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51)

03. 

티 테이블 앞에 앉은 세헌은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레스 룸에서 대강 옷을 갖춰 입은 윤신이 새 넥타이를 들고 침실로 들어오다 그 모습을 발견했다. 진지한 얼굴만 보고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어제 자신이 받아 온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은 윤신은 두 팔로 턱을 괴고 그를 빤히 관찰했다. 골똘히 뭔가 궁리하는 기색으로 화면을 주시하던 그가 꽤 집요한 시선을 느낀 듯 눈길을 주었다.

“준비 다 했어?”

“네. 그런데 수석님 타이가 여기 하나도 없더라고요. 빈 목으론 출근 안 하시잖아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긴 목을 가리키자, 세헌이 목울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훔쳤다.

하필이면 그가 출장 가 있는 사이 이 집에 가져다 두었던 넥타이 전부를 업체에 클리닝 맡긴 상태여서, 당장 맬 게 없었다.

“내려갈 때 집에 들렀다 가면 돼.”

“그러지 말고 제 거 매면 안 돼요?”

“날 너희 집 남매 모두랑 놀아나는 호색한으로 만들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하고.”

굳이 대놓고 일일이 밝히진 않지만 펌 내의 각 비서실은 만에 하나를 위해 변호사가 무엇을 입는지도 암암리에 점검했다. 지난번 클라이언트와 만났을 때 입은 슈트를 이번에 또 입거나 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걸 아는 윤신도 실수로 세헌과 같은 액세서리 따위를 걸치는 일이 없도록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었다.

“새거예요. 지난번에 누나랑 백화점 갔다가 샀거든요. 제가 쓸 거라고 하고 결제했는데 사실은 수석님 드리고 싶었던 거라서 안 매고 그냥 뒀어요. 이거요.”

손에 든 밝은 회색 넥타이를 내밀어 보이자, 그가 탁,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순순히 끄덕였다. 윤신은 의자를 끌어다 세헌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셔츠 깃을 붙잡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관찰하던 세헌이 얼굴을 기울여서 쪼듯이 키스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장난스럽게 입술을 접촉하던 두 사람이 자연히 살갗을 떼어 냈다.

이윽고 윤신이 세헌의 목에 타이를 걸었다. 꼼꼼하게 매듭을 지어 매어 주는 동안 그가 자신을 올곧게 주시했다. 세헌이 오롯이 제게 몰두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아무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 자신조차도 명확하겐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다.

“아침 먹어야죠. 시간이 직접 차려 먹기에는 애매하고…… 아래층 카페에서 때울까요? 커피랑 샌드위치?”

모두 매듭을 지어 준 뒤 확, 불현듯 당기자 세헌이 순순히 딸려 와 다시 입 맞췄다. 윗입술을 입술로 깨물었다가, 아랫입술에도 똑같이 하더니 슬며시 벌어진 빈틈으로 혀를 넣어 가지런한 치아를 야릇하게 훑었다. 그의 넥타이를 붙잡고 있던 윤신의 손이 조금 떨렸다.

골고루 핥고 지나간 그의 혀끝이 아주 느릿하게 입 안에서 빠져나갔다. 반사적으로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바로 눈앞에 아직 세헌이 자리했다.

서서히 벌어지는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퍽 관능적이라고 느낄 즈음, 그가 언제 들어도 제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잠긴 음성을 토해 냈다.

“아침 내가 만들어 놨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소 놀란 윤신이 그의 넥타이를 떨어뜨리듯 놓았다.

“언제?”

“너 씻을 때.”

“뭘?”

“커피랑 샌드위치.”

“와…….”

자신이 비몽사몽간에 씻으러 욕실에 들어갈 때 그는 이미 씻고 나와 가운 차림으로 스킨을 바르고 있었다. 제 쪽에서 모두 씻고 나왔을 땐 타이만 없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서류들을 검토하던 중이었고, 옷까지 갈아입고 침실로 한 차례 들어왔을 때는 어제 있었던 사건 때문인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조금 전처럼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사이 시간 어디쯤에 그는 따로 다이닝 룸에 다녀온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 낸 윤신은 그의 뺨에 여러 번 빠르게 뽀뽀했다. 그가 얌전히 앉아 그 접촉을 얼마간 받아 주나 싶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필연적으로 서로의 입술이 부대꼈다. 윤신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변호사님은 몸이 한 열 개 정도 돼요?”

“딱 하나야. 진짜 비싼 거니까 아껴 써.”

그는 퍽 덤덤하게 말했는데, 듣는 윤신은 지레 찔려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제가 무슨 낭비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밝히긴 선배가 훨씬 밝히면서.”

문장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돌연 침묵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너무 갔다는 생각에 미쳐 아차 싶었던 윤신이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세헌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직시하고 있는 채였다.

“난 그거 얘기한 거 아닌데.”

얼굴이 벌게진 윤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알아요.”

