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40/51)

05. 

삑. 스마트키의 동그란 버튼을 누른 세헌이 주차장 로비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습관처럼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이미 새벽 1시가 넘은 지 한참이었다.

예기치 않게 클라이언트 미팅이 길어지는 바람에, 정시에 칼같이 퇴근한 윤신과는 귀가 시간이 엇갈렸다. 그래서 곧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남겨 뒀는데 아직 답이 없었다.

보통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을 땐 으레 그렇듯 제집에 가 있을 듯해 A동 방향으로 이동하려는데, C동 쪽의 승강기 문이 열렸다. 지잉,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윤신이었다.

“도윤신?”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놀란 윤신이 세헌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와, 조금만 늦었으면 엇갈릴 뻔했다. 새벽이라 그런가, 제 예상보다 빠르게 오셨어요.”

“넌 왜 거기서 나와. 집에 갔었어?”

“네. 뭐 확인할 게 있어서요. 피곤하죠.”

고개를 끄덕이며 뺨을 쓰다듬어 주자, 윤신이 세헌의 서류 가방을 빼앗듯이 가져가 팔짱을 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옆에서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로펌 사택의 특성상 세대수는 많아도 대체로 주민끼리 서로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공용 공간일수록 늦은 시간에 사람이 거의 없긴 했다. 지금 이 로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안도할 건 아니었다. 당장 어디에서 누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잘 아는지라 평소엔 두 사람 다 적절하게 눈치를 챙기고, 또 적절하게 들킬 듯 말 듯 한 스릴을 즐겼다. 한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윤신에게서 떨어지기 싫다는 맹목적인 분위기가 어렴풋이 풍겼다.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인지한 세헌이 윤신을 옆구리에 포개듯이 세운 채로 A동 승강기 앞에 섰다. 카드 키를 리더기에 대자 마침 지하에 내려와 있던 기계가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탑승했다.

승강기 문에 비친 윤신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세헌이 고개를 기울여 정수리에 입 맞추며 넌지시 물었다.

“외근 간다고 했다며.”

“네, 일찍 퇴근했어요. 의뢰인 만났고요.”

대답과 동시에 좀 더 세헌의 몸으로 깊이 파고들려 하는데, 돌연 승강기가 운동을 멈췄다.

윤신이 민첩하게 움직여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양문형 문이 열렸다. 밖에는 담배와 라이터를 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돌리니 도국 내 세무 법인으로 얼마 전 스카우트된 베테랑 세무사라는 게 기억났다. 위층에 있는 공개 정원으로 흡연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먼저 세헌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가 가볍게 까딱, 하는 것으로 답했다.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라는 사정을 대충 아는 펌 직원들이라면 모를까, 뉴 페이스인 이 남자에겐 자신이 A동에 세헌과 함께 있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내심 난처해진 윤신은 급한 대로 세무사를 향해 정중하게 묵례하곤 괜히 서류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던 세헌이 윤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니 무의미한 걱정은 하지 말란 뜻 같았다. 그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짓 하나로, 제게 그 어떤 사람의 보호보다 안도되는 심경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의뢰인은 뭐래.”

“네? 아…… 누나가 소개했다던 그분 뵙고 온 거거든요. 초장부터 좀 부침이 있긴 하지만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나름대로 수석님 벤치마킹해서, 제 식대로 전략을 짜고 있고요.”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 어느 틈에 기계가 세헌의 집 층에 당도했다. 그들은 함께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서, 넓은 복도를 거닐어 안으로 나란히 진입하는 동안에 세헌은 학구적인 태도로 윤신의 표정과 움직임 따위들을 관찰했다.

드레스 룸에 도착한 그가 재킷을 벗으면서 되물었다.

“너 지금 나한테 할 말 있는데.”

외투를 받아 든 윤신이 그걸 서류 가방과 함께 진열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세헌이 커프 링크스를 풀고, 베스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어내는 일련의 순서를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이윽고 셔츠의 제일 위의 단추를 붙잡는 그의 손을 쓰윽, 밀어내곤 직접 단추를 풀어 주었다.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인 세헌이 재차 물었다.

“말하기 싫은 거야, 하고 싶은 거야. 노선 똑바로 정해.”

“계산 중이에요. 제가 선배한테 이 얘길 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일인 건지. 혹시 혼자서 해결해 볼 수는 없는 건지. 정말로 이 방법이 최선인지도요.”

“너 펌에서 사고 쳤어? 수습해야 되는데 도움 필요한 건가?”

두 개째 단추를 풀며, 윤신이 느긋하게 답했다.

“저처럼 일 잘하는 변호사가 사고 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러나 세헌의 표정은 그 어떤 답변을 들었을 때보다도 미심쩍게 변했다.

“물어볼 때 말해. 일분일초라도 빨리 얘기해야 수습이 쉬워.”

“진짜 그런 건 아니라는데도요.”

