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35/51)

05. 

태산그룹 영빈관인 주각관 만찬 행사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태산과 연이 닿아 있는 정·재계 및 법조계 인사들,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언론계 유력 인사들이 고풍스럽게 꾸며진 연회장에 진입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세헌을 따라온 윤신은 그중 하나였다.

사실 윤신은 이런 친목 도모 자리를 꽤나 불편하게 여겼다. 그들이 제게 정보를 하나 주면 자신도 그만한 가치의 무언가를 돌려주어야 하는데 가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나가 이혼한 뒤로는 언론사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기피했던 터라 세헌이 기회를 만들어 주어도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나 이번엔 달랐다. 현재 재판 중인 이혼 소송의 담당 판사가 참석한다고 들어 일부러 시간을 내 쫓아왔다. 피고 측 대리인은 동기라는 접점이 있는데, 제겐 아무것도 없어 불공평하다고 느끼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공통분모가 없을 거라면, 약점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꼭 활용하지 않고 조용히 사장하더라도, 상대방은 제게 그 패가 있다는 걸 알기에 몸을 사리기 마련이었다. 세헌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또 제일 유용했다.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윤신이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판사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행사라지만, 법관이 이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걸 잘 아는 그가 윤신이 알은체를 하자 얼굴을 슬쩍 굳혔다.

“도 변호사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요. 강 변 따라 왔어요?”

“네. 그런데 그건 제가 드려야 할 말씀 아닌가 싶군요. 판사님을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이야……. 이런 거 법원에 알려지면 안 좋겠죠?”

“시비 거는 거예요? 판사도 사람이에요. 재판에 안 좋은 영향 미칠 텐데?”

“어느 쪽이 더 안 좋을지 길고 짧은 건 재 봐야 아는 거 아닐까요. 아시다시피 전 재판에 지는 정도겠지만 판사님께서는…….”

“이봐요, 도 변.”

“하긴 재판장은 판결만 공정하게 해 주시면 되죠. 파티에 와서 다음 분기에 어느 회사 주식이 유례없는 상한가를 칠지 미리 좀 알게 되면 어떻습니까.”

미소 짓는 얼굴로 은근하게 협박성 메시지를 던지자 발끈하려던 판사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훨씬 나이 어린 변호사에게 모욕당했다고 느낀 건지 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보는 눈들이 있는데 여기서 더 자극했다간 역효과일 듯했다. 이쯤 슬쩍 치고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세헌이 있는 객실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노회한 인상의 중년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얼굴을 알 만큼 유력한 기업의 총괄 회장이었다. 윤신은 세헌의 뒤쪽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섰다. 가까이에 있던 터라 대화 내용이 꽤 선명하게 들렸다.

“나같이 사업하는 사람들은 변호사들이랑 공생이 숙명이라서 말이야. 강 수석 같은 인재가 와서 법조 팀을 총괄해 주면 참 좋겠는데. 도국 같은 펌에 있을 그릇이 아니잖나.”

“글쎄요. 아시겠지만 도국은 아주 좋은 펌입니다.”

“하지만 1등은 아니지. 자네가 멱살 끌고 이만큼 일으켰으니, 할 만큼 했네. 내가 또 우리 강 변 주머니 섭섭하겐 안 하지 않겠어? 복리 후생을 포함한 모든 걸 계열사 사장단 수준으로 대우해 줄 수 있어. 게다가 팀을 원하는 규모와 인력으로 꾸려 줄 테니 일도 훨씬 편할 거야.”

남자가 대놓고 떠보는 말에 분명한 의도가 존재했다. 스카우트를 제안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미희와 약속한 7년이란 시간은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 하나 그건 가장 위험한 일이 발생할 때의 경우의 수를 고려해 책정한 기간이었다.

수한의 일거리들이 거의 끊기면서 잠시 휘청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도국은 내부를 정비해 업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펌의 아성을 넘봤다. 일부 기업들 사이에서 반수한 전선이 형성되어 각종 자문을 이곳에 많이 맡겼고, 세헌을 비롯한 변호사들은 기대치를 충분히 해냈다. 일종의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헌이 변덕을 부린다면 송 대표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 덕분에 윤신은 그의 이어질 음성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게 됐다.

“말씀은 매번 감사합니다만, 전 물질 조건으로는 안 움직입니다. 게다가 굳이 어디 소속될 거라면 대기업보단 로펌 쪽이 좋습니다.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섭섭하게. 번번이 칼같이 그러나.”

“저는 변호사 대 클라이언트로 보시죠. 지금처럼요.”

아주 좋은 기회인데 망설임 없이 박차는 게 그다웠다.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 안에 자신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던 윤신은 슬그머니 입매에 미소를 걸었다.

맞는다면 기분 좋을 테고, 아니어도 괜찮았다. 자로 잰 듯 서로의 애정이 같을 순 없는 일이다. 줄곧 그가 훨씬 더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윤신은 이제 자신이 더 좋아해도 아무런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나와서 얘긴데, 요즘 바쁘다고 들었어. 나도 좀 보탤 수 있을까? 해외 인수 합병은 특히 국내 변호사 중에 눈에 차는 친구가 영 없더라고. 자네가 괜찮다고만 하면 내가 펌으로 한번 직접 들르고 싶은데.”

“프로젝트 하나로 오너가 펌까지 오실 거 없습니다. 대리인을 보내셔도 됩니다.”

“강 변호사 만나는데 어떻게 대리인을 보내나. 내가 가겠네.”

“그럼 비서에게 일정 잡으라고 하겠습니다.”

