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옥 인근의 한 고등학교 교정은 조용했다. 학생들이 없는 시기인 데다 1년 중 마지막 날이기까지 해서 매우 한적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일하게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소강당에서, 윤신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제 쪽을 향해 눈을 빛내는 학생들을 두루 살펴본 그는 특강을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럼, 질의응답 정도만 하고 강연 끝낼까요? 질문 있는 친구.”
윤신이 다정하게 묻자,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고 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재판 신 같은 거 엄청 치열하잖아요. 실제로도 검사랑 변호사랑 그렇게 싸워요?”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답을 궁리하곤, 입을 열었다.
“음, 건마다 다르긴 한데요. 미디어에서처럼 그렇게 강하게 자기주장 하고, 싸우고, 그런 경우는 별로 없어요. 다들 업계 선후배들이라 말도 꽤 조심하고요. 형사 사건을 예로 들어 볼게요. 법정에 피의자가 섰다는 건 경찰 수사가 끝나고 검찰로 넘어와 최종적으로 기소가 됐다는 거거든요. 그건 검사한테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다는 뜻이에요. 대체로.”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과 눈을 마주쳐 준 윤신이 덧붙였다.
“검사들은 진짜로 엄청 바빠요. 그런 사람들이 이건 ‘확실히 범죄다.’ 싶어서 재판부로 넘긴 거기 때문에 변호사는 무죄를 받아 낸다기보단, 죄가 있으되 형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게 돼요. 그래서 막 판도를 뒤집는 일이 많진 않아요. 실제로 재판 본 적 있어요?”
대다수의 아이들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판장 자체는 열려 있거든요. 비공개로 진행하는 게 아닌 이상 누구든 올 수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참관해 보면 좋겠네요. 우리 로펌 사단 법인에 프로그램 신청을 하면 아마 동행하게 해 줄 거예요.”
윤신의 성실한 대답을 곱씹던 남자아이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건 대체 왜 하는 거예요? 없어 보여요.”
굳이 부정하지 않은 윤신이 픽 웃으며 답했다.
“드라마에서처럼 그 말을 실제로 법정에서 그렇게 자주 하진 않는데? 오히려 서면으로 하면 모를까요. 그걸 하는 이유 자체는 판결을 내려 줄 사람이니까, 예요. 물론 법에 기초해서 판결을 내리는 게 기본이겠지만, 판사들도 사람이에요. 재판관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역할이 제일 커요. 없어 보이는 거 맞아요. 또 다른 질문 있어요?”
사위가 조용했다. 자신도 어렸을 때 막상 질문을 하라고 판을 깔아 주면 잘하지 못하고 쭈뼛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귀엽다는 듯 지켜보고 있는데, 돌연 한 여자아이가 쓰고 있는 안경을 척 올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여자 친구 있으세요?”
불현듯 세헌의 얼굴을 떠올린 윤신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비슷한 물음을 누나에게 들었을 때 자신은 명확히 부인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른 대답을 고려하게 됐다. 거리낌도 없어졌다.
“네, 뭐. 그 비슷한 건 있어요.”
“그래서 애인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다는 거예요.”
그가 보다 분명하게 답해 주면서 손목시계를 살폈다. 처음엔 눈동자를 빛내던 여자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퍽 실망한 기색으로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모른 척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점심 먹으러 갈까요? 제가 일이 있어서 같이 가진 못할 거 같고. 학생들 먹고 싶은 걸 사 줄게요. 양껏 먹어도 돼요.”
아이들은 그야말로 아이들다웠다. 언제 풀 죽은 기운을 뿜었냐는 듯 신이 난 여자아이들과, 지루한 강의가 끝났다는 게 단순히 기쁜 듯한 남자아이들이 모두 옷가지들을 챙겼다. 천편일률적인 도톰한 패딩을 물끄러미 보며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동아리 대표 아이를 따로 불러 음식점에 가서 주문한 뒤 연락을 달라고 넌지시 언질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윤신은 밖으로 나가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일이 손 인사 했다. 타닥타닥. 경쾌한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뒤늦게 코트와 서류 가방을 챙긴 윤신도 밖으로 나왔다.
“쌀쌀하네.”
몸을 움츠리며 복도의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강세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휴일 당일에도 세헌은 제게 시간을 내 주지 않았지만 크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땐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이브에는 조찬 회의부터 야간 회의까지 꼼짝없이 회사에 틀어박혀 있었고, 크리스마스엔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미희의 부탁에 따라 외국계 변호사와 함께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세헌이 새벽녘 들어오는 길에 메시지를 남겼던 걸, 소식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이튿날 아침 확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것도 다 참아 넘겼는데 하다 하다 이런 날까지 혼자 있게 만드는 게 왠지 골이 났다.
‘머릿속에 기념일이라는 개념이 없나?’
