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51)

28. 

비서실 앞에 서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윤신이 인기척을 듣고 돌아보았다. 탁 비서에게 용건이 있었던 모양인지 미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윤신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더니 파티션 너머로 손짓했다.

“탁 비, 내가 보낸 자료 태산건설에 탁송했어? 총무부장 앞으로. 우리 사무장한테 물어보니까 자기가 취합해서 한 번에 보냈다던데?”

“네. 보냈습니다. 수취 확인 연락 방금 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메시지 남겨 놨어요.”

“어, 그래? 방에 가서 확인할게. 고마워요. 도 변도 수고.”

직원들에게 손 인사 한 그녀가 고생하라는 듯 윤신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날 거 없다는 의사 표현을 몸으로 하려는 것처럼 반대편 복도로 빠르게 걸어갔다.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신은 시야에서 미희가 완전히 사라지자 책상에 한 팔을 걸치고 탁 비서에게 넌지시 물었다.

“송 변호사님, 아니, 송 대표님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죠.”

정확히 핵심을 짚었다는 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예쁨받아 좋으시겠어요.”

“저 진짜 괜찮은데.”

“선물은 줄 때 받는 게 좋아요. 힘 실어 줄 때 쌓으세요. 겸연쩍어서 저러시는 거예요.”

얼마 전 아버지에 이어 신임 대표가 된 미희는 최근 들어 저런 일이 잦았다.

한때 윤신의 거취로 세헌과 갈등 아닌 갈등을 빚은 일로 아직까지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 듯했다. 그걸 알은체하는 걸로 표현하는 것이다. 비서실은 말이 빠른 곳이고, 대표가 눈길을 줬다는 게 금세 어쏘 변호사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퍼지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일 터다. 기왕 따돌림을 당할 바에야 힘이라도 실어 주려는 것 같았다.

이는 비단 세헌과 자신이 여러 부담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기로 해서만은 아니었다. 요사이 도국은 이곳저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수한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걸 익히 아는 다른 라이벌 기업들이 눈치 싸움을 벌이다가 하나둘씩 사건을 맡기기 시작했다. 마침 세헌이 태산건설을 영진건설의 우선 인수 대상자로 만들어 기업의 인수 합병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던 터라 명분도 좋았다.

이는 도국이라는 로펌 자체의 경쟁력을 신뢰한 것이기도, 수한그룹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펌의 입장에선 뜻하지 않은 수혜이자 일종의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송 대표님 내려오신 거 보면 파트너 회의 끝났나 봐요. 곧 강 변호사님도 오시겠네요.”

덧붙이는 탁 비서의 말에 윤신의 고개가 바로 복도 방향으로 돌아갔다. 하나 아직 세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애꿎게 모퉁이 쪽의 승강기만 주시하다가 아쉬움 가득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제 쪽을 주시하고 있던 탁 비서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지레 찔린 윤신이 말을 조금 더듬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그렇게 기다려지세요? 진짜 특이하다니까.”

“어쏘가 인사 좀 드리려고 파트너님 기다리는 게 뭐 이상한가요?”

“네. 대체로 이상해요. 그리고 강 수석님을 기다리는 건 더욱 이상하죠. 안 쫄려요? 도 변호사님보다 연차 높은 변호사님들도 강 변호사님이랑은 마주치기 싫어해요.”

여전히 세헌은 업무 현장에서는 칼 같았다. 때때로 윤신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냉정하게 힐난을 들었다. 완벽한 걸 바라는 그의 눈에 아직 모자란 게 꽤 보이기 때문일 터다.

제게 유난히 더 가혹한 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공사를 혼동하는 걸 싫어했다. 처음에는 내심 섭섭했으나 이제는 윤신도 그를 이해했다. 잘못한 건 반성하고, 틀린 건 결과를 고치면 된다.

“아, 탁 비서님. 저 이거 프로 보노 한 건 제가 하기로 했거든요. 수석님 허락받았어요.”

말을 돌리기 위해 쥐고 있던 서류철을 앞으로 내밀자 탁 비서가 눈대중으로 그걸 읽었다.

이 로펌에서 버티기 위해 윤신이 고안해 낸 건 투 트랙이었다. 세헌에게 인력이 필요할 때 최선을 다해 도우면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으면 부상으로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마음에 걸리는 사건을 하나씩 곁다리로 맡는 거였다. 다행히 세헌이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판단한 건지 흔쾌히 수락했다.

