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햇볕이 대지 위로 쏟아지는 어느 초봄.
법무 법인 도국의 사옥은 마치 고장 난 열차의 내부처럼 정신없이 굴러갔다. 사방에서 전화벨과 프린터기 인쇄음을 비롯한 각종 불편한 소음이 발생했다. 한 가지 놀라운 건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그 소리들을 다루는 사람들의 행동반경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매달리는 작금의 상황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이 직원들을 고용한 두 명의 공동 대표도 초연하긴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세헌과 미희의 뒤를 슈트 차림의 변호사들 여럿이 조용히 따랐다. 후방을 향해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미희가 세헌이 선 쪽으로 몸을 좀 더 숙이면서 넌지시 속닥거렸다.
“안 그래도 그쪽에서 조만간 보자던데? 딸내미랑 널 한번 만나게 하고 싶은가 봐.”
뒤쪽의 변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사라질 때까지 말을 아끼던 세헌은 복도 양옆으로 일하고 있는 임직원들만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몹시 어이없어 보였다.
“그 집 딸 아직 로스쿨생 아니야?”
“기억하네? 맞아.”
“또 청탁인가? 송 대표 아직 그 버릇 못 고쳤나 보지?”
이번엔 그녀가 어이없어했다. 해명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했다.
“버릇이라니. 내가 펌에 도 변 꽂은 게 대체 언제 적인데.”
“난 안 나가니까 일단 대학원 졸업부터 하고 정식으로 입사 루트 밟으라고 해. 어디서 꼼수야.”
“미안하지만 이번 건 인사 청탁 아니거든?”
여기까지 듣곤 완전히 걸음을 멈춰 선 그가 나란히 움직임을 중단한 그녀를 마주 봤다. 신랄한 어투와 짜증스러운 눈빛에 미처 숨기지 못한 환멸마저 묻어났다.
“청탁이 아니면 더 문제야. 그 노친네 제정신인가?”
“있는 사람들 자식 갖고 결혼 장사하는 거 하루 이틀이니?”
“그 장사를 왜 나하고 해. 나는 파는 물건이 아니야.”
“어머, 맞다. 너 이제 품절됐지? 내가 자꾸 깜빡깜빡하네.”
“…….”
꽉.
뭔가 답변하려던 세헌이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고 미희를 지그시 직시했다. 그녀는 여봐란듯이 그의 왼손 약지에 얌전히 끼워진 반지를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들은 세헌이 듣기도 싫어해서 애초에 그녀의 선에서 알아서 거절하거나 조정하는 편이었다. 처음부터 굳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겠다 싶었다.
그가 더는 말 섞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듯 다시 걸음을 뗐다. 미희는 즐거워하면서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요즘 두 대표 사이에는 이런 일이 아주 가끔 생겼다. 세헌이 업무적으로 미희를 몰아붙이면, 그녀는 그에 대한 소소한 복수로 윤신의 존재를 걸고넘어졌다.
다른 모든 어렵고 복잡한 일에 대해서는 대응할 말도, 대비책도 늘 척척 내놓는 강세헌이 그 조잡한 공격을 받을 때만큼은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번번이 무너졌다.
“어우, 재밌어. 내가 강세헌을 한 방 먹이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속이 다 시원하다.”
“나야말로 선배 앞으로 비호감 하나씩 적립 중이야. 어디까지 가나 보자.”
“너 요즘 좋아 보여서 그래.”
“놀고 있다. 건드릴 거 생겨서 신난 거겠지. 여기까지만 해. 그만 따라와.”
이 대화는 여기서 끝이라는 양, 그는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미희는 피식 웃었다.
대표가 된 뒤로도 세헌의 사무실은 파트너 시절 쓰던 자리 그대로였다. 원래도 펌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퍽 널찍한 공간을 사용하고 있긴 했던 터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다만 미희는 대표의 품격에 맞게 확장 공사 혹은 새로 인테리어라도 하길 바랐다. 그걸 거절한 건 세헌이었다. 현재의 가구 배치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이유였다. 그 바람에 그를 설명해 주는 칭호가 변하고도 세헌의 집무실 내·외부에서 변한 것은 문패와 명패, 단 두 가지뿐이었다.
대표 / 변호사 강세헌
문에 달린 문패를 보며 걸어가던 세헌은 비서실의 직원들이 유난히 부산스럽게 굴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보통 먼발치에서 그가 나타나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 바짝 군기가 들어 공손히 인사부터 하는데, 오늘따라 개중 반 정도는 넋이 나가 있었다. 심지어 탁 비서마저 혼란스러워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의아함을 느낀 그가 눈살을 구기면서 그쪽으로 다가섰다.
코너를 돌아 제 집무실로 향하려던 미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가려던 길을 선회해 세헌과 다시 보폭을 맞췄다. 이윽고 두 대표가 비서실 앞에 당도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여기가 무슨 시장 바닥이야? 탁 실장, 너까지 중심 못 잡고 왜 이래.”
양손에 각각 휴대폰과 내선 수화기를 든 채로 갈등하던 탁 비서가 자신 쪽으로 다가온 세헌을 발견하자마자 두 개 다 내려놓으며 답했다.
“강 대표님! 전화 왜 안 받으세요! 안 그래도 지금 모시러 가려던 참입니다.”
“전화? 강 변, 전화했다는데?”
곁에서 함께 의아해하는 미희에게 묵례로 인사한 탁 비서가 두 대표 모두에게 보라는 듯 앞쪽을 향해 손짓했다. 세헌은 바로 그 타이밍에 무음으로 해 둔 제 휴대폰을 꺼냈다. 남아 있는 부재중 전화의 목록을 확인하려는 찰나, 오른쪽 비스듬한 자리에 서 있던 미희가 돌연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난데없는 스킨십을 싫어하는 그를 잘 알면서도 한 행동이라, 의문을 품은 세헌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 하는 거야, 놔.”
