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가정 법원 내 소형 조정실에 나란히 앉은 윤신과 상대측 변호사 사이에 도는 공기가 꽤 험악했다. 웬만해선 법원 청사 내에서, 특히 판사 앞에서는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윤신도 도저히 말이 안 통해 답답했던 나머지 목소리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입니까?”
탁,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책상을 내려친 옆의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내 말이 그거야! 도윤신이 너 왜 이렇게 기를 쓰고 달려들어?”
“달려들다뇨. 애초에 부부 중 일방이 상대방 쪽에서 재산 분할 청구할까 봐 미리 허위 매도한 게 사실이잖아요. 속된 말로 돈을 빼돌렸다고요. 저희는 그걸 바로잡자는 겁니다. 이혼을 안 해 주겠다는 게 아니라, 기여분만 인정해 달란 거예요. 간단한 등식 아닙니까?”
“아니, 나머지 재산에 처분 금지 가처분 내렸잖아. 그거 가져가. 누가 뭐래? 뭘 바로잡아.”
“그건 당연히 가져갈 거고요. 이미 남편이 아내의 동의 없이 처분한 부분에 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 변호사님. 민법 제406조 1항에 의하면. 이거 다 취소 및 원상 복구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 둘 다 너무 일이 복잡해지지 않나요?”
정확한 발음으로, 또 분명한 말투로 또박또박 설명하자 남자가 매우 기막혀하며 넥타이를 헝클어뜨렸다. 신경질적인 시선을 던지는 건 덤이었다.
“너 나한테 법 가르쳐? 어디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내가 법을 모를까 봐?”
“죄송하지만 저 그렇게 어디가 새파란 정도로는 안 어립니다. 법을 모르시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시는 것 같아 알려 드리는 거고요.”
“아이고, 판사님. 제가 이런 건방진 후배 변호사와 일을 합니다.”
오만불손한 선배와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은 정작 자신이 할 말이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해 버리는 통에 헛웃음만 나왔다. 변호사 대 변호사로 만났는데도 여전히 외부의 계급장을 달고 조정 위원회에서도 반말에, 욕지거리까지 해 대는 쪽이 꺼낼 얘긴 확실히 아니었다.
숨을 몰아쉰 윤신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김 변호사님, 채권자 취소 소송 하게 되면 저희가 이깁니다. 그때 주나, 지금 주나. 어차피 기여도에 대해서만 받겠다는 거잖아요. 서로 만신창이 되기 전에요.”
“글쎄, 애초에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니까. 허위 매도가 아니라고. 소송? 걸어 봐 한번.”
본질적인 문제부터 인정하지 않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상대 때문에 기가 막혔다. 결과가 뻔한데 고집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로 블러핑을 치다 보면 얻어걸리는 것도 있다지만 이런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편 쪽에서 재산의 반 이상을 불법적으로 매도했다는 정황이 매우 정확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소송으로 가면 100퍼센트 저쪽이 불리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진 윤신이 그들의 앞에서 내내 침묵하고 있던 판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판사는 시종일관 큰 중재 의지가 없어 보였다. 피고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와 로스쿨 동기라는 걸 알아서, 윤신도 크게 기대는 안 했다. 하나 최소한도의 조정은 해 주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판사도 그걸 모르지는 않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뗐다.
“대체 대리인들 싸움을 왜 여기서 합니까? 두 분 조정할 의사가 있긴 있어요? 제 눈엔 안 그래 보입니다만.”
“그러니까, 도윤신 변호사 쪽에서!”
발끈한 남자가 뭔가 더 따질 기세로 윤신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자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판사가 동기를 저지하듯 손을 뻗고 둘 모두에게 경고했다.
“안 되겠습니다. 내가 날을 잘못 고른 것 같군요. 정리되면 다시 약속을 잡읍시다. 다만 다음번에도 이런 식이면 좋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두 분 모두에게 패널티를 드리겠습니다.”
도매금으로 묶인 게 억울해서 목구멍까지 열이 차올랐으나, 윤신은 원만하게 이혼하고 싶어 하던 제 클라이언트를 떠올리며 한번 이를 꽉 물고 참아 냈다.
일방적으로 상황을 종료한 판사가 먼저 소형 조정실을 빠져나가자,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갈등이 강제로 매조졌으니, 윤신도 하는 수 없이 일단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눈앞으로 돌돌 만 휴지 뭉치가 휙 날아와 떨어졌다. 대충 구겨 놓은 그 물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신은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옆의 남자가 자신을 희롱하겠다는 의사를 담고 던진 물건인 게 분명해서였다.
