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20화 (21/51)

20.

벽걸이형 TV 화면에서 뉴스가 송출됐다.

수한 홀딩스 유정원 대표 이사가 비핵심적인 사업들의 선제적인 구조 조정을 시작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그룹 가치의 개선을 도모하고,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긍정적 목적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좀 더 회사를 제멋대로 흔들 것임을 알리는 일종의 실력 행사였다. 기업의 핵심 권력이 아버지 대에서 둘째 아들인 그에게로 이양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세헌이 턱을 가만히 쓸었다. 그러다 꼭지가 바뀌자마자 몸을 일으켜 책상 방향으로 이동했다. 윤신이 간략하게 누나의 상황을 정리해 둔 아크릴 판 위를 주시하는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정확한 목적이 아이들 때문인가. 아니면 돈 때문인가. 둘 다라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외출을 하고 돌아온 윤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뺨과 코끝이 조금 벌게져 있었다. 윤신은 세헌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조용히 살폈다. 그러자 그가 찬 공기를 제 뺨에 바르겠다는 듯 보드라운 볼을 비비곤 고개를 기울여 입 맞췄다.

“객식구 여기 두고 어딜 싸돌아다녀.”

“빨래 맡기러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시트에 정액 좀 묻어 있을 수도 있지. 유난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댁에 주말 제외하고 매일 와 주는 분이라면서요. 저랑 또 마주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도우미 아주머니께 보여요.”

“못 할 건 뭐야? 정 창피하면 내가 자위했다 그래.”

“수석님이 제 방에서 자위하는 건 더 이상하죠. 말이 안 통해. 됐고요. 내려간 김에 1층 카페 들러서 커피 좀 사 왔어요. 드세요.”

내미는 커피를 대강 내려 두라는 듯 턱짓한 그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시선은 아크릴 칠판에 고정한 채 넌지시 물었다.

“넌 어디까지 알아. 일단 정보를 좀 합쳐 보자.”

“말씀드렸듯이 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여기 있는 건 누나가 말해 준 게 아니라 제가 따로 조사해 둔 거예요.”

“도 관장이 아아아주 많은 걸 양보해서 협의나 조정으로 끝날 가능성은? 그럼 일이 훨씬 쉽겠는데. 뭐, 큰 기대 하고 물어보는 건 아니니까 편히 대답해도 돼.”

“제가 누날 그나마 잘 아는 편인데, 한번 결정한 이상 후진은 안 할걸요.”

“내 생각도 그래. 우린 재판까지 가는 걸 전제로 일에 착수해야겠군.”

탁. 세헌이 제 옆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쳤다. 윤신은 눈치껏 알아듣고 외투를 벗은 뒤,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손이 윤신의 맨투맨 안으로 불쑥 침입했다.

그는 늘씬한 허리를 휘감아 싸듯 끌어안고 천천히 제 반대편의 옆구리를 문질렀다. 그뿐만 아니었다. 슬그머니 올라온 손이 유두를 건드렸다.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튼 순간, 마른 몸이 조금 앞으로 숙어졌다.

“흐읏, 읏.”

이 반응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세헌의 손짓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곤두선 유두 위를 엄지로 지분거리다가 판판한 가슴을 움켜쥐듯이 손으로 감쌌다. 본능적으로 둔부를 들썩인 윤신이 겨우 손을 아래로 뻗어 세헌의 탄탄한 팔뚝을 턱, 짚었다.

“하아……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런 걸 일일이 물어볼 정도로 순진하신 줄은 몰랐네. 어제 나랑 떡친 사람은 침실에서 자나? 그럼 넌 누구야.”

윤신은 발끈했다.

“저를 막 더듬으시니까 그렇죠. 전 수석님이 좋고, 당연히 절 만지시면 선다고요.”

“잘 알고 있네. 세우려고 한 거겠지. 왜 물어본 거야? 순 내숭.”

“와…… 어떻게 단 몇 마디로 사람을 열받게 만들 수가 있어요? 말할 때 빈정거리지 않으면 입에 막 가시 돋치고 그래요? 이거 놔요.”

연신 기막혀하던 윤신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벌게진 손등 위를 일부러 보여 주며 아크릴 칠판을 가리켰다.

“설계 전에 짚고 넘어갈 게 몇 가지 있어. 너도 잘 알겠지만 이혼 소송은 판례가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해.”

“민법 이혼 관련 규정은 해석이 워낙 추상적이니까요. 열심히 보고는 있어요.”

이혼 소송은 판사들이 어떻게 법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그러니 판례를 단순히 열심히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엮어 볼 여지가 있는 건 가능하면 전부 다 봐야 했다. 그리고 재판부의 성향을 고려해서 공략해야 했다.

이미 나와 있는 판례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게 최선이란 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 방대한 분량을 감당하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할지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하나 염두에 둬야 할 건 판사도, 법원도 절대 우리 편이 아닐 거라는 거야. 도리어 수한의 편이라고 가정해야 해. 판사는 판결 내리고 옷 벗은 다음 수한 법무 팀에 들어가면 그만이야. 충분히 해 볼 만한 딜이지.”

