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드레스 룸에 비치된 고급 소파 위가 엉망이었다. 콘돔을 다 쓴 뒤엔 아쉬워도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게 섹스의 불문율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지금 윤신의 안에 들락날락하는 건 아무것도 겹쳐지지 않은 그의 맨살갗이었다. 그 덕분에 윤신이 흘린 체액들은 물론이고 세헌이 은밀한 내부에 쏟아 낸 정액마저 늘씬한 허벅지를 타고 일부 흘러 그 위를 적셨다.
그들은 푹신한 가죽 소파를 내버려 두고 러그 위에서 전신을 겹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개의 나신이 빈틈없이 맞물려 흔들렸다. 양팔과 무릎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윤신의 등 뒤에 세헌이 굶주린 짐승처럼 달라붙어 사납게 추삽질했다.
세헌은 정말로 했던 말을 착실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윤신은 이게 벌써 몇 번째 섹스인지 기억조차 안 났다. 체위는 네 번쯤 바꿨고, 사정 횟수는 셀 수가 없었다. 두 다리로 걸어선 나가게 안 하겠다더니, 늘씬한 종아리와 허벅지에 죄다 힘이 빠져 요란하게 후들거릴 때까지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하윽, 하! 아! 아!”
“다리 제대로 벌려.”
그는 무릎이 꺾인 윤신이 앞으로 무너질 뻔하면 번번이 복부를 단단히 붙들어서 일으켜 세웠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던지 난폭하고 거친 피스톤 운동을 이어 갔다. 서로의 몸이 부딪칠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들과 윤신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꽤 야릇하게 뒤엉켜 울려 퍼졌다.
“허억, 헉, 힘, 힘들어요. 쓰러질 것 같아요…….”
무자비한 그는 간절한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커다란 손으로 거칠게 둔부 위를 철썩, 내려쳤다.
“엉덩이 들고.”
“읏! 수석님, 제발요.”
“무릎에 힘 안 줘? 꺾인 횟수만큼 사정하게 만들 거니까 계산 잘해.”
부드러운 촉감이나 순하고, 매끈한 느낌 따위들이 이 섹스에는 전무했다. 그는 관용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저속한 행위에 몰두했다.
세헌의 두 손이 뼈가 도드라진 골반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고는 앞뒤로 거세게 허리 짓 하며 밀부에 뻣뻣한 성기를 넣었다가, 빼냈다가를 반복했다. 꿰뚫려 신음하던 윤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꺾어 반쯤 선 제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허리 아래가 참담하리만치 혹사당해서 더 토해 낼 정액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인데도, 세헌이 아슬아슬하게 전립선을 찌를 때마다 성기가 다시 곤두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만 흥분하게 만들어 놓고 속 시원하게 스팟을 찔러 주기는커녕 최대한 빗겨 나간 자리에 성기를 욱여넣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감각으로 몇 배나 괴로웠다.
자신은 늘 그가 잔인하게 대하는 대상들에서 예외였다. 한데 하필이면 침대 위에선 그 모든 사실이 전복돼 모두가 예외고 자신만이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으응, 선배, 선배, 나 아파. 거기 말고, 조금 더 밑, 뒤쪽에…….”
“입 닥쳐. 흥 깨져.”
“흐읏, 읏! 읏!”
원체 우악스럽게 몸을 붙들고 있던 통에 윤신의 하얗고 마른 몸에 손자국이 벌겋게 새겨졌다. 얼마나 세게 쥐고, 내리눌러 댔는지를 모두 설명하듯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특히 허리와 골반, 둔부 따위들이 심했다.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엔 시퍼렇게 멍마저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육식동물이 사냥한 먹잇감을 해체하는 양 잔인하게 물어뜯은 자리들에 치아 자국과 상처들이 가득했다. 삽입하던 중에 회음 부위가 미세하게 찢어진 건지 가랑이 사이에는 피가 슬쩍 비쳐 말라 가는 중이었다.
거칠게 섹스한 적 없다더니, 그 말 또한 맞았다. 이 격렬한 행위에 비교한다면 여태까지의 관계들은 모두 온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았다.
퍽! 퍼억! 앞뒤로 움직이는 그가 점점 더 속도를 높여 갔다. 겨우 버티던 윤신의 두 다리가 후들댔다. 끝내 앞으로 풀썩, 무너지자 세헌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계산 잘하라니까.”
꽈악. 선단으로 벌름거리는 내부의 어정쩡한 자리를 짓누른 그가 성기를 확, 빼냈다. 그러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허전해진 내벽이 수축해 대는 것을 내버려 두고 윤신의 성기를 거칠게 매만지며 사정을 북돋웠다. 강제로 절정에 치달아 정액을 토해 내게 만든 뒤 다시 발기하게 만들어 괴롭힐 셈인 것이다. 몸을 떨어 대던 윤신이 결국 울먹거렸다.
