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상황을 대략적으로 매조진 윤신은 세헌의 집무실로 직행했다. 한데 그 안에 방의 주인은 없었다. 잔뜩 쌓여 있는 서류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서실을 지키고 있던 사무장에게 넌지시 묻자, 잘은 모르지만 위층으로 다시 가신 듯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대답을 들은 윤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은 가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지면 이 건물 제일 높은 곳으로 향했다.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은 펌 층층마다 따로 있어서 옥상은 좀처럼 사람이 방문하지 않았다. 그 정적이 편했다.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으니, 세헌이라면 필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승강기를 타고 제일 고층으로 올라온 그는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살폈다.
‘있다.’
다행히 멀리 난간에 팔을 걸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길쭉한 뒷모습이 보였다. 제 연인임을 확실히 확인하자마자 문부터 걸어 잠갔다.
“세헌 선배.”
인기척은 물론이고 제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세헌은 돌아보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그가 있는데도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윤신이 빠르게 그를 향해 뛰었다.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 뒤에서 세헌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뿌리칠지도 모르니 밀려나기 전에 보다 단단히 안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있어 주었다.
서로의 몸이 맞닿은 채로 수 초가 흘렀다. 세헌이 필터를 빨아들이며 들숨을 삼키고, 날숨을 내쉴 때마다 탄탄한 몸이 차분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윤신은 그를 껴안고 편안하게 하중을 기댄 상태에서 판판한 복부를 감싼 양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마치 세헌을 자신의 좁은 세계 안에 가두듯이 끌어안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너른 등의 근육들이 뺨에 닿으니, 이 자세가 매우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윤신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피는 꽃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언제 여긴 또 올라왔어요?”
나지막하게 꺼낸 말에도, 세헌은 별 대꾸가 없었다.
“나랑 말 섞기 싫어요?”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하나 앞의 마천루들만 보고 있던 세헌의 관심이 실은 등 뒤에서 종알거리는 제게만 쏠려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윤신은 제 얼굴을 그의 넓은 등에 문지르면서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목소리가 좀 더 분명해졌다.
“CCTV 원본은 통제실 가서 제가 직접 확보했어요. 앞부분은 잘라서 넘겨야 할 것 같아서 추후 제출하겠다고 했고요. 선배 증언이 꼭 필요한데, 안 도와주시…… 겠죠?”
후우, 깊은숨을 내쉰 세헌의 어깨가 넘실거리는 낮은 파도처럼 한번 들썩였다.
아까 전 위기 상황에선 본능적으로 움직였지만, 정리된 마당에 그렇게까지 도와주기 싫은 모양이다. 기대도 안 했다.
“아무튼 일단 그분은 한나절 정도는 서에 계시게 하려고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뱉어 낸 세헌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고는 난간에 올려 둔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그가 새 담배를 태우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멈춘 윤신이 아까 일이 어떻게 진척될 건지 이어서 상황 보고 하려 말문을 뗐다. 그런데 돌연 세헌이 제 깍지 낀 손을 풀어내는 바람에 좌절됐다.
왠지 분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그의 두 팔과 상체 틈으로 양손을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손 인사 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그러자 세헌이 이번에도 제 손을 뿌리쳤다.
“와…… 진짜 너무하신, 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계속 튕기는 그에게 한 마디를 하려는데 갑자기 세헌이 윤신의 늘씬한 두 팔을 끌어당겼다. 곧이어 난간과 본인의 몸 사이 아주 좁은 틈새로 윤신을 끼우듯이 욱여넣곤, 서로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후, 담배 연기를 얼굴로 직통으로 맞게 된 윤신이 세헌의 어깨를 내려쳤다.
“눈 매워요.”
그러자 그가 얼굴을 기울여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다시 입에 필터를 물었다.
“저도 해도 돼요?”
“…….”
“뭐라고 말 좀 해요. 목소리 듣고 싶어요.”
세헌은 대꾸 대신 한쪽 뺨을 내밀었다. 제 눈앞에 있는 뺨에 뽀뽀한 윤신이 와락, 그를 마주 껴안았다.
이미 빠듯하게 닿아 있는 서로의 몸을 더 바짝 마찰했다. 그 상태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윤신이 착하게 그가 먼저 입을 떼 주길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귓전에 고대하던 음성이 들려왔다.
“윤신아.”
“아,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다. 네, 뭐든 말해요.”
“나 공동 대표직 제안받았어.”