법원이 옳은 일의 편만 되어 주어도 좋겠지만, 가끔은 그러지 못한 일이 생겼다. 정의의 수호자도 존재하나, 다른 걸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 또한 얼마든지 존재했다. 획일적인 정의감을 기대해선 안 됐다. 특히 대기업의 영향력이 미치는 소송의 경우에는 법관들이 암암리에 해당 그룹의 편이 되어 주기도 해서 초장부터 경계해야 했다.

아마 세헌은 여태까지 법원이 제 암묵적 아군이었던 법정에만 섰을 것이다. 하지만 윤신은 달랐다. 그가 염려하는 게 뭔지는 알지만,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도 그 정돈 압니다. 아니까 겁나는 거고, 그래도 포기는 안 할 거고요.”

“그럼 됐어. 변칙을 쓸 땐 쓰더라도 시작은 일반론으로 하자고. 솔직히 넌 그 집 진짜 사정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한번 물어볼게.”

칠판 하단부에서 자석을 하나 떼어 낸 세헌이 윤신의 두 조카 사진을 매형의 사진 아래에 부착했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아이들?”

“애들이 아빠를 좋아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는 표정을 지은 윤신이 궁리 끝에 답을 내렸다.

“그거야 당연히…… 좋아는 하죠. 그래도 제가 보기에 애착 관계는 누나랑 훨씬 더 있어요. 아직 어린애들이라서 어느 쪽 부모를 선택하는 게 더 유리할지는 계산 못 할 거고요.”

“부모님이 헤어진다고 하면 엄마 편을 들어 줄까? 아빠보단 엄마랑 살겠다고 떼쓰고 그래 줄 것 같냐는 거야.”

그거까진 잘 확신이 안 섰다. 원래 아이들은 부모님이랑 떨어져 사는 일 자체를 상상도 못 했다. 윤신도 엄마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안 계셔서 몰랐을 뿐이지, 같이 살다가 돌아가셨다면 감당이 안 되었을 것 같았다. 어린 자녀들은 누구의 편도 되어 주지 않을 공산이 컸다.

게다가 당장 엄마의 편을 들어 준다고 해도, 변칙적인 아이들의 특성상 언제 마음을 바꿔 아빠 편을 들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걔들은 이혼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데……. 애들 진술이 별 의미 없을 거예요. 그래도 일단 제가 한번 만나서 아빠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떠볼까요? 안 그래도 못 본 지 좀 되긴 했거든요.”

“그렇게 해. 사실 확인서를 받자는 게 아니고, 너희 누나 편으로 만들라는 거야. 앞으로 주기적으로 만나서 애들 좀 꼬셔. 너무 노골적으로 하면 유 대표 쪽에서 너랑 아이들 못 만나게 할 테니까 수위 조절 잘해서. 뭐, 못 만나게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아. 삼촌이 조카들 만날 권리를 빼앗아 간 거니까 카드로 쓸모가 있겠지.”

알겠다는 양 눈짓을 보낸 윤신이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번에 이제야말로 만날 약속을 잡자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집 앞에서 세헌을 만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 뒤로 시간이 꽤 흘러 해가 바뀌었던 차였다. 자신이 많이 바쁘다고 생각한 건지 누나도 뭐라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헌이 책상에 굴러다니는 펜을 하나 들어 아크릴 판을 다시 척 가리켰다.

“자, 도윤신 변호사. 잘 정리해 뒀네. 쟁점은 총 네 가지야. 이혼 사유, 위자료, 재산 분할, 양육권. 순차적으로 시작하자고. 하나. 이혼 사유. 법정에서 이 결혼을 강제로 깰 이유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거야. 법이 정한 여섯 가지. 민법 840조 1호부터. 10초 내로. 시작.”

[누나, 곧 아버지 기일인데 아이들이랑 같이 사]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윤신이 얼떨결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매우 빠르게 대꾸했다.

“정조 의무 불성실, 유기, 생사 불분명, 배우자 또는 직계 존속의 부당한 대우, 본인 직계 존속의 배우자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 그리고 여타, 중대한 사유입니다.”

순식간에 답하곤 나머지를 마저 적어서 보냈다.

[당에 가자. 이번 주 중에 괜찮은 시간 알려 주면 내가 맞출게. 응답이 늦어서 미안.]

“그중 해당되는 건?”

머리에 떠오르는 건 있었으나, 바로 대답하는 게 왠지 꺼려졌다. 굳이 입에 담기가 싫었던 탓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은 힘겹게 응답했다.

“폭행요. 목 졸린 흔적은 제가 직접 봤어요. 실은 어느 정도 힘을 줘야 그만한 상처가 생기는지 전에 제 목에 실험도 해 봤는데. 보통 힘 가지곤 그런 상처 생기지도 않더라고요.”

경악한 기색이 세헌의 얼굴에 미세하게 서렸다. 그러다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 지극정성이네. 아주 대단해.”

“비꼬시는 거예요?”

“알아는 듣는군.”