“강 대표. 맙소사, 저거 좀 봐.”
그녀의 손가락마저 탁 비서가 가리키는 자리를 함께 따라갔다. 세헌의 앞에 자리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비켜 그의 시야를 확보했다. 마침내 정면의 커다란 모니터 화면을 눈에 담은 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 새끼가.”라고 혼잣말하며 숨을 깊이 삼킨 미희가 경악했다. 그때까지도 세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뉴스 채널을 통해 나오는 기사의 영상들과 하단의 자막을 꼼꼼하게 뇌리에 담았다.
제보자가 제공한 블랙박스 영상으로 추정되는 화면 아래에 이런 글자가 떠다녔다.
[법무 법인 도국 소속 모 변호사]
[서울가정법원에서 나오던 중 강남대로에서 피습]
해당 자료 화면은 검은색 중형차의 후방에서 대형 SUV가 거칠게 세단을 들이받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가정법원 앞 도로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실시간으로 몇몇 기자들이 현장을 목격한 듯했다. 보도 중인 기자는 경찰이 현재 정확한 사고의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말로 해당 꼭지를 마무리했다.
그때까지도 ‘도윤신이 아닐 거’라는 일말의 긍정적 불씨를 잠재우지 않은 세헌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천천히 그를 돌아본 탁 비서가 그의 희망을 산산이 박살 냈다.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는 남자의 목소리는 유독 조심스러웠다.
“도 변호사님 배당 업무용 차량입니다. 경찰에서 펌으로 연락이 왔어요.”
그 순간.
까득, 손아귀의 휴대폰을 부술 기세로 움켜쥔 세헌의 손등에서 핏줄이 시퍼렇게 융기했다. 그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게 식었다. 한껏 냉랭해진 눈동자가 어두운 색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옆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열을 내는 미희와 대조되어 그의 정제된 태도는 더욱 긴장감을 일으켰다.
어딘지 묘하게 두려워하는 듯도 했으나 모두들 세헌이 이 정도로 가라앉은 건 처음 본 탓에 선뜻 그가 겁먹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분노와 공포를 혼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정지돼 있는 사이, 지금 세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상태라는 걸 직감한 탁 비서만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탁 비서는 제 상관의 옆에 바짝 다가서서 조용히 그에게 속닥거렸다.
“화내셔도 됩니다. 아끼는 후배가 다쳐서 놀라신 정도로만요. 두 분 사이좋은 건 다 아니까요.”
아끼는 후배가 다쳐서 놀라신 정도.
세헌은 그게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제게 아끼는 후배 같은 건 없다. 그에겐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오직 도윤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끼는 후배가 다쳐서 놀라신 정도’만큼 화를 내며 상황을 지켜보던 미희는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마저 입을 뗐다.
“도 변 상태는 어떻대.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된 거래. 기자 말론 앰뷸런스 실려 가기 전에 의식이 분명히 있었다는데? 아니, 어떤 개새끼가 우리 애한테 저런 짓을 한 거야……!”
기자들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 기사를 써야 했다. 현장에서 지켜본 이들이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가 사건의 피해자인데도 피습이라고 단정 지어 보도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터였다. 최소한 단순 사고는 아닌 것이다.
미희가 대답해 줄 사람을 찾아 소리 높여 질문하는 동안, 떨리는 한 손으로 입 주변을 쓸어내린 세헌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혹시나 자신이 잘못 확인한 건가 싶어서 다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별 연락이 남아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애타게 저를 찾아 댄 탁 비서의 흔적만이 부재중 통화 목록에 가득할 따름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세헌이 계속 침묵하자 결국 그를 붙든 미희가 눈앞에서 핑거스냅을 딱, 쳤다.
“강 변, 강 대표! 연락 온 거 없었어? 둘이 친하잖아. 업데이트 안 해 줬어?”
그는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는 양, 아주 낮은 음성을 토해 냈다.
단 두 음절의 단어를 뱉어 내는 것도 몹시 힘겨워 보였다.
“없어.”
이 단답엔 미희도 사뭇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너한테……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야말로 간절히 알고 싶었다. 일하러 갔던 도윤신이 차 안에서 누군가에게 피습을 당했고, 심지어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는데, 연인인 자신이 저 소식이 뉴스로 나올 때까지 이 상황에 대해 까맣게 몰랐던 이유가 대관절 무엇인지.
묵직하게 심호흡한 그는 미희에게 대꾸하는 대신 탁 비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 키.”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탁 비서는 재빠르게 파티션 옆으로 빠져나왔다.
“대표님, 경찰에서 말하길 한국대 병원으로 곧장 이송해서 수술실 잡았답니다. 정확한 건 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차 키!”
끝내 언성을 높인 세헌 때문에 좌중이 물이라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원래 세헌은 목소리를 키우기보단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구석구석 찔러 가며 잘근잘근 밟아 주는 방식으로 나무라는 편이었다. 평정을 찾지 못한 이 모습이 모두의 눈에 낯선 광경이었다는 의미다.
예기치 않은 사고 소식으로 계속 수선스럽던 이곳 비서실은 물론이고, 복도 건너편의 각 팀 사무실 직원들까지도 이쪽의 동태를 주시했다. 눈치 빠른 탁 비서는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해 얼른 책상 서랍에서 스마트키를 꺼냈다.
“대표님, 기사 배당하려면 못해도 10여 분은 걸립니다. 차라리 제가 직접 모셔도 되겠습니까?”
대표로 취임한 뒤의 그는 예전처럼 직접 운전해 출퇴근하는 일이 부쩍 줄어들었다. 도로에서 낭비될 단 1분 1초라도 줄이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으나, 대외적으로 손수 운전하는 대표의 모습을 보이진 말아 달라고 미희가 간곡히 청한 영향이 더 컸다.
