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땡.
승강기의 육중한 양문형 문이 서서히 열렸다. 보물 가득한 동굴 앞에 선 알리바바가 된 기분으로 계기판을 올려다보던 윤신은 차분히 기계에서 내렸다. 그 순간,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탁 비서가 인사와 함께 지나치려는 자신의 후면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제 등을 두 손으로 고이 밀었다.
얼떨결에 복도의 가장 구석을 향해 직진하게 된 윤신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무슨 일 있어요?”
“도 변호사님, 잠깐 시간 괜찮아요?”
“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맞는다는 양 눈짓한 탁 비서는 주변의 공기를 살피곤 윤신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송 변호사의 사무실이 바로 보였다. 몇 미터 떨어져 있긴 하지만 저쪽에서도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이쪽이 바로 눈에 들어올 만한 위치였다.
윤신은 굳게 닫혀 있는 사무실 문과 창문의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모양새를 번갈아 뇌리에 입력했다. 자연스럽게 이미 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탁 비서가 왜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기다렸는지도 함께 대충은 알게 됐다.
“정확히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도 변호사님이 뭘 알고 계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지금 송 수석님 방에 강 수석님이 함께 계세요. 저쪽 비서한테 들으니 꼭 짜기라도 한 것처럼 두 수석님께서 나란히 한 시간 일찍 출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출근 전까지의 시간을 세헌과 함께 보냈으니까. 하지만 윤신은 애써 덤덤하게 눙쳤다.
“가끔 그러시지 않아요?”
“보통 두 분 면담은 10분 내외로 금방 끝내시는 편인데 지금 들어가신 지 한 시간째예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전에 파트너 한 분 해고할 때 저러셨어요.”
겨우 평정을 가장하던 윤신의 얼굴이 서서히 질렸다.
실은 어제 일 때문에 밤잠을 조금 설쳤다. 세헌은 탁 비서의 전화를 받고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나가더니 오랜 시간이 지난 뒤라야 되돌아왔다. 그때 그에게 알싸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아울러 자신을 향한 눈빛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굳이 묻진 않았지만, 그의 범상치 않은 반응으로 어떤 화두들이 오갔을지 정도는 눈치챘다. 최소한 일 얘기가 아니었을 건 확실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제 이야기거나, 혹은 그들의 이야기거나. 또는 모두의 이야기거나. 셋 중 하나였으리라. 그 확신은 세헌이 오늘 오전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미희를 독대할 거라는 말을 전해 줬을 때 더욱 공고해졌다.
마른세수를 한 윤신이 더 편안하게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자, 앞을 보고 있던 탁 비서가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반응이 의미심장하네요? 아는 거예요, 모르는 거예요?”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알기 무서워서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척했다는 표현이 가장 명확하게 제 입장을 대변해 주리라.
“그러는 탁 비서님은 뭘 어디까지 아시는데요. 어제 강 변호사님한테 연락하셨던 걸로 알아요. 저보다는 많이 아실 거 아니에요.”
“전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약간의 경고만 해 드린 거라서 주말부터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몰라요. 강 수석님이 밖으로 나오셔야 정리가 될 텐데…….”
일순 두 사람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 암묵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면의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바라보며 탁 비서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곁에 선 윤신이 불안해하는 것 같았던지 나지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송 수석님이 알고 보면 강 변호사님보다도 냉정한 분이긴 한데요. 또 이상할 정도로 자기 사람들한텐 약해요. 안 된다, 안 된다 하셔도 결국은 도와주실걸요. 뭐, 제 사견이지만요.”
그 말에 반색한 윤신의 몸도 뒤늦게 탁 비서를 향했다. 내심 그런 얘기를 해 줄 사람을 기다렸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나와 들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사실 의리를 떠나서 셈상으로도 이번 일을 잘 버티면 잃는 것만큼 얻는 것도 많겠죠. 정식 대표 되기 전에 두 분 변호사님들 지키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직원들한테 충성을 얻을 수도 있을 거고요. 또 수한과 척져 있는 다른 기업들에게서 사건을 따올 수도 있을 거고요. 대기업들 서로서로 워낙 사이가 안 좋으니까요.”
장단을 맞추듯 윤신이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강 변호사님은 잃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기도 하잖아요.”
