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51)

15. 

거실 바닥에 집주인과 손님이 벗어 던진 질 좋은 코트가 겹쳐 있었다.

마치 거기서부터 옷으로 만든 길목이 시작된다고 알려 주기라도 하듯, 중앙의 소파로 향하는 길목에 옷가지들이 질서 있게 널렸다. 두 사람분의 재킷과 타이, 그리고 세헌의 겉옷과 같은 질감으로 된 조끼가 길고 좁게 길을 냈다.

“변호사님, 잠깐, 다리가 꼬, 읏!”

키스하면서 세헌에게 거의 딸려 가던 윤신이 다리가 꼬여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소파 위에 채 올라타지도 못한 그들은 납작한 테이블 옆에 함께 풀썩 무너졌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다. 세헌이 윤신의 허리를 두 손으로 짚어 번쩍 들어 올리더니, 제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태웠다.

어설프게 타인의 하체 위에 자리하게 된 윤신은 그의 넓은 어깨를 지지대 삼아 버티면서 입술을 계속 내주었다. 서로의 살갗이 처음부터 하나이기라도 했다는 양, 뜨거운 키스는 한 번쯤 끊이는 기미도 없이 지속됐다.

“응, 으응!”

까칠한 혀가 엉켜들었다. 매우 거칠게 혀를 놀리는 세헌 때문에 윤신의 몸이 자꾸 들썩였다. 입 속에 그의 미끄덩하고 촉촉한 살덩이가 가득 차 버거웠다. 겨우 새어 나오는 탄성들이 농익어 부끄러웠다.

처음 그가 제게 입 맞췄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남자와의 성적 접촉은 여전히 약간 어색하고 창피했다. 그런 감각들이 확실히 존재했다.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건 세헌의 행위가 매우 능숙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자꾸 휩쓸리다 보면 머릿속에 상념들이 지워지고 그만이 오롯이 남게 됐다.

게걸스레 제 입 안 세계에 탐닉하는 세헌은 꼭 일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서로의 혀끝을 거침없이 계속 얽어 댔다. 살덩이를 빨고, 깨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른 치아와 부드러운 잇몸까지 꼼꼼하게 훑어 나갔다. 그래서 윤신은 이 순간 제 입이 꼭 세헌의 것처럼 느껴졌다.

“음, 하, 숨 막혀요.”

“폐활량 이 정도밖에 안 돼? 입 더 벌려.”

숨통이 점점 조여 드는 느낌이었다. 곤란해진 윤신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제야 입술을 온전하게 떼어 낸 그가 붉어진 눈매로 윤신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세헌은 지금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기분이 온몸을 바람처럼 휩싸자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헐떡이다 겨우 숨을 고른 윤신이 어렵사리 물었다.

“사, 사탕은요?”

바로 대꾸하는 음성이 음산하리만치 낮았다.

“녹았어. 네가 죄다 빨았잖아.”

질척하게 젖은 윤신의 턱 주변을 손끝으로 닦아 준 세헌이 입술도 본인의 것이라고 새기듯 표피 위에 가볍게 살갗을 문질렀다. 그 촉감은 입 안의 온기를 나누는 것만큼 흥분됐다. 이미 옷이 반쯤 벗겨져 외부에 노출된 윤신의 상박이 바르르 떨렸다. 그걸 인지한 듯 그가 큼지막한 손을 아래로 내려 드레스 셔츠 위로 뾰족하게 선 유두를 곧은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하윽! 아!”

그는 옷 위로 손끝을 둥그렇게 굴리면서 부드러운 자극에 익숙해지게 만들더니,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꼬집어서 찌릿한 느낌을 선사했다. 이 온도 차에 당황한 윤신이 입술을 꾹 감쳐물고 안으로 먹히는 신음성만 연신 토해 냈다.

살면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한데 지금 하고 있었다.

그가 제 맨살을 더 거칠게 만져 줬으면 좋겠다.

“으응, 응, 응. 수석님. 이거 싫어요.”

“원하는 걸 분명하게 얘기해. 법정에도 그럴래? 판사님, 전 이거 싫어요.”

“싫, 제발, 하윽!”

세헌은 이미 안달이 난 윤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뼈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이 느긋하게 움직이며 유두 주변을 자극하자, 감질맛이 난 윤신의 몸이 자꾸 앞으로 고꾸라졌다. 허벅지가 떨렸다. 자연히 그 진동이 다리에 전부 전이돼 하체까지 후들거렸다.

좀 더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이 야릇한 순간을 즐기고 싶은데, 그가 여전히 한쪽 손으로 허리춤을 단단히 쥐고 있어 안정적인 자세로 올라타는 게 쉽지 않았다. 윤신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고 싶다는 양 세헌의 결 좋은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헝클어뜨리다가 곧 터럭들을 슬며시 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뺨 이곳저곳에 입 맞췄다.

다시 세헌과 눈을 분명하게 마주했을 때, 그의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가 행동만큼 여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안도했다.

