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얼핏 보면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그저 쌓여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론 일정한 질서가 있었다.
집무실의 번잡한 책상 주변부를 더듬어 원하는 걸 정확히 찾아낸 윤신이 도톰한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있던 휴대폰을 고쳐 들며 대꾸했다.
“이번 달로 3년이 됐다는 말씀이시죠?”
- 예, 지난주 월요일입니다.
그와 통화 중이던 상대방은 종로의 아주 유명한 어학원에서 강의하는 스타 강사로, 얼마 전 아내가 집을 나간 지 꼬박 3년째가 됐다며 의뢰를 청해 왔다.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찾지 말라는 의미의 쪽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연락 두절이 됐는데 본인의 유명세 때문에 드러내 놓고 수배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꽤 오래 흘렀다는 거였다.
윤신도 대학 시절 이 강사의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만큼 저명한 인사였다. 배울 만큼 배운 데다 잃을 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입지에서 괜한 구설수로 몸값이 떨어질 걸 우려해 대처가 소극적이었다는 말 자체는 납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방관적 태도가 이해 안 됐다. 자취를 감춘 이는 단순한 친구도 동료도 아닌 평생을 약속한 배우자였다. 물밑에서 몰래 시도할 수 있는 여러 수색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찾지 않고 방치했다는 건 필시 의도가 있었을 터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 법에서 3년이라고 한다던데요. 배우자 생사가 3년 이상 불명일 경우 이혼 소송이 가능하다고요. 그래서 이쪽으로 이름 있는 도 변호사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인간 군상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할 정돈 아니지만, 매일같이 다양한 클라이언트들을 접하면서 윤신도 어느 정도는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육이 생겼다.
어쩌면 이 남자는 아내가 집을 나간 처음부터 이혼을 염두에 뒀으리라. 아울러 배우자가 가출을 시도하게 된 원인 또한 이 사람의 문제일 공산이 컸다.
그러나 무결한 의뢰인의 사건만 수임한다는 건 최소한 도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사치였다. 윤신은 영 내키진 않지만 수임을 하겠다는 표식으로 서류 상단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맞아요. 3년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민법 840조 5호요.”
- 혹시 그거보다 더 장기간 연락이 두절되거나 그러면 혼인이 취소되고 그런 법은 없겠죠?
“사망하지 않는 이상 헌법엔 그런 규정이 없어요. 나라에서 정한 제도에 약속을 하신 거기 때문에 무효화하려면 반드시 소를 거셔야 해요.”
- 만에 하나 소재 파악은 안 되지만 생존해 있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됩니까.
사락. 종이를 뒤로 한 장 넘기던 윤신의 손 움직임이 멈췄다. 맞은편에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세헌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탁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왔던 연락이나 혹은 중요한 안건에 대해 간략히 보고하는 듯했다. 그걸 들은 세헌이 추가로 뭔가를 지시하며 탁 비서를 어디론가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윤신은 그를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살짝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책상에 걸터앉아 세헌이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해 주기만 고대하고 있는데, 마침 돌아섰던 그와 눈길이 부딪쳤다.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명확히 고정됐다.
화색이 된 윤신이 손을 흔들었다. 한데 그가 그대로 블라인드를 쳐 버렸다.
차락, 하는 야박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참, 너의 싸가지도 한길 소나무다.’
문제는 연인에게조차 짤 없는 저런 각박한 점까지 사랑스러워 미치겠는 자신이다.
‘강세헌 너무 좋아, 젠장.’
속으로 궁싯댄 윤신은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내분이 어디 계신지는 몰라도, 생존하긴 한다는 게 입증되면 말씀이시죠? 음, 그 경우엔 이 이혼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요. 그땐 ‘악의의 유기’를 이유로 소를 제기하셔야 됩니다.”
- 확실하게 단정을 해 주세요. 그러니까 도윤신 변호사님 의견에, 제 경우 와이프가 없이도 소송 제기가 가능하단 말씀이네요? 아내의 소재가 불명이니까요.
제 이름을 거론하며 확실하게 알려 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지금 통화의 내용을 녹취하고 있는 듯했다. 십중팔구 중간에 혹여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의 책임이라고 몰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다. 혹은 아내의 소재가 소송 준비 중 밝혀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파 두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이런 의뢰인을 한두 번 상대한 것도 아니라, 제게도 내공이 생겼다.