“더 쌀 것도 없어요.”
“그래? 이 불투명한 건 뭔데.”
“흐읏, 흡! 아!”
세헌이 꺼떡거리는 제 성기를 회음 부위에 찌르면서 귀두부터 뿌리까지를 요령 있고 빠르게 흔들어 주자, 필연적으로 윤신의 요도가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끝내 많이 희석된 멀건 액체가 팟, 튀어나왔다.
러그를 축축하게 적시는 액체들을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보던 윤신이 겨우겨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리 사이에 몸을 끼워 자리를 잡았다. 모로 누운 늘어진 몸 위에 압도적으로 자리를 잡고는 늘씬한 허벅지를 벌려 어깨 위에 걸친 뒤 단단히 붙들었다. 곧이어 골반을 붙들고는 제 것을 은밀한 음부에 욱여넣었다.
“하, 응! 천천히!”
“반밖에 안 들어갔어. 뿌리까지 제대로 삼켜.”
“천천, 천천히! 제발요. 힘들어요.”
“이렇게 벌어져서 내 걸 먹어 치우고 있는 건 너야.”
그건 당신이 몇 시간 내내 박아 댔으니까 그렇지.
이를 간 윤신이 속내를 털어놓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세헌을 쓸데없이 자극했다가 고스란히 제게로 그 여파가 돌아올 것을 학습으로 깨쳤기 때문이다.
아직도 굶주렸다는 양 세헌이 허리를 쳐올린 순간, 강직된 성기가 뿌리까지 한 번에 들어왔다. 뒤이어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내부를 속도감 있게 꿰뚫어 갔다. 그가 허벅지 안쪽을 짓이기듯 피스톤 운동을 할 때마다 깊숙하게 선단이 박혀 들었다. 세운 무릎으로 몸의 균형을 잡은 세헌은 마치 음낭까지 전부 집어넣을 기세로 안쪽까지 삽입했다.
시종일관 스팟에서 어긋나는 자리만 공략하던 그가 이번엔 윤신이 좋아서 까무러치는 자리를 은근하게 찔러 댔다. 반복된 패턴이었다. 윤신의 성기가 축 늘어져 있는 틈을 타 흥분하게 만들었다가, 한계까지 강직되면 그때부턴 방치해 버렸다. 일종의 고문 같았다.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거기 좀 더! 아! 더 해 주세요, 제발, 으응!”
둥그런 귀두의 사방을 문지르듯 내벽을 눌러 대던 그는 윤신이 반응하기 시작하자 바로 초점을 옮겼다. 그때부터는 이미 한껏 벌어져 있는 면적을 더 넓히려는 듯이 내부 여기저기를 잔뜩 유린했다. 세헌이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할 때마다 얼룩덜룩해진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어느새 윤신의 머리가 소파 밑부분에 인접했다.
타악! 마침내 정수리에 소파 다리가 마찰한 순간 그는 땀에 흠뻑 전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게걸스럽게 키스하며 스퍼트를 높였다.
“헉, 읍!”
허벅지가 한계까지 벌어진 윤신은 근육이 매우 땅겨 괴로운 숨을 삼켰다. 그러나 제 위를 점령한 독재자가 아무것도 허락해 주지 않아서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신음하는 와중 혀가 얽히고, 서로의 타액이 입에서 입으로 오갔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새어 나오는 뜨거운 한숨들과, 열락의 흔적인 야릇한 탄성들이 상대방의 몸속으로 침투하듯 넘어갔다.
농염한 키스를 선사하던 그는 젖은 살갗을 떼어 내고 윤신의 턱을 붙잡았다. 고압적인 명령이 이어졌다.
“입 더 벌려.”
속눈썹을 파르르 떨어 가며 눈을 깜빡이던 윤신이 착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세헌이 위치를 제대로 맞춘 채로 좁은 터널 속에 제 침을 뱉었다.
“삼켜. 전부.”
“흣, 읏.”
윤신이 질척한 타액을 고스란히 삼켰다. 세헌은 긴 목울대가 꿀렁이는 것까지 눈에 새기듯 관찰한 뒤라야 울대뼈 위를 포악하게 움켜쥐었다. 곧이어 확, 던지듯 내팽개쳤다.
“읏……!”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윤신은 쿠션을 찾아 뒤통수를 기댔다. 바로 그때, 세헌이 그대로 제 것을 내부에서 훅 빼냈다. 내부를 꽉 채우고 있던 질량감이 사라지자, 윤신의 밀부 내벽이 성기를 붙들기 위해 잔뜩 수축했다. 자연히 세헌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너 어지간히 까졌다. 원래 이렇게 밝혀?”
