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51)

26. 

사단 법인 접견실에 윤신과 한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속 시끄러운 일들이 많아도 어김없이 초침은 움직이고, 제 삶의 나침판도 동서남북을 찾아 움직였다.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윤신은 법률 상담으로 마지막 금요일을 보냈다.

“사실혼 배우자 대신 돈을 갚아 주셨다고요. 액수가…….”

신청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던 윤신이 정면의 남자를 향해 다시 눈길을 돌렸다.

이 의뢰인은 사실혼 배우자의 채무를 대신 갚아 줬는데, 그걸 돌려받고 싶다는 내용으로 상담을 신청했다.

“5천만 원이면 적지 않네요.”

“네. 잘 아는 분께 무이자로 빚을 낸 거예요.”

“빚을 빚으로 갚으신 거군요.”

“저흰 이미 함께 살고 있었고요. 식만 안 올렸을 뿐 당연히 그 사람이랑 암묵적 약속이 돼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채무를 대신 갚아 준 겁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아직 혼인 신고를 안 했다는 거잖아요. 남인 거고요.”

덤덤하게 사실을 지적하는 윤신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는 움찔했다.

“그건 그렇지만…….”

“신고가 없는 사실혼 관계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법적인 구속력이 없어요.”

윤신은 미리 관련 판례와 법령을 찾아 인쇄해 온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제 쪽을 보는 상대방에게 그것을 밀어 주었다.

“제가 찾아보니까 이 케이스와 아주 유사한 판례가 있더라고요. 이런 경우 적용되는 법은 민법 598조로, 여기 보시면. 금전 소비대차 법이라는 겁니다.”

밑줄 친 자리를 손끝으로 가리키자, 남자가 대충 그 부분부터 내용을 살폈다. 나름대로 골똘히 연구해서 최대한 이해에 용이하게 정리를 했는데도 활자들이 영 눈에 들어오질 않는 건지 몇 줄 읽다 말고 윤신을 향해 벌컥 짜증을 냈다.

“너무 어려워요. 이런 거 쉽게 알려 달라고 상담 신청한 거 아닙니까.”

난감하게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쓴 윤신은 가능한 한 차분히 응답했다.

“그게, 음. 풀어서 설명을 해 드리면요. 사실혼 배우자분 대신 채무를 변제해 주었을 때 귀하는 이 돈을 빌려준 것으로도, 또는 증여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는데요.”

“증여요? 그건 그냥 줬다는 뜻이잖아요. 말도 안 돼요. 난 결혼할 여자라고 믿고 그 돈을 빌려준 거라고요.”

“네. 이런 경우 두 분 사이에 명시적으로 소비대차 약정을 체결했거나, 혹은 차용증을 받으셨다면 빌려줬다는 게 성립해요. 돈을 돌려받으실 수 있단 뜻이죠. 하지만 여기 신청하신 기록을 보면, 둘 다 안 하셨더라고요. 맞죠?”

의뢰인은 매우 흥분해서 떨리는 어투로 반문했다.

“없으면 받는 게 불가능합니까?”

“법리적으론 그렇습니다. 계약이 성립됐다고 보기가 어려워요.”

하아, 아주 깊고 요란한 한숨을 몰아쉰 남자가 앞에 놓인 종이를 구겼다. 그러고는 죄 없는 윤신을 향해 지그시 싸늘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저렇게 차갑게 쳐다본다 한들 법도 상황도 바뀌는 게 아니어서 제 쪽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윤신이 고요히 눈만 마주쳐 주고 있자, 남자가 갑자기 가방을 챙겨 들곤 자리를 박차 일어났다.

“다른 법률 사무소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여긴 대형이라 푼돈 우습게 보는 거죠? 어차피 수임해 줄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기, 그런 게 아니고요. 이런 건 애초에 성립이…….”

“됐습니다.”

탁. 의자를 걷어차곤 나가 버리는 통에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말허리가 잘리고, 얼떨결에 혼자가 된 윤신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뒤이어 책상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데 가셔도 다 똑같은 소리 할 거거든요.”

한숨 같은 혼잣말 끝에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비서님, 저 5분만 쉴게요. 그다음 나머지 의뢰인 들여보내 주세요.”

- 그러죠.

