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51)

17. 

집무실 접견용 테이블 앞에 세헌과 윤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진건설 매수 절차와 관련해 두 사람이 단독 사전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특별 팀에서 윤신의 연차가 가장 낮아서 본 업무 외에 일정 관리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설혹 실수가 생길까 봐 그에게 SOS를 청했다. 결과적으론 이 일을 명령한 세헌이 직접 도와주는 모양새였다.

사방에는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정면에는 노트북 세 대가 연결되어 놓인 채였다. 윤신이 가운데 놓인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 세헌은 종이들을 넘겨 가며 눈여겨볼 만한 세부 수치들을 동공에 담았다. 그러다 동시에 각자의 손잡이 옆에 있는 컵에 손을 뻗었다. 한데 컵 두 개가 거의 붙어 있는 게 문제였다.

탓, 손끼리 마찰했다. 각자의 영역에 몰두하고 있던 서로의 시선이 그제야 상대를 향했다. 머쓱해진 윤신이 먼저 살갗을 떼어 내자 세헌이 보란 듯이 더 손가락을 얽었다.

“왜 피해.”

“피한 게 아니라. 갈증 나시면 먼저 드시라고요.”

그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윤신을 빤히 보다가 한 수 물러 주듯 뒤늦게 손을 거두어 갔다. 이윽고 물을 마시는 긴 목울대가 아주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며칠 동안 세헌은 내내 이 상태였다. 업무적으로 부딪칠 때마다 묘하게 삐걱거렸다. 정말 안 어울리게도 일과 사생활의 관계를 허물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제 고백에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분이 전이되자, 윤신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픽 웃음을 터트리곤 그에게 들킬까 애써 미소의 여진들을 감춘 채 입을 열었다.

“태산건설 외 잠재적 매수자들 인수 의향서 거의 다 확보됐답니다. 거래 구조, 거래 일정, 인수 의향에 대해서 여기 대충 기록은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거 알음알음 구한 거라 반이 가라예요. 좀 기다렸다가 제대로 된 정보로 회의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그러자, 세헌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인수 의향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비밀 유지 약정서나 비밀 유지 확약서가 중요한데…… 이건 내 정보에 의하면 아직 어디와도 주고받지 않았어. 아마 타 로펌들에서도 지금 우리랑 똑같은 짓 하고 있을 거야. 판 짜려면 지금 시작해도 시간 모자라. 그냥 고 해.”

“일반적으로 의향서랑 같이 제출하지 않아요?”

“보통은 그렇지. 이미 매각 주관사에서 IM[4]을 배포했어. 그런데도 먹음직스러운 음식 앞에 두고 후보군들이 다들 뜨뜻미지근하게 굴고 있어. 이건 기업들 선에서 아직 공식화가 안 됐다는 뜻이고, 결국 이 인수전이 여기저기 시끄럽긴 한데 실질적으론 아무것도 진행이 안 됐단 얘기야. 이게 뭘 의미할까.”

“다들 머뭇대고 있다는 거네요.”

그가 핑거 스냅을 딱 쳤다.

“태산이 금액을 생각보다 높게 부를 거라는 소문을 흘렸거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 인수가가 더 올라가게 될까 몸 사리는 거군요.”

“가능성은 태산이 제일 높지만, 모든 걸 낙관할 순 없어. 모든 시나리오를 상정해야 돼. 우린 우리 갈 길 가되, 다른 업체들이 손 놓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낙마시킬 작전도 필요해. 그건 회사법 팀 시니어들 몫이긴 한데, 너한테도 기회를 줄게. 태산 방어전 아이디어 짜서 1차 레포트 가져와. 다음 주 월요일 오전 9시까지. 더 늦으면 제출해도 날릴 거야.”

“알겠습니다. 아, 참. 실사 전에 영진건설 쪽 한 차례 흔들어 놓는 건 어떠세요?”

“순진한 소리 하지 마. 난 이 짓을 몇 년간 해 왔고, 어디가 됐든 상대측 기업은 날 싫어해. 내가 직접 움직이면…….”

