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51)

29. 

선고 기일의 법정은 무거운 기운이 맴돌았다.

보통 선고 당일에는 판사가 결과만 전달해 주는 게 다여서 당사자도 변호사도 나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윤신은 일부러 세헌과 함께 직접 참석했다. 누나는 첫째 아이가 당장 몇 달 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뉴스 헤드라인에 다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히는 게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불참한 그녀 대신이었다.

그들의 앞에 앉은 판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원고 도이경과 피고 유정원은 이혼한다.”

재판부가 선고한 피고가 원고에게 지급해야 하는 위자료와, 재산 분할 총액은 수백억 원 상당이었다.

혼인 파탄의 사유가 남편 쪽에 있었고, 수한 법무 팀 측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이경에게 증거 준비가 매우 잘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헌을 비롯한 대리인단이 그걸 노련하게 활용했던 덕분에 당사자가 언론을 통해 만신창이가 되는 것 외엔 특별한 말썽이 없었다. 피고의 자산이 수조 원대에 달했던 터라 처음에는 천문학적 분할 액수가 예상됐다.

하나 1심의 결과가 점점 확실해지자, 세헌은 돌연 협상을 시도했다. 이경의 요구였다. 그는 청구 금액을 대폭 줄이는 대신 항소는 물론이고 추후 모든 대내외 공격을 중단할 것과 면접 교섭권 포기를 제안했다. 일단 버티던 수한은 장고 끝에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피고의 재산이 대부분 수한그룹 유가 증권 형태여서, 법리대로 분할하게 된다면 경영권마저 위태로울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친권 및 양육권, 그리고 일정액 이상의 위자료를 얻어 와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기만을 원했던 이경이 가장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세헌은 아쉬운 부분이 남은 듯했지만, 의뢰인이 강력하게 원했던 일이라 타협했다.

“친권자 및 양육자로 원고를 지정한다. 피고 유정원은 원고에게 양육비로 사건 판결 확정일 다음 날부터 두 사건 본인이 성년에 이르기 전날까지 매월 말일…….”

주문 내용을 곰곰이 곱씹던 윤신이 중간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세헌을 남겨 둔 채 홀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에 세수했다. 결이 까칠한 페이퍼 타월로 물기들을 닦고, 거울 속에 비친 말간 얼굴의 스스로와 눈을 마주쳤다.

승소했다는 기쁨을 제대로 누려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웃어진다면, 그냥 웃기로 결정하고 입꼬리를 올려 봤다. 다행히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일부러 뉴스도 보지 않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 관뒀다. 소식은 나중에 전하고, 더 자세한 건 도착한 판결문을 보고 청구 이유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후우, 숨을 몰아쉰 윤신은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던 세헌과 정면에서 마주쳐 서늘한 공기가 도는 그 안에 멈춰 섰다.

무슨 말로 서두를 여는 게 좋을까 궁리해 봤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 같은 게 이 순간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저 구태의연한 물음을 던지는 게 다였다.

“청사 밖에 기자들 많을까요? 수한에서 언론 쪽은 정리해 줄 거라고 해서 그거만 믿고 왔는데, 우리 여기 올 건지는 어떻게 안 건지 취재하러 온 사람들이 있긴 있더라고요.”

“글쎄. 나올 때 법정 앞에 있던 만큼은 있겠지.”

“선고 마저 듣고 가야 해요?”

“아냐. 주문은 끝났어. 그래서 나도 나온 거야. 이만 돌아가자.”

집이 아닌 펌 사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아직 마무리 작업할 게 남아 있었던 탓이다. 이경의 입장문을 배포해야 했고, 수한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언론사 기사들을 취합해 확인해야 했다. 윤신의 표정에 그게 드러났던 모양인지 세헌이 넌지시 물었다.

“누나한테 연락은 해 봤어?”

“저녁쯤 전화해 보려고요. 아이들 재운 뒤에 통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서면 인터뷰 한 차례 해야 한다고 전해. 질문이랑 답변은 우리 쪽에서 준비한 대로.”

“전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건 필요치 않다. 재산 분할 받은 일부는 자선 단체에 기부할 것이며 평생 정의롭게 사셨던 아버지의 유지대로 겸허하게 남은 생을 살겠다. 맞죠.”