“수석님 맨살에 닿고 싶어요.”

용기 내 입을 연 윤신은 세헌의 커다란 손을 이끌어 제 헝클어진 드레스 셔츠 밑단 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으득 이를 간 그가 단추를 찢듯이 상의를 벗겨 내곤 윤신의 유두를 입에 넣어 먹어 치우려는 것처럼 난폭하게 씹어 대기 시작했다.

“흣! 아흑! 읍!”

세헌은 자비 없이 한쪽 유실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동시에 손을 노련하게 움직였다. 반대편 유두를 손가락으로 굴리고, 바짝 깎은 손톱으로 지분거렸다. 가슴팍에 그의 타액이 질척하게 묻어나는 모습을 보며, 아득해진 윤신은 머리를 젖혀 신음했다. 숨소리에 흥분감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던지 세헌의 손길도 점점 더 과감해지고, 대담해졌다.

“도윤신, 허리 들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착하게 허리를 곧추세운 윤신이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세헌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머리 주변 여기저기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가 뼈가 도드라진 윤신의 상체 이곳저곳을 손바닥과 손가락 끝으로 능숙하게 애무했다. 갈비뼈가 선명한 부분에 손톱을 끼우듯 넣고 긁으며 자극하자 윤신의 깡마른 몸이 파들거렸다.

“하아, 아! 간지러워, 기분이 이상해요.”

“지금부터 더 기분 이상한 짓 할 건데. 안됐군.”

견뎌야지 별수 있겠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윤신의 입술에 다시금 키스했다. 그러면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마른 허리를 두 손으로 지탱하듯 잡더니 제 위로 끌어 내렸다.

“아, 아흑!”

털썩. 서로의 하체가 빈틈없이 마주쳤다. 부딪친 자리 위로 곤두선 상대방의 성기 강직도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세헌은 슈트 하의 아래 감춰진 윤신의 회음 부위로 자신의 뻣뻣하게 일어선 성기가 닿도록 위치를 가늠했다. 그러고는 마른 허리를 몇 번이나 제 위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며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들썩였다.

두 하반신은 자석이 부딪치듯 뭉개지며 부대꼈다. 윤신의 입술을 가르고 새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명을 지를 뻔한 스스로에게 놀라 세헌에게 자신의 하중을 온전하게 의탁했다.

그러자 탄력을 받아 푹푹 눌러 찌르듯이 윤신의 몸을 제 위에 지분거리던 세헌이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자연히 몸을 뒤로 젖히게 되는 바람에 소파에 등이 닿았다. 꼿꼿하게 앉아 있던 그가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이자, 윤신의 무게 중심도 함께 쏠렸다.

그들은 잠시 가쁘게 호흡을 골랐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윤신이었다.

“수석님, 죄송해요. 저 선 것 같아요…….”

힐끗 아랫도리 쪽을 본 세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신의 앞섶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윤신이 창피함으로 목이 깔깔해져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이번엔 서로의 몸을 떼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대로 가 버리려는 건가 싶어져 셔츠 자락을 덥석 쥐자, 그가 놀랍게도 안심시켜 주려는 듯 이마 위에 다정하게 키스하곤 소파에 앉았다.

그는 뒤이어 윤신의 몸을 함께 일으켜 주더니, 소파에 뾰족한 무릎만 걸쳐 서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세헌의 얼굴 앞에, 발기한 성기 때문에 두드러진 앞섶을 내밀게 된 윤신이 당황해서 요란하게 흠칫했다. 뺨에 홍조도 슬그머니 올랐다. 대충 상상이 가는 영역이 있었고, 얼마 뒤 실현되리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뭐, 뭐 하시게요.”

“직접 벗어.”

“현관에 입주민 방범용 CCTV 있어요. 본인 집에도 있을 테니까 잘 아시겠죠. 그래도 저 진짜 이거 벗어요?”

집까지 함께 들어와 놓고 느닷없이 꺼낸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 빠른 세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늘 증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 두는 그에게도 이번엔 활로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이곳은 윤신의 사적 공간이고 그는 스스로 들어와 제게 키스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지금까지가 그저 탐색전이었다면, 이건 보다 명확한 관계의 물꼬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잘 이해한 듯한 그가 오만하게 턱짓했다.

“벗어.”

망설이던 윤신은 제 바지 버클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지퍼를 내리고, 열린 부분을 벌렸다. 바로 드러난 드로어즈 위로 고개를 든 성기가 바로 보였다. 정면에서 이 광경을 전부 눈에 담고 있는 세헌에게는 훨씬 더 잘 보일 터다.

얼굴이 벌게진 윤신이 속옷 위에서 잠시 손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세헌이 뿌리쯤부터 선단까지를 손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쓸면서 부추겼다.

