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침실로 들어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윤신의 발걸음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는 세헌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가선, 곁에 소리 죽여 쪼그려 앉았다. 더 가까이 가 닿고 싶지만, 침구가 들썩거리면 곤히 잠든 이를 깨우게 될까 봐 어쩔 수가 없었다.
제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거였다. 이렇게라도 이 남자를 미리 봐 둬야 오늘 하루를 용감하게 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신은 차분히 숨을 내쉬며 수마에 사로잡힌 세헌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달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했으나, 그래도 가까이에 있으면 미세한 표정 변화가 들여다보일 정도는 돼 다행이었다.
‘잘 자네.’
언젠가 세헌이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뭐 하긴. 무슨 꿈 꾸나, 잠은 안 설치고 잘 자나. 가만히 보는 거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강세헌이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었던 건지 잘 알았다.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 사실을 인지했던 몇 년 전 그 어느 날,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이미 빠진 뒤라는 걸 통렬하게 깨달았다. 재미있는 건 벗어날 생각이 그때도, 지금도 전혀 없다는 점이다.
‘조물주가 밤새워서 만들었나.’
옆모습의 곡선을 따라 눈 운동을 하던 윤신은 서서히 밑으로 시선을 끌어 내렸다. 긴 목 위에 유난히 도드라진 울대뼈를 지나 더 내려가자, 그의 단단한 어깨가 보였다. 상처가 가득했다. 새로 생긴 것도 있었고, 오래돼서 많이 아문 것도 있었다. 모두 자신이 통증을 견디며 긁어 댄 훈장들이었다. 세헌의 몸에 매달려 잔뜩 헤집어 댄 등 쪽은 훨씬 더하리라.
늘 섬세하게 끝까지 채우는 단추와, 그의 상반신을 덮은 드레스 셔츠 아래 이런 저속한 흔적들이 가득하다는 걸 누가 상상할까.
약이라도 발라 주고 싶지만, 세헌은 곁에 누운 도윤신의 살결이 아닌 다른 게 몸에 닿으면 득달같이 깼다. 그뿐만 아니라 몹시 조심스레 방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최저 데시벨의 진동 소리에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가정부 아주머니의 발걸음 소리나 관리실에서 걸려 오는 월패드의 아주 작은 알람에도 모두 민감하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그저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그런 건 줄 알았다. 종종 평균 이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강세헌은 그런 게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 단순히 잠귀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깊은 잠을 들지 못해서 그런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늘 긴장하고 있거나, 어쩌면 가장 개인적인 공간마저도 그에게는 편치가 않거나. 어느 쪽이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자신이 껴안고 함께 잠들면 그래도 그럭저럭 순하게 새벽까지 안 깨고 잘 버틴다는 거였다. 해서 웬만하면 윤신은 세헌보다 단 1분이라도 더 늦게 일어나려고 노력했다. 그걸 요사이 계속 못 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까지만 바쁠게요.’
일부러 새벽부터 출근하는 건 낮에 짬을 내 일산에 있는 의뢰인의 공방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기에 제 개인 시간을 쓰는 거였다.
어젯밤 직접 디자인한 반지가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커플들처럼 단순히 커플링을 나눠 낀다는 개념으로 이 행위를 해석해선 안 됐다. 제 상대는 강세헌이었다. 이 연애는 강세헌이 도윤신을 전방위로 구속하는 행위였고, 그 반대로는 아직 그가 허락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고로, 이는 난공불락이었던 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불편하게 쪼그려 앉은 윤신은 무릎을 더 좁게 모았다. 온갖 생각이 뇌리에 가득 찼다.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잠자리가 평안한 적 없었을 그가, 이렇게 얌전히 잠든 무방비한 모습이 애틋했다. 제게 침입을 허락한 이 사적인 공간에서 그가 누리는 안온한 생활의 일부가 너무나도 아깝고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두려움이고,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르는 그의 순간순간이 다 빈틈없이 제 것이었으면 좋겠다.
강세헌은 무슨 꿈을 꿀까.