“저도 들었어요. 진행하시면 돼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고마워요. 우선은 의뢰인 미팅 날짜부터 잡아 줄 수 있어요?”

“그럴게요. 그리고 누님 이혼 소송 선고일이 이날. 아시죠?”

탁상 달력을 들어서 앞면을 보여 준 탁 비서가 날짜를 하나 가리켜 손짓했다.

“그럼요. 알아요. 가 보려고요.”

“직접 가실 거예요? 어차피 판결문이 송달될 텐데요.”

“네. 1년 넘게 고생했는데 일단락되는 거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한동안 정신없이 달린 끝에, 누나의 이혼 소송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맞았다.

자꾸 허위 사실을 교묘하게 표장해 여론을 호도하는 수한 측 때문에 세헌은 누나의 공식 입장을 통해 반박 근거를 공개하는 강수를 뒀다.

본래는 소송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또 자라날 아이들이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해야 할 누나의 처지 따위를 고려해서 직접 노출을 꺼렸으나,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진짜처럼 더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위치에 오묘한 한 수를 놓은 거였다.

지루한 여론전 과정에서 대중에게 잊히지 않는 것 외에 한 가지 부가 수확도 있었다. 부부의 공방전이 지속되며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뭇매들을 버티다 보니 동정 여론이 반등해 힘을 얻어 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휩쓸리는 의견이 다수였다면 이제는 자발적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결전의 날이네요? 가사 팀 변호사님들 말씀 들어 보니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승소라고 기대하시던데요. 홍보 팀도 보도 자료 준비 중이에요.”

“네. 어쨌든 1심 이기면 누나도 버틸 동력이 생기니까요.”

“하긴 여기 들인 공이 얼만데요. 우리 펌 에이스인 강 수석님이랑 송 대표님 다 달라붙었으니 지면 안 되죠. 도 관장님은 뭐라세요?”

“기분이 이상할 거 같대요. 그래도 10년 살 붙이고 살았는데. 판결이 어떻게 나든 본인은 그 집을 나오게 될 테니까. 그동안 독하게 잘도 버텼죠.”

“고생 많으셨네요. 미리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탁 비서가 위로하듯 다정한 어투로 하는 말에, 윤신도 웃으며 대꾸했다. 바로 그때였다.

“도윤신 변호사는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대화의 랠리가 돌연 등장한 세헌의 음성 때문에 끊겼다. 잠시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승강기가 이 층에 도착한 듯했다. 어느새 그가 시니어 변호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긴장한 기색으로 뒤따르던 부하 직원들에게 알아들었으면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도 좋다는 듯 손짓하더니, 곧 윤신의 옆으로 다가왔다. 탁 비서를 비롯한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했다. 윤신도 서류를 품에 안으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수석님 오셨습니까. 간부 회의는 잘 끝내셨어요?”

“네, 오셨습니다. 말 돌리지 마.”

차가운 어투 때문에 움찔한 윤신이 머뭇대다 잘못을 스스로 폭로했다.

“저도 압니다. 끝까지 긴장 늦추면 안 되는 거요.”

“그걸 아는 새끼가.”

“시정하겠습니다.”

“매번 뭘 그렇게 시정하겠대. 그러다 임종 맞이하시겠다. 다신 선고 앞두고 자축하지 마. 부정 타. 업계 룰 몰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신을 못마땅하게 보던 세헌은 이내 탁 비서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그가 바로 받아 들어 앞뒷면을 스캔해 찍어 두곤, 돌려주었다. 그 순간, 세헌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넌 따라 들어와.”

재빨리 뛰어가 그의 집무실 문을 열던 탁 비서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요?”

“아니, 탁 비 말고.”

그게 아니라는 양 덤덤히 대꾸하던 세헌이 윤신을 향해 턱짓하며 덧붙였다.

“윤신이.”

그의 말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내부가 매우 조용해졌다. 모두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오직 세헌을 향했으나, 최소한 그의 관심사는 아닌 게 분명했다. 세헌이 윤신에게 박혀 있던 시선을 제 손목시계로 옮겨 고정한 채로 눈살을 조금 구겼다.

“아, 통화해야 하니까 4분 뒤에 들어와. 오차 범위는 10초.”

이번엔 윤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만 오만하게 까딱, 한 그가 집무실로 자취를 감췄다. 비서실에 남겨진 윤신은 아연해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따름이었다.