그를 흘긴 윤신이 혼잣말하듯 나지막하게 음성 주파수를 뱉어 냈다.

“확실히 자격증 있다니까.”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소리예요. 어, 그리고 또…….”

“외도. 부정한 행위에 해당돼.”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도대체 남의 뒷조사를 얼마나 해 대는…….”

의아해하던 윤신은 제 옆 사람이 다름 아닌 강세헌이라는 걸 되새기곤 이내 말을 아꼈다. 그들이 비스듬히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두 개의 시선이 스파크 튀듯 마주쳤다.

실시간으로 비난을 듣던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지그시 제 입술을 보다가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 거리가 매우 가까워 민망해진 윤신이 조금씩 식어 가고 있는 커피를 세헌의 예쁜 손에 쥐여 주곤, 제 것도 들어서 한 모금을 마셨다. 그제야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하던 얘기 계속해 봐.”

“아무튼, 당사자가 증거를 모으는 중이라고 했어요. 누난 저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에요. 사유는 어느 정도는 해결될 거예요. 뒷받침해 줄 증거의 공신력이 문제죠.”

“너희 누나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동선이 제한적이야. 남편이 다른 여자랑 성관계한 증거까진 아마 없을 거야. 혹시 모르니 이건 내가 준비하지.”

“그런 사적인 증거도 구할 수 있어요?”

황당해서 언성을 높이자, 세헌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변호사가 못 구하는 게 어디 있어.”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찾아요? 혹시 주변 사람을 사는 거예요? 도우미나, 호텔 직원…….”

“그럴 때도 있고. 그게 위험 부담이 클 땐 다른 루트를 쓸 때도 있어. 제일 간단하고 쉬운 건 이거야.”

“뭔데요?”

“너 쓰레기봉투는 사람들의 삶을 증명한다는 거 알아? 호텔 객실에서 나온 소각 쓰레기 중 열 개를 까면 적어도 아홉 개엔 콘돔이, 일곱 개엔 누군가의 지문 묻은 명함이 나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찰나간 고민하던 윤신은 애써 머리를 비웠다. 세헌이 조사원들을 통해 진행하는 일들이 대충 어떤 수위의 작업들인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놀랍긴 해도 새삼스럽진 않았다. 이 소송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게 아니라 더 추잡한 짓도 기꺼이 할 용의가 있었다.

“누나한테도 물어는 보는 게 낫겠죠?”

“그렇게 해.”

의아해진 윤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요? 수석님이 직접 안 만나 보세요?”

“난 아직 그 사건 수임하지 않았어. 요청도 받은 적 없고. 네가 중개인이니까 먼저 가서 의견을 타진하고 증거 목록 받아 와. 기왕 시작한 이상 반드시 버틸 거라는 확답도 같이 받아 오도록 해.”

이런 큰 사이즈의 이혼 소송은 아무리 짧아도 1·2년, 길면 수년도 걸렸다. 그동안 담당 변호사는 필요할 때마다 인력을 제공할 뿐이고, 매 시간 매달려 있지 못했다. 결국은 당사자의 지구력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명령을 곱씹으며 입술을 감쳐문 윤신은 턱을 아래로 슬쩍 내려 세헌의 입술을 핥았다. 실은 집에 왔더니 그가 있는 풍경이 좋아서 아까부터 계속 이러고 싶었다.

쪽, 가볍게 살갗이 닿는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분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이윽고 체온을 거두어 가듯 입술을 떼어 냈을 때는 거의 동시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세헌을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는 확실히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듯했다. 하나 걱정되는 감정은 결심과는 별개였다. 그 수심에 잠긴 눈가를 엄지로 지그시 눌러 준 그가 덧붙였다.

“싸우던 와중 가볍게 오간 폭언은 해당 안 돼. 판례가 인정을 안 해 주거든. 반드시 극심해야 돼. 반복됐다면 더 유리하고. 목 졸린 흔적이 있었다고 하니까 감금당했다거나, 혹은 네 누나 앞에서 유 대표가 부모님을 모욕했거나. 다 좋아.”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서 그간 남편이 아내에게 개새끼였다는 증거들을 찾아 그걸 법정에서 증명해야 한다는 게 불행하게 느껴졌다. 결혼이 뭔가 싶었다.

“쓸 만한 증거가 얼마나 될까요? 본가 의료원 사람들 다 누나 편 아닐 거예요.”

진지하게 묻는 물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병원 면담 기록이 있어. 다행히 두 명의 의사한테 배우자의 폭행으로 인한 상처라고 일관적인 진술을 늘 했더군. 이 기록으론 형사 고소도 가능해. 가특법까지 가중되면 훨씬 유리해질 거고. 지구대 신고 기록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찾아보니 없었어. 아무튼 의료 기록을 우리가 뽑으면 증거 능력이 없으니 누나한테 직접 받아 와.”

열심히 들으면서 그의 지시들을 외우던 윤신이 돌연 모든 사소한 움직임을 멈췄다. 세헌이 비밀스러운 일들에 대한 정보를 이미 쥐고 있는 건 퍽 익숙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누나의 사정을 지나치리만치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도 까맣게 몰랐던 사실까지 말이다. 뭔가 이상했다.