왜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내 꿈 꿔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어 속삭이듯 묻는 순간, 세헌이 몸을 모로 틀어 뒤척였다. 그러고는 꼭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그가 잠결에 자세를 고쳐 제 쪽을 봐 준 건 좋았다. 풍성한 속눈썹과 희고 깨끗한 피부, 미끈한 눈두덩이나 날카롭게 뻗은 콧대 같은 것들이 잘 보였다. 옆으로 누우면서 음영이 두드러진 얼굴이 아름다웠다. 다만, 닭살 돋는다는 듯 순식간에 좁아진 양미간이 거슬렸다.
산통 깨는 재주는 좀 없었어도 좋으련만.
울컥한 윤신은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찌푸린 부위를 다리미로 펴 주듯이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힘을 주면 깰까 봐 몇 번 어설프게 그러자 다행히 느릿하게 미간이 다시 펴졌다.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은 무릎에 두 팔을 다시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그를 직시했다.
계속 탐색하듯 주시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푹 자요.”
이번엔 세헌도 미간을 구기지 않았다.
고개를 좌로 했다가, 우로 했다가 한참을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관찰하던 윤신은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혹 문 닫는 소리가 잠든 그를 언짢게 만들까 봐 아주 미세한 틈을 남기고 열어 두었다. 벌어진 좁은 틈새로 윤신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삐릭.
꽤 아득하리만치 먼 곳에서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자동 반사적으로 슬그머니 떠진 세헌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매에는 느른한 잠기운이 스민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도리어 또렷하고 청명했다.
사실 그는 이미 윤신이 제 품에 안겨 있다가 일어나 씻으러 들어갔을 때부터 깨 있었다. 이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든 윤신의 몸을 힘껏 끌어안은 뒤 하루를 시작하는 게 습관이 돼서, 부들부들한 살결의 촉감이 사라져 버리면 바로 정신이 들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세헌의 상체에서 시트가 스르륵 내려갔다. 반라인 그의 상반신 군데군데에 손톱을 세워 긁어 댄 상처가 만연했다. 마른세수한 그의 눈길이 비어 있는 옆자리로 향했다.
이따금 도윤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선배 잠들어 있을 땐 제가 지켜 줄게요.〉
“옆에나 잘 붙어 있을 것이지.”
탁, 푹신한 베개를 침대 밑으로 내던져 버리는 그의 손길에 신경질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제기랄, 반지를 남극에서 빙하라도 녹여 만들어 오는 건가?”
2주째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의 사정거리 내에서 통제되던 도윤신이 몰래 외부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말없이 들락날락한 것도 벌써 2주째였다. 어디까지 자신을 시험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인내심 없는 그로선 이게 최대치였다. 윤신의 설레고 벅차 하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버텨 주고는 있지만 슬슬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아무나 툭, 건드리면 폭발할 지경이다.
끝내 세헌은 하루의 기분을 서막부터 가열히 망친 채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 *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세헌의 안색이 떼꾼했다.
자연히 비서실 내부가 폭풍 전야처럼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평소 며칠을 꼬박 새워도 별 타격 없을 만큼 가공할 체력의 소유자라는 걸 비서실 직원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오늘 유난히 세헌의 컨디션이 저조하다는 걸 인지한 그들이 일부러 회의 전 프로젝트 팀원들에게도 그의 상태에 대해 미리 경고해 둔 차였다.
다행스럽게도 선수 쳐 경고장을 날린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았다. 세헌의 뒤를 이어 회의실을 연달아 빠져나오는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한 기미가 가득했다.
팀원들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향해 걸어온 세헌을, 매우 긴장하고 있던 탁 비서가 빠르게 앞질렀다. 그렇게 집무실 문을 열고 기다리는데, 내부로 들어서려던 그가 별안간 비어 있는 윤신의 사무실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사나운 눈매엔 이런 글자들이 쓰였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말없이 불 꺼진 공간을 쳐다보는 세헌에게, 탁 비서가 넌지시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한테 말씀을 하시면…….”
“도윤신 또 어디 갔어. 설마 또 거기야?”
“오늘은 점심시간 이용해서 다녀오시겠다고 했어요.”
쌀쌀맞게 대꾸하는 세헌의 말투가 유독 신랄했다.
