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51)

24. 

프레젠테이션실 한쪽 벽면의 시계가 지금 막 현재 시각이 8시 정각이 되었음을 알렸다.

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윤신과, 그를 도와주기 위해 자원한 탁 비서가 나란히 앉아 정면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위엔 저녁 뉴스가 송출됐다. 윤신의 누나 부부가 과거 모처의 행사장에서 서로를 보며 웃던 모습이 잠시 자료 화면으로 나왔다가, 사라졌다.

최근 수한그룹 측은 이혼 조정 신청에 정식으로 대응할 것을 공식화하며 둘째 아들 부부의 파경 소식을 대외적으로 공개했다. 이쪽의 공세에 침묵하다 처음으로 조치를 취한 거였다.

대부분의 언론사 뉴스들이 해당 소식을 연일 톱기사로 다뤘다. 인터넷 기사들과 그것들을 함께 취합해 논조를 확인해 두어야 언론을 상대할 때 공략할 지점들을 짤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본 업무 시간에는 도저히 따로 이런 잡역을 할 여유가 안 나서 이렇게 남아 작업 중이었다.

“역시 다들 톱뉴스로 다루네요. 인터넷 기사들도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고요.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뜸 이혼 조정이니 그럴 만도 하긴 한데. 이제부턴 진짜 도 관장님 만신창이 되겠네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노트북 모니터로 눈길을 옮긴 탁 비서가 씁쓸하게 말했다. 윤신은 십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각오했던 일이에요. 여기저기서 떠들어 주는 편이 누나한테 이로운 점도 있고요.”

“상심이 크겠어요.”

살다 보면 주변인의 이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나 이 경우는 매일 온갖 시간대 뉴스로 누나의 얼굴을 보게 되는 터라 썩 달갑지는 못한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걸 모두 봐 가며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 쉽진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일부러 사려 깊은 탁 비서가 잔업을 함께해 주겠다고 나선 것 같았다.

솔직히 언론사는 많고, 자신은 하나라 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배려가 매우 고마웠다. 누나의 소식을 알게 된 펌 내 다른 변호사들은 이 조정에 조금이라도 엮이는 걸 아주 꺼려 해서 전부 혼자 해야 할 뻔했는데 다행한 일이었다.

“탁 비서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꼭 보답할게요.”

“뭐 이런 간단한 일 가지고요. 좀 노가다긴 하지만 종종 하는 건데요. 아무튼, 중립만 지켜 줘도 좋겠는데 죄다 은근하게 도 관장님을 까 내리네. 수한한테 지령받았다고 광고하나.”

“저도 매우 유감이에요.”

“뭐, 그래도 강 수석님 설계대로 되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해 줄 거예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 준 탁 비서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윤신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채널을 돌리자, 마침 다른 지상파 뉴스에서 비슷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혼 조정을 신청한 가정 법원의 전경과 수한 홀딩스의 사옥이 연달아 그림으로 등장하더니, 곧 법원 앞에서 인터뷰하는 세헌의 모습이 드러났다.

윤신은 빠르게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높였다.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와중에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도 근사했다.

기자들이 질문할 때마다, 세헌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응답했다.

- 변호사님, 도이경 씨가 제출한 조정 신청서가 법원에 접수됐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는데요. 마침 오늘 1차 조정 기일이 통지됐다고 들었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시죠.

- 조정 기일은 두 달 뒤로 잡혔습니다. 한데 아직 친권과 양육권 문제로 의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충분한 협의와 상호 간의 이해가 더 필요한 사안이라고 봅니다.

- 결국 소송으로 가게 될 거란 의견이 지배적인데, 법률 대리인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 아직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앞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은은하게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 슈트를 걸쳐 입은 세헌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느긋하게 차에 타는 장면이 연달아 나오고 난 뒤, 법원의 전경이 한 번 더 등장하며 해당 꼭지는 끝이 났다. 다시 음량을 줄인 윤신이 노트북 화면으로 관심을 돌렸다.

힐끗 그의 눈치를 살핀 탁 비서가 넌지시 질문했다.

“그, 상간녀 상대 손해 배상 위자료는 청구 안 하는 거예요? 왜 준비하란 말씀이 없으시지?”

“아, 안 그래도 그거 수석님께 제가 의견 여쭤보긴 했는데 회의적이신 거 같아요. 우리가 그걸 거는 게 수한그룹 측에서 원하는 일이라서요.”

“상간 상대의 존재가 본인 치부이자 이혼 사유인데 과연 그럴까요?”

“네. 누나가 조정 신청한 걸 수한 법무 팀 통해서 직접 외부에 알렸잖아요. 그건 이혼 사유까지 만천하에 드러날 걸 계산한 행동일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괜히 불륜을 부각했다간 판이 뒤집힐 수가 있잖아요. 폭행 같은 더 심한 다른 잘못들이 묻히게 되고요.”

이는 일반인들의 싸움이 아니니 언론의 개입을 고려해야만 했다. 세헌은 수한 쪽에서 이를 치정 문제로 몰고 가 여자 대 여자 구도를 만들고 남편의 존재를 사람들 뇌리에서 지우는 방법을 쓸 거라고 단언했다. 본인이라면 그런 방법을 쓸 거라고 말이다.

윤신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자극적인 내용이 더해지면 모두가 대법관이 되어 한마디씩을 보태게 되고, 그러면 진짜 잘못한 일들은 헤드라인에서 사라지게 되는 일이 숱했다. 기업 법무 팀들이 종종 쓰는 방식이었다.

부족한 설명에도 그 일련의 사정을 이해한 듯, 탁 비서도 눈을 마주치며 슬쩍 웃어 보였다.

“하긴. 어, 방금 조정 관련 기사 쓴 기자 목록 토스했어요. 분량 꽤 돼요. 이 시간부터 내일 오후까지 나오는 인터넷 기사들은 좀 더 추이를 살펴보고 추가로 드릴게요. 뉴스 끝나고 올라오는 건 아마 언론사 내용을 받아쓴 게 대부분일 거라 실시간의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만 들어가 보세요.”

도와줘서 고맙다는 양 공손하게 인사한 윤신이 먼저 가라는 듯 손짓했다. 노트북 화면을 닫고 짐을 정리하려던 탁 비서는 손을 움직이다 말고 별안간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셔츠 소매를 걷은 윤신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곧은 자세로 앉아 화면에 집중하던 그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요?”

“어느 정도는 수한 손 탔을지라도 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사들 전부가 작업은 아닐 거예요. 안 그래도 아는 기자랑 연락해 보니까 두 부부 이름 석 자만 넣으면 난리라고, 장 섰다고 한대요. 한동안은 더 불어나기만 할 겁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그렇겠죠. 차라리 잘됐어요.”