“대체 이 일 언제부터 아셨던 거예요? 누나 만난 뒤에 알게 되신 거 아니죠.”

그는 이 날카로운 질문을 바로 무시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의료 기록은 뒤집힐 염려가 있어. 의사를 매수하면 끝나.”

“그건 건드리면 안 되는 기록이에요. 어떻게 그런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수한은 병원도 소유하고 있으니까 훨씬 쉽지. 재벌 사모님이 와서 협박했다는 고해 성사 한마디면 다들 의심하기 시작할 테니 신빙성이 떨어져. 상처 사진이나, 폭행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있는지 물어봐. 전혀 없다면,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야.”

유리해지기 위해 끔찍한 일을 당하기라도 하라는 소린가.

머리로는 이 모든 게 증거 싸움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가까운 사람의 일이다 보니 마음이 뇌리를 안 따라 줬다. 언젠가 봤던 여린 목 위의 상처를 떠올린 윤신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아, 수석님 이런 인간이었죠.”

“이기기 싫어? 가뜩이나 압도적으로 열세인데 뭐가 있어야 이길 거 아냐. 여기까지 와서도 착한 척, 순진한 척 할 거면 이 판에서 빠져. 너 같은 애들 방해돼.”

“꼭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정떨어져요.”

“이런 날 원했던 건 너야. 다시 붙여.”

억울하게 그를 보던 윤신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제 쪽이 졌음을 표명했다. 옳고 그름의 범주를 벗어나 그의 말이 해답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아서였다. 세헌도 자신이 그냥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애먼 그에게 투덜거리고 있다는 걸 잘 아는 것 같았다. 불쾌해하지 않고 받아 주고 있는 게 그 사실을 입증했다.

“변태 성욕, 자녀 학대, 애정 상실, 성격 불일치, 의처증, 주벽. 전부 판례로 사례 인정됐던데. 그런 것도 있으면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야. 판례가 인정을 해 줬다면 작은 흠집도 도움 돼. 모조리 긁어 와. 없으면 만들어 와. 단순히 시간이 지나 사랑이 식은 애정 상실은 빼고. 그건 인정 안 해 주니까.”

“증인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요. 도우미 아주머니라든가, 정원사라든가. 갤러리 직원.”

“누가 됐든 너희 누나 편 돼 주지 않을 거야. 타진은 해 봐야 하니 리스트는 받아 놔.”

역시, 두 사람의 생각이 같았다. 부부의 일을 증언해 줄 사람이야 있겠지만 그들 또한 자신들의 아군은 아닐 터였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께 연락드려 볼게요.”

“그럼 이제 쟁점 둘, 위자료. 쟁점 셋, 재산 분할.”

“둘 다 돈이군요.”

“이쪽은 내가 쭉 읽어 봤는데 네가 적어 둔 정보들이 다 틀려. 재설계할 거야.”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세헌이 일회용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크릴 칠판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하얀색 마카를 들고 윤신이 정리해 둔 수치 부분들에 전부 사선을 그었다. 뒤를 돌아보자, 윤신이 굳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10년 조금 못 살았으니 재산 분할은 인정 안 될 거고, 송사에 이기게 되면 위자료는 받을 거고. 잘 계산했는데. 뭐가 틀려요?”

“그러니까 10년 꼬박 채울 때까지 살게 해야지. 날짜 잘 계산해서 그 이후로 조정 신청을 미룰 거야. 10년 이상부턴 50 대 50인데 이걸 왜 포기해. 이거 때문에 네 매형이 얼른 이혼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 거 아냐. 아마 네 누나도 버틸 생각일 거야. 우린 의뢰인이 고생한 만큼 돈으로 되돌려 주자고.”

관점을 바꾸니 누나가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 집에서 버티는 게 이해됐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오직 아이들을 사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던 듯했다. 도리어 가능한 한 많은 걸 빼앗는 행위로 배신을 갚아 주려는 것이다.

흔들어 놓을 거라던 결연한 말은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은 세헌보다도 그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넌 이 결혼 생활의 관찰자야.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 그걸 토대로 내가 주관적으로 싸울 거니까.”

“뭘 다 자기가 한대. 그럼 전 이제부터 뭐 할까요. 저를 좀 쓰세요.”

“넌 일단 누날 만나 보고, 받을 거 받고. 그런 다음 나와의 자리를 만들어, 은밀하게. 다행히 네가 우리 펌에 들어와 있으니 만남을 눈치챈대도 날 수임했다고는 바로 생각 못 할 거야. 시간을 좀 벌 수 있겠지.”

“네. 매형은 강세헌 변호사가 이런 머저리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죠.”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세헌이 윤신의 앞으로 도로 다가왔다. 심란해하는 얼굴 위에 입술을 문지르듯이 입 맞춰 주곤, 마른 손에 들린 컵을 대신 내려놓았다. 뒤이어 안기라는 양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에게 골치 아픈 일들을 늘려 주게 돼 미안한 마음에 주저하던 윤신이 너른 품에 와락 안겼다. 자연스럽게 세헌의 커다란 손이 동그란 뒤통수부터 목덜미, 어깻죽지를 이어 등허리까지 차분히 내려갔다.