“더 보여 줘야지. 속옷 구경만 시킬래?”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윤신이 마침내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발기한 성기가 수줍게 공기 중에 드러났다. 음낭부터 기둥을 모두 샅샅이 수색하듯 들여다본 세헌이 얼굴을 숙여 까칠한 음모 위에 입을 맞췄다. 화들짝 놀란 윤신이 몸을 비틀거리자, 한 손으로 등과 둔부를 연결하듯 팔로 받쳐 들고 균형을 잡아 주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뻣뻣해진 성기를 다른 한 손으로 잡고는 선단을 입에 불쑥 넣어 물었다.

“아흑! 윽! 잠, 잠깐, 아, 수석님, 흣!”

황망해져 급한 대로 그를 부르자 세헌이 점점 더 입 안 깊은 곳으로 성기를 넣으면서 대답했다. 정확하게 뭐라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앞부분을 문 채로 대꾸하는 바람에 그의 입 안 치아와 젖은 혀가 바짝 약이 오른 표피에 문질러졌다. 헙, 숨을 삼킨 윤신의 상체가 고꾸라지듯 앞으로 무너졌다. 동시에 탄탄한 등을 감싼 그의 셔츠를 구기듯이 쥐었다.

“읏, 읍……. 싫, 싫어.”

싫다는 말은 자체적으로 여과가 된 건지,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성기를 애무했다. 목구멍까지 깊이 넣었다가, 빼냈다가를 몇 번 반복해 사정감을 유도했다. 아울러 손으로는 음낭을 둥글게 굴려 가며 자극했다. 좁아터진 구멍에 선단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다 보니 윤신의 단전부터 사출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

더는 그 어떤 단어도 윤신의 입을 통해 나오지 못했다. 그저 세헌의 셔츠를 쥔 손아귀에만 미친 듯이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핏줄이 퍼렇게 도드라졌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입 안에 넣은 윤신의 것을 점점 더 한계까지 몰아갔다. 쿨쩍, 쿨쩍. 목에 꽂히듯 박아 넣은 성기를 빼낼 때마다 타액이 살갗에 질척하게 얹히는 소리가 일었다.

“으응, 그만! 그…… 그만!”

윤신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세헌의 입 속에 제 것을 미친 듯이 처박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이 치밀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져 그의 머리채를 쥐듯이 뒤로 당겨 버렸다.

팟, 하며 아득하고 좁아터진 동굴에서 겨우 벗어난 성기가 핏줄이 잔뜩 선 채로 허공에서 꺼떡거렸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죄다 빨개진 윤신이 허겁지겁 세헌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보조를 맞췄다. 서로의 손이 몇 번이고 겹쳐졌다. 그 순간마다 전류가 흘렀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쪽, 쪽 가벼운 키스를 나눴다.

몇 번쯤 입술이 부딪쳤을까. 마침내 세헌의 속옷으로 손을 밀어 넣은 윤신이 그의 것을 외부로 꺼냈다. 제 것보다 훨씬 크고, 길고, 단단해서 한 손에 잡기가 버거웠다. 윤신의 보드라운 손바닥 표피가 성기에 닿자 세헌이 가라앉은 신음과 욕지거리를 함께 토해 냈다.

“하, 제기랄.”

줄곧 여유롭게 윤신을 희롱하던 그도 이제 느긋함을 보이는 건 한계치인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윤신의 마른 몸을 덥석 안아 소파에 거칠게 누이더니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마른 두 다리를 벌려 윤신의 하의를 좀 더 밑으로 벗겨 냈다. 눈앞이 흐려진 윤신은 그 선정적인 모습을 최대한 선명하게 지켜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수석님, 저 이제, 할, 할 것 같아요.”

“혼자 즐겼다 이건가? 기다려. 난 아직 멀었어.”

엄지로 사출 직전인 요도 부분을 쿡 누른 세헌이 그 위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꽤 압박감이 있어서 당황한 윤신이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사이, 제 뻣뻣한 성기를 깡마른 허벅지에 툭, 부딪쳤다.

뒤이어 그는 윤신의 마른 두 발목을 겹쳐 붕대 졸라매듯 조이더니 허공을 향해 번쩍 들었다. 늘씬한 다리를 한데 모아 넓고 딱딱한 어깨 위에 올린 그는 윤신의 복사뼈 위에 몇 번 쪼듯이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사타구니 틈바구니에 제 것을 넣어 퍽퍽 난폭하게 찔러 댔다.

자연히 한껏 예민해져 있는 회음 부위에 세헌의 굵은 성기가 닿았다. 음낭에도, 성기에도 필연적으로 부딪쳤다. 그 덕분에 윤신은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응! 아! 아! 아!”