“머릿속이 음흉해. 너는. 아침 7시 반부터. 응?”

“온몸이 음흉한 수석님보단 건전하다고 생각해요. 손은 어찌나 빠르신지.”

“그래? 법정 증거 주의 알지. 누가 더 난잡한지 증거로 얘기하자고.”

긴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세헌이 윤신의 의자를 좀 더 본인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빠져나갈 구멍을 봉쇄하듯 등받이를 짚더니 한 손으로 윤신의 늘씬한 목을 감쌌다. 이내 가볍게 쥐었다가 느긋하게 살갗을 쓸어내렸다.

순리대로 그의 손은 셔츠 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얇은 천 위에서 옷으로 감춰진 유두를 지분거렸다. 이에 화답하듯 윤신은 하반신을 슬쩍 비틀어 세헌의 탄탄한 허벅지에 제 다리를 비볐다. 입술을 가르고 한 김 데워진 숨이 터져 나왔다.

“이게 증거죠. 자꾸 나한테 손대잖아.”

“네가 상상한 걸 내가 구현해 준 거지.”

“이런 상상 안 했거든요.”

“그러니까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재판을 해 보자는 거 아냐.”

“우리 출근 안 해요?”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본 그가 짧게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이 출근 전 가장 사적인 행위로 쓸 수 있는 여유 시간을 계산해 보는 것 같았다. 윤신의 머릿속도 그와 비슷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결과적으로 안 되겠다 싶어져 세헌이 손쓰기 전에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뒤이어 겹쳐진 다리도 떼어 내곤 의자를 뒤로 물렀다.

“본인이 훨씬 더 변태라는 거 인정하시죠.”

“못 해. 안 해.”

“그럼 누가 먼저 조르는지 보면 되겠네요. 당분간 섹스 금지.”

그 가정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양 세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회할걸.”

“이 말 정확히 음절 하나하나 다 돌려 드릴게요. 후회할걸요.”

곧 재미있어하는 듯한 기미가 깃든 그의 얼굴을 통해 이 대형 딜이 성사됐음을 깨닫게 됐다. 윤신이 먼저 몸을 일으키자, 세헌도 넥타이를 더욱 빈틈없이 매면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다이닝 룸으로 가는 길에 그가 뒤통수에 손을 넣어 왔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던 건지 손을 끌어 내려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손가락 끝을 좁은 귓구멍 속에 넣어 지분거렸다. 윤신이 이건 반칙이라는 양 눈을 홉뜨고 세헌을 쏘아봤다.

“스킨십은 해도 되는 거예요? 이거 반칙 아니에요?”

“너도 하든지.”

어깨를 으쓱한 그가 앞서 다이닝 룸으로 진입했다. 뒤쫓는 윤신의 얼굴에 아주 순간이지만 ‘이게 아닌데.’ 싶은 기미가 스쳤다. 호기롭게 전쟁을 시작하긴 했는데 왠지 제 처절한 패배가 머릿속에 그려져서였다. 그러나 승부욕이 강한 세헌은 제게만은 한없이 무너졌다. 그걸 아는 윤신은 곧 그럴 리가 없다는 양 고개를 가로젓곤 식탁 앞에 앉았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샌드위치를 냉장고에서 꺼내고, 커피를 내렸다. 그러는 동안 윤신의 시선은 계속 세헌의 탄탄한 뒷모습에 고정됐다.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더 간절해지는 건 인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먼저 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갈증이 났다.

식탁 위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는데, 금세 커피를 내린 세헌이 그것을 컵에 얼음과 함께 가득 채워 두 사람의 앞에 한 잔씩 놓고 마주 앉았다.

그가 먼저 커피를 마셨다. 윤신도 자연스럽게 제 앞의 샌드위치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닐 텐데 확실히 그는 미적 감각이 있었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던 윤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새카만 색 액체의 기분이 갑작스럽게 궁금해졌다. 한데 정작 그는 제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무덤덤한 시선을 던질 따름이었다.

세헌은 소유욕이 심하고 독점욕도 때론 지나쳤다. 아울러 성욕도 강한 편이었다. 지금 저 건조한 눈빛이 그가 걸어오는 싸움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 몇 분 만에 윤신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수석님이 인정하면 안 돼요? 저 이겨서 뭐 해요.”

“이렇게 벌써 안달 났다는 게 네가 야하다는 증거지. 아냐? 네가 인정해.”

“아니거든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승부욕이 자극받아 완전히 꺾이기는 싫었다. 윤신은 애써 그에게서 눈길을 피하고 말을 돌렸다.

“탁 비서님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결정사에 프로필 넣는다던데. 들으셨어요?”

대체 식탁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양, 세헌이 바로 미간을 구겼다.

“내가 그런 거까지 알아야 돼?”

“이러니까 탁 비서님이 섭섭해하죠.”

“넌 진짜 내가 누구 신경 썼으면 좋겠어?”

