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조도가 낮은 술집 조명 때문에 눈가가 어룽거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테이블 위의 주광색 전등을 본 윤신은 점점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은 아직 말똥말똥한데 몸이 축축 늘어졌다. 더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으나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도통 안 생겨서 곤란했다.
향긋한 과실주를 잔에 따르던 그는 병이 비었음을 깨닫고 고민 끝에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직원이 가장 구석 자리에 혼자 앉은 그에게 새 병을 가져다주었다. 이윽고 윤신은 투명한 잔에 알싸한 액체를 가득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뇌리까지 취하진 않아서일까. 자꾸만 속내를 시끄럽게 만드는 말들만 떠올랐다.
〈내보내야 할 때 안 내보내니까 일이 이 꼬락서니가 되는 거 아냐! 네 자리 걸고 걔 사수한 결과가 이거야?〉
미희가 세헌에게 했던 말을 곱씹을수록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누나와 자신은 도국이라면 버티기에 괜찮지 않을까 판단했던 게 사실이다. 수한과 워낙 서로 비밀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끈끈하리라고 여겼다.
하나 예비 대표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십수 년 몸 바쳐 일해 온 직장인 데다 앞으로의 미래이기도 할 테니, 제 존재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면 굴러들어 온 돌이 이쯤에서 빠져나가 주는 편이 맞았다.
요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봤으나, 늘 그런 결론으로 귀결됐다. 누난 버티라고 했지만, 자신을 감싸 준 세헌을 위해서도 용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술병을 다시 든 그는 잔에 알코올을 따랐다. 그러고는 한 모금 더 마셨다. 입 안이 써서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됐다.
“으, 머리 아파.”
얼굴을 푹 앞으로 숙인 윤신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오른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밖은 어두웠다. 그리고 하얀 눈이 소보록하게 쌓여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커플의 자취나,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따위들이 시야에 드문드문 들어왔다.
술집 내부도 왁자지껄하긴 마찬가지였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 다른 자리가 잘 안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온 건 자신 하나뿐인 것 같았다.
후우, 쓸쓸한 기분을 입 밖으로 내보내듯 깊은숨을 내쉰 그는 아예 테이블 위로 뺨을 기대기 위해 엎드렸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슬쩍 손을 뻗어 얼굴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이게 무슨 짓…….”
한데 테이블 바로 옆에 상상치도 못했던 사람이 서 있어서, 낯선 이의 손이 제 뺨을 감쌌을 때보다도 더욱 황망해지고 말았다.
“헉, 수석님?”
질 좋은 코트를 입은 세헌이 윤신의 가시거리에 박히듯이 잡혔다. 그는 이미 비운 몇 병의 술과,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안주 따위들을 눈대중으로 훑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에 있는데도 찬 바람의 기운이 이쪽까지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세헌의 표정이 유난히 차갑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헌은 계속 침묵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한 윤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찾으셨어요?”
“어디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여기 앉은 거 아니었나?”
힐끗, 창 쪽을 가리킨 세헌이 윤신의 잔을 제 앞으로 끌어갔다. 빈 곳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그대로 느긋하게 내용물을 비웠다. 손길에 약간의 짜증과 나른함이 함께 묻어 있어서 묘하게 에로틱했다.
다른 사람과 식기류 같은 건 절대 나눠 쓰지 않을 것 같은 세헌이 제게만 이렇게 경계를 늦출 때마다 사실 윤신은 스킨십할 때에 준하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 언젠가 ‘내 물건에 남 지문 묻는 거 싫어.’라고 말했던 그가 이제 자신에게만 영역을 내주었다는 의미였으니까.
팔로 턱을 괴고 세헌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미간을 구기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구경났어?”
“설명이 논리적이지가 않아서요.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낸 거예요.”
이곳은 그들이 거주하는 사택 옆 아케이드 1층의 술집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건 맞았다. 자신이 앉은 창가 자리도 밖에서 발견하기가 쉬웠다. 다만 한 가지, 이쪽은 반대편 출입구만 이용하는 세헌이 올 일이 전혀 없는 길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지, 누그러진 어투로 응답했다.
“좋아. 논리적이고, 그럴싸한 걸로 하나 골라 봐. 1번. 내가 너한테 위치 추적기를 달았다.”
“아닐걸요. 그런 거 해 주는 분이면 제가 애정 결핍에 안 걸리죠.”
“이제라도 하나 달아 줘?”
“몰래 해 주는 편이 더 짜릿할 것 같아요. 그러다 언젠가 그걸 저한테 걸리는 거예요. 제가 막 울며불며 화를 내면서 당분간 섹스 금지를 선언하고, 선밴 안달이 나서 잠든 저를…….”