일부러 자신을 열받게 하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다만 저쪽도 제 기분을 마냥 상하게 해선 썩 유리하지만은 않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나오는 건지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제게 투척한 쓰레기를 보자마자 전투욕이 일어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윤신도 언성을 높였다.
“이게 무례하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기가 초등학교인 줄 아세요?”
분노한 것을 숨기지 않는 윤신의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은 남자는 회전의자에 앉아 몸을 들썩이며 장난처럼 답할 따름이었다.
“무례하다? 도윤신 변호사 이제 보니 말을 정말 막 하네.”
“먼저 행동도 일도 막 하시는 본인부터 되돌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야, 너 강세헌한테 일 배웠다더니 걔 싸가지까지 같이 배웠냐? 알 만하다.”
일순 어깨를 움찔한 윤신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직시했다. 이 순간의 모든 게 이해가 안 되지만 유독 납득이 안 가는 게 있었다.
“여기서 강세헌 변호사님 얘기가 왜 나옵니까. 전 이제 그분 어쏘 아닙니다.”
“강세헌이 우리의 유일한 매개체니까 그렇지. 아, 너 몰랐구나. 걔랑 나 로스쿨 동기야. 상대 변호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네.”
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자극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 설명을 듣자 어렴풋하게 그 형태가 보이는 듯도 했다. 이 남자가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고 싶은 건 윤신이 아니라, 세헌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가만히 훑어본 윤신이 그제야 좀 알겠다는 양 한껏 누그러진 어투로 반문했다.
“강 변호사님이랑 아는 사이셨군요. 친하셨어요?”
“걘 아무랑도 안 친했어. 성격이 아주 지랄 같은 데가 있잖아?”
“관계가 별로 안 좋으셨나 봐요. 평가가 짜시네요.”
“그 자식은 누구와도 사이가 안 좋았어. 다들 걔 재수 없어서 싫어했거든.”
음, 추임새처럼 입 다물고 소리를 내던 윤신이 은근한 어투로 반문했다.
“혹시 나이 한참 어린 강 선배한테 성적으로 지셨어요?”
“뭐?”
“아니면 도국에 입사하고 싶었는데 거절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애꿎은 후배 변호사 데리고 본인의 감정을 푸는 이 태도는 열등감으로밖엔 설명이 안 돼서요.”
상냥한 음성과 대조적으로 냉랭하고 신랄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남자는 처음에 웃음기를 입가에 달고 듣는 듯하다가, 곧 금세 미간을 구겼다. 둘 중 하나는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여유롭게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가며 장난을 치던 걸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바로 멱살이라도 쥘 듯 가까이 다가오더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윤신을 보곤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번째 매형 욕하니까 그건 또 듣기 싫은가 봐?”
그러면 그렇지.
왜 이 얘길 안 꺼내나 싶었다. 의아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자가 예상 답안을 제게 주었다. 기가 차서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추슬렀다. 사실 하루 이틀 듣는 얘기도 아니었다.
최근 수한 홀딩스 유 대표 측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화살촉이 겨냥한 건 전처가 아니라 그녀의 법률 대리인인 세헌이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 때문에 누나에게 공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그녀를 보호했던 방패막이에게 총구를 겨눈 것이다.
그들이 택한 건 세헌을 낭설의 바다 한가운데에 빠뜨리는 아주 치졸한 방식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경과 눈이 맞아 멀쩡한 가정을 파탄 낸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를 매개로 한 두 사람 인연이 아주 진지한 형태로 진전됐고, 그가 이혼 소송을 부추겨 부부가 파경에 이르렀다는 듯했다. 위자료와 재산 분할을 받아 내 주고, 잠시 기다렸다가 몇 년 뒤엔 태산 호텔에서 결혼을 할 계획이라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세헌이 본인이 사는 아파트에 그녀의 동생인 윤신을 끌어들여 남들의 눈속임을 한다며, 사실을 교묘하게 비틀어 만든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돌았다. 그곳은 로펌의 사택이라고 해명해도, 더 재미있게 들리는 쪽을 믿었다.
“전 매형 없습니다.”
“아닌 척은. 이 바닥 소문 짜해. 너희 누나가 강세헌 사는 아파트 건물도 주기적으로 드나든다며? 아주 살림을 차렸다던데.”