“짬을 내 주면 고맙지. 꼭 좀 부탁하네.”

탁탁.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린 남자가 연회 도우미의 안내에 따라 다른 객실로 이동했다. 세헌이 그제야 윤신의 옆자리로 접근했다. 묵례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려준 그가 힐끗, 제 쪽을 보고 상체를 기울여 속삭이듯 물었다.

“재판 좆대로 하면 당신도 같이 좆 될 거라고 눈치 줬어?”

“판사님한테요? 네, 턱을 막 이렇게 떨더라고요.”

그가 대답을 더 자세하게 듣기 위해 앞으로 몸을 숙인 바람에 자신이 선물했던 회색 넥타이가 조금 너풀거렸다. 윤신은 그걸 잡아당겨 그를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세헌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눈길이 엇나가는 것도 견디기 싫다는 양 윤신의 눈앞에 핑거 스냅을 딱, 쳤다.

“왜, 협박하고 왔더니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져?”

“아니요. 저한테도 그 정도 디딜 언덕은 있어야죠. 지금까지도 너무 불공정했어요.”

“그런데 눈은 왜 피해.”

망설이던 윤신은 사방의 눈치를 살핀 뒤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그 넥타이로 수석님 묶고 싶어져서요.”

그의 표정이 매우 오묘했다. 부끄러워진 윤신이 다시 눈길을 돌리던 바로 그때였다. 출입문을 통해 아주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여 움찔했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건지 그가 윤신의 눈길이 닿은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출구 쪽에서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남자는, 수한 홀딩스 유 대표였다. 분명히 여기 오기 전 확인했던 바로 그는 초대 손님 명단에 없었다. 이곳저곳에 적이 많아 태산그룹과도 사이가 썩 원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일부러 세헌의 속을 긁기 위해 불청객 신분을 감수하고 기어이 나타난 게 아닐까 싶었다.

같은 짐작을 하는 듯, 세헌이 살짝 굳은 윤신의 어깨를 주무르는 것처럼 꽉 쥐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들을 발견한 건지 유 대표가 이쪽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윤신을 의식하고 매우 과장된 행동을 취하며 세헌에게 인사를 청했다.

“도국 강세헌 변호사님 아닙니까. 아, 내 전처의 남자 친구니까…… 이걸 일종의 동서라고 해야 하나? 우리 같은 관계는 서로를 뭐라고 칭하면 됩니까.”

비아냥거림이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곳에 초대됐을 만큼 사회 각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사라면 세헌과 유 대표가 어떤 대척점에 서 있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대놓고 주시하진 않지만 이쪽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고요한 공기로 전부 느껴졌다.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살짝 쥐어 자리를 피하자는 의사를 전하려고 하는데, 그가 입을 여는 게 반 박자 빨라 좌절됐다.

“그냥 강 변호사, 혹은 강 수석이라고 제 직함을 부르시면 됩니다. 이런 것도 몰라서 물어보시고……. 정 자발적으로 머리가 안 돌아가면 사람 불러 포커라도 치시는 게 어때요. 두뇌 활성화에 도움이 꽤 될 텐데요.”

세헌이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느릿하게 뱉은 문장 속에 새겨진 선연한 멸시를 느낀 유 대표가 몹시 불쾌한 감정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곧 나란히 선 윤신과 세헌을 향해 분노를 토해 냈다.

“하나는 품종이 좀 좋아서 놀이판에 끼워 준다고 본인이 날 때부터 상류 사회 일원인 줄 아는 개새끼고. 또 하나는…… 내가 제일 끔찍하게 생각하는 여자 핏줄이네. 끔찍해라.”

자신을 욕하는 건 견딜 수 있었다. 하나 애꿎은 세헌까지 모욕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애써 참고 있던 윤신은 발끈했다.

“이게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건 아시죠. 또 뉴스 1면 장식하고 싶으신 거예요?”

“강 변이 내 마누라랑 잘 붙어먹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길래. 내가 화가 나서 좀……. 크게 문제가 되나? 처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처남입니까. 그리고 그 추문 누가 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도윤신 변호사, 보는 눈이 많아.”

서로를 상처 내는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세헌이 윤신을 만류했다. 그러나 제 쪽을 보고 있진 않았다. 그저 유 대표를 지그시 보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표정이었다. 이 순간의 기분이 도통 가늠이 안 됐다.

그의 충고를 되새긴 윤신이 사위를 둘러보았다. 적막한 가운데 이리저리 눈길을 주자,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느껴졌지만 조금 전처럼 침묵 속인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 틈에 세헌이 유 대표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마치 할 얘기가 있는 듯이 의미심장한 태도로 기둥 뒤 사각지대에 남자를 몰아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남자가 벽면에 등을 대고, 세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뭐야. 할 말 있으면 거기서 해.”

“난 도이경 관장한텐 별로 관심 없고, 재력, 권력 다 있는 그쪽한텐 관심 있는데.”

“뭐?”

그는 황망해하는 유 대표에게로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그쪽이 나랑 붙어먹을 생각은 없나? 비위는 좀 상하지만 눈 딱 감고 박아 줄게요.”

이런 자리에서 이런 상스러운 말을 들을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인지, 유 대표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는 주변의 도움을 구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앞은 세헌이, 그 뒤쪽은 윤신과 본인의 비서들이 막고 있어서 얼떨결에 시야가 차단됐다.

