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9/51)

04. 

공익 사건 케이스의 신청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윤신의 눈매가 진지했다. 치매 걸린 어머니의 치료비 부담이 너무 커서 도움을 요청하는 의뢰인의 사연은 꽤 곤란해 보였다. 이런 경우처럼 어머니 본인이 아니기에 건드릴 수 없는 재산의 관리 자격을 얻기 위해선 후견 제도를 잘 활용하면 될 듯했다.

“민법…… 민법. 이게 어디 있더라.”

책장에 꽂힌 두툼한 책들에 눈을 돌린 윤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창문 너머로 탁 비서가 세헌의 방 문을 여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반가워하는 시선의 끝에 어떤 여자가 걸렸다. 층이 없는 단발머리의 그녀는 탁 비서의 안내에 따라 그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수석님 클라이언트인가.’

여자는 키가 꽤 컸다. 깔끔하게 갖춰 입은 투피스가 고급스러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궁금한 마음에 왼편으로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그러자 이쪽의 호기심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가 잠시간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윤신은 움찔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엄청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생기 넘치는 표정이 잘 어울렸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 자신이 ‘강세헌이라면 저런 여자랑 연애할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그런 자신만만한 이미지라 인상 깊었다.

왠지 신경이 쓰여서 책을 고르는 체하며 책장 앞에 선 채로 그쪽을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신은 서 있고, 저들은 앉아 있는 터라 각도가 비스듬했다. 여자를 마주하고 앉은 세헌의 얼굴이 꽤 잘 들여다보였다.

윤신은 이제 세헌의 얼굴 근육만 봐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방문자를 향한 대응이 확실히 썩 호의적이진 않았다. 자연히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정답지도 못했다.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남녀 사이의 긴장 같은 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빠진 윤신은 결국 책을 고르는 둥 마는 둥, 책장을 손바닥으로 훑던 행위를 관두고 밖으로 나섰다. 탁 비서에게 몇 가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차라도 준비하러 간 건지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장에게로 다가갔다.

“사무장님, 방금 강 변호사님 방으로 들어간 여자분 누구세요?”

그가 세헌에 관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궁금해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면역이 된 사무장은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도 변호사님은 처음 보시겠구나. 왜, 연초에 제약 회사 주식 인수 거래 자문해 주셨던 적 있잖아요. 거기 고명따님이에요.”

“딸요?”

매우 짧은 반문이었으나, 그 안엔 미처 담아내지 못한 호기심의 언어들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여자의 부모와 연이 있을 뿐, 저 사람 개인과는 엮일 일이 없는데 왜 펌으로 세헌을 찾아온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다년간 세헌의 밑에서 일하며 변호사의 속내를 읽는 훈련이 확실히 되어 있는 사무장이 찰떡같이 그의 반응을 이해하고 대꾸했다.

“그냥 따님은 아니고요. 그때 같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셨어요. 미국에서 재무 관리자 하다가 이쪽으로 넘어왔다네요. 강 수석님이랑도 원래 안면이 있었대요.”

“아…… 원래 아는 사이셨구나. 정확히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아세요?”

“뭐 예전에 일하다가 한 번쯤 마주치셨겠죠? 저희도 자세한 건 잘 모르고요. 그런데 확실히 저 여자분 공세가 좀 심상찮긴 했어요.”

”뭐 데이트 신청이라도 했대요?”

“네. 그래서 한동안 비서실에선 그 얘기로 난리였어요.”

‘설마 강세헌에게.’라는 심정으로 농담한 거였는데 돌아오는 말은 매우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윤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덤덤한 척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법정에선 도리어 능숙하게 할 수 있는 포커페이스 유지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진짜였어요? 왜 전 처음 듣죠?”

“어머, 도 변호사님은 모르셨구나. 세미나 가셨을 때 일인가? 1월요.”

“만약에 1월 둘째 주라면…… 네.”

“어차피 강 수석님이 사적으로 들어온 신청을 공식 루트로 거절하셨어요. 창피 좀 당했을걸요. 또 올 줄 몰랐는데 왔네요. 되게 용감하네.”

아니면 강세헌처럼 만만찮은 상대가 주는 창피마저도 감수할 만큼 그를 갖고 싶든지.

아마 둘 다일 터다.

제약 회사 주식 인수 자문 건은 이미 몇 달이 지난 사건이었다. 한데 그사이 세헌에게 그런 얘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물론 원래도 시시콜콜하게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업무에서 벗어나 저 여자 쪽에서 개인적으로 접촉을 시도했다면 그건 단순한 일 얘기가 아닌 셈이니 제게 말을 했어야 옳았다.

어떻게 비서실에서조차 다 아는 이 사건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수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평정심을 안면에 띄운 윤신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당장 알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공세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심상찮았는데요?”

