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던 탁 비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옆으로 돌아갔다. 뒷좌석에서 태블릿 PC 화면을 확인 중인 세헌을 룸미러로 쳐다보기 위해서였다.
상관과 중요한 얘기를 나눌 게 있어서 일부러 출근길 기사를 자원했는데, 막상 세헌이 이른 아침부터 무척 날카로워져 있어서 대화의 타이밍을 잡기가 요원했다. 외견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게 분명했다.
계속 기회만 엿보던 탁 비서는 뒤의 그가 짧은 탄성을 내뱉는 걸 감지하자마자 운을 뗐다.
“저도 좀 놀랐습니다.”
거울 속 세헌은 액면 그대로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는 탁 비서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곧고 단단한 손끝으로 태블릿 PC의 화면을 툭, 툭, 건드렸다. 그 접촉에도 감정이 묻어났다.
이 화면 속 소송에 관한 각종 정보들이 그의 눈에 확실히 익었다. 윤신이 맡았던 케이스인 걸로 기억했다. 해당 소송은 절차가 완전히 끝난 게 이미 반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도윤신이 지금 겨우 40억짜리 이혼 송사 때문에 보복당했다 이거 아니야. 4,000억도 아니고, 하다못해 400억도 아니고, 고작 40억. 이 COP그룹 원 회장 새끼 짓이고?”
COP는 중견 기업에 해당하는 식품 전문 업체로, 식품·원료·서비스를 아우르는 종합 식품 기업이었다.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글로벌 그룹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내수에서는 꽤 점유율이 높은 유명 업체이기도 했다.
윤신은 약 1년 전 이 원 회장 와이프의 의뢰를 받아 부부의 이혼 소송을 수임했다. 혼인 기간은 짧고 아내 쪽의 기여도도 적었으나 예상보다 많은 액수를 원고의 손에 쥐여 주는 바람에 윤신이 꽤 뿌듯해했던 기억이 세헌에게도 남아 있었다.
“그런 거로, 추정된다…… 그런 의미죠. 일단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쭉 가르쳐 줘. 내 비서한테 헌법 배우는 거 기분 나쁘고 좋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원 회장이 어어엄청 짠돌이래요. 입만 열면 돈돈돈, 한다고.”
“부인이 만 원 한 장 쓰는 것에도 파르르했다던 얘길 도윤신한테 들은 기억이 나. 그런 사람에게 40억은 아까운 돈이긴 하겠지.”
“네. 그쪽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얘기를 피고 측 펌 비서실 통해서 은밀히 입수했습니다. 게다가 보신 대로 SUV 운전자가 개통한 대포폰에 사고 직전 수상한 통화 내역이 남아 있고, 그 상대방이 그쪽 비서실 관계자라는 것 같아요. 아직 경찰은 확인 못 한 정보입니다.”
예민해진 세헌이 손바닥만 한 태블릿을 움켜쥐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것으로 치미는 분노를 차분히 억누른 그는 무섭도록 침착하게 평정을 되찾더니,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뭐 낌새 같은 거 없었어? 너 도윤신 일 같이 봐주고 있잖아.”
“아뇨, 딱히 특별한 건. 그쪽에서 블러핑 거칠게 걸긴 했는데, 도 변호사님이 신사답게 잘 대처하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실수한 것도 제가 아는 한 없고요.”
“그럼 정말 돈 때문이란 얘기네.”
상대의 의도를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충 큰 그림을 그렸을 때 나타나는 윤곽은 있었다. 당시 바로 행동을 취한 게 아니라 이제 와서 이런 행위를 가했다는 걸로 비추어 보복이라기보다는 화풀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할 터다. 어쩌면 이혼한 아내에게 느낀 분노의 활시위를 이쪽을 겨냥해 당겼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이유가 뭐였든 세헌은 이미 판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화면의 페이지를 뒤로 넘긴 그는 남자의 프로필을 꼼꼼하게 눈에 담으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쪽이 가해자라는 거 도윤신도 바로 감은 못 잡을 거 같은데, 본인이 알아낸다면 모를까, 묻기 전에 떠벌리진 마.”
“경찰 조사 들어갔는데 결국 알게 되시지 않을까요?”
“도로 한복판에서 사고 치게 했어. COP는 경찰을 매수할 생각일 거야. 몸통은 안 드러날 확률이 높아.”
“아…… 그것도 그렇겠군요. 예, 알겠습니다. 증거는 그 정도면 될까요?”
원 회장이 가해자라는 더 확실한 증거라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때론 정황들이 설명해 주는 상황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에게 진짜 필요한 정보들은 탁 비서의 선에서 찾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네 역할은 이 정도면 됐어. 여기서부턴 사람 쓸 거니까 입이나 잘 다물고 있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괜찮으시다면 저도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진짜 이건 아니죠.”
“어떻게 하긴. 받은 만큼 갚아 줘야지.”
유독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마치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란 얘기처럼 들렸다.
쿨럭, 난감해진 탁 비서가 저도 모르게 기침하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핸들에 바짝 상체를 기댔다가 떼어 낸 그는 다시 한번 룸미러 속의 남자를 살폈다. 어느새 세헌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류를 펼쳐 읽고 있었다.
몇 초쯤 지났을까. 시선에 민감한 그는 관찰하는 비서의 눈길을 눈치챈 듯했다.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관심하게 쓱, 손짓하는 그 때문에 놀란 탁 비서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그러자 세헌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사인 주면 국세청장하고 약속을 잡아. 조사국 김 과장 동석하라고 해. 은밀하게.”
“역공은 역시 세법으로 시작하시는군요. 저쪽이 제일 사랑하는 건 돈이니까.”
탁 비서의 말대로였다. 세헌이 이 게임 판에서 놓을 첫수는 세법이었다. 자주 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관심은 갖고 있어서 아주 강한 분야이기도 했다.
장사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세무 조사였다. 한번 국세청의 눈에 띄면 사업을 확장하거나 큰돈을 굴릴 때 번번이 위축돼서 웬만하면 레이더망에 걸리는 걸 피하고자 했다. 그는 그 점을 적절하게 이용할 작정이었다. 원 회장이 돈이라면 죽고 못 산다고 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심플하게 해답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타격이 클 터다.
가끔 너무 멍청해서 저지르고 난 뒤에 진리를 깨닫는 부류들이 있다. 보통은 이런 인간들을 직접 상대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이 경우는 예외였다.
“돈 좋아하는 인간들이 세금 제대로 내는 꼴 단 한 번도 못 봤어. 세법으로 시작해서 형법으로 끝낼 거야.”
“그분 정말 잘못 걸렸네요……. 한번 물면 안 놓아주시는 분인데. 애도는 안 하렵니다.”
“아, 그리고 김 과장 그 자리에 동석하는 건 반드시 함구해. 도국 사람인데 아직 오픈이 안 됐어. 너랑 나만 아는 얘기야. 더불어 앞으로 내가 원 회장한테 할 짓들도 전부.”
