밴 오전 중에 조문 가시죠? 다른 파트너분들이랑 가는 거예요?”
“응, 그럴까 해. 대표가 여러 사람 데리고 떼거리로 찾아가야 예의를 표하는 건 줄 아니까.”
“그럼 이따가는 기회가 없겠네요.”
“무슨?”
“아까 그냥 보내서 마음에 걸렸거든요.”
상대에게 전하고는 있으나 어쩐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그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윤신이 직접 주머니 속의 해답을 손바닥 위에 꺼냈다. 직사각형 반창고가 투명한 포장지에 감싸여 있었다. 푸른색 배경에 그려진 무늬는 고양이 일러스트로 추정됐다.
세헌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한쪽 팔을 내밀었다. 윤신은 바로 그거라고 답하는 것처럼 얼른 그의 손을 끌어다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허공에 고정했다. 밴드의 포장을 까서 지난밤 그가 제게 차마 상처 낼 수 없어 직접 만들었던 손목의 치흔에 그걸 얌전히 붙였다.
톡톡. 치료가 다 끝났다는 걸 암시하기 위해 그 위를 가볍게 두드리자 세헌이 밴드의 무늬를 가까이에서 확인하며 기가 차 했다.
“너 나 몰래 어디 소아과 다녀? 꼭 이런 그로테스크한 무늬를…….”
“뭐 떠오르는 거라도 있으신가 봐요?”
“뭐. 예를 들면 너 선 봤던 날?”
그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이 치미는 기색이었다. 금세 찌푸려진 세헌의 미간을 손끝으로 펴 주던 윤신은 정답이긴 하지만 완벽한 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우리가 언제 첫 키스를 했는지 제가 정확히 주지해 드린 날이겠죠.”
“첫 키스는 거기 아니야? 사택 아케이드.”
“또 그런다. 회식장이죠.”
“내 기억하고 다른데. 그땐 안 닿았다니까.”
터억!
손바닥으로 세헌의 복부를 치려던 윤신은 자신이 아직 허리의 부상이 깨끗하게 다 낫지는 않은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실었던 힘을 풀었다. 그 바람에 전신이 휘청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세헌이 등을 끌어안아 주지 않았더라면 비틀거리다 책상 어디쯤에 몸이 부딪혔을 터다. 그의 어깨 위에 어설프게 몸을 기대게 된 윤신이 천천히 상박을 젖혀 세헌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 봤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강 대표님 오늘 많이 바쁘시겠다.”
“응, 오늘은 너 껴안고 자야겠다. 이따 A동에서 봐.”
“아, 맞네. 이제 우리 피차 독수공방 안 해도 되는 거죠? 저 정식 퇴원 수속 밟았으니까 안 된다고는 하지 마요. 누나한테도 이미 전달했고, 병실에서 짐도 다 뺐어요.”
“그래, 집에서 보자니까.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사택…….”
“응? 사택?”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언제나, 어느 때나 윤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계속해 보라는 양 눈을 깜빡이는 말끔한 얼굴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세헌은 제대로 말을 전해 둘까 하다가, 지금은 이런 사적인 걸 말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어쩌면 좀 더 솔직하게 기뻐하는 윤신을 제대로, 또 오래도록 보고 싶은 욕심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냐. 타이밍이 별로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하자.”
“뭔데 말을 하다 말아요? 궁금해요.”
“우리 첫 키스가 사택 아케이드였다는 거 인정하면 알려 주지.”
“…….”
차마 그러기는 싫은 윤신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앙다물었다. 다시 얘기하자는 건 언젠간 알려 주겠다는 뜻일 텐데, 기왕 그럴 거 지금 하면 어디 덧나나 싶었다. 소소한 복수로 그의 넥타이를 힘주어 졸라 매 주곤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 과정에서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도록 세헌이 직접 도와주었다. 윤신은 그가 정숙하게 갖춰 입은 검은색 슈트를 스윽,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서 서운함을 토로했다.
“문상용 옷차림까지 이렇게 멋있으면 안 되는데. 어디 내놓을 때마다 긴장돼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별 대꾸가 없었다. 침묵이 꽤 길어졌다. 둘 사이에 가끔 이런 순간은 오곤 하지만 오늘은 어딘지 공기가 달랐다. 아쉬운 대로 윤신이 덧붙였다.
“선배 방금 무슨 생각 했어요?”
“아무 생각 안 해.”
“그런 거도 할 줄 아세요?”
“할 줄 알아. 그냥. 너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도윤신.”
당혹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는 기미가 윤신의 동공에 잠시간 스쳤다.
사실 조금 전 세헌은 어떻게 윤신에게 같이 살자는 얘기를 꺼내야 하나 그 방법론에 대해 짧게,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떤 시점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말로 전해야 도윤신이 가장 기뻐할까.
사소한 것들이 인생을 잠식해 가는 이 상황이 왜, 기쁠까.