최근 누나는 제집에 잘 드나들지 않았다. 세헌이 안 내켜 해서 보통 밖이나, 그녀의 집에서 만났다. 아울러 그 사람이랑 살림 비슷한 걸 차린 건 자신이다.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짜증스럽게 삼킨 윤신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거기 사택이라 저도 삽니다. 누난 저희 집에 오는 거고요. 명백한 허위 사실입니다.”
“억울하면 고소하든가, 변호사 선생님.”
이 허무맹랑하고도 악질적인 추문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도리어 업계 법조인들에게 잘 먹혀들었다. 세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그들은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걸 농담 삼아 소비했다. 강물처럼 흘러, 흘러 제 귀에 들어왔을 땐, 이미 당사자인 세헌도 그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데 정작 그는 꽤 재미있어했다. 얼핏 자신을 괴롭히는 척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전처도 함께 공략했다며, 방식이 아주 교묘하고 저열해서 공부가 된다는 거였다.
그가 해프닝인 것처럼 웃어넘겨 주어서 그땐 그렇게 지나갔지만, 아직까지도 윤신은 누군가 제 마음을 망치 같은 걸로 잔뜩 때려 뭉갠 것처럼 속상했다. 차라리 후폭풍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번번이 애꿎은 세헌이 휘말리는 게 가슴 아팠다.
“저희 누나 데리고 그런 더러운 농담 그만하세요.”
“이봐.”
“강 수석님도 마찬가집니다. 이 소송에 제 사감 생기게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머리가 차갑게 식은 윤신의 음성 주파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그동안 몇 번 윤신과 마주쳐 왔던 남자도 이 변화를 감지한 건지 돌연 말을 아꼈다.
순식간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 틈에 윤신은 챙기던 짐들을 마저 정리해서 서류 가방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제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어깨를 탁, 치고 지나쳤다.
“조정 의사가 전혀 없으신 거 같은데 다음엔 변론 기일에 뵙죠.”
“야, 도윤신. 야!”
윤신은 남자의 부름을 무시하고 그대로 소형 조정실을 빠져나왔다. 슬슬 외부 공기가 더워지고 있어서, 안팎의 온도 차가 꽤 됐다. 입을 꾹 다문채로 뚜벅뚜벅 걸어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차 안에 몸을 태운 그는 핸들을 탁, 내려쳤다. 곧이어 룸미러를 통해 제 굳은 얼굴을 힐끗 살폈다. 그러다 뒤늦게 내려온 상대 변호사의 모습이 유리에 비친 것을 확인하곤 으득 이를 갈았다.
이실직고하자면, 이 소송에 사감은 이미 생겼다.
저 남자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말 그대로 자신은 세헌에게 일을 배웠다는 것이다.
“기 쓰고 달려드는 게 뭔지 보여 드릴게요.”
윤신은 운전대를 쥐어 주행을 시작하며 분연히 마음을 다졌다.
* * *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돌아온 윤신은 어두운 복도를 차분히 거닐었다. 꽤 늦은 시간이라 사무실 곳곳의 불이 꺼져 있었다. 자연히 사람이 적어 고요했다.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 앞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세헌의 방을 먼저 힐끗 살폈다. 창에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어 아무것도 안 보였다.
현재 세헌은 홍콩으로 법률 세미나를 간 상태였다. 학회 자체는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행사가 종료된 뒤 그곳에서 합병 업무와 관련한 담당자들을 만나야 하는 터라 1주일이 훌쩍 넘게 그곳에 체류했다.
내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들었다. 지난 한 주간 유난히 더디게 흐르던 시간이 오늘따라 더욱 야속하리만치 느리게 움직였다. 오늘 제 할 일은 모두 마쳤으나 어차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곳으로 되돌아온 거였다.
아쉬운 한숨을 삼킨 윤신은 제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한 가지 다른 건 미세한 빈틈으로 빛이 어렴풋이 보였다는 점이다. 의아해진 윤신은 잠시간 멈칫했다.
‘이상하다. 불 다 끄고 나갔는데. 센서가 눌렸나.’
고개를 갸웃하곤 그대로 출입문을 열어젖혔다.
바로 그 순간,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인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 식겁했다. 윤신의 팔에 걸쳐져 있던 코트와 재킷이 땅으로 뚝, 떨어졌다.
“헉……!”