휴대폰을 꺼내 든 윤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오늘은 그에게 무슨 날인 걸까. 세헌은 웬만해선 월차 같은 것도 일절 활용하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주말을 포함한 정해진 휴일 외에 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휴가도 1년 중 펌 내의 모든 변호사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1주일을 제외하면 안 쓴다는 것 같았다.
억눌렀던 호기심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가 바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할 말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 덕분에 뜬금없이 제 속에 있던 화두를 던지게 되고 말았다.
- 네, 도국 강세헌…….
“12월 31일이 대체 무슨 날이에요?”
제 말허리를 불쑥 잘라먹고 저돌적으로 질문을 토하자 그도 꽤 황당한 듯했다. 조용히 침묵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 전화 예절 어디다 떼먹혔어. 사기당했으면 얘기해. 펌 내에 구제 채널이 있어.
“탁상 달력 위에 있던데요.”
그는 또 잠시 응답이 없었다. 꽤 의미심장한 적막이 흘렀다.
- 언제 그거까지 보셨어? 내 방에서 네가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텐데.
“뭐, 어쩌다 보니요.”
- 내가 쉬는 날. 이 얘기 어제 끝낸 거 아니었어?
“제가 납득을 했어야 끝내죠. 어디 가시냐고요. 이브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저 혼자 두셨죠. 투정 안 부리고 다 참았어요. 그런데 오늘까지 이러는 건 좀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남자라고 해서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되죠. 지금 우리 연애 중이잖아요. 연애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제가 특별히 말씀드리는 건데 커플들은 원래 다 이런 날 만난다고요.”
- 뭐 숨 막히는 인파 사이에 끼어서 데이트라도 하자는 거야?
이번엔 매우 황망해진 윤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당연히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마침 저 오늘 반차 썼고요. 지금 막 일정 끝났어요. 비싼 밥 사 드릴게요. 나오세요.”
- 오늘은 안 돼. 따로 다녀올 데가 있다고 설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 생전 놀러 한 번을 안 가면서 오늘은 어딜 가는데요.”
- 넌 몰라도 돼.
“나 말고 이걸 누가 알 자격이 있는데?”
- 말이 짧…… 됐다, 끊어.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윤신이 뭐라 답을 하려던 차였다. 세헌은 정말 정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황당해서 다시 걸어 봤지만 이번엔 다시 받아 주지 않았다. 물끄러미 검은 화면을 내려다보는 윤신의 안면에 기가 차다는 기색이 완연해졌다.
“이 한결같은 싸가지. 구제 채널 같은 소리 하네. 네 성질은 구제도 안 돼.”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앞머리를 손으로 확, 걷어 올렸다. 찬 공기가 마찰하는 면이 많아졌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반차라고까지 힌트를 줬으면 ‘저녁은 같이 먹을까.’라든지 본인이 정 바쁘다면 ‘이따 잠깐 만나서 차라도 한잔할까, 새벽에 얼굴 좀 보자.’ 따위의 답이 돌아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제 쪽에서 밥을 사겠다는데도 칼같이 거절이다.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느라 연말에도 공사다망하신 건지 도통 모르겠다.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행선지를 감추는 것 같아서 더 궁금했다.
“뭐 얼마나 더 벌려고. 그래 너 열심히 일해서 부자 돼라, 부자 돼.”
신경질적으로 코트 주머니 안에 휴대폰을 넣은 윤신은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다 이제는 그가 전화를 걸어와도 제 쪽에서 안 받아 주겠다는 의사를 단호히 표명하듯 다시 기계를 꺼내 전원을 꺼 버렸다.
* * *
주차장에 도착한 윤신은 널찍한 지하 2층 내부를 한눈에 둘러보았다. 바로 중앙 로비 방향으로 가려다가, 아직 A동 전용 주차 구역에 세헌의 차들이 고스란히 자리에 주차돼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탁 비서에게 받은 정보와, 누나의 비서실장에게 전달받은 적 있는 정보들을 토대로 하면 그의 소유 차량들은 죄다 수상쩍어 보이는 검은색이었다.
“벤츠 한 대, 포드 한 대, 페라리 한 대, 맥라렌 한 대…….”
순차적으로 차들의 개수를 세던 윤신이 일곱 대까지 셋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차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대중교통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차가 있나.’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하나 추가됐다. 반사적으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시 한번 연락해 볼까 싶어져 그것을 꺼내려는데 때마침 정면의 차가 번쩍, 하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뒤이어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윤신이 뒤를 돌아보자, 칠흑처럼 새카만 색 정장을 갖춰 입은 차주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집에 있었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윤신은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을 데생하듯 관찰했다. 한데 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검은 슈트를 갖춰 입은 그의 팔에 새카만 색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드레스 셔츠 위에 정갈하게 걸린 넥타이도 검은색이었다. 착장이 매우 엄숙해 보였다. 이를 통해 연상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차라리 아니길 바라는 모든 순간들이었다.
‘저 사람 반년 넘게 단 한 번도 검은 넥타이 한 적이 없는데.’