안타까운 기색을 애써 지운 윤신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갈증이 나서 탕비실 쪽으로 향하는데 마침 그 길목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송출되고 있는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화면 안엔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왜 자신과 관련된 말들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고, 또 보이곤 하는 걸까.

걷다가 멈춰 선 윤신은 전방의 커다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정 절차가 거의 마무리된 누나 부부의 소식이 전파를 타고 있었다. 하단 자막엔 이렇게 적힌 채였다.

〈수한 홀딩스 유정원 대표, 도이경 부부 조정 끝 결국 이혼 소송으로〉

〈파경 위기의 부부, 주요 쟁점은 재산 분할과 친권 및 양육권〉

‘위자료는 왜 빼.’

유책 배우자가 지급해야 하는 위자료를 누락하는 건 실수가 아니라 수한의 입김일 터다. 남편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 사이의 문제로 교묘하게 외연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천만다행이지.’

실제로 누나는 벌써부터 언론과 인터넷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비서실장과의 불륜설, 갤러리 미술품들을 중점으로 한 탈세설 등 모두 자신들이 예상했던 범주에 있던 추문들이었다. 다 짐작했던 것들인데도 타격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순간을 촬영한 사진 한 장으로 부하 직원에게 온갖 폭언을 해 댄 파렴치한 사람마저 되어 있었다. 짜깁기 영상이나, 메신저의 메시지 따위로 인터넷상에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어 해명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세헌이 선택한 건 반박이 아닌 맞불이었다.

그는 상대측의 치부들을 아주 약한 것부터 하나씩 공개했다. 물적 공세를 막을 수가 없다면 차라리 그걸 자신들도 이용해 진흙탕을 만들어 함께 뒹굴자는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매형은 성격이 워낙 불같은 편이어서 파면 팔수록 금광처럼 흠이 튀어나왔다. 이 때문에 현재 수한그룹 내부에서 승계 절차가 진행 중이라 퍽 곤란한 상황인 듯했다.

결국 그들의 싸움은 마지막 우아함을 잃고 서로 폭로전 양상이 되고 말았다.

본래 해명보다는 주장 그 자체가 재미있는 법이라, 사람들은 둘 중 누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공방으로 재미있어했다. 이렇게 흥미 본위로 몰고 가다, 최종적으로 원심을 이기게 되면 여론은 어느 정도 잡히리라는 계산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윤신은 조용히 대기실을 지나치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의 귓전에 돌연 여러 어르신들의 육성이 순차적으로 꽂혀 들었다.

“이 부부는 이혼 소송을 결국 한대요? 아무리 봐도 여자가 피해자 같던데.”

“재산 분할만 수백억 요구했다는데. 아무리 피해자라도 도이경인가 걔가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빈손으로 시집와서 무슨 몇백억씩이나 가져가. 나 같아도 안 해 줘. 친권, 양육권 다 요구하고. 도둑놈 심보지 뭐야.”

“비서실장이랑 불륜이래. 심지어 밖으로 돌면서 남편 힘은 힘대로 다 썼대요. 동생은 워낙 변변치 못해 가지고 로펌에 청탁을 해 줬다는데. 그게 여기라네.”

“여기? 도국?”

거기까지 들은 윤신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분명히 갈증이 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그런 기분마저 모두 사그라지고 말았다.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다가 곧 발걸음을 되돌려 상담실로 돌아온 그는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뒤이어 다음 신청자가 제출한 서류를 들여다보며, 인터폰 버튼을 다시 눌렀다.

“다음 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 알겠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끊기고,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은 조금 전 대기실에서 자신이 변변치 않다는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던 이 중 하나였다. 씁쓸하게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은 이내 공손하게 인사하고 제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신청서를 보니 집주인이 전세 대금을 돌려주지 않는다고요?”

그러고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 * *

제집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윤신은 누군가 방문했다는 알람음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여기 올 만한 사람이라곤 세헌밖에 없었다. 한데 오늘 그는 클라이언트 외부 미팅이 있었다. 다급히 시계를 확인하니 그가 돌아올 만한 시간이라고 하기엔 미세하게 일렀다. 하나 또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세헌 선배는 평소에 초인종 없이 그냥 오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켜 월패드 화면을 확인했다. 역시나, 영상 속 인물은 기다리던 세헌이 아니었다. 윤신은 경악스러워 숨을 삼켰다.