두 사람의 역할이 기본적으로 세헌이 악역, 제 쪽이 선역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렇지 그의 행위나 선택에 윤신이 동의할 때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윤신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하등 관심 없는 그런 면이 때때로, 아니 대체로 좋았다.

“지금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너도 쓸데없이 다른 사람한테 관심 두지 마. 난 그런 거 못 참아.”

“선배 얘기 물어보려고 추임새처럼 서두를 넣은 거죠. 사회성 없는 거 티 내요?”

굳이 부인하지 않은 그가 물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윤신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밴 넣어 본 적 있어요? 예전에라도요. 유전자 좋고, 외모 훌륭하고, 돈 잘 벌고, 학벌·직업 다 넘치고. 지나친 오버 스펙이라 조건 맞춰 줄 상대가 희박할 것 같긴 한데…….”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듯 마신 그가 퍽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고아인 건 왜 빼.”

“여자들은 그런 거 좋아해요. 시댁 없으면 편하죠. 우리 누난 그렇다던데.”

“그러니까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빼냐고. 그리고 너 그 시스터 콤플렉스는 어떻게 좀 해결이 안 되나? 이러다 침대에서까지 누나 얘기 하겠다. 선배, 박아 줘요. 누나가 지금 삽입해도 된대요.”

세헌은 제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꺼림칙해했다. 윤신은 그게 별로 싫지 않았다. 하나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건 곤란했다. 식겁해서 바로 반박하게 됐다.

“침대에서 제가 누나 얘길 왜 해요. 글쎄 이건 콤플렉스가 아니라, 애착 관계라고 하는…….”

“그 애착을 왜 남이랑 쌓아? 애인은 여기 있는데.”

“누난 가족이에요.”

“난 가족 없잖아. 불공평해. 너도 나랑만 쌓아.”

“됐어요. 선배가 인류애라곤 없는 강세헌인 걸 잊고 있었어요. 결정사 얘긴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못마땅해 혀를 찬 윤신이 세헌에게 흠 잡을 게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식사하는 모습부터 진 느낌이 들었지만, 찾자면 빈틈은 나오기 마련이다.

“선밴 좋은 남편은 절대 아닐걸요. 일에 빠져 살지, 성격 더럽지, 태도 꼿꼿하지, 떳떳하지 못한 나쁜 짓 곧잘 하지. 섹스는 꼭 거칠게 하고, 짜증 나면 담배 피우고! 살림엔 손끝 하나 안 대는 데다 딱 봐도 육아엔 신경도 안 쓸 거 훤하고요.”

“못 들은 걸로 하라며. 대놓고 흉보는 건 무슨 심보야?”

“뒤늦게 할 말이 생각났어요. 한 100개쯤 더할 수도 있어요.”

세헌도 윤신이 내린 정의 자체에는 전부 동의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꽤 엄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신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가 그렇게 단점이 많아?”

“전 그 단점들도 좋아요. 돈 많으면 개중 반 이상은 대충 해결되고요.”

거짓말에는 썩 재능이 없는 윤신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답하자, 그가 귀엽다는 양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세헌이 미소 짓는 모습은 언제나 근사해서 윤신의 시야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바로 풀려 버려서 그걸 들키기 싫은 마음에 돌연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 침묵의 실을 자르고 음성 주파수를 공기 중에 흘려보냈다.

“그럼 네가 거두면 되겠네. 지금처럼.”

그와의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에 몰두하고 있던 윤신은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을 제 눈에 담았다. 마치 관찰자라도 된 듯이 한 발짝 물러선 자리에서 이 관계의 형태를 살폈다가, 이내 그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주인공이 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같이 아침을 먹고, 밤을 함께 보낸다. 어딘가로 출장을 떠났던 그가 고향에 회귀하듯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여기 있는 자신은 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두 사람이 남녀 사이였다면 법도 사실혼 관계라고 이 사이를 규정지어 주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현실감이 없으면서도, 현실 그 자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눈앞의 세헌이 애틋해진 윤신이 다정한 어투로 응답했다.

“가끔은 우리가 결혼한 느낌이 들어요. 아직도 그 제도에는 회의적이에요?”

“응. 그렇게 구속되는 거 별로야.”

“저랑도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생활 동반자 법 한 5년 뒤쯤까지 제정 안 되면…… 우리도 둘이서 그런 거 해요. 청혼은 제가 할게요. 사귀자고도, 좋아한다고도, 사랑한다고도 제가 먼저 했으니까.”

그 순간, 커피를 마시던 세헌이 잔을 내려놓았다. 까랑, 유리컵을 식탁에 두는 손길이 위치를 잘못 잡아 접시에 비듬하게 스쳤다. 그답지 않은 실수라서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른침을 삼킨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어 냈다.

“너도 반칙 하나 한 거다.”