“맞아. 기자 대면했을 때 울라고 해. 지금이 울 타이밍이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윤신이 불현듯 질문했다. 표정에 걱정이 스며 있었다.

“매형이요. 항소는 약속대로 안 하겠죠? 믿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가정불화는 본인한테도 마이너스야. 특히 경영권 승계 막바지인데 아주 불리해져. 사후 관리도 내가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세헌은 안도한 뽀얀 얼굴을 얼마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앞서 돌아섰다. 뚜벅뚜벅 걸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를, 윤신은 별말 없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줄곧 보게 됐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원래 이혼 소송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고 변호사의 승리와 패배만 있다는 말이 있어.〉

걸음을 내딛던 윤신은 가라앉은 음성을 토했다.

“축하드려요.”

“너도. 고생했다.”

짧게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편안하고, 또 다정했다.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세헌의 차 앞에 선 윤신이 조수석 문을 열다 말고 멈춰 섰다. 운전석 쪽의 그도 이 기미를 알아채고 함께 모든 운동을 중단했다. 차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사실은 이 얘기를 계속 전하고 싶었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사소한 인사말들이 어려울 때가 있어서, 그동안은 속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보여 주지 못했다.

“고마워요. 수석님 덕분에 버텼어요.”

건너편에서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이내 별 얘길 다 듣겠다는 양 대꾸했다.

“일은 네가 다 했잖아.”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어요. 누나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요.”

“사실이니까.”

그가 제게 공을 돌리고는 있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잘 알았다. 법정 안팎에서 거친 수많은 수한과의 공방 중 세헌의 손을 타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상대측 변호사와의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해 늘 고심했고, 그와 동시에 이경이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불을 놓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손에 쥔 무기가 강력하다 하더라도, 혼자서 싸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두운 밤 혼자 남겨졌다는 아득한 외로움과 두려움은 사람을 손쉽게 나약하게 만들곤 한다. 누나에게 필요했던 건 제 편이 되어 줄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찾기가 요원하던 차에 나서 주었던 게 그였다. 그 제안을 자신이 했다면 누난 끝까지 거절했으리라.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동시에 차량에 탑승했다. 윤신이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세헌이 운전대를 잡았다. 청사를 빠져나갈 때까지도 두 사람은 별말이 없었다. 혹여 기자들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타날까 창밖을 경계하느라 윤신의 입이 굳게 다물렸던 탓이다.

차는 강남대로를 지나 로펌 사옥으로 향해 매끄럽게 질주했다.

긴장이 풀린 윤신이 겨우 말문을 다시 열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왜. 승소 처음 해 봐?”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윤신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려는 건 아닌데, 저도 승소는 숱하게 했어요.”

“대단한 분을 보조석에 태웠는지 미처 몰랐군.”

“이제 제가 수석님이랑 같이할 사건은 없는 거겠죠?”

운전대를 쥔 손을 쥐락펴락하며 농담하던 그가, 신호가 걸린 사이 윤신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던 윤신의 고개가 어느 틈에 창밖으로 돌아가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창 너머 가로수들을 하나씩 눈에 담는 옆모습이 꽤 수심에 젖은 채였다.

유리에 비친 세헌의 모습을 본 건지, 윤신은 부가 설명 하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태도도 음성도 너무나 담담해서, 도리어 그 안에 억눌려 감춰진 많은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같이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뭐, 내용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지만요.”

세헌이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너 어디 이민 가?”

“제가 이민 가면 수석님이랑 누가 놀아 줘요.”

“그런데 왜 이래.”

“누나한테는 미안한데 이 소송이 얼추 끝나니까 우리가 함께 있을 핑계가 하나 사라진 느낌이 들어서요. 수석님은 매일 바쁘고, 저도 한가하진 않고. 이제는 뭘 핑계로 같이 퇴근해요? 그동안은 프로젝트를 죄다 같이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안 봤었는데. 이젠 제가 변호사님 차 타면 이상하게 볼 거 아니에요. 이 보조석 내 자린데.”

“그 자리 안 없어져.”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주말에 만난 거 티도 못 내잖아요.”