비명을 지를 뻔한 제 입을 손으로 단단히 틀어막고 겨우 눈동자를 굴렸다. 다리를 척 꼬고 앉아 제 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제 인지 능력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확실히 세헌이었다. 당황스럽고 놀라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반가운 마음이 커서 윤신의 얼굴에 미소가 크게 걸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그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뻗어 늘씬한 허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마른 몸을 제 다리 위에 포개듯이 앉혀서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옆으로 두 다리를 나란히 뻗은 윤신이 상체를 틀어 그의 체온에 제 것을 얹었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비행기 당겨서 온 거예요?”
“응, 침대 혼자 쓰는 게 이제 어색해. 시간이 뜨길래 그냥 남은 자리 건져서 타고 왔어.”
긴 목을 포박하듯 두 팔을 세헌의 등 뒤로 뻗은 윤신이 그의 매끈한 얼굴 이곳저곳에 정신없이 뽀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자신이 하는 양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이윽고 윤신의 행위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긴 건지 뼈가 도드라진 등을 어루만졌다.
“저녁은 먹었어?”
“클라이언트랑요. 한식이었고, 그냥 그랬어요. 선밴요?”
“기내식으로 대충 때웠어. 참, 너 피고 측 대리인 때문에 골치 아프다면서. 막무가내라던데. 핸들링할 수 있겠어?”
껴안고 있던 세헌에게서 조금 상체를 떼어 낸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그가 돌아오면 슬쩍 물어보고 싶었던 화두였던 터라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게 놀라웠다.
“그 얘긴 누가 해 줬어요? 안 그래도 뭐 좀 여쭤보려고 했거든요.”
질문을 하다 보니 스스로 답을 찾게 됐다. 세헌과 자신의 팀은 이제 달라졌지만 비서실은 여전히 공동으로 쓰고 있어서 말이 종종 오갔다. 탁 비서가 그에게 전해 준 모양이다.
“탁 비서님이구나?”
눈짓하는 그의 표정이 긍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윤신이 덧붙였다.
“이길 수 있어요. 아니, 꼭 이길 거예요.”
“왜 이렇게 쓸데없이 비장해?”
“그런 게 있어요.”
이렇게 의뭉스럽게 반응하면 ‘왜.’ 하고 물어봐 줄 거라 생각했으나, 세헌의 반응은 예상에서 빗나갔다. 침묵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윤신이 인내하지 못하고 득달같이 물었다.
“왜 안 캐물어요? 물어봐야 저도 대답해 주죠. 그래야 또 저도 물어보고요.”
“걔 내 로스쿨 동기잖아. 안 들어도 뻔해서. 아, 판사도 내 동기야.”
“알아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아무리 공정하려고 해도 팔은 안으로 굽을 텐데…….”
“그리고 네 상대 변호사는 도국에 이력서를 냈다가 리젝 됐어. 두 번이나.”
“진짜였어요? 제가 그거로 그저께 그분 긁었는데요. 자존심 엄청 상했겠다.”
“그걸 리젝한 게 누구게.”
헉, 방에 들어올 때처럼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윤신의 동공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 때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음성이 내포한 건 후회와 당혹, 그리고 상쾌함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감정이었다.
“선배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번 다?”
대답 대신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더니 윤신의 허리춤을 손으로 지분거렸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뜨곤 의미심장한 어투로 응답했다.
“그쪽에서 지금 제일 널 갈구기 좋은 건, 너희 누나와 내 치정 스캔들이겠네. 곤란하겠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그는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 짐작하는 듯했다. 결국 윤신도 마음이 약해져 진짜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런 건 괜찮아요. 저도 할 말은 해요.”
“그건 내가 잘 알지.”
“선배야말로 졸지에 가정 파탄범 되셔서 어떡해요? 나랑 사귀는데 사람들은 다 우리 누나랑 사귀는 줄 아니까 좀 열받아요. 또 미안하고.”
“어떡하긴. 네가 책임지는 거 아니었어?”
“그건 걱정하지 마요. 저 생활력 강해요. 절대 안 굶길게요.”
진지하게 듣던 세헌이 납득이 잘 안 간다는 양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무료 변론과 최저 수임료가 변호사의 생활력을 증명하는 증거였어?”
“그래도 도국에 온 뒤로 벌 만큼은 벌어요.”
“너 매년 기부 얼마씩 해.”
“……꽤?”
“기대할게. 우리의 가난한 신혼 생활.”
“절약은 현대인의 미덕이에요.”