“포르노 찍어? 그만.”
잠시간 미간을 구긴 그가 기막히다는 양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야. 어쨌든 2번. 정말 우연히 마주쳤다.”
“그것도 아닐 거 같은데.”
“3번.”
“3번요.”
득달같이 낚시찌를 물자,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기가 뭐일 줄 알고? 아직 제시 안 했어.”
“3번. 저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이 앞에서 발견했다. 차는 주차장에 있으니까 이 근처에 있을 거란 유추는 하셨을 거고요.”
세헌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마 정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주말에는 같이 있는 게 불문율처럼 굳었다. 평일에도 짬이 나면 가능한 한 함께했다. 그렇게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피차 바빠 사적인 시간을 보내기가 요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때때로 어느 한쪽이 일의 강도가 높은 때엔 따로 만나지 않고 개인 시간을 영위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각자 상황을 설명하는 메시지 정도는 늘 보내 두었다. 한데 오늘은 하루가 다 끝나 가는데 윤신에게서 계속 연락이 없어 그가 찾아 나섰을 게 그려졌다.
“날도 추운데 다 돌아보신 거예요? 저희 집? 1층 카페? 근린공원? 아니면 다?”
“코인 워시는 왜 빼.”
“아…….”
“빨래방까지 가게 만들 줄은 몰랐다. 10년 만에 처음 가 봐.”
멋쩍게 눈을 깜빡인 윤신은 계속 턱을 괸 상태로 세헌을 직시했다. 눈매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 애틋한 마음을 감지한 건지 그도 별말 없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세헌 쪽에서 먼저 정적을 깼다.
“휴대폰은 왜 꺼 놨어.”
“걱정하라고요. 지금처럼요.”
“그래. 그거참 편한 방식이다. 동의해. 앞으로 걱정하게 만들고 싶으면 나도 그런 방법을 쓰면 되겠군.”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윤신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잠깐만요.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너 또 그럴걸. 이유나 설명해. 내가 알아서 해석하고 납득하게.”
“실은, 뵐 낯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대꾸와 함께 세헌의 앞에 놓인 잔을 도로 찾아간 윤신은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탁, 소리가 나게 빈 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투명한 액체를 채우려고 하자, 두 번째엔 그가 만류했다. 손가락이 곧게 뻗은 남자다운 손이 병을 옆으로 치우고, 윤신의 손목을 지분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윤신은 여느 때처럼 그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긴커녕, 도리어 제게 닿은 커다란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정말로 면목이 없어서 감히 그에게 닿아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세헌은 이 상황이 이해가 잘 안 간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척 꼈다.
“도윤신 변호사. 난 상대방의 입을 열게 만들기 위해 아주 많은 방법을 활용해. 그중에서 가장 소프트하게, 말로 설득할 때 불어.”
입술과 손을 함께 달싹이던 윤신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속으로만 담아 두고 끙끙 앓는 건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헌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 전에…… 두 분 대화하시는 걸 들었어요.”
“두 분? 내가 이번 주에 단독 미팅만 여섯 건을 했거든.”
“송 수석님이랑 선배요.”
일순, 대충 짐작 가는 영역이 있는 그가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슬쩍 찌푸린 미간과 가라앉은 눈동자 따위에 퍽 심각해진 기운이 묻어났다.
“계속해 봐.”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 저도 모르게 엿듣게 됐어요. 좀 싸우시는 거 같던데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뭐, 중요한 건 거의…… 아마도요.”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한 그가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마치 뜯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윤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의 시끌시끌한 분위기와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의 정적인 공기가 매우 대조적이었다.
침묵, 침묵, 그리고 또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세헌이 가라앉은 어투로 대꾸했다.
“도윤신. 너한텐 무슨 우연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 그것도 꽤 일신상에 도움 되는 우연만 집중적으로?”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윤신은 썩 양심적인 편이었고, 자신의 존재가 모두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훤히 알면서 모르는 척 버틸 만큼 뻔뻔스럽지도 못했다. 짐작은 했으나 애써 묻어 두는 것과, 직접 귀로 듣고 현실이 되는 건 천양지차였다.
“도움 하나도 안 되거든요. 괜히 죄송하기만 하죠.”
“그래서 이번 주 내내 바쁘다고 피해 다녔구나.”
“거짓말한 건 없습니다. 진짜 바빴어요.”
“내내 혼자 삽질을 하셨을 테고. 오늘은 술 마시면서 모든 생각을 정리했을 테고. 그러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도국에서 나가는 게 최선이야.’ 같은 결심을 내렸겠네. 맞나?”