토닥거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윤신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세헌에게 더 파고들었다. 머리 위에서 그가 입 맞추는 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네가 할 일 있어. 이게 진짜 급한 거야.”

“뭐, 뭔데요?”

“맞선 상대를 차.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감히 이걸 내 입으로 말하게 만들어?”

“헉, 맞다. 만나기로 한 것만 기억하고 왜였는지는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잠시만요.”

확, 세헌의 가슴팍을 밀어낸 윤신이 휴대폰을 급하게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창을 다시 열어서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내 맞선 얘기야. 아무튼 연락 줘.]

문자를 보낸 윤신이 세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칭찬해 달라는 것 같기도 했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몰랐다.

이에 화답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묵묵히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가 부드러운 뺨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천천히, 입술이 내려왔다. 처음엔 아슬아슬하게 부딪쳤던 살갗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농밀하게 밀착했다. 촉촉한 혀가 윤신의 입술 사이 좁은 틈새를 가르고 불쑥 침입했다. 젖은 살덩이가 입 안에서 질척하게 엮이는 촉감이 짜릿했다.

이윽고 세헌이 윤신의 마른 몸 위로 제 몸을 그림자 지듯 기울였다. 사타구니 사이에 제 앞섶을 문지르면서 입 안의 여린 살결들을 탐닉해 나갔다. 자연히 서로의 것이 발기했다.

“흐응…….”

아찔한 감각으로 신음하던 윤신은 눈을 감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 *

짙은 쪽빛의 겨울 바다와 닮은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수은처럼 반짝이는 별들과 희끄무레한 달이 빈 공간을 깁듯 빛으로 어둠 구석구석을 덧대어 놓았다. 그 빛들이 고요하게 잠든 땅 위를 은은하게 비췄다.

인적 없는 놀이터 그네 위에 앉아, 아득한 지평선을 응시하듯 아름다운 밤풍경을 올려다보던 윤신은 제 턱쯤에 닿는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눈길은 바로 맞은편 낮은 철봉에 긴 다리를 뻗고 앉은 세헌의 것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윤신이 애꿎은 모래들을 발로 슬쩍 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앞뒤로 몸을 움직이자, 잠시 멈춰 있던 그네가 다시 운동했다.

끼긱. 끼긱. 낡은 쇳소리가 고요하던 사위에 울려 퍼졌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세헌이 이내 모양 좋은 입술을 벌렸다.

“재밌으십니까.”

“수석님은 지루하세요?”

“새벽에 무슨 그네를 탄다고. 진짜 별 뻘 짓을 다 시킨다.”

“데이트라고 생각하세요. 저랑 단둘이 놀고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영 싫진 않았던지, 그가 꽤 적극적으로 응수했다.

“그 데이트를 실내에서 할 순 없었던 건가? 날씨라는 제반 상황은 왜 네 고려 사항이 못 된 거지? 그네가 그렇게 좋으면 비싼 걸로 하나 사 줄게. 집에 달자.”

“그냥 어디까지 받아 주나. 시험해 보려고 그런 거예요.”

“뭐? 시험?”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구 하는 거 쳐다보기만 하는 이런 쓸데없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실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진짜 해 주네. 저 되게 좋아하시나 보다. 그렇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윤신은 세헌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한데 그는 그저 제 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새벽에 잠들기 직전이던 그를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고 조를 때도, 산책하다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놀이터에 들렀다 가겠다고 할 때도, 그리고 이곳에 그저 앉아서 그네를 타는 자신을 지켜보라고 했을 때도 그는 제 말에 다 따라 주었다.

차라리 같이 그네라도 타면 모를까. 시간의 가치를 아는 세헌의 성향상 극도로 귀찮아할 것 같은 모든 일들을 기꺼이 했다. 그래서 자꾸 더 바라게 됐다.

제 촉촉한 아랫입술을 씹던 윤신이 은근한 음성으로 떠보듯 말을 덧붙였다.

“자기도 탈래?”

그러나 그의 관용은 여기까지였던 것 같았다.

“아직 주니어 딱지도 못 뗀 게 얻다 반말이야.”

이게 아니다 싶어진 윤신은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수석님도 와서 타 보세요.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난 싫어. 추워. 테스트 끝났으면 들어가자.”

“전 더 탈래요. 정 싫으시면 저 여기 혼자 두고 먼저 들어가세요.”