애초에 세헌이 이 각도를 모두 계산했던 건지, 아닌 건지는 스스로밖에 모를 터다. 어찌 됐든 윤신이 선 자리에서 세헌의 손 움직임이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

그는 남자의 앞섶에 손을 뻗어 성기 부위를 확, 잡아챘다.

“헉……!”

뒤늦게 비서들이 달려들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몹시 당황한 유 대표가 입을 뻐끔거리자, 세헌이 좀 더 손을 비틀어 성기를 힘껏 쥐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크기를 가늠하듯, 혹은 애무하듯 몇 번 주물렀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전부 눈에 담은 윤신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매우 곤란했다. 세헌의 뒤통수만 보고 있는 데도 왠지 그가 짓고 있을 미묘하게 역겨워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헉,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이거 안 놔!”

아연해져 몸을 굳히고 만 유 대표가 돌연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비틀어 댔다. 그러다가 언성을 높이며 세헌을 확 밀어냈다. 같은 남자에게 이런 취급을 당한 건 평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약간의 패닉이 온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엄청난 당혹감을 느끼는 게 더딘 반응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비서들이 방패가 되듯 앞을 에워싸자, 그제야 세헌도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내비치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나가서 기자회견이라도 하실 겁니까? 남자가 제 좆을 만졌습니다. 상대는 제 전처의 남자 친구입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너 매장당하고 싶어? 이거 공론화만 하면 도국이랑 넌!”

“증거 있어?”

“이 안에……!”

머리 위를 살펴봐도, 카메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안은 태산그룹이 철저하게 보안을 관리하는 영빈관이라 이를테면 비밀 보장 지대였다. 입을 한일자로 다문 유 대표 대신, 세헌이 덧붙여 주었다.

“너무 걱정 마요. 귀하의 전처랑은 안 사귀니까. 언제든 연락해요. 제가 교배하기에 품종은 괜찮잖습니까.”

천연덕스럽다 못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초연한 얼굴로 말을 잇던 그가 유 대표를 가만히 직시했다. 세헌에게 철저하게 말렸다는 걸 감지한 모양인지 남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그대로 객실을 빠져나갔다. 기가 질린 비서들이 그를 바짝 붙어 쫓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치열하게 부딪쳤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세헌이 윤신의 어깨를 왼손으로 붙잡았다. 곧이어 테이블 쪽으로 가자는 듯 손짓했다. 웃음을 참으려고 몸을 덜덜 떨던 윤신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양 세헌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밖으로 잠시 이동하자는 시선을 열심히 보냈다. 다행히 말없이 눈빛으로만 의사를 표현해도, 그는 알아채 주었다. 그들은 동선을 틀어 외부로 빠져나갔다.

훈훈한 공기가 흐르는 복도를 지나, 빈 객실에 도착했다.

세헌의 맞은편에 선 윤신이 벌게진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깨가 부들거렸다.

벽에 기대 팔짱을 척 낀 채로 그런 자신을 보던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재밌어?”

겨우 두 손을 내린 윤신이 빨개진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가쁜 호흡을 뱉으면서 답했다.

“와, 왜 진작 이럴 생각을 못 했지? 자존심은 또 엄청 세서 어디 가서 절대 말도 못 할 거예요.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겠죠. 게다가 여긴 CCTV 같은 것도 하나 없어서 증거도 없고, 아까 그 위친 사각지대여서 저랑 비서들 외엔 증인도 없어요.”

“법치주의의 장점이지.”

“게다가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유 대표가 나타나서 우리한테 시비 걸던 것만 기억할 거고요.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거 같아요.”

신이 나서 말을 내뱉던 윤신이 별안간 멈칫했다. 재미있는 건 재미있는 거고, 이 여파가 혹여 세헌에게 미칠까 걱정이 됐다.

“뒤에서 보복하면 어떡하죠? 이런 수모 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 작정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시점과 기회가 넘치게 있었어. 그쪽에선 우리가 쥔 패가 넘치는 걸 아니까,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고. 너희 누나가 나한테 카드를 아주 많이 줬잖아.”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뻗어 윤신의 입술을 만졌다. 순간적으로 흠칫해 몸을 굳히자, 세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그 손 아니야.”

“죄송해요. 생각만 해도 더러워서요.”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있던 세헌도 결국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사람 없는 공간에서 예민한 살갗을 아주 짧게 맞물렸다 떼어 냈다. 혹시 누가 오기라도 할까 봐 긴장감이 넘쳤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윤신이 자신이 선물한 세헌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매형한테까지 그런 말 듣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난 재미있어. 게다가 우리 사이 연막도 돼 주니 차라리 잘 됐지. 최소한 넌 안전하잖아.”

몇 번이고 느꼈던 거지만 세헌은 아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다정함을 보여 준다. 그게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모습인 걸 알기에 윤신은 모든 걸 돌에 새기듯 뇌리에 차곡차곡 이 기억들을 담아 두고 싶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표할 때 종종 그랬듯, 윤신은 세헌의 타이를 들었다. 위로 말아 올려 널찍한 끝부분에 정성스럽게 입 맞췄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공중에서 다정한 온도를 품고 맞물렸다.

이윽고 세헌이 한쪽 손을 뻗어 윤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묶겠다는 거 아주 좋은 생각 같아.”

윤신은 입술만 달싹였다.

* * *

마지막 변론 기일이 되자, 그동안 내내 불참하던 의뢰인이 법정에 출석했다. 조정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혼 과정이 소송으로 이어지자 그 과정을 버티기 힘들어하더니, 끝판에선 용기를 낸 모양이었다.