곧바로 제 상체를 뒤로 늘어뜨리듯 젖힌 윤신이 세헌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가 조금 전처럼 다시 얼굴을 기울여 짤막하게 입 맞춰 왔다. 알싸한 담배 냄새를 제게 새기려는 듯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하곤 장초를 난간에 비벼 껐다.
얼떨떨하게 그런 그를 지켜보다 되물었다.
“언제요? 송 대표님이 제안하셨어요? 조건은요? 엄청 파격적인 거 아니에요?”
“며칠 됐어. 미희 선배 제안 맞고, 구두였고, 조건은 아직이고, 꽤 파격적이지. 추진된다면 정말 나한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로 한동안 업계가 시끄러워질 거야.”
“그 얘길 왜 이제……. 이런 중요한 얘기 할 타이밍 정도는 있었잖아요!”
세헌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정말 있었어?”
“그저께처럼 잠깐 밤에 시간 같이 보낼 때나. 일요일 새벽에, 나란히 깼을 때나…….”
지그시 제 쪽을 보는 그의 시선에 말로 형용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묻어났다. 횟수로 따져도, 기한으로 따져도 그가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 훨씬 많고 잦았다. 그러나 여기선 그걸 주장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납득할 만큼 서로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미 결정된 일이지만 그럼에도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게 룰이었는데 이번에 자신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반칙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요?”
“이거 이상하지 않아?”
“업계 뒤집어질 만한 얘기긴 해도 그건 이 바닥이 기수 사회에 보수적이어서 그런 거고. 다들 속으로 납득은 할걸요. 저도 충격이긴 하지만 송 대표님 결정이 이해는 되거든요.”
강세헌 같은 꼿꼿하고 똑똑한 사람이 옆에 있어 주면 든든한 느낌이 무엇인지, 이 세상 누구보다 윤신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거 말고.”
“아니면 뭐, 본인 미래를 저랑 상의하는 일이 아직도 어색하세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 명제에는 반만 수긍했다.
“그것도 썩 자연스럽지는 않은데, 익숙해졌어.”
“그럼…….”
“내 인생이 자꾸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 거 말이야. 그동안 다른 사람 눈에 눈물 내는 짓을 많이 해서, 난 그런 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윤신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가 어떤 의미로 하는 이야기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였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못 주고 공기처럼 부유하던 삶이 언젠가부터 자꾸 어딘가에 깊숙하게 박혀 양분을 공급하는 형태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터다. 그리고 그가 그렇다고 첨언하진 않았지만, 그 시발점은 자신이 끊은 게 명백했다.
그간 강세헌에게 삶이란 버티는 거였다. 싸우고, 이겨서, 살아남는 총체적 과정이었다. 밀리면 끝인 전투였을 것이고, 지면 도태되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지킬 게 생겼다. 뭔가를 보호하는 감각에 순응하면서, 잃어버린다는 공포를 함께 맞닥뜨리게 되는 바람에 지난 며칠간 자신을 더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짐작에 다다르자, 이번엔 정말이지 두 사람의 타이밍이 나빴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쓰윽. 세헌의 딱딱한 어깻죽지부터 가슴팍까지를 양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린 윤신이 그와 또렷하게 시선을 겹쳤다.
“원래 뿌리 깊은 나무가 오래가요. 그건 아시죠.”
“너 많이 컸다. 날 다 가르치는 거 보면.”
“선밴 그 제안 수락하고 싶은가 봐요.”
“아마도.”
“그 얘기 나랑 의논하고 결정하고 싶었는데 내가 없었고?”
“그건 확실히.”
그래서 표정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양이다. 본인 삶의 이정표를 적을 때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느꼈는데 자꾸 옆자리가 비어 있어 초조했던 게 분명했다.
그는 화가 났는데, 모순적이게도 강세헌이 본인의 삶에 대해 잔뜩 고민한 흔적 위에 자신의 향취가 가득하다는 사실 때문에 윤신은 행복해졌다.
“청혼도 내가 먼저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선수 쳐서 인터셉트를 하시면 됩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걸 했다고.”
윤신이 황망해하며 혀를 찼다.
“지금 선배가 한 게 바로 청혼이거든요? 길 가는 사람 100명한테 물어보세요. 100명 다 제 말에 동의하지. 선배 미래에 내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 의견 수렴이 필요한 거고.”
다만 정작 당사자인 그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양 눈매를 날카롭게 접었다.