가늘게 뜬 눈으로 윤신을 보던 그는 한숨을 몰아쉬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척 꼈다. 기왕 말린 김에 더 지켜봐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예상 그대로 세헌은 그네를 타는 윤신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새카만 하늘에도, 그 위를 수놓은 별에도, 서늘하지만 상쾌한 공기에도 한 번쯤은 일시적으로 관심을 줄 만도 했는데 그저 제 연인만을 지켜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행위가 꽤 즐거워 보였다. 이를 입증하듯 조용히 눈길만 던지던 그의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세헌이 있는 방향에 가로등이 위치해 있었다. 그 덕분에 윤신이 있는 위치에서 그의 자리가 가장 잘 보였다. 집요한 시선과 산뜻한 미소를 동시에 감지한 윤신이 천천히 속도를 낮췄다. 몇 번 움직이나 싶던 그네가 운동을 멈췄다.

기구가 빚어낸 날카로운 소음들이 사라지자, 다시 바람 소리만이 흘렀다. 고요한 공기가 그들의 위를 장난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먼저 입을 연 건 윤신이었다.

“수석님이 누굴 엄청 뜨겁게 좋아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에요.”

“왜. 난 빈정거리기 1급 자격증 있어서 행복하면 안 돼?”

“제가 많이 질투했을 거 같아서요. 저만 특별한 거 아는데도 질투 나요. 사실은 본인이 엄청 다정한 거 아세요?”

이 말이 그는 매우 황당한 듯했다. 도국에 입사한 이후 처음 보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모르셨구나.”

“…….”

“진짜 모르셨구나. 아직도 객관화가 잘 안 되시나 보다. 강세헌도 못하는 게 있네.”

조금의 엇나감도 없이 서로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온 세상을 한겨울의 어둠과 형형한 빛들이 골고루 덮어 버린 고즈넉한 밤의 한가운데에서, 상대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두 개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건 마치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려 적막이 감도는 한적한 동네의 길목에 오직 단둘만 남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윤신은 돌연 그에게 닿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래서 그네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그보다 한 박자 앞서 세헌이 철봉에서 일어나 모래를 밟고, 제게로 다가왔다.

곧 그네 앞에 선 그는 앉아 있는 윤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꼭 염증이 생기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자꾸 미열이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입술을 달싹인 윤신이 이런 마음을 외부로 꺼내 놓으려는 찰나, 세헌의 미려한 얼굴이 가까워졌다. 뒤이어 귓전에 낮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지금은 눈을 감아야 될까, 떠야 될까. 네가 맞춰 봐.”

세헌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윤신은 눈꺼풀을 차분히 내리감았다. 그러고는 차가워진 두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잘했다는 양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포개듯이 깨문 그는 입 안으로 ‘후.’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움찔한 윤신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그가 더욱 짓궂게 얇은 표피를 씹었다.

살을 엘 듯 싸늘한 공기 때문에 얼어 있던 살갗이 마찰할 때의 열로 서서히 녹아내렸다. 말랑말랑해진 윤신의 입술을 야릇하게 빨아 대던 세헌은 이내 뾰족하게 혀를 세워 좁은 틈새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으응…….”

입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축축한 양감을 느낀 윤신이 몸을 슬쩍 비틀면서 신음했다. 그는 일부러 더 집요하게 내부를 탐색해 나갔다. 얇고 예민한 점막들을 모두 짓무르게 만들 기세로 난폭하게 유린했다가, 또 금세 방향성을 바꿔 부드럽게 얼러 가며 입을 맞췄다.

서로의 젖은 혀가 몇 번이고 겹쳐졌다.

진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어깨 위로 황홀한 공기가 가라앉아 칼바람을 밀어냈다.

점점 더 흥분하게 된 윤신이 일어날 듯, 말 듯 몸을 들썩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여봐란듯이 세헌이 먼저 훅 떨어져 나갔다. 매우 아쉬워하며 몸을 벌떡 일으킨 윤신이 계속 그에게 닿기 위해 행로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능숙하게 선로를 잡아 뒷걸음질 치면서 미끄럼틀 밑 딱딱한 벽면에 등을 기댔다.

세헌의 코트 깃을 붙든 윤신이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푹 파묻었다. 곧이어 접촉한 면적을 늘리기 위해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세헌의 등 뒤로 두 팔을 뻗어 깍지를 낀 뒤 온몸으로 그의 늘씬하고 탄탄한 몸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기다란 다리들이 야릇하게 얽혔다.

“수석님이 절 좋아해서 너무 좋아요.”

대꾸 대신 매끈한 턱을 쥐고 슬쩍 끌어 올린 세헌이 윤신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뒤이어 길쭉한 손가락으로 차가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뺨만 벌겋게 달아오른 모양새가 사랑스러웠다.

“넌 어떻게 이렇게 숨기고, 재고, 따지는 게 없지? 단순해서 살긴 편하겠다.”

그동안 세헌의 인생에는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 가는 그런 사람들만 득시글거렸다. 윤신은 그런 걸 계산하기도 전에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는 사람이라서, 끌렸다. 말로든, 표정으로든, 행동으로든, 때로는 눈빛으로든 말이다.

이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윤신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러고는 키스의 여진이 아직 남아 있는 애타는 얼굴로 세헌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저 진짜 반말하면 안 돼요? 사적으로만 할게요.”

“내가 얼마나 까마득한 선밴 줄은 알아?”

