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주 늦은 밤이었다.
어두운 기운이 회의실 통유리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창밖의 으슥한 풍경을 한 번, 현재 시간을 한 번 골고루 확인한 세헌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퇴근하고, 내일 봅시다.”
가장 상석의 그가 이만 회의를 파할 것을 선언했다. 곧이어 윤신이 있는 문간의 말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부에서 빠져나갔다.
세헌이 자취를 감춘 뒤, 이곳저곳에서 줄줄이 줄곧 참아 왔던 앓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회사법 팀원 몇을 포함해 세헌이 각 부서에서 필요한 인재들을 끌어와 만든 단발성 특별 팀 변호사들이었다. 최근 영진건설 매수 자문 건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다른 변호사들은 팀장인 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라야 지친 기색으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목덜미를 주무르거나, 눈을 깜빡이거나 하며 하나둘씩 공간을 벗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일 마지막 순번이자 이 팀의 막내인 윤신이 끝까지 남아 그들 모두에게 인사했다. 혼자가 된 후 짐들을 정리하고, 불을 껐다.
윤신은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불이 환히 켜진 세헌의 방을 힐끗 살폈다. 그는 일어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소매를 걷은 셔츠가 몸의 윤곽을 잘 드러내, 퍽 육감적이었다. 자연히 그의 탄탄한 나신을 떠올리게 되자 멋쩍어졌다. 내심 부끄러워하다, 불현듯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1시가 훌쩍 넘은 야심한 시간이었다. 누구와 연락하는 건지 궁금했다.
‘사적으로 통화하는 건 아닐 거고…….’
호기심이 생긴 윤신이 제 인기척을 알아 달라는 양 한쪽 팔을 뻗어 흔들었다. 그러나 몇 번 이쪽을 봐 달라고 손짓해도 그는 모로 몸을 튼 채 통화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회의 내내 눈길 하나 안 주더니 끝까지 저러시네.’
때론 섭섭할 정도로 선을 지키는 세헌 때문에 윤신은 이러다 애정 결핍 비슷한 질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을 땐 세헌도 확실히 경계를 푼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제겐 동료에게 흔히 보일 수 있는 개미 눈물만 한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도리어 유독 까다롭게 굴었다.
물론 강세헌 같은 사람이 까마득한 후배에게 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이상해 보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고 싶은 마음에 자꾸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원하게 된다.
나를 좀 봐 줬으면.
굶주린 듯이 달려들어서 키스해 줬으면.
여기서 내 옷을 벗기고 책상 위에 눕혀서…….
“와, 나 왜 이래. 사춘기도 아니고 적당히 좀 하자.”
강제로 생각을 매조지고 얼굴을 붉힌 윤신은 세헌에게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뒤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건너편의 제 방으로 들어가려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사무실 안의 세헌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길쭉한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윤신이 스스로를 가리키자 맞으니 들어오라는 듯 문으로 손끝이 겨냥한 표적을 옮겨 갔다.
그의 손짓 하나에도 설레는 기분이 금세 차올랐다. 아랫입술을 감쳐문 윤신은 자료들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세헌의 집무실에 입성했다. 마침 통화를 마친 모양인지 그가 휴대폰을 의자에 던지듯이 내려놓곤,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왼편으로 기울여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윤신을 지그시 주시했다.
“뭐 하나, 지금.”
“네? 들어오라고 하셔서, 들어왔는데요. 다시 나갈까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양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이내 픽 웃었다.
“망부석처럼 거기 서서 뭐 하냐고. 이리 와야지.”
가라앉은 음성이 듣기 좋았다. 나직한 주파수를 곱씹던 윤신은 뒤늦게 헛기침하곤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문을 잠그고, 창문 블라인드까지 내린 후에 세헌 쪽으로 황급히 뛰어가 그에게 풀썩 안겨 들었다. 그는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이 제 하중을 전부 받아 냈다. 이윽고 자료들을 빼앗듯이 가져가 책상 위에 올려 두더니 그대로 마른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윤신은 세헌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를 안은 채로 얼굴의 보드라운 살갗을 비비다가, 곧이어 치아가 나기 시작해 잇몸이 간지러운 아이처럼 그의 셔츠 위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에 화답하듯 세헌이 큼지막한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덥석 쥐곤 입술에 몇 번 짧게 입 맞췄다.
“왜 또 어리광이야.”
“누가 부리게 만드시네요.”
“넌 걸핏하면 내 탓 하더라?”
“수석님이 저 좋아하는 거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어요.”
윤신의 동그란 머리를 잡고 관자놀이와 머리카락 위 여기저기에 키스하던 그가 멈칫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빼서 매끄러운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어찌나 종일 눈길 하나 안 주시던지. 우리 사귀는 것도 까먹을 뻔했다고요.”
“너도 자격증 땄어? 하던 대로 해.”
윤신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끈한 피부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눈, 날렵한 코, 열기를 품고 있는 입술까지 홀린 듯이 훑다가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속성으로 딸 수도 있으니까 평소에 잘하시라는 거예요.”
“뭐가 불만인데.”
“너무 절 방치하시니까요. 사내 연애의 묘미가 뭡니까. 일하다가 눈 마주치면 웃고, 몰래 따로 나와서 커피도 마시고, 어쩌다 외근 같이 나가면…….”
“카섹스하고?”
“완전 좋아요.”
“펌 안에서도 하자고 그러겠다?”
“정 원하신다면…….”
바로 긍정해 놓고 난감해진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번복했다.