“흐으, 그런 거 아니, 아니에요.”
헐떡이며 고개를 가로젓는 윤신의 반응은 이미 세헌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늘씬한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얹었다.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에 피가 달라붙은 게 보였다. 오묘한 희열에 찬 얼굴로 가만히 그 위를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핏줄이 잔뜩 선 제 성기의 선단을 입구에 맞췄다. 그의 것이 당장에라도 사출할 듯 움찔거렸다.
그 순간. 세헌의 성기가 윤신의 내부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꿰뚫었다. 동시에 음부의 점막들이 그의 크고 길쭉한 성기를 감싸면서 움츠러들었다.
“아! 아흑!”
“하, 씨발, 아직도 모자라? 이 새끼 조이는 거 봐.”
마른 몸을 완전히 위에서 짓누르듯 자세를 고친 그가 마침내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쫄깃한 내부에 단단한 기둥을 박자 찌걱거리는 마찰음들이 뜨거운 공기와 함께 공간을 촘촘하게 메워 갔다. 그의 몸에서 뚝뚝 떨어진 땀들이 윤신의 위에 묻어났다.
힘이 든 윤신이 바르작거릴 때마다 세헌의 몸짓은 더욱 사나워졌다.
흥분한 그가 강렬한 인터코스를 감행할수록 압박당한 마른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퍽, 퍽! 매우 저속하고 천박한 소리들이 그들의 위를 사수하듯 내려앉았다.
“아파, 아파, 으응. 선배…….”
사출 직전에 몰린 세헌이 그제야 윤신이 좋아하는 자리들을 콱 찔렀다. 푹푹 선단으로 쑤시면서 노골적으로 사정을 유도했다.
“아! 아아! 좀 더! 아!”
윤신은 비명 같은 교성을 토해 내며 목울대를 바르르 떨었다. 체력도 수분도 죄다 빠져 그 이상은 할 수 있는 반응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손을 잡고 싶었던 모양인지 세헌을 향해 팔을 뻗었으나, 그가 ‘탁.’ 소리 나게 쳐 내는 바람에 좌절됐다.
절정에 치달은 윤신은 물론이고, 마침내 세헌의 탄탄한 허벅지와 골반, 허리도 죄다 경련하듯 떨렸다. 어느 한 지점을 목적지로 삼아 있는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골반과 윤신의 둔부가 마주쳤다. 젖은 살결이 접촉하며 품위 없는 소리들이 일었다.
이윽고 그가 나직한 탄성을 뱉어 냈다. 한 박자 늦게 윤신도 멀건 액체를 사정했다.
뒤이어 풀썩, 세헌의 탄력적인 몸이 윤신의 위로 무너졌다.
“하, 이런 씨발.”
“아, 하아…… 죽을 것 같아요.”
매우 힘겹게 위로 끌어 올린 윤신의 손이 세헌의 젖은 등을 가볍게 쓸었다. 하나 영 힘이 안 들어가 금세 중력의 영향을 받고 말았다. 밑으로 흘러내린 손바닥에 피가 벌겋게 묻어났다.
자연스럽게 아까 전 세헌의 매끈한 등에 정신없이 손톱자국을 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파서 견디기 위해 그랬던 건데, 모르는 사이 그도 함께 상처 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긁어 댄 건지 눈으로 보고 싶은데 일어날 엄두가 안 났다. 여전히 제 위에 있는 세헌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등에 상처 많이 났나 봐요. 아까 긁은 거 같은데 아직도 피가 나요. 제가 좀 볼래요.”
“넌 가랑이 사이 찢어졌어. 공평하게 주고받은 걸로 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그의 말을 듣자 지금까지의 고통이 전부 되살아나는 듯했다. 울컥한 윤신이 세헌을 향한 걱정을 금세 거두고 비아냥거렸다.
“네 알아요. 결국 해내셨네요. 기어코 피를 봤어요. 수석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내가 얼마나 거칠게 섹스하는지 가르쳐 달라며. 왜 꼭 한 입으로 두말이야?”
“그건……!”
물론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 액면 그대로 세헌이 폭주하리라곤 예상 못 했다. 거칠더라도 어느 정도는, 정말 최소한으로는 서로 기분 좋은 행위를 도모할 거라고 여겼는데 자신은 아직도 그에 대해 뭘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윤신이 분한 마음에 대답하지 않고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세헌은 무슨 생각인지 성기를 밀부에서 쑥 빼내고는 제 몸도 일으켰다.