“경력 차이는 선배님이 월반에 조기 졸업할 때 전 그걸 못 해서 그런 거고. 실제 나이는 몇 살 차이 안 나잖아요. 여섯 살이면 솔직히 친구죠.”

“안 돼. 난 어쏘가 나한테 반말하는 꼴 못 봐. 그걸 남이 목격하는 꼴은? 더 못 봐. 본 인간들 눈알 다 파내서 태우는 꼴 보고 싶으면 하든지.”

“저는 그냥 어쏘 아니잖아요. 펌에선 안 들키게 잘할 수 있어요. 제 생일 선물로 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우리 100일 선물? 1주년 선물?”

그는 어이없다는 양 열없이 대꾸했다.

“1주년은 아직 멀었어.”

“수석님 논리대로라면 언젠간 올 거니까 괜찮지 않아요?”

“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호시탐탐.”

“어떻게 시범 기간이라도…….”

따악! 손가락으로 매끈한 이마 위를 친 세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끝끝내 안 된다고 어깃장을 놓진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그가 받아 줄 줄 알았다. 암묵적 허락을 이해한 윤신이 세헌의 온 얼굴에 쪽쪽, 정신없이 키스했다. 결국 세헌은 졌다는 양 웃음을 터트렸다.

* * *

아이들은 윤신의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매는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아 말없이 차를 마셨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장례를 포함한 모든 과정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길 못 박았던 바람에 그를 추억할 만한 공간은 엄마의 유해와 함께 모신 공개 사당뿐이었다. 기일도 떠들썩하게 챙기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쯤 가족끼리 그곳에 가는 게 다였다. 다만 인덕을 많이 쌓아 그런 건지 자신들이 가면 늘 국화꽃이 이미 몇 송이 놓여 있었는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누나 가족들이 모두 함께 방문했다. 한데 이번엔 매형이 출장 중이어서 넷이서 다녀왔다. 타이밍이 좋았다고 하기엔 쓸쓸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인 건 맞았다. 이경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너희 펌에서 뭐라고 하데?”

“누나가 강 수석님 만난 거? 대충은 들었어. 우리 사정 설명했다며.”

한숨을 길게 쉬는 그녀의 안색이 퍽 어두웠다.

“네 매형이 내가 뒤로 뭐 하는지 다 알게 됐어. 그래서 급한 마음에 강 변 좀 보자고 했거든. 강 변호사 진짜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그래도 송 변이 너 당분간은 데리고 있겠다고 답 줬어. 고마운 분이지.”

“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누나. 나…… 맞선 봤던 분 다시 안 보려고. 정리 좀 해 줄래? 사과는 내가 드릴게. 너무 늦게 얘기해서 미안해.”

한번 결심한 이상, 동생의 의사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그녀가 대답 대신 짧게 침묵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반발하거나, 은근하게라도 힐난하지 않았다. 도리어 윤신을 이해해 주었다.

“그럴 것 같았어. 혹시 너 요새 연애하니?”

“그게, 응.”

“지난번엔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사이에 뭐가 있었던 거겠네. 그래서 계속 안 내켜 했던 거구나. 고생했어. 나도 영 마음에 걸리더라고.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다 싶다. 잘 해결해 볼게.”

아마 정식으로 거절하게 되면 이 얘기는 매형에게도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걸 감당해야 할 누나가 안쓰러워 마음이 무거워진 윤신은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이혼 소송 말이야. 준비하고 있는 거지?”

급한 김에 중요한 부분부터 공략하자, 이경이 바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부러 노기 띤 표정까지 보여 가며 강경하게 나왔다.

“그 얘긴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이건 내 싸움이야. 넌 너 자리 잡는 거만 신경 써. 몇 번 말해야 하니.”

“강세헌 변호사가 소송 대리인이 되어 준다면? 어떻게 생각해? 실장님이 접촉한 대형 펌들마다 전부 수임 거절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매형 귀에 들어갔다던데.”

그녀는 꽤 오래 침묵했다.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강세헌 변호사라니.”

“말 그대로야.”

이경은 말도 안 된다는 결론이 선 듯 명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강 변호사 어떤 인간인지 몰라? 강 수석은 철저하게 기득권 편이야. 머리가 비상하면 뭐 해.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쓰는데.”

“누나.”

“너희 펌 그 누구보다 내 대리인이 되어 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야. 오히려 그래서 거기에 널 넣은 거기도 해. 그이가 겨눈 칼끝이 웬만해선 강 변을 향할 리가 없을 테니까.”

지그시 입술을 깨문 윤신이 가능한 한 덤덤하게 되물었다.

“가능성이 생겼다면? 누나, 진짜 소송이 시작되면 누나를 사람들이 잊지 않는 게 중요해져. 이 사건을 어떻게든 시끄럽게 만들어 줄 사람 필요해. 강세헌 변호사만 한 사람 절대 없어.”