“여러 가지 중 그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선 저를 쳐다도 안 보잖아요. 아까 회의 때도 눈 마주치려고 제가 몇 번이나 훔쳐본 줄은 아세요?”
“당연히 알지.”
윤신은 발끈했다.
“알고도 그러신 거예요? 더 열받아요.”
“사내 연애는 속이는 사람만 있고, 속는 사람은 없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인 건 아나?”
“남자끼린데 누가 그런 오핼 한다고…… 수석님이 뭐 잘못 드셨나 보다 하겠죠.”
기가 막힌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공식적인 창구로 불만을 제기해 오는 윤신에게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자주 쳐다봐 달라는 거지. 접수했어. 넌 이제 매 회의마다 내 질문 받게 될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자신 없어?”
선물받은 뽀뽀를 돌려주듯, 아이들 입맞춤처럼 요란하게 소리 내 키스한 그가 윤신의 몸을 좀 더 가까이 안았다. 그러고는 길고 마른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애무하던 손을 천천히 등으로 끌어 내렸다. 쭉 고속도로 타듯 내려가다 허리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세헌은 서로에게 틈새라는 게 없도록 만들 작정인지 닿은 자리들을 최대한 밀착했다. 필연적으로 가슴팍과 팔·다리, 아랫도리까지 함께 문질러졌다.
이 에로틱한 접촉에 화답하듯 윤신도 두 팔로 세헌의 딱딱한 견갑골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옷 위로 그의 성기가 닿자, 낮게 신음했다.
“하아…… 좋아요. 더 해 주세요.”
점점 더 가빠지는 호흡을 도저히 추스를 수가 없었다. 세헌이 노골적으로 성기를 부딪치며 자극해 대는 통에 곧 설 것 같았다. 겨우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의 어깨 너머를 내다봤다. 멀리 보이는 마천루들에도 이곳 사옥처럼 불빛들이 곳곳에 켜져 있었다.
“수석님 거 만지고 싶어요.”
다시 얼굴을 그의 어깻죽지로 끌어 내린 윤신이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발기하기 전인데도 성기의 부피가 꽤 돼서 앞섶을 지그시 누르면 그 부분이 도드라졌다. 세헌의 것을 만지듯이 천 위를 더듬거리다가, 바지 버클을 풀기 위해 손바닥의 위치를 조금 옮겼다. 그 순간, 세헌의 휴대폰이 다시 ‘드르륵.’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소리를 들은 그가 움직이기 위해 상반신을 조금 비틀었다. 윤신은 떨어지기 싫다는 양 그에게 매달려 귓가와 목 주변에 정신없이 키스했다. 그러나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세헌은 웬일로 꽤 완고했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이번엔 아주 두 몸을 떼어 냈다.
얼떨떨해진 윤신의 동그란 눈이 그를 정통으로 향했다.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네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어.”
“지금 저 더듬는 것보다 중요한 얘기예요?”
“도이경 관장이 아까 회의 들어가기 전에 인편으로 위임장을 보냈어.”
일순 마른침을 삼킨 윤신은 뒷걸음질 쳤다. 뒤이어 접견용 소파에 제 몸을 기대 의탁했다.
며칠 전 두 사람이 따로 아주 은밀하게 만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주선자는 자신인데도 그들이 어디쯤에서 접촉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혀 몰랐다. 그날 이후 세헌도, 누나도 결과에 대해 딱히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중 누구라도 먼저 입을 떼 주길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만나 본 뒤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더니, 그녀의 선택은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인 모양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그녀가 느꼈을 강한 안도가 은은한 향기처럼 제게까지 전달됐다.
“누나가 수집한 증거도요?”
“응. 원본이 전부 왔어. 본인이 사본을 가지고 있겠대.”
“조금 전에 통화하시던 거는…….”
“도 관장 비서실장.”
“지금 그 메시지는?”
“너희 누나. 너한테 얘길 전해 달래. 본인이 하기가 힘든가 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쉽지가 않았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될 텐데, 그건 아주 길고 고단한 과정일 터였다.
누나와 만났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과 뱉어 냈던 음성 따위들을 곱씹어 보던 윤신이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세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계속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걸 깨달았다. 그 덕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누나 만났을 때요. 그동안 제 얘긴 다 귓등으로 흘리더니 변호사님 이름만 듣고도 막 설레 하는 거예요.”
“앞으로 나 이상의 카드를 절대 못 만날 걸 알기 때문이겠지.”
“네. 사실 관점에 따라 이혼 별거 아니잖아요. 저도 조정, 소송 다 관여해 봐서 알지만 그냥 단순히 인연 끊겨서 다시 남남 되는 것뿐인데요. 누가 죽어 나간 것도 아니고, 무슨 대형 재난도 아니고, 제가 대리해도 상관이 없어야 하는 건데……. 이상하게 이건 복잡하네요.”
“이제부터 난 이 이혼을 공론화해서 시끄럽게 만들 생각이야. 수한그룹 언론 동원력을 고려하면 논리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그러니 물리적 피해를 막는 데 주안점을 두는 거지. 도이경 씨 본인 말론 증거들이 확실하다니까, 버티기만 하면 재판은 이길 수 있어. 다만 그 버티기가 쉽진 않을 거야. 저쪽도 온갖 공세를 할 거거든.”
계속 일반인들의 눈과 관심이 누나한테 가 있어야, 매형이 허튼짓은 못 할 거란 계산이었다. 다치게 해서 의사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든지, 또는 억압해서 억지로 뭔가를 포기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물리적 통제를 막겠다는 것이다.