“그럼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국내 제외하고 해외 인수 합병으로만 뺑이 돌려도 1년에 어마어마한 액수 벌어다 줄 텐데요. 그리고 도 변호사님도…….”
탁 비서가 뒷말을 머뭇거리는 기색이기에, 바로 자조적인 응답이 이어졌다.
“도국이랑은 잘 맞지 않죠.”
“하지만 분명히 좋은 변호사예요. 도 변호사님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다들 그건 인정하고요. 원래 제일 친한 친구는 10년 주기로 바뀐대요. 도국도 그럴 때 됐죠, 뭐.”
모든 상황을 낙관하는 듣기 좋은 이야기들만 잔뜩 듣고 나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허무해졌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려 준다면야 좋겠지만 이 세계가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이미 알아서였다. 생각보다 훨씬 비정하고, 상상보다 훨씬 잔혹했다. 그리고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이 아주 사리에 밝았다.
어찌 됐든 탁 비서가 말한 게 가장 자신을 만족시키는 가설이긴 했다.
불안한 마음 반, 기대하는 마음 반으로 미희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예기치 않은 타이밍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당황한 윤신이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곳이 복도 끄트머리라 막다른 골목이었다.
두 사람이 도망칠 새도 없이 세헌이 밖으로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쪽으로 꽂혀 들었다. 거리가 아주 가깝진 않았는데도 그 형형함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강한 눈길이었다. 머뭇대던 윤신이 어정쩡한 자세로 겨우 입을 뗐다.
“어…… 탁 비서님. 지금은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죄송해요. 제 코가 석 자라서요. 도 변호사님이 뭐라도 얘기해 보시면 어때요?”
세헌과 시선을 교환하다, 슬쩍 탁 비서를 보자 그가 용기를 넘겨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듯 눈인사하니 자연스럽게 윤신을 비껴가 미희의 방이 있는 반대 방향 복도로 사라졌다.
이윽고 혼자가 된 윤신에게로 세헌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그를 그저, 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세헌이 제 앞에 우뚝 섰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곤 눈살을 설핏 구겼다. 매끈한 이마가 찌푸려지는 모습이, 길고 서늘한 눈매가 슬며시 접혔다 펴지는 순간이, 붉은색 입술이 슬쩍 벌어지는 모양새가, 공기 중에 스미는 강세헌의 주파수가, 모두 좋았다.
“5분 늦었네.”
“오긴 제시간에 왔습니다. 나오기 전에 설거지도 제가 했어요.”
“누가 너더러 그런 거 하래?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에, 노가리에.”
“노가리는 안 깠습니다.”
“뭐가 아니야. 내가 눈으로 본 게 있는데.”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생산적인 얘기…… 네. 좋아요. 좀 깠어요. 저 방에서 무슨 말씀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집에선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묻고 넘어갔던 화두를 입에 올리자, 그가 입을 부드럽게 다물었다. 윤신은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낼 때라는 걸 느껴 공을 그에게 넘겼다.
“제가 물어볼까요. 수석님이 말씀해 주실래요.”
“대충 감은 잡은 표정이네.”
“쓸데없이 머리가 가끔 잘 돌아가서요.”
“…….”
“저는, 아니,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국에서 나가게 되나요?”
커다란 손으로 턱을 가볍게 쓸어 낸 그가 윤신의 말간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고는 눈높이를 맞추듯이 고개를 슬쩍 숙여 귓전에 속삭였다.
“마침 네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어. 여긴 좀 그렇고, 올라가서 커피 한잔할까?”
서류 가방을 든 손을 연신 달싹이며, 윤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옥 최상층 VVIP 접견실에 불이 켜졌다. 그곳의 문을 잠그고 들어온 두 사람은 구석 소파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가 두 잔 놓였다. 처음 이걸 가져올 땐 꽤 표면이 뜨거워서 슬리브를 끼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는데, 이제는 거의 식어 미지근했다. 그때까지도 내부는 적막이 흘렀다.
쌉싸래한 맛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윤신이 세헌을 힐끗 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낀 건지 돌아봐 주는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다정했다. 입술을 슬며시 감쳐문 윤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사직서 지난번에 반려하셨을 때부터 매일 지니고 다녔어요.”
서류 가방을 연 윤신은 그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세헌의 앞쪽으로 조금 밀어 주자, 그가 종이를 꺼내 검은색 잉크로 인쇄된 종이를 눈에 담았다.