“그걸 말로 어떻게 표현해요. 여자들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비서실 미혼 여성들이 다 동의했어요. 강 수석님이 워낙 연애하신단 얘기도 전혀 없고 하니까 공략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런 남자가 나한테 무너지면 얼마나 짜릿해요.”

윤신은 입술을 열없이 짓씹었다. 침묵과 연쇄해 일어난 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사무장이 어깨를 파티션 맞은편에 있는 그에게로 슬그머니 기울이며 목소리 낮춰 덧붙였다.

“강 수석님이 넘어갔단 얘기가 있어요. 둘이 가끔 만난다네요. 진짜일까요? 도 변호사님은 뭐 아는 거 없으세요?”

분노인지 섭섭함인지 알 수 없는 감각으로 바짝 약이 올라 있던 윤신의 어깨에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누군가 본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제게 말해 주지 않은 건 몹시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세헌을 의심하진 않았다.

원래 그와 마주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세헌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걸 일일이 보고하는 것도 불편했을 거라고 자위하면 납득은 됐다. 다만 창피한 건, 제 쪽은 추파를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질투해 줬으면 싶어서 일일이 다 얘기해 왔는데 두루 생각해 보니 강세헌은 여태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남자는 진짜 어떤 의미에서든 한결같다.

“도 변호사님, 여기서 뭐 하세요?”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 갑작스러운 호명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비서실 쪽으로 다가온 탁 비서의 손에 원목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추정되는 두 유리컵 속의 액체가 낮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수석님한테 제가 모르는 손님이 오셨길래요.”

윤신의 대답과 사무장의 흥미진진한 표정만으로도 대충 상황이 그려졌던지, 탁 비서가 혀를 차며 세헌의 집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장님, 강 수석님을 아직도 몰라요? 인간 대 인간으로 관심이 전혀 없는 거라니까요. 있었으면 엄청 신경 쓰고, 더럽게 갈구죠. 여기, 훌륭한 예시가 있네요.”

윤신을 향해 눈짓한 그는 문에 노크했다. 그걸 보고 있던 윤신이 사무장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말을 긍정했다.

가끔 〈이혼 문제 연구소〉 일로 조언을 구할 때마다 아직도 세헌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곤 하는 윤신을 잘 아는 비서실 직원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짐짓 의아해하는 얼굴이 된 탁 비서가 한 번 더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가 닿았다. 윤신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불안해져 창 너머를 살폈다. 세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 안에서 문을 벌컥 열어젖힌 뒤, 바깥을 향해 손짓했다. 직접 육성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의도를 모두가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곧 불편하다는 표정을 그다지 숨기지 않은 채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두 남녀가 문간에 마주 섰다. 솔직히 윤신의 생각에도 그림체는 아주 잘 어울렸다. 파티션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비주얼 좋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관찰했다.

물론 제 눈앞에서 보다 확실하게 굴지 않으면 한 열흘쯤 독수공방을 시킬 셈이었다.

이윽고 세헌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아주 근사했다.

“난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다시는 이런 자잘한 일로 독대 요청하지 마세요. 오늘 같은 용건 처리하라고 저런 거 고용하는 겁니다. 연봉 몇억씩 받아 가면서 한가한 애들.”

별안간 세헌의 날렵한 턱이 윤신을 슬쩍 가리켰다. 자연히 3인칭 관찰자였던 자신이 저 무대의 조연 배우로 승격 아닌 승격을 하며, 순간적으로 일시 정지 상태가 됐다.

‘저 사디스트가.’

윤신은 속으로 짧은 시간에 뱉어 낼 수 있는 온갖 험담을 그를 향해 쏟아 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지막하게 심호흡했다. 그러는 동안 여자의 대꾸가 이어졌다.

“제 전화를 안 받으시니까 일 핑계 만들어서 직접 찾아오죠. 공연 한 편 같이 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내가 가끔 클라이언트들한테 하는 얘기가 있는데……. 세 번 걸었는데 콜 백 없으면 더 하지 마세요. 안 받겠다는 뜻이니까.”

“강 수석님.”

“공연은 다른 사람이랑 보시고.”

“강세헌 수석님!”

“살펴 가요.”

그는 나가는 문은 저쪽이라는 듯 오만하게 턱짓했다. 여자가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비서실에서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걸 인지했는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돌아섰다.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사라지고, 세헌도 더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양 탁 문을 닫고 도로 들어가 버렸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금세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들이 야단스럽게 들려왔다.

이 일련의 상황을 쭉 지켜보던 탁 비서가 트레이를 들고 돌아서려 하자, 윤신이 붙잡았다.

“탁 비서님, 그거 버리실 거예요?”