재판 말미쯤 피고 측 대리인이 뭔가를 더 추가로 항변하려 하는데, 앞쪽에 앉은 판사가 고개를 저었다.

“해당 건의 손해 배상 주장이 유죄로 인정되어도, 이혼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 재판부는 피고 측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추가 신청은 기각하겠습니다. 다음 기일에 최종 선고 하죠. 3월 30일 오후 2시로 정합니다.”

다음 일정을 고지한 판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신이 의뢰인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 주자, 그녀가 의연하게 버티다가 눈물을 쏟아 냈다.

“왜 우세요. 100퍼센트 낙관할 수는 없지만, 오늘 재판 보셨듯이 우리한테 유리해요. 우리가 증명한 걸, 저쪽은 거의 반박 못 했거든요.”

“고맙습니다, 변호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죠. 본인 일처럼 애써 주셨잖아요.”

“그렇게 하는 게 제 일인데요. 아, 선고 기일엔 직접 나오실 거 없어요. 판결문이 송달돼요. 그 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댁으로 가서 좀 쉬세요. 많이 힘들어 보여요.”

“네, 연락 주세요.”

어느 틈에 피고 측 대리인에게 화를 내며 남편이 먼저 법을 빠져나가고, 방청객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의뢰인도 윤신에게 몇 번이고 묵례를 하더니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법정을 벗어났다.

한산해진 내부에 윤신이 남았다. 아니, 방청석 쪽에 앉아 있던 세헌도 함께였다. 그는 짐을 챙기고 있는 윤신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에게 고정됐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서 그가 가까워질 때면 자신은 늘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보다 큰 키, 긴 다리, 균형이 잘 잡혀 늘씬하고 탄탄한 몸, 그 위를 감싼 고급 슈트,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 세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이 더할 나위 없는 ‘남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이질감이 안 들었다.

다른 사람이어도 자신이 이랬을까 고민해 본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한데 그가 아닌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상상 자체가 잘 안 돼서 늘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그래서 윤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물에 빠지듯 사념에 잠겨 있는 사이, 이윽고 원고 측 자리로 접근한 그가 윤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금 넘겨 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신이 아주 진지한 태도로 대꾸했다.

“제가 게이인 건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결론이 안 난 표정인데?”

“네. 선배 아닌 다른 남자랑은…… 뭘 하는 상상이 잘 안 돼서요.”

“구체적으로.”

“다요. 연애 그 자체도, 섹스 같은 것도. 다.”

솔직하게 털어놓던 윤신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는 세헌의 표정이 복잡했다. 왠지 굳어 있는 얼굴 한쪽이 꿈틀거리는 듯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던 그다운 반응이었다. 응답하는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다소 잠겨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기분이 아주 많이 나쁜 모양이다.

“그런 상상을 하셨다.”

“‘잘 안 됐다.’가 결론이었는데. 못 들으셨나 보다.”

“시도는 하셨다.”

“애초에 특정성도 성립하지 않고, 그 성별과 가능할지만 타진해 봤는데, 안 되던데요.”

꽤 고차원적인 고민의 발현이란 걸 인지한 건지 세헌에게서 분노한 기미가 사그라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해야 했는데?”

“사실 전 선밸 볼 때마다 내 애인이 남자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돼요. 되게 근사하고, 매력적이지만, 저랑 같은 남자죠.”

“침대 위 포지션이 문제야?”

“그것도 가끔 혼란스럽긴 한데 그거보단 좀 더 정서적인 부분이요. 예컨대, 정체성? 동성애자가 좋다, 이성애자가 좋다 그런 식의 범주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난 뭘까.”

나름대로 복잡한 고민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의외로 세헌은 아주 간단히 답했다.

“네가 근사하고, 매력적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그래. 그리고 넌 남자지.”

“…….”

“넌 도윤신이야. 나한텐 네 성별이 아니라 네가 도윤신인 게 중요했다.”

말뿐인 위로 그 엇비슷한 걸 하려는 건가 싶어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세헌의 눈에 자신은 꽤 괜찮은 인간인 모양이다. 어쩌면,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나눠 주지 못했던 그가 사랑에 빠질 만큼 말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이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요?”

“넌 내가 여자였어도 좋아했을 거 같아?”

“네.”

득달같이 대꾸한 윤신은 그 순간 왠지 오랜 난제의 정답을 찾은 듯한 후련한 기분을 실감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오직 세헌만 두고 계산하면 되는 거였다. 윤신은 오만하고, 영리하고, 외롭고, 무엇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강세헌에게 끌렸다. 그가 남자여도, 여자여도, 혹은 그 어떤 다른 성별이었더라도 그에게 빠져들었을 것이다.

“전 정체성 같은 게 없나 봐요. 그냥 좋아진 사람을 좋아했을 거예요. 그건 선배일 거고.”

물론 둘 중 하나가 다른 성별이었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자녀들이 어른이 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그런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에 지금보다는 조금 가까워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줄곧 그런 걸 막연히 그려 왔던 윤신은 놀랍게도 지금 이대로 충분히 좋았다.

강세헌은 자신이 고른 최대의 이변이다. 최고의 일탈이고, 최선의 선택이었다.

“괜찮은 결론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혹시 법정 경위가 들어오지는 않는지 문 쪽을 힐끗 살핀 윤신이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러고는 둘만 남겨져 있을 때 종종 그러듯 세헌에게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춰 주곤 가방을 마저 챙겼다. 가져온 서류들이 많아 들고 갈 게 산더미였다. 세헌이 그것들을 대신 들곤 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천천히 나와 지하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고생했다. 슬쩍 보니 항소는 안 할 분위기였어.”