잔뜩 배 속을 압박하고 있던 그의 것이 빠져나가자, 윤신은 급격하게 허전함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누워 있는데도 정액이 다리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무안한 마음에 자신도 몸을 일으키려고 움찔했다. 한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예 불가능한 범주였다. 그래서 러그 위에 누운 채로 몸만 달싹였다.
제 몸을 이토록 만신창이로 만든 세헌은 그저 이 모양새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윤신의 젖은 허벅지 위에 제 것의 귀두를 문질러 정액들을 마저 닦아 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드라운 맨살 위에 느긋하게 비볐다. 마치 그의 것이 뭉툭한 연필이고 윤신의 몸이 도화지라도 되는 양 그림 그리듯이 문지르자 윤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
필연적으로 신음한 윤신이 눈꺼풀을 차분히 내리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떴을 때, 세헌의 그림자가 제 위에 크게 드리워져 있어 놀랐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저 더는 못 해요.”
“그건 네 생각이고.”
“저 이러다 기절해요.”
“아직 안 했잖아. 빨아.”
윤신의 머리 쪽으로 위치를 옮긴 그가 선단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 위를 비볐다. 곧이어 천천히 입술을 벌리게 유도하고는 그 안으로 기둥을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그의 것을 입 안 가득 삼키게 된 윤신이 버거워서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세헌은 개의치 않고 제 것을 따뜻한 점막에 문질러 가며 부피를 키워 갔다.
“하, 좀 더 혀로 문질러.”
그를 쏘아보던 윤신은 하는 수 없이 혀로 표피를 어설프게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헌은 목구멍 안으로 처박을 듯 성기를 콱 삽입했다.
예기치 않게 누운 채로 목을 압박당한 윤신의 눈가가 벌게졌다. 이미 실핏줄이 다 터져 엉망이었는데도 더욱 붉게 물들었다. 생리적으로 눈물도 차올랐다. 그는 위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이 모든 걸 내려다보면서도 계속 거칠게 허리 짓 할 따름이었다.
“읍! 욱! 읍! 큭!”
버거운 윤신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세헌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자비를 베풀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 그가 성기를 확, 빼냈다. 젖은 입 속에서 금세 딱딱해져 제대로 곤두서 있었다.
쿨럭. 겨우 해방된 윤신은 요란하게 기침했다. 그사이에도 세헌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자리를 옮긴 그가 이번엔 늘씬한 다리를 벌리고 음부로 손을 뻗었다. 구멍 안에 손가락을 쑥 넣고 안을 휘젓다가, 그 안에서 찐득하게 고인 정액들을 죄다 긁어냈다.
긴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윤신이 본능적으로 둔부에 힘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찰싹’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 위를 내려쳤다. 어찌 된 게 대놓고 난폭하게 구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수치스러웠다. 관계하는 내내 억눌러 왔던 서러움이 돌연 북받쳤다. 웅얼거리던 윤신이 나지막하게 혼잣말했다.
“미친 새끼.”
“더 크게 얘기해. 용기가 그거밖에 없어?”
“나 이제 진짜 못 한다고! 아파.”
“너 너무 조잘거려. 쓸데없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섹스 횟수는 늘어. 쉬운 규칙인데. 이해하지? 침대로 가서 단 한 시간이라도 자고 싶으면 처신 똑바로 해.”
“영장류 체력이 이럴 수가 있어? 당신은 인간 아냐, 그냥 짐승이지. 내가 쏴 죽일 거야.”
“안됐군. 한 번 더 늘어났어.”
홱, 머리채를 붙든 세헌이 윤신을 강제로 일으켰다. 그러고는 소파로 상체를 빨래처럼 걸쳐 팔꿈치로 하중을 지탱하게 만들더니 자신은 뒤에 달라붙어서 다시 귀두를 입구에 문질렀다. 입을 열수록 마이너스라는 걸 인지한 윤신이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그가 벌게진 귀를 힘껏 깨물었다.
“윽……!”
뒤이어 한껏 음산해진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다가 쏙 파고들었다.
“도윤신,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로 날 긁으면 안 되지.”
“내 친구가 그런 소리 지껄일 줄 나도 몰랐어요.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니, 너 일부러 그랬어.”
물론 일부러 질투심을 자극하고 싶어 뱉어 낸 알량한 소리들을 그가 모를 거라곤 생각 안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한 한 윤신도 항변할 말은 있었다.
“안 잤어요! 눈치챘잖아요. 내 친구가 아무리 머저리라도 나랑 잤는데 결혼 생각을 하겠냐고요. 질투 좀 받고 싶어서 말 얼버무린 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섹스하자고 했지 격투기 하자고 했어요?”