“아아, 이젠 퇴근하고 가는 게 아니라 업무 시간에. 대놓고.”
“그…… 일부러 일찍 나오셔서 처리하실 일 다 하셨고요, 서류에 서명도 다 해 주셨고…… 업무에 지장 없이 움직이시는 거예요. 마침 좀 전에 펌 도착하셨다고 하거든요.”
이래서 일찍 나간 거였군.
꽉, 옆면의 파티션을 쥐는 세헌의 손등에 핏줄이 바짝 섰다. 스트레스가 혈당 오르듯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아서 당장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 갈겨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 역전이 싫었다. 자신이 일에 매몰돼 한 달이나 제대로 윤신을 만지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초조함, 조바심, 불안, 안달.
그리고 약간의 의심.
도대체 도윤신은 이것들을 어떻게 견뎠던 건지 감조차 안 왔다. 아무리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했다지만 어떻게 단 한 마디도 보채지 않고 이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을 참아 넘겼는지도 말이다.
애정의 밀도 차이인가?
아니면 내 쪽이 강박 상태인가?
가능성은 비등비등해 보였다.
이를 간 세헌이 파티션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집무실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탁 비서가 음성을 낮춰 세헌에게만 속삭이듯이 덧붙였다.
“조금 전에 차량 주차장 통과했다고 알림 왔어요. 곧 올라오실 거예요.”
탁 비서를 쳐다보는 세헌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거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매서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돌아섰다. 일분일초도 참지 못하겠다는 양 승강기 방향으로 걸어가는 세헌의 뒷모습에 아래부터 들끓는 분노가 설핏 비쳤다.
따각. 따각.
그가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는 복도에 낮은 구두 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중앙 로비로 향하는 모퉁이에 다다르자, 때마침 승강기에서 내린 윤신이 작은 서류 봉투를 품에 꼭 안으면서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세헌을 발견하곤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공손하게 꾸벅 인사했다. 그러고는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모양새로 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였다.
고요한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세헌은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윤신을 직시했다. 그 시선을 의아해하던 윤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거의 동시에 서로의 유려한 입술이 벌어졌다.
“왜 여기 나와 계세요?”
“너 뭐 하는 새끼야.”
세헌은 미동이 없었으나, 윤신은 어깨를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 냉랭한 표정, 그리고 제게 불만이 있는 게 분명한 적대적 태도가 신경 쓰였다. 그가 속으론 싫지 않으면서 겉으로 거부할 때의 감각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개의하게 됐다. 지금 세헌은 진짜로 골이 났다.
그러나 자신이 뭘 잘못한 게 있나 고민해 봐도 딱히 찾기가 어려웠다. 당장 급하거나 시간 맞춰 해야 하는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갔다. 미비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부터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영문을 알지 못해 그의 대답부터 구하고 싶었다.
“선배 왜 화났어요?”
질문과 동시에 윤신은 품에 안은 작은 서류 봉투를 신줏단지라도 다루듯 정성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달싹이는 손가락 끝에는 밴드가 하나 붙어 있었다. 하얀색 배경에 토이스토리 캐릭터들이 돌아다니는 모양새였다.
그걸 본 세헌이 윤신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벽 쪽으로 서로의 몸을 겹쳐 밀착하듯 윤신을 몰아붙였다.
타악.
등이 딱딱한 면에 부딪힌 윤신의 눈살이 통증으로 구겨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거였고, 세헌의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인 것도 있었지만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건 이곳이 그들의 회사라는 점이었다.
여긴 다들 자중하는 사택과는 달랐다. 몇 분 사이 수십 명의 직원들이 왔다 갔다 했다. 당장 저 승강기에서 바로 사람이 내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걸 의식해 세헌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팔을 비틀었다.
“할 얘기 있는 거면 조용한 데로 가요.”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너 뭐 하는 새끼냐고.”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이건 꼴같잖게 왜 이래?”
“윽……!”
확, 난폭하게 끌어 올린 검지에는 밴드가 말려 있었다. 그걸 본 윤신이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반지를 받으러 공방에 갔다가 열을 식히고 있는 기다란 플래티넘 막대에 손을 대 데어 버린 상처였다. 그걸 자세히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소요될 듯해 말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승강기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세헌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힘껏 밀어냈다. 겨우 떨어진 두 사람의 뒤로 변호사들 몇몇이 지나갔다. 그들이 세헌에게 공손하게 인사했지만 그는 오로지 윤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느라 봐 주지도 않았다.