바로 어깃장을 놓던 세헌이 돌연 말문을 닫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나 싶더니, 이내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방향을 선회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일단 윽박지르고 시작하던 내 스타일이랑 다르게 가고 있으니까 저쪽도 그거까지 전부 대비를 할 거야. 직접 만나서 옆구리 찔러보는 척하면서 작전 혼선을 줄 필요는 있겠지.”

결론이 나자마자 바로 내선 버튼을 누른 세헌이 탁 비서를 소환했다.

- 네, 변호사님.

“영진건설 조원익 대표. 내가 따로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아주 은밀하게.”

- 두 분이서요? 몸 사릴 텐데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와르르 약점 잡힐 거 뻔하고. 안 나올걸요. 저쪽 변호사 한 네댓 명 데리고 수석님은 혼자 나온다면 모를까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준다고 해. 한 열 명쯤 데리고 나와도 된다고. 혹시 모르니까 송 수석한테 부탁해 봐. 재계에 줄이 많으니 얘기가 빠를 거야.”

- 일단 여쭤볼게요.

그는 통화를 마치고 다시 서류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윤신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단순히 내밀기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예 윤신의 마른 어깨를 감싸듯이 안더니 오른쪽 뺨을 어루만졌다. 당황한 윤신이 그를 힐끗 봤다. 한데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던지 세헌은 따가운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더 아래로 손가락을 내렸다.

곧게 뻗은 중지가 뾰족하게 선 형태로 윤신의 벌어진 입 속으로 침투했다. 뒤이어 고리를 걸듯 입 안 여린 살을 쿡 찔렀다. 민감한 부분을 잘도 찾아내서 내부를 손끝 하나로 유린하던 그가 마침내 치아까지 건드렸다.

“읏, 수석님?”

그들의 정면에는 비서실로 통하는 창문이 있었다. 접견용 소파에 앉아 있어서 굳이 일부러 일어나 창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하지야 못하겠지만, 위험한 건 위험한 거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끝내 세헌의 팔을 덥석 쥐자, 그제야 그도 돌아보았다.

“왜.”

“그게, 장소가 좀. 부적절하지 않나 싶어서요.”

“여기 내 집무실이야.”

“저도 그건 아는데 개별적으론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곳이 회사고…….”

이 에두른 거절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세헌은 바로 리모컨을 들어 블라인드를 확, 내려 버리더니 서류를 던져 버리고 윤신의 위로 반쯤 올라탔다. 뒤이어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끼우고 두 팔을 얼굴 옆으로 짚어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봉쇄했다.

삽시간에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운 형국이 된 윤신이 눈만 깜빡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모를 만큼 순진하진 않아, 필연적으로 뺨이 살짝 경련했다. 그래도 일단 물어는 봐야 했다.

“뭐 하시게요?”

“눈 계속 뜨고 있을 거야?”

“언젠 눈 보고 싶다고 뜨고 있으라더니?”

“지금은 감을 타이밍이야.”

그의 반문과 동시에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이윽고 윤신의 턱을 부드럽게 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볍게 입술이 스친 순간, 윤신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 매끄러운 동공을 감춰 버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매달렸다. 깡마른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세헌이 이 접촉에 화답하듯 도톰한 혀를 뜨끈한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으응, 흐으…….”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거부하지 않으니 그가 더 탄력받아 노골적으로 혀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내부를 정성껏 훑고, 윤신의 목구멍으로 제 침을 넘기듯 끊임없이 젖은 살덩이를 맞물려 타액을 섞었다.

그의 기다란 목을 안은 양팔이 파들거렸다. 윤신은 몸이 뒤로 완전히 넘어가 소파에 눕게 될까 봐 바스락거리는 소재의 질 좋은 셔츠를 구기듯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그걸 모르지 않을 세헌은 놓아주긴커녕 도리어 점점 더 윤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제 혀를 가능한 한 깊숙하게 입 속에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외설적인 감각을 주지시켰다. 아울러 윤신의 늘씬한 목덜미를 단단히 손에 붙든 채로 제게 당겨 서로 간의 거리를 최소화했다. 자연스럽게 입술은 물론이고 젖은 턱과 딱딱한 상체까지 간헐적으로 부딪쳤다.

“흐읍, 음, 부드럽게 해 주세요.”

슬며시 입술이 떨어진 찰나의 순간, 윤신이 애원하듯 말문을 열었다. 세헌은 나름대로 귀담아듣는 기색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 경청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진 건 아니었다.