“수석님이 걱정이죠. 저랑 사귀면서 풍파가 많아지셨네요.”
“풍파 같은 소리 한다. 너 내가 이딴 짓 하지 말라 그랬지. 팀장 말이 말 같지가 않아?”
툭, 종이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세헌이 다리를 척 꼬고 앉았다. 몸을 비스듬히 해서 윤신을 직시하는 눈길에 비난의 기미가 가득했다. 오만한 표정과 다소 신경질적인 눈빛이 여느 때의 그였다. 윤신은 제 생각과 그의 반응이 달라 당황했다.
“이거 아니에요?”
“이건 꼭 앞서 나가. 아니야, 이 멍청아.”
눈을 가만히 감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가만히 짚은 그가 이내 다시 윤신을 주시했다.
“송 변이 나한테 딜을 하나 걸었어.”
탁 비서의 짐작대로 희망적인 얘기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걱정이 역력한 얼굴을 굳이 감추지 않고 세헌을 마주 응시하자 그가 덧붙였다.
“도국이 널 지켜 줄 수도 있어.”
“아뇨. 저 말고요. 수석님 얘기요. 그거부터 해 주세요.”
“나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야.”
이랬다저랬다 하는 이 맥락이 선뜻 이해가 안 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윤신은 곧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세헌은 그와 자신이 한배를 탔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이리라.
“둘 다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하세요?”
“응. 송 수석은 자기가 이 펌의 대표가 됐을 때 내가 파트너 변호사로 있길 원해. 그리고 나는 너를 원하지. 그게 우리가 제시한 각자의 조건이야.”
동의하듯 끄덕이는 윤신의 뺨이 슬쩍 붉어졌다. 심각한 이야기 중이고, 그럴 타이밍이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의 입을 통해 마음의 한 조각을 듣게 될 때면 늘 마음이 설렜다. 그 매끈한 피부 위를 뼈가 도드라진 세헌의 큼지막한 손이 어루만졌다. 그가 이어 말했다.
“본인이 워낙 기업 쪽으로는 인맥이 많아서, 수한과 좀 틀어지더라도 어떻게든 해 볼 생각인 거 같아. 뭐 다른 업체와 수한만큼 신뢰를 다시 쌓으려면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감수하겠대. 내가 쥐고 있는 기업 정보들이 아깝기도 했겠지. 내 몸값을 이런 데서 확인받는군.”
“전 이해가 안 돼요. 송 변호사님이 그때 화내시던 거 다 들었어요. 왜 마음을 고쳐먹으셨대요? 계기가 없잖아요.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고, 앞으론 더할 건데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하던 세헌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내가 도와 달라고 했거든.”
“말도 안 돼. 거짓말.”
추임새처럼 자신이 말해 놓고도 정확히 어느 쪽이 말 되는 건지 선뜻 이해가 안 갔다. 세헌이 누군가를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도, 미희가 겨우 그 정도 이유로 꽤 큰 부담일 수 있는 이 상황을 품고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돌다리를 건너듯 생각의 회로들을 하나씩 밟고 있다 보니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생겼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정말 세헌을 버리기엔 아까웠을 것이다.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또 어쩌면 사람 사이의 신의를 믿지 않는 그에게 그게 존재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대관절 어떤 타협안을 제시했느냐는 거였다. 미희는 어떤 의미에선 세헌보다도 손해 보지 않는 타입 같았다.
“전 뭘 하면 돼요?”
“결심.”
“무슨…….”
“송 선배는 도국이 네 누나 소송을 같이 커버하고, 앞으로도 법망에서 보호하는 대신 너와 내가 다른 펌으로 향후 7년 내에 옮기지 않는 걸 조건으로 걸었어. 어디가 됐든 수한과 했던 만큼 수익을 재건할 만큼 버티란 소리겠지. 물론 그사이에 수한이 딱히 우릴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아마 오전에 세헌이 미희와 했던 대화 내용의 골자가 저거였던 모양이다.
“7년요?”
“응. 너 얼추 버티다 도로 나갈 생각이었지? 펌이랑 안 맞잖아.”
“처음에는요.”
“지금은 아냐?”