“그래야죠. 사실 달라고 안 하셨는데 임의로 챙긴 거라서요. 한 잔 드릴까요?”

“네, 주세요. 제가 수석님이랑 마실게요.”

“어, 지금 들어가셔도 분위기 괜찮을까요? 공에 사 끼얹는 거 진짜 혐오하시잖아요.”

그도 십분 동의했다. 가뜩이나 일하는 데 쓰는 것만으로도 한참 모자란 본인 시간을 과소비하게 해 짜증이 치민 게 조금 전 세헌의 빈정거리는 말투에서 확연히 전달됐다. 실제로 미팅을 빙자한 술자리가 벌어졌을 때도, 일과 전혀 관계없는 개인적인 대화들이 시작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신은 세헌을 정말 사랑하지만, 그의 남다른 능력치가 아니었다면 벌써 성격 결함 혹은 사회성 부족으로 업계에서 사장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모두의 눈에 띄느니 그랬어도 좋았을 텐데.

어쩌면 강세헌은 매일 이런 미칠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시원한 게 필요하죠. 제가 또 강 수석님 기쁨조 아닙니까.”

능숙하게 트레이를 대신 받아 간 윤신이 그의 방을 노크했다. 그러고는 낮은 음성이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접견용 소파에 앉아 이마를 짚은 모양새로 눈 감고 있던 그가, 보지 않아도 자신이라는 걸 짐작한다는 양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탁자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마주 앉으니 세헌의 눈꺼풀도 서서히 젖혀졌다. 마침내 드러난 눈동자 색이 유난히 짙었다. 좀 피곤해 보였다.

“질문해. 5분 줄게.”

“딱 세 개만 물어볼게요. 2분이면 됩니다.”

이 대답이 꽤나 의외였던 것 같았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듯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나 자신은 정말로 상황 자체가 궁금했을 뿐이지 자질구레한 호기심이 일지는 않았다. 오늘 일로, 앞으로 다시는 강세헌이 그녀를 이런 방식으론 만나 주지 않을 걸 알아서였다.

세헌의 눈치를 살피던 윤신이 일단 마시라는 듯 유리컵 한 잔을 그의 앞에 밀어 주며 넌지시 물었다.

“1번. 여태 이런 일 많았어요? 오늘도 제가 못 봤으면 전 영영 몰랐을 거예요.”

“우리 암묵적으로 지난 일은 안 묻기로 한 거 아니었나? 네가 목격한 것만 해. 다음.”

대답과 함께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마저 해 보라는 듯 시선을 던졌다. 윤신으로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2번. 확실히 거절한 거 맞아요?”

“앞으로도 모두에게 그럴 거야. 네가 결코 헷갈릴 일 없는 아주 명확한 태도로. 다음.”

“수석님이 사랑하는 건 앞으로도 나죠?”

후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그가 퍽 진지한 태도로 눈을 맞추며 답해 왔다.

“너니까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해명하고 있겠지.”

“좋아요, 100점. 마저 드세요.”

“질투 안 해? 누구 좋아할 때 상대방 마음에 확신 같은 게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라며. 네 입으로 했던 말이야.”

“질투는 엄청 하죠. 그런데 수석님의 삭막한 인생엔 저밖에 없는 걸 제가 알아요. 화는 진짜 내야 될 때 낼게요. 싸움은 그때 해요.”

핑계, 변명, 해명.

그가 절대 하지 않는 세 가지다.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세헌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먼저 물어보라고 청해 왔다. ‘앞으로’를 전제하는 희미하고도 불명확한 제 질문에 기꺼이 긍정의 대답을 해 줬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언제 바뀔지 장담할 수 없는 거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온갖 경우의 수를 상정해서 일을 타진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건 그의 선택은 자신이었다.

더 완벽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음을 너무 줬군.”

“자업자득이십니다.”

굳이 부정하지 않은 그가 픽 웃었다. 윤신을 향한 눈동자에 미처 눌러 숨기지 못한 사랑이 가득했다.

하나 제 할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신은 그 눈빛에 화답해 주긴커녕 꼭 남처럼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세헌은 어이없단 기색을 눈에 가득 담고 동공을 끌어 올렸다.

이런 사소한 사건들이 생겨 주지 않는 이상 윤신이 이 방 안에 들어와 시간을 보내는 건 이제 조금 낯선 일이 되었다. 그걸 잘 알기에 진입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돌아가 버리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그냥 가? 너 여기 들어온 지 3분도 안 지났어.”

“연봉 몇억씩 받으면서 제가, 전혀 한가하지가 않거든요. 수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바빠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요.”

“삐졌어, 귀엽게.”

“계속 반성하시다가 퇴근하고 마저 귀여워해 주세요.”