누나가 갑자기 웬일이지?

그녀와는 지난주에 한 차례 만났던 터다. 해서 연락 없이 이곳으로 올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던지라 당혹스러웠다.

일단 주변을 둘러 본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실이 난지도가 따로 없었다. 승강기를 타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소요되는 건 몇 분여가 다였다. 그 안에 뭐라도 해야 했다.

급한 대로 윤신은 일단 거실에 중구난방으로 널린 서류들을 치워 앉을 만한 자리를 만들고, 대충 벗어 걸어 둔 옷들도 세탁 함에 넣어 두었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이미 그녀는 도착한 모양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으, 일 났네.”

아크릴 칠판을 치우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삐릭. 현관이 열리고, 차분한 발소리가 중문을 넘어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누나가 엉망인 거실을 보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게 다 뭐야? 너 이러고 살아? 전엔 안 이랬잖아.”

사실 세헌의 집과 이곳을 왔다 갔다 하느라 생활 공간의 경계가 급격히 흐려졌다. 여유가 되면 거의 그의 집에 가 지내는 통에 제집 빨래는 쌓여 갔고, 정리하지 않은 물건들은 더 많이 쌓여 갔다. 생각날 때마다 환기를 하고 청소기를 대충 돌리는 게 다였다.

“아, 그게. 요즘 내가 일이 좀 많네.”

어설프게 대꾸하자, 그녀는 동생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와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 있던 쇼핑백들을 소파 밑에 내려 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그래야지. 뭘 또 그렇게 싸 들고 왔어.”

“지난번에 보니까 너 또 말랐더라고. 이쪽 지나가는 김에 영양제랑. 간식거리 좀…….”

주변을 둘러보며 대꾸하던 그녀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온 방 안에 본인의 지난 결혼 생활이 마치 전시하듯 널려 있어서였다. 삶의 명과 암이 사방에 가득했다. 윤신이 감춘다고 나름대로 급히 정리를 해 두었으나, 그럼에도 이곳저곳에 산적했다.

물끄러미 부부의 사진들과 각종 기사들 따위들 눈대중으로 살피던 그녀는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음성으로 잠깐 끊겼던 문장을 이어 붙였다.

“여기 내 결혼 생활 연대기가 있구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뚜벅뚜벅 아크릴 칠판 쪽으로 걸어간 이경은 칠판에 적힌 시기별 사건들을 응시했다. 그곳엔 아이들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윤신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목소리를 아꼈다. 누나는 추억을 곱씹는 것 같은데, 위로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더는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슬쩍 돌리자, 장식장 쪽에 학사모를 쓴 자신과 왼편의 누나, 그리고 오른편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가 바로 시야에 잡혔다. 불안정하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안정을 찾았다.

다시 누나를 응시하자, 그녀도 뒤돌아 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윤신은 그녀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심란해서 나온 거야? 요샌 거의 칩거 중이었잖아.”

“조금. 이제 어디 함부로 갈 수가 없어서 바람 좀 쐬고 왔는데 네 생각이 불현듯 나지 뭐야. 내가 안심하고 올 수 있는 데가 여기밖에 없었어.”

괜히 애꿎은 종이들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별안간 생각났다는 양 덧붙였다.

“참, 오전에 강 변호사랑 통화했어. 허위 사실 유포 고소부터 시작하자던데? 어느 정도 맞아 줬으니, 반격을 하긴 해야 한다면서.”

“그건 내가 준비 중이야. 언론 관리 쪽은 내가 담당하고 있거든.”

특히 요즘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며 앞으로는 생활이 더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그녀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수한은 대척점에 있는 상대방에게 이런저런 주홍글씨를 새기는 걸 아주 잘했다. 이 또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역시나, 그녀가 모든 것을 각오한 표정과 어투로 응수했다.

“송사는 너도 같이하게 되는 거니?”

“응. 조정으로 합의를 못 봤으니 2주 내에 재소해야 돼. 수석님이 담당하실 거야. 내가 보조하는 거고. 걱정할 거 없어.”