지금 운전대를 잡아도 될지. 가드레일에 박지 않고 한국대 병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긴 할지. 솔직히 확신이 없었던 세헌은 쌩하고 돌아서 앞서갔다. 지켜보던 탁 비서는 다른 비서가 넘겨주는 태블릿 PC도 함께 챙기곤 승강기 방향으로 동선을 옮기는 그를 뒤쫓았다. 곁에서 주의 깊게 이 일련의 상황을 관찰하던 미희가 걱정스러워하는 기미를 최대한 감추고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강 변, 도 변 괜찮을 거야. 여기 일 정리하고 나도 갈게. 탁 비는 상황 파악해서 나한테 연락 주고!”
남은 이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성큼성큼 앞서 걸은 세헌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양쪽 복도에서 그를 발견한 직원들이 하나둘씩 나와 정숙하게 인사했다. 그는 도열한 임직원들이 보내는 모든 신호들을 무시하고 직진했다.
너무 화가 나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일까.
지금 자신이 딱 그랬다.
헛웃음을 터트린 그가 임원 전용 승강기에 거침없이 올라탔다. 탁 비서가 빠르게 따라 탑승해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개의치 않고 앞만 봤다.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어떻게든 쥐어짜 내야 했으니까. 승강기가 하강하는 걸 감지한 세헌이 길게 심호흡을 하곤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한국대 병원 사람 중에 바로 접촉 가능한 게 누구지?”
“병원장, 이사장 둘 다 가능합니다만 이사장 쪽이 말은 더 잘 통할 겁니다. 지난번 의료 재단 재산세 소송할 때 은사님 추천으로 특별히 자문해 주시기도 했고요.”
“당장 걸어. 내가 직접 통화하지.”
“예.”
“그리고 피습이면 배후가 있을 거야. 어떤 벌레 새끼 짓인지 경찰보다 빨리 알아내.”
착실하게 휴대폰으로 연락처를 찾던 탁 비서가 일순 멈칫했다. 바짝 약이 오른 세헌의 옆모습을 눈대중으로 힐끗, 살피고는 이 사안에 관해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를 택했다.
“저…… 어떻게 하시려고요? 도 변호사님한테 억하심정 있을 정도면 최소한 우리 펌이랑 관계있는 사람일 테고, 특히 쩐주이기라도 하면 경찰 수사 잘 벗어날 겁니다. 이 타이밍에 물리적으로 손대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찾아서 찢어 버리기 전에 알아내라고. 네가 시간을 벌어 줘야 그동안 어떻게 합법적으로 그 새끼를 죽일 수 있을지 내가 생각을 할 거 아냐. 나 지금 터지기 직전이니까 그냥 ‘네.’라고 대답해.”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찾겠습니다.”
세헌은 이 충실한 대답조차 마음에 안 차는지 이를 악물었다.
지잉. 어느 틈에 주차장에 도착한 승강기의 문이 다시 열렸다.
거침없이 승강기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울리지 않게도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걱정스러워하며 조용히 입술을 씹어 대던 탁 비서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 * *
병실 밖에서 통화 중이던 세헌은 땅기는 뒷목을 곧은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렀다. 종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던지라 대꾸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푹 잠겨 있었다.
“그래, 확인해서 다시 연락해. 아냐. 아마 못 잘 거야. 아무 때나 해도 돼. 응.”
복도 건너 창밖은 이미 새카만 새벽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마친 그는 도심의 쓸쓸한 야경을 잠시 응시하다 곧 소리를 최대한 죽여 가까운 병실 문을 열었다.
중문을 건너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윤신이 바로 보였다.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간 그가 잠든 이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갈 것 같았던 몇 시간 전의 일들이 마치 지루했던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아직까지도 현실감이 부족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도착해선 윤신을 위해 무슨 조치들을 취했는지, 그러면서 어떤 심경이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돌이키자 용케도 버텼다 싶었다.
체온을 재 보진 않았지만 여실히 느껴졌다. 사고 소식을 듣게 된 뒤로 제 몸의 온도는 줄곧 평소에 비해 몇 도쯤 낮았으리라. 뒤늦게 아득한 피로가 몰려왔다.
‘속 편하게 잘 자네. 사람 미쳐 돌게 해 놓고.’
천만다행으로 윤신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손가락과 다리에 골절상이 있어 수술했고, 허리 통증을 호소했으나 그 부분은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진단 결과를 들었다. 경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생명이 위험한 지경도 아닌 듯해 한시름 놓았다.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부러 VVIP 전용 특별 병동의 가장 전망 좋은 병실로 이동시켰다.
가해자 측에서 일부러 이 정도의 상처를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정말 죽이고 싶었다면 남들 다 보는 번잡한 도로 한복판에서, 그것도 후방에서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고를 낸 운전자와 윤신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엮인 일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의 사주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배후에 있는 자가 경고 또는 협박성 메시지를 전했다고 보면 될 터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윤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헌의 눈매가 일순 불안으로 젖어 들었다.
그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윤신의 심장 부근에 귀를 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과 엷은 숨결이 오감으로 전이됐다.
살아 있다.
죽지 않고…… 확실히 살아 있었다.
힘주어 주먹을 그러쥔 그는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신…….’
왜 이 멍청이가 영원히 제 곁에 있어 줄 거라 착각했을까.
그간 윤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들은 현재를 살고 있었고, 윤신은 세헌이 아는 그 누구보다 거기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애정에 굶주리게 만드는 일도,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는 정말이지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공포스러웠다. 그런 감각은 난생처음이었다.