꽤 신중한 태도로 단어들을 곱씹던 그는 돌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민은 내가 가나 보다.”

“전 심각해요.”

“매일 얼굴 보잖아.”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과의 간극이 존재했다. 두 사람은 업무 패턴도, 시간의 활용 방법도 워낙 달랐다. 실제로 같이 공통으로 진행하는 일이 없던 때엔 정시에 출근해 놓고도 밤까지 종일 대화 한 번 못 한 적도 많았다.

게다가 둘 다 일에 파묻혀 사는 편이어서 여가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요 몇 달 사이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부대낄 수 있었던 건 입수 합병이든, 누나의 이혼 소송이든 그들이 현재 진행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덕분이었다. 서로가 맡은 사건에 경계선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강세헌의 공사가 다 내 거였는데 이제는 사만 내 거라는 게 쓸쓸해요.”

끼익.

그는 윤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선을 바꿨다. 인적이 드문 인도 쪽에 주차하더니 갑자기 차에서 내렸다. 곧 보닛을 돌아 조수석 쪽으로 접근한 뒤, 밖에서 문을 벌컥 여는 통에 윤신이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려.”

“투정 부려서 귀찮아요? 이제 그만하려고 했어요.”

“하나도 안 귀찮아. 운전하면서 할 얘기가 아니라서 그래. 내려.”

윤신은 그가 예고 없이 하는 모든 행동에 의아해져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쩌지도 못하고 얌전히 앉아 있자, 그가 차체를 툭툭, 두드려서 보챘다. 세헌의 안면에는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대체로 이런 얼굴은 제 쪽에서 하는 편이라, 새로웠다. 그래서 주변을 살피곤 결국 하차했다.

이곳은 공터의 인근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나 길 건너편에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등져 건물과 건물 사이로 이동했다. 좁은 길목에서 멈춰 상대방을 마주 봤다.

세헌은 빤한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윤신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끌어 제 품에 안았다. 연이어 가볍게 머리카락 위에 키스했다. 그 촉감이 기분 좋아, 윤신은 눈꺼풀을 가볍게 내리감았다 떴다.

“윤신아.”

입맞춤 끝에 그의 입을 통해 제 이름이 불렸다. 움찔한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어조와 목소리, 체온과 손짓, 그 모든 게 좋아서 한 번 더 그 순간을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둘을 감싸고 있는 꽤 진중한 공기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차마 답하지 못하고 건물 외벽에 눈길만 던지자 그가 덧붙였다.

“팀을 옮기라고 한 건, 네가 부담되거나 나한테서 분리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날 하신 말씀 다 알아들었어요. 수석님 말씀에 동의도 하고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너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앞으로도 네가 조언이 필요하면 내가 입을 열 거야. 나한테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일 먼저 널 부를 거고. 시간이 맞으면 앞으로도 우린 같은 차 타고 퇴근할 거고. 주말을 함께 보낼 거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 자린 네 자리야. 아무것도 안 변해.”

쓰윽. 안고 있던 윤신의 몸을 떼어 낸 세헌이 눈을 마주쳐 왔다.

“지금의 네가 좋아서, 네가 너로 남아 줬으면 좋겠어서 욕심부린 거야. 도윤신 네가 내 일에 쓸모없어서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넌 좋은 변호사야.”

참을성 있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데도 못 알아들은 척 투정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선뜻 알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얼굴에 그런 초조한 기미가 적혀 있었던지, 그가 아직 갈증이 해갈되지 않은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 원한다면 내 밑으로 다시 돌아와도 돼. 그렇게 할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너 나한테 확신 없어?”

“누굴 좋아하는데 상대방 마음에 확신 같은 게 생기는 것도 이상하죠. 늘 불안해요.”

사실 강세헌은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해석이 잘 안 됐다. 그의 말마따나 처음 시작에 인과 관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제든지 아무 이유 없이 어긋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리적 거리는 계속 가까울 테지만, 서로 함께하던 공통분모를 한 번에 모두 덜어 낸다는 건 그 시발점일지도 몰랐다. 그 걱정을 입 밖으로 쏟아 낸 것이다.

“적당한 방법을 찾아보자. 나한테 맡겨.”

