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4/51)

04. 

타악!

코트와 서류 가방을 내팽개치듯 테이블에 던진 윤신이 소파 주변을 맴돌았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마구 조각난 마음을 다시 짜 맞추어 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 같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간만에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던 세헌이 종이를 한 장 뒤로 넘기며 통보했다.

“나까지 산만해. 너희 집 가서 해.”

그가 말을 걸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소파 뒤편에 몸을 기댄 윤신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세헌이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제겐 깊이 관심 가져 주지 않아서, 이번엔 아예 그의 앞으로 위치를 옮겼다. 뒤이어 테이블에 앉아 세헌의 손에 들린 책에 책갈피를 꽂아 주곤, 옆으로 치웠다.

그 와중에도 제 연인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책 표지를 눈에 담는 걸 잊지 않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덤이었다.

“〈존재와 시간〉……. 나보다 하이데거한테 더 집중하는 거예요? 이딴 나치 주의자한테? 꼭 자기 같은 거만 읽더라?”

삽시간에 소유물을 빼앗긴 세헌이 잠시 황당해 하더니, 곧 알겠으니 해 보라는 듯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좋아, 알겠어. 뭐라고 말하면 돼.”

“사랑하는 나의 윤신아, 왜 그래? 뭐 걱정 있니?”

“왜 그러는데, 도윤신 변호사.”

“아니, 그거 하나를 안 해 주고. 글자가…….”

손가락을 접어 빠르게 음절의 개수를 센 윤신이 이어 말했다.

“……열일곱 개밖에 안 되는데도?”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그냥 얘길 해. 정신 사나워.”

무턱대고 버텨 봤자 한 번 아닌 건 끝까지 안 해 줄 걸 알기에 적당한 데서 타협하는 게 최선이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걸로 입씨름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을 테지만, 지금의 자신은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저 오늘 그 회사 또 다녀오는 길이거든요. 얼마 전에 말씀드린 프로 보노요. 선배님이 모든 역사는 그 현장에서 시작된다고 해서, 직접 갔단 말이죠.”

역시 그거였냐는 양,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윤신은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뭐라 그러는 줄 아세요?”

“뭐라 그러는데.”

“제가 제시한 합의금 싹 주겠대요. 절차만 밟으면 바로 이행하겠다고요. 이것저것 다 따져서 계산한 총액보다 좀 더 많이 불렀는데. 협상하려고 들지도 않았어요.”

이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기미가 세헌의 얼굴이 완연했다. 이것까지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던 거예요? 표정이 딱 그래서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잘됐군. 네가 원했던 거잖아.”

“너무 쉽지 않아요? 꼭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거 이상하잖아요. 선배의 지혜가 필요해요. 제가 오는 길에 생각한 게 있는데, 그거랑 일치하는지가 알고 싶어요.”

나쁜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려면, 자신이 머리를 쥐어짜 내는 것보단 세헌을 통하는 편이 만 배는 더 간단했다. 간절한 눈빛을 읽은 건지 그가 기꺼이 진지한 어투로 서문을 열었다.

“도윤신, 네 의뢰인이 다니던 회사는 내실이 꽤 있는 나름대로 탄탄한 가구 회사야.”

탁자 밑에서 태블릿 PC를 꺼낸 그가 화면을 켰다. 스크랩해 둔 파일들을 열어서 회사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게 만드는 여러 수치들을 보여 주자, 윤신도 매우 진중한 태도로 그것을 읽어 내렸다. 꽤 성심성의껏 자료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에 자신은 이미 한 차례 다 훑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세헌에겐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도 자료들을 탁 비서에게 넘겨받아, 한 차례 검토했다는 건 곧 제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증거였다. 윤신은 찝찝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건 언제 또 찾아봤어요? 하여튼 나 좋아한다니까.”

일일이 사실 관계를 짚어 주는 윤신에게 익숙해진 그는 가뿐히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해고 후 소송까지 1년 반. 이후 네 의뢰인이 무작정 복직을 기다리며 2년 반이 흘렀어. 그리고 아직도 복직이 안 되고 있지. 도합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사람이 받을 금액은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1억 원 남짓 정도, 이거저거 위자료 다 보태 봐야 최대 그 몇 배 정도일 거야. 썩 쉽지 않은 액수긴 하지만 이 규모의 업체가 못 줄 돈도 아냐.”

“네, 그러니까 더 괘씸하죠. 이혼한 상대방이 위자료나 양육비 안 주는 거랑 똑같잖아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끼고 갔더니 안 주던 돈을 쉽게 그냥 준다? 왜일까. 갑자기 반성해서? 아니면 법원이 느닷없이 무서워져서?”