“네가 얘기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알려 줘?”

세 개째의 단추를 붙잡고 있던 윤신이 움찔했다. 이 순간 세헌의 눈을 마주 보면 모든 걸 들키게 될 것 같아서 그저 쇄골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그가 직접 턱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눈길을 강제로 교차하며 덧붙였다.

“내가 손수 가르쳐서 내보냈는데, 가사 팀장이 너 갈군다는 얘기 같은 걸 들어야겠어?”

왠지 강세헌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긴 했다. 원체 그가 사내에 도는 말을 빠르게 흡수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이게 그가 어떤 화제보다도 관심을 쏟고 있는 도윤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단추를 풀다 말고 세헌의 품에 풀썩 무너지듯이 기댄 윤신이 그의 딱딱한 어깻죽지에 뺨을 문지르며 호흡을 골랐다.

결국은 못 이긴 척 입을 떼게 됐다.

“팀원인 이상 팀장님 방식 따르는 게 맞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게 틀렸다면요? 제 사건, 언론이 물기 좋은 사건이라면서 자꾸 신문사에 뿌리고 싶어 하세요.”

의뢰인 이름이 유명한 순서대로 사건을 처리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약간의 역차별이 될진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제겐 다 똑같은 의뢰인이니까. 하나 그걸 이용해서 사건 해결 이상의 부가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건 확실히 부당했다.

“의뢰인 신상은 보호하고, 배우자 쪽 유명세를 이용하겠다는 거 아냐?”

“맞아요.”

“이혼 문제 연구소 홍보용이겠지. 슬슬 실적 필요할 시즌이야. 다들 그렇게 일해. 그걸 틀렸다고 말한다면 난 네 편 못 들어 줘.”

“하지만 로펌이 직접 그러면 안 되잖아요. 당장 증거가 너무 없어요. 벌써부터 시끄러워지면 우리 쪽 클라이언트한테 유리할 게 하나도 없다고요. 부팀장님도 저랑 같은 의견이세요.”

“가사 부팀장 수준이 딱 너 정도라는 거군. 인사에 참고하지.”

쿡. 그의 딴딴한 복부를 손가락으로 찌른 윤신이 차분히 설득했다.

“단순히 의뢰인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론 소송에 이기자는 거라니까요.”

설명 끝에 슬그머니 얼굴만 떼어 낸 윤신이 가까이에 있는 세헌의 턱을 콱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서늘한 눈동자와 제 것을 마주치며 솔직하게 부탁했다.

“팀장님한테 설득이 전혀 안 통해요. 부팀장님도 백기 드셨어요. 선배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저도 제가 틀렸을지도 모를 땐 여러 가능성 염두에 둬요. 그런데 이건 진짜 아니에요. 제가 맞아요.”

가사 팀으로 옮긴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윤신이 해 오는 부탁이었다.

늦둥이를 본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 왔을 윤신은 종종 사적인 부분들에서 세헌이 예상치도 못했던 귀여운 행동들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의외로 업무적인 영역에서만큼은 전혀 의존적이지 않았다. 혼자 해결하고, 수습하는 일에 훨씬 익숙했다. 힘들다는 푸념이나 투정도 거의 없었다. 일을 즐겼다.

그건 처음 업무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도 있겠지만, 본인의 자존심도 강했고, 승부욕도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윤신도 평범한 공략으론 안 되겠다 싶었던 것 같았다. 정식으로 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강세헌이라는 편법을 쓰려고 하는 것이 그걸 증명했다. 정수만을 쓰고, 정도만을 걷는 윤신이 좋았으나 그 과정에서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도 참고, 참다, 끝내 하는 수 없어 이용하는 도구가 자신이라는 게 세헌은 솔직히 싫지 않았다.

누군가의 수단이 되는 일이 즐거워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진열대에 등을 기댄 그가 윤신의 등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대꾸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뭘 도와주면 되는지를 얘기해. 들어 보고 결정할 테니까.”

“이 사건은 제 방식대로 해결해 보고 싶어요. 기사 보도만 막아 주세요.”

“팀장을 네 입맛에 맞게 갈아 줄 수도 있어. 더 쉬운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

“나쁜 분은 아니에요. 합리적인 상사인데, 가끔 저랑 가치가 충돌하는 것뿐이지.”

“글쎄. 그 충돌이 잦던데.”

정곡이 찔린 윤신이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회사에선 상하부 의견이 부딪치는 게 건강한 거예요. 바텀 업이 된다는 거죠.”

대꾸 대신 눈을 가늘게 뜬 세헌의 뺨이 꿈틀했다. 무조건 톱다운 형식으로 일하는 그와 반대되는 개념을 제 쪽이 옹호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챈 윤신이 어리광 부리듯 그에게 몸을 어설프게 문지르며 눈을 마주치자 그가 말문을 뗐다.

“내가 도와주면 넌 뭘 제공할 거지?”