그는 올곧은 시선을 제게 고정했다. 가끔 세헌이 그러듯, 눈으로 감정을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 그걸 최선을 다해 읽어 낸 윤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닫았다.

너무 급하게 달려와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모든 일을 해결하고 나니 뒤늦게 생각이 많아졌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 같은 진통이었다. 그걸 세헌이 괜한 어리광 취급 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해해 줘서 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윤신은 애꿎은 그의 어두운 색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반동을 이용해 제 하중을 다시 그의 탄탄한 몸에 기댔다.

어깻죽지에 머리를 대고 허리를 끌어안자, 그가 두 팔로 으스러져라 상체를 마주 안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던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서 귓불과 관자놀이 따위에 여러 번 키스를 하고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그 손길을 음미하듯 눈을 지그시 감은 윤신이 조용히 내뱉었다.

“머저리처럼 굴어서 죄송해요.”

“네가 멍청이인 건 알고 있었어.”

세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쩍 눈을 뜨곤 그의 판판한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꽤 힘을 주어서 통증이 있었을 텐데도 그는 전혀 아랑곳없이 자신을 안아 주는 데만 몰두했다. 윤신이 뿌리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자 벽면으로 몰아붙이곤 더 힘주어 가슴팍에 바짝 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포승줄로 포박하듯 팔을 겹쳐 활로를 봉쇄했다.

몇 번 바르작거리던 윤신도 끝내 포기했다.

“데이트 신청하세요. 그럼 봐 드릴게요.”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자.”

“시간 봐서요.”

“꼭 같이 먹고 싶은데.”

“생각해 보고요. 사랑한다고는 언제 말해 줄 거예요? 왜 늘 나만 말해요.”

“네가 내 눈에 찰 만큼 똑똑해지면.”

기가 막혀서 이번엔 작정하고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려다가, 이내 관뒀다. 빈틈 하나 없이 그와 맞닿아 있는 이 순간이 좋아서였다. 세헌의 날카로운 턱에 쪼듯이 입 맞춘 윤신이 고개를 위로 해 그를 응시했다. 슬쩍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바로 눈길이 맞물렸다. 그 날카로운 눈매에 말에는 담을 수 없는 수천수만 가지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를 지그시 보던 윤신은 눈을 감았다. 행동으로 키스를 조르자, 바로 세헌의 커다란 두 손이 윤신의 등과 견갑골에서 매끈한 뺨으로 옮겨 왔다.

세헌은 보드라운 볼을 붙들고 그대로 두 개의 입술을 맞물렸다. 윤신은 이제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해진 그의 키스에 호응하기 위해 입을 슬쩍 벌렸다. 살갗을 핥다가 쑥 안으로 파고들어 온 혀끝이 까칠하면서도 따뜻해서 발뒤꿈치부터 전류가 타고 오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탐험하듯 제 입 속을 유영하는 그의 체온이 자신을 데우는 듯했다.

“흐응, 음…….”

윤신은 뜨겁게 신음하며 세헌에게 더욱 매달렸다.

강세헌의 가장 놀라운 점은,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키스하는 제 입술이, 지분거리는 어깻죽지가, 유린하듯 간지럽히듯 목울대가, 세헌의 손이 닿는 모든 자리들이 덩달아 좋아졌다. 이게 어떤 기분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윤신은 그의 탄탄한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면서 제 안에 파고든 뜨끈한 살덩이를 느꼈다. 그러다 손을 끌어 올려 뒤통수에 넣고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힘껏 그러쥐었다.

흥분한 세헌이 부드럽게 입술을 맞물리다 혀를 깨물었다. 곧이어 어깨를 붙잡은 채 입술을 떼어 냈다. 서로의 민감한 표피가 얇고 투명한 실로 연결됐다. 혀를 내어 그걸 핥은 그가 눈동자를 사납게 빛냈다. 그 너머에 갈증이 가득했다.

“좀 더 할까.”

“여기서요?”

“마침 이 근처에 호텔이 있군. 네 머리 뒤 저긴 어때.”

그가 가라앉은 숨을 몰아쉬며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틈에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높은 호텔 건물을 힐끗 본 윤신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세헌의 재킷을 양손으로 붙잡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렀다.