세헌에겐 제3의 답이 있었다. 그리고 윤신은 그걸 굳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집에 오는 내내 제 머리에 가득 찼던 가설이 그의 말을 통해 윤곽이 잡혔기 때문이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제 결론은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회사에 요 며칠 직접 방문해 법무 팀 사람들과 해당 팀 직원들을 만나고 나자 그런 생각이 굳어졌던 차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요? 돈은 줄 수 있는데 복직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기다렸던 거예요.”

세헌은 순순히 긍정해 주었다.

“그걸 이행하면 제 발로 나가기 전엔 다시 못 자르니까. 아마 애초에 해고된 근원적 갈등이 있었을 거라고 봐. 인간관계라든지, 기업 비밀 관련이라든지. 의뢰인이 해직 후 폐인 되어 간 판세를 보니 본인은 이유를 모르는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이틀 동안 같은 팀 직원들 오프 더 레코드로 면담했는데, 평판은 썩 나쁘진 않았어요. 그런데 의뢰인이 존경했다던 본부장님이 은근하게 따돌림을 주도했다는 것 같긴 하더라고요. 눈치 보느라 대놓고 얘기는 못 하지만, 전 분명히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바람직하다고는 못 해도 사실 그런 일 회사에선 흔하잖아요.”

“일은 좀 해?”

“네. 홍보 팀 직원인데 일도 깔끔하게 잘했대요.”

“그럼 해직 원인은 그쪽이네. 그 본부장이라는 사람.”

곰곰이 궁리에 빠진 윤신이 답이 나올 듯, 안 나올 듯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대표 이사도 아니고, 임원진이 그냥 부하 직원 한 명 싫어한다고 기업체 자체가 움직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아요? 뭐 여러 사람 얽힌 치부라도 알게 됐나?”

“혹은 그 본부장 쪽이 정치질을 꽤 하거나. 네 의뢰인이 존경한다면서. 누군가 그렇게 믿을 만큼 다른 얼굴을 보여 줄 방법을 안다는 거잖아. 속이 꼬였다는 소리지.”

오늘 짧은 시간이었으나 본부장과도 직접 대면했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본능적 감각이라는 건 존재했다. 윤신의 귀엔 세헌의 가설이 썩 합리적으로 들렸다.

“제 의뢰인은 존경하던 상사한테 당하고 있는 거네요. 유일하게 알은척해 줬다고 했는데.”

“하지만 여기까지는 다 우리의 추측이야. 증거 있어? 동료 직원이 증언이라도 하겠대?”

“그건 아니지만…….”

“결과만 보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회사가 네 의뢰인을 데리고 있기 꺼려 한다는 거야. 그것도 이미지 손상을 각오하고 법원의 지시를 어길 만큼 매우. 처음부터 합의금 많이 받아 주려고 했었잖아. 이 상황에 네가 밑질 건 없어. 되돌아가 봤자 구박이나 당하겠지.”

“선배가 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같이 끝까지 싸워 줘요? 아니면, 어느 정도 덮어 둬요?”

두 가지 모두 의뢰인을 위한 선택일 테지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난 이런 자잘한 사건은 안 맡아. 맡더라도 기업을 대변할 거고.”

툭, 탄탄한 가슴팍을 건드린 윤신이 반복해서 물었다.

“만약에 했다면요.”

“돈 많이 받아 주는 거 말고 뭘 더 해. 난 변호사지, 보모가 아냐.”

“대체 도움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할 말을 잃고 몸을 앞으로 길게 숙인 윤신은 자신의 하중을 세헌에게 완전히 기댔다. 그가 두 팔을 뻗어 능숙하게 전신을 끌어당기고는 다리 위에 앉혔다. 이마를 그의 넓은 어깨 위에 기대고 숨만 내쉬자, 세헌이 어린아이를 재우듯 가만히 등을 쓸어 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사측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자신이 밑질 건 없었다. 애초에 의뢰인에게 그 회사와는 잘 맞지 않는 듯하니 합의금을 받아 종잣돈 삼아 상황을 개선하고 다른 기업체를 찾아보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나 물밑으로 조리돌림을 당해 3년이나 고통받은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당사자만 모른 채 이대로 묻자니 영 찜찜한 건 사실이다.

게다가 많이 심약해져 있는 제 클라이언트가 그 지루한 재판의 상황을 견뎌 줄지도 모르겠다. 이미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도 괴로워하는데, 보태는 게 좋은 생각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받았냐고 하면 뭐라고 설명하죠. 회사가 귀하를 싫어합니다?”

“네가 엄청난 실력의 변호사라고 해. 말 한 마디에 다 쓰러진다고.”

“강세헌이나 쓰러지지.”

“나 쓰러지면 다 쓰러진 거야.”