“아직도 입은 살았군. 눈 붙이기가 싫은가 봐. 좋아, 해보지 뭐. 밤은 기니까.”
퍽, 윤신의 머리채를 흔들어 소파에 처박게 한 세헌이 성기를 그대로 푹 처박았다. 이미 그가 수 시간에 걸쳐 늘려 놓은 밀부의 입구는 마치 본래부터 세헌의 성기가 들어갈 자리였다는 듯 활짝 벌어졌다. 그대로 뿌리까지 꽂아 넣은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아흑……!”
“하아, 제기랄.”
상처 나 잔뜩 약해지고 민감해진 내부에 그의 것이 다시 꽉 찼다. 그는 일부러 윤신을 욕보이려는 것 같았다. 마치 짐승의 교미처럼 안을 헤집는 세헌의 움직임이 몹시 천박했다.
거침없이 뿌리까지 박았다가 가능한 한 뒤로 빼내고, 다시 퍽 찔러 쑤시는 행위가 에로틱하다 못해 상스러웠다. 윤신은 괴로운 탄성과 함께 몇 번이고 앞으로 무너졌다. 소파에 접촉한 맨살이 붓고 멍들어 아렸다.
“응, 으응!”
내벽이 너덜거리는 느낌이 일었다. 화끈거리고, 따끔거렸다. 짓무르는 듯한 촉감이 아찔했다. 생생하게 세헌의 성기가 박힐 때마다 덧난 상처 위에 살갗을 문지르는 찌르르하고 아픈 감각이 일었다. 그런데 그가 계속 그래 왔듯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여겨질 만할 때쯤이면 기분 좋은 자리들을 찔러 흥분하게 만드는 바람에 정말 말 그대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가 말하는 거친 섹스가 이렇게 지능적이고도 교활한 형태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넝마주이가 된 윤신은 결국 축 늘어진 세탁물처럼 그가 박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원체 바짝 마른 몸이라 기다랗고 굵은 성기를 최대한 안으로 조준해 박아 넣으면 배 위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있는 대로 깊숙하게 삽입한 세헌이 큼지막한 손으로 그 도드라진 위를 꽉 짓눌렀다. 앞뒤로 압박당한 윤신이 몸을 정신없이 바르작거렸다.
“흐읍, 응, 그만! 그만! 아파!”
“규칙 잊어버렸어?”
“사랑해요……. 아! 아!”
천만다행히 이쪽은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윤신의 안에서 움찔하더니 이내 더욱 노골적으로 성기를 박아 넣으면서 더 말하기를 종용했다.
“흥분돼. 좀 더. 더 얘기해 봐.”
“사랑해요.”
“한 번 더.”
“사랑…… 진심으로 쏴 죽이고 싶어. 아파!”
고통과 쾌감을 강제로 끊임없이 함께 누리던 윤신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잔뜩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가죽 소파 위에 문지르며 헐떡거렸다. 피차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걸 느낀 세헌이 더는 안 되겠다 싶어져 부드럽게 목덜미를 붙잡고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키스해 주면서 윤신의 전립선 위치를 찾아 그곳을 집중적으로 찔러 주었다.
질퍽한 진흙을 밟는 듯한 소리들이 서로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이제 겨우 자신이 잘 아는 섹스의 궤도로 돌아왔음을 깨달은 윤신이 흐느끼다 말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가 세헌이 매우 세게 한 지점을 눌러 주는 바람에 눈물을 쏟으면서 동시에 속으로 먹히는 신음을 터트렸다.
“어흑, 아! 거, 거기. 쌀 것 같아요.”
사정감이 차올라 등 뒤로 손을 뻗자, 이 밤 내내 수차례 제 체온을 뿌리치던 세헌이 그제야 손에 깍지를 껴 주었다. 안도한 윤신이 허리를 떨면서 소파 위에 사정했다.
“아! 아, 아…….”
뒤이어 세헌도 스퍼트를 올렸다.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 노련한 피스톤 운동을 한동안 반복하다가, 결국 요도 끝에서 정액을 쏟아 밀부를 적셨다.
마침내 미간을 구기며 윤신의 안에서 토정한 그가 마른 몸 위에 쓰러졌다.
“하, 빌어먹을.”
잠시 그러고 있다가 아래 깔린 등이 그저 숨만 쌕쌕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성기를 빼내고,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풀썩, 세헌의 탄탄한 가슴팍으로 무너진 윤신은 반쯤 기절한 건지 눈을 감은 채 별 반응이 없었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 젖은 눈가에 쪽쪽, 키스해 준 그는 축 늘어진 나신을 주물렀다.