“네, 잘 알아요. 누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차마 뒷말을 채 하지 못한 윤신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누나가 자신의 도움을 거절했다는 건, 곧 그녀의 소송이 다른 사람들의 남남 되는 과정과는 조금 다를 것이란 뜻이었다. 아마 훨씬 더 험난할 여정이 될 터다. 그걸 세헌에게 떠맡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듯한 기분이 들어 면목이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 힐끗 그의 눈치를 살피자, 세헌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꾸욱, 도장 찍듯이 윤신의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굳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는 다 아는 듯했다.
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세헌은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 뚜벅뚜벅 옷걸이 쪽으로 걸어가 재킷과 코트를 챙기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것들을 전부 걸쳐 입었다. 연달아 서류 가방까지 전부 챙겨 들고는 아직까지 아연히 그의 모습만 관찰하고 있는 윤신 쪽으로 다가왔다.
“난 이제 퇴근할 건데. 넌 어떡할래. 야근?”
“이미 우리 야근하고 있는데요.”
“더 할 거냐고. 그럼 난 먼저 가고.”
“저도 갈래요. 회의 복기는 집에 가서 하면 돼요.”
윤신이 자신도 지금 퇴근하겠다는 양 허리를 곧추세워 섰다. 곧이어 그의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도로 챙겨 들었다. 한데 세헌이 덧붙이는 말 때문에, 방을 나서 제 짐들을 챙겨 오려다가 멈칫했다.
“그렇게 하든지. 내일 봐.”
급기야 그는 황망해하는 자신을 두고 그냥 나가 버리려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진 윤신은 급한 대로 세헌의 소매 부분을 덥석 쥐었다. 팔을 잡고 끌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왜.”
“내일 보자고요? 그 인사는 다른 변호사님들한테도 똑같이 하신 인사잖아요.”
“정 안 내키면 모레 볼까?”
으득, 이를 간 윤신은 붙잡고 있던 세헌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잡은 것도, 놓은 것도 모두 제 쪽에서 했다. 매우 황당해하던 세헌이 눈썹을 꿈틀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아파.”
“아파? 지금 여기서 그 말이 나오면 안 되죠. 내 차 타고 갈래? 아니면 네 차로 갈까? 가는 길에 커피 한잔할래? 헤어지기 싫다. 오늘 집에 와서 잘래? 같이 있고 싶어. 어떻게 이 중 단 하나를 안 합니까?”
“나 바쁜 사람이야.”
“난 한가해요? 왜 매번 내가 말하게 하는 건데요.”
“조금만 기다리면 이렇게 성질 급한 네가 하니까. 넌 그게 다 하고 싶은가 보지?”
덤덤히 말하는 세헌의 얼굴에는 뚜렷한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윤신은 순간 그의 미려한 안면 너머로 짓궂은 기색을 감지했다. 그제야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
“지옥에나 가세요.”
“뭐부터 할까. 우선순위 꼽아 봐.”
“그 순서로 해 주게요? 퍽이나.”
“그 반대부터 하게.”
그래도 안 하겠다고는 안 한다. 난감한 숨을 삼키곤 결국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손에 든 서류로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수석님은 확실히 변태예요. 누가 데려갈지 걱정됩니다.”
“다행히 결혼 비관론자야.”
이럴 땐 ‘너랑 할 거니까 상관없다.’ 정도의 답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네, 훌륭하세요. 한 여자분의 인생을 구하셨네요.”
“내 차로 가자.”
“엎드려 절받기 사양합니다.”
“너 오늘 내 침대에서 자. 자는 얼굴 좀 보게.”
“남 자는 얼굴 봐서 뭐 하시게요.”
“뭐 하긴. 무슨 꿈 꾸나, 잠은 안 설치고 잘 자나. 가만히 보는 거지.”
돌연 세헌이 그러자 윤신이 쿨럭, 헛기침했다. 항상 그가 직접 말로 간지러운 말들을 속삭여 주길 바랐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어떤 것들 말이다.
한데 그런 이야기보다 가만히 잠든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그 대수롭지 않은 말이 훨씬 더 큰 애정 표현으로 들렸다. 세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당장 반응할 말이 생각 안 났다.
아무 말 못 하고 계속 그만 쳐다보고 있자니, 세헌 쪽에서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기꺼이 기울여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춰 주곤, 양쪽 뺨에도 똑같이 했다. 입술은 떨어져 나갔으나, 아직 그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상대방의 코끝에서 흩어졌다.
“도윤신, 삐졌어? 귀여워서 그냥 놀린 거야.”
이렇게 쉽게 풀려 주면 안 된다는 걸 이성은 알았다. 하나 감정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윤신은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고, 기분이 들떴다.
이쯤에선 인정해야 했다. 세헌은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돌돌 말았다가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굴려 가며 마음껏 요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조금도 싫지 않다는 것이다. 초장부터 진 기분이었다. 그 패배감도 싫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윤신이 그의 부드러운 코트 자락을 쥐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 얼른 집에 가요.”
이윽고 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침실 내부의 욕실에서 씻고 나온 윤신은 너른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세헌은 이 안에 없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먼저 씻고 서재에 잠시 가 있었다. 정확히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회의 때문에 미뤄 두었던, 누나가 보낸 데이터 내용들을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걸 함께 볼 엄두가 안 나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서재의 문을 매우 신중하게 노크하자 안에서 작게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인 듯했다.
끼익. 문을 열자마자 책상 앞쪽에 허리를 숙인 채로 서서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는 세헌이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문 안쪽을 다시 노크하니, 그제야 힐끗 고개를 들어 자신이 선 방향을 봐 주었다.