짓궂게 부정할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수긍해 주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적당히 일할 자리 같은 건 어떻게 구해요? 안정적이고, 급여도 괜찮고 그런 데 혹시 아는 곳 있으세요?”

일순 제 몸을 어루만져 주던 세헌의 움직임이 고장 난 시계처럼 뚝 멈췄다.

“넌 원서 써 주는 고3 담임 선생님이 아니야.”

“애프터는 다른 변호사도 종종 해요. 수석님도 간단한 소송 같은 건 해 주시는 것처럼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네가 직접 일자리 주선을 하겠다는 건데.”

“잘은 몰라요. 그냥 기사회생이 간절한 사람이죠. 제가 틀렸어도 괜찮아요. 그런 부담 감수하고 돕겠다는 거예요.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요. 모든 희생은 이기심이라면서요.”

“도윤신.”

“직장을 떡, 품에 안겨 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기회를 주고 싶다는 거죠. 지금은 너무 자신감이 떨어져 있어요. 선배도 그분 얼굴을 보셨어야 해요.”

매일 햇볕을 쐬고, 사람을 만나고, 새롭게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면 충동적으로 나쁜 생각을 할 확률은 현격하게 줄어들 터다. 일을 해서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또 역으로 그만한 대가를 받아 가는 과정을 통해 성취를 다시 느끼게 된다면 언젠간 예전처럼 혼자 설 수도 있으리라.

세헌도 그 기저의 생각들을 아는 건지 여러 번 어기대진 않았다.

“청탁에 관한 부분은 나보단 너희 누나가 낫지 않겠어?”

처음엔 누나가 자신을 도국에서 일하게 만들었던 일을 빗대어 놀리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세헌을 흘기려고 했는데, 금세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그녀 쪽이 훨씬 나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누나는 얼마 전 위자료의 일부를 사재로 털어 작은 갤러리를 설립했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윤신은 벌떡 일어났다.

“저 누나랑 통화 좀 해야겠어요.”

그러고는 그대로 세헌을 지나치려 하자, 그가 안 된다는 양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늘씬한 몸을 다시 제 품에 끌어 내려 안았다. 고스란히 도로 그의 하체 위에 앉게 된 윤신이 이유를 묻듯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자 세헌이 바로 응답했다.

“가지 마. 안 들리는 데서 내가 모르는 얘기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그가 다 아는 얘길 할 거란 변명은 관뒀다. 통제 욕구도, 독점욕도 심한 그는 때때로 가족과의 관계마저 용납 못 했다.

두 팔을 뻗어 세헌의 목을 감싼 윤신은 뒤이어 보드라운 뺨과 콧잔등에 입 맞췄다. 아주 얇고 예민한 표피가 떨어져 나가자, 각자의 달콤한 시선이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닿았다. 마치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표적에 꽂아 넣듯 오직 서로만을 직시했다.

주변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세헌을 인식하자, 윤신은 마음의 가장 밑바닥부터 어떤 감정들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선배가 나 계속 독점하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이 말에 세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신을 소파 위로 무너뜨렸다. 그 위에 스스로 커튼처럼 자리를 잡고, 양팔을 윤신의 얼굴 옆으로 뻗어 창살을 만들었다. 이윽고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금세 마치 우리에 갇힌 것처럼 두 사람의 몸이 세헌이 만든 공간에 겹쳐졌다.

한 박자 늦은 그의 대답이 이어졌다.

“계속 이러면 숨 막힐 텐데. 겁도 없다.”

이윽고 그가 윤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목을 슬쩍 뒤로 젖힌 윤신이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세헌의 탄력적인 등을 손바닥으로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상반신이 더 빈틈없이 맞물리면서 각자의 긴장한 하체까지 빠듯하게 닿았다. 그가 능숙하게 앞섶 위를 문지를 때마다, 옷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성기가 마찰했다.

하아, 윤신이 나지막하게 신음하자, 그의 행동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세헌의 허리 짓이 유난히 농밀했다.

“전화 좀 나중에 해라. 한, 내일 오전쯤?”

슬그머니 미소 지은 윤신은 키스를 조르듯 입을 여는 것으로 그의 요구에 화답했다.

* * *

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해 배상의 등식은 아주 간단했다. 대부분의 피해는 곧 돈이었다. 어떤 상해를 입었든, 종류를 막론하고 금전적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물리적으로 심하게 다쳐도, 혹은 크고 작은 정신적인 위해를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재판부는 때로 죽음마저도 돈으로 치환해서 배상할 것을 명령하곤 했다. 윤신도 한 가정의 가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 합의금을 받아 주었던 적이 있었다.

누가 제일 먼저 돈으로 타인의 인생값을 매기기 시작한 걸까.