“너 많이 컸다, 아마도, 그건 확실히, 이 중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지난 몇 년을 그와 동고동락했더니, 이제 정신없이 끝까지 몰아붙였다가 자신이 손 뻗을 만하면 한발 빼는 강세헌을 대하는 덴 이쪽도 도가 텄다.
“변태. 사디스트. 겁쟁이.”
“도윤신 변호사,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변태, 사디스트, 겁쟁이. 이 중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본인이 그거라고 인정하시는 거예요?”
고스란히 했던 말을 돌려받고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세헌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윤신의 콧잔등에 제 날렵한 콧대를 문질렀다.
오래 사귀어 서로를 잘 안다는 건 바로 이런 데서 태가 났다. 두 사람의 고개가 가장 익숙한 입맞춤 자세를 찾아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솜사탕처럼 가볍게 몇 번이고 얇고 민감한 표피가 마찰했다.
윤신의 입술 사이에 제 아랫입술을 한 번, 윗입술을 한 번 순차적으로 끼워 넣고 문지르던 세헌이 손을 뒤로 뻗었다. 소중한 걸 품에 안듯이 윤신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연이어 바람에 어설피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에도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얌전히 서서 그가 주는 부드러운 촉감을 누리던 윤신이 그의 상박을 밀어냈다. 세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양이가 눈 키스 해 주듯 제 눈을 빤히 응시하며 눈길을 하나로 맞춰 왔다.
“이젠 나도 선배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면서요. 걱정 마세요. 딱 달라붙어 있을 거니까.”
“난 지금보다 더 바쁘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럴 터다. 만약 미희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면, 그때부턴 그의 삶에 도윤신 말고도 지킬 게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법무 법인인 이상 일반 회사의 경영진과 같은 권리로 로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모든 변호사들의 대표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세헌을 좀 더 방어적이고 그런 한편 공격적으로 만들게 될 게 명백했다.
“지금보다도 더, 외부에 널 내놓을 수 없고.”
그건 그를 선택했던 그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못 해 주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해 줄 수 있는 걸 말해 보세요.”
하얀 눈자위를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고민하던 세헌이, 장고 끝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널 발견한 거 후회 안 할게.”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선율처럼 맴돌았다.
그는 보다 분명하게 덧붙였다.
“네가 날 선택한 걸 후회하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적막한 밤의 바다처럼 서로를 감싼 공기가 눅눅하게 내려앉았다.
그에게 의외로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 이런 형태로 그걸 확인시켜 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윤신의 경직된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썩거렸다. 이윽고 떨리는 투명한 눈동자가 오직 세헌을 직시했다. 꼭 서로의 그림자 끝마저 닿은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세헌의 앞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설정한 이 테두리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 충동에 휩싸였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의지는 소리가 되어 나와 주지 않았다. 그걸 잘 안다는 양, 그가 잠긴 음성으로 부추겼다.
“너도 사랑한다고 얘기해 줘야지. 평소엔 잘만 하면서.”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요. 매번 뭘 사 줄까, 그러는 사람이니까. 선배 요즘 100점 자주 맞네요.”
“넌 건방지게 계속 나를 채점하고.”
그가 여느 때의 세헌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윤신이 부드럽게 웃었다.
윤신은 세헌의 입술에 제 것을 맞물렸다. 잠시간 그렇게 농밀하게 혀를 섞는 대신 살갗을 겹치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떼어 냈다. 뒤이어 주머니 안에 구깃하게 접어 둔 작은 봉투를 꺼냈다. 주둥이를 열어 안에 있는 걸 손바닥에 떨어뜨리자, 백금색 반지 두 개가 보드라운 살결 위에 툭 떨어졌다.
사실 이런 식으로 주고 싶진 않았다. 좀 더 그럴싸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다,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예약해 두었다. 진짜로 예식 같은 건 못 할 테니까, 두 사람이 기억하는 가장 근사한 그림이 배경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막상 여기 서 있자니. 그와 만나게 된 이 펌의 황량한 사막 같은 옥상이 그다지 나쁘진 않은 선택지 같았다. 잔뜩 다투고 올라와, 세헌에게 약속을 받아 내며 건네주게 되는 쪽이 훨씬 두 사람에겐 어울리는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커플링이에요. 앞으론 매일 끼고 다니세요. 처음만 어렵지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이거 하나 때문에 별…… 대체 그 커플링이 뭘 증명해 주길래 2주나 그 공 들여 만드느라 날 버려뒀는데. 대충 파는 걸 살 순 없었나?”