느닷없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 것 같기도 해서, 윤신의 뽀얀 뺨이 움찔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곧이어 식탁을 가로지르듯 몸을 기울여서 윤신의 입술에 키스하곤, 도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가만히 주시했다. 불편하지는 않지만, 긴장감은 분명히 오가는 미묘한 적막이 그들의 위를 바람처럼 감쌌다. 윤신은 세헌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을 공유하는 이런 때가 좋았다.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입술을 달싹이며 더 키스해 달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의외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졌어. 내가 변태고, 내가 음란하고, 내가 난잡해.”

곧 져 주리라고 나름대로 예상은 했다. 자신이 그때까지 버티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하나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항복을 선언할 줄은 몰랐다. 윤신은 득달같이 답했다.

“알아요.”

“섹스 금지 해제해 줘. 안 해 주면 난 아마 말라 죽을 거야.”

“했어요.”

“애초에 금지였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고?”

이번엔 윤신 쪽에서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걸 보고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턱을 괸 채 맞은편을 가만히 직시했다.

짧았던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린 윤신은 그의 시선을 받아 내며 세헌이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넣고 아삭거리는 채소를 씹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도 웃음이 전염된 건지 소리 내어 웃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 * *

클라이언트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로펌 사옥 1층 카페를 지나치던 윤신은, 픽업대 쪽에 있는 탁 비서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유난히 반가워하며 제게 손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일손이 하나쯤 더 필요했던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간식거리와 커피 따위들을 산 모양인지 그가 받아 가야 할 트레이만 네 개에, 페이퍼백이 다섯 개였다. 안쪽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힐끗 확인한 윤신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뭘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손님 오세요?”

“강 변호사님이 비서실에 돌리시는 거예요. 주말에 일했다고요.”

어제 탁 비서와 자신이 통화했던 일을 떠올린 윤신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변호사님 것도 있어요. 저기 저 카페라테. 참. 수석님이 카드 주셔서 이따 고기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아이, 아니에요. 전 일을 안 했는데 제가 껴서 뭐 해요.”

“다들 엄청 좋아할걸요?”

하지만 세헌은 싫어할 터다. 세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윤신이 멋쩍게 웃어넘겼다.

음료 포장이 완료되기를 함께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화두는 당연히 예의 그 일일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게 많은 윤신이 먼저 운을 뗐다.

“어제 그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아침에 수석님이 그 일로 계속 통화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가뜩이나 복잡할 텐데 꼬치꼬치 여쭤보기가 좀 그래서 말았거든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윤신에게, 탁 비서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닿았다. 대부분의 일을 능숙하게 해내지만, 호기심을 감추는 데는 썩 재능이 없는 그가 말로 윤신을 찔렀다.

“아침에 강 수석님이 통화하시는 걸 들었다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행간에서 뭔가를 읽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난처해졌다. 탁 비서는 세헌이 하는 공식적인 모든 일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출근하기 전 누구와 통화했는지도 인지하고 있을 테고, 그걸 자신이 안다는 건 좀 수상쩍긴 했다.

변명거리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정공법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뿐이었다.

“아침 일찍 잠깐 뵀거든요.”

“어, 그래요? 아아, 맞다. 사택 동지시지. 처음에 수석님이 도 변호사님 엄청 신경 쓰여 하시는 것 같더니, 결국은 많이 친해지셨네요. 볼 때마다 신기해.”

윤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진짜 괜찮을까요? 새벽에 저도 잠깐 확인해 봤는데 기사는 없더라고요.”

“당장 며칠 막는 거지 입건이라도 되면 계속 그러진 못할 거예요. 수석님도 그래서 여러 가지 루트로 해결 방안 고민하고 계시고요. 하필이면 언론이 딱 좋아하는 사고를 쳐서…….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우리 클라이언트랑 행장이랑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여서 원만하게 합의가 되나 봐요. 꽤 막역하대요. 두 사람 사이에 잘 해결하면 어느 정도는 덮어지니까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음료와 간식거리들이 모두 준비된 듯했다. 그것들을 탁 비서와 반씩 나눠 든 윤신이 걸음을 내디뎠다.

기다란 로비를 지나는 동안, 마침 생각이 난 게 있어 화제를 잠깐 바꿨다.

“참, 제 케이스요. 남편 쪽 사실 조회 좀 부탁해요.”

어떤 사건인지, 또 자신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챈 탁 비서가 응수했다.

“신용 카드?”

“네. 조회하셔서 출입국 기록과 관련된 내용을 좀 찾아 주세요. 호텔 디파짓도 좋고, 여행사 결제도 좋고요. 외국으로 돈을 빼돌린 정황이 너무 뻔해서 당연히 조정이 될 거라고 여기고 안 건드린 건데, 저쪽은 우리가 자금 흐름을 못 찾고 있다고 판단하는 거 같아요. 자꾸 어깃장을 놓네요.”

“강 수석님 동기 변호사분 담당 사건 말씀이시죠? 의뢰인이 이혼당하기 전에 아내 몰래 건물 매도했다던.”