암기력은 좋은 편이었다. 확실히, 기억에 없었다. 의아함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는 사이, 세헌이 제 앞에 우뚝 섰다. 그러나 먼저 입술을 벌린 건 윤신 쪽이었다.
“지금 가세요?”
“너 나 스토킹해? 너희 동 구역도 아닌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충동적으로 엇비슷한 걸 하고 있긴 했는데요.”
“했는데.”
“지금 이렇게 마주친 상황엔 짐작되는 인과 관계가 있긴 있어요.”
“뭔데. 같이 좀 알자.”
“제가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우리 인연인가 봐요.”
별안간 말문을 닫은 그가 빤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무성의한 대꾸와 함께 자신을 무심히 지나쳤다.
“닭살 돋아. 비켜.”
이렇게 그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단순히 세헌의 음험해 보이는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표정 또한 여태껏 본 적 없는 퍽 버거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들킨 건지, 보여 주는 건지는 몰랐다. 어찌 됐든 제게 낯선 장면인 것만큼은 명명백백했다. 곁에서 지켜봐 온 세헌은 늘 바빴음에도 심리적인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점심이 지난 이런 애매한 시간에 출발해도 되는 자리라면 일 중독자인 그가 하루 종일 월차를 내는 게 말이 안 됐다. 어쩌면 이런 기분과 표정을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싫어서 굳이 하루를 통으로 날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넘치는 가정이 뇌리에 피어올랐다. 본능적으로 그의 소맷자락을 잡은 윤신이 천천히 손을 끌어 내려 그의 손을 맞잡았다.
“뭐 하는 거야.”
“혹시 선봐요? 싫긴 한데 저도 봤으니까 한 번은 봐 드릴 수 있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
그는 매우 어이없어했다.
“내가 선을 왜 봐. 결혼 생각 없어.”
“나랑도 안 해요?”
“너랑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지.”
“그거 아니면…….”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윤신의 표정이 안 좋았다.
살면서 이렇게 새카만 슈트에 어두운 검은색 타이를 받쳐 매게 됐을 땐 늘 슬픈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친구나 동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변호를 맡던 사건의 의뢰인이 불의의 사고 혹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삼도천을 건넜을 때. 그런 모든 순간마다 마음이 참 찡하고 아팠다.
한참 전부터 달력에 기록해 놓고 있었으니 오늘 당장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닐 터다. 게다가 탁 비서의 말로 매년 이날이면 쉬어 왔다고 했으니 아마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어떤 일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윤신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저조해진 주파수의 음성으로 퍽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수석님 이렇게 입고 계셨죠.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는 대꾸 대신 덤덤하게 자신을 볼 뿐이었다. 하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어떤 정답들이 창백한 얼굴에 분명히 드리워졌다. 좀 더 용기를 낸 윤신이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납골당 같은 데 가시나요? 이런 거 여쭤봐서 죄송해요. 그런데 알고 싶어서요.”
위로해 주어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하면서도, 그가 말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역시나. 지그시 윤신을 보는 그의 낯빛에 이번엔 보다 확실히 무언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정면에서 전부 보고 있는데도 어떤 감정에 기반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았다. 그건 이 순간 세헌의 마음이 꽤나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것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변호사님.”
그가 답이 없어서 윤신이 꽤 힘 있는 말투로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강 변호사님.”
“4년 차. 납골당이란 건 유골함을 수십 년 동안 그 조그만 상자 안에 넣어 둘 금전적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죽어서 가는 곳이야. 그게 평생 도련님으로 산 네 상상력의 한계고.”
“네. 제 상상력 빈약해요. 힘들어 보여서 그래요. 이런 얼굴 처음 봐서요.”
“…….”
“저 진짜 그냥 올라가요? 말 들을게요. 혼자 있고 싶다고 그러면 자리 피해 주고요.”
조용히, 또 아주 고요히 윤신이 말하는 걸 귀담아듣던 세헌이 끝이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내가 너처럼,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면 넌 어떡할래.”
〈정말 죄송한데 잠깐만 같이 있어 주세요. 혼자 못 있겠어서요.〉
오래전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은 지금 많이 힘들어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의 조합이었다.
덤덤히 세헌과 눈을 마주친 윤신이 그의 손을 놓았다. 순간 아주 황망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윤신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단 단 한 번의 행동이 마음을 표현하는 데 훨씬 효율적이었다. 세헌을 뒤로하고 그가 시동을 건 차량의 조수석으로 다가간 윤신은 직접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착실하게 안전벨트를 매고 정면을 주시하자, 그가 자신을 창문 너머로 가만히 응시하는 게 보였다. 저 무표정의 내부에 안심한 기미가 보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다시 걸음을 내디딘 세헌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뒤이어 옆자리의 윤신을 뜻 모를 눈빛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윽고 말없이 핸들을 잡고 능숙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 * *
저녁이 되고, 노을과 그늘이 함께 생기자 햇볕이 대지 위에 내리쬐던 낮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찼다. 물가에 서 있어서 더했다.