자극이 과해 윤신의 허리가 정신없이 들썩였다. 성기가 점점 더 빠듯하게 발기해서 골반부터 허벅지까지가 죄다 경련했다. 세헌이 이를 느끼곤 팽팽하게 약이 오른 성기 표면을 주물러 주면서 사출을 도왔다. 그 와중에도 제 것을 윤신의 다리 사이에 끼워 들락날락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토정하고 싶은 충동으로 온몸이 무너질 지경이 된 윤신이 두 팔을 바르작거렸다. 안아 달라는 듯 연신 흔들었다. 여느 때의 모습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건 세헌이 이를 무시하고 저 좋을 대로 성기를 다리 사이에 욱여넣다가 회음 부위 위 아무 자리에서 엉망으로 사출해 버리는 거였다.

한데 그는 정말 의외로 윤신의 다리를 끌어 내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워 주고 제 품에 안아 편하게 기대게 만들었다. 곧이어 서로의 치솟듯 발기한 성기를 겹쳐 쥐었다.

“으응, 응, 흐응……. 수석님, 아, 기분 좋아요. 이제 해도 돼요?”

몹시 선정적인 장면의 연속이라 내심 당황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세헌의 품에 있자니 훨씬 안심이 됐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어떻게든 해 줄 것 같았다. 윤신이 턱까지 덜덜 떨어 가며 조심스럽게 묻자, 세헌이 어느 틈에 생리적인 눈물로 젖은 눈가를 입술로 훔쳐 주곤 나지막이 반문했다.

“왜 자꾸 우는 거야?”

“좋아서요. 이건 좋아서 그런 거예요…….”

“이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아! 아! 으음.”

어느 틈에 세헌도 끝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과 동시에 윤신에게 진하게 키스했다. 젖은 입 속에 제 혀를 넣고, 내부의 모든 열들을 빼앗듯 그 안을 유린했다. 동시에 한 손으로 겹쳐 쥔 두 개의 성기를 요령 있게 쓸기 시작했다. 저마다 핏줄이 빠듯하게 선 그것들이 미열을 빚어낼 만큼 난폭하게 마찰했다.

세헌이 서로의 것을 사출로 몰아붙일수록 윤신의 판판한 하복부가 꿈틀거렸다. 특히 윤신은 참을 수 없는 요의에 휩싸여 딱 죽을 맛이었다.

이윽고 각자의 성기에서 쿠퍼액이 쏟아졌다. 꿀렁거리며 선단에서 액체들이 흘러내렸다. 지치지 않고 세헌이 민감한 살결을 계속해서 더듬고, 흔들어 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것에서 정액이 튀었다.

“아흑……!”

“빌어먹을, 윽!”

팟! 세헌의 성기에서 튄 정액이 윤신의 복부를 타고 흘렀다. 윤신의 것에서 튄 찐득한 액체들은 세헌의 질 좋은 셔츠와 바지에 죄다 흩뿌려졌다.

하아, 하아. 헐떡이며 호흡을 고르던 윤신은 세헌의 위로 무너졌다. 그가 자연스럽게 마른 몸을 받쳐 들면서 뒤로 쓰러져 주었다. 그의 기다랗고 늘씬한 몸 위를 완전히 짓누르듯 뭉개 누운 윤신이 단련된 어깨와 목 사이에 뜨거운 숨들을 뱉어 냈다. 워낙 가까이 마찰해 있어서 호흡할 때마다 서로의 몸이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복부와 그의 셔츠가 닿은 자리, 그리고 서로의 성기가 엇갈린 자리들이 끈적거렸다.

부끄러워 얼굴을 감춘 윤신이 속삭이듯 말을 붙였다.

“셔츠는 빨아서 돌려 드릴게요.”

“빨 줄 알아?”

“빨래는 당연히…….”

“그거 말고.”

은근한 음성이 내포한 바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망설이던 윤신은 지쳐 늘어져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조금 전 그가 제게 해 줄 때 직접 한번 해 보고 싶다고 느끼긴 했다. 멍석이 깔리자 못 할 것도 없다 싶어졌다. 한데 사정 후 슬며시 늘어져 있는 그의 성기를 손으로 쥐려고 하자, 세헌이 치워 내고 그대로 다시 제 품에 끌어안았다.

풀썩. 다시 세헌에게 무너진 윤신이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귀를 기댔다. 벅찰 만큼 강렬한 생동감이 전이돼 기분이 묘해졌다.

“하겠다는데 왜 말려요. 해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콘돔 없이 하셔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충동적으로 와서 계산이 아직 안 끝났어.”

그는 아직도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인 걸까.

다만 윤신에게 딱히 설명하는 얘기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스스로의 내부에서 갈등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를 알려 줄 수 없다면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라도 확실하게 해 주길 원했으나, 세헌에겐 그럴 생각 또한 없는 것 같았다.

상체만 미세하게 세운 윤신은 세헌과 시선을 교환했다. 여전히 열락에 젖어 있는 그의 붉어진 눈가가 인상적이었다.

“수석님은 사정한 뒤에 얼굴 이렇구나. 엄청 야해요.”

“마음에 들어?”

“이 얼굴이야 완벽하죠. 이목구비 주차도 딱 좋아요. 누구라도 좋아할걸요.”