〈내가 네 거라는 요건 사실.〉
언젠가 세헌이 제게 반지를 끼워 주며 했던 말을, 이제는 자신이 돌려줄 수 있어 기뻤다.
“우리가 서로의 거라는 요건 사실요. 이제 더 이상 선배가 외로울 일은 없는 거죠.”
물끄러미 윤신을 보던 세헌이 부드럽게 웃었다. 말려 올라간 입매가 유려했다.
“그 ‘우리’는 마음에 든다.”
뒤이어 그는 바로 손을 뻗었다. 실랑이하다 결국은 마지막 소원을 들먹여야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려 기분이 묘했다.
그는 본인이 먼저 끼워 주려는 듯 둘 중 더 둘레가 좁은 걸 골라 갔다. 그러고는 살짝 뒤로 물러나 윤신의 왼손을 붙잡았다. 이미 몇 년 전 세헌이 선물한 심플한 반지 위에 예의 바르게 입을 맞추고는 그걸 빼내 윤신의 입술 틈에 끼웠다.
착하게 그걸 물고 있는 사이, 링의 안쪽에 새겨진 본인의 이니셜을 확인한 그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이윽고 세헌이 길게 뻗은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표면이 반질반질한 고급스러운 플래티넘 링이 딱 맞았다. 싱글거리며 그 위를 내려다보던 윤신은 제 입에 물고 있던 반지를 주머니에 보호하듯이 넣었다.
서로의 마음만 알면 됐지, 닭살 돋게 무슨 반지 같은 걸 나눠 끼냐면서 산통 다 깰 줄 알았던 세헌이 그러지 않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설핏 웃고는 그를 보는데, 별안간 세헌이 이런 말을 꺼냈다.
“내 거에도 이니셜 새겼어?”
“당연히 새겼죠.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요. 밖에 나가서 쓸데없는 짓 하면 침실 벽에 묻히는 게 저뿐만은 아닐 거라는 뜻입니다. 유의하세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오늘 그는 간지러운 일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윤신은 그의 손을 일단 관찰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뼈가 도드라진 손은 감탄스러울 만큼 말끔했다. 종종 그의 손을 잡을 때 그러듯 바짝 깎인 손톱을 매만지고는 아주 신중한 태도로 그의 약지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뾰족한 부분을 위로 해서 천천히 끼우자 다행히 잘 들어갔다. 그런데, 끝까지 지퍼를 올리듯 링을 채워 놓고 손을 떼어 낸 순간. 뒷부분이 휙, 돌아갔다. 어느 틈에 뾰족한 돌기 쪽이 세헌의 약지 옆면을 덮은 채였다.
물끄러미 그 위를 내려다보는 윤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세헌의 입가는 정반대로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윤신을 힘껏 끌어안고 귓바퀴에 정신없이 키스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안해진 윤신이 변명했다.
“작은 건 못 늘려도 큰 건 줄일 수 있대서…… 분명히 잘 때 재긴 쟀어요. 그런데 손대중으로 대니까 그게 맞겠냐고요.”
“줄자 같은 걸 활용한다는 개념은 네 머릿속에 없는 거야?”
“그럼 선배가 깨잖아요.”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미세하게 몸을 바르작거리던 윤신이 모든 운동 에너지 발산을 멈추고 멈칫했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완연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 뜨거운 문장은, 오늘 새벽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 세헌에게 속삭였던 말이었다.
고로, 그때 그가 깨어 있었다는 얘기다.
그 말을 할 때 기상한 상태였다면 옆에 쪼그려 앉아 본인 얼굴을 관찰하는 집요한 시선을 죄다 느끼고 있었단 뜻도 됐다. 윤신의 얼굴이 석양에 반사된 것처럼 빨개졌다.
이래서 새벽에 편지 쓰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부스럭거리는데 어떻게 안 깨. 그리고 모르는 거 같아 알려 주는데, 너 일어나면 나도 무조건 같이 깨. 어떻게 해도 깨니까 좀 더 편안하게 움직여도 돼.”
“안 깬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런 적 없어. 그냥 눈 감고 너 안고 있었던 거지.”
“왜요?”
“내가 잠든 줄 알고 네가 귀여운 짓 하니까.”