눈을 살짝 접어 인상을 쓴 윤신이 부드럽고도 딱딱한 다변적인 말투로 응답했다.
“네. 소장 송달하고 재판에 참석하게 만드는 일이 어려우니까, 생사가 3년간 불분명했다는 걸 우리가 증명하면 됩니다. 그러면 법원에서 공시 송달[1]로 소장을 송달하고, 배우자 출석 없이 궐석 재판[2]이란 걸 해요.”
생사 불분명은 배우자가 관계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여서, 꽤 중대한 이혼 사유였다. 다시 나타난 배우자가 소송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도 그 혼인이 부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남겨진 쪽에서 생사 확인이 어렵다는 걸 까다롭게 입증을 해야 하는 거였다.
-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카드 사용 내역 같은 건 뽑아 뒀어요.
이 의뢰인은 증거까지 철두철미하게 미리 준비를 해 둔 모양이다.
“저희 펌 비서실에서 오늘 중으로 목록 보내 드릴 거예요. 그것 중에 저희한테 제공해 주실 수 있는 정보들 정리하셔서 내주까지 회신해 주십시오. 내용 확인한 후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펌에서 정식으로 뵙는 걸로 하죠.”
- 잘 좀 부탁드릴게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윤신은 까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을 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가끔 이런 찝찝한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다. 수임을 거절할 만한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다. 아울러 특별히 의뢰인이 나쁜 사람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주 묘하게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그런 사건들을 맡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조금 전 동그라미 쳐 두었던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 비서실 쪽으로 향하자, 뭐 필요한 게 있느냐는 듯 사무장이 살짝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사무장님. 안 일어나셔도 돼요.”
파티션 앞으로 직접 다가간 윤신은 괜찮다는 양 재차 손짓하며 서류를 건넸다.
“이분요. 저희 정보 협력 매뉴얼 보내 주세요. 회신 오면 알려 주시고요.”
“배우자 생사 불분명…… 어라, 이 건부터 하시게요? 제가 변호사님이 관심 가지실 만한 거 여러 건 올려 드렸는데요. 가정 폭력 건이랑, 빨리 도움 필요한 케이스들요. 안 하세요?”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팀장님이 이분부터 하래시네요. 차근차근 할게요.”
“아아, 가사 팀장님이. 그분 너무 유명세에만 신경 쓰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어째 요즘 도 변호사님 계속 이런 건만 맡으시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아무튼 네, 알겠습니다.”
이제 윤신의 성향을 잘 아는 비서실에서 나름대로 사건을 선별해서 가져다주긴 하지만, 위에서 직통으로 명령이 내려오면 그것들은 미뤄지는 수순인 게 당연했다.
신경 써 줘 고맙다는 듯 사무장에게 눈인사한 그가 비서 팀 직원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세헌의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잠긴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빈틈 사이로 제 얼굴만 쏙 밀어 넣은 윤신이 서류를 보는 데 몰두하고 있는 세헌을 가만히 직시했다.
몇 초가 지나도 상대방이 들어오는 기미는커녕 조용히 관찰하는 시선만이 느껴지니, 일에 열중하던 세헌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냉담한 눈동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일 줄 알았다.
본인 집무실 방문을 열고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하게 만들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의미 같았다. 무언의 힐난엔 아랑곳하지 않고 뽀뽀해 달라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그걸 관찰하던 세헌은 이내 다시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벌써 한 번 저 방에서부터 블라인드로 차였던 윤신은 울컥했다. 지기 싫은 마음에 그 자세 그대로 살짝 눈을 감아 좀 더 키스를 졸랐다. 시야가 어둠에 차단돼 있어 정확힌 모르지만, 한 번쯤은 그가 제 쪽을 힐끗 쳐다봤으리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탁, 펜대를 가볍게 내던지는 소리가 들려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세헌이 등받이에 등을 기댄 오만한 자세로 자신을 빤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만 까불고, 문 닫고 들어와.”
그제야 승리감에 도취되어 문을 닫고 안에 들어섰다. 뚜벅뚜벅 걸어 세헌의 앞에 서니 네 속쯤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그가 손끝 하나 대지 않는 거였다.
“할 말은. 알겠지만 브리핑은 가능한 한 간략한 언어로 핵심을 담아서.”
“들어오라고 했으면 저를 막 더듬고 그래야죠.”
“나도 간절히 그러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말고. 두 시간 뒤에 놀아 줄게. 용건.”