다시 그의 입술이 윤신의 것과 맞물렸다. 이번엔 더욱 거칠게 입 속을 헤집었다. 숨이 버거워진 윤신은 견디다 못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움켜쥐었다. 미세한 통증이 그의 성감을 자극했던 모양인지 혀의 운동이 더욱 난폭해졌다.

“읏, 읏! 읍!”

쿨쩍거리는 효과음이 지나치리만치 에로틱했다.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투명한 타액이 윤신의 턱을 타고 흥건하게 흘렀다. 헐떡이던 윤신이 그의 목 이곳저곳을 바짝 깎은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자 세헌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양 셔츠의 단추를 풀고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저절로 뒤로 젖혀질 것 같았던 윤신이 바르작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눈을 번쩍 떴다. 짙은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세헌도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윤신은 두 팔과 다리를 이용해 세헌의 탄탄한 몸을 힘껏 밀어냈다. 얼떨결에 뒤로 밀린 그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단추부터 채우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 건방진 눈빛 뭐지?”

“노크 소리 안 들리세요?”

“들려. 네, 들어오세요.”

전자의 말은 키스의 여운에 젖어 있는 제 옆 상대에게, 후자의 말은 조금 더 데시벨을 높여 바깥의 손님에게 뱉어 낸 세헌이 윤신을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윤신은 이렇게 바로 들어오게 만들면 어쩌냐는 듯 그를 원망스럽게 마주 보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땅에 떨어진 서류들을 줍는 척하며 젖은 턱밑을 손등으로 미친 듯이 닦아 내 타액들을 훔쳤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보니 느닷없는 불청객은 탁 비서였다.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자신을 멍하니 응시하는 윤신을 보곤 뺨을 실룩였다.

“실내 많이 더워요? 여기 이거 누르시면 온도 낮출 수 있어요.”

창피해진 윤신이 바로 반박했다.

“괜찮아요. 물 마시다 사레가 들려서…… 진짜 괜찮아요.”

영 안 괜찮아 보이는 윤신을 꽤 수상쩍게 보던 탁 비서는 이내 세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송 변호사님이 잠깐 보자 하시네요. 지금 회의 끝내고 VVIP 접견실에 계세요.”

“거기서 따로 보자고?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단 소린데.”

“조금 전에 내선으로 말씀하신 접견 다리 부탁드렸더니 지금 인수 작업 건 대면 보고 준비해서 방으로 오라시네요. 듣고 도와주시겠다고요.”

“역시 송 변은 공짜가 없네. 알겠어. 나가 봐.”

그에게 묵례한 탁 비서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얼굴에 서린 열기를 그때까지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윤신이 세헌을 밉게 쳐다봤다. 그가 뻔뻔하게 ‘어쩌라고.’ 하듯 오만하게 턱짓했다.

“얼굴 수습할 말미를 좀 주시지 진짜, 좀 너무하시…… 읏!”

유연하게 팔을 뻗어 덥석 뺨을 붙든 그가 다시 쪽, 하고 솜털이 날리듯 부드럽게 입 맞췄다. 순식간에 또 그의 공세에 당한 윤신이 분한 기색으로 서류철을 들어 그의 팔뚝을 마구 때려 댔다. 세헌은 일단 건드리는 대로 맞아 주다, 윤신의 행동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라야 미간을 구겼다.

“이게 어디서 하극상을.”

“입 주변 죄다 젖어 있던 거 탁 비서님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요! 눈치 빠른 분인데!”

“어쩌긴 네가 곤란한 거지. 졸다가 침 흘렸다 그래.”

기가 막힌 윤신이 헛웃음을 토해 냈다.

“와, 진짜. 와…… 인간이 이렇게까지 본인 생각만 할 수도 있구나. 나르시시스트도 이렇게까진 안 해요. 저 정말 험한 길 가고 있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드네요.”