도윤신이 제게 준 무겁고 무한한 신뢰는 단순히 ‘당신을 좋아해.’에서 끝나는 얄팍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푼 그는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다 윤신이 수술할 때 빼놓았던 커플링이 침대 헤드 옆 협탁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잘 끼우고 다녀야지. 어디서 솔로 행세를 하려고.”
반지를 가져온 세헌이 잠든 윤신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약지에 그걸 다시 끼워 넣었다. 여전히 잘 맞았다. 순간 어떤 열망을 참을 수가 없었던 그는 허리를 숙이고 반지에 키스했다. 그러자 이 기척으로 잠이 깬 윤신이 느릿하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가늠하는 낌새였다.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기다려 주며 지그시 쳐다보는 세헌의 시선에 반응한 윤신은 어렵사리 목소리를 내뱉었다.
“……선배?”
끝이 죄다 갈라진 음성이었다. 세헌은 들은 게 분명한데도 무슨 생각인지 묵묵부답이었다. 더불어 무표정했다. 매사에 명확한 그답지 않게,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경이 한껏 곤두서 있다는 것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윤신은 잠시간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좋을 듯해 상체를 좌우로 움직였다. 한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환자가 전신을 들썩거리는 광경을 주시하던 세헌은 그제야 숨을 길게 몰아서 쉬었다. 곧이어 계속 낑낑거리던 윤신이 편안히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다만 헤드에 등을 기대 안정적으로 앉게 지지해 주는가 싶더니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금세 떼어 내는 청결한 손끝의 체온이 퍽 차가웠다.
겨우 제 앞의 남자를 마주 보게 된 윤신의 입술을 가르고 난처해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큰 부상 아니래요. 차가 튼튼해서 몸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됐을 거라고…….”
평소에 비해 다소 잠겨 있긴 했으나, 맑은 성음과 유순한 어조는 윤신의 것이 확실히 맞았다. 윤신이 내뱉은 얼마 안 되는 음절들을 한참 곱씹던 세헌이 눈앞의 티 없는 얼굴을 빤히 직시했다. 총기 있는 눈동자를 지그시 마주 보던 그가 이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뜸을 들인 것 치고는 의외로 퍽 건조한 어투였다.
“그래. 나도 담당의한테 들었어. 많이 놀랐겠다.”
“충격이긴 했어요. 평소 저를 해치고 싶어 할 정도의 큰 악의를 느끼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죠, 뭐. 누군가한텐 악역이어야 하잖아요.”
심지 굳세게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윤신의 표정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제 앞에서 얼굴을 시종 굳히고 있는 남자의 안색을 부드럽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데 정작 세헌에게 별 영향을 미치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한 태도로 입을 뗐다.
“너 잠든 사이 내가 좀 살펴봤거든. 수술 부위 부기가 아직 심하던데. 통증은 어때.”
“자다 깨서 그런가. 아직은 괜찮아요. 머리도 꽤 맑고요.”
“원래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흔해. 사소한 신체 변화라도 다 살펴야 하니까 당분간은 면밀하게 네 몸 상태 점검하고, 컨디션 이상 있는 건 전부 의사랑 상담하고…….”
차분하게 말을 잇던 세헌이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문장을 제대로 완성조차 하지 못했다.
태연한 척 버티는 데 소모되고 있던 일말의 인내심이 결국 고갈된 듯했다.
그는 윤신이 너무 근심하지 않도록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려 봤다. 하지만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음성을 출력해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소리 대신 희미한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그 무거운 숨결 속에 심려인지 안도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번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거의 진정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의 섬뜩함이 아직까지 숨통을 옥죄고 있다는 게 뒤늦게, 생생히 느껴졌다. 멀쩡히 앉아서, 저와 눈을 마주치고, 언제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도윤신이 실제라는 걸 인지하자 안도로 호흡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선배? 괜찮아?”
솔직해지자면 지금 세헌은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저 대신 좀 더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의미를 담아 윤신에게 시선을 또렷이 고정했다.
그에게 늘 주의를 기울이는 윤신이 이 메시지를 못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어째 선배가 더 놀란 거 같네. 저 이렇게 멀쩡하게 선배하고 대화하잖아요. 괜찮아요.”
상냥한 위로에도 차마 대꾸하지 못한 세헌은 손아귀를 힘주어 움킬 뿐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윤신이 목소리를 일부러 명랑하게 고쳐 물었다.
“누나는요? 의식 잃기 전까진 봤던 거 같은데.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줄 사람 필요해서 와 달라고 했거든요.”
천만다행으로 세헌도 그 노력을 알아봐 준 듯했다.
꽤 오랜 시간 숨을 고르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네 조카들 잠자리 봐줘야 한다고 아까 돌아갔어. 며칠 맡길 사람 불렀다고 했으니까 아침에 인계하고 다시 올 거야.”
“선밴 어떡할 건데요?”
“나는…….”
“나는?”
“…….”
대꾸를 기다리는 윤신의 얼굴에는 지금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눈으로 여실히 보면서도 세헌은 순순히 굴어 주지 않았다.
내내 걱정과 불안이라는 낯선 감정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애써 억눌러 두었던 의문들이, 윤신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생기자마자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마침내 뱉어 낸 음성은 이 안에서 뱉어 낸 그의 목소리 중 가장 가라앉은 주파수였다.
“넌 오늘 밤 내가 어디 있을지 궁금하긴 해?”
그 말을 들은 윤신은 촉촉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올 게 왔다 싶어서였다.
이 병실 안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세헌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건 눈치챈 바였다. 제게 궁금한 게 아주 많지만 저를 배려해 꾹 짓눌러 참고 있다는 것 정도는 간단히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였다.
당황하지 않은 윤신이 깁스하지 않은 왼쪽 손을 세헌에게로 뻗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는 그 때문에 먼저 체온을 건네려던 거였다. 만져도 괜찮다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런 말들을 행동으로 대신할 셈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어째 이상했다. 가만히 응시할 뿐 어떤 행위로 되돌려 주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접촉을 피하는 눈치였다.