액수가 적은 대신 마음껏 쓰라는 듯 눈을 마주쳐 준 윤신이 세헌의 뺨을 붙잡고 짧게 입 맞췄다. 꽤 구태의연한 서약의 방식이었으나, 그는 충분히 만족한 듯했다. 이윽고 걱정할 것 없다고 달래는 음성이 아주 다정했다.
“도윤신.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소문 같은 건 늘 있었어. 너도 날 둘러싼 얘기들 한두 개쯤은 들어 봤을 거 아니야.”
“그 소문들은 수석님이 해 온 짓이 있어서 생겼던 거고요. 이번엔…… 다르죠.”
“나한텐 그거나 이거나 똑같아.”
새삼스럽게 또 미안해진 윤신이 그에게 좀 더 몸을 바짝 기댔다. 셔츠 하나 차림인 그의 몸 근육이 꽤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세미나로 출장을 가 있던 1주일은 물론이고, 그 전의 며칠도 일이 바빠 같이 있지 못했던 터라 금세 몸이 달았다.
윤신은 그가 직접 반지를 끼워 주었던 약지를 길게 세워 그의 붉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슬며시 벌어진 틈을 타 제 혀를 그 사이에 끼웠다. 앞부분을 조금 넣었다가, 빼냈다가 하니 그가 장단을 맞춰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하며 압박을 가했다.
후, 세헌의 입 속으로 숨을 토해 낸 윤신이 좀 더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뺨을 어루만지면서 민감한 표피를 아슬아슬하게 부딪치자, 그가 바통을 이어받아 윗입술을 한 번, 아랫입술을 한 번 아플 정도로 강하게 깨물고는 본격적으로 촉촉한 입술을 맞물렸다.
“으응…….”
시작은 윤신이 했지만, 리드하는 건 세헌 쪽이었다. 그가 노련하게 살덩이를 겹쳐 얽으면서 윤신을 몰아붙였다. 절박하게 살갗을 탐하는 혀끝이 모순적이게도 까칠하면서 부드러웠다.
이렇게 느긋하게 키스를 나눈 게 오랜만이었던 두 사람 모두 빠르게 흥분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저마다 정신없이 상대방의 혀를 빨면서 절박하게 서로를 탐해 나갔다.
성감이 잔뜩 달아올라 혀의 돌기들이 죄다 서는 듯했다. 윤신은 숨이 점점 막혔으나, 그로부터 떨어지고 싶지 않아 연신 바르작거렸다.
이윽고 그들은 거친 키스 끝에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길게 연결된 실선을 전부 삼킨 세헌이 윤신의 턱과 목 주변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머리를 뒤로 슬쩍 젖히고 신음하던 윤신이 본능적으로 그의 셔츠 단추를 가볍게 매만졌다. 곧이어 가슴팍으로 끌어 내려 유두가 위치한 부근을 쓸다가, 아주 느릿하게 더 아래로 좌표를 옮겼다.
마침내 단단하게 긴장한 그의 복부를 타고, 바지 버클까지 도달했다.
“저 오늘 할 일 다 끝났어요. 여기서 당장 해요.”
다리 위에서 몸을 조금 들썩이자, 세헌이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은 건지 괴로운 숨을 삼켰다. 윤신을 향해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성욕이 가득했다. 그걸 받아 내며 그의 귓전에 대고 깊은 호흡을 뱉어 낸 윤신이 결국 슬쩍 도드라진 앞섶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른 손목을 잡아챈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사나운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했는데, 행동을 저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눈빛만 가만히 교환하고 있던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놔요. 만지고 싶어요.”
“너한테 긴히 부탁할 게 있어서 이쪽으로 온 거야. 그거 먼저 해결하고. 섹스는 집에서 느긋하게 하자.”
“부탁? 저한테요? 강세헌 씨가요?”
평소 세헌이 제게 부탁할 일이란 건 많지 않았다. 명령이라면 모를까, 뭔가를 조심스럽게 청한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차올랐다.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힌 윤신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자 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마른 몸을 다리에서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일어서서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잠깐 따라와. 보여 줄 게 있어.”
집무실 밖으로 나간 그는 맞은편의 본인 사무실로 진입했다. 윤신이 보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두루 살피면서 세헌을 뒤따랐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책상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기다란 접견용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쳤다. 문단속을 하고 완전히 안으로 들어온 윤신이 바로 그의 옆에 가 몸을 기대면서 그가 넘긴 서류를 눈으로 살폈다.