“도 변호사님께도요?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말씀 안 드려도 될까요? 섭섭해하실 텐데.”
“도윤신은 내 허락받고 비밀 만들었어?”
“예? 다치신 거 말씀 안 한 게 비밀…… 이라기엔…… 오히려 바쁘신 대표님을 배려하신…….”
“운전이나 똑바로 해.”
알겠다고 답한 탁 비서가 입을 꾹 다물고 주행에 집중했다. 이른 시간이라 어느 정도 뚫려 있는 도로에 점점 차량이 많아지고 있었다. 세헌은 사위가 조용한 틈을 타 서류를 좀 더 검토하다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에게나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은 있다.
분명 그게 자존심이었을 때도 있었다. 그는 그걸 건드린 사람을 절대로 봐주지 않았다. 다만, 그게 다쳤을 때 어떤 기분으로 방어했었는지 과거에 확실히 발생했던 일인데도 떠올려 보려 하니 어려웠다. 다른 사소한 모든 것들은 잘만 기억하면서 그것만 흐렸다.
그 모순의 이유를 찾아보던 세헌은 보다 강렬한 기억이 과거의 기억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목숨처럼 여겼던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게 생겼다는 말로 바꿔도 얼추 설명은 될 터다.
이번 일로 그는 정말 많이 화가 났다.
남자가 40억 아까워서 벌인 짓 때문에, 가진 모든 걸 잃게 해 줄 작정이었다.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닦듯이 문지른 그는 문득 하루의 초입부터 한 날이 너무 길다고 느꼈다. 당장 달려가서 누군가에게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이성으로 억누르는 건 늘 힘든 일이었다.
느리게 호흡한 그는 다시 서류를 들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일반 병동 휴게실이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똑같은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여러 명 모여 서서 가운데 테이블에 앉은 윤신을 둘러싼 형국이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여자를 또렷한 시선으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음, 주신 자료들은 최대한 꼼꼼히 훑어봤거든요.”
사고 이후 꽤 오래 입원해 있었더니 일상생활은 큰 무리 없이 가능할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그사이 계절도 한 번 바뀌었다.
시간이 허락해 주어서 오히려 다리나 허리는 거의 나았는데, 손가락뼈의 골절이 윤신을 괴롭혔다. 하나 그 정도로 출퇴근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건 세헌뿐이었다.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들의 소견마저 무시하고 계속 손가락 깁스를 갈아 대게 만드는 그 때문에 자신은 강제로 입원 생활을 연장하는 중이었다. 호텔 객실 수준의 시설을 자랑하는 VVIP 병동 특별실의 하루치 입원비가 대체 얼마인 건지,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모르고 싶을 정도였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는 의뢰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맡고 있던 사건들을 적당히 팀에 재분배했으나, 이제는 정말로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해서 웬만한 서류들은 이미 병실에서 살피고 있었다. 다만 그거로는 조금 모자란 느낌이었다. 슬슬 안정적인 업무 공간인 제 일터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 언제쯤 그가 허락해 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일반 병동에 와 환자들에게 법적 자문을 해 주는 취미를 만들었다.
처음엔 분명 제게 맞는 옷이 아니었던 듯했던 도국이 이렇게 간절해지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솔직히 꿈에서도 예상 못 했다.
“물론 식재료에 하자가 있었다고 하면 행정 조치는 기본이고 형사상 소송도 가능하긴 해요. 그런데…… 사실 이건 기간도 오래 걸리고, 식품위생법 관련은 피해 액수가 원체 소액이다 보니 소송보단 정부 중재 제도를 활용하시는 게 더 낫긴 하거든요.”
정면의 여자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체한 경험이 있는 환자였다. 윤신은 프로 보노라고 생각하며 엄숙하게 답변했다. 이어 말하는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모양으로 여닫혔다.
“다만 제가 반드시 이렇게 해라, 말씀드리긴 그렇고 일단은 같이 피해를 입으신 분들끼리 모여서 논의를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집단으로 움직이면 좀 더 힘이 생기는 건 사실이에요.”
“법 위반이 맞긴 하다는 거죠?”
“예, 피해와 책임을 세세하게 따지면 업무상 과실 치상까지도 끌어낼 수 있어요.”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를 향해 편안하게 미소 지어 준 윤신이 문득 그녀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고개가 움직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눈도 한꺼번에 동일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모니터가 걸려 있었다. 마침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는 참이었다. 주변 소음들 탓에 소리는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자막을 읽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상황과 논조 유추는 가능했다.
화면 속에는 어떤 남자가 취재진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유명한 식품 전문 업체인 COP의 창업주 2세이자 현 총괄회장이기도 했다.
‘저 사람…….’
또한 수개월 전 소송이 마무리된 제 의뢰인의 남편이었다.
최근 원 회장의 회사에 여러모로 악재가 쏟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사생활과 관련된 오너 리스크는 물론이고 COP에서 제조, 유통, 판매하는 식재료와 식품들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들까지 줄줄이 밝혀졌다. 아울러 공정위가 허위 광고, 계열사 신고 누락 등의 몇 가지 사유로 경고를 주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납득이 갔다.
이상한 건 국세청의 움직임이었다. COP를 대상으로 특별 세무 조사를 실시한다는 모양이었다. 세금을 탈루해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저대로라면 못해도 수백억대의 추징금이 예상됐다. 판세를 보니 확실한 증거를 쥔 듯했다.
보통 저 정도 규모의 중견 기업 혹은 대기업들은 세무 조사를 받을 때 예고 없이 당하지 않는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고, 세금을 정당하게 내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영상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특별 조사 또한 사전에 미리 경고하고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COP의 경우 기습 공격을 당해 우왕좌왕하는 게 명명백백히 국민의 눈에 드러났다.
전부 다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정당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말을 보태기가 뭐하면서도, 윤신은 어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일의 타이밍과 강도, 그리고 방식 때문이다.
시시각각으로 COP의 브랜드 가치가 완전히 후려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강세헌이 M&A를 주도할 때처럼 말이다.
‘원 회장 내일 자살해도 아무도 안 놀랄 거 같네.’
그 정도로 사방에서 그에게 철퇴를 때려 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존재가 원 회장이 손에 쥔 걸 다 잃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차근차근,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포석을 쌓아 가는 걸 보니 지켜보고만 있는데도 무서울 정도였다. 이대로 상황이 악화 일로를 걷는다면 저 남자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제 피습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결과였다.
경찰은 몇 주 전,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던 처음 말과 달리 SUV 운전자의 단독 행동으로 보이며 곧 입건 예정이라는 얘기를 전했다. 그때 세헌이 집요한 성정의 그답지 않게 ‘사건이 잘 해결됐으니 너는 이제 그 일을 잊어버리기만 하면 되겠다.’라고 스치듯 말했던 게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땐 안 좋은 기억이니 차라리 지워 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몹시 수상쩍었다.
법에는 법원이 선고하는 형량이라는 게 있다. 사회적으로 약속해 두고 다 함께 지키는 죄에 대한 적정값이 있다는 뜻이다. 저 화면 속 결과가 제 사고에 대한 세헌의 양형이라면 쉽게 납득된다. 그는 자비가 없으니까.