“게다가 강 변호사님도 워낙…… 아시죠? 언론 타면 매번 시끌시끌해져요.”

문장에 온점을 찍자마자 탁 비서가 두 손으로 턱 밑을 받쳐 꽃 모양을 만들었다. 윤신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듣고 가볍게 웃었다.

“네, 뭐. 외국 어디에선 잘생겼다고 사형수 팬클럽도 생겼다면서요. 변호사의 자질과는 관계없지만 솔직히 외모가 크게 도움되더라고요.”

“에스테틱이라도 예약해 드려요?”

“고맙지만 다음에요. 바빠서요.”

농담에 농담으로 받아치자, 탁 비서가 윤신을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아무튼 그래서 최근 몇 년간은 뒤에서 조정만 하셨지 거의 언론 노출 안 하셨거든요.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일인데 변호사가 자꾸 부각돼서 사건 날린 적이 한 번 있어서요. 이번엔 우리가 워낙 열세라 입 열면 말 들어 줄 시선 몰이가 필요하다고 직접 저격수로 나서신 것 같던데.”

“감사한 일이죠.”

대꾸를 듣고도 추가적인 해명을 요구하듯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빛이 꽤 아팠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날카로워서였다.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린 그가 황급히 이어 말했다.

“듣고 싶은 말씀 있으신 거 같네요.”

“없다고는 못 하죠.”

왠지 뭘 물어볼지 벌써부터 짐작이 돼서, 차마 들을 용기가 안 났다. 하나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본인의 사적인 시간도 반납하고 와 준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가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동의라고 여긴 건지, 탁 비서가 이어 말했다.

“그분은 이 건을 대체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 질문의 내용을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어떻게 답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던 윤신이 계속 침묵했다. 이번엔 이 잠잠한 적막을 또 나름대로 해석한 것 같았다.

“지금 펌 분위기 진짜 흉흉해요. 언제 수한이 우릴 치나…… 메신저 매일 불난다니까요.”

당장은 세헌이 원성 및 비난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있긴 하지만, 실은 윤신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따가운 시선과 불편한 공기를 잘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이번엔 진짜 자신이 관둬야 하는 타이밍 같다고 느껴 직접 사직서를 들고 미희를 찾아갔다. 세헌에게 상의하지 않은 건 그가 반대할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오전 중 어쏘 관리자인 송 변호사에게 제출한 사직서가 오후에는 세헌의 손아귀에 있었다.

자신을 소환한 그로부터 이것도 못 버티냐고, 실망스럽다는 냉정한 힐난을 들어서 반발심이 생긴 나머지 고스란히 도로 챙겨 나온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러게요. 대충은 알아요.”

“제가 아는 강 수석님은 이런 건을 맡는 분이 아니에요. 죽었다 깨어나도요.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이 소식 들었을 때 강 변호사님이 과로로 미치신 줄 알았어요.”

그건 자신과 탁 비서가 아는 강세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 그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가장 오해가 없을지 정확하게 계산이 안 섰다. 눈치 빠른 상대방이 제 한 마디로 인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조금 우려됐다. 그 때문에 농담처럼 눙치는 게 다였다.

“그럼 이번엔 죽었다가…… 깨셨을까요?”

“말씀해 주기 싫구나? 아니면, 못 하시는 건가?”

“죄송해요.”

“둘 다구나. 오케이. 접수했어요. 뭔가 이유가 있었겠죠. 쓸데없는 일 하는 분은 또 아니니까요.”

이제야말로 탁 비서가 몸을 일으켜 출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마침 조금 전 대화의 실질적 주인공이었던 세헌이 밖에서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막 접견을 마치고 이쪽으로 바로 온 듯 한 손에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 탁 비서는 눈치껏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곤 세헌을 비껴 나갔다. 그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답한 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세헌은 입성하자마자 타원형 테이블 위에 봉투를 휙, 던지더니 미간을 구겼다. 뒤이어 넥타이를 헝클어뜨리고, 소매도 걷어 올렸다. 아마 미팅하는 내내 답답했던 것 같았다. 그는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흐트러진 상태로 윤신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대충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윤신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잡무?”

“네. 언론사 통계 좀 내려고요. 수석님은요. 미팅 잘 끝나셨어요? 예비 입찰은 마감이죠?”

그는 목을 슬쩍 뒤로 젖혀 목 근육을 풀곤 차분히 대꾸했다.

“일단 실사 결과가 확실하고 우발 채무도 워낙 크니까 잠재 매수자들 중에 경쟁이 될 만한 기업들 일일이 접촉해서 본 입찰까지 손 떼게 하는 건 가능하지 싶어. 잔챙이랑 싸워서 이기는 거야 식은 죽 먹기고. 태산에서 슬슬 언론 플레이를 도와줄 거야.”

“수석님이 누나 이혼 조정 건 맡는다고 뭐라고 안 해요? 요즘 계속 눈에 띄잖아요.”

“태산? 도리어 좋아하던데. 아무튼 미팅 결과 나머진 내일 회의 때 설명해 줄게. 프로젝트 담당자가 외국인이라 똑같은 걸 두 번씩 설명해서 더는 말할 힘도 없다.”

“그럼 지금은 뭐 하고요?”

종종 그러듯 그는 말로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두 팔을 벌렸다. 힐끗 출입문 쪽을 본 윤신이 빠르게 뛰어가 잠금장치를 안에서 걸곤 되돌아왔다. 픽 웃는 세헌의 품에 안겨 탄탄한 몸 윤곽을 드러내 주는 셔츠 위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의 체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내내 누나의 이혼 소식을 전하는 뉴스들만 보느라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요즘 잠은 좀 자요?”

“틈틈이.”

“과연 그럴까요. 겨우 짬나면 저랑…….”

“떡치지.”

찰싹, 안고 있던 그의 등을 내려친 윤신이 이걸로 안 되겠다는 듯 몸을 떼어 냈다. 세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여 입술에 키스했다. 슬며시 떨어져 나간 살갗의 체온이 아쉬웠으나, 윤신은 그의 옷자락을 쥔 채로 그저 머뭇거렸다. 이 행위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리란 걸 직감한 그가 해 보라는 양 뺨을 어루만졌다.

“뭔데.”

“수석님이 누나 사건 맡은 거, 다들 이상하게 생각해요. 조금 전에 탁 비서님도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매우 새삼스럽네.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넌 이제 그걸 안 거야?”

“왜 똑같은 말을 열 배로 재수 없게 해요?”

“너 열받으면 부글부글 끓는 거 귀여워서. 너 볼수록 귀엽다.”