안에는 누군가의 간단한 이력 따위들이 기록돼 있었다.
사진을 보니 윤신의 눈에도 익은 유명 국회 의원이었다.
“아들이 하나 있고…… 몰랐는데 이 사람 싱글 맘이네요. 아, 몇 년 전에 사별했구나.”
꼼꼼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윤신이 옆의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걸 제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요?”
“내 조사원이 있는데. 모레 만나서 자료를 좀 받아 와 줘. 그 자리에서 맞는 걸 준 건지 정도는 바로 확인해야 해서 미리 프로필을 보여 주는 거니까 대충 숙지만 하고. 이 이상 자세하겐 알 필요는 없어.”
썩 친절하지는 않은 설명이었으나, 윤신은 바로 맥락을 이해했다. 그가 지금 주력하고 있는 사건은 외국계 변호사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해외 기업 인수 합병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뿐만 아니라 전부터 홍콩에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터다. 그것과 관련한 정보인 모양이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쓰일지는 모르지만, 세헌이 조사원을 만난다는 건 투명하지 않은 절차로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여서 대충은 감이 잡혔다. 다만 한동안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제게 함구했던 터였다. 세헌은 본인이 하는 물밑의 공작들을 윤신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이걸 왜 저한테……. 모레 어디 가세요?”
“오후에 클라이언트랑, 은행장이랑 아주 중요한 삼자 미팅이 급하게 잡혔어.”
“주말이고, 여독도 풀어야죠. 댁에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나도 시도는 해 봤지만, 사정상 양쪽 다 시간을 변경하는 게 불가능해. 처음엔 탁 비한테 맡길까도 했는데, 걜 못 믿겠어.”
능력치가 높은 조사원들은 일종의 무형 고정 자산이고, 그게 외부에 노출되어서 좋을 건 없었다. 아울러 여전히 제 주변의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그다운 결정이었다. 윤신은 세헌이 신뢰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을 에둘러 들은 듯해, 부끄러웠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감쳐물다가,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저는 믿나 봐요.”
정확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양, 그는 지그시 시선을 보냈다. 제 말에 그렇다고 대꾸해 주진 않았으나 윤신은 이미 그의 답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턱을 들어 올려 세헌의 뺨에 키스하고 서류철을 옆에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그가 한쪽 팔을 뻗어 윤신의 마른 몸을 당겨 안았다. 그에게 기댄 채로 숨만 쌕쌕 내쉬던 윤신이 세헌의 단단한 허벅지를 천천히 쓸었다. 에로틱하다기보다는 퍽 걱정스럽고 조심스러워하는 손짓이었다.
부탁이야 들어주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였다. 줄곧 한 번쯤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 같았다.
“제가 받아 올 거, 혹시 찜찜한 자료예요?”
“대답해야 돼?”
“맞는구나.”
“넌 더 안 듣는 게 나아. 차는 내 걸 끌고 가서, 그냥 배달만 해. 전달한 뒤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여기고 털어. 거기까지가 네 일이야.”
“선밴 저를 무슨 유치원생으로 보시는 것 같아요.”
서두만 듣고도 윤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감이 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숨을 쉬었다. 동시에 가슴팍이 차분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세헌 쪽에 완전히 하중을 몰아 기대 있는 터라 윤신에게 그 파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울러 귓전에 꽂히는 침착한 숨소리를 통해 제 말을 새겨듣고 있는 기색이 전이됐다.
“가끔 복잡한 일 생기면 저한테도 얘기해 줘요. 골치 아프면 털어놓고, 힘들면 의지하고요. 저는 선배한테 그러잖아요.”
“네가 하면 됐지.”
“같이해요. 전부 다 같이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숨기는 거 있는 거 싫어요. 나쁜 놈인 거 알고 좋아한 거예요.”
눈꺼풀을 차분히 내리감은 윤신은 그에게 제 머리를 문질렀다. 사락, 사락.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의 물 먹은 듯 뻣뻣한 드레스 셔츠 위에 쓸릴 때마다 부드러운 마찰음이 일었다. 그들은 서로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세헌의 잘 정리된 손톱을 매만지던 윤신이 불현듯 말을 이었다.
“모레 전 어디로 가면 돼요?”
“지난번 우리 같이 갔던 유원지. 오후 2시에 내가 찍어 둔 위치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 그럼 그쪽에서 널 알아볼 거야. 차 안에 있으면 돼. 그 후에 만나서 저녁 먹자.”