“저긴 뭔 돈을 그렇게 해 처먹었대. 다 망하게 생겼구만. COP는 다른 데서 인수하려나?”
“이혼한 지도 얼마 안 됐다는데 굿을 하든지 해야…….”
“굿은 뭔 굿. 음식 갖고 장난질하면 쓰나. 천벌 받는 거지. 얼굴 봐라. 심술보가 그득하잖아.”
주변에서 두런두런 원 회장에 관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화면에 정확히 고정된 채였다.
뉴스는 원 회장의 악재가 당분간은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마무리 멘트로 기사를 마쳤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이혼 소송과 관련한 자료 화면들이 마지막으로 뜨는 바람에 휴게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윤신에게 도로 쏠리고 말았다. 영상 속 원 회장의 아내와 함께 법원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변호사의 모습 때문인 듯했다.
“네…… 맞아요. 저예요…….”
어색하게 미소 지은 윤신이 앞에 놓인 간식들을 뒤적이며 최대한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려 보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특히 제 뺨에 유독 강렬한 시선이 와 닿았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2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여자 환자가 자세히 이목구비를 뜯어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눈으로 턱을 괴고 제게 집중하고 있었다.
서서히 몸마저 앞으로 기울이려는 듯해 슬며시 뒤로 등을 젖힌 윤신이 대놓고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변호사님 실물이 훨씬 멋있어요.”
“어, 화면으론 별로예요?”
“아뇨! 화면도 너무 좋아요. 이렇게 보니까 누나랑 많이 닮으셨네요. 어디서 봤나 했어요.”
“제가 혈육 덕을 좀 보긴 하죠. 누나가 워낙 미인이라.”
“도이경 관장님, 그 변호사하고 사귀는 거 맞아요? 도국에 그 엄청 잘생긴 변호사.”
멈칫한 윤신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하도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재미있지 않은 모든 얘기에 노련하게 잘 웃는 편인데 지금 이 말만큼은 웃기가 힘들었다.
“아…… 누나 사생활은 제가 함부로 말할 게 아닌 거 같아서…….”
그가 가까스로 친절한 미소와 선을 넘지 않는 적당한 대꾸로 이 대화를 매조지려던 찰나였다.
탁! 탁! 탁!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누군가 휴게실 출입문을 거칠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삼오오 몸을 기울이고 여러 화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소음의 진원지로 눈길을 돌렸다. 윤신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사뭇 날카로운 표정을 한 세헌이 서 있었다. 저기서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을 강타한 게 아닐까 싶었다.
“어?”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난 윤신이 반색해 바로 손을 흔들었다. 옆의 여자도 예의 ‘엄청 잘생긴 변호사’를 보곤 조금 놀란 눈치로 숨을 삼켰다. 루머가 진짜라는 걸 확인한 표정을 짓더니 곧 ‘비밀 잘 지킬게요.’라고 말하듯 눈을 빛내는 걸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누나 아니고 나하고 자는데.’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윤신이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였다.
콰앙!
이번엔 주먹 쥔 손으로 문을 거세게 내려친 세헌 때문에 사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무표정에도 감정은 깃들어 있다. 그는 원래도 선명하게 웃는 낯을 하는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수틀린 표정을 내내 짓지는 않았다. 패착을 금세 깨달은 윤신이 변명하기도 전이었다. 세헌이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딱, 해서 따라오라는 뜻의 수신호를 보내더니 냉정하게 돌아서 버렸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늘씬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신은 곧바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럼, 오늘 법률 상담은 여기까지 할게요. 전 손님이 오셔서요.”
아쉬워하는 모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윤신은 최대한 속력을 내서 세헌을 따라갔다.
바로 떠나 버릴 것처럼 나가 놓고. 아직 제 다리가 완벽하게 성치 않은 상태라는 걸 의식한 듯 눈에 띄게 느리게 걷고 있는 세헌이 바로 보였다. 덕분에 그를 금세 따라잡은 윤신이 숨을 고르면서 팔꿈치로 팔뚝을 쿡 찔러 알은체했다.
“언제 왔어요? 한 시간은 더 걸릴 거 같다더니.”
“이 시간에 일반 병동까지 와서 심야 프로 보노 활동이라도 하나 보지?”
“VVIP 병동은 입원한 사람도 너무 적고 늦은 시간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못 하게 해서……. 당분간 여기 와서 재능 기부 계속하려고요. 저 요즘 엄청 심심하고 한가하거든요.”
“속 보이니까 떠보지 마. 그래도 출근은 안 돼.”
물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민망해하며 제 손가락에 달고 있는 깁스를 슬쩍 쳐다본 윤신은 세헌에게 더 바짝 붙어 힐끗 그를 곁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딱히 다가오는 자신을 밀어내지도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해 주고 있지만 심기는 아직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지금은 아까 일을 해명할 타이밍이다. 으슥하고 은밀한 곳에 단둘이 있게 되기 전에 말이다.
“방금 휴게실에서의 일 말인데. 전 아주 떳떳해요.”
“아주 떳떳하게 쪼개고 있던데.”
“누나 얘기가 나와서 그런 거예요.”
“글쎄, 그건 더 열받는데. 딴 여자 떠올리면서 웃은 거잖아. 그건 바람이 아닌 거 같아?”
“당연히……!”
아닌 거 같다.
아니, 아닌 거 같은 게 아니라 그건 바람이 아니다.
그렇게 해명할까 짧게 고민해 본 윤신은 그냥 설득을 포기했다. 이 남자가 논리 없이 막무가내일 때 말로 납득시키려 들면 어느 틈에 자신이 말려 있기가 부지기수였다. 차라리 말을 아끼는 쪽이 그나마 승률은 높았다.
그건 그거고. 그를 보자 맨살에 닿고 싶어졌다. 욕망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윤신은 괜히 세헌의 딴딴한 근육 질감이 느껴지는 옷자락에 환자복 차림인 제 상체를 슬쩍 기댔다 떼어 냈다. 몇 번 그러면서 나란히 걷는 사이, 두 사람은 동끼리 이어 주는 구름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 마침내 VVIP 병동에 입성했다. 그곳은 다른 데와 달리 쾌적한 공기와 설명하기 어려운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 보는 눈이 훨씬 적었고, 엄숙한 분위기도 풍겼다.
자연히 두 사람의 말수가 적어졌다. 얼마쯤 걸었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세헌이 계속 궁금했다는 양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상담해 주고 있는 거 같던데. 혹시 벌써 명함 준 건 아니지?”
주어가 없어서 헷갈렸던 윤신이 반문으로 응수했다.
“누구 말하는 거예요?”
그 순간.
계속 보폭을 맞춰 걸어 주던 그가 윤신의 앞을 우뚝 막아섰다.
이곳은 개인 병실로 올라가는 비상계단 앞이었다. 세헌은 퍽 음험해진 어조와 냉담한 표정으로 방금 전 들은 말을 복사하듯이 똑같이 따라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보였다.