말을 이을 때마다 위에서 자꾸 꼼지락거리자 다시 자극이 이어졌던 것 같았다. 허리 아래에서 그의 성기가 함께 꿈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대상으로 흥분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낯설었다. 왠지 가슴이 벅차 돌연 입술을 감쳐문 순간, 세헌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윤신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옷자락을 다시 붙들었다.

“왜 일어나요? 더 이렇게 있을래요.”

티슈로 서로의 정액을 대충 훔친 그가 윤신의 속옷을 대충 여며 주었다. 뒤이어 제 옷매무새도 가다듬으며 답했다.

“가 봐야 돼. 너도 할 일 있지 않나? 알겠지만 난 평가가 박한 편이야. 노력하는 게 좋을걸.”

“숙제 제출 시간을 조금만 미뤄 주시면…… 내일 정오까지?”

“난 한 번도 어쏘한테 시간 미뤄 준 적 없어. 참고가 됐으면 좋겠군.”

그의 답을 곱씹던 윤신이 한 박자 늦게 반박했다.

“저는 다른 어쏘랑은 다르죠.”

“네가 뭐가 다른데.”

“그거야…….”

이미 일어서서 바닥에 떨어진 베스트를 주워 든 그가 소파에 우두커니 앉은 윤신을 힐끗 내려다봤다. 상반신을 탈의한 흐트러진 상태가 눈에 거슬렸던지 아슬아슬하게 허리춤에 걸려 있는 셔츠를 끌어 올려 주었다. 제 상체 위를 덮은 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신이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당신의 애인이라거나,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거나. 대답하고 싶은 말은 많았고, 또 할 수 있는 것도 꽤 되는 듯했는데, 그걸 해도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최선이었다.

“저는 다르죠.”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지 세헌이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곧이어 윤신의 턱을 슬그머니 끌어 올려 짧게 입 맞추고 떼어 냈다. 그가 그러는 동안 윤신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가 보드라운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게 답이에요?”

“고민 중이야. 이용당해 줄지, 말지.”

“뭐 마감 몇 시간 늘려 주는 소소하고 자잘한 특혜조차 안 주면서 뭘 자꾸 이용한다고……. 그래서 진짜 그냥 갈 거예요? 여기서 자고 가시면 안 돼요? 전 일할 테니까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난 못 찾았으니 네가 적당한 이유를 찾아봐.”

“사정 직후에 미련 없이 일어나시는 거 보니까 기분이 몹시 언짢아요.”

손목시계를 힐끗 본 세헌이 시간을 가늠해 보는 듯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일할 동안 나는 놀까? 나도 할 일 있어. 찝찝해서 빨리 씻고 싶기도 하고.”

여기에도 욕실 있는데요. 그것도 세 개나.

그렇게 말하려다 이렇게까지 조르는데도 계속 어깃장을 놓는 그에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관뒀다. 어쩐지 자신만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감정도 조금 상했다. 한일자로 굳게 닫힌 윤신의 입술과 조금 식어 있는 뺨 등지를 관찰하던 세헌이 넌지시 물었다.

“억울해?”

“약간요. 제가 무슨 성욕 처리반입니까? 이렇게 싸고 가시게.”

“너도 내 옷에 쌌으니까 공평하잖아.”

“됐어요. 가세요. 하실 일 있다면서요. 수석님 인생엔 일밖에 없는 거 알아요.”

그 말에, 그가 꽤나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윤신을 응시했다.

매끈한 얼굴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조금 전과 같이 단조로운 입맞춤이 아니라 더 길고, 정성스러운 접촉을 시도했다. 뺨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눈두덩 위와 이마에 한 번, 시계 방향으로 움직여 가며 온 얼굴에 제 냄새를 새기듯 키스하곤, 마지막으로 콧잔등을 부딪쳐 왔다.

강세헌치고는 매우 노력한 듯한 퍽 다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여기 있으면 내가 일을 전혀 못 할 거 같아서 그래. 정신 차렸을 때 일어나려는 거야.”

훨씬 마음이 누그러진 윤신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세헌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이 딱딱한 촉감이 언제나 기분 좋았다.

잡힌 손을 위로 끌어다가 윤신의 부드러운 손등에 쪽, 입 맞춘 그가 살갗을 떼어 냈다.

“지금 그 섭섭한 기분까지 쳐서 청구서 보내.”

“뜬금없이 웬 청구서?”

“너 나한테 원하는 거 있잖아. 적당히 써서 보내라고. 물론 시세에 맞춰서 보내야 나도 대금을 지불할 거야. 바가지 씌우면 기각이야. 간다.”

영문을 모르는 윤신이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세헌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기미가 아주 희미하게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내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오늘도 어제와 똑같이 반짝거렸다. 왜였을까. 윤신은 순간적으로 세헌의 앞면이 아닌 뒷모습만 보고 있는 게 싫어서 심장이 아팠다. 그래서 뒤늦게 손을 뻗었다.