* * *

집 근처 24시간 카페는 오늘도 한적했다. 늘 앉던 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차가운 겨울 공기가 흐르는 창밖을 내다보는 두 사람은 꽤 편안한 차림새였다. 모자까지 푹 눌러쓴 윤신이 머그 컵의 주둥이를 손가락 끄트머리로 만지작거렸다.

세헌의 것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윤신의 것은 향긋한 레몬 향이 미약하게 풍기는 얼그레이 홍차였다. 반도 비우지 않은 그의 컵을 힐끗 보곤 제 쪽으로 당겨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그의 선택은 변동이 거의 없었다. 취향인 건지, 습관인 건지 모르겠다.

“왜 늘 같은 것만 마셔요?”

턱을 괴고 윤신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제일 빨리 주니까. 샷만 내리면 되잖아.”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갔다. 농담이라고 믿고 싶은데, 진담 같아서였다. 생각해 보면 술을 제외하고 밖에서 사 마시는 음료 중 아메리카노와 탄산수 이외엔 고르는 걸 못 봤다. 둘 다 구매 시간과 과정이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했다.

솔직한 대답을 구해선 안 될 것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번뜻 떠올랐다. 머뭇거리던 윤신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혹시 저랑 데이트하는 시간 아까웠던 적도 있어요? 이렇게 시간 낭비도 종종 하니까요.”

“어땠을 거 같은데.”

“저야 잘은 모르지만 대답을 현명하게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너랑 있을 땐 시간이 가는 게 아깝지. 늘 모자라.”

만점짜리 답변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 정도는 됐다. 윤신은 합격이라는 양 픽 웃었다.

이윽고 그의 빚은 듯한 손이 머그 컵을 쥐었다. 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대고 내려놓는 동안 윤신의 시선은 그 동선을 집요하게 좇았다.

“커피 맛을 알긴 알아요? 요리는 곧잘 하긴 하던데요.”

“네 침 맛이랑 다르다는 건 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답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자, 자정이 훌쩍 지난 늦은 시간임에도 주변에 사람이 드물게 있었다. 등지고 있는 자신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세헌은 지근거리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저렇게 상스러운 소리를 세포 하나 꿈틀대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늘 감탄스러웠다.

퍽 잠긴 목소리였고, 테이블끼리 거리가 없진 않아서 못 들었을 것 같긴 했다. 하나 만에 하나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민첩하게 컵들을 정리해 픽업대로 치운 윤신이 대관절 느닷없이 무슨 짓을 하는 거냐는 양 제 쪽을 보는 세헌의 손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어정쩡하게 반쯤 몸을 세운 그의 귓전에 속삭이듯 건네는 말은 덤이었다.

“안 되겠어요. 이만 나가요.”

“네가 여기 홍차 마시고 싶다며.”

“그러게 왜 이상한 소리를……. 누가 들었으면 어떡해요. 빨리 일어나요.”

“어떡하긴. 한 쌍의 호모밖에 더 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좀 걸어요.”

“귀찮아. 그리고 밖에 추워.”

“좀!”

억지로 출입구 쪽으로 당기자, 다행히 세헌도 그럭저럭 순순히 따라왔다. 그의 단단한 손목을 붙든 채로 카페를 나서서 반대 방향으로 진로를 정한 뒤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완전히 아케이드 한 면을 벗어난 뒤라야 숨을 몰아쉬었다.

인지하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걷다 보니 대로변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이미 버스가 끊긴 시점이라 사람이 없었다.

높은 산을 오르다 보면 중간에 한 번 숨 돌리는 타이밍이 필요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런 게 있으면 좋을 듯했다. 그런 생각에 다다른 윤신이 그곳 벤치에 먼저 앉았다. 세헌은 못마땅한 듯 그 위를 슬쩍 보더니 이내 하는 수 없다는 양 옆에 몸을 의탁했다. 척, 다리를 꼰 그가 얼굴을 기울여서 입 맞췄다.

버스만 끊겼다 뿐이지 도로 쪽에는 차들이 쌩쌩 다녔다. 식겁한 윤신이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아프리만치 탁, 쳤다.

“대책 없어. 오늘 왜 그래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다시 키스하려고 하기에 이번엔 윤신이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는 김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천천히 머리를 뒤로 뺐다.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윤신은 여전히 입가를 사수한 채였다.