블라인드가 여전히 걷혀 있어서 서로 살갗을 마주하진 못했다. 창문을 등진 윤신이 허공에 대고 쪽, 뽀뽀하는 시늉을 하며 입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방을 벗어났다.

비서실 직원들에게 눈인사로 수고하시라는 의사를 전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와 서랍에 고이 수납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아마 오늘 일은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들킨 것뿐이고, 세헌은 앞으로도 계속 본인에게 접근하는 여러 접촉들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본인이 알아서 잘 해결할 테고, 또 그런 칼 같은 본인을 신뢰하는 윤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강 수석님이 워낙 연애하신단 얘기도 전혀 없고 하니까.〉

사무장의 말을 곱씹는 윤신의 얼굴이 심각했다. 안 그래도 그런 얘길 만들어 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럴싸한 계기까지 생기는 걸 보니, 온 우주가 부추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단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 임자가 있다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그런데 선배 손가락 사이즈를 알아야…… 대놓고 만지거나 재면 바로 눈치챌 테고.’

사념 끝에 휴대폰을 든 윤신이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의 조심스럽고도 다소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금세 귓가에 들려왔다.

- 네, 말씀하세요.

“법무 법인 도국 도윤신 변호사입니다. 갤러리 〈산사〉 도이경 관장님께 명함 받고 연락드립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명함을 도로 내려놓은 윤신은 통화 중 메모를 병행하기 위해 랩톱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 * *

상담자의 심신 안정을 위해 조도를 낮게 꾸며 놓은 접견실 안에서, 이미 도착한 윤신의 손님이 대기 중이었다. 집무실의 그는 노트북과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겨 거기로 이동했다.

노크 후 안으로 들어서니 모자를 푹 눌러쓴 30대 중반가량의 여자가 공손하게 묵례했다. 이 모습을 본 윤신은 그 위에 제집을 찾아왔던 언젠가의 누나를 겹쳐 보게 됐다. 절박했던 그 순간을 되새기려는데, 그때의 감각이 왠지 흐렸다. 마치 아득한 옛날 일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이제 자신이나 누나는 괜찮은 모양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잘 오셨어요.”

그가 명함을 내밀면서 맞은편에 앉자, 여자가 모자를 벗으면서 한 번 더 인사했다.

“관장님 소개받고 왔어요. 동생분이시죠, 도 변호사님.”

“맞아요. 그저께 처음 통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훨씬 나아지셨네요.”

“도국에서 도와주신다고 하니 마음이 좀 편해져서요. 정말 고맙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그녀의 앞에 서류를 내민 윤신이 차분하게 질문을 시도했다.

“오실 때 차량은…….”

“변호사님이 시키신 대로 제 차는 다른 쪽으로 돌리고 중간에 택시로 갈아탔어요. 제 공방 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지금 제가 거기에 있는 걸로 알 거고요.”

대답과 함께 종이들을 본인 쪽으로 끌어간 여자가 물물 교환 하는 것처럼 저장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만 한 물체를 윤신에게 넘기면서 문장을 덧붙였다.

“올 때 준비해 달라고 하신 것들도 다 담았고요. 확인해 보세요.”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의 예감은 이 사람이 아주 모범적인 의뢰인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USB를 노트북과 연결해 내용을 눈대중으로 대강 담은 윤신이 상대방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고 본격적인 말문을 뗐다.

“저도 얘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배우자분 외도가 의심되신다고요.”

“네. 의심이라고는 하지만 전 확실하다고 봐요. 그래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 몇 군데를 갔었는데. 저한테 뭐 자꾸 내용을 써 오라고…… 의견을 정리해 오라는데 제가 거기에 쓸 게 없어서요. 남편이 외도하는 것 같다, 폭언이 심하다. 그거 외에는요. 그래서 관뒀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기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의뢰인에게 아주 많은 일들을 일임하는 변호사들이 심심찮게 있긴 있었다. 운이 나빴던 듯했다.

“의심만으로는 소송을 걸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제일 중요해요. 어디까지 갖고 계세요?”

“실은…… 안 그래도 관장님께 한 소리 들었는데. 제 수중엔 아무것도 없어요.”

타닥.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 위를 내려친 윤신이 그것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소송을 건다고 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승소할 확률은 제로에 한없이 수렴했다. 진지한 태도로 노트북 화면을 여자를 향해 돌려 준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이미지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꽉 차게 드러난 사진에 눈을 고정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죠?”

“아시겠지만 법원은 증거로 말하는 곳이라서요. 우리의 입증이 부족하면 역으로 당하는 수도 있어요.”

“바로 소송 준비는 어렵단 말씀이시죠?”

“네. 이혼이 하고 싶으신 거지, 지는 소송이 하고 싶으신 건 아닐 테니까요. 이건 오늘부터 의뢰인께서 어떻게든 찾아서 저한테 가져오셔야 하는 것들이에요. 한번 살펴보세요.”