“먼저 자라니까. 너 내일 오전부터 회의 있잖아.”
“같이 안 자요?”
“난 좀 더 봐야 될 것 같다. 금방 갈게.”
“그럼 그냥 저도 같이 봐도 돼요? 누나가 보낸 자료 보시는 거죠.”
아주 짧게 생각에 잠겨 있던 세헌이 손을 까딱했다. 빠르게 다가간 윤신이 그의 뒤에서 탄탄한 몸을 끌어안고 시선을 같은 곳으로 옮겼다. 저장 장치 안에 든 자료 파일들은 영상, 사진, 문서를 막론하고 다양했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훑어본 것 같았다. 트랙패드를 움직여 의료 기록들을 눈대중으로 살피는 세헌의 얼굴이 퍽 진지했다.
윤신은 그의 등에 달라붙어 있다가 왼편으로 고개를 쏙 내밀어 물었다.
“대충 보셨어요? 어때요?”
“음, 어떠하냐……. 올해 들은 중 제일 어려운 질문이네.”
“법정에서 쓸 만하냐는 거였어요.”
“그런 관점이라면 아주 훌륭해. 아니, 완벽해. 날짜를 보니 꽤 오래 차곡차곡 준비한 모양인데. 이건 질 수가 없는 게임이야, 법적으로는.”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세헌의 안색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원래 크게 표정 변화가 없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너머로 비치는 감정들이 있었다. 지금은 분명 부정적인 기운이 풍겼다. 그의 생각을 조금쯤은 알 것 같았던 윤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누나도 변호사들 암암리에 만나 보니 그랬다 그러더라고요. 담당 변호사는 매형의 치부를 카드로 쥐고 협상하면서 이걸 법정이나 세상에 공개할지 말지를 판단하게 되겠죠. 결국 수한의 적이 되는 거니까 다들 부담 느낄 만도 해요.”
그는 동의한다는 듯 덤덤한 어투로 차분히 대꾸했다.
“안됐지만 난 대기업 이기는 변호사를 한 번도 못 봤어.”
“쉽게 이길 수가 없는 구조니까요. 그래도 선밴 하실 수 있잖아요.”
“법정 안에선 우리가 이긴다고 치자. 법정 밖에서는? 이 싸움은 법원에서 안 끝나. 그래서 아무 로펌도 맡아 주질 않는 거야. 너도 알잖아.”
“…….”
“앞으로 너희 누나는 사회적으로 누더기가 될 거야. 여론전이 시작되면 수한이 가만히 있을 리가. 분명히 제일 예민한 문제들을 건드리겠지. 가령,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훼손한다거나, 앞길을 전부 틀어막는다거나.”
세헌이 버텨야 한다고 말했던 건 아마 이런 법정 밖의 공세였으리라.
할 말을 잃은 윤신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사안들을 떠올려 봤다. 사실 혼자서 자료들을 준비하며 자신도 시뮬레이션을 해 봤다. 수한의 객식구로 10년이니, 정확하겐 아니라도 대충은 매형과 사돈댁의 방식을 알았다. 만에 하나 송사에선 이긴대도 그 뒤가 더 큰 걱정이었다. 예상안을 짜 볼수록, 누나는 만신창이가 됐다.
그가 말하는 존엄성을 훼손하는 건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매일 붙어 다니는 비서실장과의 관계부터 물고 늘어질 터다. 그녀가 아내로서 정숙하지 못했다고 여론을 이끌 테고, 수한 홀딩스 안주인으로서 내조가 부족했다고 비난할 게 뻔했다. 또한 두 아이들을 양육할 때 어머니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몰아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 본인과 동생인 자신의 앞길을 막고 고립시킨다거나, 심한 경우 돌아가신 아버지가 맡으셨던 사건들은 어쩌면 본인의 영달을 위한 것들로 탈바꿈될지 몰랐다.
간단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이혼 소송은 수개월에서 몇 년까지 걸렸다. 이 경우는 판이 크니 평균보다 서너 배는 더 소요될 거라고 봐야 했다. 친권과 양육권이 껴 있으니 절차가 가변적일 테고, 운 나쁘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었다. 그동안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가늠도 안 갔다.
“그리고 너.”
“저요?”
“넌 어떻게 될까…… 감이 안 온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 널 끼고 갈지. 빼고 갈지.”
윤신이 대답 대신 힘주어 그를 안자, 세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두 사람이 마주 본 상태로 마른 몸을 품에 안아 주면서 물기가 조금 남아 있는 젖은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변호사가 도울 수 있는 건 재판까지야. 그동안은 어떻게 버틴다 해도, 송사 과정이 다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지고 네 누나가 맞닥뜨릴 현실이 남아. 난 네 누나의 커리어와 너희 아버지 명예가 몇 년 뒤 매우 실추되어 있을 게 훤히 그려져. 돈을 벌 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빚지고는 못 살거든.”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가 계속 싸워야 한다는 의미 같았다. 윤신도 100퍼센트 동의했다. 증거가 확실할수록 재판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 터다. 그 과정에서 누나의 삶은 지금보다 더한 만신창이가 될지도 몰랐다.
지금 세헌이 그걸 모르지 않는 제게 굳이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아마 마음을 다잡으라는 경고일 터다.
심란해진 윤신은 다른 데 관심이라도 돌려 보기 위해 그의 뒤로 손을 뻗어 영상을 켰다. 세헌의 어깨 너머 슬며시 재생되는 화면 속에 집기들이 마구 부서지는 장면과 그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에 담기도 싫은 순간들이 모두 기록이 되어 눈 바로 앞에서 생동감 있게 이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삼킨 윤신이 바로 화면을 껐다.