윤신은 제 순간적인 감상에 솔직한 편이었다. 업무적으로는 그러면 안 되는 상황이 종종 생겼으나, 사적인 범주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겐 뭔가를 가감하는 것보단 가능한 한 보여 주는 걸 선호했다. 또한 남들도 자신을 그렇게 대해 주길 원했다. 그게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세헌만큼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조금 낯 뜨거웠다. 싫은 건 아닌데 부끄러워 곤란했다. 헛기침한 윤신이 애써 말을 돌렸다.

“요즘 계속 파트너 변호사들이 따로 면담 요구하고 있는 거 알아요.”

“꼰대들 등쌀에 짜증 나서 사망할 것 같아.”

“누나 부부 일이 앞으로 도국에 영향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되시는 게 당연하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저 너무 불편해요.”

“구내식당에서 식사하는 게?”

“탁 비서님이 대체로 같이 드셔 주세요. 다들 쳐다보면서 웅성거리는 건 괜찮아요.”

“아니면 탕비실에서 커피 타는 게?”

왜 못 알아듣는 척하냐는 의미로 아랫입술을 슬쩍 감쳐물자, 그가 알겠다는 양 바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일개 로펌이라도 이 회사 전체랑 척지는 건 수한으로서도 모험이야. 수년에 걸쳐 너무 많은 게 얽혀 있다고. 너나 내가 없으면 수한도 굳이 도국에 본을 보일 필요가 없어지지. 개인인 나나, 너희 누나를 조지면 되니까. 그러니 실력 행사가 들어오면 내가 책임지고 여길 관두면 돼. 네가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세헌은 윤신의 숱이 적당한 눈썹을 결대로 쓸어 주며 덧붙였다.

“아마 그런 시기가 오면 너도 더는 여기에서 버틸 수 없어질 거야. 그땐 같이 관둬야 해.”

이 사면초가의 형국에 한 가지 큰 다행으로 여겨지는 건, 거짓말이 부전공쯤 되는 세헌이 이제 제게 그 어떤 것도 속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인 판단에 일부러 털어놓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도, 자신이 묻는다면 전부 알려 주었다. 불편한 부분도, 곤란한 일들도, 난처한 상황 따위들도 다 설명했다.

그걸 아는 윤신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그의 양쪽 손을 덥석 쥐었다.

“같이?”

“각자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 처음부터 그럴 각오 아니었어?”

“아뇨. 그거 말고요. 같이라면서요. 수석님이 저를 데리고 나가실 생각인 거잖아요.”

“뭐 문제 있어?”

처음 세헌은 자신을 도국에 두고 혼자 나가는 걸 고려했다. 미희가 어느 정도는 커버해 주겠지만 그게 불가능해졌을 땐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계획이 자신을 데리고 나가는 것으로 변경됐다. 겉보기엔 미세한 차이지만, 이는 꽤 많은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적어도 윤신은 그것을 알아챌 만큼의 눈치는 탑재했다.

생각을 거듭하자, 그의 언중에 있는 모든 맥락들이 계산기 두드려 결과를 낸 양 훤히 읽혔다. 해석한 답을 세헌의 앞에서 혼잣말하듯 토해 내는 윤신의 목소리가 매우 낮아졌다.

“다른 구성원 변호사님들이 절 빨리 내보내라고 하는군요. 수석님한테는 남아 달라고 하고요. 그래서 선밴 저 여기서 하루라도 더 버티게 해 주려고 본인을 인질로 잡은 거예요. 매형이 저부터 건드릴까 봐요. 맞죠.”

그는 미간을 조금 구겼다.

“나 지금 몇 마디 안 했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행간이 읽히니까요.”

“쓸데없이 머리가 잘 굴러간다니까. 좀 멍청해도 좋았을걸.”

윤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제가 무슨 어린앤 줄 아세요? 이건 과보호예요. 저는 제가 책임져요. 제 사직서 받아 주시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잖아요.”

“그건 안 된다고 했지. 이게 내 설계야. 함부로 어그러뜨리지 마. 아울러 네 사표 수리 권한은 나한테 있어. 한 번만 더 직속 상사 건너뛰고 쓸데없는 짓 해. 날 무시한 걸로 받아들이고 징계 줄 거니까.”

“수석님!”

“참고로 난 촌지 받아.”

길쭉한 세헌의 손가락이 키스하라고 명령하듯 제 붉은 입술을 툭 건드렸다. 윤신은 그의 촉촉한 살점이 슬쩍 눌렸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야릇한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폐가 된다는 걸 알지만 이미 멀리 와 버리고 말았다. 견딜 때까지 견뎌 보다가 전부 혼자 감당하고 관두는 걸로 해결하고 싶었는데 세헌이 도저히 그걸 두고 볼 수가 없는 모양인지 얇은 실로 서로를 묶어 버렸다. 그러면서 번번이 단호하게 어깃장을 놓았다.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는데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어서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윤신은 벌떡 일어나 세헌의 의자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들고 그에게 거칠게 입 맞췄다. 세헌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윤신이 기울인 반대편으로 움직여 주었다. 동시에 입을 열어 젖은 혀끝이 안으로 손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냈다. 숙련돼 있진 않지만 정성스러운 키스에 기꺼이 장단을 맞췄다. 서로의 살갗이 체온과 타액을 찾아 정신없이 맞물렸다.

“흐응, 응…….”

시작한 건 제 쪽이었는데, 어느 틈에 리드는 세헌 쪽에서 했다. 자연히 윤신의 입술을 가르고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 손을 드레스 셔츠 안으로 넣어 등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그 감촉에 놀란 윤신이 그의 딱딱한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입 안에서 겹쳐진 살덩이를 분리했다. 마침내 입술까지 떼어 내자 흥건해진 아랫입술 주변의 피부가 번들거렸다.

그는 그 표피를 혀로 모두 핥으면서 윤신을 제 허벅지 위에 주저앉혔다.

“이건 나도 최근에 알게 된 나의 놀라운 부분 중 하난데, 지금 이 상태가 좋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양 윤신이 바로 반박했다.

“약점 생긴 게요? 몇 번이나 이게 맞는지 고민되신다면서요.”

“아무리 고민하고, 분해해서 뜯어봐도 결론이 늘 똑같아. 명쾌해. 이렇게 답이 하나밖에 없는 문제를 푸는 건 처음이야. 시나리오를 써서 가설을 상정할 필요도 없고, 굳이 수식 만들어서 역산할 필요도 없어. 그 어떤 것보다 쉬워. 눈 달려 있으면 다 푸는 1점짜리 같은 거.”

결론이 그렇게 났더라도, 중간중간 후회된 적 없느냐는 물음을 던지려던 윤신은 말을 아꼈다. 아직 시작 단계에서 그런 걸 묻는 건 너무 비겁한 것 같기도 했고, 또 대체로 솔직하게 말해 주는 그의 입에서 기대하지 않은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자신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놓아줄 용기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이제 와 뒷걸음질 치기에 자신은 이미 그가 너무나도 욕심났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다행히 세헌이 목소리를 이어 갔다.