알겠다는 양 눈을 맞춰 온 그녀가 윤신의 손을 끌어갔다. 뼈가 도드라진 손등에 제 손바닥을 겹치듯 올리고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강 수석이 그러더라. 네가 이 소송의 기본 틀을 만들고 있대. 판례도 꼼꼼하게 읽고, 증거에 대한 진술, 반박, 다 네 손 안 거치는 게 없다고. 심지어 아주 흠잡을 데 없이 잘한대. 자기가 특별히 손댈 게 없다면서 칭찬했어.”

그의 입을 통해 이런 극찬이 나왔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윤신이 눈살을 조금 구겼다. 가끔 제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적절히 당근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러리라곤 예상 못 했다.

“수석님이 그러셨다고? 나 비행기 태우는 거면 안 그래도 돼.”

“정말이야. 누나인 나보다, 상사인 그 사람이 훨씬 더 널 제대로 보고 있더라. 언제였지? 한참 전에 강 수석이랑 송 수석을 따로 만났던 적이 있었어.”

대충 언제쯤이었는지는 짐작이 갔다. 자신과 세헌의 관계가 지금처럼 분명하지는 않을 때였다.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했던 그때, 그들이 만났다는 얘길 들었던 기억이 났다. 윤신이 침묵으로 응답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때 그랬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넌 훨씬 똑똑하고 영리하니 차라리 좀 더 의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지만, 그런 건 모르는 사람으로 산 거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땐 못 믿었어. 나한텐 아직 너 어린애 같았거든.”

그땐 그랬다는 말은,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다. 다행히 이제 어느 정도는 자신의 존재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모양이다. 당연히 세헌이 중간에 가교가 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윤신은 이것으로도 만족했다. 멋쩍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그는 말을 돌렸다.

“누나, 힘들지.”

“그렇다기보단 가끔 후회가 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었나 봐.”

“이혼 전문 변호사가 왜 있게. 다들 시행착오 겪으면서 사니까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해 주면 미안함이 좀 덜하고. 너랑 강 변, 그리고 도국에 빚진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사례할게.”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녀는 다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여기 더 있는 게 윤신의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았던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곤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난 이만 가 보는 게 낫겠어. 밥 잘 챙겨 먹어.”

“이렇게 그냥 가?”

“일하던 중 아냐? 우린 다음에 날 잡고 다시 봐.”

아쉬움을 애써 삼킨 윤신이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가기 위해 누나를 뒤따르던 그때였다.

순차적으로 중문을 벗어나는 순간, 외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띠릭. 잠금이 해제되고 동시에 몸에 착 감기는 슈트 차림의 늘씬한 몸이 위용을 드러냈다. 재고 따져 볼 것도 없이, 세헌이었다. 그는 현관에 놓인 여성용 구두를 발견한 뒤 천천히 눈을 앞쪽으로 옮겼다. 그곳에 윤신과 누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손님이 계셨네.”

잠긴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가 살짝 묵례했다. 그 찰나간 세헌과 윤신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윤신으로선 그저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다였다. 혹시나 누나 입장에서 세헌이 여길 드나드는 게 수상쩍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기지를 발휘해 주길 눈으로 부탁했다.

세헌은 가만히 윤신을 들여다보더니 상황을 파악한 듯 이내 이 무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도 변, 난 가져갈 거 있어서 잠깐 들렀어. 물건은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누나 배웅해 드려.”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어느 틈에 그녀가 동생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동공에 책망이 선명하게 깃들어 있어서 윤신의 뺨이 움찔했다. 지레 찔린 음성 주파수가 야릇하게 떨렸다.

“왜, 왜 그렇게 봐?”

“윤신아, 수석님이 여기 종종 왔다 갔다 하시니?”

“어? 어어, 뭐. 같이하는 프로젝트가 워낙 많아서.”

“그런데 집 꼴을 이렇게 해 놓으면 어떡해. 얘가 정말. 제때 정리해. 창피해 죽겠다.”

“아…… 알겠어.”

찰싹, 확인받듯 등을 때린 누나가 대신 사과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헌은 딱히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아주 가볍게 으쓱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자 면목 없다는 기색의 그녀가 동생을 잘 봐 달라고 말하듯 상냥한 어투로 그를 향해 대화의 화살촉을 옮겼다.

“통화로 드릴 말씀이 아닌 것 같아서 못 드렸는데. 건너 건너 소식은 듣고 있어요. 요즘 펌 사정이 별로 안 좋다면서요.”

매우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아주 담백하게 대꾸했다.