지금의 강세헌은 꼭 활화산 같았다. 언제 터져 버릴지 불안했다. 어제 새벽만 해도 이런 기미가 없었는데 갑작스러웠다. 안 되겠다 싶어진 윤신은 지지난 주쯤 그들이 키스를 나눴던 비품실로 세헌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내부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그 안에 세헌과 자신을 모두 가둔 채, 안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두 사람이 뜨겁게 입 맞추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던 이 장소에서, 이유도 명확히 모르는 갈등으로 세헌과 다투고 있자니 돌연 서러움이 북받쳤다.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걸 참아 내느라, 윤신은 한참을 더 침묵했다. 한데 그게 세헌의 분노를 더 부추긴 듯했다.
“끝까지 대답을 안 하시겠다.”
이윽고 그는 윤신의 손가락에 돌돌 말려 있는 밴드를 벗겨 버렸다. 끈적하게 살갗을 감싸고 있던 얇은 쪼가리가 떨어지자, 표피가 벗겨져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꽤 아찔한 장면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세헌이 미간을 구겼다.
“이건 왜 다 헐었어. 누가 빨아 주기라도 했나 봐?”
다짜고짜 당하고 있는 것도 황당한데, 이런 몰아붙임에 윤신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선배 같은 변태 아니고서야 누가 제 손을 이렇게 표피 다 벗겨질 때까지 빨아요?”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밖에서 좆질하면 넌 그냥은 못 죽는다고. 농담 같아?”
“좆질, 허……!”
그 어떤 말보다도 기막혀 황당해진 윤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화가 나서 눈가가 떨리고, 뺨도 경련했다. 윤신은 대체로 순한 편이지만 부당한 순간에 침묵하는 스타일은 못 됐다.
“일을 너무 해서 미치신 것 같은데 나 붙잡고 이러지 말고 어디 요양이라도 가서 좀 쉬지 그래요. 같이 가 드려요?”
최대치로 비꼬는데도 세헌에게 타격을 전혀 주지 못한 듯했다. 그는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내뱉었다.
“여태 넌 단 한 번도 나한테 의심 산 적이 없었어. 난 네가 어디 가서 뻘짓 할 거라곤 상상조차 안 했다고. 왜? 넌 거짓말도, 숨기는 것도 안 하거든. 묻기 전에 자판기같이 다 불거든. 몇 시에 뭘 할 건지. 누굴 만나는지. 용건은 뭐였는지! 거기서 나랑 떡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까지!”
“누가 듣겠어요! 진짜 왜 이래, 오늘!”
아무리 비품실 안이라지만, 언성이 이 이상 높아지는 건 위험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우려된 윤신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하나 세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만큼 도윤신 네가 쉽고 뻔한 새끼란 뜻이지. 그럼 너는 계속 나한테 쉽고 뻔해야지. 왜 일을 어렵게 만들어.”
“요지가 뭡니까, 대체. 선배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고 싸우고 싶다고요.”
“너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내가 어디가 잘못된 것 같아. 넌 나를 믿는다는데, 난 너를 못 믿겠다고. 왜 네까짓 게 할 수 있는 걸, 나는 못 하지?”
일순 윤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일차적으로 당혹스러워서였다. 오해 살 만한 일을 한 게 있나 돌이켜 보니, 그런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복잡하게 요동치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울리지 않게 감정이 격해진 듯한 세헌이 날카롭게 덧붙였다.
“네 부재가 나를 불안하게 해. 불쾌해. 왜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이런 엿 같은 감정을 느껴야 돼.”
“선배 지금…… 혹시.”
“그러게 왜 설명도 없이 날 방치해. 너랑 나 사귄 지가 대체 몇 년째야. 내가 이런 거 제일 못 견뎌 하는 거 몰랐나? 네가 그 공방 가서 여자랑 시시덕거리면서 반지 같은 거 만들어 오면, 너 기다리면서 혼자 침실에 처박혀 있던 내가 고마워하며 넙죽 받을 줄 알았어? 그래?”