그제야 여자가 트랙 패드를 움직여 이미지들을 한 장씩 살펴보았다. 그가 보여 준 건 법정의 판례를 통해 이미 확실하게 증거의 효력이 인정된 샘플용 예시 스케치들이었다. 상간 상대방과 배우자가 숙박업소에 들어가는 모습이나, 차량 안에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 따위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됐다.

신중하게 그걸 확인하는 여자에게, 윤신이 부연 설명을 이어 갔다.

“차량이 숙박업소에 들어간다든가, 이런 장면 보이시죠. 번호판 보이고, 창문으로 얼굴 보이고요. 혹시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발견하신다면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 두셔야 해요.”

성실하게 경청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관장님 남편…… 아니, 전 남편한테도 그런 증거로 이겼다고 했어요. 여기 도국에서 차량 안에서 성관계하는 장면을 구해 줬다고 하던데요.”

그건 세헌이 개인 정보원들 통해 취득한 증거였다. 그가 수집한 증거들은 매우 적나라했고, 필연적으로 재판에도 주효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것까지 도와주진 않았다.

다만 이 의뢰인이 누나를 통해 제게 도움을 요청한 특수한 케이스고, 또 제 쪽에서도 반대로 부탁할 것이 있어 미리 어느 정도는 환경을 조성해 둔 참이었다.

“저희 펌이 직접 그런 것까진 해 드리지 않고요. 도이경 관장님이 고용한 신변 보호 업체가 있어요. 거기서 사람 행방 추적 정도는 같이 도와주거든요. 의뢰인께서 동의하시면 제가 거기에 따로 문의를 해 두긴 할 거예요. 비용은 좀 들 수 있어요.”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그럼 제가 해야 할 건 따로 없는 건가요?”

“아뇨. 부인께서도 집이라든가, 작업실 같은 사각지대에서 이런 외도 증거들을 찾으셔야 해요.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증거는 확보할 수 있겠지만 과거를 증명하는 건 의뢰인밖엔 할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남편분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들을 복사해 오셔야 하고요.”

여자는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나눈 대화 중에 애정 표현 같은 걸 찾아오시면 크게 도움이 되거든요. 외도 상대를 부르는 애칭이라든가. 밀어를 나눈다든가. 사랑한다든지. 함께 자고 싶다든지. 그런 대화요.”

“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같은 거 말씀이죠. 해 볼게요.”

“또 배우자 본인이 대화 중 상간 사실을 실토하는 걸 녹음하시면 가장 좋아요. 어려우시겠지만, 그것도 고려해 주시고요.”

“안 그래도 관장님 조언대로 집에서 몰래 녹취 시작했어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해 준 게 제 누나라는 부분에서 울어야 할지, 그게 변호사의 입장에서 아주 도움되는 방향이니 웃어야 할지 선뜻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속으로 복잡다단한 심경을 꾸역꾸역 삼킨 윤신이 화제를 바꿨다.

“물리적인 폭행은 없었다고요.”

“네. 그런데 폭언이 심해요. 울면서 사과하면 제가 받아 줬고요. 아이 아빠니까.”

이혼하는 부부들에게서 이런 경우는 아주 흔했다. 아마 남편 쪽에서 아이를 봐서라도 참으라고 설득했을 터다.

이럴 때가 제일 어려웠다. 현상은 존재하지만, 기록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리고 제게는 그게 아주 많이 필요할 때.

“윽박지르거나 하는 장면을 본 증인은요? 혹은 자녀분.”

“없어요. 아이가 본 적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얘길 해 본 적이 없어서…….”

“만약에 봤다면 자녀 증언이나 사실 진술서로도 가능해요. 자녀분이 몇 살이죠?”

“이제 유치원 들어가요. 다섯 살.”

너무 어리다.

아직 학교도 못 들어간 제 조카의 얼굴을 떠올린 윤신이 담담하게 응답했다.

“제가 만나 봐야겠네요. 펌으로 오라고 하는 건 좀 그렇고, 밖에서 같이 한번 봬요.”

“증거 때문이라면 전 더 당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그런 방식은 별로 권장하지 않아요.”

“남편이 집요해요. 의처증도 있고요. 확실한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순간이 오면 강세헌은 어떻게 할까.

갈등이 생긴 부부에게 가정 법원은 일종의 전장이었다. 손에 무기 없이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아군이 적군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게 존재했다. 그걸 막기 위해 세헌은, 본인이 강구한 여러 가지 방법 중 제일 효율적인 걸 활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확실하게 이긴다.’라는 명제에 가장 근접한 형태일 터다.

순간적으로 그런 유혹에 휩싸인 윤신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그의 방식과 제 방식 사이의 교차점을 찾았다.