세헌의 낮은 목소리와 차분한 발소리가 사라지자, 사방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 틈에 제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으로 타임 워치를 켠 탁 비서가 시간을 보여 주면서 정적을 깼다. 황망히 선 윤신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건 덤이었다.

“변호사님 어디 아프세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신이 조금 전 탁 비서와 똑같이 반문했다.

“저요?”

“아니, 강 변호사님이요. 이름으로 다정하게 부르셨잖아요. 둘이 언제부터 그랬어요? 저는 저분이 누굴 그렇게 부르는 걸 난생처음 들어요. 저도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곰곰이 답할 말을 생각해 봤지만, 윤신도 할 말이 마땅찮았다.

“언제부터……. 글쎄요. 저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꽤 됐나 봐? 아, 도 변호사님도 사택 사시죠? 진짜 많이 친해졌나 봐요.”

“아뇨. 실은 저도 처음 듣거든요. 성 떼고 부를 줄도 아는 분이군요. 몰랐어요.”

화면의 반복 재생 버튼이라도 누른 건지, 조금 전 세헌이 있었을 때와 비슷한 고요가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윤신이야말로 그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칭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걸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 요구해 볼 걸 그랬다.

윤신아.

그의 감미롭고 낮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준다고 상상하니 한계 속도가 없는 차를 타고 질주하는 기분이다. 그가 왜 이름을 부르면 제게 약해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들은 별거 아닌 호칭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윤신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자아가 형성되고 세헌은 타인을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처음일 테고, 그걸 자신이 누리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여태까지 불완전 연소였던 강세헌의 인생이, 완전 연소가 되어 가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짜릿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감정들을 겨우 억눌러 삼킨 윤신이 애꿎은 제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그 순간, 타인의 음성이 이 달콤한 사념을 깨뜨렸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전 10년 넘게 못 한 걸 2년 만에 하셨어요. 자, 그리고 3분 20초.”

대꾸와 함께 휴대폰 화면을 보여 준 탁 비서가 세헌의 방을 향해 손짓했다. 밖에 나가 있던 넋을 그제야 완전히 되찾은 윤신은 정중하게 묵례해 보이곤 그쪽으로 걸어갔다.

심호흡을 한 뒤, 10초를 셌다. 그러고는 노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통화하던 그가 마침 대화가 끝난 건지 기계를 내려놓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찼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제 쪽을 직시하는 눈빛이 꽤 흥미로워 보였다.

“타임 워치 돌렸어? 정확하네. 들어와.”

진입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닫고 들어온 윤신은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 작은 소동 때문에 비서실 쪽에서 이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아서, 차마 문을 잠그지도 창의 블라인드를 내리지도 못했다.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세헌이 머리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윤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탐색하듯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였던 건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왜 팔다리가 따로 놀아. 어디 아파?”

“밖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그 말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세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루 이틀이야?”

“저, 이름 좀 불러 주면 안 돼요?”

그는 뜬금없는 요구에도 의외로 순순히 화답했다.

“도윤신.”

“그렇게 말고요.”

“너 다른 이름 있어?”

“그게 아니라…… 됐어요.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뭐 하실 말씀 있으신 거죠?”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그는 꽤 한참이나 윤신을 주시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파트너 정기 회의 안건 중 네 이름이 올라왔다. 일단 내가 네 의사 물어보려고 홀드 했어.”

여태까지 숱한 회의 동안 제 이름은 몇 번이나 도마 위의 생선으로 등장했으리라. 누나의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다른 구성원들이 세헌을 몰아붙였을 게 너무나도 쉽게 예상됐다. 그가 중간에서 전부 방패막이가 되어 줬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세헌은 그 얘길 한 적이 없었다. 느닷없이 이제 와 꺼내는 건 다소 갑작스러웠다.

“누나 일이에요?”

“아냐. 네 일이야. 슬슬 팀 옮겨 볼 생각 없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범주의 이야기여서, 윤신은 얼떨떨했다. 또한 몹시 섭섭했다. 자신을 다른 팀으로 보내겠다는 건, 이제 제 사수가 세헌이 아니라는 뜻과 상통했다. 겨우 대꾸하는 음성의 파동이 여느 때보다도 컸다.

“저 다른 팀에 보내시게요?”