“결과는 예상대로 나오겠죠? 참. 그런데 언제 왔어요? 아까 들어와 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여기서 같이 퇴근하려고.”

얼굴에 완연하게 화색이 된 윤신이 반색했다.

“진짜요?”

“밸런타인데이잖아.”

그의 입에서 ‘밸런타인데이’라는 대사가 나오리라곤 꿈에도 예상 못 했다. 어떤 중요하거나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하는 등의 소박한 행복은 자신이 주로 느꼈다. 그런 날 그에게 이걸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조르면 세헌은 대충 장단 정도 맞춰 주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그의 성향을 고려했을 땐 아주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저랑 놀려고 일찍 퇴근하신 거예요? 진짜로?”

“나는 좀 그러면 안 돼?”

“완전히 되죠. 제가 오늘 계획한 게 있어요. 선배가 예약했다던 거기에서 저녁 먹고, 2차는 집에 가서, 지난번에 저 주려고 사 오신 그 샴페인을 따는 거예요.”

“그렇군. 마침 나도 오늘 하고 싶었던 거 하나 있는데. 하나씩 서로 해 주자.”

“뭔데요? 제가 무조건 해 드릴게요.”

승강기에 올라탄 윤신이 눈동자를 빛냈다. 기대에 가득 차서 몸을 완전히 틀고 세헌을 응시하자 그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네 두 팔을 넥타이로 느슨하게 묵고 네 몸에 초콜릿을 잔뜩 바르는 거야. 그리고 그게 없어질 때까지 내가 전부 빨아 주는 거지. 정확히는 거기에.”

그의 사나워 보이는 긴 눈매가 슬쩍, 접혔다. 그는 곧 윤신의 앞섶 위를 힐끗 턱짓했다.

순간 매우 놀란 윤신이 손바닥으로 입을 턱, 틀어막았다.

지잉, 승강기의 문이 닫혔다.

* * *

삐걱, 삐걱.

윤신이 몸을 반쯤 걸친 식탁이 앞뒤로 흔들거렸다. 겹쳐진 양팔이 넥타이로 단단하게 묶여 있다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느슨하게 풀려 갔다. 그 앞에 서서 녹인 초콜릿을 성기 위에 바른 세헌이 살갗을 정성스럽게 핥았다. 그의 따뜻한 입 안에서 서서히 발기한 윤신의 성기가 꿈틀거렸다. 세헌은 개의치 않고 혀로 달콤한 액체를 훔쳐 삼켰다.

“흐으, 세헌 선배, 이제 그만해…….”

“여기 아직 남아 있어.”

늘씬한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린 그는 윤신의 가랑이 사이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러다 곧 짤 주머니에 담긴 초콜릿을 음낭 위에 흥건하게 뿌렸다. 뒤이어 한쪽씩 입에 넣고 살덩이로 빚듯이 굴려 자극하면서 초콜릿을 쓸어 들였다.

그가 입에 윤신의 것을 넣었다, 뺐다 할 때마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 마른 허벅지와 배 위에 하얀색 초콜릿이 묻어났다. 자연히 세헌의 입가에도 하얀색 액체가 퍼졌다. 미끄덩하고 점성이 있어서 꼭 정액이 묻은 것 같았다. 수치스러운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리던 윤신이 두 팔을 힘껏 비틀었다.

탓, 끈이 풀리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자유로워진 한 팔을 뻗어 그의 옷깃을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더는 못 보겠다는 양 세헌의 피부 위에 묻어난 것들을 대신 삼켜 주었다.

“이제 진짜 그만. 입이 너무 달아요.”

“아랫입도 달게 만들어 달라고 졸라 봐. 혹시 알아? 슬슬 찔러 줄지도.”

“선배, 으응. 이러지 마.”

“네가 주저할수록 내가 짓궂어진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 이제 알 때도 됐잖아.”

때로 말보다 행동이 훨씬 강력한 의사 표현으로 작용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윤신은 머뭇거림을 멈추고 아래로 손을 뻗어 세헌의 앞섶을 문질렀다. 이미 버클을 풀고 지퍼까지 내려가 있는 상태여서 금세 드로어즈를 뚫을 기세로 치솟아 있는 그의 것이 만져졌다.

땀이 차서 뜨끈해진 손바닥으로 그 위를 지분거리다가, 속옷 위로 끌어냈다. 연이어 아주 천천히, 그가 감질내도록 위아래로 쓸자 세헌이 바로 반응했다.

확, 몸을 기울인 그가 윤신의 밀부에 제 것의 입구를 댔다. 이미 잔뜩 넓혀 놓은 내부에 바로 진입할 기세로 선단을 진득하게 비볐다. 양팔로 식탁의 끄트머리를 짚어 자세를 잡은 윤신이 제 두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한쪽 손으로 늘씬한 골반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성기를 쥔 채 힘껏 삽입했다.

퍼억!

선단부터 순식간에 힘껏 밀어붙인 세헌이 뿌리까지 제 것을 처박았다. 그의 딱딱한 골반과 윤신의 둔부가 부딪쳐 난폭하게 마찰했다. 밀부를 꿰뚫린 마른 몸이 통증과 쾌감으로 뒤틀렸다. 윤신의 입에서 거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흑!”