“글쎄요. 대의를 위한 무상 복지야말로 제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난데…….”

“내가 ‘무’로 시작하는 거 싫댔지. 난 신자유주의자야.”

“그럼 오랜만에 프로 보노인 걸로. 와, 이래서 인맥, 인맥 하는구나.”

헛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그는 늘 그렇듯 연인의 바람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 더 힘주어 제 몸에 전신이 닿도록 끌어안고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살짝 풀린 셔츠에 윤신의 살갗이 닿았다. 그들은 껴안은 채로 몇 초간 서로의 숨결을 음미했다. 그러다 세헌이 먼저, 손끝을 세워 윤신의 셔츠 안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허리춤을 아슬아슬하게 만지작거리자 윤신의 하반신이 긴장감으로 꿈틀했다.

“지금 1시 넘었어요. 안 피곤해요?”

“2시가 넘은 것도 아니잖아.”

“2시였어도 그 소리 했을 거죠? 3시 넘은 것도 아니잖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가르쳐 주려는 거야. 넌 내 지도 편달이 필요해.”

야릇하게 속삭이며 윤신의 달아오른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대니, 점점 서로의 숨도 가빠졌다. 드레스 룸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농염한 빛깔로 물들었다. 세헌의 손가락 움직임이 점점 더 관능적으로 변했다. 척추를 따라 등을 쓸어내리나 싶었는데, 한술 더 떠 바지 틈새로 나아가 윤신의 속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엉덩이 골을 가르고 진입한 손끝이 입구를 지분거리듯 문질러 댔다. 윤신은 캥거루처럼 세헌에게 매달려 안기며 신음했다. 그가 구멍 안에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기에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어디부터 알려 줄 거예요?”

“어디부터 알고 싶은데.”

세헌의 판판한 등을 감싼 셔츠를 붙들고 있던 윤신이 제 한쪽 손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을 비비듯이 만지작거리다 입 안으로 쏙, 끄트머리를 넣었다.

“후으, 여기요.”

고른 치아를 훑고 더 깊숙이 전진해 천장과 여린 살들을 구석구석 애무했다. 그러자 세헌이 혀끝으로 윤신의 손가락을 쫓으면서 표피를 타액으로 적셨다.

이윽고 그의 입 속을 장난스럽게 유린하던 검지와 중지를 빼낸 윤신이 얼굴을 기울였다.

“하, 선배 나 키스하고 싶어. 입 열어 줘.”

“혀 넣어. 빨아 줄게.”

그의 지시에 따라 착하게 붉고 촉촉한 혀를 밖으로 내어 입술 사이로 끼워 넣으려 하니, 세헌이 살짝 만류했다.

“손가락 먼저 넣고, 그 위에 넣어야지.”

시키는 대로 세헌의 입안 왼쪽에 손가락을 다시 끼운 채 중앙에 제 혀를 반쯤 욱여넣었다. 곧바로 세헌의 내부에서 손톱과 혀를 함께 빨아들이는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늘 하던 키스의 변형일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복부가 빠르게 단단해지며 온몸에 전율이 일듯 피부 위가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살덩이가 아득한 내부에서 몇 번이고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윤신이 끼워 넣은 손끝 때문에 접촉이 완전하지 않아 애가 탔다.

“흐응, 흐, 으읏.”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온몸을 흐느적거리던 윤신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어 손가락을 빼냈다. 연이어 본격적으로 키스를 시도하며 세헌의 셔츠를 마저 벗겨 나갔다.

겨우 단추를 다 풀어 셔츠를 땅에 떨어뜨린 뒤 그의 쭉 뻗은 탄탄한 팔을 곡선 그리듯 어루만졌다. 복부에서부터 다시 역주행을 하는 것처럼 판판한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상반신의 탄력적인 살결과 꿈틀거리는 잔근육들이 손바닥에 마찰하며 쉴 틈 없이 움찔대는 듯했다.

어설픈 애무에 세헌도 빠르게 흥분했다. 결국 뾰족하게 솟은 목울대가 크게 일렁일 정도로 거칠게 심호흡한 그가 윤신의 셔츠 단추를 난폭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반쯤 벌어진 틈새로 손을 쑤셔 넣어 뾰족하게 선 유두를 꼬집었다.

“읏……!”

세헌을 만져 가던 윤신은 제 몸에 닿은 노련한 손길이 주는 자극에 항복해 다리를 꼬며 그에게 하체를 문질렀다. 선명하게 발기하려 하는 두툼한 양감이 전이돼 눈앞이 아득해졌다.

“으응, 좋아해요.”

“그래? 얼마나.”

“선밴 상상도 못 할 만큼. 더 들어오세요.”

으득, 잇새를 짓이긴 세헌이 윤신의 젖꼭지를 거칠게 짓이기며, 동시에 아득한 입 속에 제 혀를 깊숙이 욱여넣었다.

“웁, 읏!”