“많이 바빠요? 이번 주는 좀 괜찮을 줄 알았어요.”
“대체로 괜찮아. 그 와중에 급히 봐야 할 게 생겼어.”
분주한 상황에서 자신이 방해하는데도 최대한 참아 주는 그가 느껴졌다. 윤신은 비로소 제 타이밍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식했다.
이제는 팀이 다르다 보니 그에게 급작스럽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고, 또 처리할 시간이 필요해지는 때를 바로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주 가끔 이런 일이 빚어졌다. 왠지 초조해진 윤신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저 첫 번째 소원 오늘 쓸게요. 이따 같이 퇴근하시죠.”
팔짱을 척 낀 그가 눈살을 미세하게 구겼다.
“이거 소원 자가 증식의 서막인가? 벗겨 먹힐 쪽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첫 번째 소원을 쓸 때 그가 규칙을 깼다는 이유로, 제 소원은 다시 세 개가 되었다. 램프의 지니로선 그걸 앞으로도 계속 증식하게 만들 거냐는 물음을 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에요. 앞으로 딱 세 개만 쓸게요.”
이 대답에 세헌이 의외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편법은 삶을 꽤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데, 아는 거지?”
“제가 양심적인 사람이라서…… 라기보단 생각해 보니까 선배가 너무 매 순간 양보를 많이 해서요. 진짜 머저린가 봐요. 아는데 가끔 까먹어요. 지금 1초가 아까운데 참는 거죠?”
“참는 거지.”
“죄송해요.”
“왜 참는 거 같은데.”
“그거야…… 절 너무 사랑해서?”
“…….”
“이 타이밍에 침묵하시는 거 별로 본인 인생에 도움 안 될 텐데요.”
“당연히 그래서지. 아무리 머저리라도 그건 까먹지 마.”
아무래도 그는 지금 보이는 데면데면한 태도가 귀찮거나 번거로워서가 아님을 윤신이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이런 세헌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제 기분은 널을 뛰었다. 감정 기복 파동이 요란한 편은 아닌데도 강세헌은 가뿐히 그 일을 해냈다. 때론 직접적인 언어가 아니어도 좋았다. 에두른 말조차도, 제 언어를 빌린 소극적 동의조차도, 누굴 좋아해 본 적 없는 그로선 어려운 심정으로 하는 고백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윤신에겐 세헌의 표현들이 모두 소중했다.
날아갈 듯 기분 좋아져 픽 웃게 됐다.
“제가 훨씬 더 사랑해요. 방해 그만하고 가 볼게요. 하던 일 하세요. 이따 봐요.”
아쉬운 마음에 1초만 더, 1초만 더 하고 뭉개게 될까 봐 서둘러 세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한데 그런 윤신을 그가 도로 불러 세웠다.
“윤신아.”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어요? 나가는 길에 사무장님한테 말씀드릴게요.”
“너야말로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영문을 모르는 듯하자, 세헌이 직접 힌트를 제시했다. 그는 나른하게 살짝 고갯짓하더니 제 입술을 길쭉한 검지로 툭툭, 가볍게 쳤다.
아. 뒤늦게 중요한 걸 깨달았다는 양 윤신이 빠르게 세헌에게 뛰어갔다. 하얀 뺨을 두 손으로 붙잡고는 제 것이라고 도장 찍듯이 쪼옥, 입 맞춘 뒤 떼어 냈다. 더불어 매우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세헌의 입술을 혀끝으로 할짝인 뒤, 꾸벅 공손하게 인사했다.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듯 단박에 자세를 틀어 밖으로 나가 버리는 동안, 집무실에 남겨진 세헌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만년필을 쥐려던 그의 곧은 손가락 사이에서 펜대가 툭 떨어졌다. 허무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세헌은 짜증스럽게 마른세수했다.
이미 윤신은 사라지고 없는데, 눈앞에 저 문을 조금 열고 머리만 밀어 넣은 채 눈을 감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갈증이 나 목구멍이 간지러운 기분이 치밀었다. 본능적으로 방금 전 윤신이 닿았던 제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그는 입술 사이에 그걸 끼웠다.
그리고 손끝을 더 안쪽으로 넣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돌았군.”
이런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 *
윤신은 신중하게 고르고, 고르고, 또 골랐다.
사실 세헌은 웬만하면 제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그라도 절대 해 주지 않는 몇 가지가 확실하게 존재했다.