하나 이미 그는 코트마저 주워 들곤 현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세헌을 붙잡아 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삐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여닫혔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거실에는 윤신의 옷만이 반쪽짜리 길이 되어 남아 있었다.

시선을 길게 이어 가다 보니 길의 끝에 잔뜩 헝클어진 자신이 존재했다. 세헌이 대충 걸쳐 준 셔츠를 다시 벗으며, 씻기 위해 몸을 일으킨 윤신은 복부에 채 훔쳐 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의 정액을 발견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휴지로 남은 끈쩍한 것들을 닦아 내는데, 돌연 그가 남기고 간 음성들이 뇌리를 잠식해 갔다.

“청구서…….”

현관으로 통하는 중문을 가만히 지켜보는 윤신의 눈가가 수심으로 젖었다.

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거지. 내가 기대는 게 그렇게 부담인가.

자꾸 이 관계를 거래의 일종으로 단정 짓는 세헌의 태도가 의아했다. 몸값을 책정하고, 자신이 그를 이용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감정과 행위의 교환을 권했다.

서로 마음은 완전히 주지 않았다고 센 척하고 있지만, 윤신은 진지한 연애 관계로 이걸 발전시켜 나가 보고 싶었다. 그도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이미 결심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의미심장하게 던지는 말들이 오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이런 연애 송사에 익숙지 않아 그렇다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상대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강세헌이었다. 도리어 좀 더 노련하고 교활하게 나온다면 모를까. 아무리 낯선 상황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방어적으로 구는 건 좀 이상했다.

단순히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진 않았다. 명백히 세헌은 제게 남다르게 대했다. 숨기고 싶어 하지만 차마 감추지 못하고 새어 나온 그의 애정이 때때로 감지됐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윤신은 세헌이 확실히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그럼 이게 그 사람의 연애 스타일인가? 내가 맞춰야 하나.

고개를 갸웃하던 윤신은 미묘하게 상처가 됐던 세헌의 말을 되새기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청구서 보내라 그럼 못 보낼 줄 알고.’

애꿎은 셔츠를 구긴 그는 한숨을 몰아쉬며 침실로 들어갔다.

* * *

사옥 근방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에 도국의 변호사들과 관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펌에서 무료로 법률 자문을 해 준 공익 인권 영화 〈프린키피아〉의 자문 위원단 대상 비공개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을 냈다.

이 영화는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는 저명한 감독의 연출 작품이었다. 게다가 유명 영화배우 신의건이 개런티 없이 출연한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필연적으로 언론과 대중이 집중하고 있었다.

본래는 사단 법인의 연말연시 봉사 활동 업무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그런 이유들 때문인지 기사화를 위해 대표가 직접 시사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엔 파트너 변호사들과 어쏘 변호사들이 대부분 모이는 연말 행사 자리가 되고 말았다.

북적거리는 상영관 내부를 쓱 둘러본 윤신은 이 안에 세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폈다. 그러면서 제 몫의 자리인 제일 뒷줄 구석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뒤편 출입구 쪽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도윤신 변호사?”

뒤를 돌아본 그의 시야에 미희의 모습이 잡혔다. 그뿐만 아니라 세헌도 함께였다. 그들이 등장하자 다른 변호사들이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윤신도 똑같이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아주 조금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같은 차 타고 온 건가?

단둘이?

“송 수석님. 오셨어요. 강 변호사님이랑 같이 오신 거예요?”

“응.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낭비할 거 뭐 있어. 세헌이 차로 왔어.”

“아…… 그래요?”

대꾸하면서도 윤신의 시선은 앞쪽의 파트너 좌석으로 향하는 세헌의 늘씬한 몸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엔 자신이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한번 쳐다봐 주지도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 다른 파트너 변호사들과 몇 가지 화두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야속했다. 거기에 관심이 팔려 있는 제 모습을 본 미희가 주의를 이끌려는 듯 다시 말을 붙였다.

“자리 왜 혼자 이쪽이에요. 여긴 사무장들 비롯한 임직원들 예비용 칸인데?”

“아, 네. 팀 내에서 제 연차가 워낙 소박하다 보니.”

슬쩍 윤신의 자리를 쳐다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 처우가 납득이 안 가는 듯했다.

“팀으로 자리를 배정할 거면 더 앞이어야지. 회사법 팀이 펌 매출 1위 팀이야. 그것도 압도적으로. 자기 혹시 다른 어쏘들이나 직원들이 괴롭혀?”

사실 다들 재벌가에서 보낸 낙하산이라고 은연중 무시하고, 따돌리고, 프로 보노용 변호사로 대우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낙하산이 맞긴 맞아서 불만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늘 같은 강세헌에게 배속돼 나름대로 그가 쓰임을 인정해 주고 있으니 역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어쏘 변호사들 입장에서 제 존재가 아니꼬운 게 당연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전 선배님들이랑 동떨어져서 차라리 편해요.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여기서 볼게요. 저, 이만 자리로 가 보셔도 돼요. 다들 기다리시네요.”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단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동료들 앞에서 보이는 게 곤란하다는 의미의 눈빛을 은밀하게 보내자, 사람 다루는 데 능숙한 미희가 바로 알아듣고 눈짓했다.