그 후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지퍼까지 순식간에 끌어 내리고 피차 곤두서기 시작한 서로의 성기를 속옷 위로 덮듯이 만졌다.

뒤이어 외부로 꺼내 두 개의 기둥을 자연스럽게 겹치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지잉. 지잉.

윤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헉, 헉, 스타카토처럼 끊듯이 신음하던 윤신이 매우 괴로워하며 세헌에게 제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가 애를 끓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핏줄 선 팔뚝을 꽈악, 쥐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진열대에 기대 있던 세헌이 언짢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두 손은 윤신의 골반에 가볍게 얹은 채였다.

“펌?”

이 시간에 연락이 왔다면 그럴 공산이 제일 컸다.

“아마도…… 어? 아니에요.”

한데 아니었다. 화면을 확인한 윤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연 설명했다.

“제 의뢰인이에요. 김정아 씨. 위험한 일 생기면 아무 때고 연락 달라고 했거든요. 이 시간에 연락할 정도로 물색없는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이쯤 되니 세헌도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또 그 여자야?”

며칠 전 복도에서 함께 걸으며 웃는 걸 봤을 때도, 조금 전 그 여자의 사건을 빌미로 제게 부탁을 해 왔을 때도 그는 모두 참아 넘겼다. 그러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까지 거슬리는 일이 반복되자 신경질이 이는 듯했다.

“씻고 계세요. 바로 따라갈게요.”

윤신은 미안하다는 표식으로 세헌의 입술에 제 것을 부대끼곤 돌아섰다. 자세를 고친 세헌도 옷을 마저 벗고 두툼한 배스 가운을 꺼내 대충 걸친 뒤 침실과 연결된 간이 문으로 향했다.

타악. 윤신이 휴대폰을 귀에 댄 순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네, 도윤신입니다.”

세헌이 자취를 감추며 꽉 닫아 버린 문을 애틋하게 돌아본 그도 잔뜩 헝클어진 옷을 추스르며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 * *

타닥. 타닥.

의견서를 작성하는 세헌의 양미간이 설핏 좁혀진 채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듯 불편해하는 기미가 미형의 얼굴에 묻어났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다. 그러다 조금 전에 돛대마저 이미 동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빈 갑을 휙, 책상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댄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건 덤이었다.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연히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근육을 운동을 하던 세헌은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6시 반이었다.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저 오늘도 먼저 퇴근해요. 밤에 집에서 봐요. - 도윤신]

“퇴근?”

곧바로 블라인드를 걷어 올려 건너편 방을 확인했다. 이미 윤신은 짐을 챙겨 나간 건지 불이 꺼져 있었다.

최근 윤신은 계속 이랬다. 한마디로 말해 1주일이 훌쩍 넘게 세헌을 내버려 두었다.

이혼 소송은 늘 성수기였다. 바꿔 말해 변호사가 언제, 얼마큼의 일을 하게 될지 대충 예측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렇게 윤신의 일정이 종잡을 수 없어진 건 처음이었다. 며칠 내내 연속으로 칼퇴근을 반복했고,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세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윤신 역시 늘 일에 파묻혀 살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주말은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대체로 반납이었다. 드물게 일찍 퇴근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조차 대부분 본인 하루 할당량 정도는 다 마치고 가는 식이었는데, 최근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지 매일 새벽까지 서재에 불이 켜졌다.

세헌은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굳이 변곡점을 따지자면 얼마 전 새벽 드레스 룸에서 의뢰인의 전화를 받았던 날부터였다.

그날 윤신은 그가 다 씻고 나올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얼굴에 스킨을 바를 때쯤 나타나,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의뢰인의 가정 내 문제가 생긴 듯했다. 일 욕심 있는 도윤신을 알아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이토록 자신을 말없이 방치하는 건 곤란했다. 내버려 둘 거라면,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맞았다. 그들은 서로의 바쁜 시간에 대한 상호 이해가 아주 잘되어 있는 연인이었다. 업무에 관련된 사항일 경우 세헌은 거의 100퍼센트 납득했다. 그런데도 윤신은 그를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전에 종종 보내곤 했던 문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구체적으로 왜, 어딜 가서, 무엇을 하고, 언제쯤 돌아올 건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던 예전과 달리 단순한 입장만의 나열이었다.

“육하원칙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다.”

탁.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던지듯 내려놓은 세헌은 내선용 인터폰을 손에 쥐었다.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네, 변호사님. 탁 비입니다.

“도윤신 또 어디 갔어.”

- 클라이언트 만나러 외근 가셨습니다. 그, 소설가 와이프 공예 공방에요.

또다.

그가 침묵하자 탁 비서가 눈치껏 덧붙였다.

- 도 변호사님께 뭐 지시하실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연락 넣어 두겠습니다.