“네. 수한에서 사건을 하나둘씩 거둬 가고 있어서요. 아비규환입니다.”

“아…….”

“그래도 검찰 움직여서 압수 수색 들어오는 것까진 각오했는데, 아직 그런 움직임은 없더군요. 최악보다는 상황이 낫습니다.”

너무 가감 없이 전부 말해 버리는 그 때문에 적막이 맴돌았다. 곤란해하던 그녀가 난감하지만 꽤 분명한 어투로 먼저 그 고요를 깼다.

“제가 좀 보답할 수 있을까요? 업계에 남편과는 별개로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좀 계세요. 도국에서 괜찮으시다면 다리를 놓고 싶은데요. 처음부터 윤신이 맡아 주시는 대가로 그러려고 했던 거라, 저한테 목록이 있어요.”

“그건 추후에 소송에서 이기고 나서 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상황을 활용해야죠. 지금은 우리가 피해자여야 해요. 송 변한테 넌지시 의사만 타진해 두시고요.”

“그럴게요.”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변론 기일엔 본인이 직접 참석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마 송 변이 자세하게 알려 주겠지만……. 오셔서 판사한테 어두운 표정 좀 보여 주세요. 언론에도요.”

진짜 본 게임이 시작됐다는 걸 그녀도 아는 듯했다. 윤신은 다소 뻣뻣해진 누나의 어깨를 다정하게 주물렀다. 그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온기를 채워 준 그녀가 눈은 세헌을 향한 채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저, 참. 송 수석님 말씀으로는 소송이 시작되기 직전이나 직후, 집을 나오는 게 이혼 의사를 확실하게 피력하는 전략 중 하나라던데요. 어차피 각방에…… 살얼음판이라서 말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잠시 빠져 있던 윤신이 불쑥 끼어들어 반문했다.

“나오고 싶어? 그 집에 있겠다고 했잖아.”

“마침 내 명의로 된 게 몇 채 있고,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거든. 윤신이 너도 종종 보고.”

그녀가 뱉어 낸 문장에 온점이 찍힌 순간, 이번엔 세헌이 응답했다.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두 분 다 유명인이라는 특수성이 있어서 차근히 따져 볼 것들이 존재합니다. 아이들은 데리고 나올 겁니까?”

“당연히 제가 데리고 나와야죠.”

“그건 수한한테 먹잇감을 던져 주시는 겁니다. 자녀를 소유물 취급 했다고 할 거예요.”

“그럼 두고 나오는 편이 낫다는 거예요? 그렇겐 못 해요.”

“그것도 떡밥을 주긴 마찬가집니다. 지금 수한 법무 팀 변호사들은 똑같은 말을 장황하게 만들어서 소설을 써 대고 있어요. 언론은 수한의 논리를 받아적고요. 모든 일엔 타이밍이라는 게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 집을 주시하고 있으니 시기가 좋지 않단 뜻이에요.”

궁극적으로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다. 이미 마음의 결심을 굳힌 누나를 설득하려면 걸맞은 논리가 필요할 터라 장황하게 설명했던 모양이다. 윤신이 침묵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동안,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쯤…….”

“이 문젠 제가 혼자 결정할 게 아닌 것 같네요. 도 변이랑 논의를 좀 해 보죠. 추후에 다시 대답해 드려도 됩니까?”

펌의 업무는 딜이 크고 중요한 사건일수록 수직적으로 진행되는 편이었다. 특히 세헌의 팀은 대체로 모든 의사 결정이 톱다운 형식이었다. 그게 가장 효율성도 성공률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제 의견을 먼저 구하겠다고 말해 주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그렇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그럼 전 진짜로 가 볼게요.”

세헌의 말에 납득이 된 모양인지 누나는 문 쪽으로 한 걸음을 이동했다. 동시에 중문 쪽으로 향한 그와 눈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현관을 벗어났다. 윤신은 그녀를 쫓다 잠시 멈칫했다. 반쯤 열린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처럼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미 승강기 앞에 서 있던 그녀가 뒤따라 나온 동생을 보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식 기다릴게. 내려오지 마. 손님 두고 집주인이 나오는 거 아니야.”

이제는 그를 두고 제집의 손님이라고 칭할 수가 없는 윤신은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땡.’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아가리를 벌렸다. 그녀는 더는 따라올 거 없다는 양 손사래를 치며 기계에 올라탔다. 윤신은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 끝인사를 했다.