두 다리가 후들거려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윤신이 하체를 덜덜 떨었다. 피부를 맞대고 있는 세헌에게도 그 진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던 모양인지, 그가 늘씬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단단한 어깨 위에 발목을 걸쳐 주었다. 뒤이어 골반을 양손으로 쥐고 성기의 위로 끌어 내리듯이 고정해,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콱콱 쑤셔 넣을 때마다 성기의 표피를 윤신의 내벽 점막이 쫀득하게 감쌌다. 절로 자극이 돼 앞뒤로 움직이는 세헌의 움직임이 점점 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치 거칠어졌다. 마치 물살의 영향을 받아 요동치는 배처럼 꽤 육중한 무게의 식탁이 떠들렸다.

그가 하체를 욱여넣을 기세로 윤신에게 삽입할 때마다 탄력적인 살가죽이 겹쳐지며 초콜릿이 서로의 살갗에 번졌다. 하얀색 액체가 조금씩 굳어서 피부에 문질러졌다. 그와 제 몸에 시멘트 자국처럼 남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진 윤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세헌은 이걸 용납할 수가 없는 듯했다.

“눈 떠.”

“아! 아! 으응! 아!”

“눈 제대로 뜨라니까.”

골반을 잡고 있던 한쪽 손의 위치를 위로 옮긴 그는 파들거리는 눈두덩부터 이마까지를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그러고는 젖은 앞머리를 매만져 주듯 천천히 밑에서부터 쓸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떠지게 된 눈꺼풀 밑으로 흔들리고 있는 윤신의 깨끗한 동공이 드러났다. 세헌은 그 위를 혀로 핥는 걸 좋아했다. 윤신의 눈가에서 생리적으로 눈물이 흐르면, 그때부터는 폭주하곤 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혀끝을 내밀어 눈알의 표면에 묻은 물기를 슬쩍 훔쳤다. 아찔해진 윤신이 방어적으로 눈을 내리감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하체를 조이게 됐던 건지 세헌이 숨을 끊듯이 거칠게 뱉으면서 나직하게 신음했다.

“하, 제기랄. 윽!”

동시에 그가 두 손을 악력을 최대치로 활용해 윤신의 골반을 있는 대로 제 것 위에 내리꽂았다. 성기가 밀부를 뚫고 들어와 배 속 깊은 자리까지 죄다 점령할 것처럼 가득 찼다. 아득해진 윤신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선배! 꽉 찼어, 잠깐, 아! 아!”

본능적으로 양팔을 버둥거리게 되자 마른 손등에 치인 초콜릿과 그릇 따위들이 식탁 아래로 죄다 떨어졌다. 하나 와장창 소리를 내며 낙하한 그것들이 앞서 추락한 넥타이를 끈적하게 적시든 말든 두 사람의 안중에 없었다.

윤신은 겨우 표적을 겨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을 안으라는 양 상체를 숙여 주는 세헌의 상박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하나처럼 맞물린 두 개의 몸이 함께 흔들렸다.

섹스할 때 그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난폭하게 굴었다. 꼭 입구가 뿌리를 감쌀 때까지 깊이 넣어서 윤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했다. 아프게만 하면 관두라고 하면 되는데, 능숙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자리들을 함께 자극하는 통에 백이면 백 휩쓸렸다.

세헌이 선단으로 내벽의 어느 한 자리를 둥그렇게 문질렀다. 곧 뒤로 허리를 뺐다가 다시 그 위치에 성기를 쑤셔 넣으면서 윤신의 전립선이 같이 압박당하도록 기둥을 비볐다.

“읏! 거기, 거기 선배 걸로 좀 더 비벼 줘.”

“여기?”

“아! 아! 지금도 아파요. 살살해요.”

“계속 아파해. 네가 아파하면 좆이 떨려. 흥분돼.”

“강세헌! 잠, 흐응!”

사디스트 맞는다니까.

아닌 척하면서 대체로 제 의견을 들어 주는 그지만, 침대 위에선 양보가 없었다. 타협은 더더욱 해 주지 않았다. 들어 주는 시늉이라도 해 준다면 다행이었다.

세헌은 윤신이 쾌락을 누리면서 즐기면서 한편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순간에 가장 민감하고 비밀스러운 내부를 유린하기를 좋아했다. 눈물을 쏟기라도 하는 때엔 웬만해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여느 때의 달콤한 혹사는 오늘도 지속됐다.

욕심껏 허리를 쳐올린 그가 서로를 감싼 공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안아 줘…….”

힘겨운 숨을 토한 윤신이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그에게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등이 배길 만큼 딱딱한 식탁에서 몸을 떼어 내자, 세헌이 능란하게 마른 몸을 들어 안았다. 그러고는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다리를 내려 주고 제 허리를 감싸게 만들었다.

어느새 서로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눈짓한 순간 윤신이 입을 벌렸다. 입술이 부딪치고, 뜨끈한 살덩이가 겹쳐졌다. 이를 신호로 세헌이 속력을 올렸다.

퍽! 퍽! 상체를 바짝 붙이고 성기를 박아 댈 때마다 윤신의 것도 세헌의 하중에 함께 짓눌렸다. 전립선을 속도감 있게 찔러 주니 앞뒤로 자극이 돼 금세 쿠퍼액을 쏟아 냈다. 뒤이어 불투명한 정액이 팟, 하고 튀면서 피부 위에서 말라 가고 있던 초콜릿 위에 뭉개졌다.

“아! 선배! 아흡!”

땀과 정액, 그리고 초콜릿까지 엉켜 몸이 찐득거렸다.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납게 허리 짓을 반복하던 그가 몇 날은 굶은 짐승처럼 추잡하리만치 적나라하게 혀를 빨았다. 세헌의 절정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윤신이 그를 껴안았다. 이 접촉이 그를 반응하게 만들었던 건지, 미친 듯이 추삽질을 해 대던 그도 마침내 사출했다.