“조건도 괜찮고, 타이밍도 적당하고, 네 커리어에도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난 좋은 생각 같아.”

“제가 일을 못 해요?”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거야.”

“아니면 업무 스타일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드세요? 수석님한테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도윤신, 내 말 듣고 있어?”

“이거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인 건 맞아요? 다 결정된 건 아니고요?”

“흥분하지 마. 네 의사를 묻겠다고 했잖아. 조금 전 한 얘긴데 까먹은 것 같다.”

이게 파트너 회의 테이블에 나온 얘기라면, 적어도 펌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고집을 피우거나, 떼를 쓸 일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 세헌이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서운함이 커져 갔다. 데리고 있겠다고 보호해 주는 것까진 안 바랐다. 좋은 생각이라고 부추기는 건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러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데 매몰돼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으나 지금은 진흙에 처박힌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매우 널뛰었다.

“알겠지만 넌 섭외 파트랑은 잘 안 맞아. 송무가 훨씬 체질일 거야. 우리 펌 송무 담당 변호사들은 거의 판·검사 출신 재조들이니 너랑 성향도 맞을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어쏘시에이트가 너한테 딱 맞는 옷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핑계처럼 들려요.”

“좋아. 더 솔직하게 말하지. 난 네가 나처럼 되는 것도 싫고, 그게 짜증 나서 내가 몸 사리게 되는 것도 싫다. 우린 너무 달라.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날 닮지 마.”

“…….”

“이리 가까이 와 봐.”

선뜻 말을 잇지도, 그의 요구대로 다가서지도 못하는 윤신의 손목을 세헌이 슬쩍 잡았다. 이리 오라는 듯 당기기에, 윤신은 힘없이 딸려 갔다. 지척에서 본 그의 눈빛이 꽤 간절했다.

“팀을 옮기더라도 남 좋은 일만 하는 건 불가능해. 넌 도국에 쓸모 있는 변호사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 돼. 그래도 네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은 생각 같다고 말한 거야. 다른 파트너들이 네가 돈이 될 것 같다면서 등 떠밀어 주는 지금이 적기야.”

그는 꼭 자신을 설득하고 싶은 모양이다. 어투도, 음성도 평소보다 훨씬 상냥해서 윤신의 마음도 금세 녹았다. 그걸 아는 건지 책상 위에서 봉투를 하나 끌어온 세헌이 그 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웬만한 사람은 거의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 부부였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윤신이 사진 속 사이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물었다.

“이걸 왜 절 주세요?”

“그간 옆에서 지켜보니 네가 이 분야에 흥미가 생긴 것 같아 보여서. 내가 잘못 본 건가?”

거기까지 듣자 세헌이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이 뭔지 대충은 이해가 갔다.

“혹시 이 부부 이혼해요?”

“그렇다더군. 의뢰인이 도국의 수많은 변호사 중 널 골랐어. 네가 누나 덕분에 인지도가 좀 생겨서, 그걸 활용하고 싶은가 봐. 나도 동의해. 특히 언론에 잘 팔릴 거야. 승소로 이어지면 너의 몸값도 올라가겠지.”

지금까지는 파트너 변호사인 세헌의 직속 부하 직원 개념으로 일했다면, 앞으로는 아예 펌 내의 전문성을 띤 변호사로 이름을 올리라는 의미 같았다. 결국 그의 제안이 서로를 분리하자는 말인 건 맞았다. 자신을 데리고 일하면서 세헌도 썩 편치만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아서,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가 이 관계를 더욱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 이런 판단을 내렸으리라는 거였다.

“하지만 제가 다른 팀 소속이 되면…….”

“뭐 걱정하는지 아는데 방은 거길 계속 써도 돼. 나도 네가 거기 있는 편이 좋아. 고개 들면 뭐 하는지 잘 보이거든.”

안 그래도 이것만은 욕심을 부리고 싶었는데 그가 그래도 된다고 말해 주어 안도했다.

“가사 팀으로 적을 옮기면 되나요?”

“네가 그러겠다고 결정한다면.”

“정말 방은 그대로 써도 되는 거죠?”

“파트너 될 때까지 써.”

그가 정확하게 본 것 같았다. 누나의 사건을 맡으면서 이혼 소송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세헌이 수임하는 일들은 주로 큰돈이 오가는 자문들이어서 위험 부담이 컸고, 그런 만큼 다치게 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대체로 이기는지라, 늘 윤신이 공동 가해자가 되어 타인을 상처 입히게 됐다. 그걸 마음에 걸려 한다는 걸 세헌도 느꼈던 모양이다.