주변에 볼 거라곤 하나도 없이 강만 쭉 있는 어느 지방 강변은 퍽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범죄를 다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스산한 풍경이 사방에 펼쳐졌다. 놀랍게도 이곳이 세헌의 오늘 목적지였던 것 같았다. 화려한 삶을 사는 그와 그다지 안 어울리는 장소였다.
불그스름한 빛을 띤 사위의 분위기가 으슥했다. 근방에 있는 거라곤 좁은 국도 하나라서 인적이 드물었다. 여름철쯤에는 물가라 사람이 조금 붐빌지도 모르겠으나, 겨울엔 강이랍시고 보러 올 만큼 운치 있지 못했다. 이 고독한 강가에, 그가 무슨 연유로 온 것일지 대충 짐작만 할 뿐 아직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윤신은 이윽고 강가에 선 세헌의 쓸쓸한 뒷모습을 시야에 꽉 차도록 담았다. 고요하고 황량한 장소에 그마저 없었더라면 자신은 퍽 적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늘 이곳에 혼자 와, 홀로 외로웠을까.
“여기가 어디예요?”
애틋하게 세헌을 응시하던 윤신이 그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넘실거릴 듯 흐르는 강물을 관찰하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안전지대를 확보하려는 것처럼 제 존재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집요한 눈가가 오늘따라 약간 젖은 것처럼 느껴졌다.
새장 문을 열듯 붉은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잠겼다.
“자연 친화적 납골당.”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인지한 윤신은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꾸며 냈다.
“그거 부정 산골 행위 아닌가? 주위에 양식장은 없지만 육지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 않잖아요.”
“틀렸어.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선 이 행위가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아.”
“꽤 오래전부터 편법 즐기며 사셨군요.”
농담에 픽 웃음을 터트리는 세헌에게, 아까 주차장에서 봤을 때의 긴장한 기색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이곳으로 운전해 오는 내내 별말 없더니, 다행히 기분이 좀 나아진 듯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는 꽤 초연해 보였다. 어쩌면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이미 단념한 듯 보였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를 보는 윤신의 마음 한편이 무너졌다. 애써 빚어냈던 명랑한 표정도 얼굴에서 잔불이 꺼지듯 자취를 감췄다. 그걸 지켜보는 세헌의 매끈한 입가에서도 미약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서로를 주시했다.
사방은 트여 있었다. 그러나 꼭 단둘이 좁아터진 원 안에 손을 잡고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각성된 치열한 시선이 오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세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하려는 듯해서, 윤신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수 초가 지나도 살갗에 닿는 촉감이 없었다.
“눈 떠. 눈이 보고 싶어.”
그의 부탁인 듯, 명령인 듯 모호한 지시에 도로 슬그머니 눈을 떴다. 제 눈매를 빤히 주시하던 그가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해 주더니 머리 위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어둠이 완연히 내리깔리기 직전의 붉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세헌의 옆모습 곡선이 아름다웠다. 윤신은 그의 침묵을 함께 향유하며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고개를 기울였다. 두 번은 속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티니 이번엔 진짜로 입술 위에 키스했다. 번뜩 정신이 들어 그를 보자, 한껏 가라앉은 깊은 눈동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직 도윤신뿐이라는 양 제 얼굴을 오롯이 직시하고 있어 부끄러워졌다.
이건 그의 빈틈이다. 윤신은 지금 이 순간이 이런 질문을 할 때라고 느꼈다.
“여기에. 누굴 뿌렸는데요.”
세헌은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동생.”
“동생이 있었어요? 남자? 여자?”
“남자애. 어릴 때 죽었어.”
거기까지 들은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해진 윤신이 추궁하듯 질문했다.
“혹시 저 남동생에 투영해 보시는 겁니까? 그런 트라우마 있는 사람들 있더라고요.”
“프랑스 영화 찍어?”
“아니면 말고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미간을 구기고 싸늘한 시선을 던지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신은 좀 멋쩍은 기분이 들어 괜히 그의 옆에 더 다가갔다. 옆에서 몸을 좌우로 미세하게 들썩이며 그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반복했다. 그게 거슬렸던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나 세헌이 바로 손을 뻗어 왔다.
“이쪽으로 와.”
그는 뒤에서 끌어안듯 마른 몸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시야가 한데 겹쳐져 같은 소실점을 응시했다. 어둠이 가득 드리운 강을 잠시 바라보는가 싶던 세헌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왼쪽 뺨과 귓가에 몇 번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는 제 코끝을 윤신의 턱 주위에 문질렀다. 그 애틋한 촉감이 윤신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좀 더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줄곧 그런 생각을 해 왔지만 지금만큼 강렬한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건 처음이었다.