날카롭고도 진지한 눈매가 자신만을 주시했다. 윤신은 그를 속일 수 없고, 또 그럴 마음도 없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죄송해요. 지금도요. 상황만 좀 정리되면……. 너무 민폐기도 하고요.”
“나 지금 너한테 날 위해서 희생하라고 말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긴 하나, 희생이란 말엔 어폐가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도국과 자신의 성향이 썩 맞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배운 것도 많았다. 계기 자체는 누나의 등쌀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몇 년은 버틸 생각으로 들어온 거였고, 어쩌면 해낼 수 있으리라.
물론 7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길었다. 자신이 변호사가 되어 지나온 시간보다도 더 오랜 기간이었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도리어 너무 간단했다.
그리고 윤신은 그동안 도국에서의 시간들을 통해 어떤 사실을 배웠다. 이렇게 제게 유리한 거래 조건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제 대신 누군가 셈을 치른 게 분명했다.
“희생은 지금 변호사님이 하고 계신 게 희생이죠. 제가 현상 유지하는 게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한 마디 했다고 부탁을 들어준다고요? 이게 무슨 우정 영화인 줄 아세요? 제가 모르는 다른 조건은 뭐예요.”
“그런 거…….”
“있을걸요. 저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백지 수표를 대체 몇 장을 쓰는 거예요?”
구구절절 하는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어, 그는 미간을 흠씬 구겼다.
“넌 눈치가 좀 없으면 안 돼?”
“7년 동안 얼마나 뜯어먹히실 건데요.”
“나도 아직 몰라. 해 봐야 알지.”
“해 봐야 아는 막연한 걸, 살면서 해 보신 적이나 있어요?”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세헌이 손으로 도드라진 울대뼈를 차분하게 쓸어내렸다.
“없어.”
“더는 안 되겠어요. 조정은 막바지고, 소송부터는 제가 들어갈게요. 선밴 빠져요.”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날 해임하겠다고?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어. 납득 못 해.”
“제가 아주 꽝은 아니라는 거 수석님도 아시잖아요. 전 돈 버는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이기는 방법은 알아요. 잘할 수 있어요. 저로도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 남매 일이에요. 이제부터 손 떼세요.”
“도윤신.”
“눈치도 없는 멍청이처럼 모르는 척 옆에 앉아서 수석님이 혼자 다 감당하는 거 지켜보는 짓도 더는 못 하겠어요. 남한테 부탁 같은 것도 하지 마세요! 그런 거 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지금까지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개새끼로 사는 게 훨씬 어울려요.”
미간을 구긴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다 윤신의 눈가에 일렁이는 물기를 보고 매우 짜증스럽게 입술을 짓이겼다.
“울지 마.”
“대체 제가 뭐라고…… 왜 그래요, 진짜.”
“울지 말라고. 신경질 나.”
감정이 격해진 윤신은 그의 명령에도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있는 게 좋다. 제 옆엔 아무도 없다고 좌절할 때마다 의연한 태도로 옆에 머물러 주어서 큰 의지가 됐다.
하지만 이렇게 깊이 얽매여서 그에게 신세만 지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잘하는 일인지를 모르겠다. 세헌의 이 어리석은 결정엔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을 터다. 그리고 아마 그 속에 자신만 존재하고, 정작 강세헌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모르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것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더는 한계였다.
“기어이 저게. 너 이리 와.”
서럽게 흐느끼는 윤신의 어깨를 세헌이 당겨 감싸 안았다. 마른 몸이 조금 휘청이다 천천히 그의 위로 무너졌다. 인내심이라곤 없는 그는 아주 묵묵하게 등을 토닥이며 울음을 멈출 때까지 차분히 달랬다. 몇 번 우는 모습을 들켜서 그런지, 이제는 익숙하게 위로했다. 가볍게 내려치는 손은 음정이 없는 자장가 같았다.
소리 없이 세헌의 셔츠가 젖어 갔다. 어깻죽지가 축축해지는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그는 윤신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얼마쯤 흘렀을까. 어깨의 들썩임이 훨씬 사그라진 윤신이 세헌의 품 안에서 숨을 골랐다. 그제야 그도 나지막이 목소리를 이어 갔다.
“넌 내가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보여?”
훌쩍이던 윤신이 푹 잠긴 음성으로 답했다.