전부 정답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세헌이 지나치게 잘 읽는 건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쉽게 읽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사이의 어디쯤에 아직 찾지 못한 해답이 있으리라.
“사직서는 제가 제출할게요. 수석님은 그러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물끄러미 시선만 던지던 그가 힐끗 뒤쪽을 살폈다. 구석 자리인 이곳의 위치와 칸막이의 높이, 사람들의 눈길이 닿을 수 있는 각도 따위들을 꼼꼼하게 확인하곤 윤신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해서, 윤신은 착하게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어정쩡하게 그를 훔쳐보자, 세헌이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정수리에 쪽, 하고 키스해 주었다. 서로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어스름한 불빛이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비췄다.
“잘 들어. 나는 송 변을 잘 알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일단 버틸 때까지 버텨는 줄 거야. 나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너희 아버지 때문에. 뭐, 정 안 되면 버리겠지만 그것까지 감수하며 널 지키는 건 나도 바라지 않아. 결국엔 다 빚으로 돌아오거든.”
“하지만…….”
그는 바로 윤신의 말허리를 잘라 냈다.
“건방지게 어쏘 주제에 어디서 ‘하지만’이야. 네 사직서가 필요해지면 내가 알아서 자를 거니까 앞서가지 마. 지금은 아니야. 넌 아직 주니어 이름표도 못 뗐어. 울타리가 필요해.”
“그럼 변호사님도 사표 내지 마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왜 저만 말을 들어요? 수석님은 제 말 같은 건 안 들어요?”
“안 들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윤신이 억울함 반, 미안함 반의 마음으로 그의 뺨을 있는 힘껏 꽉 깨물었다. 약간의 타액과 치아 자국이 세헌의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선명하게 남았다.
통증이 있는지 인상을 쓴 세헌은 몹시 어이없어하며 제 젖은 뺨을 가리켰다.
“뭐 하는 짓이야. 핥아.”
“싫어요.”
“핥아. 밤새 안 재우고 내 좆 핥게 만들기 전에.”
애꿎게 그의 등 뒤로 서늘한 김이 잔뜩 올라온 창문만 보며 머뭇거리던 윤신은 결국 혀를 슬쩍 내어 벌게진 부분을 핥았다. 그러다가 반발심이 생겨 다시 치아로 깨물려는데 이번엔 세헌이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려 입을 맞춰 왔다.
마치 불꽃이 튀듯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서로의 살갗을 입 안에 넣고 빨다가, 거의 동시에 혀를 이끌어 내 맞물렸다. 윤신은 그의 뺨과 턱을 쥐고 절박하게 체온을 공유했다. 세헌이 이에 화답하듯 마른 몸을 바짝 안은 채로 달려들어 정신없이 입 안의 질척한 표피들을 탐했다.
아무리 왁자지껄한 공간이고, 또 분리되어 있다지만 이곳은 엄연히 외부였다. 자연히 윤신의 숨소리와 목소리의 주파수가 최대치로 낮아졌다. 끙끙 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응, 응.”
이 억눌린 소리에 성감을 자극받은 모양인지 그의 큼지막한 손이 마른 상체를 미친 듯이 어루만졌다. 뾰족하게 솟은 견갑골과 판판한 등을 건드렸다. 윤신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한참이나 상대방에게 매달려 키스하던 두 사람은, 결국 윤신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면서 아주 느릿하게 서로의 몸을 떼어 냈다.
숨을 고르는 동안 따뜻해진 숨결이 상대방의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 감촉 때문에 아주 충만감이 일었다. 또 남들에게 이 상황을 들킬 수도 있다는 위험 부담 때문인지 짜릿했다. 세헌의 뺨에 자신의 뺨을 문지른 윤신이 이윽고 그를 빤히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화답하듯 가볍게 이마에 입 맞춰 준 세헌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수석님도 저 좋아하세요?”
서로의 마음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걸 굳이 또 확인받듯 묻는 건 아직 불안하다는 의미였다. 제 존재 자체가 부담이 되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윤신은 세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두려워졌다. 어쩌면 지난번 미희에게 했던 말대로 수천 번, 지금 이게 잘하는 짓인가 고민하고 있는 중일 듯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약간의 퇴로를 열어 줄 필요가 있었다.
“수천 번 고민하시고 대답하셔도 돼요.”
심각하게 듣고 있던 세헌은 픽 웃었다.
“골고루 잘도 엿들었다.”
“죄송합니다.”
“고민 끝에 내가 너 아니다 싶다 그러면 어쩌게.”