“저기…….”
“이건 내가 마저 볼 테니까 넌 일단 가서 자.”
“같이 자요. 저도 선배 자는 얼굴 볼래요.”
살짝 질린 안색을 가만히 주시하던 세헌이 짐짓 차가운 어투로 충고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난 협상에 필요하다면 이런 영상들을 언론에도 기꺼이 공개할 거야. 아마추어처럼 굴지 마.”
“그러지 말고 같이 자요. 어차피 마라톤일 텐데 내일 봐도 되잖아요. 애초에 매형 쪽에서 답변서를 보내야 뭐라도 시작할 수 있고요.”
“도윤신.”
“내일 하자고.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벌써 1시예요.”
그가 냉정하게 조언해도 윤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세헌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차마 계속 단호하게 굴지 못하고 뒤로 손을 뻗어 노트북을 ‘탁.’ 닫아 버렸다. 그러고는 어깨를 미세하게 떨고 있는 윤신을 힘껏 끌어안았다. 겨우 대꾸하는 음성 속에 안쓰러워하는 한숨이 묻어났다.
“하, 그래. 같이 자자.”
늘씬한 몸을 번쩍 들어 올린 그는 서재를 빠져나갔다. 윤신은 두 다리를 그의 단단한 허리에 감싸고 목도 힘주어 안았다. 침실에 다다랐을 즈음,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까 지난번에 여기 있는 콘돔 다 썼어요. 제가 집에 다녀올까요?”
풀썩, 윤신을 내려놓고 베개에 머리를 누여 준 그가 이마를 슬쩍 건드렸다. 뒤이어 옆자리에 누워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그냥 자.”
서로의 다리와 팔이 슬그머니 얽혀 들었다. 비스듬히 누운 윤신이 그의 얼굴을 괜히 더듬거렸다. 민감한 손끝의 위를 세헌의 입술이 야릇하게 지분거렸다. 팍팍한 현실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짜릿한 감각이 두 사람을 감쌌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진 윤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헌이 바로 다시 끌어 제 위로 쓰러뜨리는 바람에 허사였다.
“누워. 정신 사나워.”
확, 당긴 몸이 그의 판판한 상체에 부딪쳤다. 윤신은 꼼지락거리면서 세헌의 전신 위에 완전히 올라탔다. 그를 깔듯 엎드린 채로 턱에 코끝을 문질렀다. 그러자 이번엔 잘 참던 세헌 쪽에서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고 그대로 반 바퀴를 굴러 윤신의 위에 올라탔다.
눈가에 붉은 기운은 착각이 아니라면 탐욕의 발현이었다.
고민하던 윤신이 한쪽 다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그대로 허벅지 부분으로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문질렀다. 꿈틀거리는 성기는 이미 발기하기 시작한 듯했다. 순식간에 곤두서서 위로 고개를 추켜드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선 거예요? 커졌어요.”
“안 잘 거야?”
“해도 돼요.”
“얼굴에 내 기분 지금 매우 좆같아요, 하고 쓰고 있는 자식이랑 뭘 하라고. 너 지금 머릿속에 누나밖에 없잖아. 재워 줄 때 자. 네 가랑이 사이에 기어이 커진 좆 꽂게 만들지 말고.”
사실 끝까지 할 생각으로 오긴 했는데, 조금 전 본 영상 때문인지 죄책감이 조금 일긴 했다. 그렇다고 세헌과 함께하는 아까운 시간을 그냥 허비하기도 싫었다. 그와 자신은 워낙 골고루 바빠서 느긋하게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가 빨아 드릴까요? 사정하는 거 보고 싶어요. 잠이 잘 올 것 같은데…….”
“부추기면 하고 싶어. 그만 까불어.”
“수석님은 숨소리, 신음 소리 다 야해서 들으면 저도 흥분돼요.”
헛웃음을 터트리는 세헌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어낸 윤신이 다시 자세를 반전시켰다. 서로의 위치가 또 전복됐다. 윤신은 그의 잠옷 바지 위에 슬쩍 손을 얹고 그대로 옷을 끌어 내렸다. 뒤이어 속옷 위로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잡았다.
스윽, 보드라운 살갗이 뿌리부터 선단까지를 쓰는 순간 그가 목을 슬쩍 뒤로 젖혔다. 까다로운 세헌이 제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것 같아서, 윤신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착실하게 그의 성기 기둥을 주무르던 윤신은 핏줄들이 선 자리들을 섬세한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이윽고 위아래로 몇 번 더 쓸어 주다가 제 고개를 숙였다. 연이어 촉촉한 입술로 요도 위에 입 맞추곤 그대로 선단부터 입에 물었다.
그 순간, 세헌이 저속한 욕지거리와 함께 신음했다.
“읏, 씨발.”
귓전에 꽂히는 그의 탄성은 언제 들어도 짜릿했다. 윤신은 제 것도 함께 곤두서는 걸 느끼면서 점점 더 입 깊숙한 안으로 발기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축축하고 여린 점막들이 길고 커다란 그의 것을 삼켰다. 윤신은 혀를 길게 내어 표피를 핥고, 손으로 매만졌던 도드라진 핏줄 위도 함께 빨았다. 그 덕분에 더 커질 수도 없을 것 같던 성기가 꺼떡거리며 더욱 강직되고, 벅차졌다. 약동하는 성기의 촉감이 뜨끈한 열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입 속에서 향기처럼 퍼져 나갔다.