그런 사념들을 얼기설기 서로 엮던 그는 불현듯 자신의 삶이 오직 윤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인정한 순간. 뜨끈뜨끈해진 세헌의 시선이 윤신의 이목구비 구석구석을 훑듯이 지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긴 목선과 도드라진 울대뼈, 셔츠 깃 안쪽에 감추어진 여린 살결까지 차분히 그림 그리는 것처럼 눈으로 훔쳤다.
“……선배?”
당황한 윤신이 어깨를 움찔했다.
서로 살갗이 직접 닿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거리를 둔 이 상태가 더 흥분됐다. 당장 공들여서 그의 혀끝을 제 안으로 초대해 잔뜩 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냐하면 강세헌이 눈으로 자신을 꼬시고 있었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동료가 죽었다는데,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게다가 조문을 가기도 전에 여기서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밤부터 새벽까지 바쁘게 움직여 놓고도 오늘 하루 또 종일 시달릴 그를 위해서였다. 서둘러 한 걸음 물러선 윤신은 최대한 그의 앞에서 걸을 때 몸에 별 부담이 없는 걸 어필하듯 뚜벅뚜벅 뒷걸음질 쳤다.
“여기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잘 다녀와요. 이따 봐요!”
“이거 남들 눈에 띄어서 내 권위에 타격 오면 네 책임이야.”
손목에 붙인 밴드를 가리킨 세헌이 눈짓했다. 윤신은 제가 기꺼이 다 책임지겠다는 대답을 손 인사로 대신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딸칵.
손잡이를 잡은 상태 그대로 잠시 숨을 내쉬는 윤신의 얼굴이 굳었다. 힐끗 고개만 틀어 그의 방 문패를 바라보는 안색이 썩 좋다고는 못 했다. 대표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솔직히 제대로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데 요즘의 세헌을 보면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의 수면 시간은 줄었고, 업무의 부담은 커졌고, 펌에서의 책임은 과중해졌다. 무엇보다 방금 전의 세헌은 자신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러 가기 전에 제 존재를 구했다. 저 남자는 워낙 강하고 자존심도 드높은 사람이라 그런 말은 절대 직접 꺼내지 않지만 여실히 느껴졌다. 혼자서 의연하게 버텨 왔던 그는 삶의 무거운 무게를 버티는 데 제가 필요해졌다.
무척이나 기쁜 일인데 그런 한편으론 복잡한 심경이 일었다. 넥타이를 매 주고,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고, 약간의 웃음을 되찾게 해 주는 것 외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의 SOS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니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도움이 될 일이 분명 있을 텐데…….’
심각하게 고민하던 윤신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제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복도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여름을 닮은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깥을 내다보니 사옥 정문 앞에 취재진들이 들어가겠다고 원성 중인 게 보였다. 아마 죽은 변호사가 남긴 유서 때문에 도국이 ‘착취하는 로펌’처럼 보이는 모양인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기사들의 논조에는 질타가 꽤 있었다.
복수는 냉정하게 해야 제격이라는 말이 있다. 윤신은 종종 그 말에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를 생각하곤 했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실감하는 건 그 정의가 대체로는 맞는다는 거였다. 죽기 전의 망자가 얼마나 냉정했는지, 걷잡을 수 없이 인터넷상에 퍼져 나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유언을 보며 그 진실을 새삼 느꼈다. 도국이 망하길 바라는 그 원망 섞인 마음도 말이다.
물론 저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터다. 한 김 열이 빠지면 물이 식고 얼음이 녹듯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도국은 한 사람이 죽음을 통해 무너뜨리기엔 너무 강력한 이익 집단이었다. 다만 그러는 사이 양쪽 모두 다치는 건 어찌 보면 숙명이었다.
심란하고 울울한 기분을 억누른 윤신이 이제야말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복도 멀리에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저를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도 변! 마침 잘 만났다.”
“팀장님?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전화로 하시거나 저를 부르시지.”
“만나서 해야 할 얘기라서. 내가 마음이 급해 가지고. 잠깐 괜찮지?”
했던 말의 진의를 증명하듯 가사 팀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켜보는 눈이 있진 않은지 점검차 훑는 모습이었다. 팀장이 팀원을 만나는 건 손톱만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위의 눈치를 살피는 양태에서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윤신이 들어가서 말씀하시겠냐는 듯 사무실을 향해 손짓했다.
“자리를 옮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 옮길 건데. 자네 사무실 말고, 위층으로.”
“위층요?”
“선배님들이 좀 보자시네.”
“……저를요? 왜요?”
“내가 먼저 말하긴 좀 그렇고, 나도 조용히 데려오라고 부탁받은 거거든. 가서 직접 들어 봐. 자, 가자.”
고개를 갸웃한 윤신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저마다의 업무들로 분주한 사무실들이 보였다. 본래의 직무 외에 여러 가지 대외적인 일들까지 신경 써야 하기에 당분간 모두에게 꽤 고단한 나날이 될 것이다.
제일 끝에 위치한 세헌의 방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윤신은 얼른 가자는 듯 조바심을 내는 가사 팀장을 따라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