“누구, 말하는, 거예요?”
“아니, 그…….”
“여러 사람한테 줬어?”
“아뇨! 한 분…….”
“주긴 줬단 얘기네?”
“그게 그렇게 되는……?”
“내가 안 물어봤으면 난 영원히 몰랐겠다. 네가 입 꾹 다물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움찔한 윤신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세헌은 침묵이 의미하는 긍정의 뉘앙스를 바로 읽어 내곤 거친 언사를 퍼부었다.
“도윤신. 사고 나서 죽을 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한테나 연락처를 줘. 너 지금 출근 못 하게 했다고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아니면 신나게 재능 기부하는 거 방해했다고 날 긁는 거야? 내가 행간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아…… 드리면 안 되는 걸까요?”
“되는데 내가 입 아프게 물어볼까요? 누구.”
“저기, 선배.”
“대답부터 해. 누구.”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 사고가 난 이후로 세헌이 제 신변을 어딘가에 공개하는 일에 극도로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던 바였다. 자잘한 핑계를 대 가며 계속 출근을 막고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단지, 출근이나 퇴원을 방해하는 그에게 항의하기 위해 일부러 명함을 준 건 아니었다. 그가 괜찮다고 말해 줄 거라 생각했다.
상대는 요사이 몇 번 일반 병동 휴게실에서 맞닥뜨린 적 있는 산재 사고 피해자였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을 자신이 다 해결해 주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동법 전공자로서 산재 사건은 그냥 넘기기가 불편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애꿎은 제 손가락 깁스를 반대편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산재였어요. 현장에서 추락사고 난 아저씨가 계세요. 그분한테 드렸어요. 50대 정도 되시고…… 아까 그 자리엔 안 계셨어요.”
“산재? 아까 너 끈적하게 쳐다본 그 여자가 아니라?”
윤신은 발끈했다.
“당연히 아니죠!”
아울러 그 사람은 저보다 제 주변의 소문에 더 관심이 컸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으나, 괜히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까 봐 그 말은 아껴 두었다.
해명을 듣곤 머리끝까지 예민해져 있던 세헌의 반응도 미미하게 누그러졌다. 이 타이밍을 놓칠 순 없는 일이었다. 윤신이 얼른 덧붙였다.
“다시 돌려달라고 할까요? 다른 분한테 가시라고…….”
“진심이야?”
“당연하죠. 저는 선배 기분이 제일 중요해요. 선배가 싫어하면 안 해요.”
사방을 둘러보아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윤신은 최후의 공격이자 수비를 한 번에 가하듯이 그에게로 몸을 기울이면서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세헌의 서늘한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이게 잔머리만 늘어 가지고……. 그래도 신원 확인은 해야 돼. 탁 비한테 넘겨.”
“역시. 허락해 줄 줄 알았어.”
그는 인정할 수 없어 하며 대놓고 비웃었다.
“알긴 뭘 알아.”
“제 애인이 저를 향한 사랑이 넘치는 걸 알아요.”
“그 미친놈이 누군데.”
배시시 웃는 것으로 대응한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잡고 괜히 흔들었다. 아직도 휴게실에서 자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둘러싸여 있던 일과 모르는 여자에게 웃어 보였던 일로 앙금이 남은 건지, 그의 태도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그게 제 착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가 밀어내면서 사람 두어 명이 서 있는 승강기로 향하려고 해서, 조용히 좀 걷자는 의사를 전하기 위해 전방의 비상계단을 가리켰다.
세헌은 물끄러미 윤신을 직시하더니 이내 눈앞의 보드라운 뺨을 쭉 늘여 꼬집었다. 그러고는 마지못해 계단의 문을 열었다. 완전히 단둘이 있게 되자 그가 환자복 차림의 윤신을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아무리 당장 인기척이 없다지만 언제 어느 때 누가 각 층의 문을 열고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르는 일이라 윤신이 바로 저항했다.
“뭐 해요. 누가 봐요!”
“충분히 조심하고 있어. 너 느려 터져서 답답해. 협조해.”
정말 조심하고 싶으면 언제 사람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거 없는 장소에서 남자인 애인을 안아 들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윤신은 그렇게 반복해서 말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가 그러고 싶어 하고, 저도 싫지 않은데 왜 말려야 하는지 그럴듯한 이유가 더 이상 생각이 안 났다.
다행히 마침 자신이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 신분이니 여차할 경우 훌륭한 핑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품에 가득 안아 주는 이 행위가 저를 무척 행복하게 했다.
“선배하고 같이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가끔 무서워.”
그는 잠시 흠칫했을 뿐 걸음을 멈추지도, 답해 주지도 않았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윤신은 어째 그의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저를 안아 주는 손끝이, 귓전에 스미는 숨결이, 맥박으로 전이되는 심장 박동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으니까.
세헌의 곧은 목을 꼬옥 끌어안은 윤신이 이거로는 모자라단 의미로 그의 너른 어깻죽지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 * *
두 사람은 병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문을 잠그고 내부로 입성한 세헌은 안고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침상에 앉혔다. 그러고는 손을 씻을 요량인지 병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인형처럼 앉아 있던 윤신은 무심코 돌린 시선에 잡힌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협탁 위에 익숙한 포장으로 싸인 디저트 박스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먼저 도착했던 세헌이 자신이 없어 일반 병동까지 찾아 나선 거라는 계산이 단박에 끝났다. 그가 사 온 것인 모양이다.
오늘 아침, 자신은 으레 하는 출근 전 통화 중에 사택 근방에 있는 파이 가게의 단호박 파이가 생각난다고 지나가듯 그에게 말했다. 알겠다는 답변 외에 딱히 첨언이 없길래 발화자인 저조차 종일 까먹고 있었는데 저 남자는 잊지 않고 굳이 거기까지 들러 사 온 걸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찡해졌다.
“이거 어떻게 사 왔어요?”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세헌이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힐끗 돌아보았다. 윤신은 일어나 그를 향해 디저트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그가 확인한 것 같아 상자는 내려놓고 이어 물었다.
“가게 문 아직 열려 있어요? 아니, 애초에 이게 남아 있어요? 이 집 거 늦게 가면 팔지도 않아서 쉬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건데.”
꼼꼼하게 손의 물기를 닦고 도로 병실로 들어선 그는 본인도 생각할수록 황당한지 넥타이를 헝클어뜨리며 답했다.
“아침에 통화 끝나고 예약했어. 나한테 퇴근길에 파이 사다 바치게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저 말고 있으면 안 되죠.”
가볍게 웃은 그가 윤신의 앞에 마주 섰다. 그는 더 얇아진 환자복 이곳저곳을 들쳐 수술한 자국이 잘 아물어 가고 있는 다리와 여타 상처 부위들을 점검했다. 그 바람에 둘의 시선이 한 군데서 엉키지 못하고 미묘하게 엇갈렸다.
“변태같이 어딜 보시는 거예요.”