“도윤신. 한 스무 번쯤 말한 거 같은데 난 이런 하극상을 별로 안 좋아해.”

“어쩌라고요.”

“손 안 치워?”

그제야 착하게 손을 내린 윤신이 항변했다.

“어두운 골목도 아니고요. 여기 차들 막 다니는 길거리에서…… 읏!”

바로 그 순간, 세헌이 이 빈틈을 공략해 쪽, 하고 입술을 부딪쳤다. 슬쩍 떨어져 나가는 그의 표정이 꽤 만족스러워 보여서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윤신도 이내 접고 웃고 말았다.

“선배 의외로 장난기가 좀 있어요. 알아요?”

“네 덕분에.”

“어디 가서 써먹으시면 안 돼요. 제가 찾아 드린 거니까 제 거예요.”

여부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윤신의 코트 옷깃을 여며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윤신이 돌연 호기심이 생겨 질문했다.

“버스 정거장 벤치에 앉아 있어 본 적은 있어요? 어릴 때 말고요.”

“어릴 때도 없어. 웬만한 거린 걸어 다녔거든. 버스 탈 돈이 있으면 차라리 아껴 뒀다 끼니를 때웠지. 인생이 긴축 재정 상태인 이런 거, 도련님은 상상도 안 되지?”

응답과 동시에 오래전 일들을 반추하는 세헌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기억에 있는 모든 것들 중 그 어떤 한 조각도 그를 즐겁게 만들어 주지 못하는 듯해, 지켜보는 입장에서 마음이 좀 아팠다. 세헌을 이해해 보고자 곰곰이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윤신은 애석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석님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은데, 가끔 잘 안 돼요.”

“좋은 기억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전 그래도 다 알고 싶어요. 우린 아직도 서로 모르는 부분이 많잖아요.”

“난 너 다 봤어.”

“저를요? 설마. 제가 얼마나 다양한 면이 있는 사람인데요.”

“네 알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릴 수도 있어. 핏줄 하나하나 다. 옷 벗길 때마다 아주 꼼꼼하게 보거든.”

쿨럭, 놀라 기침한 윤신이 그를 흘겼다. 자신은 그와 관계할 때 그렇게까지 이성적이지 못했다. 늘 꿰뚫려 신음하기 바빴다. 꽤 억울해하는 눈빛을 내비치자, 세헌은 그럴 거 없다는 양 태연자약한 태도로 이어 말했다.

“너도 관찰할 시간 줘?”

“공간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허리 아래는 사양할게요.”

“난 그쪽이 좋은데.”

“풍기문란으로 잡혀가요. 전 수석님 얼굴 볼래요. 기분이 좋아져요.”

왠지 질 수 없다는 기분이 든 윤신은 몸을 분명하게 모로 틀었다. 그러고는 세헌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차근히 뜯어보았다.

적당한 숱의 모양 좋은 눈썹과, 인상을 날카롭게 만드는 데 단단히 한몫하는 크고 길쭉한 눈, 날렵한 콧대와 그 아래 조화로이 자리한 입술까지 데생을 하듯이 손가락으로 이어 그렸다. 얌전히 기다려 주던 세헌이 입술에 손이 닿은 순간 잘 정돈된 손톱에 입술을 입 맞췄다.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가르고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검지와 중지의 사이에 그의 축축한 혀를 끼워서 문지르다가 촉감이 너무 에로틱했던 나머지 당황해서 손을 뒤로 뺐다. 으슥한 자리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대놓고 그랬다는 사실에 아연해져 괜히 주변을 보다가, 뺨에 닿는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세헌을 일으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도 그는 군소리 없이 조용히 쫓아왔다.

아스팔트에 타이어가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동네를 탐험하듯 한참을 걷던 와중, 윤신은 그의 손을 잡고 걷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주변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슬쩍 건드려 보려고 하는데 반 박자 앞서 세헌이 방향을 트는 바람에 손등끼리 서로 스치며 좌절됐다.