손을 달싹이던 윤신이 제 허리춤을 감싼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말없이 체온을 교환하며 타이밍을 엿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세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동생은 아니고, 그냥 나를 잘 따랐던 동생이야. 처지가 비슷했어. 같은 동네 쪽방에 살았고, 부모님이 함께 거주하진 않는데 우리가 모르는 지구 어딘가에 살아 계시긴 해서 둘 다 보육원 같은 덴 못 갔어. 법으로 안 된대.”
“왜 죽었는지도 여쭤봐도 돼요?”
“상해 치사.”
원색적으로 말해 폭행당해 죽었단 소리다.
헉, 숨을 몰아쉰 윤신이 고개를 비스듬히 젖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한테요?”
“근처 살던 양아치들 아닐까 추정은 되지만 CCTV 같은 게 잘 설치된 동네도 아니었고. 사고가 일어난 게 어두운 밤이라 목격자도 없었고. 경찰은 부모 없는 애라고 수사를 대충 했고. 또 그땐 나도 어렸지. 시신은 있는데 범인은 없었어.”
정확한 가해자가 누군지는 그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윤신도 때때로 죽음이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차이를 알 정도는 됐다. 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는 제 아버지 같은 죽음이 있다면, 가끔은 이렇게 원인도 모른 채 비참하게 생이 사그라지는 죽음도 존재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주변이 한층 고요해졌다. 이 삭막한 공간에서 서로가 뱉어 내는 것이라곤 숨소리뿐이었다. 냉랭한 바람이 부는 소리, 깨끗하지 못한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한참 뒤편의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그들이 선 자리의 빈틈을 차곡차곡 메워 갔다.
그 가운데 선 세헌이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음성은 물길이 지나가듯 고요했고, 또 너무 덤덤해서 어쩐지 슬펐다.
“이미 죽은 아이 유골은 어디서도 안 맡는다더군, 무연고로 돌릴까도 했는데 애 부모님이 아직 살아 있으면 그것도 안 된다네. 나도 딱히 어디 둘 데가 없어서 여기 뿌렸어. 또 불법인 건 주워들어서 아니까 떳떳하게 뿌리지도 못하고. 겁이 나서 몰래. 밤에.”
“…….”
“여기서 어릴 때 내가 살던 집까진 한참이야. 늦은 밤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한 대여섯 시간쯤 걸었을 거야. 급하게 뿌리긴 뿌렸는데, 너무 시간도 한밤중이었고, 나도 정신이 없어서 이 강 어디쯤이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아. 그냥. 여기 어디쯤? 돈을 많이 벌고 나선 후회했지. 물에 뿌린 걸 다시 수거해 담을 수도 없으니까. 좀 보관해 두고 있을걸.”
이젠 그냥 어딘가로 흘러갔겠거니, 하듯 강을 직시하는 그의 동공의 파동이 잠잠했다.
침착하고 무덤덤하게 내는 이 목소리는 여태까지 들어 본 모든 주파수보다도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아파진 윤신은 세헌의 옆모습을 살피다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양 도도하고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 되지 않는 희미한 빛이 반사돼 반짝이는 물결이 야속했다.
이런 곳에 묻힌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참담한 기분을 몰고 왔다. 저 물마저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이미 한참 전에 그때 그 일을 잊었을 것이다. 키가 작고 앙상한 나무들과 발밑의 자갈들 정도가 세헌과 함께 그날의 슬펐던 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모든 걸 추억하는 건 아주 외로운 일이었을 터다.
“의외로 감성적이신 데가 있네요. 매년 동생 이렇게 기억해 주려고 오시는 거예요?”
“그 반대야. 내가 기억하려고.”
“그 말이 그 말 아니에요?”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있고, 나는 이제 살만 하거든. 얠 가끔 잊어버려. 기억할 것도 생각할 것도 많으니 내가 얼마나 좆같이 살았었는지 때때로 일부러 까먹어. 그래서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꼭 오늘 여기 와서 되새기는 거야. 아, 그런 어린 시절을 거쳐 난 여기까지 왔지. 잊지 말자.”
잊지 말자.
그 말은 꼭 더는 약해지지 말자는 자기 최면처럼 치환돼 들렸다.
그간 세헌에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피 한 방울 안 섞인 동생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미희와 같은 은인을 만나게 되었더라도, 또 더 흘러, 흘러 탁 비서와 같이 그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과 접하게 되었더라도 결국 그가 기댈 수 있는 건 이미 죽어 버린 유년기의 친구뿐이었을 터다.
애틋한 마음은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을 테지만, 그 대상이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의 약점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이제야 왜 강세헌이 이렇게 겁쟁이일 수밖에 없었는지 어렴풋이 잡히는 듯했다. 물론 그에 비하면 그런대로 평탄한 유년 시절을 거쳐 지금 같은 어른이 된 윤신으로선 세헌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본인이 경험한 데까지만 이해가 가능한 법이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흉내일 뿐이었다.
그래도 윤신은 어떻게든 세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뼈가 도드라진 그의 딱딱하고 기다란 손가락을 안타깝게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물은 꼭 흐르기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온대요.”