“사람 많을 텐데 그렇게 대놓고 접선해도 괜찮아요?”
“이번엔 인파가 많은 걸 역이용하려는 거니까 당연히 괜찮아.”
그가 한 말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윤신이 돌연 흠칫했다. 세헌에게 의탁하고 있던 몸을 곧게 세우곤 옆의 그를 힐난의 기미 가득 담아 쏘아보았다.
“잠깐만요. 우리 지지난주에 데이트했던 거기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한 세헌의 표정 때문에 윤신은 더욱 열이 올랐다.
“설마 정보 교환할 때 어디가 안전할지 염탐차 가신 거에 저 이용하신 거예요?”
그 부분은 항변하고 싶었던지, 눈으로 생각을 전달하던 그도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너랑 가 봤다가 접선하기 괜찮아서 거길 선정했다는 경우의 수도 있겠지.”
“네, 뭐 그랬다손 쳐요. 결과론적으론 지금 수석님이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럽히시는 거네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이 정리된 윤신이 세헌으로부터 제 둔부를 조금 떨어뜨렸다. 거리를 벌리고 몸을 모로 해서 그를 보자, 세헌이 바로 다시 손을 뻗었다. 버티는 윤신의 힘보다 그가 당기는 힘이 훨씬 더 강력했다. 어쩌면 의지의 크기가 달랐던 거였을 수도 있었다.
그는 처음보다 더 가까이 서로의 몸을 밀착해서 윤신을 품에 가뒀다. 두 팔로 빈틈없이 껴안아 귀와 목울대 따위에 수차례 키스의 비를 퍼붓다가, 이내 눈을 맞춰 왔다. 좀 더 세헌을 밀어내려던 윤신의 결심도 결국 한 송이 꽃처럼 꺾이고 말았다. 그에게 안긴 채로 힐난을 이어 나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게 잘못된 거야? 너랑 갔던 덴 다른 사람이랑 가면 안 돼?”
“와,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랑 그냥 가도 안 되지만 이런 일로는 더 안 되죠. 봐요. 나한테 오늘까지 거긴 우리가 데이트하고, 키스한 장소였는데 모레부턴 비리 심부름한 장소가 되는 거잖아요.”
워낙 꽉 안겨 있어 몸을 비틀어도 크게 움직이기가 요원했다. 겨우 고개만 틀어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세헌은 조금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윤신이 화내는 포인트를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모호한 얼굴로 눈살을 구기다가, 손을 겹치듯 눈길을 겹쳐 왔다.
어찌 됐든 윤신 쪽에서 매우 반발하고 있어서, 해결 방법을 모색할 필요를 느낀 듯했다.
“앞으로 안 그럴게.”
“‘안 들킬게.’를 잘못 말한 거 아니에요?”
“네가 모르는 델 가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특별히 의식 없이 거길 골랐으리란 걸 모르지는 않아서, 윤신도 더 화를 낼 동력을 상실했다.
“봐준다.”
“생각보다 섬세하네, 도윤신 변호사.”
“수석님이 무딘 거겠죠. 역으로 생각해 봐요.”
“넌 배려심이 많아서 애초에 그런 짓을 안 하잖아. 난 그런 거 생각해 볼 필요 없어.”
또 영 틀린 소린 아니어서 할 말이 없었다. 서로의 기본값이 다르다는 사실에 왠지 억울한 마음이 싹텄다. 짜증을 내듯 그의 복부를 팔등으로 툭, 치곤 상체를 완전히 틀어 세헌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런 일로 떨어져 있기엔 그가 많이 그리웠다.
비슷한 마음이었던 건지 그가 뒤통수에 큼지막한 손을 넣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번쩍 윤신을 들어 제 위에 다시 앉혔다.
이윽고 그는 마른 몸을 끌어안은 채로 윤신의 앞섶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두 팔을 아래로 뻗은 윤신이 세헌의 골반쯤을 붙들어 자세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그가 버클을 풀고,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읏, 집에 가서 하자면서요.”
드로어즈 위로 도드라진 기둥을 힘껏 쥔 그가 귓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럴 건데. 오랜만이라 낯가릴까 봐 그동안 잘 있었나 인사하는 거야. 안녕.”
툭, 손끝으로 선단 부분을 가볍게 치는 그 때문에 윤신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으…… 이럴 때 진짜 변태 같아요.”
귓전에 은근하게 속삭이는 세헌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고, 에로틱했다.