마음에도 없는 거부에는 익숙했다. 낯설어서 그러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감정이 실린 거절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강세헌은 반드시 제가 보낸 애정을 더한 크기로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형태가 획일화돼 있진 않지만 언제나 자신은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 나 다쳐서 화 많이 났구나.”
“그게 너한테 중요하긴 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나한테 선배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다른 거 잠깐 미루고 지금은 좀 안아 주면 안 돼요? 보고 싶었어요.”
후우, 깊이 심호흡한 세헌은 이런 순간에도 솔직하게 마음으로 부딪쳐 오는 윤신 덕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완고한 태도를 드러내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지친 기색으로 마른세수했다. 연이어 짧은 탄성 같은 숨을 한 번 더 내쉬더니 커다란 양손을 제 얼굴에서 끌어 내려 윤신을 예민한 시선으로 마주 봤다.
“내가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당연하죠.”
“그럼 넌. 나한테 넌 어떨 거 같은데.”
“당연히 선배한테 저 이상 중요한 건 없죠. 와, 이걸 내 입으로 말하게 하냐. 아무리 강세헌이라도.”
농담으로 이 얼어붙은 공기를 녹여 보려 했으나, 실패였다.
그가 야속하게도 칼같이 잘라 내 버린 탓이다.
“그래? 넌 말로만 떠들지 정작 머리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
“대체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사고 직후, 너는 내가 아니라 도이경 관장한테 연락을 했더군. 수술이 필요하니까 보호자로 와 달라고. 병원은 도이경과 접촉하고, 경찰은 펌 비서실과 접촉했어. 그 와중에? 난 뉴스로 네 소식을 들었다. 넌 이 상황이 이해가 돼? 난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 너 나 이해시킬 수 있겠어?”
이건 원망일까. 아니, 그거보단 덜 거북한 의문 제기였다. 혹은 불평일까. 그거보다는 더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을 터다. 뭐가 됐든, 한없이 아래로 침잠하는 듯한 무거운 음성의 대꾸에는 분명한 노여움이 실려 있었다.
거기까지 듣자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감이 좋은 윤신은 모를 수가 없어졌다.
도국의 공동 대표가 된 뒤로 ‘여기에서 더 바빠지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싶었던 강세헌의 일정은 그걸 너끈히 해냈다. 곁에서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지켜봐야 하는 입장으로선 자신이 짐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최선이었다. 제 인생에서 그를 배제한 게 결코, 정말이지 결단코 아니다. 오해를 풀어야 했다.
변명할 말이 있는 윤신은 바로 설득했다.
“선배 오늘 중요한 회의 있었잖아요.”
“……회의?”
“네. 외근 전에 스케줄 확인하고 나갔거든요. 오늘은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저녁을 같이 먹고 싶으면 나한테 물어봐야지 왜 그걸 일정표한테 물어.”
“그게, 딱 보니까 안 될 거 같아서…….”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판단해서 지레 단념하냐고. 내 스케줄이 무슨 상관이야. 나하고 밥 먹고 싶으면 먹자고 우겨야지. 바쁘다 그러면 그 정도도 못 해 주냐고 따졌어야지. 네가 포기하는 네 권리를 누가 찾아 주는데. 나는 네 거야. 잊었어?”
어쩌면.
대표실의 일정표를 확인하고 세헌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하던 찰나엔 잠시 그 사실을 잊었던 것도 같았다. 그의 앞길에 아주 작은 걸림돌이라도 돼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아무 대답하지 못하자, 세헌이 덧붙였다.
“정리하면. 내가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어서 네가 도로 한복판에서 피습당한 것도 말을 안 했다. 일하는 와중이라, 방해되니까.”
윤신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주시하던 세헌이 기막혀했다. 자신이 댄 합리적인 까닭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뭐랄까. 원하는 대답의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대꾸를 듣기라도 한 양,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설핏 찌푸려졌다.
“아, 방해. 그래 방해 같은 거 하면 안 되지. 나 출장 중에 너 죽기라도 하면 그것도 장례 끝나고 알려. 일하는 와중에 너 뒈졌다는 소식 들리면 업무에 방해되잖아. 안 그래?”
“바쁜 사람한테 어쩌자고 일일이 말해요. 저까지 어떻게 사소한 걸로 귀찮게 하냐고요. 작은 일로 칭얼거리기엔 변호사님이 너무 많은 걸 책임지셔야 하는 분이 됐어요.”
잠자코 들어 주다 일순 이를 악문 세헌이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매우, 매우, 매우 신경질적인 어투였다.
“사소한……!”
소리쳐 놓고 역으로 심란한 기색이 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말을 더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고 침대 주변부를 걷다가, 서로 가까이 있는 게 크게 도움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한 듯 달빛이 스며들어 오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가뜩이나 차가 저를 들이받았던 순간의 공포가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어 힘겨웠다. 몸도 마음도 다친 상태에서 제일 위로받고 싶었던 세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니 윤신도 슬슬 섭섭해졌다. 해서 일부러 그더러 보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달래 달라고 표현하는데도 세헌은 다가와 주지 않았다. 여전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의지가 전달됐다.
결국 풀이 죽은 윤신이 얇은 이불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힐끗 내려다본 왼손 약지에 그가 다시 끼워 놓은 건지 반지가 도로 잘 자리하고 있어 속으로 울컥했다. 이걸 보자 저 남자가 지금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를 잘 알 것도 같아 속상해졌다. 슬며시 고개를 들고 창가의 그를 훔쳐보니,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게 바로 드러났다.
“너 지금 뭘 잘했다고 삐진 얼굴이야.”