서류를 내려다보던 윤신의 표정이 착잡했다.

‘이 사람의 3년 남짓이 겨우 이거라는 거지.’

시간은 금이라고 하나, 그게 모두 똑같은 가치를 하는 광물인 것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 세헌의 3년과 제 3년의 값은 달랐다. 연봉과 정신적인 위자료를 함께 고려해 최대치로 받아 낸 것이긴 하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그래도 추후 자립하는 데까지 도움을 주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나을 듯했다. 잘만 해결된다면 윤신도 오래전 사고를, 또 요사이의 부끄러움들을 이 일을 통해 조금쯤 마음에서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든 그가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오전에 한 차례 통화를 마쳤고, 이력서를 보내 달라고 해서 보내 두었다. 직원들과 논의해 볼 테니 오늘 밤쯤 다시 연락을 달라기에 기다렸던 차였다. 금세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신아! 마침 잘 걸었어.

“지금 통화 괜찮아? 너무 늦은 거 아냐? 오늘 좀 바빠서, 일이 이제 정리됐어.”

- 아냐. 나도 아이들 재우고, 차 마시고 있었어. 어제 부탁한 거 때문에 연락한 거지?

“너무 갑자기 부탁한 건 아닌가 모르겠다. 부담되면 거절해도 괜찮아. 다시 알아보지 뭐.”

- 부관장한테 말을 전했더니 일단 사람이 어떤지 면접을 보고 최종적으로 마음에 들면 인턴식으로 6개월만 써 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당장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보단 반년 뒤 다시 갱신하는 게 위험 부담이 적을 것 같아서 나도 그러자고 했어. 꽤 건실한 가구 회사 홍보 팀 출신이라 이력서 보고 다들 좋아하긴 하더라고.

삐걱. 그녀의 말을 신중하게 새겨듣던 윤신은 이내 자세를 고쳐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안하게 기댔다. 겨우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만나 보고, 영 느슨하다 싶으면 억지로 고용하진 않아도 돼. 나도 걸을 준비조차 안 돼 있는 사람인데 남한테 피해 끼쳐 가며 억지로 달리게 하는 건 맞지 않는다고 봐. 다만, 핸디캡이 있는 사람이니까 느긋하게 봐 줘. 자신감이 좀 없더라.”

- 그럴게. 누구 부탁인데.

꼭 특혜를 줄 필요는 없었다. 윤신이 의뢰인에게 주고 싶은 건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다시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거였다. 예전의 실수 아닌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어제 통화로 충분히 그 내용을 설명했으니, 사려 깊은 누나가 현명하게 대처해 줄 것이다.

“고마워. 누나밖에 없다. 참. 애들한테 엄청 사랑한다고 전해 줘. 크리스마스 지나면 보러 가겠다고.”

- 지나서? 당일에는 안 오니?

“어? 그날은…….”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세헌과 약속이 있었다. 보통은 따로 일정을 정해 두지 않고 되는대로 만나곤 하지만, 그날은 꼭 함께 있고 싶어서 윤신이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다.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말을 머뭇거리자 그녀가 부드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 여자 친구랑 있어야지. 넌 매번 똑같은 걸로 놀려도 번번이 당하더라.

마음이 놓이자, 긴장이 풀렸다. 윤신은 괜히 두 다리를 까딱이다가 창문 너머를 살폈다. 세헌의 방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다만 창틀의 높이가 있어 세헌의 책장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창가 쪽에 서자, 책상에 앉아 통화 중인 그의 모습이 비쳤다.

저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린 끝에 그가 찾고자 하는 건 명예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가치일까. 아무래도 형체가 없는 것을 좇는 듯한데, 불안하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어떻게 저렇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건지, 윤신은 때로 세헌의 에너지 원천이 정말로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 안 그래도 애들이 너 보고 싶어 해. 그럼 26일에 하루 들러. 같이 저녁 먹자.

“그럴게. 선물은 뭘 사 가나? 갖고 싶은 거 있대?”

- 글쎄다. 아, 지난번처럼 게임기 같은 전자 기기는 사 오지 마.

“알겠어. 내가 며칠 고민해 볼게.”

마치 도둑질을 하기 전 낯선 집을 염탐하듯 세헌을 관찰하는 동안, 업무상의 대화가 좀 지지부진했던 모양인지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뒤이어 누군가 섬세하게 빚어 놓은 듯 잘난 얼굴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야릇했다.

‘본인 잘생긴 걸 분명 알긴 아는데. 왜 사무실에 처박혀서 낭비하지?’