무표정하게 윤신을 직시하던 그는 끝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 * *

사옥 최고층에 위치한 VVIP 접견실은 다른 내부 공간보다 훨씬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 어디에서 새어 나갈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사방을 밀폐했다. 여긴 주로 최종 청구 금액이 수십억 대에 달하는 주요 고객들을 위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세헌과 미희가 테이블 하나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담의 형식이지만, 이건 일종의 거래였다. 미희는 아주 사람 좋은 것처럼 보여도 절대 손해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고마운 부분도 있는 좋은 동료였다. 다만 손익의 경계가 워낙 확실한 편이라 세헌도 그녀가 완전히 제 편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여기. 송 수석도 전문가니까 내 구두 설명보단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거야.”

태블릿 PC를 내민 세헌이 그녀 쪽으로 화면을 비춰 주었다. 미희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페이지를 넘겨 가며 그 안의 내용들을 한참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세헌은 제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신으로부터 온 거였다.

[저 프로 보노 때문에 병원에 다녀와요. 아이 괜찮아졌다고 해서 슬슬 합의 마무리하려고요. 수석님께도, 송 변호사님께도 누 안 끼치게 잘 정리할게요. -도윤신]

알겠다고 간단하게 답장한 그가 휴대폰을 옆으로 치우자, 어느 틈에 미희가 그를 꽤 즐거워하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도 변 말이야. 영진건설 조 대표 동성 친구랑 바람난 건 어떻게 알았대? 이거 내가 여기저기 은근슬쩍 찔러봤는데 아직 아는 사람 하나도 없더라. 세상에.”

“수한 둘째 며느리발. 마침 나도 좀 쥔 게 있었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화면에 다시 시선을 두곤 덧붙여 말했다.

“그럼 출처 분명하네. 도 관장이 없는 소리 할 사람은 아니잖아. 별꼴을 다 본다. 사모는 무슨 죄니. 이야, 그런데 이거 도 변이 정리한 거지? 네가 얘 서머리 다른 어쏘들 돌려 보게 했다더니 볼 때마다 예술이다, 아주. 맞아. 저번에 도 변 외고 시절 친구 우연찮게 만났는데, 그때도 때마다 도 변 노트 돌려 봤대.”

“외고에서 본인 노트를 공공재로 돌린다……. 본인 무기를 적한테 공유하는 등신이 내 밑에 있었네.”

“그거 돌려 보게 해 줘도 도윤신이 1등 했어. 그럼 된 거 아냐?”

“온갖 엘리트 코스는 다 타 놓고 대체 왜 인권 변호사를 한 건지 이해가 안 돼.”

“그런 애라 걔한테 마음 가는 거잖아. 넌 절대 안 할 일 나서서 하는 애라서. 뭐, 원래 반대가 끌리는 법이지. 나도 도 변 볼수록 썩 마음에 들어.”

굳이 부정하지 않은 세헌이 제 몫의 커피를 입에 댔다.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씁쓸한 끝 맛을 입 속에서 누리던 그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 가라앉은 분위기를, 그와 아주 오랜 시간 가까이 알아 온 미희가 모를 수는 없었다.

“정확히 뭐가 마음에 걸리는데?”

“걔 데리고 일하는 거 매우 찜찜해.”

“한동안 잘 나가다 갑자기 또 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난 이런 기분이 몹시 꺼림칙해.”

“저기, 강 변. 내가 지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해 줄래?”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양,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계속 생각했던 거였다. 언젠가부터 세헌은 확실히 윤신이 자신을 닮아 가는 게 신경 쓰였다.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했던 건 아니었지만, 제 은사였던 도 교수에게도 못 할 짓을 하는 느낌이 끊임없이 들었다.

물론 제 방식을 답습하는 게 윤신이 진짜 원하는 바는 아니리라. 단순히 이곳에 동화되고, 버티기 위해 노력하는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펌은 전쟁터였고, 도윤신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니 사수인 제 명령을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자꾸 비슷한 일들을 겪다 보면 결국은 진심이 되고 말 터다.

윤신이 꽤 인상 깊게 읽은 듯하던 〈위대한 유산〉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이 세상의 다른 사기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다.〉[5]

익숙해졌다는 환상, 능숙해졌다는 착각에 취해서 자신을 속일 게 훤했다. 그게 훨씬 심신이 편하고, 또 죄책감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감정이었다. 윤신이 매사에 진심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 지친 모습이 더욱 분명한 형태로 그려졌다.