뭔가 찜찜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면 행방을 묘연하게 하는 게 옳았다. 한데 윤신은 비서실에 제 행로를 아주 투명하게 밝혔다. 어딘가로 새어 나갔으면 하는 심사가 느껴졌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의뢰인의 배우자일 터다.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했고, 나름대로 자신을 벤치마킹해 전략을 짜는 중이라고도 했으니까.

문제는 그러면서도 왜 제겐 자세히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예 공방…….’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최근 윤신의 태도와 자신이 던진 말들, 그리고 이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지어졌다. 아울러 여자 쪽이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하니, 짐작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다만, 그걸 알면서도 세헌은 인내가 안 됐다. 쉽게 짬을 내기도 어려운 오후 시간을 여자와 단둘이 쓰면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을 상상을 하면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익숙한 자기 혐오감에 도윤신의 부재가 주는 심리적 공허감이 보태져 그의 심기를 어수선하리만치 어지럽혔다.

〈수석님의 삭막한 인생엔 저밖에 없는 걸 제가 알아요.〉

도윤신의 풍성한 인생엔 자신만 있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애정이란, 아무리 열심히 물을 줘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샘 같았다. 상대방이 온몸에 끓어 넘치는 사랑을 오직 제게만 다 쏟아붓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갈증이 나고, 때로는 숨이 가빴다.

도윤신은 정말로 끝까지 자신을 견딜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말이다.

단 한 번도 손가락에 뭔가 채워졌던 적 없는 허전한 제 왼손을 내려다본 세헌의 입맛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비서실엔 오픈했다는 거군.”

- 네. 그런데 괜히 배우자 쪽에서 걸고넘어지면 애꿎게 안 좋은 말씀 들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조언드려야 할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세헌이 마른세수했다. 곧이어 푹 잠겨 긁히는 듯한 음성으로 탁 비서의 말에 차갑게 응답했다.

“도윤신이 너보다 어린 변호사라서 우습지.”

- 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친하다고요.

도윤신 넌 좆같은 ‘우리’ 많아서 참 좋겠다.

꽉, 아랫입술을 깨문 세헌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네가 걔 단편적인 행동만 보고 3분 만에 생각할 수 있는 결과는 도윤신도 3초면 생각할 수 있어. 충고는 그걸 못하는 사람한테 해야지.”

그제야 탁 비서도 그가 하는 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인지한 듯했다. 윤신이 지금 일부러 그러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린 것이다.

- 아…… 하긴. 도 변호사님은 보통 정공법 쓰시는 분이라서 설마 했는데. 선수 다 되셨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은 길게 하는 거라고 몇 번 얘기…… 됐다. 미희 선배 퇴근 안 했으면 잠깐 나 좀 보자고 해. 사무실로 가겠다고.”

- 알겠습니다. 다른 건요?

“담배.”

- 오늘 아침에 드렸는데 그걸 그새 다 태우셨어요? 적당히 하시죠.

“잔소리할 거면 끊어.”

탁. 통화를 종료한 세헌은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부디, 제 손으로 직접 도윤신의 뒷조사를 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강력한 통제 욕구와 도윤신의 애정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목구멍으로 끌어 올리며 결국 그걸 내려놓았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담배를 달라는 양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정면을 보자, 미희가 서 있었다. 한 품에 얇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도 마침 그에게 용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왜. 하이파이브라도 하자고?”

“탁 비가 내가 가겠다고 했다는 말은 안 전했나?”

“마침 너한테 오려던 길이었어. 나 계속 여기 서 있어?”

피곤한 듯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짚은 세헌이 접견용 소파를 가리켰다. 그녀가 그곳에 가 앉는 사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으로 향했다.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접견을 수락한 미희였다.

“탁 비 쩔쩔매던데. 혼냈어? 왜?”

“남의 팀 일에 신경 끄고.”

“쟨 일 잘해서 너한테 혼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런 거 보면 재밌잖아.”

“각설해. 선배도 나한테 용무 있어?”

“아, 응. 내가 먼저 할게. 이거 검토 좀 해 주라.”

그녀가 건넨 봉투를 열어 보니 서류가 한 부 담겨 있었다. 그걸 꺼내 들어서 차분히 읽기 시작하는 세헌에게 미희가 설명을 이어 갔다.

“내가 펌 대표인데, 왜 네 컨펌을 안 받으면 마음이 안 놓이지는 모르겠어. 쪽팔려서 이거 어디 내놓고 말할 수도 없고…….”

내용은 금융 팀이 현재 다루고 있는 금융 분쟁 사건의 간략한 요약 자료였다. 뒷면에 별첨으로 프로젝트 관련 TF팀 구성 계획이 달렸다. 금융 거래 전문가들은 물론 송무, 국제 거래 등의 각 분야에서 뽑은 전문 인력들 이름 목록이었다.

사락,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뒤로 넘기는 세헌의 눈이 신중한 빛깔로 젖어 갔다.