지난 몇 년 동안의 경험치를 돌이켜 보려 했으나, 너무 개수가 많아 통계가 안 나왔다. 눈 감은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만지작거린 적도 있었고, 뺨에 괜히 제 뺨을 문지른 적도 많았다. 아침이라 발기한 성기를 아슬아슬하게 손끝으로 건드리며 놀았던 적도 숱했고,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 향을 맡거나, 바짝 깎은 손가락 끝에 입 맞춘 적도 잦았다.
윤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떻게 그걸, 몇 년간 한 번을 말 안 해요? 인간이 이렇게 지독해도 되는 거예요?”
제 행동들을 모두 느끼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장 어디에 숨고 싶었다. 그런데 세헌이 자신을 결박하듯 막아서고 있어 여의치가 않았다.
창피한 동시에 조금 풀이 죽었다. 자신만 그의 예민함에 예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기뻤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난 선배가 내 몸의 감촉이랑 소리만 받아들이는 변태라고 생각해서 좋았는데…… 제가 내는 기척이나 소음도 예외는 아닌 거네요.”
계속 윤신을 놀리며 즐거워하는 기색이던 그가 별안간 미간을 흠씬 찌푸렸다.
“내가 무슨 변온 동물인 줄 알아? 너 가끔 진짜 제정신 아니야.”
“저 왔다 갔다 하고 그런 거 거슬리면 앞으로 침대는 따로 쓸까요?”
“헛소리하지 말고. 잠은 무조건 내 옆에 붙어서 자.”
“바로 깬다면서.”
“깼을 때 네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돼. 네 소음은 예외 맞아.”
꾸욱, 제 턱으로 윤신의 정수리를 누른 세헌이 난간을 등지고 섰다. 그의 애정 표현에 기분이 좋아져 픽 웃은 윤신이 그 옆에 기대어 같은 곳을 보면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노을이 져 가는 하늘을 배경색으로 해서 그 위에 이 손을 그려 냈다고 생각하니 꽤 운치 있었다.
주변의 마천루들이 대강 하객이라고 치고, 구름 낀 주황빛 하늘이 대충 식장이라고 치고, 이 주변을 감싼 공기와 바람들이 결혼 행진곡을 불렀다 치고, 주례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그걸 보며 여러 가지 즐거운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입을 다시 열었다.
“플래티넘요. 심박 조정기에도 이걸 쓴대요. 체내에 매식해도 괜찮은 물질인 거죠. 알레르기도 없다고 하고요. 안전한 거니까 절대 빼시면 안 돼요.”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세헌이 나지막하게 혼잣말하듯 응답했다.
“나한테 끼워 준 걸 보면, 네 반지는 목에 걸 생각일 거고.”
역시나, 그는 자신을 잘 읽었다.
디자인이 다르긴 하지만 백금색 깔끔한 링에 다이아를 박아 넣었다는 큰 틀의 결은 같았다. 아울러 두 개를 겹치면 레이어드한 하나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잠시 빼 둔 반지를 하필이면 누군가 발견해 한데 겹쳐 볼 가능성 같은 게 희박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 만에 하나조차 조심해야 하는 게 그들의 사이였다. 더 오래, 안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몸을 사려 나쁠 건 없었다.
“네. 전 출근 안 하는 날에만 손에 끼려고요. 그래도 선밴 매일 끼고 다녀야 돼요.”
“너도 그냥 하고 다녀.”
세헌은 가끔 이런 면에서 무모했다.
“그러다 누가 눈치라도 채면요.”
“받아들여야지. 감기 걸리는 것처럼.”[4]
“…….”
“가뜩이나 못 하는 거 많은데 그거까지 숨기게 하긴 싫다.”
그와의 공통분모였던 책 속 문구를 떠올린 윤신이 미소 지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제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마주 웃어 주었다. 매끄럽게 말려 올라간 세헌의 입가에, 다시금 매료됐다.
이 얼굴. 윤신은 이걸 오직 자신만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았다. 이런 행복을 앞으로도 누리고 싶었다. 세헌이 그 마음 또한 읽은 것처럼 윤신의 손등을 끌어 올려 그 위에 다시 진득하게 입 맞춰 주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으로 시작하는 어떤 대단한 약속이 없어도, 이 관계가 법적 구속력을 보장받지 못해도,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줘도, 이거면 충분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의 삶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였다. 세헌이 공동 대표가 되고, 자신이 다른 어떤 것이 된대도. 그대로이리라.