질문을 하긴 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결론이었다. 윤신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나 뾰족한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꽤 오래 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보답받을 수 없는 짝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섭섭해서 순식간에 뚱한 표정이 된 윤신이 입을 굳게 닫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자 그가 턱을 쭈욱 늘이듯이 당겨 억지로 빈틈을 보이게 만들었다.
“어디서 이런 게 굴러떨어졌지?”
“고의는 아닌데요.”
“잘 떨어졌어.”
계속 울상에 죽상이더니, 이번엔 또 그의 한 마디에 금세 풀려 웃음을 터트렸다. 매끄럽게 말려 올라간 윤신의 입꼬리가 퍽 반드러웠다. 풋사과의 향기가 날 것 같은 싱그러움이 묻어났다. 그 양쪽 입매에 공평하게 키스한 세헌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슬쩍 드러난 매끈한 이마에도 꾸욱 입술을 눌러 도장을 찍었다.
“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나만 따라와.”
윤신은 미안함과 안도감이 뒤엉킨 복잡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곧, 세헌의 온기가 남아 있는 이마를 그의 어깻죽지에 기대 가느다란 숨을 흘렸다.
* * *
토요일 오후의 나른한 공기가 서재 안을 맴돌았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윤신은 건너편 책상 앞에 앉아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세헌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의류들을 눈으로 훑었다.
평상시에 입을 만한 겨울용 니트, 바지 따위는 물론이고 타이와 맞춤으로 된 슈트까지 기다란 소파 사방에 빼곡하게 전시된 채였다. 점심쯤 그의 의상 담당 직원이 다녀가며 전달해 주고 간 것들이었다.
가능한 한 검소하게 사는 윤신도 이것들의 브랜드는 모두 알았다. 지금 이 소파 위에, 장신구나 시계 따위 하나 없이 오직 의복으로만 수천만 원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넥타이를 만져 보던 윤신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말문을 열었다.
“이게 다 제 거라고요? 저한텐 아무 말씀 없었잖아요.”
사락. 종이를 뒤로 넘긴 그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카드 얼마만큼을 써야 한대. 그래서 네 사이즈 알려 주고 어울릴 것 같은 색깔 몇 가지 얘기했더니 적당히 찾아온 거야. 가져가서 입어.”
“그래서 본인 게 아니라 제 물건을 사셨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긴 했지만 눈길까지 내어 주진 않았다. 여전히 모니터 화면과 서류에 온 관심을 몰두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가 자신을 생각해서 선물을 준 셈이니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세헌은 이유 없이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사는 행위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윤신에겐 그렇게 단순한 문법으로 다가오지 않는 게 문제였다.
“저기, 변호사님.”
“응. 얘기해.”
“바쁘신 거 같으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혹시 저 없어 보여요?”
그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양 미간을 설핏 구겼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시선 한 자락 허락해 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윤신은 슬슬 섭섭해졌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후줄근하다거나 해서 저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시냐고요.”
“집 사 주면 밖에 내놓기 창피해서 가둬 놓고 싶은 거냐고 묻겠군.”
“그건 사 주시면 얘기할게요.”
“나더러 자산 관리사가 전화해서 이번 달분 돈을 쓰라는데 네 생각이 났어. 그래서 샀고, 그게 다야. 내 사고 회로는 아주 심플했다고. 이의 있으면.”
“있으면요?”
“마음 깊은 곳에 고이 가지고 있어. 입은 다물고. 시끄러워. 집중 안 돼.”
대답을 들은 윤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카드 긁을 시간도 없으시니 이런 전화 종종 받으셨겠네요. 그럼 여탠 뭘 사셨어요?”
“적당히 그림이나 조형물 같은 걸 살 때도 있었고, 술도 가끔 샀던 것 같고, 리조트 회원권 같은 걸 끊을 때도 있었고. 아, 리조트 스키장 이용이 이번 달까지라고 오라던데. 갈래?”
순간 반색해서 가겠다고 답을 하려다가, 이내 관뒀다. 지금은 그럴 군번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누나의 소송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차피 장기전을 각오했고, 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안에서 일의 일부로 이행해야 하는 게 맞았다. 다만, 세헌이 걸렸다. 미희가 했던 말들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렸다.
〈내 귀에 들어왔으니 다른 파트너들 아는 거 시간문제야. 어쩔 거야!〉
그가 회원권을 끊을 정도라면 고급 리조트의 VIP 전용 스키장일 테고, 운이 나쁘면 거기의 누군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될 터다. 언제 어디에서 말이 퍼져 동료 파트너 변호사들 귀에 들어가게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펌 내에서 그의 상황이 언제 아슬아슬해질지 모르는데 그런 소문까지 보태는 게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다음에요.”