나지막이 한숨을 쉰 윤신이 살짝 울상 지으며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나 혹시 창밖에서 누가 관찰하고 있을까 봐 그 이상은 하지 못하고 금세 천을 손에서 놓았다. 돌아서 있어서 뒤가 보이지 않아 더 불안했다. 윤신은 그저 지그시 눈길을 던지다가, 이내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럴게요. 어차피 거절도 못 하는 판 같은데, 말이라도 잘 들어야죠.”

“잘 생각했어.”

“그런데 제 클라이언트는 어느 쪽이에요? 저도 이 배우 좋아하는데. 이분이에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사진 속 여자 배우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게 눈길을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안면에 신경질적인 기색이 스쳤다.

“뭘 해?”

순간적으로 움찔한 윤신이 바로 항변했다.

“연예인은 그냥 연예인이죠. 순수한 형태의 팬심…….”

“그래? 그렇다 이거지.”

추임새처럼 응수하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투가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역지사지해 보게 됐다. 왠지 세헌이 비슷한 공격을 가하면 자신은 훨씬 더 크게 동요할 것 같았다.

그가 배우나 가수를 좋아하는 게 잘 상상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좋아진다면 세헌은 어떤 식으로든 그 대상을 쟁취할 듯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누군가가 좋다는 소리를 들은 제 얼굴이 어떨지 마치 사진 찍히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결국 윤신은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없던 일로 할게요. 잊어버리세요. 저도 그냥 립 서비스 같은 거였단 말이에요.”

“왜, 계속 좋아하시지. 우리 클라이언트는 그 여자 쪽이야. 잘됐군. 골대가 비었잖아.”

“안 그럴게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변호사님한텐 저밖에 없는 걸로.”

“…….”

“빨리 대답해 주세요. 수석님은 쓸데없이 너무 멋있어서 불안해요.”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세헌의 표정이 윤신의 가시거리에 가득 담겼다. 그러다 반쯤은 장난이었던지 곧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쪽에서 너를 직접 골랐단 얘긴 무슨 뜻 같아?”

그의 질문은, 풀기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제가 누나 동생이라는 점을 이용하고 싶은 거겠죠. 부부가 처한 상황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시선 몰이를 하고 싶거나.”

정답이라는 양 손을 뻗은 세헌이 윤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밑으로 내려온 그의 곧은 손가락이 계곡 사이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쓸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하자, 창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가 맞닿은 살갗에 힘을 주어 이 정돈 괜찮다는 걸 넌지시 알려 주었다. 다행히 대놓고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자료는 탁 비서님 통해서 받으면 돼요?”

“응. 저 방을 계속 쓸 거면 앞으로도 탁 비랑 업무 공유하면 돼. 쟤가 전방위거든.”

“잘해 볼게요.”

“알아.”

“시작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요.”

“일을 시켜 봤으니까 알지. 너희 누나 소송도 난 이름만 빌려준 수준이지 네가 다 준비했잖아. 일머리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고. 나도 보내기 아까워. 진심이야.”

면전에서 세헌의 진심을 듣는 건 늘 가슴이 설렜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이 머뭇거리다 뺨에 발그레한 홍조를 매단 채 겨우 화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그러자 그가 바로 손을 놓아주곤 장난스럽게 눈살을 구겼다.

“보조사를 이상한 데서 쓰네. 난 그렇겐 말 안 했어.”

“와, 어떻게 여기서 빼요? 비겁하게. 남자 맞아요?”

“맞을걸. 잘 알 텐데.”

힐끗 윤신의 앞섶을 향해 고갯짓한 그가 또렷하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황망해진 윤신이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더 할 말 있어? 없으면 나가 봐. 내 할 말은 다 끝났어.”

“이, 이렇게 그냥요?”

“뭐 더 해야 돼?”

팀을 옮기라는 중차대한 일을 논의한 뒤인데도 너무나 쉽게 자신을 내보내는 그 때문에 섭섭해졌다. 윤신이 반발심에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기분을 숨기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가, 돌연 돌아보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직시하니, 세헌은 눈썹만 슬쩍 들어 올리곤 제자리로 돌아가 본인의 업무를 시작할 태세를 취했다. 울컥해서 다시 다가가려 하자, 이번엔 ‘안 나가?’ 하듯 눈짓해 보였다.