“맞아요. 제가 이번 건은 좀 크게 이기고 싶어서요.”

“그분도 우리랑 사연이 많죠. 아무튼 알겠어요. 곧 보고드리죠.”

고맙다는 의사 표현으로 눈을 마주친 윤신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승강기 방향으로 조용히 걷고 있는데, 로비 중앙의 인포 데스크에 윤신 또래로 보이는 낡은 코트 차림의 웬 남자가 비척비척 걸어와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뭔가를 열심히 물었다. 직원 한 사람이 반대편 건물을 가리키자 그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아니라 별관을 찾아온 손님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별관으로 가려면 두 사람이 선 위치를 비스듬하게 지나쳐야 했다. 그 덕분에 그의 표정이 잘 들여다보였다. 아주 어둡고, 침울했다.

탁 비서도 그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던지 자취가 사라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출입구가 연결돼 있어서 가끔 저렇게 별관이랑 착각하는 사람 왕왕 생겨요.”

“사단 법인 쪽 찾아온 거면 법률 상담일까요?”

“맞다. 법률 상담 월요일로 바뀌었죠. 도 변호사님 의뢰인일 수도 있겠네요?”

윤신에겐 무료 상담일지라도 미리 한 번씩 내용을 숙지하고 가는 습관이 있었다. 아울러 해당 사건에 필요한 법과 판례 따위들을 꼼꼼하게 챙기곤 했었는데. 이번엔 당장 오늘 상담을 앞두고 있으면서 그러지 못했다. 다른 일들에 파묻혀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유난히 그쪽 일에 해이해져 계속 이런 식이었다.

씁쓸한 숨을 삼킨 윤신은 탁 비서가 답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조용히 물었다.

“상담 시간은 이따 3시 이후예요. 맞는다면 왜 벌써 왔을까요.”

“엄청 급했던 거 아니겠어요? 얼굴도 되게 안 좋았잖아요. 봤죠.”

“그러게요. 마음이 안 좋네요. 예전에 의뢰인들한테서 저런 표정 가끔 본 적 있어요.”

“그러셨겠다. 그래도 이겨 주셨죠?”

“이긴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왜 손도 못 써 본 일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요.”

탁 비서가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느새 승강기의 앞이었다.

두 사람은 기계에 올라탔다. 윤신이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아는지 탁 비서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층수 버튼만 누르고 말문을 닫았다.

계기판의 숫자가 균일한 속도로 올라갔다. 이윽고 사무실 층수에 다다른 그들은 승강기에서 내렸다. 비서실 테이블 위에 짐들을 내려놓은 윤신은 트레이 안에 든 제 몫의 커피만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세헌의 방 쪽을 기민하게 살피며 탁 비서와 사무장에게 눈인사한 뒤 빠르게 제 방으로 들어왔다.

탁. 문을 닫고 들어와 책상 위의 자료들을 찾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 틈을 한참 뒤지자 이혼 소송 자료들 밑에 쌓인 무료 법률 상담 신청서들이 손에 잡혔다.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겨우 꺼내 위로 올리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게 왜 이렇게 밑에 깔려 있어. 잘 보이지도 않게.’

예전엔 제 일보다 무료 상담이나, 프로 보노 사건 같은 것들이 훨씬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강세헌이 모든 것들 중 제일 우선이었고, 그다음엔 제게 맡겨진 공식적인 업무 순서였다.

물론 엄밀히 말해 도국의 소속 변호사 입장에선 위임장을 받아 수임하는 사건과 사회에 공헌하는 차원에서 하는 일의 경중이 다른 게 당연했다. 그래도 윤신은 균형을 유지하고 싶었다. 세헌은 그런 자신을 좋아했고, 윤신 또한 스스로를 잃는 건 싫었다.

이동식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윤신은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촉박하긴 해도, 아주 작은 여유가 있었다.

“민법 390조, 채무 불이행, 그리고 불법 행위…….”

만년필을 꺼내 든 윤신은 신청서의 내용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읽으며 메모하기 시작했다.

* * *

별관 사단 법인 접견실에 앉아 있던 윤신이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아까 본관 로비에서 봤던 제 또래의 남자가 안으로 조심스럽게 입성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시간이 훌쩍 넘게 밖의 대기실에서 이 짧은 상담 시간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남자의 얼굴은 많이 지쳐 있었다. 원래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지금 모양새는 퍽 심약하다고 표현하면 적확할 듯했다. 윤신은 저런 얼굴을 잘 알았다. 도국 밖에 있을 때,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일부는 저런 표정을 지었다.

개중 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마주쳤던 거의 모든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으로 하여금 검은색 슈트에 검은색 넥타이를 착용하게 만들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희망을 단 한 줄기도 보지 못했던 건지, 송사 중 끝내 자살을 택했다. 그때는 모두 관두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 그 허무했던 기분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앉으세요.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윤신이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남자는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앉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 위해, 앞쪽으로 시원한 물을 내밀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걸 마시고 윤신을 훔쳐봤다. 또렷하게 시선을 교환해 준 윤신이 상담 신청서를 꺼내 들었다.