“제 생각엔…… 너무 증거가 불충분해서 남편분을 좀 자극할 필요가 있긴 할 것 같아요. 의처증 증명부터 시작하면 다른 건 줄줄이 나오게 될 거거든요. 그렇다고 의뢰인이 또 폭언을 당하실 필욘 없고요. 화살을 외부로 돌리면서 증거를 확보할 방법을 제가 찾아볼게요.”

이 방 안에서 처음 마주쳤을 땐 그래도 안정을 찾고 있는 듯 보였는데, 어느새 여자의 안색이 좀 어두워져 있었다. 대화를 지속하며 점점 자신이 역으로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손을 달싹이며 윤신이 주었던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는 가능한 한 공기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이럴 땐 아는 체를 하는 것보다, 모르는 체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노트북을 다시 제 쪽으로 당겨 온 윤신은 화면을 켜서 의뢰인이 제공한 자료들을 확인하다가, 곧 다시 입을 뗐다.

“잘못하신 거 없는데 너무 위축되지 마세요. 배우자가 알게 되더라도 주눅 들지 마시고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에 먼저 연락하시고, 바로 저한테도 전화 주시고요.”

“그럴게요.”

“주신 자료들 정보 제공 동의하시면 업체에 넘겨서 남편분 동선을 확보할 거예요. 이 안에 제가 작성해 달라고 요청드린 건 모두 충실하게 작성해 오신 것 같고…….”

그가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던 건 가사 분담 형태, 육아 분담 정도, 직계 부모 부양 여부, 월 소득 따위의 정보들이었다. 이것들은 법원의 판결 사례를 기준으로 비율을 정해, 위자료나 재산 분할의 정확한 액수를 책정할 때 필요했다.

제 요구의 의도를 이해하고 착실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온 걸 보니 그래도 의지가 확실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업체에서 행적 확보가 되는 동안, 전 다각도로 재산 분할이라든가 위자료 부분들 확인하겠습니다.”

“일정은 변호사님 편하신 대로 해 주세요. 그런데, 지난번 통화할 때 말씀하신 건 뭐예요? 변호사님도 제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라고요. 그 말 때문에 용기 얻어서 왔거든요.”

이 자리에서 꺼낼 만한 화두가 아닌 것 같아서 함구하려고 했는데, 의뢰인이 먼저 서문을 여는 바람에 뒷얘기를 이어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머쓱하게 뺨을 붉힌 윤신이 괜스레 제 턱을 손등으로 쓸면서 대꾸했다.

“음. 실은 제가 반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싶은데요. 그쪽으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 마침 장신구 디자인을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귀걸이랑, 반지, 초대장 카드 같은 것도 만들고요. 혹시 웨딩링……?”

“아뇨, 커플링요.”

“아…….”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런 말 하니까 좀 웃기죠.”

반지가 끼워진 제 왼손을 만지작거리던 윤신이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를 본 그녀가 풋 웃는 바람에 미세하게 날 서 있던 공기가 누그러졌다.

“천만에요. 더 믿음이 가네요.”

“저, 두 사람 디자인은 다르게 하고 싶은데.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재료를 뭘 쓰느냐에 따라, 또 어떤 디자인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은이 제일 빠르고 간단하긴 한데 은으로 커플링을 하실 건 아닐 거고요.”

“네, 오래가는 걸로요. 아, 그리고 누나한텐 비밀 지켜 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변호사님도 제 비밀 유지해 주실 텐데, 저도 당연히 그래야죠.”

서로 간에 비밀이 생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동시에 웃었다.

* * *

회의실 가장 상석에 앉은 세헌의 앞에서, 회사법 팀 시니어 변호사 한 사람이 몹시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브리핑에 열중했다. 세헌을 비롯한 몇몇 팀의 팀장급 변호사들과, 연차 높은 중견들, 나머지 어쏘들까지 바글거려 넓은 공간임에도 내부가 꽉 찼다.

어스름이 깔린 공간을 스크린의 불빛이 은은하게 채워 갔다.

“컨소시엄으로 대상 회사를 공동 매입하려는 상황이니, 투자금 회수 조항이 필요합니다.”

팔짱을 척 끼고 보고를 받던 세헌이 입을 뗐다.

“다 아는 얘긴 생략하고, 좀 전에 A팀은 상장이 베스트라고 얘기했어. B팀 생각은?”

“일반론으로 가서 유가 증권 시장에 상장되는 것도 괜찮겠지만, 저희 팀 판단에 인수자 쪽에선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안이 있어야 할 거고.”

“이 프로젝트의 경우 인수자가 예상보다 소극적입니다. 딜을 안정적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봐서요. 저희 팀은 풋옵션[3]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이쪽에 지분 매입할 자급력이 있어 가장 해 볼 만하고요. 클라이언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금융위 투자 가이드라인, 준비됐나?”