이윽고 양문형 문이 닫히자마자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집에 들어갔다. 이미 세헌은 안으로 진입한 모양인지 현관이 텅 비어 있었다. 거실을 향해 뛰어오자, 그가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두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네.”

“그건 제가 할 소리죠. 일찍 왔네요?”

그의 앞으로 다가간 윤신이 세헌의 베스트를 벗겨 주었다. 뒤이어 넥타이를 풀어 재킷 위에 올린 뒤 탄탄한 어깨를 소파 쪽으로 훅 밀었다. 그는 저항 없이 푹신한 쿠션에 앉았다. 그 위에 올라타듯 윤신이 자리를 잡았다. 서로 뜨거운 시선을 교환하다 먼저 불이 붙은 윤신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여 키스하려 하는데, 의외로 세헌이 목울대를 붙잡아 접촉을 저지했다.

“읏, 왜요?”

“다신 외간 여자 집에 들이지 마.”

그 말을 들은 윤신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외간……? 누나예요. 제 혈육.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예요.”

“내가 드나드는 집에 여자 하이힐 있는 거 기분 별로야. 앞으론 웬만하면 밖에서 만나.”

너무 기가 막혀 대꾸하지 못한 사이, 그는 침묵을 수락으로 이해한 듯 갑갑하게 목까지 채워진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윤신은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이내 너무나도 강세헌이 할 법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어 수락하고 말았다.

“네, 그러죠. 뭐. 이런 건 공평한 게 나으니까. 다른 접촉 방법을 찾아볼게요.”

“누나 일이라 고집 부릴 줄 알았더니 웬일로 한 큐에 말 들어?”

“수석님은 저한테 바라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원하는 건 들어주고 싶어요.”

이 얘기에 그는 선뜻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겼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입술을 벌렸다.

큰 변화 없는 무표정, 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예민한 날카로움, 그리고 눈가에 비친 자신을 향한 열기, 그 모든 게 언제나의 그였다. 다만 그가 돌연 꺼내는 화두가 예상 범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도 관장 요즘 가벼운 우울증 치료 받는 거 알고 있어?”

전혀 몰랐던 이야기라, 입술만 감쳐물게 됐다. 그 이상의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하는 것으로 이미 체내의 에너지를 죄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겨우 비우고 아까 그녀가 사 들고 왔던 영양제 따위가 든 쇼핑백을 힐끗 쳐다봤다. 누나는 말 그대로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말을 아끼자, 그가 뼈가 도드라진 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다면서.”

“그런 걸로 알아요. 그런데 그 방공호에 매형이 같이 있으려니까 힘든가 보네요.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어떡하죠? 지금 집에서 나오면 안 좋잖아요.”

“우린 지금 이혼 소송 하겠다는 거지 형사 소송을 하려는 게 아니야. 너희 누난 죄인이 아니라는 걸 네가 잘 알려 줘. 네 말대로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어.”

“……알겠어요.”

“집 말고 밖에서.”

“알았다고.”

한껏 풀이 죽은 상태로 픽 웃은 윤신이 괜히 세헌의 목울대를 어루만졌다. 잘못은 상대편이 했고, 자신들이 지금 그걸 바로 잡고 있었다. 남들 다 하는 이혼인데 뭐가 이렇게 산 넘어 산인지 모르겠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세헌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아서 잘 들여다보이진 않지만 안정적인 파동의 동공 속에는 자신이 꽉 차 있으리라. 그 생각을 하자 모든 걱정이나 고민을 다 털어 버리고 세헌을 끌어안고 싶어졌다.

윤신은 제 깡마른 몸을 그에게 편안하게 기댔다. 그러자 그가 큼지막한 손으로 상체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면서 체온을 나누어 주었다. 아직 옷을 갈아입기 전이어서, 드레스 셔츠와 정장 바지의 부드러운 느낌이 얇은 평상복 위로 전해졌다. 자신은 편안한 차림인데 세헌은 여전히 틀에 박힌 모습이어서 이상하게 열이 올랐다.

“수석님은 슈트가 진짜 잘 어울려요.”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윤신은 그의 너른 어깨 위에 걸치듯 팔뚝을 올렸다. 그러고는 달라붙어 있던 상체를 조금 떼어 내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이 안에 뱀이라던데.”