“제가 대충 보긴 했는데. 음. 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셨고, 한 차례 소송까지 가셨네요. 해고 무효 확인 및 임금 청구 소송이었고, 결과적으론 해고가 무효라고 선고도 받으셨고요.”

남자는 본능적으로 윤신이 제 말을 잘 들어 줄 사람이라 여긴 건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법원이 회사 측에 해고 일부터 복직하는 날까지의 임금을 계산해서 저한테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절 복직시켜 주지 않고 있어요.”

“판결 확정 후에도요?”

물컵을 두 손으로 잡은 남자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떨렸다.

“계속 연락이 없어서 직접 찾아갔거든요. 그런데 사무실에 제 자리는 이미 없어져서 복사기가 놓여 있었고, 전 그 사람들한테 투명 인간 같았어요. 동료들은 알은척도 안 하고요. 다들 저를 벌레 보는 것처럼……. 회사에 누를 끼쳤다는 거겠죠. 제가 늘 존경했던 본부장님만 겨우 알은척해 주셨어요.”

“상담자분, 진정하시고요. 다 들어 드릴 거니까 차근차근 말씀하시면 돼요.”

“처음엔 저 혼자 준비해서 소송했던 거라서요. 그래서 회사가 이행을 안 하나 싶어서, 이번에는 로펌 도움을 구해 보려고요. 인터넷 피해자 카페에 변호사님 이름이 자주 올라와요. 시청이나 법원 변호사 무료 상담보다 여기가 낫다고, 도이경 남동생이 제일 친절하다고…….”

누나의 이름을 뱉은 남자가 실수했다고 느낀 건지 말끝을 흐렸다. 윤신은 괜찮다는 표시로 떨리는 손을 가볍게 덮어 주곤 고객용 모니터에 준비해 둔 판례를 띄웠다. 다행히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뭐죠?”

“이 경우 주위적으로는 복직 의무 불이행의 채무 불이행에 기해, 예비적으로는 복직 거부의 불법 행위에 기해 손해 배상 청구를 할 수 있어요. 주위적이란 건 주된 청구라는 뜻이고, 예비적이란 건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를 대비한 예비 청구라는 뜻인데요. 읽어 보세요.”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을 허겁지겁 마시는 것처럼 남자는 활자들을 열심히 읽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청구 내용이 저랑 비슷해 보여요.”

“맞아요. 대법원에서 아주 유사한 판례가 있었어요. 승소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왜 혼자 소송을 하셨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남자는 다시 윤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임료가……. 승소해도 상대측에 100퍼센트 청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네, 보수 규칙에 따라서 일부만 받을 수 있어요. 음, 금전적인 문제가 있으시군요.”

생각에 잠긴 그는 한 번 말의 맥을 끊었다. 제게 집중하고 있는 남자의 눈매가 아주 진지했다. 혹시 자존심을 다치게 할까 봐, 윤신은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당장 생계가 많이 어려우신가요?”

“복직을 기다리면서 재취업을 하지 않아서 모아 둔 돈을 전부 까먹었어요. 그게 길어지다 보니까……. 회사에 가 봤더니 사람 취급을 안 해 줘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고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니 자연히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도전하기가 쉽지 않고, 악순환이더라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는 감정적인 문제에까지 생각조차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꽤 억울한 어투로 열심히 말을 하다가, 너무 흥분했다 싶었던 건지 입을 다물었다. 윤신이 최대한 상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차분한 음성 주파수로 응답했다.

“직위를 돌려 드리는 건 쉽지 않겠지만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순 있을 것 같아요.”

“어, 어떻게요?”

“소송 결과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해도 이미 그 회사는 법원 명령을 어겼어요. 두 번짼 더 쉬울 거예요. 법원은 판결과 명령을 내리긴 하지만 이행을 일일이 감시하진 않아서요. 제 생각엔 소송보단 법정 밖에서 합의로 해결하는 편이 나아 보이거든요.”

“법원 말도 안 듣는데 제가 합의로 어떻게 해결을 봐요?”

“저희 도국에, 프로 보노라고…… 공익을 위한 사건을 처리해 주는 팀이 있어요. 꼭 소송만 하는 건 아니고, 대리인이 돼서 합의도 받아 드려요. 상담자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한번 넣어 볼까 싶은데. 어떠세요? 저한테 맡기지 않으실래요? 마침 제가 노무 전문 변호사예요.”

고민하기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까 제 집무실에서 이 사건과 남자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며 한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그리고, 해 볼 만하다고 느꼈다.