잠자코 듣다 멈칫한 윤신의 어깨가 느릿느릿 들썩였다. 직접 반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 안 했다. 제 행보는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해 주는 걸 알아서,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털어놓게 만들 거라곤 예상 못 했다.
어디부터 답변해야 할지, 그게 정답이 맞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윤신은 열없이 눈만 깜빡였다. 펌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서로의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는 그림들을 그리며 행복감이 물씬했다. 그런데 10여 분 만에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세헌의 옷을 쥔 손을 풀진 않았다. 그러자 그가 그걸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매정하게 쳐 냈다. 그 행위는 그에게도, 윤신에게도 서로 상처였다.
망설이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세헌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한 번 거부당해서 선뜻 끌어안지는 못하고, 거리만 좁힌 채로 애써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오해받을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요. 같이 있던 시간도 얼마 안 돼요. 정보 교환이 필요한 순간 외엔 늘 따로였어요. 여러 마리 토끼 한 번에 잡으려던 거였다고요. 선밴 언제나 그랬듯이 다 알 거라고 생각했고요.”
같이 화를 내는 대신 그를 설득하는 이유는, 그의 감정이 손에 잡히듯 만져졌기 때문이다. 세헌은 낯설게도 상실이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그건 두 사람의 역할이 예고도 없이 바뀌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들의 관계에서 기다리는 이는 대체로 윤신이었다. 세헌이 훨씬 바빴다. 자연히 그가 사이를 조절했고, 모든 사안을 숙고한 뒤 결정했다. 아울러 뭔가를 주는 건 그였고, 그건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터다.
온전히 이 관계를 틀어쥐고 있던 와중, 그 모든 게 사실은 윤신이 그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느끼며 전혀 미동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걸 마지못해 인정한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을 촉발시킨 건 제게도 책임이 있는 셈이었다. 그가 인생에 자신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매 순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초조해서 쥐락펴락하고 싶어 하는 서툰 사람이라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조급했던 나머지 일부러 미뤄 두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두 팔을 뻗어 세헌을 안아 주려고 하자, 그가 한 번 더 윤신의 손길을 밀어냈다. 꼭 맨 처음 제게 마음을 쓰면서도 거부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안 어울리게 왜 2주나 참아 줬어요. 별말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내가 못 참겠다는 이유로 네 계획을 망쳤어야 맞는다는 거야?”
“네. 얼마든지요. 왜 안 돼요? 짓밟고 망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잘하면서.”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건방 떨 건가?”
“네. 전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도 나한테 뭐든 해도 돼요.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그때의 제가 화 짧게 내고 어떻게든 하겠죠. 저도 그 정도 순발력은 있어요.”
“…….”
“난 하는데, 왜 선밴 못 하냐고요? 강세헌이 나보다 겁쟁이니까요.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면서 이렇게 명백한 사실 관계에서 도망치지 마세요. 어차피 난 감추는 것도 못해서 선밴 내가 자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잖아요.”
그가 불안한 건 강세헌이 도윤신을 더 좋아해서도, 윤신의 삶에 다른 잃을 것들이 많이 존재해서도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세헌이야말로 내심 제대로 느끼고 있을 터다. 자신 또한 다 버리고 그에게 전부를 던진 지 오래라는 것을 말이다.
빌어먹을. 윤신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듯 욕지거리를 삼킨 세헌이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뭔가 반박하려던 찰나였다.
동시에 윤신의 재킷 주머니 속 휴대폰이 주파수 높여 진동했다.
한풀 누그러졌던 두 사람 주변의 공기가 다시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그가 ‘또야.’ 하듯 지겨운 얼굴을 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말했다.
“또 득달같이 쫓아가야지. 받아 봐.”
새벽녘 타인의 연락을 받느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았던 기억이 떠오른 윤신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어 민망해졌다.
이제 보니 갈등의 씨앗은 모두 자신이 차곡차곡 뿌리긴 했다. 휘황찬란한 꽃은 그가 혼자 물 주고 키워 끝내 피웠지만.