윤신의 경고를 그는 여유 있게 흘려 넘겼다.
“전에 먹었을 땐 너무 달아서 별로라고 하더니 갑자기 왜 저게 먹고 싶대?”
“그러게요. 갑자기 떠올랐어요. 그걸 먹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거 같기도 하고. 선밴 우리 저거 처음 먹던 날 기억나요?”
“나지. 단 거 싫다는데도 네가 억지로 나 먼저 먹어 보게 했잖아. 누가 변태인지 모르겠군.”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 즐거운 일을 하며 머물렀다는 사실은 ‘추억’쯤으로 간단하게도 표현이 가능했다. 그건 그 시공을 이루고 있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마법 같은 일을 하게 만들었다.
윤신이 그날 세헌의 모습을 반추하는 동안, 흐트러진 앞머리를 걷어 올리고 반질반질한 이마에 꾹 누르는 것처럼 입술을 문댄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너랑 한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다 선명하게 기억이 나.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까지도.”
“저거 처음 먹었던 날은 기분이 어땠는데요?”
“그냥 네가 좋았어.”
그의 앞에서 으레 그러듯 종알종알 대꾸할 준비가 돼 있던 윤신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많이 벅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그저 세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복잡해진 눈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던 그가 두 팔을 벌렸다.
반갑게 그를 향해 안겨 든 윤신은 단단한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가 그대로 서로의 몸이 바짝 붙을 수 있도록 무게중심을 기울이더니 상대가 뒷걸음질 치도록 조금씩 전진했다.
몇 걸음쯤 걸었을까.
툭. 허벅지 뒷부분에 침대의 프레임이 닿은 걸 느낀 윤신이 그의 널찍한 등을 감싼 손을 천천히 끌어 내려 골반쯤을 붙잡았다. 세헌이 거부하지 않는 틈을 타 왼손의 위치를 앞으로 변경해 그의 두둑한 앞섶을 덥석 쥐었다.
“우리 언제까지 삽입 안 해요?”
“너 다리하고 허리 아작 났던 거 잊었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완쾌한 게 아냐.”
“하나, 아작까지는 안 났고요. 둘, 저 거의 회복 단계고요. 셋, 유사 성행위도 싫진 않지만…… 저 이거 입 말고 아래에 넣고 싶어요. 이제 그만 애태우고 오늘은 살짝 넣어 보면 안 돼요?”
“살짝? 그게 얼마큼인데.”
“……끝만이라도? 감질나.”
“끝만 넣……. 그게 돼? 자신 없어.”
“나 함부로 하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제가 선배 폭주하는 거 같으면 신호 줄게요. 그럼 천천히 뺐다가 다시 넣어요.”
“네가 말리면 뭐 해. 내가 들을 자신이 없는데. 일단은 너 허리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윽.”
꽈악.
윤신이 더 듣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손아귀의 성기를 힘껏 쥐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두 팔을 쭉 뻗은 세헌이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면서 손바닥에 하중을 실었다. 윤신을 품에 가둔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그가 어설프게 몸을 겹친 상태로 가까이에 있는 말간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신의 손은 쉬지 않고 세헌의 성기를 애무했다. 가뜩이나 부피가 커서 잘 쥐어지지 않는 기둥은, 속옷과 바지에 두 겹으로 감싸여 있어 더욱 한 번에 자극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마치 그가 제 안에 넣을 때처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하니 굵직한 음경이 금세 양감을 키워 질 좋은 천을 뚫을 듯이 삽시간에 팽창했다.
“하아, 도윤신. 놔.”
“싫어.”
“싫긴 뭐가 싫어. 이거 성추행이야.”
“선배가 허락해 주면 합법이에요. 얌전히 있어 봐요.”
뿌리치지 않는 그의 대응을 수락으로 이해한 윤신이 손을 충실히 움직였다.
넓은 방 안의 공기는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윤신이 하는 대로 얼마간 두고 봐주는 세헌의 팔뚝에 핏줄이 빠듯하게 도드라졌다. 그의 숨결이 한결 무겁고 눅눅해졌다. 연신 거친 숨을 토해 내던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윤신의 몸을 확, 뒤집어 버렸다.
타악. 양팔로 침대를 짚은 윤신의 뒤에 세헌이 바짝 붙어 섰다. 그는 윤신의 왼쪽 손등에 제 것을 얹듯이 올려 마치 감싸 안는 것처럼 깍지를 끼곤 다른 한 손으로 환자복의 고무줄 바지를 훅 끌어 내렸다. 곧이어 거침없이 제 바지 버클을 풀고, 어느 틈에 강직된 성기를 드로어즈에서 꺼내 탄력적인 허벅지 사이에 쿡 찔러 넣었다.
“흣! 선배, 으응…….”
자연히 윤신의 민감해진 회음 부위에 세헌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한껏 빳빳하게 발기한 그의 것은 뽀얀 허벅지의 틈새를 지나 자극을 고대하고 있는 윤신의 음낭과 뿌리에까지 수월하게 닿았다. 앞뒤로 삽입 운동을 할 때마다 서로의 음경이 아슬아슬하게 맞부딪쳤다. 적나라한 촉감이 일 때마다 겹쳐 쥔 두 개의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구속되지 않은 손으로 늘씬한 허리를 붙들고 피스톤질을 하던 세헌이 불시에 윤신의 머리채를 훅 잡아당겼다. 뒤로 딸려 온 윤신의 희멀건 얼굴이 뺨만 흥분으로 벌게져선 그를 올려다봤다. 세헌은 그 홍조 띤 뺨을 먹어 치울 것처럼 게걸스레 핥으면서 위험천만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애가 타?”
“읏, 흐으, 으.”
“애가 타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선배, 조금, 아파, 아…….”
“말했잖아. 난 너 아파하면 흥분된다고. 그래서 지금 하면 안 되는 거야. 참아 줄 때 몸 사려.”
잔뜩 달아올라 한 번 더 훅,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긴 세헌이 이번엔 윤신의 벌어진 입술까지 허겁지겁 빨아 댔다.
옷을 벗을 틈도 없이 각자 하의만 조금씩 깠는데도 그들을 둘러싼 외설로 내부의 공기가 터무니없이 난잡했다. 쾌감으로 헐떡거리는 윤신의 턱을 잡은 세헌은 점점 스퍼트를 올리면서 서로의 입술을 맞물려 키스했다. 그는 간단하리만치 쉽게 벌어진 입 안에 제 혀를 엉망진창으로 쑤셔 넣고는, 마치 음부 내벽에 윤활제를 바르고 그걸 뭉개는 것처럼 살덩이로 안을 유린했다.
키스하는 동안에도 하반신의 움직임은 지속됐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아랫도리를 움직여 서로의 성기가 마찰되게끔 자극했다. 눈앞이 아찔해진 윤신이 오른손으로 그의 딴딴한 허리를 잡고 어찌할 바 몰라 하자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포식자의 눈동자에 가학심이 강렬히 피어올랐다.