“그냥 절 많이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말했잖아. 난 지금이 좋다고. 그동안은 관성처럼 살았는데, 난 지금 내 생애 그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어. 롤러코스터 탄 기분이야. 아찔하고, 즐거워.”
“…….”
“이기심이 배제된 희생 같은 건 없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기만족인 거고. 우린 공평하게 그걸 하면 돼.”
어울리지 않게 그가 차분히, 또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윤신은 쉬이 넘어와 주지 않았다.
“별로 공평하지 않아요.”
“도윤신.”
“게다가 롤러코스터는 타고 나면 어지럽죠.”
“하지만 또 타고 싶지. 좀 거친 섹스처럼.”
대답을 듣자마자 세헌의 어깨를 밀어낸 윤신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코와 뺨이 벌겋게 익고, 눈가의 실핏줄은 죄다 터진 상태였으나 아주 분명하게 책잡는 눈길을 보냈다.
그가 눈빛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훤히 읽힌다는 양 곧은 손가락으로 미끈한 콧잔등을 툭, 치며 픽 웃었다.
윤신이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7년이나 저 좋아하실 수 있어요?”
“글쎄. 그것도 안 해 봐서 모르겠어. 7년 뒤에 다시 대답해도 되나?”
어쩌면 일단 해 보겠다는 응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답일 것이다.
“그래도 소송은 제가 맡아서 할게요.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누나도 요샌 저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넌 너희 누날 설득 못 했고, 난 했어. 도이경 관장이 날 수임했으니 그건 내 일이야. 아무리 너라도 내 밥그릇 빼앗는 꼴은 못 봐.”
“저니까 그냥 봐주세요.”
“너니까 안 되는 거야. 쓸데없는 짓 하면 진짜 화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어투로 천명하듯 말한 그는 윤신의 부은 눈두덩 양쪽에 공평하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울었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듯 벌게진 얼굴 이곳저곳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윤신은 얌전히 있다가 이내 세헌의 딱딱한 손을 끌어 내렸다.
“제가 너무 수석님 인생에 예상 밖 사태를 많이 만드는 거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하겠다는 건 하나도 못 하게 하고.”
“네가 뭘 만든 게 아니야. 내가 널 인정한 거지. 요샌 매일 아침 눈뜰 때 네 생각을 해. 옆을 보면 네가 잠들어 있어.”
그는 윤신의 머리카락을 아주 다정한 손길로 쓸어 넘겼다.
“내가 지킬 거 생긴 기분 생각보다 괜찮더라.”
그의 모든 말들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피가 끈적끈적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것들이 체내에서 순환하며 아주 느릿한 속도로 자신을 잠식해 가는 듯했다.
푹. 힘이 다 빠져 세헌의 딱딱한 어깨에 이마를 기대자 그가 번쩍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윤신이 바르작거리는 사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하체에 태워 앉혔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게 된 윤신은 양팔까지 긴 목을 감싸 세헌을 제 몸으로 포박했다.
어째서 문을 열면 비서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무실 층이 아니라 이곳 최상층이어야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남들과 동떨어진 자리, 분리된 공간, 그리고 이 안엔 단 둘뿐이었다. 꼭 이세계에 둘만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저는…….”
“사인하겠다고 대답해.”
“하, 미치겠다. 진짜. 왜 이렇게 막무가내예요.”
“나 기다리는 거 아주 싫어해. 빨리.”
좀 더 고집을 피워 제 의사를 관철해야 할 것 같기도 했는데, 그건 세헌이 원하는 일이 아닐 터라 망설여졌다.
한숨을 깊게 몰아쉰 윤신은 결국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네. 해 봐요. 같이.”
만족스럽다는 듯 눈썹을 꿈틀한 그가 그대로 위치를 반전시켜 확, 윤신을 소파에 누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맞물려 정신없이 키스하기 시작했다.
* * *
사옥 내 인터뷰 룸 문이 열려 있었다. 윤신은 그 안으로 슬쩍 얼굴을 밀어 넣었다. 방송사 직원들이 카메라 장비 따위들을 세팅하느라 분주했다. 평소 도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 언론사 취재진들이 미희와 세헌, 그리고 윤신을 인터뷰하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미 개인 인터뷰는 각자의 집무실에서 끝낸 참이었다.