아랫입술을 감쳐문 윤신이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네, 일 많이 하고 부자 되세요.”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됐어요. 저도 벌어요. 내친김에 일이랑 섹스도 하지. 왜 그건 나랑 해?”

문을 벌컥 연 윤신은 빠르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탁! 문이 닫히면서 너른 공간에 금세 난 자리가 생겼다.

애써 집중하는 척하던 서류에서 눈길을 돌린 세헌이 윤신이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뒤이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길쭉한 펜대를 빙그르르 돌렸다. 춤추던 자루가 곧게 뻗은 가락에 가로로 고정됐다. 휙, 그걸 던지듯 내려놓은 세헌의 유려한 얼굴이 부드럽게 무너졌다.

이윽고 픽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입가에 나른하지만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 * *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혼이란 윤신에겐 그저 법적 절차의 하나였다. 하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파경은 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시작도 됐다. 이 과정을 돕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다른 법에 비해 흑과 백이 명확하지 않은 분야기도 했고, 누나의 사건으로 백신을 세게 맞아 봤으니 다음엔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헌도 그런 걸 알아챘기에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게 아닐까 했다.

늦은 밤까지 의뢰인이 보내온 자료들을 점검한 윤신은, 사무실 칠판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서서 그 위에 요약 정리한 내용의 전체적인 그림을 눈에 담았다. 대략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니 누나의 경우처럼 조정으로 끝나지 않고 소송까지 가게 될 것 같았다.

“혼인 파탄이 났는데, 남편은 이혼 의사가 없고…… 아내는 소송이라도 불사하길 원하고. 주요 사유는 역시 남편의 의처증인가. 이건 진단 기록이 없는데.”

물끄러미 칠판을 보던 윤신이 손을 길게 뻗었다. 마카로 빈 공간에 당장 필요한 것들을 차근차근 적어 갔다.

“남편 쪽 최근 1년 참석 행사 리스트…… 정신적 학대 행위 증언해 줄 증인. 두 사람 카드 사용 내역, 통신 기록…….”

쌓여 있는 서류 중 한 부를 챙겨 든 윤신이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부부의 통신 기록은 조회가 되어 있는데, 남편과 매우 밀접한 관계라는 매니저의 것은 없었다. 얼굴이 알려진 배우가 직접 움직이긴 쉽지 않았을 테니 아내의 뒷조사를 할 때 이쪽 루트를 활용했을 게 가장 유력했다. 소속사 쪽을 먼지 털듯 털면 뭐가 나올 것도 같았다.

“소속사 진행비 처리한 내역도 같이. 오케이. 여기까지.”

탁. 마카를 내려 둔 윤신은 이 정보들을 요청하기 위해 내선 인터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데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머쓱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뒤였다.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급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세헌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없어 의아했다. 건너편 사무실을 창문 너머로 보자, 불이 꺼져 있었다.

‘먼저 가셨나. 그럼 말씀을 하셨을 텐데.’

의아해서 전화를 걸어 보려는데,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헉, 깜짝이야.”

활짝 열린 문 앞엔 예의 세헌이 서 있었다. 하필이면 마침 출입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와중이라 그의 위치가 사각지대에 놓여 안 보였던 것 같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윤신이 휴대폰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 두며 진땀을 뺀 잠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양반은 못 되시네요.”

“어딜 하늘 같은 선배를 그 조잡한 머릿속에서 굴려.”

“어떻게 굴렸는지는 안 물어보세요? 꽤 하드코어 했는데요.”

“내가 너 굴리는 것보단 소프트할걸.”

삽시간에 발그레해진 뺨을 툭, 손가락으로 건드린 세헌이 연달아 말했다.

“퇴근할 건가? 그럼 내 차로 가고.”

“그래도 돼요?”

반색한 윤신은 칠판을 옆으로 치우고 제 짐들을 챙겼다. 서류 가방에 필요한 것들만 넣고는 빠르게 재킷을 걸쳤다. 세헌이 기꺼이 기다려 주고 있다가, 윤신이 사무실을 벗어나자 대신 불을 끄고 문단속을 했다.

그들은 조용한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늦은 시간이긴 해도 아주 사람이 없는 건 아니어서 가능한 한 말을 아꼈다. 승강기에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그런 기조는 유지됐다.