“벗겨서 확인해 봐.”

사락. 드레스 셔츠로 감싸인 딱딱한 등을 손바닥으로 느긋하게 쓸자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심기 불편함과 야릇한 흥분이 공존한 오묘한 표정이 퍽 매혹적이었다. 윤신은 좀 더 적극적으로 그의 상반신을 점령해 나갔다. 손끝에 닿는 자리마다 표피 아래의 세포들이 널을 뛰는 게 분명히 감지됐다. 그걸 느끼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내게 됐다. 그가 반색하지는 않으리란 걸 이미 알아서, 눈길을 조금 피해 입을 열었다.

“나중에요. 수석님 누나한테 정식으로 소개해도 돼요?”

“너희 누나와 난 이미 서로를 아는데 뭐라고 소개하게.”

검지를 세워 그의 어깨부터 시작해 가슴팍을 지나 탄탄한 복부까지 끌어 내린 윤신은 바지 버클 위를 손으로 지분거렸다.

“제가 사귀는 사람이라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한테는 우리 관계 말하고 싶어요. 환영까진 아니어도 인정은 해 줄 거예요.”

“넌 여태 모두가 너에게 호의적인 진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나 보다. 너답다.”

“누난 괜찮아요. 따로 밥이라도 한 끼 먹거나…….”

“무슨 상견례 해? 난 그런 거 간지러워서 싫어. 공식적으로 게이 되는 것도 사양이야.”

선뜻 그러자는 대답까진 아니어도 늘 하듯 짓궂게 한두 마디 정도 보태는 것에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너무 강력하게 거부하자 울컥한 윤신이 그의 어깨를 꽉 붙들고 여러 번 흔들었다. 어지럽게 만들고 싶었는데 전혀 타격이 없어 보여 더욱 열이 바짝 올랐다.

“어떻게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재수 없을 수가 있어요? 재주가 비상한데 비법 전수 좀 해 주세요. 상대방 열 뻗치게 하는 좋은 기술 같아서 대대손손 물려주게요.”

잔뜩 비꼬아 타박하니 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게 어디서 도윤신 주제에 후손을 보려고. 네 정자는 인류의 번식에 아무 쓸모도 없어. 내 일용할 양식 정도나 되겠지.”

“그럼 왜 상견례는 안 해 주는데?”

“그거 진짜 상견례였어? 내가 정신 나갔어, 그런 걸 하게? 차라리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그래. 우린 호모입니다.”

“좀 할 수도 있죠. 뭐가 겁나는데요. 강세헌 씨 정자는 인류 번식에 쓸모 있을 줄 압니까?”

“이 새끼 봐라.”

“나 뭐.”

유치하게 말다툼하다 동시에 황망해진 두 사람이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었다. 특히 윤신의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했다. 세헌도 그만큼 어이없었을 테지만 표정에 별로 안 드러났다.

사실 윤신도 심각하게 공론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도 자신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나중에 일이 다 잘 해결되면, 최소한 제 영원한 아군인 누나에겐 털어놓고 세헌을 자랑하고 싶었다.

한데 세헌에게 휩쓸리다 보니 얼떨결에 코너에 몰렸다.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간 건지 뒤늦게 절실하게 깨닫고 얼굴이 벌게진 윤신이 화제를 돌리듯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오늘 자고 갈 거죠.”

헛웃음을 터트린 세헌이 머리를 뒤로 슬쩍 젖히면서 담담하게 응답했다.

“자고 갈 거야. 인류가 증식하는 데 별 도움 안 되는 뻘 짓도 할 거고.”

쪽, 홍조가 오른 매끈한 뺨에 키스해 준 그가 본격적으로 혀를 내어 윤신의 하얀 얼굴과 목 등지를 마치 달콤한 사탕 빨듯 훔쳤다. 눈꺼풀을 내리감고 살갗에 닿는 세헌의 뜨끈한 살점을 느끼던 윤신이, 이내 그가 떨어져 나가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시선이 부딪친 순간, 슬슬 씻으려는 작정인지 세헌이 마른 몸을 옆으로 옮기곤 일어섰다. 셔츠의 단추를 마저 풀며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서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신이 스프링에 튕기듯 일어나 세헌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함께 침실로 들어왔다. 파우더 룸의 선반에서 가운을 챙겨 그에게 건넨 윤신이 얼굴을 앞으로 쏙 내밀고 물었다.