늘 하던 생각을 오늘도 하며, 윤신이 좀 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사이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세헌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꽤 끈질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어 윤신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신이 열심히 손짓했다. 아직 누나와 통화 중이어서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사무실에서 웬 담배냐는 의미의 수신호를 보냈다.

어설픈 몸짓이었는데도 그 함의를 용케 알아들은 건지 세헌이 ‘착’ 소리가 나도록 블라인드를 야멸치게 내려 버렸다.

“와, 저 성격 파탄자.”

- 윤신아? 누구 같이 있어?

세헌과 같이 있긴커녕 그를 지켜볼 수 있는 창구마저 차단당했다. 윤신이 잽싸게 머릿속을 정돈했다. 그러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응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저기 누나, 그러면 그분 면접 구체적인 일정은…….”

- 응. 그분한텐 우리가 알릴게. 그런데 아직 펌이니? 매일 너무 늦게까지 일한다. 연차는 쌓이는데 왜 일을 점점 더 많이 하는 느낌일까?

“곧 퇴근하려고.”

- 얼른 들어가. 참. 강 수석님은 잘 지내시지? 한동안 안부도 못 물었다.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묻고는 있지만, 윤신은 기저의 무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나도 세헌과의 물밑 스캔들을 모르지 않아서, 언젠가부터 그를 입에 올리는 걸 민망해했다. 추문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에게 걸림돌이 될까 봐 우려되는 듯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세헌이 두 사람의 관계를 그녀에게 노출하는 걸 안 내켜 해서 해 줄 수 있는 말도 많지 않았다.

만에 하나 누나가 결사반대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단순히 그녀가 취할 입장이 걱정돼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단 강세헌의 외로웠던 삶 속에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은 조금이라도 들일 생각이 아직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친구든, 동료든, 연인의 가족이든, 개인적으로 관련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윤신은 눙쳐서 대꾸했다.

“늘 똑같으셔.”

- 그럼 다행이고. 참, 너 사귄다는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 언제 소개해 줄 거야.

“내 말이. 누나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아무리 졸라도 허락을 해 줘야 말…….”

- 응?

그녀는 모르지만 제겐 공통 인물에 대한 질문이었던 터라 긴장이 풀려 습관적으로 응답하게 됐다. 말허리를 강제로 자른 윤신이 세헌의 방 블라인드 너머를 어떻게든 보려고 애쓰며 말을 돌렸다.

“아니 그게. 저, 소개는 나중에 해도 돼?”

- 그럼. 준비되면 언제든지 알려 줘. 그런데 애가 수줍음이 많은가 봐?

수줍음이라는 단어와 제 연인을 한 테두리에 넣어 보려던 윤신은 금세 기권을 선언했다. 세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감정이 뭔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픽 웃었다.

“으응, 그렇지 뭐.”

- 그나저나 예전엔 금방금방 헤어지더니 그 애랑은 꽤 오래 사귀는구나? 한동안 아무도 안 만나길래 연애에 질렸나 했어.

그 반대로 연애가 너무 재밌어서 문제였다. 세헌과 나란히 다리를 겹치고 앉아 아무 의미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멋쩍어진 윤신은 입술을 달싹였다. 침묵하는 그로부터 곤란해하는 메시지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이경이 이어 말했다.

- 아무튼, 면접 후에 다시 통화하자. 오늘은 이만 끊을게. 얼른 퇴근해.

“어어, 응, 전화해 줘. 잘 자.”

금세 목소리가 단절되고, 기계음이 들렸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본 윤신이 눈동자를 차분히 내리깔았다. 이제는 꽤 편안해진 그녀의 목소리를 곱씹다 보니 사념이 많아졌다. 그동안 자신이 봐 온 누나는 어떤 게 행복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조금 에둘러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라도 그것들을 되찾아 다행이었다.

통화가 끝나자, 제게 남은 건 세헌이었다. 윤신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퇴근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퍽 늦은 시간이라 비서실 직원들은 이미 없었다. 한 시간여 전까지만 해도 남아서 뭔가를 처리하고 있던 사무장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짐작건대 퇴근한 게 아닐까 싶었다.

조심스럽게 세헌의 집무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대꾸하는 게 들렸다.

슬쩍 문을 여니 실사 자료들에 눈을 박고 있던 그가 시선을 주었다. 목이 뻐근했던지 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역시 너일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윤신이 문을 닫고 들어와 세헌에게 잘 보이는 자리에 우뚝 섰다.

“내가 내 거 감상하겠다는데 블라인드는 왜 치는데요.”

“문 안 잠가?”

“밖에 아무도 없어요. 벌써 10시예요. 우린 퇴근 안 해요?”

“해야지. 그 전에, 너 마침 잘 들어왔어. 이리 앉아 봐.”