그런 길을 앞서 걸은 자신은 때때로 고독했다. 세헌은 윤신에게 그런 상황이 오는 게 우려됐다. 이런 걱정이 매우 쓸데없는 거라고 판단하면서도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았다.

“송 수석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도 교수님 유난히 좋아했잖아.”

“나야 그렇다 치고, 강세헌답지가 않네.”

“뭐가.”

“웬일로 어떤 대상을 향한 정서 반응이 매우 정상적이니까 하는 말이야. 그게 교수님을 향한 건지, 도 변을 향한 건지에 따라 세부 카테고리는 좀 달라지겠지만.”

“회식 자리에서 그건 오해라니까. 안 믿는군. 뭐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많이 쳐 줘서 그땐 안 했다고 해도, 그 뒤엔 했을지 알 게 뭐야?”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떠보지 마. 안 했어.”

뒤이어 바로 반박하자, 이번엔 미희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야, 강세헌. 안 하긴 뭘 안 해. 차라리 귀신을 속여. 내가 너랑 몇 년을 안 줄은 아니? 너 걔한테 관심, 호기심, 흑심 다 있어. 최소한 머릿속으로는 수천 번 벗겨 먹었을 거다.”

“넘겨짚는 게 취미면 로펌 말고 역술원을 해.”

“넘겨짚긴? 근거투성이다. 네가 여태 걜 얼마나 두고 봐 줬는지 내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해? 넌 정장 입은 뱀이야. 지금 네 밑에서 버틴 애들 안 물리려고 다 치열히 독 피해서 겨우 살아남은 애들이라고. 왜 도윤신만 안 되는데? 왜 걔만 해묵은 죄책감을 자극하는데.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고. 나도 좀 알자.”

그가 답하지 않으니, 논증에 힘을 얻은 그녀의 음성 주파수가 더욱 확고해졌다.

“나 리쿠르트 담당이자 어쏘 담당관이야. 주니어들 사이에서 도윤신, 반년 넘게 따돌림당하고 있어. 네 사건은 무조건 회의 시간당 페이니 돈은 돈대로 벌고, 루트대로 잘 라인 타기만 하면 성공까지 탄탄대로인데 나라면 부러워 미칠 거 같거든.”

“애가 쓸 만하니까 적재적소에 쓰는 거야. 봤으면 알 거 아냐.”

“그런 부분도 있는 거겠지. 너 확실히 도 변한테 유해. 뭔가 다르다고.”

그녀의 말을 곱씹다 차분히 대꾸하는 그의 음성이 꽤 허탈했다.

“내가 꽃을 받아서 그래. 뇌물이 너무 비쌌어.”

“꽃?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희귀한 보석이라도 주데? 도 변 걔가 그럴 각이 안 나오는데.”

정말 윤신이 지불한 것들의 값어치가 감당이 안 됐다. 보석 같은 건 곁에 가져다 댈 수도 없을 만큼 버거웠다. 그 덕분에 상대방이 손만 까딱해도, 자신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마저 해일처럼 일었다.

미희의 말이 모두 맞았다. 처음부터 윤신에게만 세헌의 태도도, 관점도 달랐다. 이 펌은 정글이다. 누가 죽어 나가나, 또 누가 살아남나.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녀가 몰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초에 이런 이야기들을 꺼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됐어. 이 얘긴 관두자. 아무튼 어느 정도 상황 파악 끝났으면 영진건설 조 대표랑 자리나 마련해 줘. 해 주는 걸로 알고 먼저 일어난다.”

이 화제로 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세헌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태블릿 PC를 챙기려고 하자, 미희가 기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행동을 만류했다.

“잠깐만. 저녁이나 같이하자. 도이경 관장 만나기로 했어. 탁 비한테 네 이번 주 스케줄 확인하고 어렵게 시간 맞춘 거니까 거절은 마.”

“갑자기 왜.”

“말 안 했나? 지난번에 네가 거절한 미술품 대리, 그냥 내가 맡아서 하고 있어. 네가 반려했는데 네 밑 변호사를 주면 그쪽이 불쾌할 수 있고. 나라는 카드가 최선이었다.”