다시 윤신의 고개가 앞을 향할 수 있도록 놓아준 세헌은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대로 병원복 상의 너머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여린 살갗을 세게 깨물려다가, 상대가 환자라는 점을 가까스로 스스로에게 주입하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겨우 숨을 몰아쉰 그는 있는 대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윽!”
털썩. 겨우 버티고 있던 윤신의 상반신이 침대 위로 완전히 무너졌다. 잘 개인 이불에 팔을 얹고 엎드린 그 위로 세헌이 올라탔다. 두 사람의 하체는 땅으로 침잠하듯이 함께 주저앉았다. 나란히 다리를 접어서 무릎부터 종아리로 이어지는 단면으로만 땅을 디뎠다.
아무래도 다쳤던 다리를 의식한 듯했다. 그가 제 사타구니 사이에 윤신을 가두어 하체를 포갰다. 무릎을 꿇는 자세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것 같았다. 바로 눈치챈 윤신이 그의 종아리 위에 제 것을 얹는 것처럼 꼬아 다리를 겹치는 것으로 화답했다.
자세를 고치면서 윤신의 상체가 필연적으로 빨래 거는 것처럼 침상에 걸렸다. 뒤에 달라붙은 세헌이 허리 짓 할 때마다 엎어진 몸이 들썩거렸다.
조금 전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지 못한 걸 보상받겠다는 양, 세헌이 윤신의 팔을 감싼 제 손목을 거세게 물었다. 콰악, 짐승의 송곳니가 찍히듯이 치흔 위에 온갖 잔인한 충동과 사나운 욕구들이 실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윤신은 연신 몸을 달달 떨어 댔다.
“아, 흐으, 더, 더 해 줘.”
뒤의 그는 기쁘게 윤신의 바람을 이행했다. 그는 힘껏 조이고 있는 허벅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성기를 추삽질했다. 자연스럽게 자극받은 윤신의 것도 덩달아 꼿꼿하게 발기해 프리컴을 쏟기 시작했다. 타악, 탁. 딱딱해진 두 개의 기둥이 엇박으로 거세게 부대꼈다. 다정하게 윤신의 귓전을 혀로 핥은 세헌이 달래듯이 속닥거렸다.
“너무 보채지 마. 참기 힘들어.”
철퍽, 철퍽. 서로의 살갗이 마찰하면서 질척한 마찰음이 일었다. 세헌의 귀두에서 흘러나온 불투명한 쿠퍼액이 윤신의 다리 사이를 적셨다. 동시에 윤신의 것에서 나온 액체가 침대 프레임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반쯤 무릎을 굽히고, 뒤로 뻗은 두 다리를 세헌에게 걸친 윤신은 상체의 지구력과 근력으로 하체의 자극을 겨우 견디며 깊고 아득한 열락에 빠져 정신없이 뜨거운 호흡을 뱉어 낼 뿐이었다.
“아, 싫, 싫…… 넣어 줘…….”
“윤신아. 얼른 깨끗하게 회복할 거지?”
“흐읏, 응!”
“좆을, 구멍 너덜거릴 때까지, 먹어 치우고 싶으면 얼른 나아야지?”
“아! 아, 좋, 기분 좋아. 나, 나올 거 같아. 흣. 박아 줘, 응?”
그야말로 마음 같아선 몇 번이고 온 체중을 실어 성기를 갖다 박아 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는 이성 없는 이성 모두 끄집어내 자세를 고친 세헌이 손가락을 길게 세웠다. 그는 윤신의 입 안에 중지를 넣고 척척해질 때까지 적셨다. 그러고는 자신이 꿰뚫고 있는 허벅지의 바로 위쯤, 둔부의 갈라진 자리에 그것을 그대로 욱여넣었다. 쿡, 내벽을 찌르면서 능숙하게 짜릿한 자리를 찾아낸 그가 스팟을 정통으로 찔러 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귀두를 삽입하는 것처럼 찌걱거리는 내부에서 시동을 걸다가 손가락의 개수를 억지로 늘려 기어이 네 개까지 삽입했다. 안을 거세게 찌르는 바람에 전립선을 자극받은 윤신이 허리가 튕겨 오르는 것처럼 움찔하곤 허벅지를 파르르 떨었다. 그는 그 반응만을 기다렸다는 듯 콱, 콱, 손가락의 첫 마디뼈부터 손바닥 사이의 계곡이 만나는 자리까지 깊숙이, 또 세차게 들이밀었다. 그의 거친 삽입 때문에 윤신은 자지러졌다.
“아! 흐응! 선배, 읏!”
호흡이 달리는 포로의 신음이 서서히 음량을 높였다. 욕보여지는 윤신의 얼굴부터 목까지 죄다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트를 움켜쥔 손은 파르르 경련했다. 세헌이 여전히 단단히 깍지 낀 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뒤로 뻗어 그의 몸에 길고 깊은 상처를 냈을 터다.
세헌도 슬슬 한계에 봉착한 듯했다. 차츰 움직임이 광포해졌다.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이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절정의 직전이었다. 방음이 잘되는 공간이라 적나라한 소리를 죽이지 않아도 돼 다행이었다. 완전히 달떠 시선 처리가 불명확해진 윤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헌은 성기를 내벽에 처박듯이 허벅지 사이에 귀두를 욱여넣고 강직된 기둥끼리 야릇하게 비볐다. 동시에 벌름거리는 구멍을 손끝으로 세차게 찔러 댔다.
마침내 두 사람의 하반신이 동시에 익숙한 형태로 수축했다.
퍽! 퍽!
막판 스퍼트를 올린 그가 성기와 손가락을 정박으로 쑤셔 박았다. 삽입했다가 뒤로 물러설 때마다 마치 밀부의 무른 살들이 딸려 나오듯이 허벅지 살갗이 따라왔다. 그 미칠 것만 같은 감각을 피차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먼저 반응한 건 윤신이었다.
“아! 아, 갈 거 같……. 하윽!”
이윽고 팟, 하고 윤신의 요도구에서 희뿌연 액체가 쏟아졌다.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세헌의 성기에서도 점도 높은 백탁액이 분출됐다. 하아, 하아. 토정한 두 사람은 말없이 숨을 골랐다. 한참을 그러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조금씩 비스듬히 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닫고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코앞에 침대 두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눕혀 달라 그럴걸.”
쪽.
대꾸 대신 윤신의 발그레해진 뺨에 입을 맞춘 세헌이 아직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제 것을 툭, 툭, 쳐 대는 짓궂은 장난을 쳤다. 부끄러워하는 연인을 몇 번 놀리는가 싶더니, 이대로 있게 둬선 안 될 것 같았던지 반쯤 늘어진 윤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연달아 침대 위로 올려 앉히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헤드에 기대게 했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풀어내며 나른하게 이어 말했다.
“시트 갈기 전에 연습해 볼래?”
이미 실전을 수백, 수천 번 겪은 커플이 이제 와 연습할 게 뭐가 있나 싶었다.
“뭘요?”