“겨울 다 지났는데, 다음?”
“그래도 다음에요. 세 번 묻지 마요. 흔들릴 것 같아요.”
애써 질 좋은 니트들에 눈길을 준 윤신은 그것들을 겹쳐 상체에 대 보았다. 그러다 남색의 라운드형이 깔끔하고 제일 마음에 들어 포장을 열었다. 니트를 감싼 포장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옷을 꺼내, 셔츠 위에 입어 보았다.
부드러운 촉감이 기분 좋았다. 몇 번이고 표면을 만지작거리다가 세헌을 향해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쳤다.
“어때요? 어울려요?”
하나 주의를 이끄는데도 세헌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말로 하는 차분한 대답뿐이었다.
“응, 잘 어울려.”
“와, 영화 보면 옷 사 주고 몇 벌 막 입히다가 마지막에 엄청 감탄하며 봐 주던데.”
“잘 어울린다니까.”
“뭐 입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보고 얘기하죠?”
그는 도리어 서류에 눈을 더 고정하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니트.”
“색은?”
“네이비.”
“…….”
“잘 어울려. 세 번 얘기했다.”
이 안에 들어와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안 봤다. 그걸 알고는 있을까.
결국 참다 참다 윤신도 폭발했다.
“야, 강세헌.”
의외로 이 강경한 반응이 꽤 효과가 있던 모양인지 긴 손가락 사이에 펜대를 굴리던 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뒤이어 고개를 들어 전방에 있는 윤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길이 마주쳤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분노의 기운을 감지한 모양인지 세헌은 졌다는 양 펜을 휙, 던지고는 무성의하게 답했다.
“왜.”
“집으로 오라며.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집에 조용히 있는 사람 불러냈으면 좀 쳐다봐. 어떻게 한 번을 안 보냐.”
이미 부단히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는 세헌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으려고 결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위대한 유산〉에선 사랑이란, 맹목적인 헌신이자, 절대적인 겸손이고, 또 완전한 복종이자, 신뢰이고, 또 믿음이며, 무엇보다 제 온 마음과 영혼까지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열렬한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하던데.[1]
그런 격렬한 감정까진 아니더라도, 좀 더 자신을 구속하고, 원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느끼고 가끔은 그걸 표현해 주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인 걸까.
윤신이 섭섭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를 보자, 세헌이 툭, 던지듯 응답했다.
“자. 봤어. 아주 아름다워.”
“그게 다야? 나랑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이렇게 그냥 앉혀만 둘 거야?”
“떡이라도 치고 싶어. 만족해?”
“쳐야 만족하지.”
어쭈, 하듯 흥미로운 시선으로 윤신을 보던 세헌이 제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지그시 눈으로 압도하는 그의 기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강렬하게 직시하는 날카로운 눈매와, 쏟아 내는 눈빛이 퍽 매혹적이었다. 일순 당황하게 된 윤신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해명하듯 훨씬 공손해진 어조와 태도로 덧붙였다.
“기왕 선물받았는데 앞에서 한 벌 입어는 봐야 하니까요. 그냥 한 번만 봐 주시면 더 방해 안 하고 조용히 나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끝까지 쳐다도 안 보니까 오기가 생겨서…….”
“스트레스 쌓여서 붙잡고 있었어. 그리고 난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해. 몰라?”
“알아요. 죄송해요, 유치해서. 옷 챙겨서 나가 볼게요.”
“누가 나가래. 들어오라고 했고, 나가란 명령 아직 안 했어.”
“업무 중이신 거 같은데 계속 있어요? 게다가 저도 할 일이 있고…….”
말을 중간에 자르듯 손을 슬쩍 든 그가 제 쪽으로 오라는 듯 까딱거렸다. 윤신이 입을 다물곤 홀린 듯이 세헌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윽고 그는 윤신의 한쪽 엉덩이를 손으로 꽉, 쥐면서 주물렀다. 뒤이어 긴 손가락을 회음 부위 쪽으로 밀어 넣어 바지 위로 쓸자, 윤신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면서 낮게 신음했다.
“하아…….”
“애초에 약속보다 30분이나 일찍 내려온 게 너잖아. 이제 어떡할 거야. 5분이면 되는데 마무리하기 싫어졌어.”