“주말에 같이 있자.”

“시간 돼요? 이번 주 내내 엄청 바쁘셨잖아요. 할 거 쌓였을 텐데.”

“그래도. 네 옆에서 바쁘게.”

선뜻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윤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 매우 여러 개의 주말이 흘렀다. 그동안 자신은 번번이 세헌이 괜찮다고 하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불렀을 때만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늘 일에 파묻혀 있는 사람이고, 자신도 특별히 다르진 않아서 그게 훨씬 익숙하고 편했다.

그런데 세헌이 여태까지의 패턴을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저 얼쩡거리면 집중 안 되고 방해된다면서요.”

“그냥 집중 안 되고 방해되는 편이 낫겠어.”

“그럼 수석님이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그것도 좋지.”

“막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제가 그렇게 좋아요?”

“응.”

너무 순순하게 답하는 바람에, 윤신의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나만 네 옆에 있어 주는 게 아니라, 이제 내 옆에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태 그의 삶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전부를 함께 공유하길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물론 때로 눈빛으로, 손짓으로, 전신으로,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로 고백해 오지만 여태까지 세헌의 삶 자체가 워낙 독립적이어서, 그걸 바꾸려면 꽤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서로 양보해 조금씩 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조금 달라졌다. 노골적으로 성급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는 여태까지 이어 온 삶의 문법을 깨부술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멋쩍은 한편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피하고 몸을 들썩이다가, 결국 회귀하듯 세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빤한 시선이 자신만을 주시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처음부터 한순간도 제게서 비껴 나간 적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매우 부끄러워졌다.

“혹시 저 얼굴 빨개졌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꿎은 손을 쥐락펴락하던 윤신은 괜히 세헌의 길쭉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를 만질수록, 윤신의 깨끗한 피부 창백한 부분들이 데워지듯 붉게 물들었다.

* * *

윤신의 거실 책상 위에 자료들과 기기들이 가득했다. 노트북이 세 대, 태블릿 PC가 네 대, 그리고 곳곳에 쌓인 서류철과 책상 옆의 아크릴 칠판까지.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데도 그 주변부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이동식 의자를 끌어 칠판 앞에 둔 세헌이 그곳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크릴 위에 마카로 뭔가를 쓰고 있는 윤신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직 조정 기간이긴 했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누나 부부의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윤신이 꼭 모든 부분에 참여하고 싶어 해서 가능하면 주말에 동시에 짬을 내 자료들을 검토했다.

“저쪽에서 우리 예상대로 나와 준다면…… 누나는 실장님이랑 결백한 사이라는 걸 증명해야 돼요. 이 부분은 영진건설 사모님 쪽에서 증언을 해 준다고 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윤신은 자신이 적어 둔 글자들을 한눈에 담았다.

그 순간, 세헌이 늘씬한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윤신이 당황한 사이 천천히 뒤로 끌어당겼다. 황급히 마카 뚜껑을 닫은 윤신은 그의 다리 위에 겹쳐 몸을 의지했다. 세헌은 제게 바짝 닿은 마른 몸을 손바닥으로 나른하게 쓰다듬고는 이어 어깻죽지와 등 곳곳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이윽고 나지막하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윤신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연달아 지퍼까지 내려 앞섶 부분을 벌어지게 만들더니, 빈 공간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슬그머니 드로어즈 위에 모로 자리한 성기 기둥을 위아래로 쓸자,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윤신의 몸이 파도가 이는 것처럼 크게 들썩였다. 세헌이 건드리면 바로 반응하는 여느 때와 달리 조금 곤란한 듯했다.

“변호사님.”

“그거 말고.”

“선배.”

“그쪽이 낫겠어.”

“하지 마요. 여기서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정면에 누나랑 조카들 사진이 있어요.”

가까스로 뒤로 손을 뻗은 윤신이 그의 턱을 받쳐 들듯 잡았다. 곧이어 칠판에 붙여 둔 사진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위로 밀어 올렸다. 필연적으로 세헌의 시선이 이경 부부의 사진과 그 아래 아이들 사진에 가 닿았다. 그러나 이내 전혀 개의치 않고 바지 앞섶 틈새에 제 손을 더욱 깊숙이 집어넣는 바람에 윤신의 마른 손이 아래를 향해 뚝 떨어졌다.

“흐읏, 아…….”

옷 위로 윤곽을 그리듯이 차분히 위아래로 쓸기 시작하자, 그 섬세한 손놀림에 백기를 든 성기가 서서히 곤두섰다.

축 늘어져 있던 기둥이 위로 치솟아 드로어즈를 꿰뚫을 듯 발기했다. 손으로 이 촉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던 세헌은 기다렸다는 양 성기를 밖으로 빼냈다.

그는 한쪽 손으로는 윤신의 도드라진 유두를, 다른 한쪽 손으로는 단단해진 성기를 애무했다. 요도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다가, 곧 대신 자위하듯이 손바닥으로 마찰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싫, 이거 싫어요. 으응, 잠시만요.”

“여유가 없는 건 너 같은데. 정말 싫어?”

“그러니까 잠깐. 아!”

정면 아크릴에 두 사람이 겹쳐 앉은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게 자꾸 윤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진 속 가족들은 마치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 같았다. 웃고 있는 누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윤신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양 두 팔로 칠판을 거칠게 밀어 버렸다. 이동식이어서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금세 판서한 부분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제야 윤신은 자신이 깔고 앉은 세헌의 허벅지를 붙잡고 그의 것 위에 제 둔부를 문질렀다. 이 행위에 화답하듯 세헌이 옷 위로 성기를 밀어붙였다, 떼어 냈다 반복하면서 서로의 몸을 더욱 달뜨게 만들었다. 그가 속도를 내어 성기를 자극할수록, 탄탄한 허벅지를 잡은 두 팔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아, 선배…… 그냥 침대로 가면 안 돼요?”

“혹은 여기서 삽입하는 방법도 있겠지.”

몸을 바짝 붙여 귓전에 속삭이는 낮은 음성이 제 마음을 현혹했다. 얼굴을 붉힌 윤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입으로는 그를 기꺼이 허락했다.

“읏, 흐으, 좋아요. 해 주세요.”

“여기서 기다려. 콘돔 가져올 테니까.”

“싫어요. 그냥 해요. 바로 들어와요. 선배 정액은 손가락 넣어서 직접 빼 주세요.”

“하…….”