그의 물음에, 중간에 다른 시니어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필요한 파트만 요약본으로 준비해 뒀습니다.”

세헌의 앞은 물론이고, 각 자리마다 놓인 태블릿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가 거기에 눈을 고정하려고 하는 그때였다. 복도에서 윤신과 어떤 여자가 다정하게 대화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무심코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딱 잡혔다.

의뢰인을 대할 때 저런 식으로 수줍어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뚫어져라 창문 너머를 보던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태블릿 PC로 눈을 돌렸다. 처음엔 그럭저럭 집중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탁,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죽인 채로 그의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직원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세헌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집중이 안 됩니다. 10분만 쉽시다.”

“10분이나 말씀입니까?”

발표하던 시니어가 그의 전에 없던 기행에 어리둥절해하며 그의 행보를 가로막았다. 세헌의 입에서 나온 ‘집중이 안 된다.’라는 말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자 움직이다 멈춘 그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꼭 이런 돌대가리가 하나씩 들어와. 내가 너희 수반이야. 명령에 따르기 싫으면 집에 돌아가서 영영 쉬어. 문도 열어 줘?”

“아닙니다. 제가 브리핑 중 뭐 실수한 게 있나 해서…… 문제가 있었다면 고치겠습니다.”

물론 이 브리핑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시니어가 아니라 세헌 스스로가 문제였다. 그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양 주변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10분 뒤에 돌아올 테니까 각자 부족한 거 보충하세요.”

그러고는 의아해하는 모두의 시선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승강기 방향으로 향하자, 마침 의뢰인을 배웅한 뒤 돌아오고 있던 윤신과 모퉁이가 있는 사각지대에서 딱 마주쳤다.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윤신은 세헌을 미처 보지 못하고 쭉 직진할 기세였다. 그 앞을 간단히 막아 내니, 그제야 밑으로 보이는 구두코가 세헌의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수석님?”

“누구야.”

힐끗 제 뒤를 돌아본 윤신의 사고 회로가 팽글팽글 돌았다. 여기 선 사람이 자신뿐임을 인지한 뒤라야 그가 다짜고짜 꺼낸 말의 핵심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아, 회의하다 보셨어요? 의뢰인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죠. 누나가 직접 부탁했다던.”

“김정아 디자이너.”

“이름을 어떻게…… 저 아직 탁 비서님한테 위임장도 안 넘겼는데요.”

매우 황망해하며 대꾸하던 윤신이 얼마 전 그의 서재에서 두 번째 소원을 쓰던 날의 일을 되새겼다. 그때, 세헌이 제 외투에서 살짝 빠져나온 명함의 일부를 순간적으로 눈에 담았던 걸 떠올렸다.

“선배 카메라예요? 힐끗 보면 기억하게.”

“저 복도 지나면서 무슨 얘기 했지?”

“소송 얘기 했죠. 뭐 다른 얘기 할 것도 있어요?”

“나야 알 수 없지. 그러니까 묻겠지? 불어.”

직접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반지를 나눠 낄 사람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정말로 뭘 수공예하는 데엔 까맣게 문외한이라, 디자이너에게 그 사람의 성향을 얘기해 둬야 적당한 모양을 추천받을 수 있을 듯해서였다.

기본적으로 디자인은 깔끔한 걸 선호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이 아주 많으며, 어려운 관계의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잦다. 메모할 땐 두툼한 만년필을 주로 사용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도 빈번하다. 결정적으로 종종 태우는 담배 냄새가 배는 게 싫은 건지 손을 청결하게 자주 씻는다. 그런 얘기 따위들을 나누며 잠시 아주 즐거웠다.

한데 이 얘길 세헌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대충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냥, 소송 얘기.”

“아니, 너 다른 얘기 했어.”

그는 가끔, 꼭 귀신같다.

당황한 윤신을 내려다보는 세헌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연이어 짜증을 내거나, 빈정거리거나, 또는 그 어떤 감정 상태도 드러내지 않은 고저 없는 어투로 단어들을 뱉어 냈다.

“나는 거짓말을 빈정거리는 것만큼 자주 해. 아울러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도리어 그럴 가능성을 고려해서 늘 양동 작전을 짜지. 교란하려고.”

“알아요.”

“그런데 네가 하는 건 못 참아. 넌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안 돼. 하지 마.”

“…….”

“또 얼버무리면 그땐 화낼 거야. 다시 묻는다. 무슨 얘기 했어.”

입술을 살짝 깨문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저 거짓말 잘 못하는 거 아시죠.”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를까?”