다만 크기가 버거워서 뿌리까지 전부 담지는 못했다. 그의 성기는 중간까지만 윤신의 입에 박혀 깔짝거렸다. 그게 안달이 난 건지 갑자기 세헌이 윤신의 부드러운 머리채를 거칠게 붙들었다. 그러고는 음낭까지 처박을 기세로 허리를 확, 쳐올렸다.
“읍! 으읍!”
목구멍을 찔러 오는 압박감 때문에, 윤신은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그러나 제 안에서 그를 분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앞뒤로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는 그의 것을 최대한 받아들였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선명했으나, 그런 만큼 짜릿한 희열도 느껴졌다. 세헌의 것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제 성기도 뻣뻣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헌의 것과 윤신의 입 안 점막은 끊임없이 마찰했다. 그는 더 난폭하게 추삽질했다. 급기야 아예 몸을 일으켜서 앉더니, 윤신의 머리를 제 것 위에 힘껏 짓눌렀다.
“크읍! 욱, 윽!”
그는 목젖에 닿을 듯이 삽입했다가, 뒤로 슬쩍 빼냈다가, 다시 처박기를 반복했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매우 선정적이었다. 자연히 윤신의 하얀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세헌의 안색도 흥분감으로 달아오르긴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밀부 속에서 인터코스를 감행하듯 거칠게 허리 짓 하던 세헌은 윤신의 허리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대로 하의를 허벅지까지 벗겨 내고는 따뜻한 입 안에 몇 번이고 욱여넣었던 성기를 빼냈다.
“하아, 하…….”
얼굴이 새빨개진 윤신의 입가에서 투명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그걸 보고 미간을 흠씬 구긴 그가 마른 몸을 돌려 엎드리게 만들었다. 뒤이어 허벅지를 좁히더니, 성기를 그 안에 푹 찔러 넣었다.
“으응, 응. 수석님. 저 할 것 같아요.”
“기다려.”
그의 미간에 괴로워하는 기색이 진하게 새겨졌다. 흠씬 인상을 쓴 세헌은 앞으로 손을 뻗어 윤신의 것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면서 제 것을 허벅지 사이에 처넣었다 빼낼 때마다 박자를 맞춰 만져 주었다. 함께 달아올라 한계까지 치달은 두 사람의 것이 빳빳하게 굳었다.
허리를 움직여 좁은 공간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세헌의 귀두와 윤신의 회음 부위, 그리고 음낭이 함께 마찰했다. 그는 윤신의 매끈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이 마주치게 만들더니 게걸스럽게 키스했다. 서로의 턱에 타액들이 죄다 묻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퍽, 퍽!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성기가 함께 자극이 된 윤신은 순간 까무러칠 듯 정신이 흐릿해졌다. 곧이어 둔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세헌도 그걸 모르지 않는지 점점 더 속도를 내서 난폭하게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 두 사람이 프리컴을 쏟아 내며 정액을 팟, 터트렸다.
“아아! 아! 아흑!”
“윽. 젠장!”
꽈악. 제 것의 선단을 윤신의 음낭에 비비자, 뿌연 액체들이 그 위로 튀었다. 그것들은 윤신의 허벅지를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거나, 시트에 뚝뚝 떨어졌다. 이미 윤신의 것에서도 정액이 흐르고 있어서 이곳에서 잠들긴 튼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정액을 쏟아 낸 그들은 함께 젖은 침대 위로 무너졌다. 하의만 어설프게 벗은 채로 마주 본 두 사람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기가 스몄다.
관능적인 호흡들이 점차 여상한 숨소리로 변해 갔다.
먼저 입을 연 건 윤신이었다.
“어느 쪽이 더 짜릿해요? 입 안? 다리 사이? 꼬시고 싶을 때 참고하게요.”
은근하게 그의 옷자락을 건드리며 묻자, 세헌이 저속한 눈빛이 아로새겨진 유려한 얼굴을 기울였다. 귓불을 콱, 아플 정도로 깨물고는 속삭이듯 농염한 음성을 토해 냈다.
“네 구멍이 내 좆 못 빠져나가게 조일 때 제일 짜릿해.”
“그런데도 진짜 안 해요?”
“섹스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야. 지금은 좀 자는 편이 머리 비우는 덴 더 도움될 거야. 그러니까 그만 들쑤시고 이리 와. 여기 젖어서 안 되겠어. 다른 방에서 자자.”
먼저 일어나 옷을 추스르곤 두 팔을 활짝 벌린 그가 윤신을 향해 턱짓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세헌을 관찰하던 윤신은 이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 * *
서류 봉투를 야무지게 든 윤신은 승강기에서 내렸다. 의견서를 보내기 전 혹시나 싶어 세헌에게 한 번 확인을 받으려고 했는데, 마침 그가 지금 VVIP 접견실에 있다는 얘길 들었다.
곧 다음 미팅 시간이라 어차피 집무실로 돌아와야 할 테니 그쪽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오며 점검을 받고 바로 송달실로 가는 게 그의 동선에 효율적일 듯해 그곳으로 향했다.
한데 사옥 제일 위층인 VVIP 접견실 주변이 매우 적막했다. 접견 중이라면 방 밖에 고객의 비서라든가, 경호원, 혹은 도국의 직원들 한두 명 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윤신이 접견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내부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벌써 끝났나.’
다급히 승강기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길이 엇갈린 모양인지 계기판을 보아도 이곳에서 내려가는 기계는 자신이 타고 왔던 것밖에 없었다. 허탕인가 싶어 아쉬운 대로 도로 내려가려는데 중간층에서 별안간 승강기가 만선이 된 모양인지 기계가 한참을 기다려도 올라올 기미가 안 보였다.