자꾸 추락하듯 기울어지려 하는 상체를 곧추세운 윤신이 허겁지겁 손의 위치를 옮겼다. 열중쉬어 하듯 등 뒤로 양팔을 뻗어 세헌의 바지 버클을 바로 풀고, 지퍼를 내렸다.

지익. 언제 들어도 소름 끼칠 정도로 짜릿한 소리가 들리고, 금세 손에 어느새 발기한 그의 것이 잡혔다. 마침내 윤신이 속옷 안에 감싸인 성기를 바로 빼내려던 때였다.

드르륵. 드르륵.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누군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소리가 끊기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전화가 온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그의 드로어즈에서 손을 겨우 떼어 낸 윤신은 세헌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 한숨을 몰아쉬었다.

“수석님 거예요?”

“네 거 같은데.”

힐끗 뒤를 돌아본 윤신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몸을 한 차례 들썩거렸다.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 천천히 세헌의 품에서 일어났다. 한데 상체를 책상 쪽으로 숙이고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받는 사이, 허벅지에 어정쩡하게 걸려 있던 바지를 그가 확, 끌어 내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엉덩이의 갈라진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 주변을 혀로 핥았다.

놀라서 입을 쩍 벌린 순간, 하필이면 누나의 목소리가 귓전에 꽂혀 들었다.

- 윤신아? 전화받은 거야?

“어, 누나, 허억, 헉…….”

- 도윤신?

기어코 구멍 속으로 진입하겠다는 양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밀부 입구를 공략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르작거리면서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세헌의 완력이 더 세서 여의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거의 젖 먹던 힘까지 전부 짜내어 그에게서 벗어난 윤신은 여전히 앉은 채로 빙글거리는 세헌을 돌아보며 동공으로 온갖 육두문자를 날려 댔다.

턱을 괸 채로 눈을 가느다랗게 뜬 세헌이 바로 일어나 쫓아오려는 기세기에 양해를 구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는 강세헌답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다가왔다. 턱을 쥐고 키스를 하더니, 종아리쯤 어설프게 매달려 있는 하의와 속옷을 기어코 전부 벗겨 버렸다.

휙, 옷을 소파 쪽으로 던지고는 성기를 덥석 쥐더니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밀부 주변을 핥았다. 놀란 윤신이 몸을 비틀다가 치아에 온 힘을 실어 그의 손목을 콱 깨물었다.

“읏…….”

살갗에 난 치흔을 확인하며 세헌이 정지한 사이 빠르게 뛰어가 바지를 꿰입었다. 겨우 상태를 추스르고 휴대폰을 귀에 대는데, 어느 틈에 늘씬한 두 다리로 우뚝 선 그가 입맛을 다시고 소리 없이 이렇게 말했다.

‘맛있어.’

그는 미간을 구기는 제게 어깨만 으쓱해 보인 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 윤신아. 윤신아! 어디 아파?

뻔뻔한 세헌을 응시하며 이를 으득 간 윤신이 조금 뒷걸음질 쳐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앉아 눈길을 벽으로 돌렸다.

“누나. 미안. 갑자기 뭘 좀 쏟아서 줍느라고. 아픈 거 아냐. 얘기해.”

- 내일 출근해서 강 변호사님 뵈면 내가 연락 좀 달라 그런다고 얘기 전해 줘. 급한 건 아니고, 추가로 드릴 자료가 있어서. 강 수석 주말엔 클라이언트 전화 웬만하면 안 받는 걸로 알아서 걸기가 뭐하더라고. 목소리나 들을 겸 너한테 전화했어.

“아…… 강 변호사님 말이지. 어, 그럴게.”

눈앞에 그를 두고 이곳에 없는 듯이 말하고 있자니 죄책감이 조금 일었다. 힐끗 다시 세헌을 보자, 어느새 그는 조금 전 그 상태로 눈동자가 향한 방향만 바꿔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본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제 쪽을 쳐다보지 않는 걸 보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되는 모양이다.

고개를 기울여 세헌의 옆모습을 감상하듯 보던 윤신은 괜히 애틋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누나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바람에 주의를 다시 빼앗겼다.

- 밥은 잘 챙겨 먹고 일하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힘닿는 데까진 마련해 볼게.

“그럴게. 애들은?”

- 간식 줬더니 낮잠 자.

매형의 안부를 꺼낼까, 말까 한참 고민했으나 윤신은 끝내 그러지 않는 걸 택했다. 최근엔 계속 이래 왔다. 그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범한 대화들을 나누는 게 다였다.

물론 대궐같이 크고 넓어 한집에 살며 마주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곧 헤어질 사람과 동거하는 게 마음까지 편하진 못할 터다. 그 힘든 감정들이 모두 짐작돼서, 그는 도리어 말을 아끼게 됐다.

“음, 누나. 실은 나 지금 일하던 중이거든. 중요한 얘긴 만나서 하자.”

- 주말인데? 좀 쉬지.

“노력은 해 볼게.”

- 아무튼 알겠어. 다음 주쯤 보면 될까? 우리 윤신이 볼 때마다 마르는 것 같은데 맛있는 거 사 줘야지.

“실장님 편에 괜찮은 날짜 말씀드릴게. 그때 봐.”

- 수고해. 쉬엄쉬엄하고. 먼저 끊는다.

알겠다고 간단히 대꾸하자, 그녀가 앞서 통화를 종료했다. 검은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신은 뒤늦게 정신을 추스르고 세헌 쪽으로 다가섰다.

그제야 그는 서류를 한 손에 든 채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제게 몰두하던 그는 사라지고,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눈빛이 덤덤했다. 일에 열중할 때 세헌은 늘 그랬다. 섭섭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매우 멋있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창피해서, 윤신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손목 좀 봐요. 상처 났어요?”

순순히 그가 왼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손목 부근을 꼼꼼하게 훑어본 윤신은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흔적으로 남지 않을 듯해 안도했다.

“그러게 통화하는데 뭐 하는 거예요. 끊고 마저 하면 되지.”

“김샜어. 누난 뭐래.”

“내일 연락 좀 달래요. 추가로 자료 줄 게 있나 봐요. 그런데, 수한에서 온 답변서 읽어 보시던 거예요? 이거 다 보신 거잖아요.”

“다시 봐도 흠잡을 데가 없네. 딱, 수한 법무 팀 스타일이야.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고.”

“소송 내용이 다 비슷비슷해서 그런가 가정 법원 판사들은 깔끔한 걸 특히 좋아하긴 한다더라고요.”

“이혼 소송은 서면이 반이야. 곧 글이 반이란 거지. 너 서면 쓸 때 온도 균형 맞추려면 고생 좀 하겠다. 그래도 네 법률 문장이 심플해서 눈에 잘 들어오는 편이니 괜찮을 거야. 아, 여기 잠깐 앉아 봐.”