예컨대 누나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알리는 일이라든지, 왔다 갔다 하기 복잡하니 서로의 집을 하나로 합친다든지, 제대로 커플링을 맞춘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랬다. 이 기회에 그런 미지의 세계 중 그도 들어주기 어렵진 않을 몇 가지를 해결해 버릴 심산이었다.
고민하던 와중 불현듯 이 장소가 떠올랐다.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사택에서 한참 떨어진 창고형 대형 마트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운전석의 세헌은 힐끗 앞 유리 밖을 내다보곤 믿기지가 않는다는 기색으로 핸들을 강하게 쥐었다. 뒤이어 예상 그대로 기각을 선언했다.
“안 돼.”
물론 이럴 줄 알았다.
윤신이 안전벨트를 풀면서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
“소원이잖아요.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나름대로 소프트한 걸 고른 거라고요.”
“하나도 안 소프트해. 나한테 이건 고어야. 몰라?”
“다른 건 다 해 주면서 별것도 아닌 이건 안 된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죠. 변호사님은 맨날 클라이언트들한테 이거 잘해야 된다고 충고하면서, 왜 본인은 안 해요.”
“그거랑 이거랑 같…… 징그럽게 남자 둘이 무슨 카트 끌고 생필품 쇼핑을 해. 애초에 난 대형 마트에 와 본 적이 없어. 다른 거로 해.”
왠지 그의 안에 답이 있는 듯해, 떠보듯이 물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수석님 머릿속에 이미 답 있는 거죠.”
“마침 봐 둔 매물이 하나 있어. 차명으로 내가 먼저 매입해서, 또 다른 차명으로 양도를 하는 방식이면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비법이네 불법이네 난리 칠까 봐 먼저 말해 두는 건데 세금은 국세청에서 내라는 대로 낼 거야.”
봐 둔 매물?
윤신이 한 단어에 꽂혀 눈을 반짝거렸다. 혹시 사택을 나가 자신과 둘이 살자는 얘기인 건 아닌가 기대감이 치솟았다. 사택은 펌에서 가깝고, 관리가 편하다는 장점만큼 언제나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단점도 명확했던 터였다.
제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알겠다는 양, 세헌이 설명을 더했다.
“재테크 용도야. 스스로 돈을 좀 벌어.”
윤신은 지금도 또래 평균에 비해 압도적일 만큼 잘 벌었다. 물론 세헌과 비교할 바는 못 됐으나, 그가 단순한 수입 격차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누나가 제 세컨 카를 교체해 주었다. 꽤 오래 몰기도 했고, 생일도 겹쳐서 겸사겸사 선물해 준 거였다. 그때부터 마음에 영 안 들어 하는 기색이더니 거기까지 생각을 전개해 뒀던 듯했다.
그녀가 ‘제 것’인 윤신에게 물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런 거 말고 저랑 작정하고 동거를 해 달라고요.”
“그건 이미 반은 하고 있잖아.”
“그게 또 사택이랑은 다르다니까. 아니, 징그럽게 다 벗고 섹스도 하면서 이게 뭐 그렇게 싫다고. 됐어요. 저랑 장 보기. 그게 제 소원이에요. 협상 불가.”
“도…….”
“결렬. 내려요.”
이름 세 글자 중 성만 겨우 뱉어 낸 그 순간, 윤신이 그의 말허리를 훅 잘라 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여지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차 밖으로 먼저 나가 버렸다. 운전석에 앉아 잠시 갈등하던 세헌이 결국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마지못해 하차했다.
지하 주차장 모퉁이에 겹겹이 겹쳐 있는 카트를 하나 꺼낸 윤신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묘하게 찜찜해하는 기색으로 다가간 세헌은 복잡한 기미가 만연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쓸었다.
“혹시 날 주부로 만들 생각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걱정 마세요. 변호사가 훨씬 더 잘 어울리시니까.”
“그렇다면 내가 가사 일에 대체 인력을 고용할 수 있게 나를 놔두는 방법은?”
강세헌이 고용한 아주머니는 고급 식자재 마트와 인근의 백화점에서 반드시 정해진 브랜드의 제품만 샀다. 재산 증식에 엄청난 소질이 있는 이 돈 많은 물주로부터 브랜드 지정 외엔 다른 어떠한 요구 조건도 없었다.