이는 윤신의 아이디어였다. 자신의 로펌 청탁 비리 의혹을 수한 측에서 제시하기 전에 서로 간의 인연이 깊다고 언론에 알려 먼저 선수를 치려는 거였다. 그들에게는 윤신의 아버지라는 아주 그럴싸한 매개체가 있었다. 이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평생 남을 도우며 살다 간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그 내용을 공식화하면 어떨까 싶었다.
안 그래도 요사이 누나를 둘러싼 흉흉하고 악질적인 소문들이 부쩍 많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까지 보태는 게 상황을 악화시킬 듯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용한다는 약간의 심리적 부담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문 쪽에 서 있다가 들어가서 기다릴까, 말까를 고민하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세헌과 미희가 대화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미희가 먼저 들어가고, 세헌이 남자 윤신과 마주 섰다.
“표정이 왜 그래. 너희 아버지 다큐멘터리 만들자고 아이디어 낸 건 너잖아.”
그의 손에 쥐어진 인터뷰 질문지를 힐끗 턱짓한 윤신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랬지만, 수석님이 이런 자질구레한 것도 해 주실 줄 몰랐어요.”
“내가 도윤신 네 특징을 한 가지 알아냈어.”
대화의 랠리 중 몹시 뜬금없는 소릴 하기에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저 연구하고 계셨어요? 뭔데요?”
“아주 일관적이야.”
“칭…… 찬이에요?”
“안 가르쳐 줘.”
“욕이구나. 그럼 그렇지. 기대도 안 했어요.”
“저리 안 비켜? 누가 보면 호모인 줄 알겠다.”
입술을 꽉 깨문 윤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승부욕이 일었다.
“맞잖아요. 강세헌 씨는 매우 완전한 형태의 게이거든요. 남자 좋아하고, 남자랑 사귀고, 남자랑 데이트하고, 남자랑 섹스하고. 만점짜리 호모네요. 만점.”
어이없이 윤신을 주시하던 그가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늘씬한 몸을 지나쳐 인터뷰 룸 안으로 들어갔다. 몹시 얄밉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던 윤신도 자연스럽게 뒤쫓았다.
소파의 적당한 자리에 미희가 먼저 앉아 질문지를 읽고 있었다. 세헌은 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윤신에게도 앉으라는 듯 옆을 가리켰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그의 곁에 앉아, 힐끗 훔쳐봤다. 그가 눈길을 감지한 듯 돌아보았다.
“또 뭐.”
보는 눈들이 꽤 있는 터라, 윤신도 이번에는 몸을 조금 기울여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꽤 의미심장한 어투였다.
“돈 제일 많이 든 통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저예요.”
“뭐가 뭔지 구분이나 할 줄 알아? 난 재산 축적에는 거의 차명을 쓰는 편인데.”
“그거 불법……!”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스스로 손을 써 입을 막은 윤신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어느 틈에 세헌은 천연덕스럽게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려 활자에 집중하고 있는 채였다.
어떻게 법을 다루는 변호사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법망을 넘나드는 건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때때로 그 사고 회로가 이해가 안 갔다.
이럴 땐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듯 고개를 힘껏 가로저은 윤신은 제 앞에 놓인 질문지들을 읽었다. 그러는 사이 세팅이 모두 된 모양인지 인터뷰어인 PD가 그들의 앞에 앉았다.
안에서 문이 굳게 닫혔다.
세 사람에게 일일이 인사한 그녀는 인터뷰에 앞서 몇 가지를 알렸다.
“개인 인터뷰는 세 분 집무실에서 모두 땄고요. 이제 이 떼 샷 인터뷰인데, 불편한 점 없게 도 교수님과 관련한 추억 같은 것들, 그리고 세 분 인연에 대해서 주로 여쭤볼 거니까 부담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쪽 카메라가 아니라 저를 보시면 되고요.”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쳤다. 저마다 필요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뒤, 본격적으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매우 온화하게 흘러갔다. 인터뷰어는 능숙했고, 세헌과 미희는 더욱 숙련됐다. 중간에 낀 윤신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몰랐던 것들도 알 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가 로스쿨에 재직했던 몇 년 사이의 일들을 아들인 자신은 몰라도, 저들은 알았으니까.
시간이 정확히 얼마쯤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정도 공기가 무르익어 가자, PD는 드디어 세 사람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 윤신의 도국 취업이 청탁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따로 마련한 질문이었다. 미희가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누나와 어린 자신을 본 적 있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다.