탁. 답변서를 내려놓은 세헌이 앉으라는 양 스툴을 가리켰다.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윤신이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말을 이었다.

“조정은 명목상이고, 저쪽도 소송 준비를 하고 있어. 내 계산에 따르면 원심은 이길 것 같아. 다만 네 매형은 지더라도 반소를 전부 걸긴 할 거야. 위자료 청구 소송, 재산 분할 소송.”

“뭐, 재산 분할은 유책 배우자도 청구할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질 걸 알기 때문에 저쪽이 원하는 건 이기는 게 아니야. 최대한 덜 주는 거지. 그러려면 도이경 씨가 아주 나쁜 여자여야 해. 그 때문에 소송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너희 누나 흠집 내기가 시작된 건 알고 있지.”

윤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차분히 끄덕였다.

“우리가 정리한 거 외에, 또 생각나는 거 있어? 흠이 될 만한 거.”

그의 물음에 윤신은 빠르게 머릿속을 헤집어 그동안 고려했던 많은 것들을 끄집어냈다. 매형이 어딜 공격해 올지를 알아야 맞불을 놓든 말든 할 수가 있어서 이미 이런저런 루트로 누나의 흠집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한 쪽에선 그것들을 여성 잡지나 짜깁기 기사 등에 아주 은근한 방식으로 흘리며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따금 본인 일 때문에 남편의 요구에 소홀했다든가, 그래서 집안 행사 같은 걸 불참할 때 시어머니가 대신 참석했다든가, 혹은 그녀의 비서실장이 거슬린다고 몇 번이나 언질을 했으나 아버지의 지인이고, 또 신뢰하고 있다는 이유로 번번이 그 말을 거부했다든가 하는 소소한 것들이었다.

“딱히 없는데. 지난번 말씀드린 성관계 거부 정도가 센 편이에요. 그건 둘째 낳고 얼마 안 됐을 때인 데다 가벼운 산후 우울증을 앓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서 참작이 될 거고요. 뭘 창조해 내지 않는 이상, 없을걸요.”

“아니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걸. 대기업 법무 팀은 대부분 아주 창조적인 집단이야.”

“…….”

“곧 만난다는 거 같으니까 혹시나 누락한 게 있는지 다시 꼭 확인해 봐. 나보다는 네가 듣는 편이 대답하기가 나을 테니까. 아주 작은 거라도 괜찮아. 저쪽에서 뭘 걸고넘어질지 우리가 무조건 미리 알아야 해. 최대한 리스크는 제거하고 가자고.”

“그럴게요.”

“좋아, 그럼. 본 게임 들어가기 전에, 첫 번째 변론 기일 염두에 두고 진술서 하나 써 볼래?”

일순 놀람과 기쁨 그 경계에 서게 된 윤신이 스스로를 가리켰다.

“제가요?”

“싫어?”

“그게 아니라…….”

“정성껏 써 봐. 그걸로 시뮬레이션 돌려 보게.”

조정 절차가 끝나고 부부가 타협하지 못한 채 소송 절차가 개시되면, 변론 기일이 정해지게 될 터다. 그때부터는 각자가 주장과 이를 뒷받침할 증거들을 진술하며 유리한 판결을 유도해야만 했다. 세헌은 그렇게 중요한 시발점을 제게 맡긴 것이다.

좋았는데, 너무 좋아서 오히려 겁먹게 되는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역시나, 자비 없는 그는 됐다는 양 바로 말을 거두어 갔다.

“못 하겠으면 관두고.”

“잠깐만요. 진짜 제가 해도 돼요? 무서워요.”

“이 정도로도 무서우면 여태까지 혈혈단신으로 변론은 어떻게 하셨어.”

“변호사님 끼어드니까 이거 진짜 실전 같아서요. 그럼 일단 제가 예상 진술서를 가라로 써 보면…….”

바라는 게 있되, 차마 꺼내 놓을 수가 없어 뒷말을 얼버무리자, 그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양 즉답해 주었다.

“우선 쓰기나 해. 내가 첨삭하고 문제점 알려 줄 테니까 편하게 해도 돼.”

“좀 못 써도 괜찮아요?”

“못 쓰면 안 되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질 수가 없는 판을 지기라도 하면 너, 나, 너희 누나. 어쩌면 도국까지 전부 좆 되는 거야. 알아듣지.”

“편하게 하라면서요.”

“넌 잘할 거야. 잘하고 있고.”

칭찬에 인색한 편인 그가 하는 말인지라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럭저럭’이 칭찬이라고 했던 탁 비서의 말로 미루어 이건 찬사에 가까우리라. 기분 좋으라고 하는 일종의 립 서비스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말이라면 세헌도 하지 않았을 터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이 이제 다시 안아 달라는 듯 두 팔을 뻗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윤신이 앉은 스툴을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뺨에 묻어 있는 긴 속눈썹을 떼어 준 뒤 품에 으스러져라 안았다.

이윽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부딪쳤다. 서로의 보드라운 살갗들을 입 안에 가두듯 열정적으로 키스하고, 혀를 내어 얽었다. 그러면서 하던 숙제를 마저 해치우듯 서로의 옷가지를 벗기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휴대폰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젖은 입을 떼어 낸 두 사람의 시선이 절로 책상 위에 닿았다. 조금 전엔 누나가 스킨십을 방해하더니, 이번엔 탁 비서였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요. 받아 보세요.”

“이러니까 더 하고 싶네.”

“저도요.”

“통화 금방 끝낼 테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말고 벗고 있어.”

그는 농담처럼 대꾸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확인하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탁 비.”

- 변호사님. 지금 잠깐 통화되세요?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외출해 계시면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길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펌 내부 상황에 관한 일입니다.

여유롭던 여느 때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밀정이 경과를 보고하는 것처럼 한껏 낮춘 긴장 섞인 음성이었다. 그 속에 묘한 불안도 감지됐다. 덕분에 본능적으로 크든, 작든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한 세헌이 힐끗 윤신을 보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

- 저, 실은 제가 어쩌다 송 변호사님이 발송하신 전체 메시지를 좀 보게 됐는데요. 지금 맡고 계신 이혼 소송 때문에 수한에서 실력이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꽤 큰 사건을 하나 걷어 갔대요. 그래서 아주 노발대발하셔서 파트너들 죄다 소집한 것 같아요. 수석님만 빼고요.

거기까지 들은 그가 초연한 손짓으로 윤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나른하게 응답했다.

“아, 그래? 끊지 말고 잠깐 기다려.”

아무래도 수한 쪽에서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사건을 수거해 갔다는 건, 말을 안 들으면 먹이를 빼앗겠다는 사인을 직접 줬다는 뜻과 상통했다.