풀썩, 마른 몸을 안은 채 식탁 위로 몸을 무너뜨린 그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 짜릿한 호흡 소리들이 윤신의 귓전에 빗물처럼 파고들었다. 제 안에 서서히 쌓여 가는 세헌의 정액을 느낀 윤신이 허리를 움찔했다. 그러자 세헌이 밀부에서 성기를 아주 느릿하게 빼냈다.

진이 다 빠진 윤신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그를 멀거니 올려다봤다. 한데 지금까지 같이 에너지를 소비한 세헌에게 지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는 도리어 토정의 여운에 빠져 있는 윤신의 몸 이곳저곳에 키스를 쏟아 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다리를 벌리게 만들더니 허리를 숙여 회음 부위 전부에 제 체온을 새길 기세로 젖은 살결을 꼼꼼하게 핥았다.

“흐으, 뭐 하는 거예요?”

의아해진 윤신이 밑을 힐끗 쳐다봤을 땐 이미 게임이 끝난 상태였다. 세헌이 음부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넓혔다. 그러고는 벌린 틈새의 안으로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내부에서 긁듯이 정액들을 빼내자, 그것들이 뚝뚝 떨어져 식탁에 고였다. 윤신은 아연해졌다.

“미쳤어요? 읏, 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다리를 버둥거려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세헌은 긴 손가락을 이용해 윤신의 내부를 괴롭혔다. 중지를 끝까지 쑤셔 넣고 끝을 둥그렇게 말아서 성기 뒷부분의 한 위치를 힘껏 눌렀다. 스팟을 자극당한 윤신의 성기가 다시 꿈틀하면서 발기했다.

이미 세헌에게 한참 혹사당한 뒤라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팔꿈치로 겨우 하중을 지탱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세헌이 다시 상체를 제 위로 기울여 키스해 왔다. 하체가 슬그머니 부딪친 순간, 조금 전 사출한 그가 금세 도로 흥분했다는 걸 알게 됐다. 졌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식탁 위에 누우며 다리를 달싹였다.

“언제 또 섰어요? 혹시 내 생각만 해도 서요?”

“넌 내가 사춘기 청소년으로 보여? 애인 생각만 해도 서게.”

“서는구나.”

입술을 꽉 깨문 세헌이 답하기 싫어하는 기색으로 눈살을 구겼다. 그러다 끝내 응답했다.

“가끔.”

“가끔 아닌 거 같은데. 혹시 혼자서 자위도 해요? 그러고 보니까 나만 보여 주고, 선배가 하는 건 한 번을 못 봤네.”

“…….”

“그것도 해요? 와, 어떻게 이런 걸 숨기고 있을 수가 있어요? 나도 보여 줘요.”

“이제 입 다물어.”

딱딱하게 강직된 성기 선단을 음부 입구에 지분거리던 그가 너트에 볼트를 고정하는 것처럼 위치를 맞췄다. 밀부에 손님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주변부가 벌름거리면서 숨 쉬듯이 박동했다. 세헌은 힘차게 방아쇠를 당기기 전, 윤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제 쪽으로 당기는 것으로 통증을 분산시켰다.

이윽고 윤신이 입을 슬쩍 벌리며 신음하는 순간, 그대로 선단을 깊숙한 곳에 밀어붙였다.

“으응! 흣!”

두 개의 하체가 조금 전보다 훨씬 매끄럽게 결합했다. 아직 남아 있는 정액이 윤활제 역할을 해 주는 건지, 아니면 세헌이 난폭하게 쑤셔 대면서 내벽을 필요 이상으로 넓히게 만든 건지 한층 수월하게 박혀 들었다.

그런데도 그의 것이 내부를 꽉 채우고 삽입 운동을 해 대기 시작하니, 압박감이 말도 못 했다. 주변의 산소가 전부 희박해진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게 됐다. 태아처럼 무력하게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다가, 겨우 손을 뻗어 그를 안았다. 도드라진 견갑골이 손바닥에 만져진 순간, 세헌이 제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짜릿해서 구역질이 다 났다.

“나랑 해서 기분 좋아요? 자위보다 낫죠?”

“좋아, 젠장. 돌 것 같아.”

“천천히 해요. 선배 거 완전히 흉기야. 너무 커요.”

“흉기가 널 즐겁게 해 주잖아.”

“좋, 흐응! 아! 아!”

세헌의 음낭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또 제 엉덩이가 그의 탄탄한 허벅지에 문질러질 때마다 성기가 심하게 깊이 박혀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듯 교성이 터져 나왔다. 넋을 잃고 달려드는 세헌 때문에 윤신의 몸이 자꾸 비스듬하게 엇나갔다. 일단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져 그의 목덜미를 확, 잡아챘다.

잔뜩 달뜬 윤신의 얼굴이 세헌을 최대한 또렷하게 직시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표정으로 의사를 전했다. 천만다행히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차츰 속도를 늦춰 서로의 움직임에 박자를 맞췄다. 격렬한 피스톤 운동은 여전했으나, 삽입할 때의 빠르기가 일정해진 덕분에 윤신의 나신이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매끈한 가슴팍으로 손을 뻗어 도드라진 유두를 비틀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윤신의 꺼떡거리는 성기를 매만졌다. 그러면서도 사납게 허리 짓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부에 그의 것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쫀쫀한 내벽이 수축했다. 반쯤 뒤로 빠져 공기와 마찰했던 그의 핏줄 돋은 성기가 강속구를 받아치듯 박혀 들었다.