세헌이 자연스럽게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그가 꺼낸 건, 그들이 함께 합을 짠 대본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처음 본 건, 도 교수님 장례식장이었고, 두 번째 본 건 법정이었습니다.”
PD가 바로 받아쳤다.
“어떤 법정이었죠?”
마치 그날 일을 떠올리는 듯, 건조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 즐거워하는 기색으로 무너졌다.
“형사 법정이었습니다. 마침 어쏘 변호사가 필요했을 때였어요. 좋은 인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도 교수님 아들이라더군요. 안 그럴 이유가 없어서 보러 갔었죠.”
“어땠나요? 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도 변호사님이 굉장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특히 현장 평판이 매우 좋았어요.”
“최종 변론에서 〈위대한 유산〉 얘길 하더군요. 사실 그 책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책입니다. 작가가 등장인물들 입을 빌려서 제 방식이 틀렸다고 설교를 해서요. 그런데 도윤신 변호사는 그걸 감명 깊게 봤는지 인용을 했어요. 그때 생각했죠. 우린 좀 안 맞겠다.”
순간적으로 윤신은 그를 정면에서 쳐다보고 싶은 기분에 사무쳤다. 한데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가며 실시간으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는 걸 알아서 쉽지 않았다. 그저 손을 달싹이며 제 귀에 편안한 그의 음성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돌이켜 보니 자신도 세헌을 그 법정에서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성격도, 성향도 잘 맞지 않는 정반대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그때 그 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자 미세하게 긴장이 풀려 설핏 웃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PD가 질문을 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한가요?”
“네. 처음 생각대로 여전히 잘 안 맞습니다. 도 변은 너무…….”
세헌은 말을 뱉어 내는 도중 대놓고 윤신을 힐끗 쳐다봤다. 정면에 카메라가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부분들도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정직해요. 그리고 일관적입니다. 성실하고, 모든 게 진심이고, 항상 진짜로 옳은 가치를 좇아요. 반면 전 때때로 비합리적인 가능성에 배팅하는 것도 문제를 푸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제 쪽이 좀 더 사고가 유연한 편이죠.”
그가 부드러운 말투로 농담처럼 마지막 말을 덧붙이자 미희를 비롯한 내부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공간에서 웃지 않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도마 위에 오른 윤신 하나였다. 윤신은 그제야 세헌의 옆모습을 훔치듯이 보았다. 그의 얼굴엔 확신이 있었다.
“도 변이 제 명령에 따라 저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게 아주 불편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도윤신 변호사가 맞고. 제가 틀렸다는걸요. 학교 밖에서 뭘 배운 건 처음이에요.”
정면의 담당 PD를 보는 그와, 그런 그를 응시하는 제 시선이 어긋났다. 하지만 윤신은 지금 이 순간 세헌과 자신의 무언가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했다.
강세헌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매우 큰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윤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걸 아주 잘 안다는 듯, 윤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세상은 제가 아니라 도 변 같은 사람들이 바꾸겠죠. 전 그게 교수님의 유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도 그렇게 사셨으니까 아들이 배웠을 거고요. 또 그 아들이…… 어느 누군가에겐 그게 맞는다고 행동으로 가르칠 거예요. 제가 배웠듯이요. 교수님과 너무 인연이 짧았던 게 아쉽군요.”
그 말을 들은 미희는 세헌이 제 입으로 본인이 틀렸다는 얘길 했다는 게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은 동의하듯 금세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반면 윤신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목석처럼 굳어서 생각에 잠겼다.
여태까지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제게 있는 답은 아버지의 가치관을 물려받은 거였고, 자신에게 부친은 늘 옳은 사람이었으니까.
하나 세헌을 알게 되고 이곳에서 나름대로 많은 것들을 지켜보게 되면서 회의를 느꼈던 게 사실이다. 정직하게 살아온 자신보다, 누나가 세헌을 더 신뢰하는 모습이 그런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세상이 아버지의 방식만으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로부터 배웠는데, 정작 강세헌은 자신에게 그 반대의 사실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헌은 고전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윤신은 그가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처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통렬하게 깨닫고 한 단계 성장하게 되진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는 이미 완성형이었고, 여태까지의 강세헌처럼 앞으로도 잘 먹고, 잘 살 터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쯤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찼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는 걸까.