“법무부 자문 위원……. 정부가 어깃장 놓고 싶어 하는 눈치라 이 타이틀은 필요해. 금융감독원 위원이랑 관세청 위원이 없군. 왜 안 넣었어?”

“금융 팀 변호사들 중에 딱 써먹을 인력이 없어서 그래. 다들 이번 분기에 바빠.”

“무슨 소리야. 구색은 맞춰야 돼. 순 검사장 출신만 있고. 싸우자는 건가?”

“역시 그렇게 보여?”

“이 리스트 쓰레기야. 누가 짰어?”

“나.”

“다시 짜.”

툭, 서류와 봉투를 한데 겹쳐 탁자 위에 가볍게 던지자 미희가 그걸 집어 들었다. 그가 보자마자 기각할 줄 알았다는 양 한결 마음이 편해진 표정이었다.

“사건 따 와서 하나씩 몰아 줬더니 쓸 놈이 없어서 그런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니.”

“쥐어짜. 그게 대표 능력이지.”

“차라리 세헌이 네가 금융 팀 일도 좀 봐 줄래?”

“사람을 더 뽑는 게 훨씬 빨라. 나 말고 리쿠르트 팀장한테 부탁해.”

“금융 팀 일이 별로면, 공동 대표는 어때?”

이 말을 들은 세헌은 멈칫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냉정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그의 눈길을 마주한 미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반응으로 미루어 잘못 들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의 도국을 만든 데 세헌의 공이 지대하다곤 하지만, 근원적으로 이 로펌은 미희의 아버지가 아주 성실하게 일군 밭이기도 했다. 그런 제반 상황을 포함해 이 펌의 입지와 규모까지 모두 고려하면 아무리 영입 대상이 강세헌일지라도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녀는 설득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어느 모임을 가도, 대표는 난데 네 얘기만 해. 웃긴 건 자존심도 안 상해. 다 사실이라서. 이럴 거면 너한테도 감투를 주는 게 내 입장에서도 훨씬 이득이지.”

자기 객관화가 매우 잘되어 있는 그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제의가 아니란 것쯤은 눈빛만 봐도 잘 알았다. 오래 알아 온 사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을 위에 두었을 때와 달리, 책임이 무거워진 현 상황이 미희는 꽤나 버거운 듯했다. 실제로 예전보다도 더 세헌에게 선택과 결정을 의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제안인 게 분명했다.

“계산기 두드려 보니 7년이 너무 짧더라. 해마다 연말 카운트다운 하는 느낌이 들어.”

“제안은 고맙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그녀는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디 얽매이는 것도 싫어하고, 다 잡은 고기도 싫어하잖아. 그래도 도국 정도면…… 관심 없어도 쥐고 있을 만하지 않나? 우리 업계 2위 펌이야. 1위 탈환까지 곧일 거고.”

“선밴 나랑 파이 나눠 먹는 거 상관없어?”

“네가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파이는 상관없어.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가져야지.”

“날 믿나? 내가 취임해서 선배가 목숨처럼 여기는 도국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 줄 알고.”

“100퍼센트는 못 믿지. 네가 나한테 그런 것처럼. 그런데 세헌아, 나도 이제 네 약점 알아. 네가 도국을 치면 난 너 말고 그걸 칠 거야. 걔 하나 밟는 거 나한테 일도 아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그는 몹시 불쾌해하며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세헌과 윤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극소수였다. 단 한 번도 그의 입으로 직접 확실히 해 둔 적은 없지만, 일련의 상황을 통해 익히 짐작하고 있음을 서로 인지했다.

그렇게 날 세울 거 없다는 양, 미희가 덧붙였다.

“공생을 하자는 말이야. 이 정도 규모 펌 대표라기엔 너무 젊어서 꼰대들 거부감은 있겠지만 다들 네가 얼마나 대단한 변호사인지는 아니까 문제없어. 수치가 있는 지표로 설득하면 다들 동의해 줄 거다.”

오래전 미희로부터 도국의 파트너가 되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손쉽게 출자를 결정했던 건, 직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 이곳저곳에서 그의 판단에 어깃장을 놓는 일들을 참기가 어려워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늘 세헌이 맞았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고 윗선을 설득해야 하는 게 엄청나게 쓸모없는 소모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현재 그는 일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어 그런 무거운 직함까진 불필요했다. 아울러 공동 대표가 된다면 앞으로 남은 변호사로서의 삶도 도국과 뗄 수가 없어질 터다.

하나,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마따나 판돈이 워낙 큰지라 승리하고 성취하는 데 매력을 느끼는 그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니 또한 이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이어 말했다.

“고민해 봐. 너만 마음의 결정 내리면 바로 타진할게. 그럼 내 얘긴 일단 여기서 갈음하고. 네 용건은 뭔데?”

그의 용건이지만, 실은 윤신의 일이었다.