철퍽거리는 마찰음과 두 사람이 내뱉는 가쁜 숨소리가 넓은 다이닝 룸을 가득 채워 갔다.

“하, 할 것 같아요. 지금 할 것 같아, 좋아한다고 말해 줘.”

돌이켜 보면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늘 자신이 했다. 그러나 윤신은 보채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알았고, 표현에 서투른 편인 그를 이해해서였다. 그래도 좋아한단 얘기는 곧잘 해 주곤 했었는데, 오늘따라 세헌은 응답이 없었다.

“응? 선배.”

한계치에 다다른 윤신이 조금 더 애타게 졸라 봤지만,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도리어 과격하리만치 상하 운동을 해 대면서 격렬한 인터코스를 이어 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던 윤신은 결국 세헌이 내벽 안쪽을 꽉 눌러 준 순간 사정했다.

“아흑! 아! 사랑해요.”

“읏, 빌어먹을!”

“사랑해요…….”

일순 인상을 찌푸린 그의 미끈한 이마에서 땀이 뚝 떨어졌다. 동시에 그도 토정한 듯 밀부에 액체가 서서히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헌은 조금 더 걸릴 거라고 여겼던 터라, 의아해진 윤신은 호흡을 고르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출 직후의 모습이 으레 그렇듯, 세헌이 상기된 얼굴로 그런 자신을 마주 봐 주다가, 이내 성기를 빼냈다.

하반신이 삽시간에 허전해진 윤신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그가 사타구니 사이에 흐르는 정액들을 닦아 주며 자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대로 초콜릿이 흥건한 바닥에 드러누운 세헌은 전신이 담요라도 되는 것처럼 윤신을 몸에 올렸다.

턱으로 그의 턱을 꾹꾹 누른 윤신이 아기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겨우 위치를 위로 옮겨 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수석님.”

“이름으로 불러.”

“세헌 선배, 나 좀 씻고 싶어. 몸에 초콜릿 냄새랑 정액 냄새가 진동해요.”

그는 대답 대신 윤신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서로의 사이에 흐르는 에로틱한 공기는 여전했다. 다만 윤신은 그가 잠시 자신과의 이런 소소한 여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기민하게 그런 기색을 알아채고, 세헌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달아오른 뺨을 기댔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제게로 전이됐다.

“심장이 꽤 빠르게 뛰는데요. 혹시 저 때문이에요?”

“초콜릿 먹어서 그래.”

“언제쯤 솔직하게 다 말할까? 가끔 낯간지러운 소리도 잘하긴 하던데.”

픽 웃은 그가 윤신의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뒤이어 그 위에 키스했다. 세헌이 선사하는 촉감을 음미하던 윤신은 열린 다이닝 룸 문밖을 내다보았다. 거실로 향하는 복도의 창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와중, 묘한 이질감을 느껴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그러고는 상체를 슬쩍 일으켰다.

“선배, 밖에 눈 와.”

불편한 자세로 세헌을 내려다보자마자, 그와 바로 눈길이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의 시선은 오직 제게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선배님?”

그는 꽤 오래 침묵했다.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웠다. 괜히 불안해져 고개를 갸웃한 윤신이 뭔가 더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아주 낮게 잠겨 있는 음성이 천천히 세상의 빛을 봤다.

“이건 내가 할 거라곤 상상 못 했던 말인데.”

“왜 겁주는데요, 무섭게.”

“윤신아.”

“혹시 저 찰 거예요? 그건 선배는 못 하는 일인 걸로 합의 봤잖아요.”

“사랑해.”

너무 놀라면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더니, 자신이 딱 그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이 무거운 고백의 값을 어떻게 매겨야 하는 건지, 그게 가능하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동요한 윤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뺨이 경련했다. 이윽고 두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삽시간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제 몸의 일부인데도 통제가 불가능했다. 겨우 대꾸하는 음성에는 마음에도 없는 투정이 섞였다. 목소리의 파동이 매우 요란하게 요동쳤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옷도 안 입고 있는데. 좀 잘 차려입었을 때 말해 주죠.”

“난 이 모습이 제일 좋아.”

붉어져 가는 눈매를 손으로 훔쳐 준 그가 윤신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대로 천천히 제게까지 끌어 내려 눈 주변을 입술로 문질렀다.

“나 같은 사람도 누굴 좋아할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고마워.”

줄곧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건,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세헌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강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겁이 많았던 그를 새장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게 만들 기회를 줘, 제 쪽이야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벅찬 감정들을 어떻게 간단히 정리해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만 삼킨 윤신이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밸런타인데이야. 꽃을 준비 못 해서. 마음에 차?”

“이 꽃 너무 비싸요.”

이렇게 로맨틱한 선물을 받으리라곤, 예측 못 했다. 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 짜릿하고 가슴이 벅찼다. 꼭 모든 걸 가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마 이 이상의 고백은 없을 것이다.

그와 달리 자신은 사랑한단 말을 자주 했다.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것보단 가능한 한 담담하게 제 마음을 표현해서, 세헌에게 안정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 자신이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발그레해진 뺨을 손등으로 훔친 윤신이 세헌의 품에 와락 무너지듯 안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깡마른 맨등을 차분하게 쓸어내렸다.

창밖에서 함박눈이 내려, 대지를 덮어 가던 어느 아득한 밤이었다.

〈끝〉1684761482067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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