산책은 계속됐다. 희미한 빛을 지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금세 주변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낙엽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자전거 도로를 한참 거닐었다. 조용히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윤신은 그의 마음이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전방에 그들이 사는 사택 건물이 있었다. 입주민 전용 출입구 쪽 아치형으로 된 진입로에 작은 루미나리에가 열렸다. 새벽을 밝히는 불빛들이 그들이 거니는 길 위로 쏟아졌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던 세헌이 먼저 침묵을 깼다.

“네가 지난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 우리가 더는 같이 사건을 맡을 일이 없다는 거.”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민망해진 윤신이 입술을 감쳐물곤 응답했다.

“아, 신경 쓰지 마요.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져서 어리광 피운 거예요. 펌에 워낙 제 편이 없으니까 불안한 마음에 그랬나 봐요.”

“마침 송 대표가 이혼 문제 연구소를 신설할 계획인 것 같아.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계속 사람들 입에 우리 펌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서 그걸 역이용하고 싶은 모양이야. 물론 너희 가사 팀에서 전담하게 될 거고, 연구소가 펌 내에서 자리 잡힐 때까지 한 1·2년간은 그 팀 일을 나도 가끔 도울 생각이야.”

걷다 중간에 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춘 윤신이 이 말을 해석할 시간을 벌려는 듯 눈을 열없이 깜빡였다. 맡겨 달라더니, 이게 그가 찾은 해법인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찾으리라고 여겼던 윤신은 내심 고맙고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수석님은 그런 거 하실 시간 없잖아요. 저 때문이라면…… 바쁘신데 제가 너무 죄송하죠.”

“프로 보노 대신이야. 내 몫의 프로 보노를 도맡아 해 줄 사람이 다른 팀으로 갔거든.”

윤신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는 기대에 찬 얼굴을 실망시키는 대신, 기꺼이 긍정했다.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나도 널 보는 쪽이 좋아.”

“진심이세요? 진짜죠.”

가볍게 끄덕여 보인 그가 불현듯 어떤 익숙한 문장을 칼로 꺼내 들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넌 내 일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얼마 안 되는 내 안의 좋은 면의 일부이자…… 나쁜 면의 일부로서 말이야.[3]”

“어, 그거…….”

“뭔지 알겠어?”

온갖 사념이 뇌리에 가득 쌓여 갔다. 서둘러 머릿속의 기록들을 꺼낸 윤신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빛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 속의 글귀였다.

“핍이 하는 말이에요.”

“맞아.”

세헌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늘 건조하고 냉랭한 편인 그의 얼굴이 윤신의 앞에선 늘 어떤 방식으로든 무너졌다.

과거의 일들을 전부 보진 못했지만, 세헌은 눈 감고도 윤신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

그들이 선 자리는 똑같은 전쟁터였다. 종류가 다르고, 병력과 규모가 차이 날 뿐 전장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은 공통분모였다. 한데 거기에 선 윤신은 세헌과 달리 끊임없이 타인을 먼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가장 평화적인 방법일지. 이 방식이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지는 않을지, 혹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지, 분쟁 없이 이길 순 없을지. 늘 고민했다.

반면 세헌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누군가를 이용했고, 때로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지저분한 방식도 활용했고, 또 버텨 봐도 별수가 없을 시 편법과 불법 혹은 탈법의 경계에서 얼마든지 널을 뛰었다. 그것도 죄책감이라곤 없이 아주 가뿐하게 말이다. 평생 이렇게 살았고, 지금처럼 사는 방법밖엔 몰랐다. 이런 식으로 이겼다. 앞으로도 이 기조는 지속될 터다.

그렇기에 윤신이 제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넌 내 거울이고, 날 들여다보려면 네가 필요해.”

손에 땀이 차는 느낌이 든 윤신이 마른침을 삼켰다. 좀 더 근사한 대답을 해 주고 싶었는데, 이런 뻔한 말밖에는 안 떠올랐다.

“저도 좋아해요.”

픽 웃은 그가 아주 고요한 호수처럼 가만히 말간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다 아직 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다는 양, 퍽 신중한 태도로 재킷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뒤이어 윤신과 똑바로 눈을 마주쳐 주면서 좁은 홈을 벌렸다.