그들은 이렇게 또 내려가서 하던 일을 마무리할 터다. 강세헌은 2주 동안 농축된 자기혐오와 질투심으로 오늘 하루를 내내 낭비했으니 주말까지 집에서 업무를 연장할 게 뻔했다. 자신도 아까의 사고를 마저 수습해야 하니 상황은 비슷했다.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같이 일어나고. 평범한 일상의 반복을 하게 될 것이다.
윤신이 또다시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는데, 그 짧은 외도조차 참을 수 없다는 양 세헌이 손을 뻗었다. 그는 윤신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반 바퀴 굴리듯이 당겨 온 뒤, 깨끗한 얼굴을 마주 본 채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여 약속의 증표라는 양 키스하려는 순간, 윤신이 쓱, 왼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자기라고 불러 봐요. 그럼 키스하게 해 줄게요.”
세헌은 바로 반문했다.
“내가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말라 그랬지. 좀 더 제대로 된 조건을 걸어.”
“이 와중에, 이런 순간에도. 요컨대 오늘이 우리 기념일인 건데!”
“이건 어때. 오늘 밤 섹스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기. 그럼 불러 주지.”
그건 원래 하늘이 두 쪽 나도 제 좆대로 하면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듯 윤신이 세헌을 힐난하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손바닥에 닿은 입술을 좀 더 앞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턱, 손등이 입술에 닿자 더 말할 수가 없어진 윤신이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뜬 채 보다 편안한 방향으로 턱을 기울였다.
손을 가운데 두고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쑤실 듯 혀로 자극하기 시작한 세헌의 움직임이 야릇해졌다. 당황한 윤신이 손을 쑥 아래로 빼냈다. 그러자 밀어붙이고 있던 그의 혀끝과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읏, 저 아직 마지막 소원 안 썼어요. 그거 쓸 거예요.”
“그걸 이렇게 간단한 거로 쓰고도 괜찮겠어?”
윤신은 하나를 배우면 최소한 세 개쯤 할 정도로는 영민했다. 이제 세헌의 방치에 배상을 청구하는 만족스러운 협상 방법을 습득했으니, 잘 배워서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내버려 둘 때 적재적소에 써먹으면 되는 일이다.
“금세 선배가 바쁜 시즌이 또 오거든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세헌을 주시했다.
그가 그런 윤신이 제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 같잖아하는 시선으로 마주 응시했다.
곧 나른한 어투로 속삭이듯 이렇게 대꾸했다.
“입 벌려, 자기야.”
헉. 일순 돌이 된 윤신의 얼굴이 타들어 갈 듯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바로 해 주리라곤 짐작 못 했다. 성격 나쁜 강세헌이 종종 그러듯 몇 번 제 애간장을 녹이다 하리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애가 닳았다. 기계처럼 다시 듣기 같은 걸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놀라느라 반 박자 늦게 반사 반응을 보이게 됐다. 느릿하게 열린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감탄사들이 새어 나왔다.
“와, 미쳤어! 강세헌 하란다고 진짜, 웁!”
바로 그 순간, 시끄럽다는 듯 입술을 겹친 세헌이 윤신의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황혼의 무드가 가득한 자리에서, 달싹거리는 살갗 사이로 진입한 살덩이가 질퍽한 소리를 내며 겹쳐졌다.
“읏, 으응…….”
치열을 훑듯이 스쳐 지나간 그의 혀가 윤신의 것에 맞물렸다. 자연히 격했던 반응이 점점 사그라졌다.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겹쳤다가, 또 금세 속도감을 주면서 맞물리는 혀의 움직임이 농염했다. 혀뿌리까지 삼킬 것처럼 깊이 파고들어 엉켜 대며 능숙하게 윤신을 몰아가는 세헌의 혀끝에마저 독점욕이 묻어났다. 마른 등을 끌어안은 손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검불처럼 연신 달싹거렸다.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 밀도도 함께 높아져 갔다. 농밀하게 상대방의 혀에 열중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점점 더 붉어져 가는 저녁노을이 나부끼듯이 내려앉았다.
오늘따라 그의 혀끝도, 타액도, 모두 달았다. 세헌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두 손을 어깨 너머로 넘기듯 세헌을 끌어안은 윤신이 그에게 빠듯하게 매달렸다.
세헌의 결 좋은 머리카락 사이에 끼워 넣은 왼손 측면에서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그런 윤신의 등을 부축하듯 끌어안은 그의 왼손 안쪽에서도 같은 광채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