도국 내에서 팀장급은 주기적으로 로테이션을 돌았다. 변호사마다 대체로 주력하는 분야가 있긴 했으나 경력과 경륜이 쌓이면 큰 테두리 안에서는 겹치는 게 많아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1년 전 바뀐 가사 팀장은 처음부터 윤신과 잘 맞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나쁘진 않았으나 두 사람의 가치관이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윤신의 주장과 달리 바텀 업이 되는 스타일도 아닐 터다. 제 쪽에서 설혹 손댈까 봐 농담처럼 얼버무렸다는 걸 명확히 느꼈다.

세헌은 윤신이 일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는 그게 어울리니까.

“가사 팀장 교체 건.”

미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사 팀장? 일을 썩 잘하진 않아도 영 못하진 않아. 사유는? 합리적이어야 할걸.”

세헌은 단박에 대꾸했다.

“우리.”

“……웬 우리?”

“그 ‘우리’가 내 마음에 안 들어.”

이는 아주 비합리적인 이유였다. 맥락이 없어 억지로 납득해 보려 해도 그럴 수조차 없었다. 한데도 발화자가 강세헌이어서, 미희는 묘하게 설득됐다.

“얼마 전에 네가 홍보 팀 보도 막았다는 얘기 들리던데. 혹시 그거 때문에 개기데? 아닌데. 펌 안에 너한테 개길 사람이 없는데. 도윤신 빼고.”

“…….”

“아아, 도이경 관장이 부탁해? 네 애인…… 아이고, 본인 동생 좀 잘 부탁한다고?”

“재밌지?”

“이런 재미가 있는 줄 몰랐던 지난 수십 년의 삶이 아까워 미치겠다고나 할까.”

그가 진작 말하고 싶었던 화두라는 양 꽤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송 대표 부디 도윤신 앞에서 뭐 비밀스러운 거 알고 있다는 티 좀 내지 마. 가뜩이나 펌에 걔 편 없는데 왜 대표 눈치까지 보게 만들어.”

“도 변 반응이 귀여워서 그러지.”

“시니어가 보기엔 너무 까마득한 본인 위치는 생각 안 해?”

“넌 걔가 그렇게 아까워 미치겠니? 막 지켜 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네? 낯설게.”

“그거까지 귀하랑 상관있어?”

미운 눈치로 세헌을 흘긴 미희가 알아듣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러나 대화는 여전히 위성처럼 그 주변부만을 빙빙 돌았다.

“어떻게, 그럼 너의 윤신이를 위해서 이번엔 뭘 해 줄 건데?”

“무슨 윤신이? 좆 깐다고 고생이다. 슬슬 짜증 나. 적당히 해.”

신랄한 대꾸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은 그녀가 빙글거리며 이어 물었다.

“좌천?”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세헌은 공과 사의 구분을 지어 주는 분계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사 팀장이 펌에 당장 손해를 끼친 게 없으니 그건 합당하지가 않았다. 일차적으로 징계를 본인이 납득 못 할 테고, 다른 직원들 보기에도 안 좋았다. 사기가 저하될 터다. 무엇보다 윤신도 이런 결말을 원하진 않을 게 명백했다. 그렇다면 채찍보단 당근을 주는 게 현명했다.

“일은 못하지 않는다니 돈 되는 금융 팀으로 보내. 마침 바쁘다며. 거긴 연차 쌓인 인간들 득시글거리니까 팀장급이 들어와도 문제없을 거야. 본인도 욕심이 있는 스타일이면 만족할 거고. 공석된 팀장 자린 가사 팀 부팀장 승진시키면 될 것 같다.”

“부팀장? 걔는 또 왜 갑자기 승진을 시키재. 인사철도 아닌데.”

“내 마음에 들어.”

못 들을 얘길 들었다는 양, 미희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달처럼 떠올랐다. 세헌의 입을 가르고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실제로 가사 팀 부팀장은 그의 밑에서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어 접점이 전무했던 터였다.

그 덕분에 궁금한 게 아주 많았으나, 그녀는 이 사안에 윤신이 조금이라도 걸려 있는 이상 그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을 걸 지난 시간 동안 충실하게 학습했다.

“뭐…… 네가 웬만하면 청탁 같은 건 잘 안 하기도 하고. 또 네가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알겠다. 이럴 때 점수를 따야지. 얘기해 둘게. 수고해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각자 나설 방향으로 이동했다. 미희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세헌이 집무용 책상 앞으로 되돌아와 앉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밤의 어스름이 스멀스멀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금융 팀 일이 별로면 공동 대표는 어때?〉

그녀가 남기고 간 제안을 떠올리고 있자니 왠지 윤신이 제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인생의 항로를 정할 때, 세헌은 윤신을 떠올렸다. 뭐든 혼자 하는 게 삶의 암묵적 습관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둘이 함께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생각이 듣고 싶었다.

한데 늘 고개를 들면 가시거리에 있었던 윤신이 어디에도 없어, 솔직히 약이 올랐다.