마침내 윤신이 먼저 세헌의 차 조수석에 탑승했다.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세헌이 운전석에 타자마자 달려들어서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그것으로는 영 모자랐던지 매끈한 뺨을 잘근잘근 씹었다.

룸미러를 통해 뒤를 보며 차를 빼던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그사이 안전벨트를 맨 윤신이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가사 팀장님한테 여쭤보니까 이 케이스 원래는 수석님 앞으로 온 거라던데요. 먼저 변호사님 찾아왔다가, 거절하셔서 절 고른 거라고요.”

“그랬지. 잘돼 가?”

“쟁점 정리 중이에요. 그런데 혹시 제 클라이언트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에요?”

이 몇 마디를 통해 유추가 되는 부분이 있었던지, 세헌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응답했다.

“또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으시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물어봐. 너 그거 진짜 못 해.”

실은 그의 말이 맞았다. 새롭게 모시게 된 팀장을 통해 제 의뢰인인 배우의 명예 훼손 소송을 오래전 강세헌이 맡은 적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다만 그 인연은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고, 그는 이제 이런 사건은 맡지 않았다. 누나의 건은 매우 특이 케이스였던 데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자주 뉴스에서 이 내용을 떠들어서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굳이 도와 달라고 찾아왔던 걸 보면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에는 아무것도 손도 대지 못하고 며칠 내내 이 사건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 말만 기다리고 있던 윤신이 바로 낚시찌를 덥석 물었다.

“남녀 막론하고 의뢰인이랑 불꽃 틔웠던 적 없어요? 하면 안 되는 거 즐겨 하시니까 클라이언트랑도 눈 맞으면 하룻밤 불장난 같은 거 하고 그러셨을 것 같아서요.”

“넌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공사 구분 확실한 사람이야. 왜, 그 배우 좋아했던 건 넌데 나랑 알아서 질투 나?”

“진짜 이럴 거예요? 수년 전 인연이고 변호사님 입지도 달라졌는데 이번에 또 부탁할 정도면 그때 꽤 사이좋았다는 뜻이잖아요. 저한테 하듯이 다정하게 잘해 줬겠죠?”

“전혀 안 좋았어. 난 성질 더러워서 누구와도 사이 나빠.”

그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반응해서 윤신의 반응이 두 배로 불퉁하게 나갔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제가 모를 때 일이니까 속이면 끝인걸.”

“듣고 싶은 말 뭔데. 해 줄 테니까 얘기해.”

“그럼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세 번.”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저만.”

“당연히 너만 좋아해. 일 말고 너랑 섹스하는 거 보면 몰라?”

그에게 오직 자신뿐이라는 바로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안 어울리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구는 세헌 때문에, 윤신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전혀 웃지 않았으나, 윤신은 세헌이 지금 자신과 함께 있어 즐겁다는 걸 알았다.

기왕 비싼 고백을 들은 김에 머리를 기울여서 그에게 슬쩍 기댔다가 떼어 냈다. 그가 그 마찰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정수리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들은 신호가 걸린 사이 서로에게 고개를 돌리고 아주 짧게 키스했다. 다시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일 얘기 할 거 있으면 지금 해. 집에 도착하면 못 하게 할 거야.”

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의뢰인 면담한 뒤 부부 싸움 연대기라고 해야 할지, 이틀 동안 쭉 정리해 봤는데요. 결혼 전 성관계 사실을 남편이 알게 돼서 갈등이 생기고, 파탄 배경이 됐다는 거 같아요.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인가. 결혼 전에 성관계도 못 하게.”

“네 무기는?”

“남편이 원래 의존적이고 집착적인 성격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거요. 그게 결혼 중에 드러났고, 이 혼인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심하다는 거. 역시 주변인 증언이 제일 무난하죠? 매니저, 소속사 사장 및 직원들, 혹은 동료 연예인들 및 주변인들, 그리고, 과거에 사귄 여자.”

“그게 다야? 뭐 허전하지 않아? 그럴 텐데.”

영문을 모르는 윤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은데요.”

“충분하지 않을걸.”

빠르게 머리를 굴리자,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는 금세 답이 나왔다.

“남자도 만났대요? 얼마나? 몇이나?”

“아내는 정신적으로만 학대했지만, 남자 애인 쪽은 신체적 상해까지 가했을 가능성이 커. 사실 법정에선 눈에 보이는 피해를 증명하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되지.”