“자위는 몇 번이나 했어? 나 얘랑 인사 한 열흘 만에 하는 거 같은데.”
“안 했어요. 바빴단 말이에요. 매일 침대에 머리 닿자마자 쓰러져서 잤어요. 아! 잠, 잠깐.”
이윽고 그의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기둥을 안정적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쥐락펴락했다.
맨살갗이 닿는 게 아니어서인지 윤신의 머릿속에 나쁜 짓을 하는 것만 같은 아득한 감각이 치밀어 올랐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자, 세헌이 음험한 상상력을 자극하듯 나른하게 귓속말하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확실해?”
“으응, 선배, 아…….”
“아, 넌 뒤 찔러 주는 걸 좋아하지. 여기도 안 건드렸어?”
금세 좀 더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 넣은 그가 매끈한 회음 부위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입구 주변에서 감질나게 손가락 끝을 세워 천 위로 몇 번 찌르기를 반복하자, 윤신의 허벅지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안 했다니까! 읏, 응!”
“혹시 알아? 솔직하게 말하면 네 허벅지에 좆이라도 비벼 줄지.”
눈앞이 아찔해진 윤신의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와 중구난방으로 퍼졌다. 정말 계속 본의 아닌 금욕 기간이 이어졌던 탓에, 세헌의 손이 닿는 순간순간마다 흥분감이 차올랐다. 아주 빠른 속도로 흥분한 성기가 천을 꿰뚫고 나올 듯 꺼떡거렸다. 그는 일부러 놀리듯이 그 발기한 윤곽을 손가락 끄트머리로 그려 나갔다. 세헌의 몸을 잡고 있는 윤신의 두 팔이 덜덜 흔들렸다.
“선배, 하아, 나, 나 못 버티겠어.”
“버틸 필요 없어.”
쓱, 드로어즈를 반쯤 끌어 내린 그가 허공으로 수줍게 드러난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뻣뻣하게 강직된 기둥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다가, 곧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마치 원통에 끼워 넣듯 성기를 손에 가두고 앞뒤로 문질러 주자, 윤신이 결국 허벅지를 파르르 떨어 댔다.
금방 한계에 치달은 윤신의 선단이 부들거렸다. 세헌은 사정 직전까지 윤신을 몰아가더니 돌연 성기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아직 반 정도 걸쳐 있는 속옷 안으로 손가락을 세워 쑤셔 넣었다. 한껏 예민해진 회음 부위를 몇 번 쓰다듬더니 그대로 밀부의 입구에 중지를 지분거렸다.
“안 돼, 아, 거기 아직 하지 마요.”
“오랜만인데 얘도 반갑다고 인사는 해야지.”
“하지, 아!”
윤활제도 없이 쿡, 쑤셔 넣은 손가락이 순식간에 내부로 진입했다. 한동안 관계하지 않았던지라 서로 버거웠지만 그는 퍽 익숙하게 야릇한 행동을 이어 갔다.
전립선의 위치를 찾아 지그시 누른 순간, 윤신이 입을 반쯤 벌리고 힘겹게 헐떡거리면서 쿠퍼액을 쏟아 냈다. 탄력받은 세헌이 좀 더 힘껏 그 위를 짓이기듯 압박하자 곧 열없이 사출해 정액을 토했다.
“읏! 아흑! 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윤신이 움츠리고 있던 몸을 겨우 바로 세웠다. 사정의 여운으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서 세헌과 시선을 교환했다. 제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는 그의 눈동자가 몹시 질척거리고 있는 듯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노력하다, 안 되겠다 싶어져 완전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고는 상체를 앞으로 쓰러지듯 기울여 세헌에게 의지했다. 그의 고급스러운 셔츠와 바지에 튄 불투명한 액체들이 신경 쓰였으나, 어떤 조치를 취할 여력이 전혀 안 남은 상태였다. 오죽하면 여전히 성기를 외부에 내놓은 채로 속옷조차 끌어 올리지 못했다.
옆으로 팔을 움직인 그가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선단에 남은 정액을 대신 훔쳤다. 그러고는 제 옷 위에 튄 것도 대충 닦은 뒤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두 몸을 접촉했다.
“윤신아.”
“응…….”
“얼른 가자. 내 걸로 귀여워해 주고 싶어.”
눈을 감은 채로 세헌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던 윤신이, 그의 애타는 마음에 화답하듯 두 팔을 뻗어 그의 탄탄한 등을 힘껏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