세헌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윤신은 지금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청하고 있음을 느꼈다.
“변호사님이 매년 여길 와 보듯이, 그분도 꼭 여기 돌아왔을 거예요. 운이 좋으면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죠.”
침묵하고 있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윤신은 정확히 역방향으로 얼굴을 틀어 세헌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도 인과 관계 없는 건 절대 싫으세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특히 이런 일은, 어차피 정답도 없고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미 죽어 없어진 건 아무 힘이 없어. 딱히 눈물 나게 애틋해서 여기 온 게 아냐. 한 해 마무리 잘하고, 마음 다잡는 차원에서 방문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기적으로 다잡아야 할 만큼, 삶이 쉽지도, 녹록하지도 않은 거예요. 수석님도 그렇게 사는 게 버거운 거잖아요. 사방이 적이고, 할 일은 많은 데다, 누굴 믿지도 못해요. 사실은 많이 쓸쓸하고, 외롭죠.”
“…….”
“그래도 이제 저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요?”
할 말을 잃은 듯 그가 눈썹 사이를 구겼다. 윤신이 그 대신 두 배로 웃기 위해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결국 세헌도 졌다는 양 픽 웃음을 터트렸다.
“데려오면 이렇게 쓸데없이 조잘거릴 거 같더라.”
“같이 있어 달라고 한 건 수석님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같이 있게 슬슬 돌아가자.”
툭. 미끈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친 그가 윤신을 품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아주 잠시 강물을 바라보나 싶더니 이내 뒤쪽 강둑에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걸었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건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뒷모습이 편안해 보인다는 거였다.
이 변화가 자신 덕분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던 윤신이 답이 안 나와 뒤늦게 그를 쫓았다.
“우리 저녁은 어디서 먹어요?”
“각자 해결.”
“집에 가서 때우면 시간 애매한데. 올라가는 길에 해치워요. 아까 내려올 때 도로변에 보니까 바지락 칼국수집 있던데 어때요? 조금 전에 제 이마 폭행하신 거 선처해 드릴게요.”
“애원해. 나야말로 그럼 칼국수인지 수제비인지 고려해 볼 테니까.”
“저 밥 사 주세요. 세헌 선배.”
어깨를 으쓱한 그가 돌연 고개를 기울여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수락의 의미 같았다. 웃으면서 그를 쫓던 윤신이 중간에 걸음을 멈칫했다. 감정 주머니를 비집고 나오는 수많은 심리 상태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시동을 걸고, 뒤에서 굳어 있는 윤신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안 타? 놓고 간다.”
“이번엔 화 안 내네요?”
“뭐로 화를 내야 돼? 네가 잘못한 게 한두 가지여야지.”
“이제 이름 불러도 돼요?”
가만히 시선만 던지던 세헌이 차체를 가볍게 건반 두드리듯 내려쳤다. 가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왜 윤신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이 나왔는지를 되짚어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되새기던 그는 머릿속에 결론이 선 건지 보조석을 향해 손짓했다.
재빠르게 뛰어가 조수석에 탑승한 윤신은 올 때 그랬듯 야무지게 벨트를 매고 바깥의 세헌을 응시했다. 왠지 세헌의 반응이 심상찮게 느껴져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건 아닌지 조금 뒤숭숭했다. 차 밖의 그가 이 모습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윤신의 매끈한 뺨을 두 손으로 붙들고 도장 찍듯 꾸욱, 입 맞추고 떼어 냈다.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성냥에 불이 붙듯 눈길이 부딪쳤다.
야릇한 적막 끝에 음성 주파수를 토해 낸 건 윤신이었다.
“아직 안 된다고 하시면 안 그럴게요. 전 그냥, 수석님이 이름 불러 주실 때 기분 좋거든요. 그래서…….”
“해도 돼.”
너무 쉽게 긍정적인 답이 나와 자신이 외려 당황했다. 말을 더듬게 됐다.
“무, 무르시기 없어요.”
“그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애꿎게 손을 달싹이자, 불안을 눈치챈 듯 이번엔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도 키스했다. 곧이어 귀에 실크처럼 착 감기는 음성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저녁은 근사한 데서 사 줄게. 도윤신.”
얼굴을 붉힌 윤신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무래도 연말이라 그런 건지 도로가 예상보다 훨씬 정체됐다. 식사를 마시고 집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밤이 낮과의 세력 싸움에 완승을 거둔 지가 한참이었다.
차창 밖으로 아파트 근방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윤신은 운전 중인 세헌의 손목을 별안간 붙들었다. 그가 무슨 용건이냐는 듯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윤신의 시선은 바깥에 고정된 채였다.
“저 여기 좀 세워 주세요.”
“곧 집인데 어딜 가려고.”
“뭐 사 올 게 있어요.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금방 올 테니까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갓길에 차를 세우게 만들더니 미련 없이 바로 내린 윤신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세헌이 같이 내릴까 하다, 이내 관두고 차에 앉아 뒷모습이 향하는 동선을 살폈다.