툭, 가볍게 아가리를 연 상자 안에는 얇은 반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윤신의 입술이 말라 갔다. 차마 생각을 음성으로 치환해 빚어내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세헌이 직접 설명했다.

“커플링은 아냐. 간지러워서 내 손으로 내 거까진 못 사겠더라. 이건 그냥, 다른 팀으로 보내기 전에 주는 일종의 증거품이야. 이를테면 증 제1호.”

뒤늦게 겨우 입을 뗀 윤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이게 뭘 증명하는 건데요?”

“내가 네 거라는 요건 사실.”

그 말을 듣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그에게 들켰구나 싶어져 필연적으로 귓전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걱정을 끼칠까 봐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와 분리되기 싫어 은연중 계속 불안해하고 섭섭해할 자신을 그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선배…….”

“앞으로 하나씩 더 늘려가 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저 너무 창피해요.”

“그래 보인다.”

“그런데 너무 행복해요.”

“그것도 그래 보이고. 손 이리 줘 봐.”

염세주의자인 강세헌의 입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앞으로 그걸 증명해 줄 증거들을 늘려가 보자고 하는 미래 지향적 발언이 나오리라곤 꿈에도 예상 못 했다. 윤신이 얼떨떨해서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기다리다 못한 세헌이 직접 마른 왼손을 끌어 갔다.

그는 다정하게 손가락 위를 쓸어 주고는, 신기할 정도로 둘레가 딱 들어맞는 반지를 곧은 약지에 채워 주었다.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윤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펌에서도 계속 끼고 있어도 돼요? 아니, 허락 필요 없어요. 제 거니까 제 마음이에요.”

“좋을 대로 해.”

“누가 물어보면 애인이 줬다고 해도 돼요? 아니다. 그것도 수석님 허락 필요 없어요.”

졌다는 양 가볍게 웃어 보인 세헌이 이만 가자는 듯 덥석 손을 붙잡았다. 윤신의 몸이 절로 딸려 갔다.

위험천만한 행동에 놀라 몇 번 잡힌 손을 흔들어 보던 윤신은 그가 맞닿은 손의 약지로 반지 위를 가볍게 쓸어내린 순간 입술을 감쳐물었다. 작정하고 관찰한다면 남자 둘이 이러고 있는 게 썩 수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시간이 워낙 늦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이 정도 일탈은 그에게도, 제게도 허락해 주고 싶었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물 밑에 작은 인공 호수가 있는 다리를 지나 건물 출입구로 향했다.

어두운 밤, 색색의 전구가 반짝이는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윤신은 아치형 진입로를 지나다가 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땅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반사된 빛깔들이 그들이 선 자리 위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홀린 듯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선배, 우리 지금 빛 위 걷고 있는 거 아세요?”

그제야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땅에 닿았다. 정말로 두 사람은 빛 위를 걷고 있었다. 다리 밑의 호수에도 불빛들이 비쳐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새가 퍽 아름다웠다.

“어둠이 걷히니까 빛이 등장하는 거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아요?”

그는 썩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싱겁게 답했다.

“이런 거에 일일이 감동하는 네가 더 드라마틱하다. 중학생이야?”

“예쁘잖아요.”

“네가 내 인생에 등장한 것만큼 드라마틱한 게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윤신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걸었다.

이건 그의 사랑 고백이다. 아무리 흘려들으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그런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세헌은 제 존재를 스스로의 안에서 완전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좋은 면의 일부이자, 또 어쩌면 나쁜 면의 일부로서 말이다.

반지를 받았을 때만큼 당황한 나머지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윤신은 부끄러움을 감추고 농담처럼 답했다.

“네, 저도 사랑해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윤신의 얼굴 위에 어느 틈에 빛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세헌의 눈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는 느릿하게 걸으며 윤신의 매끈한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굳이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수긍했다.

“그러게. 나도 하나 보다.”

정말이지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윤신의 뺨이 움찔했다.

“세헌 선배?”

“얼른 올라가자. 춥다.”

그는 또다시 벌겋게 홍조가 오르기 시작하는 뺨에 정성스럽게 입 맞췄다. 그러고는 잡은 손을 풀어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서서히 닫히는 회전문에 반쯤 걸렸다가, 이윽고 모두 사라졌다.

〈끝〉1684761454225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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