“우리 얘기 먼저 끝내고요.”
“안 그래도 오늘쯤 터질 것 같았어. 네 말이 머리론 이해되는데 그 빌어먹을 진동 소리 들으니까 또 화가 나. 아무래도 난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따 다시 얘기하자.”
붙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그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벌컥 열어젖힌 문을 뒤로하고 곧게 뻗은 다리를 내디뎠다. 빠르게 뒤쫓으려던 윤신은 마침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여럿 내리면서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이 묶였다.
이럴 때 세헌을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한데 금세 세헌이 모퉁이를 돌아가 버릴 것 같아서 초조했다. 결국 직원들 사이를 헤치고 윤신이 그를 쫓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누군가의 시선이 짧게 느껴지나 싶더니, 이내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파고든 웬 남자가 윤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 이 새끼, 어딜 가.”
“읏……!”
하필이면 벌겋게 까진 자리가 함께 잡힌 건지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놀란 윤신이 가해자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자, 시선 끝에 익숙한 얼굴이 바로 보였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뿔테 안경을 쓴 키 큰 남자였다. 제 의뢰인의 남편이기도 했다.
조금 전 휴대폰으로 온 전화는 의뢰인이 아니라,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경호 업체의 연락이었던 모양이다. 펌까지 따라 진입할 수가 없어 전화했던 것 같았다.
이 남자의 등장으로 올 것이 왔음을 인지한 윤신이 최대한 차분하게 말문을 뗐다.
“무슨 일이신……. 헉!”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의 깡마른 손이 윤신의 멱살을 확, 붙들었다.
“네가 도윤신이지. 도이경 동생. 딱 알아보겠네. 방까지 갈 것도 없겠다. 너 잘 만났어.”
본능적으로 피해 보려고도 했으나, 이미 우위를 선점한 남자 쪽이 거칠게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전혀 방어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얼결에 몸이 밀리고 말았다. 덕분에 윤신은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윽, 큭, 놓고 말씀, 하세요.”
“너 내 마누라 데리고 무슨 꿍꿍이야. 어? 어린놈의 새끼가.”
힐끗, 대답 대신 머리 위의 CCTV 위치를 확인한 윤신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최근 의뢰인을 자주 만나면서 그 사실이 남자의 귀에도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다섯 살 난 아이도 함께 한 차례 만났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타입인 그로 하여금 이런 순간을 자초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만, 장소가 안 좋았다.
여기서 소란이 벌어진다면 이 상황의 앞 장면까지 찍힌 영상을 펌에서 증거물로 확보하게 될 텐데, 조금 전 자신과 세헌이 저 모퉁이 끝의 비품실 안에서 나란히 나왔던 터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강세헌은 비품실 같은 데 들어갈 만한 사람이 못 됐다.
미치겠네. 어떡해야 되지.
가뜩이나 세헌 때문에 복잡했던 차에 머리를 굴리면서 방어까지 하느라 벅찼다. 제게 위해를 가한다고 해서, 의뢰인의 배우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조금 전 승강기에서 내린 직원들은 도와주긴커녕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움받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안 되겠다 싶어진 윤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뒤이어 탁 비서의 이름을 목청 높여 부르려고 입을 떼던 그 순간.
확, 제 멱살 쥔 남자의 손이 누군가의 참견으로 옷깃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갔다.
“이건 또 뭐야!”
버럭 소리치는 남자의 음성이 맞은편 구세주에게 가 닿았다. 가빠지던 숨을 겨우 추스를 수 있게 된 윤신도 감사하다는 표시로 그쪽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억, 감사합니다…….”
그런데 질 좋은 천에 착 감싸인 기다란 다리와 구두코가 익숙했다. 마침내 다시 얼굴을 들어 상대를 마주 보았을 때, 정면에 보이는 게 지나치게 낯익은 외양이어서 당황했다.
“수석님?”
“너한테 원한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
구원의 손길을 내민 등장인물은 다시 나타난 세헌이었다. 소란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온 듯했다.
뒤도 안 돌아볼 것처럼 가 놓고, 꼭 저렇게 얼마 못 가 돌아본다.