“그냥 사랑한다고 해도 저 똑똑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다 알아들어요.”
“설마 내 앞에서 지능 자랑하는 건가? 지능이 있으면 할 수가 없는 짓인데?”
“……저 사과할까요?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요?”
“그딴 거 하기만 해.”
“그럼 좀 오죠? 보시다시피 전 못 간단 말이에요.”
툭툭. 자유로운 한 손으로 침대를 가볍게 두드리자, 허벅지 양옆으로 팔을 뻗어 걸터앉은 창틀을 힘껏 붙잡은 세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벌렸던 거리를 다시 좁혀 침대 쪽으로 접근했다. 금세 지근거리에 도달한 그가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윤신의 보드라운 뺨을 한 손으로 잡아 저를 똑바로 쳐다보도록 고개의 위치를 고정해 주었다.
흔들리는 윤신의 동공이 기꺼이 그를 마주했다. 세헌은 지금 당장 시무룩해진 연인을 마음껏 달래 줄 수도 있었으나 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는 훨씬 담담해진 음성으로 윤신을 불렀다.
“도윤신.”
“네, 선배.”
“아직도 잘 모르는 거 같으니까 가르쳐 줄게. 넌 사소하지 않아.”
“…….”
“너의 아무것도 나한텐 사소하지가 않다고. 그러니까…….”
그는 말을 차마 끝맺지 못했다. 말줄임표 속에 얼마나 수많은 염려들이 숨어 있는 건지, 윤신은 선뜻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완고했던 무표정이 무너지자 그의 진짜 표정이 드러났다. 스스로의 감정에 명확한 확신이 깃든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미가 없었다. 이 고백은 당연하게도 윤신의 마음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 가장 깊숙하고 아늑한 자리에 고이 파묻혔다.
언제나 그랬듯 윤신은 세헌의 말 기저에 숨어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다른 어떤 것도 너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아주 작은 일들도 소중하다고, 그러니 이런 배려는 진짜로 저를 위한 게 아니라고. 서투르게 맞닿아 오는 그의 소리 없는 음성을 너무나도 간단히 깨닫게 됐다.
그가 동요한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세헌의 인생에서 가볍게 취급한 점이다.
이 남자가 너무 애틋해진 윤신은 고개를 그의 손바닥 방면으로 더 기울였다. 보다 많은 피부의 면적이 그와 닿게 되자, 큰 안정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많이 속상했어요? 제가 무서워할 때 같이 못 있어 줘서?”
이 질문에 세헌은 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윤신은 그가 때때로 침묵을 통해 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오만 가지 걱정을 다 했을 터다. 두렵고, 낯설고, 불안한 것들을 자꾸만 배워 가는 그가 자신의 애를 적잖이 태웠다. 가능하다면 모르게 하고 싶은데, 세헌이 저를 통해 그것들을 알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복잡한 심경이 일었다.
이 순간 윤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방금 전 채 끝내지 못한 말을 부드럽게 이어 갔다.
“내 일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넌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굴어도 좋아. 난 얼마든지 휘둘려 줄 거야. 네가 아프거나 슬플 때 내가 널 혼자 두게 만들지 마. 이거 경고 아니야.”
“그럼 협박이에요?”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
“그러니까 반드시 지켜 줬으면 좋겠어. 지금 심정 같아선 네 앞에서 무릎 꿇고 빌 수도 있을 거 같은 기분이야.”
부탁보단 명령이나 지시 쪽이 그와 더 잘 어울리는 명사였다. 몇 년째 사귀어 온 윤신조차 세헌이 누군가에게 부탁 같은 걸 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런 걸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서 줄곧 살아왔으니까. 제 누나와 관련된 일로 송 대표에게 했던 것마저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거래였으니 그가 저자세로 이렇게 나오는 일은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질 않아서 횡설수설하게 됐다.
“그럴게요. 하고 싶은 거 다 하자고 하고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선배한테 제일 먼저 말하고, 다 꼭 지킬 건데…… 부탁은 안 하시면 안 돼요?”
청유형으로 물어 놓고 나니 그거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윤신은 얼른 제 뺨에 얹힌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단단히 약속하듯 그의 왼손을 침대에 올린 뒤 그 위에 제 것을 얹었다. 서로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똑같은 자리에 위치한 다른 모양의 반지가 작은 마찰음을 내며 부대꼈다. 그 순간, 알겠다고 답하는 것처럼 세헌이 편안한 표정을 짓는 걸 보자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서로를 위로해야 할 타이밍 같아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나 이제 안아 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눈두덩 양쪽에 골고루 입을 맞춰 준 그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환자복 차림의 연인을 품에 조심스럽게 안았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꽉 껴안지도 못하고 뒤통수만 슬며시 당겨서 가슴팍에 기대게 해 주었다.
움직이면서 흩날린 터럭들에도 가볍게 키스한 세헌이 이거로는 모자라다는 양 고개를 틀어서 관자놀이와 뺨, 눈썹 위 등지에 이리저리 뽀뽀했다. 그러다 불시에 고개를 쓱 들어 올린 윤신 덕분에 두 촉촉한 입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하지만 여전히 모자라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윤신이 그의 입술 너머를 맛보려는 듯 혀끝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쑥 들어온 설첨을 조금 빨아 준 세헌이 턱을 슬쩍 틀어 뿌리치곤 고개를 엄정하게 가로저었다.
“안 돼. 그만. 꼬시지 마.”
“왜요?”
“넌 당분간 섹스하면 안 되니까.”
“해도 될 거 같은데……. 체위만 조심하면요. 그리고 선배가 거칠게만 삽입 안 하면…….”
“하면 안 되는 이유 너도 잘 알고 있네.”
“…….”
“아무리 도윤신이라도 죽을 뻔했으면 놀라는 게 당연해. 일단, 오늘 밤은 좀 더 자.”