“어머.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그래요. 일단 오늘은 보는 눈이 많으니 자기가 편한 대로 하자. 혹시 상담할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그녀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려 주곤 세헌의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바로 옆 좌석이 채워지자, 세헌이 그제야 이쪽을 돌아봐 주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던 윤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왠지 분한 생각이 치밀어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누구한테는 물건에 지문 묻는 게 싫으니 가능한 한 차 안에 있는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더니.’

물론 꽤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제게도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하나 송 변호사와 자신의 대우가 확연히 달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윤신의 얼굴이 미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변했다.

자신도 미희와 세헌이 오래전 인연으로 워낙 가까운 사이라는 건 알았다. 자세한 것까진 모르지만 탁 비서를 통해 들은 귀동냥들이 있었다.

미희가 외가의 재단을 이용해 후배인 세헌을 어릴 때부터 금전적으로 후원했다고 하고, 또 그도 그걸 잊지 않고 도국을 선택했다고 하니까 꽤 돈독한 사이일 거라고 추측이 가능했다. 한데 보다 정확한 걸 알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세헌은 맨 처음 함께 식사했을 때 자신을 떠보면서 그녀와 잔 적 있느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이 사실 관계를 짚기 위해 한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꽤 뜬금없었다. 아주 중요한 힌트일 가능성도 무시하진 못했다.

‘혹시 두 분도 사귄 적 있나.’

그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니 별게 다 아리송하고 신경 쓰였다.

괜히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은 윤신은 시선을 내리 깔고 애꿎은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계단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웅성거리나 싶더니 곧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여긴 가장 구석 쪽의 네 좌석밖에 안 되는 위치였고, 동서남북을 통틀어 주변의 빈 좌표를 채운 건 윤신 혼자였다. 그래서 사람이 이쪽으로 들어올 거라곤 예상을 못 했다. 무시하려는 찰나, 익숙한 향기를 느끼고 움찔했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생각했던 그대로의 인영이 제 옆으로 와 있었다.

세헌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는데 그가 퍽 황당해하며 가볍게 눈살을 구겼다.

“뭐 해. 비켜.”

“아, 네. 죄송합니다.”

의아해하던 윤신은 뒤늦게 다리를 치워 주었다. 세헌이 윤신의 왼편에 앉았다. 한참 앞쪽 정중앙에 그의 자리인 것으로 추정되는 송 변호사의 옆은 도로 빈 채였다. 그가 말석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람들의 주의가 모두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고 있는데도 그 호기심 섞인 에너지가 충분히 불편했다.

난처해져 긴 목을 손바닥으로 쓸던 윤신이 어깨를 낮춰 속삭이듯 낮은 음성을 토해 냈다.

“왜 여기로 오세요? 수석님 때문에 다른 변호사님들이 다 이쪽 눈치 보잖아요.”

“다시 가?”

“꼭 말씀을 그렇게 하셔야 해요?”

“이미 그렇게 하셨어.”

그가 이렇게 나오자, 윤신도 물러서기가 싫어졌다.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세헌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승부욕을 건드렸다.

“왜 이쪽으로 오신 거냐고요. 저 때문에?”

그제야 흘긋, 윤신을 바라봐 주는 세헌의 얼굴이 덤덤했다. 그는 이미 스스로의 내부에서 답을 내린 것 같았다. 하나 그걸 상대방에게 알려 줄까, 말까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는 듯 보였다. 결국 결론을 지은 듯 그가 가벼운 한숨을 섞어 답했다.

“애초에 오늘 난 여기 못 오는 거였어. 없는 시간 쪼개고 쪼개서 너 보러 왔는데 떨어져 앉아 있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왜 이런 당연한 걸 묻는 거지? 이해가 안 돼.”

그건 연애가 그런 일을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려 주려던 윤신은 이내 관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더 그의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은 더 중요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럼 왜 처음엔 모른 척하고 저쪽으로 가셨는데요.”

“내가 너처럼 여기 놀러 올 군번은 아니지 않나?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거의 모든 파트 팀장이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아. 할 얘기가 있어서 갔던 거야.”

“그럼 일정 있는데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왜요?”

“왜겠어, 잠깐이라도 보고 싶으니까지. 너 진짜 계속 이런 거 질문할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수석님처럼 똑똑하진 않아요.”

“넌 알면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잖아. 표정이 불안해하고 있어. 무슨 일 있었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무슨 일이 있긴 있었을 텐데, 그게 제게 발생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강세헌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저들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본질적으로 남녀 관계인 이상 한 번쯤 불꽃이 튀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망설이던 윤신이 더는 인내하지 못하고 결국 궁금증을 터트리고 말았다. 최대한 낮추고 있던 목소리의 주파수도 조금 높아졌다. 그걸 의식하다 보니 음성 끄트머리가 조금 찢어졌다.