“도윤신.”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닌지 이름에 반응한 윤신이 손을 바르작거리다가, 더 꽉 안아 달라는 듯 슬며시 내밀었다. 깊은숨을 몰아쉰 세헌은 머리를 쓸어 주다가, 이내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그러자 윤신이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낭창해진 몸을 주체하지도 못하면서도, 겨우 몇 마디를 뱉어 냈다.
“지옥에나 가.”
그는 덤덤히 대꾸했다.
“죽어서 좋은 데 갈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사디스트…… 이럴 줄 알았어.”
씁쓸하게 픽 웃음을 터트린 그는 손을 뻗었다. 뒤이어 애틋한 손길로 윤신의 땀에 전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잔뜩 날 서 있던 드레스 룸 내부의 공기가 겨우 조금 누그러져 그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서로의 지친 숨소리가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 * *
사락.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윤신의 어깨 위에서 시트가 걷혀 내려갔다. 멍과 붉은 자국 따위로 난도질이 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헤드에 겨우 기대앉은 윤신은 눈살을 흠씬 찌푸렸다. 누가 간밤에 자신을 쇠파이프 같은 걸로 수천 대는 때려 댄 것 같은 파괴적인 통증이 일었다. 몸 이곳저곳이 다 아파서 어디가 아프지 않은지를 꼽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은밀한 부위의 통증은 말도 못 할 수준이었다. 자연히 망할 피의자를 눈으로 좇게 됐다.
시선을 돌리자,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서재가 아니라 티 테이블에 앉아 일하고 있는 세헌의 모습이 보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통해 자신이 깼다는 걸 알게 됐는지 눈길도 가만히 던지고 있는 채였다.
그들은 잠시 서로 마주 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좀 괜찮아?”
윤신은 얼굴이 부어 잘 올라가지 않는 입매를 억지로 끌어 올려서 시니컬하게 미소 지었다.
“그 질문 재미있네요. 웃겼어요.”
정통으로 이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 눈뜨자마자 시비야.”
“눈 감고 있을 때도 댁을 욕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잠꼬대 안 해요?”
“했어.”
“그냥 가위로 구멍을 찢어 놓지 그래요. 그편이 훨씬 평화적이었을 텐데.”
“그런 방법이 있었네. 참고할게.”
미간을 확 찌푸린 윤신이 기꺼이 화답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선물로 수석님 좆은 제가 잘라 드릴 테니까!”
“떡은 쳤는데, 어때. 만족했어?”
힐끗, 그가 저속한 태도로 윤신의 성기를 가리켜 턱짓했다. 이런 순간까지 본인의 자존심은 사수한 채 그저 오만하게 구는 그 때문에 윤신은 더욱 열받았다.
“이게 만족한 상태 같아요? 아파 죽겠어요! 병원도 못 가. 가서는 또 뭐라고 말해요? 제가 어제 강세헌이랑 섹스를 한 건지 그쪽의 하반신이랑 섹스를 한 건지 모르겠다고요!”
말을 할수록 잔뜩 갈라져 새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열심히 비꼬던 윤신은 처음 들어 보는 낯선 목소리에 놀라 목을 손으로 덥석 쥐었다. 피부가 뜨끈했다. 그리고 청결하게 씻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몸 이곳저곳과 주변을 눈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침대 위는 매우 깨끗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피부가 얼룩덜룩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물에 닦은 모양인지 말끔한 상태였다. 아울러 상처 위에 연고 같은 것들이 발려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다리 사이에도 약 바르셨어요? 그…… 들락날락하셨던 부분요.”
“응. 콘돔에 발라서. 세상모르고 자더군. 이제 손가락으로는 만족이 안 되지?”
짐작이 사실이 되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에게 알몸을 보이는 일이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의 노출의 적정선이라는 게 있었다. 환히 불 켜진 곳에서, 잠든 제 음부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연고를 발랐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도저히 뻔뻔하게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시트 아래로 뭘 걸치지 않아 나신 상태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단 욕실로 들어가서 제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힐끗 세헌의 눈치를 살핀 윤신은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디뎠다. 힘을 쥐어짜 내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산이었던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땅으로 무너져 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윤신은 다리를 벌린 채 세헌을 정면으로 보게 되고 말았다.
“헉…….”
몸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데 여의치가 앉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그걸 해 줄 사람이라곤 세헌뿐이었다. 한데 정작 그는 제 매끈한 턱을 가만히 쓸면서 척 다리를 꼬고 앉아 윤신의 다리 사이를 빤히 직시할 따름이었다.
“너 나한테 그거 자주 보여 준다.”
“먼저 여러 번 보여 주셨으니 저도 보여 드려야죠.”