남은 이야기는 차근차근 하자는 듯, 배려해 주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분간이라니.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윤신은 하루라도 빨리 완쾌해야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그에게 닿은 자리들을 문지르는 것으로 어리광부렸다.
“선배 때문에 깼어요. 그러니까 선배가 다시 재워 주세요.”
“그럴 거야. 손.”
“……제가 무슨 애예요?”
“애지, 그럼. 새파랗게 어린 게. 손.”
아이 취급이 영 싫지는 않은지 윤신이 자유로운 한 손을 어설프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세헌은 그대로 잡아당겨 제 목을 두르게 하나 싶더니, 이내 윤신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커다란 침상에 운신이 불편한 몸을 고이 누이고 의자를 꺼내 그 옆에 앉았다. 다친 부위가 다리와 허리인지라 정자세로 누울 수밖에 없는 윤신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곁눈질만 했다가, 가장 쉬운 응시 방법을 몇 번 강구해 보더니 이내 투덜댔다.
“왠지 고문당하는 기분이에요.”
픽 웃음을 터트린 세헌이 손을 뻗어 윤신의 머릿결 방향대로 앞머리를 치웠다. 금세 드러난 뽀얀 이마 위에 쪼옥,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입을 맞춰 주자 서서히 얼굴색이 달아오르는 모습이 즉물적이어서 귀여웠다. 필연적으로 살짝 수그러진 그의 상체는 윤신이 그의 넥타이를 슬며시 잡아당기는 바람에 더욱 아래로 기울어졌다.
분위기가 달콤하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물렸다. 야릇하게 혀를 넣는 대신 보드라운 살결을 차분히 음미하는 것처럼 입술을 겉으로 빨다가, 느린 호흡을 서로의 젖은 표피 위에 토해 냈다.
그는 좀 더 윤신의 안쪽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서서히 살갗을 분리했다. 안타까워진 윤신이 조르듯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자세를 바로 한 세헌이 강경하게 안 된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말을 돌렸다.
“혹시 저 다쳤다는 소식 듣고 막 엄청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하거나, 우왕좌왕하거나 그러진 않았죠?”
불현듯 세헌의 뇌리에 아까의 혼란하던 모든 순간들이 스쳤다. 매우 흥분했고, 애꿎은 탁 비서에게 화풀이했고, 잠시 남몰래 우왕좌왕했던 기억 속의 조각들을 되살리자 도윤신이 원하는 모든 걸 알아서 저질렀다는 생각에 기가 찼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찰나에 지었을 뿐, 얼른 안색에서 그런 기미를 거뒀다. 천연덕스러운 대답은 덤이었다.
“아주 의연하게 대처했어. 대단히 침착하게.”
“……뭐야, 진짜예요? 너무하네.”
“왜. 서운해?”
“솔직히 서운한데 오늘은 제가 그걸 티 낼 군번이 아니라서요. 며칠 뒤에 삐지려고요.”
피식 웃은 그가 윤신의 가슴팍을 노곤한 손길로 도닥이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자. 잘 자는 게 보고 싶어.”
“여기 얼마나 있을 건데요?”
“있을 수 있는 만큼.”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유난히 잿빛이었다. 세헌은 윤신의 시선이 그곳으로 닿지 않도록 좀 더 몸을 바짝 붙이고 눈꺼풀 위에 손을 올려 내리감을 수 있도록 도왔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 남자가 바라는 걸 간절히 들어주고 싶어진 윤신은 착하게 어둠 속으로 눈동자를 감췄다.
천천히, 편안하고 나른한 숨소리가 병실 안을 구석구석 채워 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침묵은 매일 삼키고 내뱉는 공기처럼 평온했다.
빈도가 잦지는 않지만 세헌은 기회만 되면 잠든 윤신의 모습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그런데 최근에는 영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느긋하게 이 모습을 지켜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그 공백의 시간 동안 도윤신은 한계도 없이 바빠지는 저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게 오늘의 일을 빚어냈으리라. 그러니 엄밀히 책임 소재를 가르자면 윤신은 그저 배려심이 있었고, 나쁜 건 자신이었다.
오뚝한 코끝에 다정하게 입 맞춘 그가 연인이 더 깊은 수면에 빠질 수 있도록 행동을 자제했다.
창을 타고 스며든 달빛이 두 사람을 은은하게 비췄다.
그때, 그의 휴대폰에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배후 찾았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목부터 내용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어 내린 세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화면을 거꾸로 덮어 협탁에 놓아두곤 다시 윤신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해는 아직 진짜 모습을 장막 속에 숨기고 있었다.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세헌은 몸을 일으켰다.
‘5시 5분 전…….’
어제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와 밤새도록 머무른 통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들이 꽤 됐다. 중요한 것들은 탁 비서를 통해 처리했으나 결재를 유보한 것들도 존재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다니. 스스로도 저질러 놓고 믿기지가 않았다. 뭐가 됐든 그걸 해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해야 할 듯했다. 사택에 잠시 들러 씻고 나갈 시간까지 고려하면 여기까지가 최대치였다. 도이경이 6시가 넘어 올 거라고 했으니 이 이상 머무를 순 없었다.
돌아서서 나가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아이처럼 곤히 잠든 윤신에게 입을 맞출까 갈등하다가, 건드리면 깰까 조심스러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체념한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삐걱.
소리를 최대한 죽여 내부에서 벗어난 그는 풀어 헤쳐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애매한 시간의 새벽녘이라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 안 보였다. 승강기를 향해 걷고 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마침 딱 그가 타려던 기계를 타고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도착 알림음과 함께 양문형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벗어나려던 인영이 세헌을 마주 봤다. 승강기에 탑승하려던 그도 정면의 여자를 보곤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의 방문객인 이경이 먼저 알은체했다.