이런 창고형 마트에서 사는 공산품 같은 것들이 싫은 거라면, 차라리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윤신이 작은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 온 걸 챙겨 주면 그건 그거대로 군소리 없이 두고 썼다.
바꿔 말하면, 이 남자는 생활의 근간이 되는 세간에 아무런 관심도, 취미도 없다는 뜻이다.
“이참에 이런 것도 해 보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한 애인인 게 불만인가? 너무 복에 겨운 거 아니야?”
“물에 빠진 사람 구하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이 왜 존재하는 거 같으세요. 예로부터 저만 이러는 게 아니란 뜻이죠. 이거나 잡으세요.”
윤신은 척, 카트의 손잡이를 세헌에게 내밀었다. 그는 불특정 다수의 손길이 닿았을 카트를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졌다는 양 몸을 움직였다.
“가지가지……. 비켜.”
마침내 그가 그걸 잡곤 앞서 걸었다. 세헌의 옆을 쫓는 윤신은 몰래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왜 그렇게 싫어요? 마트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어요? 와 본 적도 없다면서요.”
“난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불편해.”
왠지 그다우면서도, 조금은 의외의 답이었다.
“본인은 바쁜데 다들 느긋해 보여서?”
“그것보단 내일은 뭘 해 먹을지, 욕실에 샴푸는 떨어지지 않았는지, 어떤 세제가 더 깔끔하게 닦이는지, 휴지는 몇 상자가 남았는지 그런 거 고민하는 감각을 나도 알게 될까 봐. 그거 너무…….”
세헌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인지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나 말줄임표에 숨은 말들을, 윤신은 어쩐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온 그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듯했다.
“이런 게 행복이면 내가 평생 불행하게 살아온 게 되잖아.”
“…….”
“이래서 내가 남이 쓸데없이 행복한 걸 싫어하는 거야.”
꺼림칙하고 싫은 게 아니라 낯설고 불편한 것이라면, 그 감각을 알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일 뿐이라면 이제부터 자신이 하나씩 가르쳐 주면 되는 일이다. 진작 더 강하게 졸라서 함께 와 봤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윤신이 세헌의 손가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폐점이 가까운 아주 늦은 시간이라 사위는 조용한 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윤신이 마침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 전의 사각지대에서 고개를 기울여 세헌의 뺨에 쪽, 뽀뽀했다.
“볼테르가 그랬대요. 자긴 행복해질 거라고요. 왜? 건강에 좋으니까. 큰일 났다, 강세헌. 이제 튼튼해지겠다. 가뜩이나 체력 괴물인데…….”
‘뭔 소리야.’ 하듯 윤신을 어이없어하며 보던 그는 픽 웃곤 이내 여기에도 하라는 듯 얼굴 반대편을 슬쩍 내밀었다. 다시 주변을 살핀 윤신이 그 위에도 입 맞춰 주자,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는 것처럼 입술 위에 키스해 주었다.
그도 ‘우리 같이 쇼핑해요.’에 들어 있는 소소한 바람들을 아주 모르진 않는 모양이다.
줄곧 이런 게 너무 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발개진 뺨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휴대폰을 꺼낸 윤신이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뒤따라 올라타는 세헌을 마주한 채로 화면을 열어 보여 주었다.
“선배, 이거 봐요. 이게 오늘 우리가 사야 될 것들이에요. 당장 저희 집에 없는 거.”
그는 꽤 신중하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유 유통 기한 꼭 확인하고 사기, 수석님 드실 탄산수 성분 꼼꼼하게 확인하고 고르기, 버터랑 체다 치즈 칼로리 제일 낮은 걸로, 시리얼은 그래놀라가 포함된 것으로.
거기까지는 나름대로 순조롭게 눈에 담나 싶다가 돌연 인상을 썼다. 그의 반응을 보고 대충 어디쯤을 읽고 있는지 눈치챈 윤신이 맞은편에서 카트를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능할까요?”
그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윤신이 직접 작성해 온 목록을 육성으로 딱딱하게 뱉어 냈다.
“내가 술 사면 수석님이 못 사게 막기.”
“……안 되나요?”
“수석님이 과일을 고르면 그건 신선도가 별로라고 내가 타박 주기.”
“전 자신 있어요.”