세헌은 은근한 어투로 말을 이으며 제 무릎을 툭, 건드렸다. 윤신은 겉옷과 서류 가방을 접견용 소파에 올려 둔 뒤 그를 향해 다가섰다.

“엉큼한 건 성격이죠? 일종의 타고난 본능?”

뻔뻔한 소리를 하는 윤신을 주시하던 그가 기가 막힌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좋겠다. 네가 무슨 헛소리를 해도 귀엽게 봐 주는 사람 있어서.”

윤신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수석님?”

“너희 누나.”

“수석님이면서.”

“그럼 당연히 나지. 알면서 뭘 물어.”

대답과 동시에 그의 딱딱한 손이 윤신의 팔목을 그러쥐었다. 슬쩍 제 쪽으로 당기자, 윤신이 못 이긴 척 순순히 딸려 갔다. 탄탄한 다리 위에 윤신을 앉힌 세헌이 책상 위의 자료들을 손으로 하나씩 짚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눈길이 태블릿 PC에 닿았다.

내용은 처음 보는 거였지만, PDF 파일에 워터마크로 찍힌 하단의 로고가 제 눈에도 확실히 익었다.

“예전에 제가 소개한 업체가 보내 준 실사 자료네요. 아직도 여기에 맡기시는구나.”

오른편에 둔 실물 위치 지도를 가리킨 세헌이 긍정했다.

“응, 꼼꼼하고, 확실해. 이 공장 부지 주변 환경 오염 실사 결과인데. 네가 한번 봐 봐.”

“이걸 왜요?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돌연 윤신의 턱을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돌려 키스했다. 쪽, 쪽. 몇 번 보드라운 살갗이 맞물렸다. 마치 정신을 빼놓으려는 것 같아서, 윤신이 그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페이지를 넘겨 가며 하나하나 결과들을 꼼꼼하게 눈에 담기 시작하자, 미묘하게 이상한 점들이 감지됐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너무 평범해서 더욱 기묘한 것들이 때로는 존재했다. 음식점의 바깥에 진열대로 만들어 놓은 샘플 모형들을 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잠깐만요. 수치가 지나치게 다 평균에 수렴해요. 꼭 아무 문제 없어 보이게 만들어 놓은 샘플처럼 보여요. 이 도표하며……. 꼭 어디서 한 번쯤 본 모양 같은데요.”

“내 눈에도 그래. 이 기시감은 뭐지? 너무 멀쩡해.”

이는 세헌이 실사를 요청한 기업이 정말 법과 규정을 잘 지키고 있든지, 혹은 이 결과지에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이 조사 업체의 대표가 어떤 성향인지를 고려하면 전자의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 기업이 이렇게 환경 오염 이슈를 잘 지키면 우리가 불리한 거죠?”

“그렇다고 봐야지.”

“제 도움 필요하세요?”

“내가 직접 하려고 했는데, 다른 실사 보고서 검토할 게 쌓여 있어서 당장 내가 이거까지 뒤집어 놓을 시간이 없다. 네가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고, 의견서 초안 작성해서 보내 줘.”

“맨입으로?”

“원하는 거 사 줄게. 시계, 차, 집. 다 괜찮아.”

윤신은 몸을 틀어 세헌의 셔츠 깃을 잡고 득달같이 대꾸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강세헌 사 주세요.”

“이미 네가 가지고 있는 거 말고.”

처음엔 질색하더니, 그는 이젠 이런 말도 곧잘 했다. 자신이 기대했던 중 가장 완벽한 대답이라, 윤신은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기꺼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쿡, 설핏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상체를 찌른 윤신은 태블릿 PC의 자료들을 제게 전송했다. 뒤이어 이제는 슬슬 정리하고 돌아가자는 의미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쯤 어설프게 허리를 세운 순간, 세헌이 골반을 붙잡고 제 위로 다시 쿡 찌르듯이 내렸다.

마치 성기를 삽입하는 것처럼 힘주어 앞섶에 꽉 누르자, 서로의 하반신이 습자지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바짝 밀착했다. 그렇게 몇 번 문질러 주니, 익숙한 모양새의 성기끼리 매우 아슬아슬하게 부딪쳤다. 윤신의 가랑이 사이로 그의 성기가 꽂히는 것 같은 야릇한 촉감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하아, 긴 숨을 몰아쉰 윤신이 본능적으로 양손을 내밀어 책상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오류였던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이 겹쳐진 모양새가 꼼짝없이 성관계 체위로 보였다. 아울러 꼭 자신이 그의 진입을 학수고대하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윤신이 두 팔을 부들거렸다.

“이, 이게 뭐예요?”