“어, 강 대표님 아직…… 계셨네요?”
놀라워하는 표정 속에는 당혹감도 담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처럼 치명적일 정도로 바쁜 사람이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후배의 병실에서 시간을 죽인다는 건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병원에서 맞닥뜨렸을 때 일개 시니어가 다친 일에 대표가 직접 찾아와 병원장에 이사장까지 모두 소집해서 환자의 상태를 보게 하고, 또 병실부터 담당의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광경을 보며 과한 관심이다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는 둘의 사이가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며 끈끈해지고 진득해진 걸 잘 아는 그녀가 친한 선배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넘기길 바랐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여기에서 맞닥뜨린 건 확실히 수상쩍을 터다.
세헌은 이경이 미심스러워하는 기미를 선명하게 읽어 냈으면서도 초연하게 응수했다.
“6시 넘어서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으나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는 그를 보며 그녀도 아리송해했다.
“예, 그런데, 애들 봐줄 사람이 일찍 도착했어요. 시간이 조금 떠서……. 윤신이는요?”
“다시 잠든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지금 깨면 더는 못 자니까 시끄럽게 굴지 마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여기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마주쳤겠죠?”
“물론 그렇긴 한데요.”
“혹시 저한테 용건 있습니까?”
“……아뇨. 딱히.”
“잘됐군요.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럼.”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한 세헌이 이경을 지나쳤다. 의사를 묻고 취한 행동이긴 했으나 단순히 명분일 뿐, 결론적으로 그가 보인 태도는 대화 거부였다. 너무 능수능란했던 바람에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한 그녀는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려 그와 나눈 대화를 분석했다. 열심히 생각해 봐도 선뜻 답이 내려지지가 않았다. 이 시간까지 여기 남아 있는 세헌의 존재도 의아했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건 윤신의 잠귀가 둔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단정적인 충고였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가 없어진 이경이 급히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세헌을 말로 붙잡았다.
“저기, 강 대표님?”
옷소매를 정리하던 그가 시선을 슬쩍 들었다.
“뭐죠?”
그녀는 대단히 할 말이 많았다. 입 안에 단어들이 꽉 찬 듯한 느낌이었다. 궁금한 게 많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대체로, 아니 모조리 윤신에 대한 거였다.
그런데 막상 가는 그를 잡아 놓곤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다. 머리가 터지도록 궁금한 수 가지의 질문을 억지로 다시 상자 속에 욱여넣은 이경은 당장 세헌이 대답해 줄 수 있고, 그녀 역시 답을 들어도 괜찮을 한 가지에 대해서만 입에 담았다.
“그 사고 가해자 경찰이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따로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운전자가 단순히 윤신이에 대한 억하심정으로 벌인 일이 아닌 것 같다고요.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한다던데요.”
“글쎄요. 경찰이 조사 중이니까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펌 일…… 위험하진 않은 거죠? 이번 일 겪고 나니 걱정이 돼서요. 지난번 소설가 테러 때랑은 차원이 다른 상황이라 노파심이……. 누가 차로 들이받다니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잖아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무심하게 듣고만 있던 그의 안색이 순간 복잡다단한 기미를 띠었다.
그는 ‘위험하다는 핑계로 내게서 도윤신을 빼앗아 갈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라는 뜻의 어떤 응답을 하고 싶었다. 아울러 ‘오늘 일을 갚아 주는 모든 수고는 자신이 다 할 거’라는 주의도 주고 싶었다. 축약해 ‘도윤신은 내 거니까 신경 껐으면 한다.’라는 경고를 건네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었다.
하나 신중한 그는 떠오르는 걸 고스란히 내뱉는 대신 차분히 응수했다.
“드물긴 하지만 신변이 위험한 경우도 더러 있어서 장담 못 하겠네요. 그래서 보안 팀을 운영합니다. 필요할 경우 그런 테러들을 여론전으로 활용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대표님, 윤신이 대표님을 엄청 따르는 직원입니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실 건…….”
“그 도국에 도윤신을 억지로 들여보낸 건 도 관장이잖습니까.”
거기에 당신의 책임도 있다는 말에 이경은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세헌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래 붙들어 놓기가 어려워진 그녀는 상냥한 미소와 자기반성으로 화답했다.
“남 탓하는 게 원래 제일 쉬우니까요. 민망하네요.”
“할 말 또 남았습니까?”
“살펴 가세요. 또 뵐게요. 어제오늘 일 정말 고마웠습니다.”
눈인사로 답한 그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맞은편의 그녀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승강기의 문이 닫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양문형 문이 완전히 다시 합체되었을 때,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송미희 대표로부터 위로의 전화도 걸려 왔고, 그녀 편에 윤신을 위한 여러 특별한 배려들을 해 주겠다는 감사한 제안도 들었다. 가사 팀 팀장과 부팀장도 직접 자신을 찾아와서 유감이라는 인사를 전하고 한동안 머물다 갔다. 탁 비서도 밤늦게까지 계속 왔다 갔다 하며 고생했다. 그런데 왜 강세헌의 배려만 이렇게 껄끄럽게 마음에 남아 지워지질 않는 것일까.
다른 이도 아닌 ‘강세헌’이라서 정황이 있어도 묵혀 왔던 모든 의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세헌’이기에 모두 설명된다.
목구멍을 찌르는 가시처럼, 남자가 남기고 간 근사한 실루엣의 잔영이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오늘도 이경은 강렬한 호기심과 그걸 파헤치고 싶은 욕구를 애써 가슴 깊이 파묻었다.
“아냐. 의심하지 말자. 친한 선후배끼리 그럴 수 있어.”
이건 판도라의 상자다.
몇 년째 그녀가 불편하고 찜찜한 온갖 상상을 억누르며 끝내 열지는 않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