“설득이 될까요. 부부는 두 사람 모두 배우고, 이혼은 사람들 시선을 끌 거고, 자칫 잘못하면 원치 않는 아웃팅이 될 텐데요.”

1년 내내 누나의 이혼으로 자신까지 시달렸던 터라 윤신도 이제 어느 정도는 언론의 하이에나 같은 습성과 생리를 조금은 알았다. 걱정스러운 기색을 읽어 낸 그는 일부러 부담을 주는 건지 제게 있는 승부욕을 자극했다.

“글쎄. 도윤신 변호사가 해내는 모습을 보고 싶네. 기대해도 돼?”

“팁 주실 거 없어요?”

“도윤신. 넌 21세기 인간이야. 왜 고리타분한 법정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해?”

곰곰이 세헌의 옆모습 윤곽을 주시하던 윤신이 핑거 스냅을 딱, 쳤다.

“과거 피해자를 찾아서 동영상이나 온라인 서비스에 심경 고백 같은 걸 유도하면요? 익명이니 거기에 기댈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일 테니 남편 쪽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을 거고요. 게다가 그 자체가 조정에서 증거로 유효하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 다 연예인이라 여론에 민감하니 잘만 이용하면 판결에 영향을 주긴 할 거예요.”

“순조롭게 나쁜 놈이 돼 가고 있군.”

엄밀히 말하면 제 의뢰인이 피해자니, 자신이 하려는 건 이를테면 구명이었다. 속으로 이런 반박을 하고 있다는 걸 훤히 꿰뚫어 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검사를 했어야 돼. 이제라도 지원해 보든지.”

“앞으로도 수석님 옆방 쓸 거거든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핸들을 툭, 친 세헌이 슬쩍 눈짓했다. 윤신은 그 시선을 전부 받아 내면서 그의 탄탄한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순간에, 늘 제 옆에 다른 이가 아닌 세헌이 존재해서 다행이다. 윤신은 늘 같은 태도로 제 옆에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슬며시 이마가 닿은 팔을 들어 올린 그는 마치 이 마음을 모두 안다는 양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곧이어 관자놀이와 귀, 뺨 따위를 어루만졌다. 그 딱딱한 손의 서늘한 촉감을 느끼면서 윤신은 눈꺼풀을 차분히 내리감았다.

“곧 누나 선고 기일인데 같이 가실래요? 저도 굳이 가실 필요 없다는 건 아는데요. 그냥.”

최종 선고 기일엔 변호사들이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숱했다. 지난하게 치러 온 재판의 결과, 원심은 이길 게 거의 확실하기도 하고 또 원체 세헌이 바빴던 터라 이런 일로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조금 미안했다. 퍽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자, 그가 순순히 대꾸했다. 그 내용은 그다지 순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집에 와인이 몇 병 있어. 발라서 마시자. 그럼 같이 가고.”

“발라서요? 액체를요? 어디에요?”

돌연 윤신의 앞섶으로 손을 뻗은 그가 성기 위를 지그시 눌렀다. 안으로 먹히는 숨을 겨우 삼킨 윤신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응시하자, 이번엔 여봐란듯이 기둥을 틀어쥐곤 손아귀에서 비틀었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그나마 나았을 터다.

“아니면 담아서 마시는 방법도 있는데.”

은근한 어투로 말한 세헌이 기다란 중지를 세워서 회음 부위를 쿡 찔렀다. 마치 삽입하듯 입구를 옷 위로 지분거리자, 마른 상체가 흔들리다 앞으로 훅 꺾였다. 안전벨트가 아니었다면 글러브 박스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어찌할 바 몰라 하던 윤신이 뒤늦게 이성을 찾고 세헌의 손등을 찰싹, 쳐 밀어냈다. 의외로 그는 저항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했던 말까지 거둔 건 아니었다.

“화이트? 레드?”

“안 마셔요!”

“음, 로제도 있을 거야.”

“난 안 마신다니까?”

“누가 너더러 마시래? 마시는 건 내가 마실 거야. 넌 잔을 제공하는 거지. 예전에 그 샐러드에 네 정액 섞이니까 훨씬 맛있더라.”

입술을 질끈 깨문 윤신이 세헌의 팔뚝을 세게 탁, 때렸다.

“읏, 진짜 미쳤나 봐.”

짓궂게 빙글거리던 그는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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