“하던 거 해. 정 힘들면 기어가든가.”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고 있으면 그가 다가와서 도와줄 거라고 여겼다. 기절한 자신을 정성껏 씻기고 약 발라 재워 가며 살폈을 것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정말이지 늘, 강세헌은 예상한 것 그 이상을 보여 주었다. 오만한 자세로 앉아서 아주 나른하고 여유로운 시선을 보내는 그 때문에 윤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개새끼야, 이쪽으로 안 와?”
“‘와서 도와주세요.’라고 해야지.”
“와서 도와주세요, 이 개새끼야.”
그제야 졌다는 양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윤신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가까이 와서 마른 몸을 일으켜 주고, 침대에 앉힌 뒤 그 앞에 마주 앉았다.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차분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이윽고 잠긴 목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에도 그의 마음은 깃들어 있었다.
“도윤신.”
청결한 시트를 끌어다가 제 몸 위를 망토처럼 감싸던 윤신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왜.”
“나는 이제 좀 무섭다.”
이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순간적으로 헷갈린 건 제 탓은 아닐 터다. 윤신이 내심 당황해서 입을 다물자, 세헌도 이 기분을 모르지 않는 듯 덤덤히 덧붙였다.
“원래 누굴 좋아하는 게 이런 건가? 다른 사람이랑 키스 같은 걸 했을 널 생각하니까, 머리끝까지 열받아서 어젠 너 진짜 다치게 만들고 싶었어. 제어가 안 되더라.”
“송 수석님이랑 잤냐고 물었던 거 잊었어요? 그런 생각은 잘만 하면서.”
“네가 좋아했던 사람이랑. 그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거든.”
“…….”
“너무 싫어서 구역질 나. 실은 아직도 화가 나.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돼?”
세헌이 제게 어떤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상황도, 그게 하필이면 이런 질문일 것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거였다. 윤신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저 입을 굳게 닫곤 생각에 잠겼다.
가능한 한 긍정적인 면만을 취사선택해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이 연애는 훨씬 더 복잡한 일일지도 몰랐다. 세헌은 서툴긴 하나, 금세 잘 배웠다. 이번엔 질투를 학습했으니 그걸 표현한 것이고, 또 다른 걸 학습하는 날엔 그걸 표현하게 될 터다. 그것도 그의 방식으로 말이다. 몸이 아픈 건 견딜 수 있지만, 다음번엔 마음이 다치게 될 수도 있었다. 둘 모두 말이다.
솔직히 윤신은 지금 이 순간 세헌이 매우 미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당장 그를 안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해서,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손을 뻗었다.
시트를 슬쩍 올려 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유도하고, 가까이 온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두 손으로 포박해 오는 손길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세헌이 윤신의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시트에 쓸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너무하셨던 거 알죠. 거친 섹스 하자고 했지 저를 학대하라고 한 거 아니거든요.”
“알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아직 제 화가 풀린 건 아니에요.”
“응.”
“사랑해요.”
이쯤에서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감기라는 표현으론 모자랐다. 사랑은 마치 교통사고 같았다.
다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을 덥히는 진심 어린 고백은 늘 그렇듯 서로의 시간을 잠시간 멎게 만들었다.
일순 공기의 흐름이 모두 멈추고, 어느 영화 속 스틸 컷 한 장면처럼 두 사람의 순간이 정지했다. 세헌은 그 빈틈을 타 아주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대꾸하는 음성이 여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도 알아.”
“그럼 됐어요. 질투가 나면 그냥 하면 돼요. 대신 저한테 털어놔요. 전 그런 게 듣고 싶거든요. 그럼 제가 몇 번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강세헌이라고 말해 줄게요.”
보드라운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은 윤신은 몇 번 헝클어뜨리듯이 결을 쓸어 주었다. 의외로 세헌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마른 몸을 안고 있을 따름이었다.
계속 그와 살갗을 접촉하고 있자니 잔뜩 예민해져 있던 윤신의 머릿속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분했던 감정도 미세하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여태 스스로를 통제하는 데 능란했을 그가, 지금 이 순간 그게 쉽지 않아 얼마나 혼란스러울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참을 안겨 있다가, 슬쩍 그의 어깻죽지에서 뺨을 떼어 냈다. 세헌이 떨어지기 싫다는 양 머리카락 위에 여러 번 뽀뽀하곤 겨우 놓아주었다.
“저 오늘 할 일 꽤 많은데. 실사 보고서도 써야 하고요. 의견서 쓸 것도 두 개나 돼요.”
그 몇 마디에 윤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이해한 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와주실 거죠? 수석님이 봐 주시면 여러 번 검토 안 해도 되잖아요.”