윤신이 꽤 신뢰감 있게 말을 내뱉자, 계속 겨울비처럼 침침하게 잠겨 있던 남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눈빛에도 미세하지만 희망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이 작은 변화를 통해 윤신의 마음도 안도했다. 역시 자신은 이런 일이 체질에 맞았다. 마냥 낙관할 순 없는 일이지만, 일이 잘 해결된다면 제 기저에 빙하 밑부분처럼 꽁꽁 숨겨져 있던 빛바랜 트라우마도 조금은 씻겨 나갈 수 있으리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변호사님.”

“해야 할 일 하는 건데요. 그럼, 여기 저희도 등록을 해야 하니 인적 사항부터 적어 주세요. 그런 다음 좀 더 자세하게 얘길 해 보죠.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급히 펜을 들어 윤신이 내미는 종이 위에 개인 정보를 기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윤신의 불편했던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다.

* * *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세헌의 검은색 세단 헤드라이트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주차장 벽면에 등을 기대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윤신은 승강기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는 늘씬한 인영을 발견하고 몸을 곧추세웠다. 잘 맞는 슈트 차림의 세헌이 뚜벅뚜벅 걸어 제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목에 걸린 밝은 회색 넥타이가 시니컬한 그의 인상과 아주 잘 어울렸다.

“이제 내려오세요?”

“그러시는 중인데. 먼저 간 거 아니었어? 탁 비가 그러던데.”

“제가 어딜 감히 먼저 갑니까. 비서실에서 이상하게 볼까 봐 따로 가겠다고 한 거예요.”

불친절한 설명만을 듣고도 세헌은 대충 감이 잡히는 듯했다.

“너 탁 비 앞에서 사고 쳤구나.”

하나 윤신은 도저히 제 말의 어느 부분에서 그걸 직감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안 하던 거짓말을 했으니까.”

아. 그제야 대충 그 사고의 흐름이 짐작됐다.

“소박하게요. 오전에 선배 통화하시는 거 들었다고 탁 비서님한테 쓸데없는 얘길 해서요.”

“탁 비가 눈치가 9단이긴 한데, 걘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날 아주 좋아해.”

“알고 있었어요?”

“모를 수가 있나.”

괜히 탁 비서와의 오랜 인연조차 부러워진 윤신이 오뚝이처럼 상체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 모습을 그가 말없이 주시했다. 가느다랗게 뜬 눈이 마치 혀로 핥듯이 말간 얼굴을 훑었다. 그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시선에 금세 민망해진 윤신이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며 그의 가슴팍을 서류 가방으로 툭, 건드렸다.

“왜 주차장에서부터 꼬셔요?”

“너 뭐 좋은 일 있지. 걱정 끝이 너무 짧은데?”

“그런 거 없는데요.”

천연덕스럽게 반박하는 윤신 때문에 어이없었던지,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체를 짚고 조수석의 문을 열어 준 그가 타라는 듯 손짓했다. 언제는 이런 일 간지러워서 못 해 준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꽤 자연스러웠다.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낸 윤신이 차량에 탑승하려던 때였다. 세헌이 돌연 잇는 말 때문에 행동이 정물처럼 멈췄다.

“왜 좋은 일이 없어. 너의 욕망을 도국을 통해 발산하고 계시던데.”

단둘이 있을 때 제 입으로 직접 말해 주고 싶었던 윤신이 김빠진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아세요?”

“내가 모르는 게 있을까?”

“아니, 여긴 대체 말 퍼지는 게 왜 이렇게 빨라요. 펌 안에 친구도 몇 명 없으면서 소문은 제일 먼저 듣더라.”

“그러니까 너 나랑 스캔들 안 나게 조심해. 너 쫓겨나. 모두가 탁 비서처럼 내 편은 아니야. 언제나 보안 조심.”

이 논리를 좀처럼 납득할 수가 없어서 발끈하게 됐다.

“사람들이 수석님 편이 아닌데 왜 제가 쫓겨납니까?”

“나는 돈을 되게, 아주 많이 벌어다 주니까. 넌 프로 보노 같은 거나 좋아하는 변태고. 가사 팀 일 좀 집중해서 하나 했다. 딱 1년 가는군. 1년. 장하다, 도윤신.”

탁. 차체를 두드린 그가 윤신의 몸을 조수석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순순히 차에 올라탄 윤신이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문을 닫아 주곤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곧이어 주행을 시작하는 그를, 반쯤 모로 상체를 튼 윤신이 빤히 직시했다.

“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귀엽다는 양 가볍게 미소 짓긴 했지만, 세헌은 윤신이 바라는 말을 해 주진 않았다.

“물어봐 줬으면 싶어서 미치겠는 거겠지. 난 또 상대가 원하면 해 주기가 싫더라.”

“하여튼 꼬여 가지고. 그래서 안 물어볼 거예요?”

“상담료부터 내.”

그가 제 하얀 뺨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윤신이 거리낌 없이 세헌을 향해 상반신을 기울이고 매끄러운 피부에 입을 맞췄다. 마침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세헌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몇 초간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가, 서서히 살갗을 분리했다.