“샴푸 두 개 붙어 있는 거 가격 비교해서 장만하려고 하는데 수석님이 이게 향이 더 좋다면서 바꿔서 넣기. 쌀 살 때 무거울 테니까 들어 주겠다고 대신…… 더는 못 읽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윤신에게 휴대폰을 탁, 하고 다시 넘긴 세헌이 그것으로는 모자랐던지 판판한 복부를 카트로 밀어냈다. 구체 관절 인형처럼 삐걱대다 몸이 후방으로 밀린 윤신이 에스컬레이터에서 겨우 벗어나며 그를 흘겼다.
“제가 남자라는 점을 너무 알차게 이용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뒷걸음질 치면 어떡해. 버텨야지. 넘어져, 이리 와.”
밀어낼 땐 언제고, 뒷걸음질 치며 윤신이 조금 비틀거리자 그가 득달같이 손을 내밀었다. 손톱 끝이 잘 정리된 깔끔하고 예쁜 손을 가만히 보던 윤신이 마지못해 잡는 척 붙잡고는 세헌의 곁에 나란히 섰다. 정말 새삼스럽게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넘어져, 이리 와.’라는 아이 다루듯 하는 말을 ‘저’ 강세헌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이야.
세헌과의 연애는 이래서 좋았다. 그를 다 안다고 착각할 즈음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또 그 특별함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 함께 주지해 주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그냥 세헌의 수려한 외모에 관심을 두는 건지 힐끗거리며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윤신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카트를 밀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긴장한 귓전에 낮게 속삭이는 건 덤이었다.
“콘셉트가 뭐야. 신혼 부부?”
늘 그렇듯, 윤신은 순순히 자백했다.
“당연하죠. 그런데 여기도 사람들이 쳐다봐요. 일부러 멀리 온 건데, 수석님 알아본 걸까요?”
“별수 있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아, 이쪽에 채소랑 과일 있다.”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과일 코너로 이동한 윤신은 개별로 포장된 체리를 적당히 카트에 담았다. 그러다 불현듯 세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르는 제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냉장고는 집에 와 주시는 아주머니가 알아서 주기적으로 채워 넣어 두시기 때문에, 사실 윤신도 신경 쓸 일이 많진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게 좋은 과일인지 아닌지 대충 짐작은 되지만 명확히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하나 능숙한 체하며 과일을 보는 시늉을 하니, 세헌이 그 속이 뻔히 보인다는 듯이 눈짓했다.
“도윤신 너 과일 볼 줄 모르지.”
“이게 신선하고 맛있는 거예요.”
“확신해?”
“신선…… 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맛은 있을걸요.”
투명한 봉투에 든 새빨갛지만 조금 물러 있는 사과를 들어 보이자, 그가 짧게 한숨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사과 아래쪽 엉덩이 주변이 노랗고, 꼭지가 깊숙이 박힌 것들이 담긴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알이 단단한지를 만져 보더니 윤신이 고른 것과 바꿔 카트에 담았다.
“드라마 콘티를 써 올 거면 자료 조사를 제대로 하는 게 기본 아닌가?”
발끈해서 제 봉투를 다시 집어 든 윤신은 반박했다.
“제가 고른 게 옳은 선택이면 어떡하실 건데요. 지금 큰 실수하시는 거예요.”
“난 실수 안 해. 내려놔.”
“네…….”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그가 채소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윤신은 머쓱해하며 사과를 내려놓고 따라붙었다. 생각해 보니 갑을이 바뀌긴 했지만 결론적으론 자신이 써 두었던 쇼핑 목록의 방향성을 충실히 지킨 셈이었다. 기분이 들떠서 세헌의 팔짱을 끼듯이 살짝 몸을 기대고 어리광을 피우자 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적당히 샐러드용 채소를 고르곤, 드레싱도 몇 개 담았다. 세헌이 선택한 것들은 모두 평상시 윤신이 자주 먹는 맛들이었다. 윤신이 선택한 건 정확히 그 반대였다. 서로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세헌이 평소에 얼마나 제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기쁘기도 했다.
계속 장을 보다 보니 의외로 윤신이 서툴고, 세헌이 능숙했다.
윤신이 처음 보는 브랜드의 제품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리뷰를 훑는 동안, 세헌은 직접 영양소 따위를 확인하고 비교했다. 그렇게 잡곡류와 육류, 냉동식품 따위들까지 차곡차곡 고르다 보니 금세 카트 안이 쌓여 갔다.
“우리 이제 위로 올라가요.”
“여기선 다 골랐어?”