“출출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드시라고 과일 샐러드 만들어 놨는데. 가져올까요?”

“그거 괜찮네. 가져와서 전부 벗고 침대에서 기다려. 다리도 제대로 벌리고.”

“허억.”

콱.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은 그가 윤신의 성기를 옷 위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위로 옮겨 음부와 복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샐러드는 이 위에.”

“미쳤,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왜 이렇게 밝혀요?”

“할 거잖아.”

“안 할 거거든요.”

“앞으로 펌 생활 순탄하려면 하는 게 좋을걸.”

대꾸와 동시에 몸을 돌린 세헌이 욕실 문간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멱살을 쥐듯 니트를 잡아채 마른 몸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속수무책으로 세헌에게 딸려 간 윤신이 사선에 위치한 그의 유려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자, 고개를 기울여 귓전에 속삭였다. 음성이 매우 낮고, 가라앉아 있어서 몹시 에로틱했다.

“군소리하면 다른 조건 추가된다. 딜도까지 박고 기다릴래, 과일만 올리고 기다릴래.”

움찔한 윤신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이 동요를 너무나도 잘 아는 듯 벌게진 귓불을 잘근잘근 씹더니 곧 음산한 어투로 냉랭하게 경고했다.

“잘 기억해. 네 정자는 인류학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어. 함부로 좆 놀리고 다니면 너 내 침실 벽에 묻어 버리고 묘비명을 내가 쓸 거야. 맨정신에 묻히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해.”

차마 뭐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세헌은 그제야 만족한 듯 윤신을 두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탁! 문이 바로 눈앞에서 닫히고, 윤신과 그의 자리가 분리됐다. 금세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부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윤신이 다이닝 룸으로 가 미리 샐러드를 만들어 담아 두었던 볼을 챙겨 침실로 되돌아왔다. 뒤이어 침대에 앉아 제 옷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알몸으로…… 대체 어떻게 먹겠다는 거야.’

부들부들한 니트부터 벗어 고이 접어 두곤, 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 밑단을 매만졌다. 세헌과 관계할 때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신을 모두 보였는데도 막상 밝은 불빛 아래서 시키는 대로 하려니 부끄러웠다.

‘그런데 우리 집에 딜도가 있었어?’

어디쯤에 있을지 제 침실 안을 둘러보던 윤신은 쿨럭, 잔기침했다. 곧이어 제 바지 버클을 매만졌다. 한데 차마 푸를 수가 없어서 손에 쥐었다, 놓았다 반복하다 보니 차차 얼굴이 화르륵 불타는 것처럼 붉어졌다. 숨도 가빠졌다.

제 바지 앞섶을 내려다보며 지퍼의 이를 붙잡아 봤지만 여전히 탈의할 엄두가 안 났다. 숨을 돌리기 위해 조금 전 그가 했던 말들을 찬찬히 곱씹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아니 좋아한단 말을 왜 저렇게 해? 오싹하게. 해 본 적이 없나?”

궁싯대듯 혼잣말하던 윤신이 돌연 얼굴을 앞으로 쭉 빼 굳게 닫힌 욕실 문을 응시했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결과에 귀결됐다.

“진짜 없나?”

고개를 갸웃해 봤으나, 그의 인생을 통틀어도 제게 했던 것들 외엔 너무나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런 결론에 미치자 입가가 절로 실룩거렸다.

“없었겠지. 당연히…….”

애꿎은 입술을 마치 채소 다지듯 잘근잘근 씹던 윤신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마른세수했다. 세헌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순간순간 인지하게 될 때마다 심장 한쪽을 누가 단단히 틀어쥐고 마구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기쁘면 그저 설레거나 벅찬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아픈 느낌이 드는 거구나 싶었다. 세헌을 좋아하며 그런 걸 알게 됐다.

구름 위로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설핏 웃은 그는 이내 푹신한 침대 위에 제 몸을 누이고 한 바퀴를 굴렀다.

누군가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고 했다던데, 제겐 세헌이 그랬다. 그에게도 자신이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

“강세헌 너무 좋아.”

윤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 매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