“기어이? 송 수석, 정신 차려. 그거 공짜 아냐. 업무 강도에 비해 기형적으로 높은 보수는 반드시 탈 나. 일 하루 이틀 해? 분명 나중에 다른 걸 요구할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호의를 어떻게 거절해. 그쪽에서 일은 틀어졌어도 널 한번 따로 만나 보고 싶대. 비싼 밥 한 끼 사고 싶다는데, 같이 가.”

순간적으로 세헌의 뇌리에 오만 가지 사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개중 제일 영향력 있게 그의 안에 똬리를 틀고 앉은 건 언젠가 길바닥에서 울고 있던 윤신이었다. 그 뒤로 위험에서 구해 줄 바다를 찾던 때의 일이나, 자신이 따로 알아봤던 윤신의 누나 부부에 관한 정황들도 하나둘씩 비눗방울 터지듯 떠올랐다.

별생각 없이 도 관장의 호의를 받아들인 미희를 보니, 아직 그런 제반 상황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이 자리에도 없는 도윤신의 분수령이 그 식사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뱉은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잠시 업무상의 통화 때문에 미희가 자리를 비우자, 조용한 객실 안에는 세헌과 이경만이 남겨졌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아주 정중한 태도로 한쪽 손을 다른 팔에 받쳐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러나 세헌은 물끄러미 고급스러운 찻잔 속 액체를 내려다볼 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웃곤 말문을 열었다.

“차 한 잔도 부담되세요?”

바로 대꾸하는 세헌의 음성이 매우 쌀쌀맞았다.

“이 차는 부담 안 됩니다. 지금부터 하실 말씀은 부담될지도 모르겠네요.”

굳이 부인하지 않은 그녀가 차분하게 응답했다.

“급하게 연락드리면 만나기 어려운 분이라고 들었는데.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어떤 클라이언트를 만나느냐에 따라 까다롭기가 다르겠죠. 시간을 쪼개서라도 꼭 내야 하는 고객도 있는 법이니까요.”

“듣던 대로 장사를 잘하시네요.”

“저는 늘 고객께서 부디 최선의 쇼핑을 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의 말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그녀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내심 속상해하는 기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세헌이 일부러 자극하듯이 덧붙여 말했다.

“도윤신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변호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래도 저한테 보낸 거 후회 안 하십니까.”

“아직 뉘우치기엔 이른 감이 있군요. 말씀이 나와 말인데 윤신인 어떤가요? 애가 머리는 좋은데 제가 워낙 오냐오냐하면서 가르쳐서 가끔 세상 물정에 흐릴 때가 있어요. 그래도 그 덕분에 제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라 어찌어찌 설득해서 도국으로 보내긴 했는데……. 사실 적응을 잘하긴 하는 건지 걱정이 큽니다.”

“적응도, 일도 아주 잘합니다. 제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요.”

“예쁘게 봐 주셨다면 감사하고요.”

일부러 예쁘게 보는 게 아니다. 대형 로펌과는 지향점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올바른 일을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는 아주 괜찮은 변호사라는 덴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연차에 따라 일정한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판사나 검사라면 모를까 변호사들에게 몸값이란 거의 모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연봉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스포츠 선수와 같았다. 그런 천박한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이 바닥에 그 같은 가치관의 인력들은 정말 흔치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정반대의 삶을 사는 세헌마저도 그걸 알았다. 도이경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걔의 형이었다면 저한테는 절대 안 보냅니다. 흰 도화지에 나쁜 물이 드니까요. 큰 실수 하신 겁니다.”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끊기자, 일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공기가 서로의 사이에서 전류처럼 흘렀다. 세헌은 매우 완고하고 확고한 태도로 그녀를 질타하고 있었다. 이경도 그걸 느낀 모양인지 애써 평온하게 가장하고 있던 표정이 확실히 어두워졌다.

금세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의 시선이 정통으로 상대방을 향했다. 기왕 자리가 마련된 김에,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세헌이 적막을 먼저 깼다.

“이제 묻죠. 정확히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침착하지만 분명 혼란을 담고 있는 어두운 동공으로 그를 직시하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눈가에서 비치던 불안이 손끝에도 전이가 된 건지, 부들거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따뜻한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도 아직 진정할 여유가 필요한 듯이 수 초간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사후 제 전 재산을 펌의 사단 법인에 기부할 생각이에요. 수한 사람으로 10년 사는 동안 쌓아 온 인맥을 이용해 최대한 알음알음 굵직한 수임도 주선할 거고요. 펌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핵심만 말해요. 요점 흐리지 말고. 난 어물거리는 거 딱 질색이에요.”