“네, 샴푸 떨어졌어요. 그거랑 유제품 사야 돼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며 카트를 잡은 세헌이 윤신의 손을 끌어 갔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도리어 과감하게 서로의 손을 겹쳤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러워진 윤신이 손등을 움찔했다. 이에 그가 천연덕스럽게 더 꽉 짓누르듯 깍지를 꼈다. 고개를 돌리고 벽을 바라보는 윤신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보디용품 따위들이 전시되어 있는 코너로 이동하니 아래층과 달리 향긋한 향기가 코끝에 스몄다. 윤신은 샴푸의 향들을 직접 꼼꼼하게 맡아 보았다. 세헌에게도 맡아 보게 하면서 제일 합리적인 가격대의 통 두 개를 양손에 쥐어 들었다.
“제가 원래 가끔 쓰는 건 이건데요.”
그에게 먼저 보라색 통의 향기를 맡아 보게 한 윤신은, 곧 반대편 손에 든 하늘색 통을 내보였다.
“이번엔 이거 사 보려고요. 어떠세요? 선배도 쓸 거니까 의견 수렴할게요.”
두 번째 샴푸의 향까지 코끝으로 음미한 세헌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제게 시선만 고정한 채였다. 의아해진 윤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 쓰는 비싼 브랜드 아니라서 그래요? 저희 집에 둘 거니까 대충 타협하시죠.”
그러자 이번에도 입 다물고 있던 그가 돌연 손을 뻗어 윤신의 머리카락을 손에 한 움큼 쥐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향기를 맡아 보는 동안 서로의 몸이 밀착됐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를 재빨리 확인한 윤신은 그가 제 향기에 집중하는 사이 긴 목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요.”
그는 여전히 별말 없이 윤신의 머리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베이지색 통의 외부 뚜껑을 열어 윤신의 코끝에 대 주었다. 아까 자신이 이것저것 고르면서 향기를 맡게 해 주었던 것들 중 제일 담백하고 깔끔한 향기의 샴푸였다.
보라색과 하늘색 통을 둘 다 손에서 빼앗아 간 세헌이 그것들을 제자리에 도로 내려놓고, 본인이 직접 고른 걸로 카트에 놓았다. 이런 말도 함께 덧붙였다.
“넌 이런 향이 더 어울려.”
필연적으로 윤신의 머릿속에 자신이 적어 왔던 쇼핑 목록이 떠올랐다.
수석님이 이게 향이 더 좋다면서 바꿔서 넣기.
그걸 곱씹는 입가에 샴푸 향기보다도 더 향기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서서히 지는 꽃처럼 사그라졌다. 이 급격한 온도 차의 영문을 모르는 세헌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콘셉트 회의 다시 해?”
“아뇨.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 좋아서요.”
“참고로 그게 진짜로 더 어울려.”
“전 앞으로 샴푸는 이거만 쓸 거예요.”
당신이 너무 다정해서. 그런데 오직 제게만 상냥해서. 그걸 자신만 알 수 있어서.
그게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
그 벅찬 감정이 도리어 자신을 심란하게 했다.
그를 좀 더 합법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갖고 싶었다. 강세헌이 제 것이란 걸, 제겐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란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인파가 모두 지나간 뒤 숨어서 몰래 키스하는 게 아니라 손을 잡고 걷고 싶고, 가끔은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서로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싶었다.
연인들 사이에 애정이 생기면 더 오래 함께하는 미래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윤신도 약혼이나 결혼 같은 형태를 늘 염두에는 두고 있었다. 다만, 그런 한편으론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함께 인지했다.
그래서 여태까진 그저 서로의 애정을 더욱 공고히 해 주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화두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겨 왔다. 한데 불현듯 강세헌을 완벽히 가지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감각이 밑부터 올라와 버티기가 힘들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세헌을 끌어간 윤신은 애써 표정을 지우며 유제품 코너로 이동했다.
“저 선배랑 가끔 이렇게 장 보고 싶어요.”
불쑥 이런 말을 꺼내자 쇼케이스 앞에서 버터를 고르던 그가 멈칫했다.
막상 해 보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선배는요? 저랑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는데 왜 말을 잘 안 해요?”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든 세헌이 거절할 리 없었다. 말론 거절해도 진짜로 마음에 안 들어 할 리 만무했고, 만에 하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순간엔 양보할 걸 알았다.
오늘, 지금 이 순간처럼.