“윤신아, 네 말대로 다른 대형 펌들이 다 거절했어. 단순히 이 소송에서 이기거나 질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야. 대외적으로 해당 펌이 수한그룹의 적인 것처럼 비칠 걸 알아서야. 리스크가 클 걸 뻔히 아는 강 변이 날 왜 도와. 도국은 수한이랑 관계도 좋잖아.”

그녀는 현재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아주 정확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세헌이 최선이란 걸 모르지 않지만, 그가 사건을 수임할 리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윤신도 누나가 한 말에 거의 대부분 동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말이 모두 맞았을 것이다. 하나,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제게 닿은 그의 마음이다.

다만 감정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다 해도 그녀에겐 보여 줄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누나를 설득해야 가장 최선일까를 시뮬레이션하던 윤신이 이경의 마른 손을 다정하게 붙들었다.

“누나, 강세헌이 맡아 줄 거야. 그러겠대.”

역시 어불성설처럼 들렸던지, 이경이 다급히 반문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강세헌이 왜?”

“자세히 설명은 못 해 줘. 그런데 내가 증인이야. 내가 알아. 해 줄 거야.”

윤신은 그의 약점이었다.

이 사실을 세상에서 그와 자신밖엔 모르지만, 확실하게 존재했다.

“윤신아.”

조용히 제 이름을 부르는 누나의 음성 주파수가 분명하게 흔들렸다. 불친절한 설명 때문에 이 상황이 영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론 희망적인 생각으로 희미하게 벅차 하는 듯했다.

“다만 수임할 생각이 있다면, 끝까지 버틸 각오도 해야 한대. 그런데 누나 긴 싸움 할 준비 돼 있잖아. 난 그렇게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계속 믿지 않는 기색이던 그녀가 윤신의 몹시 단호한 태도에 조금쯤 신뢰가 생긴 건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이가…… 강세헌 변호사를 설득해서, 우릴 망치려는 건 아닐까?”

여태까지 세헌에 대해 많은 걸 알아봤을 테고, 또 직접 목격한 것도 있을 테니 충분히 할 수 있는 가정이었다. 사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라도 의심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고, 누구도 제 편이 아니라고 여겨질 테니 당연했다. 하나, 윤신은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 거 아냐. 난 그 사람 믿어. 하지만 누나가 당장 내 말 덮어놓고 신뢰하긴 어려울 거 알아. 돌다리 두드려 보고 건너도 돼. 마침 수석님이 은밀하게 자리를 주선해 달래. 만나서 최종적으로 판단해.”

“그래도 되니?”

“그럼. 아, 결정하면 외도랑 폭행 증거들을 준비해 줘. 증명력만 있다면 아주 작은 것도 상관없어. 변호사님이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만들어 줄 거야. 혹시 매형이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거나, 그런 것도 있다면…….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해. 그런데 중요한 쟁점이라서.”

“아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조언이잖아.”

“매형한테 뭘 당했든, 치부라고 생각하지 마. 그것들 치부 아냐. 법정에서 쓰일 증거지.”

떨리는 손을 제 손으로 덮은 이경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절박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은 마치 접근 불가의 파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윤신에게 제 일에 관해 입도 뻥끗하지 말라며 날을 세우던 그녀였으나,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빠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희망을 봤다는 증거이기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발현이기도 했다.

“증거라면 많아. 의료 기록, 현장 동영상, 피해 사진 나한테 다 있어. 일부러 저항도 안 했어. 아는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소송에는 질 수가 없을 수준이래. 그런데 이름 좀 있는 변호사들은 송사를 맡아 준다고 하지를 않더라. 수한이랑 싸우려면 언론 다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정말 길이 없나 싶어서 가슴이 답답해 터지는 줄 알았어.”

“그런 증거엔 기한이 있어서. 날짜가 지나면 기능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도 가끔 있어. 결심 서면 최대한 빨리 보내 줄 수 있어? 인편으로.”

“그럴게.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애들 데려올 수 있는 거니? 재산 분할이랑 위자료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거고? 영진건설 사모는 소송하기도 전에 경제권 다 빼앗겼어. 이제 양육 능력 없다고 재판장에서 몰아가겠지. 원심이 끝이 아닐 거야. 그걸 답습할 내 모습도 그려져.”

윤신은 어울리지 않게 숨도 제대로 안 쉬어 가며 말하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 주었다. 누나는 그제야 시선을 마주치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안심하라는 이 행동을 잘 이해한 듯해서 다행이었다.

“누나, 강세헌이잖아. 증거만 확실하면 무조건 이겨 줄 거야.”

“그렇지. 하…… 아빠가 하늘에서 도와주시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강세헌이라니. 믿어도 되는 건가. 어, 얼른 교섭 자리부터 만들어 줘. 내가 직접 얘길 해 봐야겠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누나를 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가녀린 어깨를 끌어안았다. 떨리는 등을 토닥여 주는 동안 오만가지 상념이 스쳤다.

제겐 미온적이다 못해 완강하기까지 했던 그녀의 태도가 세헌의 이름 세 글자에 이렇게 바뀌는 걸 보고 윤신은 깨달았다. 지킬 게 있다면, 자신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세헌이 제 옆에 있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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