서류 봉투를 힐끗 본 윤신은 이내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한 걸음씩 내딛는 와중, 아래쪽에서 언성이 높아진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미화부 직원들이 청소 중에 갈등을 빚은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로펌 직원들은 웬만해선 계단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자꾸 음성을 곱씹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 변 여기 두자고 한 거야?”
이 또렷한 발음과 귀에 선명한 목소리는 분명히 송 변호사의 것이었다.
“제정신이야. 감정 결과서라도 제출해야 믿겠어?”
그리고 대답하는 이 목소리는 착각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세헌의 것이었으니까. 늘 사이 원만하던 두 사람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생긴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게 날이 바짝 서 있는 미희도, 여느 때보다 더욱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세헌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고민하던 윤신은 차가운 벽에 바짝 기대어 자료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일단 숨을 최대한 죽인 뒤, 매우 조용히 까치발을 들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도로 빠져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아주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였다.
“세헌아, 도이경 씨 시댁 식구들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가정 법원에 이미 조정 신청했대. 재산 분할 때문에 얄팍하게 10년 딱 채우고 걸었다는 거야. 수한에서 괘씸하게 여긴단 소리 들려. 당연하지. 나 같아도 그러겠다. 나도 자세한 건 확인을 해 봐야 알겠지만…….”
그녀의 말을 세헌이 중간에서 확 잘라 냈다.
“도이경 관장은 무조건 재판 갈 거야. 조정은 단순히 전치주의 때문이지 처음부터 소송 전제였어. 아, 따로 확인할 거 없어.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보면 돼.”
“뭐라고? 이걸 왜 너한테 물어봐?”
“도 관장 대리인이 나니까.”
미희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꺼내는 말엔 정말 기가 막힌 듯 신경질이 가득했다. 윤신으로선 이렇게 히스테릭한 그녀의 음성은 처음 들은 듯했다.
“대리를 네가 했다고? 이혼 소송은 샅바 싸움이야. 내 공격을 상대편 샅바 붙들고 하는 거라고! 결국은 같이 무너져! 이런 일을 나랑 상의도 없이…… 이렇게 큰 사고를 치면 어떡해! 내 귀에 들어왔으니 다른 파트너들 아는 거 시간문제야. 어쩔 거야!”
“난 이미 결정했어. 위임장도 받았고. 언제부터 내 사건에 토 달았어? 내 클라이언트는 내가 정해. 그게 이 펌에 들어올 때 내가 건 유일한 조건이었어. 잊은 건 아니지?”
“강세헌, 이건 달라. 이 부부 이혼을 왜 네가 수임해? 꼭 맡아야 한다면 유 대표였어야지. 우린 국내에서 수한하고 제일 많이 거래하는 펌 중 하나야. 넌 그렇다 쳐. 다른 파트너들은, 새파란 어쏘들은! 네 밑에 직원만 몇백인 줄은 알아? 올해 우리 펌 수한 전 계열사랑 걸린 건 예상 청구액만 도합 기백억대야. 수틀리면 우리 다 죽어!”
“말했잖아. 안 되겠다 싶으면 펌은 내 꼬리를 자르면 된다고. 불명예 퇴직은 각오했어.”
거기까지 듣고 윤신은 움찔했다. 이미 한 차례 어떤 갈등과 그 해결 방안들이 그들 사이에 오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헌은 본인의 자리를 걸고 모종의 딜을 했던 것 같았다.
조금 전 그녀의 말을 필연적으로 곱씹게 됐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 변 여기 두자고 한 거야?〉
‘혹시 나 때문에 뭘 건 건가.’
손을 달싹이던 윤신은 서류를 힘주어 쥐었다. 종이들이 바스락거렸다. 그 덕분에 아래에서 마찰음을 들었을까 염려돼 식은땀이 다 났다.
천만다행히 저쪽에선 저마다 소리를 높이고 있어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세헌아, 갑자기 막 디케라도 된 기분이야? 그래? 커리어 무너져도 상관없어?”
“안 무너져. 이 소송을 하면 내가 여태 한 건들이 전부 패배로 바뀌어?”
“변호사는 서비스직이야. 네가 너를 파는 직업이라고. 이건 네 평판에 관한 문제야. 너 똑똑한 거 알아. 잘난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아. 하지만 넌 개인이고, 수한은 대기업이야. 너 회사법 전문인데 거기서 입김 넣기 시작하면 무기한 일 뚝 떨어질 거라고. 안 무섭니?”
“그래. 내 일이네. 내가 알아서 할게. 엿 되든 좆 되든. 만족해?”
“이게 어떻게 네 일이야! 넌 도국 얼굴이야! 이래서 내가 진작 도윤신 내보내자고 했잖아. 네가 책임지겠다고 걔 감싸고 돌 때부터 완강하게 얘길 했어야 했는데……! 내보내야 할 때 안 내보내니까 일이 이 꼬락서니가 되는 거 아냐! 네 자리 걸고 걔 사수한 결과가 이거야?”
아니나 다를까.
짐작이 확신이 되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송 변이 너 계속 데리고 있겠다고 답 줬어. 고마운 분이지.〉
누나의 말은 달랐다. 토씨 하나 안 까먹고 똑똑하게 기억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창구였을 뿐이고, 사실은 세헌 쪽에서 나섰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제게 말해 주지 않아서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으나 요사이의 강세헌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윤신은 몸을 떨면서 최대한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는 상관없이 아래층의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미희에 비해 한참 여유롭던 세헌도 조금 격해진 모양인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좋은 머리 갖고 태어났으면 기억하는 데도 좀 써. 도윤신 품자고 한 건 송 변이야.”