윤신은 울컥했다. 그런 기색을 감추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그사이 지켜보는 시선이 몇 배로 늘어났다.
세헌은 매우 짜증스러워하는 시선으로, 자꾸 눈을 피하는 윤신을 한번, 당황한 듯한 소설가를 한번 쳐다봤다. 곧 손에 단단히 틀어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한데 모아 쥐었다. 그러고는 수갑을 채우는 것처럼 뒤로 넘겨 가뿐하게 엑스 자로 겹치게 해 상반신을 제압했다. 이윽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퍼억. 몸의 앞면이 벽면에 부딪힌 남자가 꽤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욱, 이, 넌 누구야!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힐끗 남자의 뒤통수를 살핀 세헌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신선하군.”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안 놔?”
“이 펌 안에서 나한테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지껄이는 사람은 처음이라서요. 얼굴 좀 봅시다. 이쪽으로 고개 돌려요.”
그는 바르작거리며 해 대는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턱을 한 손으로 힘껏 쥐었다. 얼굴을 난폭하게 옆으로 돌려 옆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곤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워낙 대중적으로 유명한 소설가라 얼굴을 바로 알아본 듯했다.
“도윤신 변호사, 이거 치정극인가?”
그 와중에도 맥락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가 현 상황을 법정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게 느껴졌다. 이곳엔 증거, 증인, 모두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배우자분 의뢰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치정은 아니다……. 너흰 뭘 처구경하고 있어. 보안 팀에 연락 안 해? 너.”
척,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변호사를 향해 턱짓하자 지명당한 주니어 어쏘가 깜짝 놀라며 뒤늦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동선이 통제된 상태였던 남자가 세헌의 빈틈을 노리려고 몸을 달싹였다. 그걸 손바닥의 감각으로 인지한 세헌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머리채를 쥔 후 뒤로 훅 젖히면서 남자의 목울대가 벽면에 닿도록 밀었다. 필연적으로 남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트렸다.
“이거 놓, 욱, 웁…….”
“법무 법인 도국 소속 도윤신 변호사에게 폭력을 먼저 시도한 건 귀하고, 이에 따라 제 행동은 전적으로 임직원 보호를 위한 방어 행위임을 알려 드립니다.”
완전히 상대방을 제압한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딱딱하고 고저 없는 말투로 남자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서늘한 눈매와 형형한 눈빛이 향한 건 윤신이었다. 그는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오직 윤신을 겨냥해 비난하고 있었다. 그사이 지켜보는 관중은 더 늘어나서 송 대표까지 나온 참이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어느 틈에 소식을 듣고 온 건지 제일 먼 사무실에서 일하는 세헌의 비서진들도 한 박자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탁 비서가 제일 먼저 군중을 뚫고 다가왔다.
“강 수석님! 도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아니, 이분…… 그 작가님 아니에요?”
“보안 팀 출입 관리 똑바로 못 해?”
“유명한 작가분이라 우리 클라이언튼 줄 알았나 봐요. 바로 시정 명령 하겠습니다. 이분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쪽으로 넘겨주십시오.”
“어떻게 파트너가 이러고 있는데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새끼가 탁 비 말곤 하나도 없어. 내가 얼굴이랑 관등 성명 매치해서 하나씩 족치기 전에 꺼져.”
무대를 관람하듯 이 상황을 관전하던 직원의 대다수가 세헌을 비롯한 간부급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곤 썰물 빠지듯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남겨진 건 사건의 중심인물인 세 사람과 세헌의 비서들, 미희, 그리고 세헌과 직위가 같은 몇몇 파트너 변호사들이었다.
그 대신 탁 비서가 남자를 통제하자, 훨씬 덜 강압적으로 저지당한다고 느꼈는지 남자가 벗어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몸부림쳤다.
“이거 놔! 당신들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세헌은 매우 한심해하며 ‘도국’이라고 쓰인 한글 명패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낮게 내뱉었다.
“……씨발, 가지가지.”
욕설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점점 남자의 저항이 거세졌다. 하는 수 없이 지켜보던 윤신이 같이 제지하려는데, 세헌이 손목을 꽉 잡아당겼다.