“송 수석님이랑 둘이 사귄 적 있어요?”

이 질문을 듣자마자 매우 황당해하며 인상을 쓴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덧붙여 반문했다.

“너 어디 아파?”

“수석님의 대답에 따라 제 마음이 아플지, 안 아플지가 결정되겠죠.”

세헌과 미희의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하나, 생각한 건 해내고 마는 그의 성향상 등식 성립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예전에 제게 혹시 본인이 누나를 거절한 적 있느냐고 농담처럼 물었던 것도 그렇고, 또 지금은 자신과 은밀하게 관계를 싹 틔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세헌은 사귐의 경계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게이 같진 않았다.

뭐랄까, 차라리 다른 외부 조건을 따진다면 몰라도 마음과 눈에 찬다면 나이나 성별 같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상수는 보이지 않는 타입 아닐까 싶었다.

“이 새끼 오늘 왜 이러는 거야.”

“대답부터 하세요.”

“그런 적 없어. 자, 내가 대답했으니 이제 네 차례야. 너 혹시 질투해?”

윤신은 숨기지 않고 즉답했다.

“네. 두 분만 단둘이 계시는 거 싫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세헌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꺼려졌다.

진지하게 대꾸한 윤신이 눈을 가늘게 뜬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일순 짧은 적막이 이어졌다. 이렇게 바로 가감 없이 수긍할지는 몰랐던지 세헌도 순간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다.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여러 가지 사념들이 스쳤다. 그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으나, 윤신은 이 표정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지 대강 짐작됐다. 그는 지금 다루기 힘든 아이를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스스로의 들뜨는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윤신은 투정을 부려 창피해진 마음에 먼저 화제를 돌렸다.

언젠가 세헌의 책상 위에서 본 달력을 돌이키며 넌지시 질문했다.

“내일 뭐 하세요? 괜찮으시면 우리…….”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스크린을 향해 몸을 틀며 가볍게 응답했다.

“따로 다녀올 데가 있어서 연차 썼어. 우린 내년에나 보게 될 거야.”

어느 틈에 영화가 시작될 때가 된 건지 좌석들이 서서히 채워졌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스크린에선 광고가 시작됐다. 대답과 동시에 제게 옆모습을 보여 주는 세헌을 응시하며, 윤신은 어둑어둑한 가운데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약속도 안 했는데 나랑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지.’

내일이 바로 12월 31일이었다. 윤신도 큰마음 먹고 반차를 썼다. 도국에 입사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전 중엔 세헌 대신 사단 법인 봉사 활동 시간을 좀 더 채우기 위해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로 교육을 가게 돼 있었다. 아이들 방학 기간이라 꼭 특강을 들을 생각이 있는 학생들만 선착순으로 받아 치르는 소규모 강연이었다. 그게 끝나고 오후엔 세헌을 만나 함께 새해를 맞이하면 어떨까 막연히 생각하던 참이었다.

매년 인류를 찾아오는 한 해의 마지막이 새삼스러운 사건인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날까지 일에 파묻혀 있고 싶지 않았다. 누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에 갔다고 하니, 마침 핑계도 좋았다. 혼자라 쓸쓸하다고 하면, 그는 제 옆으로 와 줄 것 같았다.

또 굳이 제 쪽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지난번 탁 비서에게 물어봤을 때 그가 매년 쉬는 날이라고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을까 계산했던 게 사실이다. 세헌에겐 그런 날 만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내일이 대체 무슨 날이길래.’

혼란스러워진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옆모습이 너무 완고해서 차마 내일이 뭐 하는 날이냐고, 자신과 함께 있어 줄 순 없는 거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보다가 뺨에 떠오른 홍조를 감추듯 고개를 돌리려는데, 때마침 암전이 내려 다행이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진 사이 세헌의 손이 제 쪽으로 향했다. 그는 윤신의 보드라운 뺨을 붙들고 쪽,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빠르게 떨어져 나간 그는 스크린에 영상이 떠오르며 빛이 들어왔을 때 이미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정면만 보고 있는 채였다.

윤신은 세헌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복잡한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불안해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의 뼈가 도드라진 오른 손등을 붙잡고, 매끈하고 청결해서 늘 도리어 외설적으로 보이는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세헌은 밀어내긴커녕, 윤신의 손가락 사이 계곡을 지분거리는 것으로 답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윤신의 뺨이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고개까지 그의 어깨에 기대려고 하자, 기미를 느꼈는지 그가 이쪽을 다시 힐끗 봤다.

자연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세헌이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었다.

그 순간 윤신은 온몸이 다 얼어붙는 것 같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미치겠다.’

그를 제 손에 완전히 쥐고 싶은 탐욕이 치밀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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