셈을 제대로 치렀다고 판단한 건지, 세헌이 말문을 열었다.

“뭐가 특별했어?”

“특별? 사건이 특이해서 수임한 건 아니에요.”

“내가 알기로 그동안 네가 프로 보노로 맡고 싶었을 사건들은 꽤 있었어. 그 남자가 가져온 문제는 뭐가 달랐길래 널 움직인 거냐고.”

아, 그런 의미의 특별.

윤신은 부정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장외의 질문을 던졌다.

“질투 나요?”

“그랬으면 좋겠어?”

윤신은 답하지 않았으나, 세헌이 기꺼이 덧붙였다.

“넌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난 해명할 의무가 없지.”

“했구나? 꼭 아닌 척하더라. 수석님이 아닌 척하면 100퍼센트예요.”

이번엔 그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윤신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이 아침에 선물했던 타이를 끌어다가 그 밑부분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고, 그것으로는 모자라다는 듯 세헌의 귀와 뺨 이곳저곳에 입술을 뭉개듯이 키스했다. 날카로운 턱선에 코끝을 문지른 뒤라야, 다시 정면을 보고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현재와 맞물린 꽤 오래전 일을 곱씹고 있는 터라 침묵이 조금 길어졌다.

“예전에 어떤 클라이언트가 자살한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 아는 분 법률 사무소에 들어간 지 2년 차 때였을 거예요.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내리 한 달 넘게 쉬었어요.”

퍽 무거운 화두였던지라, 세헌도 딱히 대답하진 않았다. 그저 들었다. 그가 제 목소리를 그 누구의 음성보다 경청한다는 걸 잘 아는 윤신이 기어에 얹은 그의 손 위에 제 왼손을 덮듯이 얽으면서 손가락을 지분거렸다. 이어지는 주파수는 꽤 평이하고, 덤덤했다.

“걷고 있는데 왜 걷는지 모르고, 말을 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신이 안 서고, 딱히 의지할 데는 없지만 뭔가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무리 일해도 나올 구멍이 없고, 즐거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아무런 힘이 안 난다. 무기력하다. 잠이 쏟아진다.”

“우울증 환자였어?”

“네. 그런 내용이 장장 유서 열 장에 걸쳐 써 있더라고요. 그분 유서가 가족이 아닌 제 앞으로 왔거든요. 제가 본인 말을 들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대요.”

“그 남자랑, 그 죽은 클라이언트가 느낌이 비슷했나 보지?”

물론 그런 것도 없진 않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자신을 움직였다.

“어렸을 때요. 아버지가 아주 가끔 누나랑 절 앉혀 놓고 술 드셨을 때가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요. 진짜 옛날 일이거든요.”

다행히 세헌에게도 꽤 관심 있는 화두였던지 금세 이 호흡을 따라와 주었다.

“전 너무 어려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몰랐고, 누난 뭔가를 아는 거 같았는데 나한테 설명해 주진 않았죠. 콜라 같은 걸 마시면서 아빠 말동무를 해 드렸어요. 그런데 제가 변시 합격하던 날, 누나가 처음으로 아버지 술 취하면 꼭 하던 얘기라면서 전해 주더라고요.”

“뭐였는데.”

“쪽팔리다…….”

“…….”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셨던 건지 여태까진 잘 이해 안 됐는데. 아까 제 기분이 딱 그랬어요.”

지금 하는 가사 팀의 일은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껴졌고, 예전 일들보다 훨씬 편했다. 세헌과의 관계는 순항했고, 누나도 자리를 잡아 갔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다소 해이해져 있었다. 그 의뢰인을 보는데, 왜 변호사가 됐는지 조금씩 그 마음을 까먹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동의하는 듯, 동의하지 않는 듯 그의 반응이 묘했다. 윤신은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그 돈 받아 줄까 해요, 왕창.”

사실 사건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하나 제게 쉬워 보인다 해도, 당사자에겐 그렇지 않을 터다. 아주 중요하고, 또 심각한 인생 속 이변일 게 분명했다. 그걸 조금, 도와주자는 것이다.

일순 힐끗 제 쪽을 본 세헌은 역시나,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본 중 너의 직업 만족도가 제일 높아 보여.”

그 말에 바로 거울을 들여다본 윤신이 허탈한 어투로 대꾸했다.

“전 큰돈 벌긴 그른 거 같아요. 그냥 엄마 유산이나 까먹고 살아야지.”

“그거 남아 있긴 해?”

“예전에도 한번 말씀 드렸지만 집 사는 데 다 썼어요. 안 굶기겠다고 했는데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100만 원 벌면 선배 80만 원 쓰게 해 드릴게요. 사실혼 관계에선 물적 증거가 중요하니까 녹음하셔도 좋아요.”

“사실혼이라. 청혼은 어디 가고.”

“그건 5년 뒤 얘기죠.”

툭, 툭. 핸들을 길쭉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리치는 세헌의 입가에 근사한 웃음기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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