집요하게 발길을 눈으로 따라가니, 윤신이 옷 가게들이 있는 상가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최종 목적지는 제일 구석에 자리한 불 켜진 꽃집인 듯했다. 거의 매일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평소에 열려 있는 걸 거의 못 봤는데, 오늘은 대목인 데다 내일이 휴일이라 이 시간까지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커다란 유리 너머로 윤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인에게 신중하게 뭔가를 묻더니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금세 자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한 세헌이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자니, 수 분 뒤 윤신이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하얀색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취향 한번 고상하군.”
“예쁘죠.”
어느새 조수석에 다시 탑승한 윤신은 소중하게 꽃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꽃향기를 맡아 보았다. 그 모습이 꼭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영화 속 한 컷에 홀린 관객처럼 잠시 그걸 관찰하던 세헌은 이내 말없이 다시 차를 출발했다. 이미 집 근처에 당도해 있었던 터라 주차장까지는 금방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길을 따라 로비 방향으로 함께 걸었다. 헤어져야 하는 기준인 각 동의 중문이 보일 즈음, 윤신이 먼저 입을 뗐다.
“이 꽃 뭔지 아세요?”
“백합 아냐?”
“맞아요.”
“댁에 꽂아 두시게?”
“아뇨.”
천만에요, 하고 말하듯 윤신이 세헌을 향해 꽃을 척 내밀었다. 황망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세헌이 눈살을 구겼다.
“이걸 왜 날 줘.”
“일반적인 납골당 같은 데 가시는 거라고 생각하고, 내심 가는 길에 꽃집 같은 게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길은 거의 비포장도로에, 뭐가 아무것도 없어서 못 산 게 마음에 걸려서요. 다음부터 수석님도 이런 거 사 가세요. 국화가 너무 노골적이라 별로면 백합도 외국에선 장례식장에서 쓴대요. 장미도 괜찮고요.”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변호사님이 아니라 동생분한테 만나서 반가웠다는 의미로 드리는 거예요. 수석님은 그냥 전달자고요. 고로 이건 제 선물.”
꽃이라는 건 흔히 쉽게 지는 성질을 떠올리기 쉽지만, 윤신은 그 반대를 먼저 생각했다. 그건 생명력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도 늘 한 송이씩, 또는 몇 송이씩 기분 따라 꽃을 샀다.
당신은 여기에 없지만 이 꽃은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고. 질 걸 알면서도 반드시 만개하고 마는 꽃처럼 자신도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그런 마음들을 그 한 송이에 담아 전하면 슬픈 기분이 많이 사그라졌다. 세헌도 그 생명의 힘을 알았으면 하고 바랐다.
이 모든 애틋함을 모른 척하는 대신, 세헌은 천천히 꽃을 받아 들었다. 윤신이 그랬던 것처럼 향기를 맡았다. 그러는 동안 윤신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어 말했다.
“지난번 그거 말인데요.”
“그거?”
그 순간, 앞·뒤, 좌·우를 공평하게 둘러본 윤신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도 지금 이 순간,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청구서요. 써서 달라고 하셨잖아요.”
꽃을 들고 있던 세헌의 손이 쓱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향긋한 향기를 맡으며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던 그는, 금세 표정을 굳히고 윤신을 직시했다. 영문을 모르는 윤신은 제 생각을 덤덤하게 전할 뿐이었다.
“그거 지금 쓸게요.”
“원하는 게 뭔지부터 얘기해야지.”
“수석님이야말로 일단 이쪽으로 좀 오세요. 오늘 같이 사람들 다 집 밖으로 탈출하는 날 이런 한가한 타이밍이 쉽게 오는 게 아니거든요.”
도대체 뭘 하려는지 보자는 양 그는 거침없이 다가갔다. 인적이 없는 로비 한가운데에 슈트 차림의 남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윤신은 각 동의 승강기가 열리는 기미가 없는지를 힐끗 살피고는 두 팔을 뻗었다. 뒤이어 세헌의 탄탄한 상체를 와락, 끌어안아 제 품에 가뒀다. 그의 키와 체구가 더 커서 버겁긴 했지만 가까스로 허용 범위였다.
“이게 청구서인가?”
“아뇨. 제 요구는, 지금부터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수석님이 웃지 않는 거요.”
윤신은 세헌을 꽉 안은 채로 으스러져라 힘을 주었다. 그의 판단에 시세에 맞는 청구서였던 건지, 그도 얌전히 있어 주었다. 그 덕분에 고요한 가운데 분명하게 이 기분을 전할 수 있었다.
“게임은 제가 졌어요.”
“…….”
“저 수석님 좋아해요.”