“접수. 또.”
“지금 몇 시예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가볍게 답했다.
“오전 9시.”
“저 아침 차려 주세요. 아, 도우미 아주머니 부를 생각 하시지 말고요.”
“그러지 뭐.”
“조신하게. 에이프런도 두르고요.”
선뜻 수락하려던 그가 덧붙이는 말을 듣자마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윤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까지도 그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결국 시트를 조금 걷어 냈다. 성기 부분만 대충 가리고 상체와 하체를 막론한 상처들을 보여 주자 그도 타협했다.
“그래.”
“핑크색 없어요? 아주머니가 몇 개 사 두셨을 거 아니에요.”
“없어.”
“없는 거 확실해요? 집에서 요리를 전혀 안 해 봐서 모르는 거 아니고?”
“…….”
“그럼 핑크 포기하는 대신 누드 에이프런.”
이 말엔 바로 그가 기각을 선언했다.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되겠던 모양이다.
“안 돼.”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아무거나.”
일부러 놀리듯이 하는 말에도 세헌은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온순하게 나오는 강세헌은 매우, 매우, 매우 드물었다. 인형 놀이를 하는 듯한 소소한 재미를 느낀 윤신이 내친김에 이것저것 해 보자는 양 이어 말했다.
“또 이번 영진건설 매수 프로젝트요. 직원들 고용 승계 문제 때문에 담당자 접견할 때 저도 참관하러 따라 들어가는데 깐깐해서 다루기가 만만찮대요. 어떻게 상대해야 좋은지 팁 좀 주실 수 있어요? 수석님도 제가 뭐라도 하면 좋잖아요.”
“안 그래도 알려 주려고 했어.”
“그리고 또…….”
“그래. 해 줄게.”
듣지도 않고 바로 받아들이는 세헌 때문에 윤신의 말이 멈췄다. 자신이 해 달라고 할 일이야 사실 뻔한 거긴 했지만, 그래도 그같이 확실한 사람이 자꾸 백지 수표를 남발하는 게 낯설고도 좋아서였다. 전부 해 주겠다고 했으니 이것도 해 줄까 싶어져, 윤신은 입술을 달싹이다 매우 신중하게 물었다.
“저한테 먼저 헤어지자고 하시면 안 돼요. 절대 안 헤어질 거지만, 만에 하나 헤어져야 한다면 제가 말하게 해 주세요. 저 수석님한테 차이면 평생 재생이 안 될 거 같아요.”
분명 보다 가벼운 마음이었던 건 제 쪽이었다. 처음엔 그랬던 게 확실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요 몇 달 사이 세헌에 대해 더욱 내밀한 것들까지 알게 되며 그가 애틋해진 듯했다.
그건 감정의 크기 차이라기보다는, 각각의 본질 차이이리라. 자신은 누구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만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하다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이라면, 세헌은 마음의 빗장을 꼭꼭 닫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눈이 내리듯 누군가를 마주치게 된 셈이었으니까.
해서, 명확하게 답해 주지 않을 거라고 내심 기대를 버리고 꺼낸 요구였는데, 놀랍게도 세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자신에게 블러핑을 할 이유 같은 게 없으니 안 되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을 것 같았다. 윤신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두 팔을 겨우 들어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에 세헌이 상처투성이 몸의 어디를 만져야 할지를 대충 가늠하다 그나마 상처가 적은 등을 어루만지며 척추를 따라 차분하게 토닥였다.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있다가, 돌연 윤신이 어제 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땐 정신도, 체력도 없어 흘려 넘겼으나 이제 와 떠올리니 가슴에 사무쳐 심장이 미어졌다.
〈죽어서 좋은 데 갈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이 말을 이끌어 낸 게 자신이 했던 저주여서 더욱 상처였다.
“수석님.”
“응, 도윤신.”
“어제 했던 말은 취소예요.”
“네가 한 수백 개의 나를 향한 상스러운 욕 중 어떤 거.”
“몇 개 안 했거든요.”
“잠꼬대랑, 너 혼자 속으로 한 것도 다 센 거야.”
아차 싶어 얼굴을 살짝 구긴 윤신이 그의 목덜미를 꽉 붙들었다.
“귀신이네.”
“그렇다 치고.”
“저 두고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저 두고 죽지 마요.〉
언젠가 들은 적 있던 비슷한 말을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된 세헌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부정적인 반응이라고 느껴졌던지 윤신이 응답을 보챘다.
“얼른 약속해요.”
그러자 그는 이번에도 고개를 차분하게 끄덕였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곧이어 마치 약속의 증표를 남기듯, 윤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 위에 여러 번 반복해서 키스했다. 두 사람은 빈틈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