다리 사이를 한 손으로 희롱하던 세헌은 이내 마른 몸을 제 허벅지 위로 끌어다 앉혔다. 두 사람의 시야에 서로밖에 없을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다. 가볍게 입술을 맞물린 그들은 상대방의 입 안으로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듯이 살갗을 겹친 채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 윤신이 제 얼굴을 그에게서 떼어 내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을 듣자 그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갔는데, 세헌의 언중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어서였다.
“스트레스 쌓이는데 왜 일을 해요? 지금 읽는 거 판례 아니에요?”
이 질문을 그야말로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맹수 같은 날카로운 눈에 뭐가 문제냐고 묻는 근본적인 의문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그러는데. 너도 머리 복잡할 때 판례 읽으면 도움된다며.”
“그거랑은 다르죠. 스트레스를 일로 푸는 거 진짜 미친놈 같아요.”
“원래 생각이란 걸 잘 안 하고 말을 하나?”
“한 건데.”
“더 해야 되겠는데.”
물론 이 해소 방식이 완전히 오답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헌의 업무가 지닌 태생적 무게감을 고려하면 도리어 은연중에 스트레스를 더 쌓게 되는 게 아닐까 했다.
운동으로 땀을 흘린다거나, 푹 잠을 잔다거나, 혹은 평소 좋아하는 영화나 뮤지컬 같은 걸 재탕하는 방법도 무난했다. 그는 차가 많고 스피드를 즐기니 드라이브 같은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무궁무진한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식이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와서 이런 방법밖에 해 보지 못한 거라면, 가르쳐 주고 싶었다.
“이거, 거의 다 하셨다고요?”
“5분 정도 더 봐야 돼.”
“그 정돈 돌아와서도 금방 하시잖아요. 우리 데이트해요.”
이 말에 세헌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네가 오늘 저녁엔 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 놀자며.”
“마음이 바뀌었어요. 제가 진짜 진짜 맛있는 아인슈페너 파는 데 알거든요. 제 친구가 하는 카펜데요. 도착하기 두어 시간 전에만 얘기하면 가게도 다 비워 줄걸요? 처음 창업할 때 저한테 신세를 많이 져 가지고요.”
신이 나서 말을 이어 가는 윤신의 몸이 돌연 앞으로 쑥 기울어졌다. 자신이 비틀거린 게 아니라, 세헌이 느닷없이 팔목을 잡고 능숙하게 품으로 좀 더 당겨 안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하체가 맞닿으면서 성기의 윤곽이 느껴졌다. 그게 흥분되는지 세헌이 남색 니트 안으로 손의 위치를 옮겨 뾰족하게 솟은 유두를 지분거렸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면서 자극하다가, 이내 살갗으로 유륜을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자연히 윤신의 마른 몸이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흐응…….”
“가게에서 섹스해도 돼?”
나지막하게 숨을 몰아쉬던 윤신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물들었다.
“거, 거기서요?”
“싫어?”
단호하게 제 마음을 규정짓는 그 때문에 윤신의 마음도 입도 바빠졌다. 진심으로 싫은 건 아니지만 곤란한 건 사실이다. 그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서 해명을 이어 갔다.
“업장에 CCTV가 아마 있지 않을까요. 최악의 경우 저의 사회적인 입지가 매우 훼손되겠죠. 운 나쁘면 기사도 몇 개 날 거고. 친구의 사업장에서 동성 애인과 성관계한 유명 로펌 변호사 A씨…….”
“싫다는 거네.”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알겠어요. 좋아요. 해요.”
“친구 가게에서?”
순간 반문하는 세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짓궂었다. 그걸 보다 보니 뭔가 말린 게 아닌가 싶어졌다.
“잠깐만요. 혹시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
“늦어. 그 반사 속도로 뭘 할 수 있는데. 나무늘보랑 마라톤 하기?”
얄밉다는 양 그의 단단한 팔뚝을 탁, 내려친 윤신이 긴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제 얼굴의 피부를 세헌의 뺨과 귓가에 부드럽게 비볐다.
그 바람에 아직 니트 안에 있는 딱딱한 손도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유두를 아프리만치 꼬집었다가, 곧 간지러울 정도로 약하게 마찰했다. 노련하게 애무하는 손길에 윤신은 점점 몸이 달떴다. 세헌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으면서 탄성을 내뱉었다.
“으응, 흐읏.”
“도윤신.”
“응? 거기 좀 더, 부드럽게…… 꼬집으면 아파요.”
“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일을 미뤄 본 적 없어. 그래서 감이 잘 안 오는데.”
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외출해도 정말 지장 없어?’ 정도이리라.