“연습해 보자. 내가 넣었다가 천천히 빼낼 수 있는지.”
“넣어 주게요?”
윤신이 외부로 드러난 세헌의 성기를 가리키자, 그가 번들거리는 음경을 덩달아 힐끗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응, 끝만.”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안 된다면서.”
“그러니까 시도해 보자고.”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데?”
그는 질문하는 윤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병원복의 하의를 더 끌어 내려 무릎 위에 걸치도록 한 그는 정액을 훔쳐 내지 않아서 번들번들한 허벅지를 눈대중으로 살폈다. 가랑이 틈새에 꽂아 넣은 시선이 매우 엄정하고 진중했다.
무릎 사이를 세세히 관찰당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당황한 윤신이 다리를 오므리려 움찔댔다. 그 기척을 바로 알아챈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한계까지 양다리를 벌리더니 은밀한 음부 사이를 탐색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벌름거리는 구멍을 벌려 안을 검사했다. 한 박자 뒤늦은 대답은 덤이었다.
“내가 제대로 안 풀어 줬는데도 손가락 네 개까지 들어갔어. 느꼈어?”
“그, 그거야…….”
“너 뒤로 자위했지.”
그의 노골적인 물음에 윤신은 얼굴을 붉히며 득달같이 항변했다. 정말로 억울했다.
“아뇨? 준비를 한 거죠. 변호사님이 자고 갈 거라고 해서…….”
“넓히기만 했다고? 정말?”
“…….”
“그 구멍이 네 몸에 달려 있다고 네 거인 게 아니야. 내 좆집이지. 내가 너 주거 침입죄로 수용 시설에 처넣을 수도 있는데, 너한테 내 좆을 처넣는 거로 타협해 주는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어디 가서 더러운 말 배워 오세요?”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너야 뒤로 자위할 시간까지 넘치겠지만.”
웬만한 음담에는 뻔뻔하게 대응할 줄도 아는 윤신의 얼굴이 있는 대로 벌게졌다.
“진짜 아니라니까?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아래를 풀 때 손가락을 넣고 평소 건드리면 자지러지는 부위를 조금 더듬어 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길고 굵은 성기가 박아 주는 자극과 비교돼 더 아쉬워지기만 할 걸 알아 여러 차례 쑤셔 대진 않았다. 그건 그거대로 그에게 놀릴 거리를 주는 듯해 상세히 설명하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리를 움직여 그를 밀어내려 하자 가소로워하는 웃음을 터트린 세헌이 윤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저항하는 몸을 가뿐히 제압하곤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욕조의 프레임에 안고 있던 몸을 앉혀 둔 그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싫은 게 아니라 부끄러운 거였던 윤신은 금세 행동을 멈추고 얌전히 굴었다.
온수가 쏟아져 나오면서 서서히 욕조에 자박자박한 물이 차올랐다. 세헌은 누더기처럼 걸치고 있는 윤신의 병원복과 속옷을 모두 꼼꼼하게 벗겨 냈다. 손을 직접 물속에 넣어 온도를 재더니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았던지 윤신을 거기에 고이 앉혀 주었다.
정 반대편의 샤워 부스를 힐끗 쳐다보는 모양새가 퇴근하고 온 참이라 씻으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윤신은 코앞에서 셔츠의 단추를 푸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시선을 느낀 그가 얼굴을 꽉 붙잡곤 정수리에 쪽, 입 맞추며 예상 그대로의 말을 꺼냈다.
“잠깐 앉아 있어. 샤워하고 올 테니까.”
“그냥 들어와요.”
“…….”
“빨리. 떨어져 있기 싫어요. 너무 조르게 하지 마요.”
윤신이 얼른 들어오라는 뜻으로 물 위를 손으로 가볍게 내려치면서 찰박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걸 빤히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옷을 마저 탈의했다.
“졸라도 안 돼.”
“선배는 나를 정액 묻은 상태로 물에 넣었거든요?”
“그거랑은 다르지. 기다려.”
“좋아요. 그럼, 오늘 확실히 자고 갈 거죠?”
최근 이경이 병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몇 년 사이 윤신이 이렇게 마음 놓고 쉰 적이 거의 없어서 이 기회에 동생을 자주, 또 많이 봐 두고 싶은 눈치였다.
덕분에 세헌은 해 진 시간에만 방문하는 일이 반복됐다. 대체로 새벽에 왔다가 새벽에 돌아갔다. 오늘은 그녀가 미리 약속이 있다며 못 올 거라고 얘기해 준 날이라 특별히 윤신이 그에게 자고 가 달라고 졸랐다. 안 해 줄 거면 퇴원을 시켜 달라고 조건을 걸었더니 그가 손쉽게 수락했다.
외부에서 잠을 자는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병원 밖으로 내보내기 싫은 것 같아서 기뻤는데, 그걸 솔직히 말하면 입원 기간이 더 길어질 것 같아 함구했다.
윤신이 사념에 빠져 있는 사이 드레스 셔츠를 벗어 던진 그는 아까부터 흐트러져 있던 바지에 손을 대며 대답했다.
“응. 내일은 여기서 출근할 거야. 그러려고 사택에 들렀다 온 거고.”
“파이 사야 해서 일부러 들른 건 아니고? 옷은 이모님한테 가져다 달라고 했어도 됐잖아요.”
“겸사겸사.”
“선배.”
“보채지 마. 들어주고 싶어져. 금방 씻고 올게.”
“그게 아니라 원 회장요. 요즘 난리 난 COP 오너.”
그는 하의까지 탈의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반라의 세헌이 전라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저만을 오롯이 응시하는 윤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윤신은 환한 불빛 아래 알몸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 내는 건 아직까지도 부끄러운지 몸을 조금 꼰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COP 전 계열사가 뒤집어졌겠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얘길 왜 단둘이 있는 욕실에서 하냐고.”
“딱 봐도 선배 설계던데 뭘. 저도 눈치 있어요. 원 회장이 저 차로 치라고 사주한 사람이에요? 그럼 다 말이 되거든요.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 이유도, 그걸 선배가 묵인하는 이유도, 원 회장이 지금 저 지경이 된 이유도, 다요.”
신중히 그 말을 해석하던 그가 다시 옷을 벗으며 허탈해했다.
눈으로도 한숨을 쉴 수 있다면 딱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넌 왜 누가 망하는 것만 보이면 내 설계래? 터질 게 터진 거겠지.”
“예순이 다 될 때까지 승승장구해 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체계적으로 망한다고요?”
“그게 인생 아냐?”
“철학 전공 하셨는 줄 몰랐네요.”
“미안하지만 법이 내 전공이야. 사회 복지 같은 거나 배워 놓고 어디서 하늘 같은 선배 학위를.”
꽈악. 뺨을 손가락으로 집어 길게 늘인 전라의 그가 샤워 부스로 향했다.
쏴아아아.