등 뒤의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다가, 이내 이마를 윤신의 등에 기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세헌이 소리 내어 웃는 일은 대체로 자신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윤신은 그게 늘 기뻤지만, 이런 순간엔 솔직히 창피한 마음이 더 컸다.

“왜 웃어요. 웃지 마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수석님이 먼저 시작한 거고, 전 쓰러질까 봐 대응했을 뿐이라고요. 대체로 그렇듯이요.”

“그렇게 기대돼?”

일순 눈을 질끈 감은 윤신은, 속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타박했다. 왜 자신은 세헌처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뻔뻔히 거짓말을 할 수 없는가를 끊임없이 고찰하며, 겨우 대답했다.

“약간요.”

예상과 달리 더 이상 세헌은 웃지 않았다. 대신 여봐란듯이 윤신의 골반을 좀 더 꽉 제 위로 내리눌렀다. 그러면서 파르르 상체를 떠는 윤신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붉게 달아오른 귀를 게걸스레 핥으면서 속삭였다.

“너 빨고 싶어졌어.”

천천히 골반 아래로 손을 내린 그가 윤신의 앞섶을 요령 있게 문질렀다. 길쭉한 손가락을 겹쳐 동그랗게 만 뒤, 성기가 누인 부분을 윤곽으로 그리듯이 위아래로 쓸었다. 아직까지도 책상을 짚고 있던 윤신의 두 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곧이어 못 견디겠다는 양 몸을 억지로 틀어 세헌을 마주 봤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절박하리만치 강하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을 가르고 젖은 혀끝을 밀어 넣은 그는 붉은 살덩이를 거침없이 엉키면서 자극했다. 뾰족하게 선 돌기들을 전부 마모되게 만들 기세로 요란하게 빨자, 타액들이 뒤섞이며 척, 하고 질척한 마찰음들이 줄기차게 일었다.

“흐응, 음, 으음…….”

서서히 성기가 발기하기 시작한 덕분에 윤신의 몸이 들썩였다. 이 반응을 놓치지 않은 세헌이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려 책상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마른 몸이 완전히 눕게 만들었다. 윤신이 두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그는 기다리라는 양 바지 위로 입술을 묻고 발기한 기둥을 입으로 물었다. 뒤이어 다리를 벌려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회음 부위와 입구 주변을 옷 위로 애무하자, 자극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아 안달이 난 윤신이 다리를 들썩거렸다.

“아, 흐읏, 선배, 이거 말고 다른 거.”

세헌의 손을 끌어간 윤신이 제 바지 버클 위에 얹었다. 이미 여유를 잃은 그는 기꺼이 그것을 풀어내고, 지퍼를 내렸다.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드로어즈 위를 핥아 주자, 윤신이 헐떡거렸다.

“아! 읏! 싫……!”

“보챌 거 없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거 알잖아.”

쓰윽. 성이 나 바짝 곤두선 그의 것이 제 깡마른 허벅지 춤에 느껴졌다. 얼굴을 붉힌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쥐었다. 힐끗 내려다보니 그의 팽팽해진 앞섶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간파했다. 이윽고 세헌이 코트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찾아냈다. 그 안에서 콘돔을 꺼낸 뒤 윤신의 입에 물렸다.

젖은 입술이 포장지를 붙들고 있는 동안, 그는 윤신의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곤두선 성기의 선단을 입에 물고 빨았다. 목을 젖힌 윤신이 허리를 흔들었다. 억누르고 있던 교성을 터트리는 바람에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콘돔이 메모꽂이 위로 툭 떨어졌다.

“으응, 응!”

윤신의 발그레해진 귀두를 혀로 감싸던 그가 기둥까지 입에 더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축축한 점막으로 그것을 완전히 감쌌다. 세헌의 아래 깔린 마른 몸이 경련하듯 떨려 댔다.

마침내 그가 목구멍 가장 깊은 곳으로 성기를 처넣어 애무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사무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변호사님, 사무장입니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사색이 된 윤신이 입을 뻐끔거렸다. 가능한 한 낮은 주파수로 속닥거렸다.

“무, 문 안 잠갔어요.”

정작 공동정범인 세헌은 당황한 기색조차 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아.”

“사무장님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아닌 거 같은데. 어떡할래. 커밍아웃? 할 때가 되긴 했지.”

“어떡하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마당에 농담이 나와요? 들어오라고 해야죠.”

대답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미끄러뜨린 윤신이 책상 아래 몸을 숨겼다. 세헌이 장단을 맞춰 제 코트를 휙, 던져 아랫도리를 가려 주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뒤늦게 들어와도 좋다고 대꾸하자, 사무장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세헌이 내일 오전까지 제출하라고 지시했던 영문 자료들의 번역본이 들려 있었다.