본인은 차치하고라도 제게 할 일이 있다는 게 다소 신경 쓰였던 것 같았다. 왠지 냉정하고 오만한 성격의 세헌과 어울리지 않는 소소한 걱정이라 윤신은 신음하던 와중 웃음이 터졌다. 슬며시 그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눈높이를 맞춰 시선을 맞교환했다.
하나씩, 타인을 향한 감정과 걱정 따위들을 배워 가는 강세헌 때문에 매일매일 가슴이 벅찼다. 그가 이토록 다정하다는 걸 대체 누가 믿어 줄까.
매끄러운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척, 짚은 윤신이 보드랍고 촉촉한 윗입술을 깨물듯이 빨았다. 그러자 그게 대답이라는 걸 인지한 세헌이 바로 호응하며 윤신의 아랫입술에 똑같은 행위를 돌려주었다.
콧잔등을 문지른 두 사람이 여린 호흡을 뱉어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실 때까지는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하나 중간에 마치 식물들의 잎이 마디마디 어긋나 제멋대로 자라듯 모든 게 틀어졌다.
오래전 대학 시절 사귀었던 윤신의 여자 친구 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세헌과 교제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친구가 예전 이야기를 꺼내며 지금은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이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개중 한 명은 심지어 그 가게 주인인 친구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돼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는 듯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터라 이런 께름칙한 소식을 듣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윤신이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부디 가 달라고 몇 번이나 눈치를 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세헌은 딱히 화내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승강기에서 먼저 내린 그가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윤신은 빠르게 그를 뒤따라 와서 옷자락을 붙잡았다.
“수석님.”
현관 앞에 선 세헌이 힐끗 돌아보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재빨리 항변했다.
“제가 걔네 둘이 사귀는 게 질투가 나서 화를 낸 게 아니고요. 좀 역겹잖아요. 친구끼리 같은 여자 사귀는 거요.”
세헌은 매우 순순히 동의했다.
“역하지.”
“네. 그런 거였죠. 그래서 그런 거지. 얼굴도 자세하게 기억 안 나요.”
“혹시 잤어? 그럼 진짜 역겹고.”
정확히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늘 갈망했던 일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윤신은 이상하게, 세헌의 질투심을 조금 자극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주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뭉뚱그렸다.
“그런 것도 말해야 돼요? 그런 부분은 서로 지켜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윤신이 어물쩍 넘기려고 하자, 그의 얼굴에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냉랭해진 안색을 인지한 윤신은 달아오른 뺨을 겨우 추스르며 세헌의 옷자락을 가볍게 쥐었다.
“선배, 있잖아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라며.”
“네. 그게…….”
“난 더 쌓였어. 매우 고맙군. 앞으로도 종종 부탁해, 도윤신 변호사.”
비꼬며 현관을 연 세헌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신은 눈치껏 최대한 조용히 그를 쫓았다. 그러고는 드레스 룸에 다다라 재킷을 벗어 던진 그의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사실 아무리 서로에게 솔직한 게 연인 관계에서 좋다고 해도, 이런 문제는 예민한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싫을 수 있었다. 최소한 자신은 그랬다.
끊임없이 시기하게 될 것 같아서 윤신은 그에게 과거에 관한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누군가 가슴 애틋하게 좋아진 건 처음이어도, 연애까지 첫 번째란 법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처음인 편이 더 말이 안 돼서, 앞으로도 영영 묻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 순간 세헌의 기분이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의 질투가 기쁘기도 했다. 그의 옆구리 사이에 손을 끼워 넣은 윤신이 천천히 위로 위치를 옮겨 갔다. 그의 옷을 대신 벗겨 주듯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세헌은 귀찮다는 기색 반, 어쩔 수 없겠다는 기색 반의 나른한 손길로 윤신을 밀어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윤신의 말 때문에 그의 행동이 그림처럼 정지했다.
“질투하세요?”
세헌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어지는 답엔 허탈함이 조금 묻어 있었다.
“기분 엿 같아.”
그의 입으로 직접 긍정의 말을 듣자 윤신이 눈살을 지그시 찌푸렸다. 추측하고, 짐작하는 것보다 단 한 마디가 주는 확신의 힘은 막강했다.
“선배, 나 섹스하고 싶어. 지금 당장.”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등 뒤에서 탄탄한 몸을 안고 있던 윤신이 세헌의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는 상의를 벗겼다. 그뿐만 아니었다.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려 그것도 풀어내고, 지퍼를 내렸다.
위험하고 아득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외설적인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기다란 손가락을 벌어진 틈새 안으로 쑥 넣었다. 곧 드로어즈 위로 세헌의 성기를 가볍게 쥐락펴락했다. 몇 번 달싹이는 것으로도 그의 것은 금세 발기해 딱딱해졌다.