“그땐! 그땐 달랐지. 도 관장이 이럴 줄은 몰랐어.”
“원래 상황은 바뀌어. 그러게 모르는 사이로 살면 좋았을 걸 애초에 그 새낄 우리 펌에 왜 받았어. 왜 내 밑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서 사람 꼴을 이렇게 되게 만들어. 난 지금 내가 제일 하찮게 보던 방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어. 나야말로 엿 같아! 이해가 돼? 매 순간 수천 번씩 이게 잘하는 짓인가 고민해. 그런데 결과는 늘 같아. 그러니 어쩌겠어.”
“너 무슨 연애편지 쓰니? 감상적이셔서 나까지 눈물 나네. 너 소녀 다 됐다?”
그는 빈정거림에 빈정거림으로 응수했다.
“빌어먹을, 좆 까.”
“글쎄 그게 왜 너냐고! 그냥 여태까지처럼 나쁜 새끼로, 너만 아는 쓰레기로 살아!”
“이걸 해 줄 게 나쁜 놈인 나밖에 없으니까!”
미희도 차마 할 말을 잃은 듯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세헌이 퍽 건조하지만 분명한 어투로 이어 붙였다.
“사람 좋다고 소문 자자한 송 변도, 이런 순간이 오니까 은사님 아들, 딸, 모른 척하자고 하잖아. 당장 내가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수한이랑 연계된 회사들로부터 일 죄다 끊길까 봐 그게 걱정돼서 발도 담그지 말자며 물러나고 있다고.”
“내가 나빠? 내 인생, 내 회사. 내가 지키는 게 나쁘니? 그게 늘 우리가 하던 일이야! 그래서 네 말 같잖게 들리니까 위선 떨지 마.”
“알아. 선밴 정상이야. 아무도 비난 안 할 거야. 도 교수님도, 아마 안 하실 거야. 섭섭해하시기야 하겠지만 잠깐일 거라고 생각해.”
“그럼 너도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해! 파트너는 이익만 분배받는 사람들이 아냐. 손실이 나면 그것도 메꿔야 해. 네 역할에 책임을 지라고.”
“도윤신 걔랑 같이 그 강에 갔었어.”
‘그 강?’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윤신의 속눈썹이 물이 끓듯 파르르 떨렸다. 지난해 12월 31일에 세헌과 함께 다녀왔던 그 쓸쓸했던 강변을 말하는 것 같았다. 추억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갔던 강이라곤 그 황량한 곳이 다였다.
따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강이 어떤 곳인지 미희는 알고 있는 듯했다. 조금 전의 불편한 침묵과 달리 한결 가라앉은 고요가 흘렀다. 그게 위층으로 흘러오는 공기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말을 덧붙이는 세헌의 음성도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잠겼다.
“그 강에 다녀왔을 때. 도윤신이 돌아오는 길에 백합을 한 송이 주더라. 죽은 사람 기리러 갈 땐 그런 걸 사 가야 하는 거래. 돌이켜 보니까 난 한 번도 꽃 같은 걸 들고 갔던 적이 없더라고. 그래서 그 새벽에 돌아가서 그걸 강에 뿌려 주고 왔어. 난 단지 그 꽃값을 하려는 거야. 비싸서 그렇지.”
“그날 웬 꽃 타령을 하나 했더니……. 세헌아. 감상적인 척하지 마. 너랑 안 어울려. 그냥 모른 척해. 너 곤란해진 사람들 못 본 척하는 거 잘하잖아. 응? 이번에도 눈 딱 감고!”
“사직서 집무실에 가져다 놓을 테니 부담되면 바로 알아서 처리해. 걔만 여기 둬. 도윤신은 아직 풋내기라 울타리 필요해. 나 이 펌에서 10년 넘게 개처럼 굴렀어. 그 정도 요구할 자격 있다.”
“강세헌! 제발.”
“내 할 말 끝났으니 먼저 내려갈게.”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는 낮은 굽의 구두 소리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어지는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매우 짜증스러웠다. 그러다가 그것마저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 아주 육중한 무게의 침묵이 대화를 엿들은 도둑고양이의 위를 짓눌렸다. 윤신은 딱딱한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다가, 이내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강세헌은 강하고, 똑똑하고, 늘 이기기만 하니까 제게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도와주기만 한다면 문제들이 대체로 해결될 줄 알았다. 하나 자신이 짐작한 것보다 세헌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제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난 지금 내가 제일 하찮게 보던 방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어.〉
미희는 아마 다른 사람을 선의로 도와주는 그런 일을 떠올렸겠지만, 사실 그의 그 말은 그런 범주를 초월한 본질적인 담론이었다. 윤신은 그 ‘하찮게 보던 방식’이 자신을 좋아하는 일을 뜻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감정을 평생 동안 인간의 약점이라고 생각했을 그는, 혼란과 갈등 끝에 결국 그걸 스스로 손에 쥐었다.
그래야 했을 세헌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솔직히 고민해 본 적 없었다. 매 순간 제 마음이, 제 입장이 중요했을 뿐이다.
왜 더 좋아해 주지 않느냐고, 표현해 주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던 모든 순간이 후회됐다.
그는 이미 여태까지의 삶을 모두 부정해 가며, 몸부림쳐 자신을 아껴 주고 있었는데.
마음이 짠해 울컥한 윤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