신중한 음성이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우는 동안, 세헌은 말이 없었다. 그저 늘씬한 몸을 정물처럼 굳히고 적막을 만들어 냈다. 윤신은 보채지 않았다. 제게 흔들리고 있는 그의 마음 자체는 이미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타인과의 깊은 관계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위해 실질적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줄까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어떤 의미에선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을 전복하는 셈이니 쉽지 않은 결정일 터다. 줄곧 그를 지켜보다 보니 세헌이 왜 선뜻 제게 손 내밀지 못하는지 그 방어적인 심리를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속된 혼자라는 감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게 이제야 견딜 만한 친구처럼 느껴지는데, 새삼스럽게 삶 속에 낯선 이를 끌어들이기가 우려되는 것이다.
하나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감추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그러니 더 숨김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면 되는 일이다.
“도윤신.”
그가 제 이름을 불러 줄 때의 낮은 울림이,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느낌이, 그 차분한 호흡이, 모든 것이 좋았다. 보편적인 도덕 기준으로 봤을 때 썩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윤신은 그가 이미 좋아졌다. 돌이키기엔 멀리 왔다.
바로 그때, 땡, 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며 가운데 있는 B동의 승강기 문 중 두 개가 순차적으로 열렸다. 그제야 세헌의 탄탄한 몸을 놓아준 윤신이 고요한 호수 같은 그의 동공과 눈길을 마주했다.
“어차피 우리 사귀고 있고, 저 수석님 마음 이미 알아서 별로 안 초조해요. 얘기해 줄 준비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오늘 밤은 혼자 있고 싶으실 테니까 우린 내년에 봬요.”
굳어 있던 그가 제 손의 꽃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윤신은 세헌의 견갑골이 도드라진 등을 A동 중문 방향으로 밀어냈다.
뒷걸음질 치며 그를 보자, 세헌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고백을 처음 받아 봤을 리는 만무한데, 그는 이 서툰 마음 표현에 분명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그 또한 이미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서로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제 꿈 꾸고요.”
윤신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함과 동시에 중문을 열고 사람들이 로비로 나왔다. 그 덕분에 윤신의 모습은 사람들의 뒤로 금방 사라졌다.
한참 망연히 서 있던 세헌이 녹슨 기계처럼 뻣뻣하게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 드레스 룸으로 향한 그는 진열대 위에 한 송이 꽃을 툭,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뒤이어 코트를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옷장에 등을 기댄 채로 물끄러미 하얀 꽃잎을 응시하는 눈매가 짙었다. 머릿속에 마치 제야의 종소리 같은 아득한 소리가 둥둥, 울려 퍼졌다. 은은한 꽃향기가 말도 안 되게, 이쪽까지 흘러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줄곧 윤신이 제 흔들리는 마음을 필요에 의해 이용하는 게 아닐까 예측했다. 서로를 겨냥한 진심을 적당히 활용해 자신을 움직이려 한다고 말이다. 그게 몹시 불쾌하면서도 그 끈을 놓고 싶지는 않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해서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우스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사이에 계속 혼돈이 일었다.
사실 조금 전이야말로 윤신이 부부 사이의 갈등을 빚고 있는 누나 이야기를 꺼내리라고 여겼다. 청구서는 차라리 빨리 상황을 명확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싶었던 자신이 일부러 놓은 덫이었기 때문이다. 남을 속이는 데 서툰 윤신이 백기를 선언하고 스스로를 인질로 삼아 그걸 핑계로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면, 지금까지 삶의 문법을 어기고 한 번쯤 들어줄까도 싶었다. 윤신은 그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데 상대는 전혀 다른 화두를 던져 세헌을 뒤흔들었다.
〈저 수석님 좋아해요.〉
그는 늘 모든 걸 의심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날카롭게 판단하고 또 결정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순간 윤신이 제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곤 ‘좋아해요.’가 다였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떻게 제 감정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늘 당당할 수 있는 건지 몰랐다. 감추지도, 숨기지도, 그걸 불편해하는 기미도 없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확신이 없을 땐 그렇다고 표현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 믿음이 생겼을 땐 그걸 서슴없이 상대방에게 이야기했다. 치밀하게 계산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 전혀 하지 않는다.
모든 걸 계산하고 손익을 따져 행동하는 세헌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고 제 짐작의 범주를 벗어나는 윤신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런 만큼 이끌렸다. 어쩌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이용당해 주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빤히, 꿰뚫어 버릴 기세로 백합을 쳐다보던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어색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강가에 다시 도착했을 때 새벽이 돼 있을 것 같긴 하지만, 타인에게 준 선물을 자신이 계속 갖고 있는 게 안 내켰다.
〈아직도 인과 관계 없는 건 절대 싫으세요?〉
도윤신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긴 했으나, 세헌은 놀랍게도 이제 그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꼭 원인이 있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결과가 윤신이면 되는 일이다.
〈잘 오셨어요. 거기서 저 보셨잖아요.〉
다정한 목소리를 곱씹던 그는 결국 고스란히 코트를 도로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이게 윤신이라도 되는 듯 꽃을 손에 쥔 뒤, 다시 집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