“더 짜증 나게 만들지 마.”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대부분 남자를 더 자극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을 터다. 하지만 윤신은 그게 세헌 본인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손이 닿았던 구겨진 옷깃에 고정돼 있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세헌은 윤신이 클라이언트의 배우자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것 때문에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게 한동안 윤신을 빼앗아 갔다고 느낀 의뢰인의 남편이라는 점도 일부 그를 분노하게 했을 터다. 무엇보다 더 대갚음해 주고 싶은데, 애초에 이게 윤신이 의도했던 상황이란 걸 알기에 망쳐 놓을 수가 없어서 욕구 불만으로 짜증이 치민 듯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타이밍 좋게 승강기 문이 열리고 보안 팀 직원들이 나타났다. 비서들에게 남자를 인계받은 후, 멈춰 있는 승강기에 다시 올라탔다.
그들의 뒤를, 상황 수습을 위해 탁 비서와 다른 비서들이 따라붙었다. 탁 비서가 대표로 보고했다.
“우선 저희가 같이 내려가서 이분 경찰에 넘기고 서류 정리해 오겠습니다. 증거로 제출할 CCTV 영상도 떠 올게요. 그때 수습 시작하시죠.”
‘CCTV 영상?’
헉. 안 돼.
이 상황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져 있던 윤신이 한 단어에 꽂혀 흠칫했다. 곧바로 다른 승강기를 잡고 그들을 쫓으려는데, 미희가 다른 파트너들에게 돌아가라는 듯 손짓해 들여보내곤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다는 듯 손짓하는 건 덤이었다.
“이런 건 먼저 경찰에 넘긴 뒤 정리하는 게 제일 정석이야. 빠르기도 하고. 비서들한테 맡겨. 그리고 자긴 나한테 상황 설명을 해 줘야겠는데?”
“저기, 대표님. 영상을 제가 제일 먼저 확보를 해야 해서요.”
“왜 비서들이 하면 안 되지? 쟤들 일이잖아.”
주장은 있으되 근거로 댈 게 없어 곤란해진 윤신이 세헌을 쳐다봤다. 눈으로 열심히 글자들을 작성해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는 매우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시선을 마주쳐 오다가,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건지 돌아섰다.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세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의 몫이기도 해서였다.
변호사로서 강세헌의 커리어는 도국에서 주춧돌부터 세워 서까래까지 올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걸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망치게 두고 싶진 않았다. 영상 확보는 제 쪽에서 제일 먼저 해야만 했다. 간절한 시선을 던진 윤신이 미희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세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세헌 선배.”
“건방지게 어디서 파트너 변호사 이름을 함부로 불러. 잘리고 싶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담배 말려, 놔.”
탁. 팔로 윤신을 밀어낸 그가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그 안에 담배는 물론 라이터까지 다 있었던 건지 윤신을 매정하게 지나쳐 승강기를 잡고 올라탔다.
지잉. 문이 닫히는 걸 보고만 있던 윤신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희가 그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법조계에서 잔뼈 굵은 그녀의 눈치가 남들보다 매섭고 빨라 천만다행이었다.
“영상에 뭐 걱정되는 게 있나 본데 자긴 일단 내려갔다 와.”
“고맙습니다, 대표님.”
바로 버튼을 눌러 내려갈 승강기를 잡으려는 윤신에게, 미희가 덧붙였다.
“도 변, 방금 거 강 수석 진심 아닌 거 알지? 쟤는 원래 말이 미운 애잖아.”
“잘 알아요. 아직도 매일 혼나요.”
정말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세헌이가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걸 다 보고. 좋은 구경 했다. 오늘 사내 메신저 먹통 되겠어.”
그 말 역시 전적으로 동의했다.
음성을 내뱉는 대신 묵례하는 것으로 답변한 윤신은 계속 침묵했다.
미희마저 자취를 감추고, 로비에 홀로 남겨지자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 다 스쳤다.
종이 대신 반지를 담아 온 작은 서류 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세헌이 밴드를 강제로 벗겨 버린 검지를 응시했다. 불그스름한 속살이 아까보다도 더 부어올라 있었다.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속상한 표정이 된 윤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오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질 셈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려 옷 위에 흙탕물이 번지듯, 진창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