미완성의 서로를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그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너무 그에게 닿고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을 뻔했다. 별안간 롤러코스터가 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키스하고 싶어.’
겨우 윤신이 간절한 욕구를 억누르는 사이 미희와 세헌을 대상으로 한 몇 개의 질문이 더 이어졌다. 그때부터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인터뷰가 끝이 났다.
그들은 제작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부에서 북적이던 사람들이 카메라 따위들을 챙겨 철수했다. 세 사람도 인터뷰 룸을 벗어났다. 세헌과 뭔가 대화를 하던 미희가 PD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서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배웅은 내가 할게. 강 수석, 자긴 10분 뒤에 내 집무실에서 잠깐 봐. 도 변은 수고했어.”
세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윤신은 묵례로 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뒤, 복도에 둘만 남겨지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윤신이 세헌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집무실로 되돌아가려던 그가 돌아보았다.
“왜. 완전한 형태의 호모한테 할 말 있어?”
“수석님, 여유 시간 10분 저 주세요.”
가느다랗게 눈을 뜬 그가 윤신의 모습을 슬쩍 훑었다. 살짝 달뜬 뺨과 애달파하는 눈동자, 그리고 연신 달싹거리는 입술을 차례로 살폈다. 결국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챈 모양인지 그대로 손목을 꺾어 마른 손을 역으로 꽉 쥐었다. 그러고는 그들이 나온 인터뷰 룸 안으로 윤신을 다시 쑥 밀어 넣었다.
타악. 출입문이 닫혔다.
딱딱한 문을 등진 윤신이 세헌의 넥타이를 확, 잡아끌었다. 키가 큰 그가 앞으로 좀 고개를 기울이자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맞았다. 윤신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오직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허겁지겁 입술을 맞물렸다.
그들은 입 밖으로 혀끝을 내어 젖은 살갗을 얽고 거칠게 문질렀다. 돌기들을 모두 마모시킬 기세로 격렬하게 부대끼면서 셔츠에 감싸인 상대의 몸을 미친 듯이 어루만졌다. 세헌의 곧은 손이 윤신의 드레스 셔츠 위로 유두를 비틀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앞섶을 닿게 해 몇 번 마찰하자, 평소보다도 훨씬 요란하게 반응했다.
“읏! 흐읏, 응!”
“재밌네. 발정 난 고양이 같아. 왜 느닷없이 취한 거야?”
“기분 좋아. 더 해 줘.”
다소 의아해하긴 했지만 그는 윤신의 요구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버클을 빠르게 풀어 지퍼를 내리곤 벌어진 틈새로 도드라진 성기끼리 부딪쳤다. 윤신의 마른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10분밖에 없잖아요. 빨리.”
슬쩍 미간을 구긴 그는 고른 치아를 세게 짓이겼다. 뒤이어 윤신의 매끈한 턱을 난폭하게 잡아채더니 그대로 입을 벌리게 만들어 내리꽂듯 침을 뱉었다.
훅, 떨어진 타액을 삼키는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그러고는 모자라다는 듯 슬쩍 입을 열어 좀 더 그의 일부를 제게 달라고 보챘다.
“더…….”
“젠장. 갑자기 너 왜 이래?”
결국 최대한 이성의 끈을 붙들기 위해 노력하던 세헌도 폭주했다. 그는 우악스럽게 윤신의 머리채를 확, 잡았다. 강제로 뒤로 고개가 젖혀지게 된 윤신이 눈살을 구겼다.
“윽! 아파.”
“입 열어.”
“하으…….”
“더 크게.”
명령에 착하게 반쯤 벌어진 틈새를 더욱 늘리자, 세헌의 시야에 붉은 혀와 외설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목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유난히 적극적으로 나오는 윤신 때문에 눈앞이 아찔해진 그는 겨우 마른 침을 삼켰다. 곧 피를 내기라도 할 기세로 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갈되지 않았다. 그는 이 갈증을 풀 유일한 방법을 이미 알았다.
잔인하게 눈을 빛낸 세헌은 이윽고 마치 성기를 꽂아 넣듯 아득한 입 속에 제 혀를 깊숙이 쑤셔 박았다.
“읏……!”
동시에 눈을 질끈 감은 윤신이 세헌의 것에 제 것을 문지르며 달뜬 목소리로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