“지금 나 건드리는 거 안 좋은데.”
“전 수석님 거친 것도 좋아해요.”
“후회할걸. 난 너랑 거칠게 섹스한 적이 없거든.”
“그럼 오늘 얼마나 거칠게 하시는지 알려 주세요.”
“도윤신.”
“빨리요.”
하아, 숨을 몰아쉰 그는 그때까지 일단 두고 보던 걸 멈추고, 짜증스럽게 돌아섰다.
타악! 윤신의 두 팔을 엑스 자로 겹친 세헌이 마른 몸을 진열대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윽……!”
신음한 윤신이 반사적으로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어 세헌을 보았다. 뒤에 서 있어서 몰랐는데 표정이 꽤나 차가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로 형언할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버티자, 그가 좀 더 전신을 압박했다. 여전히 한쪽 팔로 두 손목을 쥐고, 무릎으로 동선을 통제했다. 뒤이어 윤신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아! 아흑!”
그대로 바닥에 마른 몸을 내동댕이치듯 밀어붙인 그가 고른 치아로 시계를 풀어 던졌다.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린 윤신이 시선을 둘 곳을 찾는 동안,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난폭하게 짚고 그대로 힘주어 눌렀다.
“흣, 아파, 그렇게 누르지 마요.”
“넌 대체 왜 애정에 안달을 내지? 다 보여 주면 감당도 못 할 거잖아.”
“선배, 읏, 윽!”
“한 번만 더 나한테 네 전 여자 친구 얘길 듣게 하면 동창들한테 전부 전화를 돌려서 나한테 박혀 사정하는 네 신음 소릴 듣게 할 거야. 알아들어?”
확, 어깨를 놓아준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윤신의 옷가지들을 거침없이 벗겨 나갔다. 순식간에 나신으로 만들어 놓고 가랑이 사이를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벌렸다. 밝은 빛 아래에서 수치감을 느낀 윤신이 그의 몸에 손을 얹었다.
“방으로 가면 안 돼요?”
그러나 세헌은 자비가 없었다. 탁, 손을 치워 내곤 더욱 보란 듯이 다리 사이를 벌리더니 그대로 사타구니 틈새에 손을 넣었다. 연이어 아무런 예고도, 윤활제도 없이 손가락을 밀부에 쿡 찔러 넣었다.
“허억! 헉! 윽!”
깜짝 놀란 윤신이 몸을 바르작거려도 소용없었다. 억지로 내부를 넓혀 제 것이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손짓이 몹시 거칠었다. 몸을 들썩이며 안아 달라고 졸라 봤지만 그는 가뿐히 무시하고 제 영역을 확장하는 데 몰두할 따름이었다.
“흐응, 읏! 아흑! 변호사님, 아! 거기 싫! 응!”
콱콱, 찔러 넣는 손가락 개수가 급속도로 늘었다. 그는 늘 찔러 주었던 스팟들을 완벽하게 비껴가며 집요하게 공간을 열어 갔다. 벌름거리는 내벽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세헌의 긴 손가락을 감쌌다. 그런데도 피스톤 운동 하듯 들락날락하는 그의 움직임은 그저 사납고 난폭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여느 때에 못 미치는 만큼 내부를 벌린 뒤, 손가락을 쑥 빼냈다.
이윽고 그가 드로어즈 안에서 터질 듯이 팽창한 성기를 속옷 위로 끄집어냈다. 툭, 튀어나온 그의 것이 핏줄이 죄다 서 매우 성이 나 꺼떡거렸다.
윤신이 언제 봐도 감당 안 될 크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는 사이, 세헌이 바닥에 떨어진 재킷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이내 치아로 난폭하게 포장을 까더니 딱딱하게 곤두선 성기 위에 돌돌 말아 끼웠다.
뒤이어 그는 윤신의 입구에 제 것의 선단을 맞췄다.
눈앞이 아찔해진 윤신이 황망한 어투로 물었다.
“이, 이대로?”
“더 필요해?”
“커서 다 들어올까요? 뭐라도 바르면…….”
“훨씬 매끄럽게 잘 들어가겠지. 그런데 난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선…….”
“너 오늘 두 다리로 걸어서 이 집에서 못 나갈 줄 알아.”
차마 대답하지 못한 윤신이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든 순간, 세헌이 성기를 퍽! 찔러 넣었다. 있는 힘껏 쳐올린 허리의 힘 때문에 뿌리까지 틀어박혔다.
“아흑……!”
윤신은 쾌감인지 고통인지 인지할 수도 없는 아찔한 감각으로 자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