당장에라도 세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릴 것 같았던지, 조금 전까지 머뭇거리던 기미는 모두 사라지고 초조해하는 음성이 단박에 이어졌다.

“윤신일 계속 책임지고 고용해 주세요.”

“내가 왜 걜 책임집니까. 내가 낳았어요?”

“그 애를 좀 살려 달란 소리예요.”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윤신 죽습니까? 내가 안 죽였는데 왜 죽죠? 걘 나만 죽일 수 있어요. 아귀가 안 맞습니다.”

“제가…… 최대한 몸 사려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했는데. 전 진짜 노력했거든요.”

하아, 거기까지 듣고 깊은 숨을 내쉰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녀가 퍽 초조해하는 음성으로 뱉어 낸 문장은 채 몇 개가 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그의 입장에선 꽤 선명하게 상황이 파악됐다.

“시간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묻죠. 혹시 이혼 소송 준비하는 거, 유 대표한테 들켰어요?”

까랑. 매우 정확히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그 때문에 놀란 그녀가 찻잔을 놓쳤다. 받침대 위에서 미세하게 춤추던 다기가 금세 운동을 중단했다. 이 반응으로 확신에 확신을 더한 그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자신이 정보력에 강하다지만, 그래 봤자 일개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수한그룹과 같은 대기업이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에는 미칠 수가 없었다. 제 쪽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의 기반 소스만 있었다면 그녀의 남편도 명령 한 마디로 충분히 알아내는 게 가능했다.

“윤신이가 그래요? 함구하라고 했는데. 제 말 어길 애가 아니에요. 뭔가 이상해요. 혹시 펌 쪽으로 남편이 압박이라도…….”

“걘 입도 뻥끗 안 했습니다. 아직 말 잘 듣는 동생이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확인한 겁니다. 여태 이런 일이 없다가 갑자기 만나자는 요청을 적극적으로 하셨길래 상황이 더 나빠진 게 아닐까 추측한 거고요.”

아직 펌까지 영향을 끼친 건 아니라는 에두른 답변에, 그녀의 불안정하던 안색도 조금 나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불편한 부분들이 있는 모양인지, 음성 끝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 사람이 서서히 절 말려 죽일 거예요. 그런 사람이에요. 윤신인 상황을 단순하게만 알 뿐 남편이 어떤 인간인지 잘 몰라요. 그인 정떨어진 사람한테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게 대해요. 윤신이가 제 약점이란 걸 잘 알아서, 저한테 화가 날수록 걔 목부터 조를 게 뻔해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했는데, 제 예상보다 일렀어요. 그래서 뵙자고 청한 거고요.”

“…….”

“제 살만 깎아 먹지 말고, 가끔은 남도 짓밟아 가면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 주세요. 그럼 조금 전 말씀드린 걸 다 해 드릴게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부탁합니다.”

가만히 말들을 곱씹던 세헌이 그제야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까지도 그저 쳐다보기만 하던 찻잔을 들어, 내용물을 한 모금 입에 댔다. 그 품위 있는 손길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그녀가 세헌의 초연한 태도에 아주 조금쯤 위로를 받은 듯 구겨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는 딱히 반응해 주지 않고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다가, 곧 잔을 내려놓았다.

이어지는 세헌의 음성이 퍽 차가웠다.

“도윤신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고 영리해요. 이미 살아남는 방법을 압니다. 알지만 여태 그런 건 모르는 사람처럼 산 거예요.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 건지 압니까? 아주 강하다고요. 어떤 의미에선 저보다 훨씬 그렇습니다.”

“…….”

“차라리 좀 의지하는 게 어때요. 그편이 훨씬 동생을 위하는 일일 겁니다.”

“그러다 다치면요. 걘 날 위해서라면 몸을 안 사릴 거예요. 착한 애예요.”

“다치게 된다면 그것도 누나를 잘못 둔 본인 운명이겠죠.”