세헌은 윤신이 있는 자리에서 이 대화를 이어 가는 게 현명한 생각이 못 된다는 자체 판단을 내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 윤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휴대폰 스피커 부분을 손으로 막으면서 귓전에 속삭였다.

“합병 건 때문이야. 자료를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집에 다녀와야겠어.”

필요한 게 뭔지 알려 주면 자신이 대신 다녀와도 된다는 양 눈을 또렷이 마주치던 윤신은 세헌의 단호한 표정을 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착하게 순응하는 윤신의 매끈한 턱을 붙잡아 입에 ‘쪽’ 소리 나게 키스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움직인 윤신이 겉옷을 챙겨 와 세헌에게 걸쳐 주었다. 그걸 입으며 밖으로 나온 그가 복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주민 전용 흡연 공간으로 나와 아직 쌀쌀한 바깥공기와 조우했다. 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대를 입에 문 뒤 입을 열었다.

“걷어 간 사건 어느 팀 거야. 내가 모르는 걸 보면 회사법은 아닌 모양이고.”

- 금융요. 이게 시작일 거래요.

도국을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단순한 하청 업체 정도로 보는 수한의 시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 그는 미희에게 몇 장 분량의 보고서를 건넸다. 도국에 문제가 생길 시 스스로 용퇴하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하던 날이었다. 수한에서 실력 행사가 들어왔을 때의 순서를 예측한 레포트를 함께 제시했다. 거기에 적은 대로 금융부터였다.

이건 미희의 담당 분야라 그녀 선에서 조정이 가능할 테지만 이 뒤엔 다른 파트너들이 맡고 있는 조세나 인수 합병 자문까지도 이어질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도국 내의 세무 법인과 관세 법인이 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들고 일어날 게 뻔했다. 그 전에는 무조건 펌을 관둬야 할 터다.

“송 변은 파트너들 소집해서 무슨 작당을 하는데. 도윤신 내보내기?”

- 아니에요. 표적 수석님이에요. 수석님 변호사법 위반으로 거시려는 것 같아요.

후우, 밤공기 사이로 제 호흡을 밀어 넣던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아, 그래?”

솔직히 작정하고 걸자면 걸릴 게 한둘이 아니긴 했다. 하나 그 말은 반대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도 있는 문제란 뜻이다.

미희의 사고 흐름은 매우 단순하고 간단했다. 당분간 펌의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런 소소한 문제로 제 발목을 잡아 업무적으로 주저앉히려는 것이다. 자신이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없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이혼 소송에서 손을 떼도록 유도하려는 게 분명했다.

- 태평하시네요. 걱정도 안 되세요?

“내가 도국 최대 매출처야. 그 객기 얼마 못 갈 거야.”

- 수석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건 팀킬이에요. 부당하다고요.

“회동 언제라고?”

- 오늘 밤이요. 10시. 파트너 외부 회의 종종 하시는 영빈관. 가시게요?

자신이 취할 행동에 따라 그 모임은 예정대로 성사될 수도, 취소될 수도 있었다.

“불청객이 뭐 하러 거기까지 가. 판 벌린 송 수석을 만나 봐야지. 이만 끊자.”

- 네. 제발 원만하게 해결하시길. 건투를 빌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탁 비서의 걱정 담긴 음성을 들으며 통화를 종료한 그가 주머니 안에 차 키가 잘 들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집까지 다녀오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 세헌은 승강기에 올라타며 윤신에게 좀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러고는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모임이 밤 10시라면 아직 미희는 집에 있을 것이다.

그가 아는 그녀는 실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탁 비서에게 그토록 중요한 회합의 내용을 부주의하게 들켰을 리가 없었다. 제게 우호적인 그를 알아, 애초에 이 얘기가 세헌의 귀에까지 전달되기를 바랐을 터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차 키를 만지작거리던 세헌은 마침 기계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승강기에서 내렸다. 곧이어 세단에 탑승해 핸들을 붙잡았다. 탁 비서와 통화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초연하게 버티고 있었으나, 제 인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파악! 운전대를 힘주어 쥔 그의 미간이 흠씬 찌푸려졌다.

“제기랄.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가 다소 난폭한 주행을 시작했다.

사택에서 미희의 집까지는 도보로 15분가량 걸렸다. 차로는 훨씬 더 금방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운전이 꽤 거칠었다. 단순히 자리 보전의 위기의식 때문에 분노하는 게 아니다. 최악의 경우 변호사로 더 버틸 수 없다면, 뭐든 새로 시작하면 된다. 세헌은 매 순간 매우 충실하게 일하지만 어디에도 미련은 없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제 동선을 가로막아 상황을 통제하려는 송 수석의 오만한 판단이 그를 매우 실망시켰다.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스스로 외엔 오직 도윤신뿐이다. 그녀는 그걸 간과해선 안 됐다.

끼익. 어느 틈에 도착한 미희의 집 주차장에 신경질적으로 차를 세운 그는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짜증스럽게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마중 나왔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왔구나. 강 변. 생각보다 빠르네.”

대답도 없이 그녀를 지나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그가 익숙하게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세헌의 뒤통수에 대고 미희가 덧붙여 물었다.

“차라도 줄까?”

“뒤통수 얼얼해서 아무것도 마실 여유 없어. 그냥 앉아.”

“세헌아.”

“앉아.”

낮고 음험한 목소리가 꽤 심상찮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세헌이 차가운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문제 생기면 내가 관두겠다고 했지. 분명히 몇 번이고 의사 피력했어. 얘기 잘 끝난 줄 알았는데, 송 변 이제 와서 나 엿 먹이려는 거야? 나 그 소송 해야 돼. 그러겠다고 결정했어. 그러니까 내 존재가 걸리적거리면 사직서를 수리해, 추잡하게 발목 잡지 말고.”

“난 너 포기 안 해. 네가 얼마짜린데. 너야말로 귀찮아지기 싫으면 그 소송에서 손 떼.”

잇새를 씹듯이 짓이긴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반문했다.

“이거 송미희 생각이야? 아닐 거 감 잡고 묻는 거야.”

솔직하게 말을 하는 편이 좋을지 그렇지 않을지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헌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을 것이다.

“반반이야. 수한 법무 팀에서 연락이 왔어. 도국에 도 변 두는 거랑 도이경 씨 소송 담당해 주는 것까진 묵인해 주겠대. 어차피 증거 여럿 확보된 건 아는 모양이고…… 우리 펌에서 맡는 것까진 백번 양보해서 참겠는데, 그걸 네가 하는 게 싫대.”

그는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픽 웃었다.

“나랑 붙는 상대방은 다 날 싫어해. 심지어 내 의뢰인들도 개중 반은 날 싫어하고. 돈받고 일하는 주제에 건방지고 비싸거든. 어느 부분이 새삼스럽지?”