‘공동 대표라…….’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듯 엄지와 검지로 차분히 쓸어내리던 그가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돌렸다.

* * *

같은 시각.

창문 밖을 내다본 윤신이 인기척을 듣고 돌아보았다. 쌍방 의뢰인인 정아가 샘플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윤신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그녀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반지 모형을 눈에 담았다. 아직은 백색의 라운드 링 형태일 뿐이어서 투박했다.

“모양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네. 기본 세공은 된 거예요. 최종적으론 여기서 호수 조절을 하고요. 이 부분을 매끈하게 깎아서 시안 같은 형태가 되고요. 이렇게 진행하시겠어요?”

시안 중 하나는 깔끔한 백색 링의 부드러운 곡선 끝에 살짝 모서리가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다이아를 겉에 장식해 볼까도 했지만, 세헌이 평상시에 끼고 다닐 걸 고려하니 외부에 군더더기는 없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래서 안쪽에 한 겹 여유를 두고 작은 다이아를 박았다.

또 다른 하나는 제 것이었다. 재질이 같은데 똑같은 모양이기까지 하면 안 될 듯해 일부러 판이하게 만들었다. 세헌의 것과 같은 백색의 링 측면에 다이아를 촘촘하게 박았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링을 겹치면, 한데 포개어졌다. 안쪽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서로의 이름을 각인했다.

“애인분 호수는 아직 모르시는 거죠?”

“네. 제가 손가락으로 이렇게 말았을 때…… 이 정도?”

윤신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자, 그녀가 웃었다.

“어림짐작으로 좀 크게 만들게요. 작은 건 못 늘려도 큰 걸 줄이는 건 가능해요.”

“그럼 이 측면 다이아보다 내부 다이아를 더 크게 제작해 주세요. 얼마나 걸릴까요?”

“실은 제가 세공을 다 혼자 하느라…… 뚝딱 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다음 주 중엔 드릴 수 있어요. 가능한 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이미 디자인하는 데만 꼬박 며칠이 걸렸던 참이었다. 그런 뒤 알맞은 크기의 다이아를 주문하느라 일정이 하루 또 미뤄졌다.

장례식장에서의 첫 만남 다음으로 제게 강력했던 세헌의 인상은, 사택에서의 재회였다.

그때 본,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된 아름다운 손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길쭉한 손가락과 손등에 드러난 핏줄의 이미지까지 더해져 그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것도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어울릴 것 같아 고민이 깊었다. 심지어 지난주 내내 공방 주인도 없는 빈 공간에 홀로 남아 다른 반지들을 보며 머리를 쥐어짜 내 그림을 그렸다. 겨우 완성본을 전달한 게 사흘 전이었다.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경호 업체에서 마침 연락 왔거든요.”

“정말요?”

“네. 지난번 저한테 새벽에 전화하셨을 때 녹취랑 영상 너무 잘 남겨 두셔서. 그거랑 몇 가지 증거만 더 확보하면 될 것 같아요. 소송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요.”

“다행이다……. 그런데 남편이 변호사님께서 여기 왔다 갔다 하시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거 같아요. 정말 괜찮을까요?”

“의처증이 의심된다는 주장을 하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뭐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꼭 거기로 안 찾아갈 수도 있잖아요. 다른 식으로 분출이라도 하게 되면…….”

정신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규격화된 행동 패턴이라는 게 있었다. 특히 사건을 맡으면서 편집증이나 의처증이 있는 배우자들의 양상을 정리해 보니, 거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에 하나를 위해서 경호 업체를 고용하는 거니까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윤신을 마중했다. 그는 다시 한번 묵례하곤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쥔 윤신이 의뢰인을 뒤로하고 주택들이 가득한 골목을 서행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마침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세헌이었다.

곧 반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들뜬 윤신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 어디야.

“아, 의뢰인 만나러 왔는데요.”

- 또?

왠지 상대방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깊게 잠긴 것 같았다. 잠시간 해저의 한가운데 빠져들었다 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동안 계속 제대로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그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솔직히 자신도 슬슬 곤란하던 참이었다. 얼른 세헌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조금 높이게 됐다.

“지금 막 나왔어요. 댁에 계세요?”

- 응, 댁에 계셔. 데리러 가?

“아니에요. 차 안이에요. 제가 곧 갈게요.”

- 윤신아.

“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꾹꾹 억눌린 침묵이 이어졌다.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세헌은 제 이름을 진중하게 불러 놓고 별말이 없었다. 기분이 이상해 뒷말을 부추기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냐. 얼른 와라. 보고 싶다.

언제 들어도 그의 고백들은 귀에 달콤했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간 숨을 참고 있다가, 겨우 대꾸했다.

“저도 사랑해요. 쏜살같이 갈게요.”

귀엽다는 양 세헌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상시에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그라서, 세헌이 이럴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핸들을 고쳐 쥐는 윤신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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