“나중에 얘기해 주면 안 될까요? 다 말할게요. 지금 계속 물어보시면 저 거짓말해야 돼요. 왜 그래야 하는 건지도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깨끗한 눈동자에 비친 간절한 부탁을 읽어 낸 건지, 그가 윤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짧은 한숨 끝에 결국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알겠어. 가 봐.”

공손하게 묵례한 윤신이 세헌을 지나쳤다. 차분히 몇 걸음 걷다가 괜히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어느 때고 근사한 그의 연인은 같은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곳에 버틴 채로 제 모습을 봐 주자, 더 앞으로 못 가겠는 기분이었다. 다시 다가와서 세헌의 앞에 우뚝 선 윤신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뒤이어 짧은 찰나를 이용해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밑부분에 키스했다.

“선배 회의 중에 나온 거죠. 여유 몇 분 있어요?”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양, 한 손으로 윤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세헌이 다른 한 손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5분.”

“충분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의 단단한 손을 덥석 쥔 윤신은 마치 첩보전을 펼치듯이 빠른 속도로 승강기 오른편의 비품실로 향했다. A4용지와 공구 같은 자재들이 가득 있는 그 안으로 세헌을 쏙 밀어 넣곤, 이 모습을 본 사람이 없는지 밖을 확인했다.

뒤이어 안에서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탁자로 세헌을 몰아붙인 윤신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능숙하게 허리를 끌어안아 윤신의 자세를 고정하고 지탱해 주었다.

그들은 바로 얼굴을 맞대 입술을 포갰다. 겹겹이 재료들이 겹쳐진 샌드위치처럼 서로의 살갗을 위아래로 쌓은 뒤 빨다가, 윤신이 먼저 그의 보드라운 표피 사이로 혀를 숨겼다.

가뿐하게 들어간 혀끝이 세헌의 혀와 적극적으로 엉켰다. 질척거리는 두 개의 살덩이가 익숙한 위치를 찾아 맞물렸다. 입 안 곳곳을 헤엄치듯이 들쑤시던 윤신이 입술을 떼어 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이 5분을 최대한 알차게 써야겠다는 듯 그의 얼굴 이곳저곳에 정신없이 키스해 댔다.

쪽, 쪽. 보드라운 입술이 쫀쫀한 피부 위에 닿을 때마다 야릇한 마찰음이 일었다. 윤신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끌어 올려 뒤통수를 쥔 세헌은 보은을 하겠다는 듯 관자놀이 위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왼손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4분 지났다.”

충분하다고 말했던 4분 전의 자신을 원망하며, 윤신이 세헌의 품에 더 빠듯하게 안겼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냉정하게 이마를 쑥 밀어낸 세헌이 몸을 곧추세우곤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가 몸을 걸치고 있던 탁자에 대신 걸터앉은 윤신은 꽤나 섭섭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관찰했다.

“와, 진짜 일 앞에선 가차 없다. 가끔 정말…….”

말을 도중에 관둔 윤신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끝까지 해야지.”

“제가 현명하게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 말해 놓고 안 한 척하는 버릇이 있더라.”

그야말로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잘 알면서 꼭 한 번씩 까다롭게 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맞불을 놓긴커녕 세헌이 기대하고 있을 더 많은 사랑을, 얼마든지 속삭여 주고 싶어진다.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딱 1분만요.”

“나 포함 저 회의실 안에 있는 인간들 1분씩, 다 합친 총액이 얼만 줄은 아나? 내가 이미 머저리같이 너 쫓아 나오면서 수천 날렸어. 넌 3분 뒤에 나와.”

흐트러진 옷을 모두 추스른 세헌이 윤신의 이마에 입술을 문질러 주곤 돌아섰다. 뽀뽀는 해 주지만 결국은 매몰차게 가 버린다. 멀어지는 탄탄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윤신이 그를 흔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사랑해. 가끔 개새끼지만.”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세헌이 멈칫했다. 손이 삐끗한 것 같았다.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야릇하게 구긴 그는, 찰나간 사념에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신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대듯 덧붙였다.

“돈 많이 벌어 와, 자기야.”

후우,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몰아쉰 세헌이 놀랍게도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탁. 여지없이 문은 닫혔다.

다만, 가끔 호칭에 변화를 꾀할 때마다 영 신통찮은 반응을 보였던 여태까지와 달리, 이번엔 그가 분명하게 화답했다.

방금 이거 뭐지.

그래?

그으래?

닭살 돋는다고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제게 맞춰 주려는 정성이 가상했다. 아닌 체하지만 여기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제 양쪽 귀를 번갈아 탈탈 털어 보는 시늉을 하던 윤신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서툴지만 다정한 강세헌이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세헌의 이름 세 글자를 육성으로 내지르게 될까 봐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하게 가렸다. 그러고는 최대한 소리 죽여 정신없이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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