금세 샤워기에서 쏟아진 거센 물줄기들이 부스의 유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나기를 닮은 그 투명한 물방울들이 벽에 부딪혀 일일이 깨지는 소리가 그 위에 더해졌다. 수증기가 인 너머로 세헌의 실루엣을 지켜보던 윤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온갖 구석에서 있는 숨통 없는 숨통 모조리 다 조여 놓고 가진 걸 다 빼앗는 것. 그래서 살아 있게는 만들지만 생존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누굴 피 말리게 하고 싶을 때 강세헌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나면 결과적으로 소송이든, 인수전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상대측은 내몰린 끝에 백기를 들었고 그가 승기를 거머쥐었다. 또한 그는 받은 건 반드시 갚는 합리주의자였다.
저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부정하는 걸 듣고 나니 살짝 헷갈렸다. 둘 중 하나였다. 그가 정말로 결백하거나, 혹은 자신이 알길 원하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은 해답이라는 걸 알기에 윤신은 말을 아꼈다.
그가 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윤신은 크기가 작아서 금세 반 정도 물이 찬 욕조를 확인했다. 좀 더 빨리 많은 양이 나오게 할 수는 없나 수도를 확인하려는데 동시에 멀리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 흠칫했다.
‘전화?’
욕조와 샤워 부스의 물소리 때문에 소리가 선명하지 않았다. 아직 나올 기미 없는 세헌을 힐끗 본 윤신이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대강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고 그걸 걸친 상태로 욕실의 출입문에 다가섰다. 그쪽으로 가서 귀를 문에 대니 확실히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내 건 벨소린데.’
세헌에게 전화가 온 듯했다. 이 시간에 걸려 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그에게 가져다줄 셈으로 윤신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이 기척들을 눈치챈 건지 세헌이 어느 틈에 샤워 부스의 문을 벌컥 열고 손가락을 까딱, 하는 거였다.
“너 어딜 도망가.”
근육이 잘 잡힌 탄력적인 몸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모양새는 언제 봐도 관능적이었다. 이 에로틱한 장면은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닌데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윤신은 얼른 눈을 문밖으로 돌리려고 애쓰면서 답했다.
“도망이 아니라…….”
“나란히 벗고 있는데 어딜 딴 델 쳐다봐. 너 그렇게 여유 있어?”
“하지만 전화 오는데?”
그제야 그도 진동 소리를 포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금세 다시 입을 떼긴 했으나 처음의 기조를 바꾸진 않았다.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선배 연락처는 거물급 클라이언트들밖에 모르잖아요. 이 시간에 걸려 왔으면 중요한 연락이고요. 거기 있어요. 제가 얼른 갖다줄게요.”
세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밖으로 튕기듯이 나간 윤신은 에어컨 바람에 몸을 덜덜 떨면서 그의 휴대폰을 찾았다. 다행히 협탁 주변에 차 키와 함께 얌전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얼른 그걸 챙겨 들고 도로 욕실로 들어가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강 털어 내던 세헌이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윤신의 휴대폰 벨 소리도 요란한 파동을 자아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의아함을 느끼고 눈을 마주쳤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의 느낌표가 둘의 교차한 눈동자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곧 휴대폰을 건네받고 화면을 확인한 세헌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송 대표, 시간 개념 없어? 내가 분명 오늘 밤은 사옥 테러당한 거 아니면 연락하지 말…….”
날카롭게 답하던 세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그는 별말 하지 않고 조용히 상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윤신은 잠시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병실로 다시 나가 제 것도 챙겨서 욕실로 되돌아왔다. 발신인은 탁 비서였다. 미심스러워진 윤신이 전화를 받으려는 찰나, 세헌이 휴대폰을 낚듯이 강탈했다. 심지어 본인이 하던 통화는 잠시 뒷전으로 하고 윤신의 전화를 대신 받기까지 했다.
“탁, 나 지금 송 대표랑 통화 중이야. 전화 연결됐으니까 너 이제 얘한테 그만 걸어. 시간이 몇 신데 환자한테 전화질이야.”
뚝.
할 말만 쏟아 내고 도둑 통화를 마친 그가 다시 본인의 휴대폰으로 주의를 돌렸다.
‘저 안 아픈데요?’
윤신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가 손가락을 검지에 올렸다.
쉿.
그러고는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 선반에서 가운을 찾았다. 얇은 배스 가운을 꺼내 든 그가 아직 축축한 몸 위에 그걸 걸치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욕실 밖 파우더 룸으로 나갔다.
지금 세헌이 벗어나려고 하는 건 그저 이 밀폐된 욕실이었다. 그런데 윤신의 직감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금방이라도 이 병원을 벗어나 도국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통화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인 걸까. 너무 초조해서 그가 업무상 통화할 때는 절대 하지 않는 짓을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치아 자국이 남은 세헌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윤신이 돌아보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자고 갈 거라고 했잖아.”
스피커 부분을 손으로 막은 그가 윤신에게 조용하게 속삭였다.
“가는 거 아니야. 통화 좀 하고 돌아올게.”
“…….”
“금방 올게.”
윤신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준 세헌이 습한 공기가 가득한 공간을 빠져나갔다. 그가 문간을 건너가는 뒷모습이 괜히 야속했다. 딸칵. 밖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남아 있는 윤신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와, 그사이 3분의 2 이상 물이 채워진 욕조에 몸을 담그고 생각에 잠겼다.
송 대표와 탁 비서가 퇴근한 세헌에게 다시 전화를 걸 만한 일. 그것도 웬만하면 연락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까지 했건만 걸 수밖에 없었을 중차대한 일. 그건 대체 뭘까.
뭐가 됐든 지금 도국엔 강세헌이 필요한 모양이다.
‘나도 선배 필요한데.’
원래도 종종 있는 편이었으나 세헌이 대표가 된 뒤로 자신이 회사에 그를 빼앗기는 일은 더욱 빈번해졌다. 그가 대표가 된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요즘 특히 실감하고 있었다.
후우. 깊이 숨을 내쉰 윤신이 속으로 투덜댔다.
‘내 건데…….’
서운하긴 하지만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미 처음부터 그가 경고했던 일이고, 자신도 각오하고 응원했던 것이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강세헌은, 또 모두가 필요로 하는 강세헌은 언제 어느 때나 자랑스러웠다. 조금 전에도 일부러 더 자신이 나서서 그가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몰아갔다. 착하고 좋은 연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위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심이었다.
다만 가끔 그의 부재에 쓸쓸할 때가 있었고, 종종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안타까울 때가 존재했다.
소리 죽여 툴툴거리던 윤신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불현듯 협탁에 아직 얌전히 놓여 있을 단호박 파이 상자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건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사실 아까 그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걸 처음 먹었던 날의 기억은 제게도 생생했다. 온갖 싫은 티는 다 내 놓고 조르는 제 말에 못 이긴 척 억지로 먼저 파이를 먹어 주던 강세헌을 보면서 자신도 그와 똑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그가 좋다고.
따뜻한 물에 제 몸을 맡기고 있던 윤신은 마침내 수전을 잠갔다.
곧이어 늪에 빠지듯이 한참을 가라앉아 물속에 잠겨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