“특별 팀 어쏘 변호사님들이 번역 다 마치셨다고 해서요. 빨리 드리는 편이 낫지 싶더라고요. 메일로는 보내 뒀고요, 이게 인쇄본입니다.”

“아, 그거. 여기 둬요.”

또각또각. 낮은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무장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 참. 다다음 주 금요일에 참석하실 태산 진연우 상무님 주관 만찬 행사가 하나 있습니다. 드레스 코드는 그레이입니다. 탁 비서한테 의복 따로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뇨. 얼마 전에 선물받은 타이가 있어요. 그걸 쓰죠. 알겠으니 이만 퇴근해요.”

윤신이 숨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그녀는 도톰한 서류를 내려놓고, 발걸음을 돌리는 듯했다. 묵례를 하는 모양인지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혹시나 눈치챌까 봐 두 손으로 입을 강력하게 틀어막고 한참을 침묵하던 윤신이 뒤늦게 무거운 호흡을 뱉어 냈다. 겨우 긴장이 풀려 세헌의 무릎에 뺨을 기댔다. 힐끗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가 눈썹을 흘긋 들어 올렸다.

“하던 거 마저 해야 하는 거 아냐?”

“하긴 뭘 해요! 꿈 깨요.”

찰싹. 그의 다리를 때린 윤신은 옷을 추스르며 책상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벌게져서 열을 식히기 위해 뺨을 손등을 문지르는 동안, 세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양새가 처음에는 단순히 긴장을 푸는 행동인 줄 알았으나, 어깨가 떨리는 모양새를 통해 뒤늦게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를 마주 보고 책상에 걸터앉은 윤신이 아랫입술을 힘주어 감쳐물었다. 이윽고 천천히 손을 끌어 내린 세헌이 턱을 괴고 그런 자신을 빤히 올려다봤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즐거운 기운들이 가득했다.

드물게 꽤 요란하게 웃은 그 때문인지 잔뜩 달떠 관능적이던 야릇한 분위기가 서로를 잘 이해하는 푸근한 분위기로 바뀐 뒤였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전 십년감수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너도 산전수전 다 겪으면 이렇게 돼.”

“제가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도 이렇겐 안 될걸요. 으, 여기 더 있기 싫어요. 집에 갈래요.”

“도련님 얼른 댁에 모셔다 드려야지.”

완전히 몸을 일으킨 세헌 때문에 서로의 비스듬한 시선의 구도가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윤신의 뺨에 입 맞춰 주곤 손을 내밀었다. 그걸 잡고 책상 아래로 내려온 윤신이 땅에 떨어져 있는 세헌의 코트를 들어 먼지를 떨면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이제야 퇴근하는 모양인지 사무장의 뒷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러는 사이 그도 대충 주변을 정리하고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문단속을 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 윤신이 돌연 생각난 게 있어 세헌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은 잠시 문 앞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세헌이 자신을 끌어안는 순간, 자연스럽게 윤신이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귓전에 키스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그들은 깃털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가볍게 입술을 맞물렸다 떼어 냈다.

침묵 끝에 먼저 말문을 연 건 윤신이었다.

“다다음주 금요일 행사요. 혹시 늦게 끝나요?”

“그건 왜.”

“그다음 날이 그날이잖아요. 12월 31일.”

“너 그 주에 변론 기일 있잖아. 네가 신경 쓸 거 없다니까.”

“같이 가요. 올해는 간 김에 그 근처에서 하루 묵고 올까요? 같이 해도 보고.”

윤신이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고, 또 세헌도 그걸 원하는 게 분명해 매년 마지막 날엔 두 사람이 함께 예의 자연 친화적 납골당에 들렀다.

그는 그곳에서 한 해를 정리하고, 또 이듬해를 위해 마음을 다잡는 거라고 말했으나, 윤신은 이제 세헌이 그러지 않았으면 싶었다.

이제부터 그가 심경을 정돈하는 데엔 오직 자신만 이용하길 원했다. 혹여 죄책감이나 자괴감 같은 게 느껴질 땐 자신을 보며 달래고, 여기서 더 가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 땐 자신을 생각하며 브레이크를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든 건 제게만 털고, 좋은 건 자신과만 나누었으면 했다.

마음에 관한 한, 그의 모든 게 제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은 이미 그러고 있었으니까.

독점욕은 그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비싼 꽃은 올해도 제가 살게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윤신은 충분히 만족했다. 제 뺨을 어루만지는 세헌의 눈동자에 그가 빚어낼 수 있는 모든 우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끝내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윤신은 착하게 대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픽 웃은 세헌이 엄지로 윤신의 눈 아래를 지분거렸다.

그러고는 보드라운 양 뺨을 두 손으로 덥석 쥐어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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