“정말 싫대. 넌 너무 눈에 띄고, 무엇보다 거기서도 네 스타일을 아니까. 세헌아. 이거 그냥 경고 아니야. 어떻게 안 되겠니? 나도 같이 양보할게. 우리가 맡긴 맡되, 차라리 다른 어쏘 주자. 응? 우리 애들 다 똑똑해.”

“그 똑똑한 애들이 일을 제대로 하기나 할까? 아니, 어쏘 아니라 파트너를 줘도 이 건은 대충 하지 않겠어?”

“하아…… 정말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 도윤신 내 어쏘로 받아들이는 순간 선배한테 빚 다 갚았어. 앞으로 그런 소린 은혜 베푼 다른 사람한테 가서 해.”

차가운 거절에 순간 상처받은 듯한 눈빛을 비친 그녀가 끝내 언성을 높였다.

“정떨어진다. 대체 언제까지 나 너한테 남이니? 어떻게 20년 알고도 곁을 안 줘?”

“20년 아닌 200년을 알아도 우린 남이야.”

“싸가지 없는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냐! 절대 포기 못 하겠으면, 도와 달라고 부탁이라도 좀 해! 그래야 나도 죽도록 네 원망 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넘어가 주지. 어째서 네 결론이 도국을 나가 버리는 거야? 같이 뭘 도모할 순 없는 거니? 나도 계산 아주 좋아하지만, 오랜 친구 위해서라면 가끔은 미친 척 뭔가를 희생할 수도 있어. 제발 주변을 좀 돌아봐.”

섭섭함을 느낀 그녀의 노골적인 힐난에도 세헌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을 침묵했다. 염두에 둔 적 없는 주안점이라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던 그녀는 그가 그러는 동안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했다.

세헌이 궁리를 끝내고도, 미희가 숨을 다 고르고도 적막이 꽤 오래 이어졌다.

무거운 고요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도와 달라고 애원하는 거? 그걸로 만족 못 할 거잖아.”

평정을 모두 되찾은 미희가 진지하게 응답했다.

“물론 플러스 알파로 다른 조건이 필요하겠지. 다만 거기서 우리의 우정을 고려해 내가 조금쯤은 너그러울 수도 있다는 얘기야.”

도국을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그녀가 세헌에게 얻고자 하는 건 결이 뻔했다. 그를 통해 펌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고 그 가치 또한 높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세력을 확장해 업계 1위를 탈환하길 바랐다. 거기에 세헌이 도움을 주는 것을 간절히 원할 터다. 그러려면 그의 존재가 도국에 꽤 오랜 시간 필요할 게 자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7년.”

모든 소모적인 동작을 멈춘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주시했다. 미희가 덧붙였다.

“난 내가 대표로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네가 버텨 주기를 원해. 그러니까 7년. 네가 도 변 데리고 도국에서 딱 7년만 말뚝 박아 주겠다고 한다면…… 펌 차원에서 그 소송 도울게. 물론 네가 담당해서 맡아도 좋아.”

어이가 없어진 그는 말허리를 불쑥 자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노예 필요해?”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내가 개처럼 일한다고 진짜 개새끼는 아냐. 난 목줄 매이는 거 질색이야. 조금 전엔 20년 알았는데도 우리가 남이냐고 묻더니, 날 그렇게 몰라?”

“맞아. 널 아니까 계약 조건을 네 마음만 바뀌면 언제든 나가 버릴 수 있는 형태로 만든 거야. 그런데 이번에 네 사직서 받고 나니 너 다른 펌 갈까 봐 새삼 미친 듯이 불안하더라. 우리 펌이랑 힘겨루기라도 하게 되면 넌 그때마다 온갖 방식으로 도국을 뒤집어 놓겠지? 그 꼴은 못 보겠다.”

“그래서 이 소송 도와줄 테니 7년 동안 군소리 없이 무조건 도국에 박혀 있어라.”

“강 변. 향후 10년 잡고, 그동안 수한 전 계열사에서 끊길 수임 예상 총액만 수조 원대야. 나 지금 그거랑 너 바꾸겠다는 거야. 넌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너도 도국이 편하잖니.”

오래 일해 익숙하기에, 그녀의 말마따나 도국이 매우 편한 건 사실이다. 여태까지 쌓아 올린 게 워낙 많아서 이 펌이 그에게 최적화되어 있는 것도 맞았다. 조건만 따지면 제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도리어 미희가 손해를 감수하고 아주 많이 양보했다고 봐야 했다.

하나 제 무언가를 저당 잡히는 일은 역시 내키지가 않았다. 어딘가에 얽매여 반경을 통제당하는 건 세헌이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마음에 안 내키는 일을 해 본 역사가 전무했다. 운명처럼 도윤신을 좋아하게 된 일을 빼면 말이다.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입가를 훔치듯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내일 다시 얘기해.”

냉랭하게 통지하며 돌아서는 그를 보고 미희가 황급히 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빠르게 집을 벗어나려 하는 세헌을 최대한 지근거리에서 뒤따랐다.

그를 배웅하면서 기회를 틈타 넌지시 대꾸를 건넸다.

“오늘 파트너 회의는 취소하려고. 넌 고민해 보고 대답해 줘. 긍정적인 답변 기다릴게.”

세헌은 응답이 없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쌀쌀맞게 미희의 집을 완전히 벗어나더니 이윽고 이곳에 올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얼굴로 제 차에 올라탔다.

탁. 냉랭하게 문을 닫은 그가 쌩하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지나 주변 큰 도로에 편입하는 동안 갖가지 사념들이 눈송이 쏟아지듯 그의 뇌리로 떨어졌다.

사실 세헌은 이 사태를 책임지기 위해 도국과의 끝을 이미 연말쯤으로 계산하는 중이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그답게 소송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인생 계획들도 대충은 머릿속에 청사진이 있었다. 윤신을 제 삶 속 또 다른 주인공으로 끼워 넣겠다는 결심을 한 이상, 전체 인생의 재설계가 필요할 시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한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게 예상보다 빨랐다. 그래서 펌 내부가 뒤집어졌고, 자연스럽게 모든 게 틀어졌다.

조금 전 미희가 했던 말들을 곱씹는 그의 안색이 천천히 굳어 갔다.

‘7년이라.’

역시 기댈 데가 송 변밖에 없나.

여행자가 자신 하나라면 몰라도, 윤신의 존재를 거미줄처럼 엮어 함께 판을 짜려니 길이 퍽 가팔랐다.

“이 꼴통 때문에 내가 별 고민을 다…….”

쓴웃음을 터트린 그는 불안정한 공기를 애써 치워 내듯 차분히 숨을 가라앉혔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