처음부터 이렇게 몰리게 될 상황을 예견하고 윤신을 우산 아래로 보내려 했던 그녀로선 딱히 변명할 수 있는 말이 없는 듯했다. 대포가 날아오는데 우산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을 터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비난을 온몸으로 감수하겠다는 태도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래서 세헌이 계속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오지랖을 부리는 건 그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제 앞에 앉은 상대는 윤신의 누나였다. 미리 경각심을 줄 필요가 느껴졌다. 자연히 말투에 조금 더 날이 섰다.

“상대는 수한그룹입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거 끔찍한 기분이긴 한데 현실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말씀드려요. 우리 펌은 수한 못 당합니다. 적당한 선의 경고에 그친다면 좋겠지만, 도 변이 본인 최대 약점이라는 관장님 지금 발언으로 미루어 그러지 않을 공산이 크겠군요.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딱히 압박할 곳이 없는 수한은 우릴 치겠네요.”

“수한 각 계열사에서 도국에 아주 많은 일들을 위임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일개 변호사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무너뜨리진 못할 거예요. 그래서 거길 선택한 거기도 하고요.”

“안된 말씀이나 우린 찜찜한 일을 아주 많이 하는 집단입니다. 물론 가능한 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지만 그 과정까지 모두 합법적이진 않아요. 이를테면 벌집이라고. 난 버틴다고 칩시다. 펌 대표님을 비롯한 다른 파트너들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두고 볼까요?”

“하지만 수석님, 저와 윤신이를 분리한다면 어떻게든 될지도 몰라요.”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회로를 돌려 밝은 미래를 추측하는 건 물론 어떤 의미에선 바람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는 기대치라는 게 있어야 작전을 실행에 옳길 동력이 생기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헌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늘 최악부터 가정했다. 긍정적인 건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승률 면에선 최악이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 결국은 이혼할 거죠.”

“네. 이혼은 꼭 할 거예요.”

“본인 몸만 나올 겁니까? 그렇다면 얘긴 그나마 쉬워지고요.”

“아뇨. 아이들이랑, 약간의 위자료.”

“재벌가 일원들 이혼할 때 친권 양육권 순순히 넘기는 거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결국 싸울 거란 소리네요.”

그녀는 꽤 확고한 듯 분연히 답했다.

“필요하다면 해야죠.”

“그럼 도국은 더더욱 도윤신을 받아 줄 필요가 없어져요. 어떤 파트너도 동의해 주지 않을 거고요.”

“하지만 송 변호사님이라면…….”

“송 변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형 로펌을 이끌어 갈 도국의 차기 대표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도와주지 않는다면요? 한 가지 작전만 짜 놓고 그게 당연히 실현될 거라 낙관하는 순진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차안, 3안, 죄다 생각했어야죠. 이렇게 안일해서 남편을 어떻게 이기려고요.”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소송하려면 윤신이 그늘을 먼저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도국뿐이라 그런 거예요. 이렇게 허무하게 이혼해 주고 싶진 않아요. 아이들 지켜야 한다고요!”

이경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던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통화를 하러 자리를 비웠던 미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힌 것부터, 현재 내부의 두 사람을 향해 짓고 있는 아연한 표정까지. 모든 기제들이 이미 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를 대충은 들었음을 의미했다.

순간 아차 싶어진 세헌이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미희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정면의 이경을 향해 아주 정중하지만, 힐난을 가득 담아 질문했다.

“관장님,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죠? 소송이라뇨. 지금 전국적으로 이름 알려진 남편분을 공개적으로 유책 배우자로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승계 싸움 중인 분을요? 그러면서 이걸 까맣게 속이고 동생을 저희 펌으로 들여보내신 거고요?”

당황한 이경이 눈짓으로 세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기곤 이내 차분한 목소리를 꾸며 대신 답했다. 미희가 어떻게 나올지, 또 펌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하면 최대한 윤신의 주변 상황을 묻어 두고 싶었다. 하나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의 누나 쪽에서 먼저 SOS 신호를 보낸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도윤신 말이야.”

“그래, 세헌아.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니?”

그의 입이 열리자 미희가 추임새 같은 대꾸와 함께 세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양 뺨이 조금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 듯했다. 그걸 목도한 그는 나지막이 혀를 차곤 덧붙였다.

“금덩이인 줄 알았겠지만……. 시한폭탄이었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세 사람 사이에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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