이쪽도 얼마든지 그렇게 해 줄 수 있는데, 그는 왜인지 좀처럼 털어놓질 않는다. 그게 꼭 강세헌이 몰래 남겨 둔 1센티의 거리 같았다. 허물고 싶었다.
제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세헌이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곤 눈을 마주쳐 왔다.
“넌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
“그 말을 선배한테 들으니까 웃기네요.”
“넌 이미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있어. 그리고…….”
그는 카트를 사이에 두고 지그시 윤신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곧 발그레해진 뺨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그 따뜻한 손끝에 말로는 빚어내지 못한, 억누른 애정이 가득했다.
“글쎄, 난 너랑 진짜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꼭 제 사고 체계 안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세헌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돌려주었다. 필연적으로 윤신의 어깨부터 발목까지 전부 얼음이 되고 말았다.
강세헌은 자신을 매 순간 충만하리만치 사랑하고, 또 그걸 시시때때로 알게 해 주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듣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말이지 전율이 일 정도로 좋았다.
너무 기뻐서, 외려 장난스럽게 흘려 넘기게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꼭 신기루 같아서일까.
“그 제도에는 회의적이라고 할 땐 언제고.”
“그러게. 여기 자주 오면 안 되겠어. 두 달에 한 번 이상은 안 되는 걸로.”
탁. 버터와 체다 치즈, 그리고 우유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골라서 카트에 넣은 그가 윤신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카트를 직접 잡아 운전하게 하면서 뒤에서 윤신을 밀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시리얼 코너를 향해 뚜벅뚜벅 걸으면서도 윤신의 뇌리는 강세헌으로 가득 찼다. 늘 이런 이야기를 농담인 양 먼저 꺼낸 건 제 쪽이었고, 세헌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저 얘기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혹시 나도 이 사람 좀 더 구속해도 되나?
어떤 물리적인 형태로 말이다.
물론 대한민국에 살면서 남자끼리 거창한 관계 정립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소한의 구속으로 커플링 정도는 하는 게 어떠냐고 한번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불편하다며 그가 아주 명확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반지라도 끼고 나타나면 펌 내에선 물론이고 법조계 전체에서 제 누나와 드디어 결혼을 하는 거냐느니, 아니면 또 다른 물주가 생긴 거냐느니 온갖 구설수에 시달릴 걸 알아서 조르진 못했다. 분명히 뒤집어질 게 제 눈에도 훤했다.
하지만 그도 원한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게 아닌가.
“저기. 수석, 아니 세헌 선배.”
라면과 우동 따위의 즉석식품 앞에 멈춰 선 윤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뗐다. 세헌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제 쪽을 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심호흡한 윤신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그의 머리 뒤에 보이는 컵라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이런 얘길 꺼내기에 장소가 지나치리만치, 로맨틱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얘기해.”
“……예? 아, 라, 라면 드셔 본 적 있어요?”
그는 무슨 이런 황당한 질문을 다 하냐는 양 가만히 눈길을 주더니, 곧 평범하게 답했다.
“먹어 본 적은 있고, 앞으로 또 먹을 생각은 없고. 먹을 거면 네 것만 사.”
‘이게 아닌데.’ 하고 자괴감 비슷한 걸 느끼며 착잡해하던 윤신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왜요? 이렇게 편리한 문명사회의 산물을……. 강세헌 씨 지금 인생의 큰 즐거움 놓치고 사시는 거예요.”
“난 인스턴트 혐오론자야. 이런 건 인간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발명품이고.”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죠.”
“뭐가 곤란해. 이것보다 더 심플할 수가 있어?”
“편식하는 거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잖아요.”
그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구겼다.
“보통 이런 것도 편식이라고 표현하나? 학술적으로.”
“됐고요. 수석님은 가끔 게으름을 부릴 필요가 있어요.”
타악. 카트에 손에 집히는 라면 번들을 집어넣은 윤신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헌은 이제 이 소꿉놀이에 참견하는 걸 포기한 듯했다.
“그래. 알차게 갖고 놀아. 후환이라는 말을 모르면 까불다가 몸으로 학습하는 수밖에.”
그러고는 그들 옆을 장 보러 나온 노부부가 지나가 찰나의 사각지대가 생긴 바로 그 순간, 윤신을 진열대 쪽으로 몰아붙여 쪽, 이마에 뽀뽀했다. 곧이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초연히 카트를 끌고 가 버렸다.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보던 윤신이 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만 홀로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몰래 웃으며 황급히 그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