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퍽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윤신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탁 비서가 말간 얼굴로 시선을 던지는 그를 향해 자료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도 변호사님. 바쁘세요?”
“아, 탁 비서님.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탁 비서는 윤신의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었다. 그가 바로 읽어 보려고 하자, 굳은 표정을 지으며 종이 첫 장 위에 척 손을 올려 그 행위를 막아 냈다.
“잠깐. 보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강 수석님 요즘 기분 왜 저조한지 혹시 아세요?”
윤신은 얼마든지 즉답을 줄 기세로 경청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야말로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요즘 좀 예민하신 거 맞는 거죠? 며칠 전부터 긴가민가했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저도 몰라서 여쭤본 거예요. 두통약 다시 찾으시길래요.”
필연적으로 얼마 전 그가 집무실 안에서 덤덤하게 뱉어 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사람들이 날 이용하는 덴 익숙해.〉
아무래도 자신의 무언가가 그를 또 골치 아프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은데, 형체가 정확하게는 안 잡혔다. 요사이 계속 고민해 봤는데도 뚜렷하게 윤곽조차 안 섰다. 특별히 실수하거나, 실언한 일이 안 떠올랐던 탓이다. 심란해진 윤신이 금세 혼자만의 사념에 빠져들자 탁 비서가 이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불쑥 말을 걸어 흐름을 끊었다.
“어제 영진건설 매수 자문 회의 끝나고 나오시면서 저한테 질문할 거 있다고, 내일 잠깐 보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제야 탁 비서가 제 방에 들어온 진짜 목적을 떠올려 낸 윤신이 입을 열었다.
“아, 네. 그 회의요. 제가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완전히 전쟁터더라고요.”
“그렇죠. 펌 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변호사들 다 그 방에 있었을 테니까.”
“팁 주실 거 없으세요?”
“강 수석님 눈에 띄고 싶으세요?”
세헌의 말로 미루어, 그 부분은 이미 꽤 오래전에 해결된 것 같았다.
“그것보단,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싶어요.”
“어차피 일이야 다 잘하는 분들이고, 그중에서 강한 인상을 주려면 공개하기엔 치명적이고 감추기엔 아슬아슬한 정보를 쥐고 계시면 돼요. 무슨 얘긴지는, 아시죠?”
그 정돈 자신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물밑 정보에 강한 타입이 아니었다. 정보력을 강하게 만드는 일은 돈과 품이 많이 든다.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성과 필요할 땐 끊어 내는 과단성도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약간의 비도덕적인 상황들을 눈감고 모른 척할 만한 유연한 가치관이 필요했다.
얼굴에 자신 없다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던 건지, 탁 비서가 차분히 이어 말했다.
“그런 걸 구할 수 없다면…… 때때로 질의하실 수 있어요. 그때 우물쭈물하지 말고 대답 잘하시고. 시키기 전에 뭐라도 해 보겠다고 하시고, 혹 레포트 제출하라고 하면 핵심이 눈에 확 들어오게. 여태 도 변호사님이 제출한 각종 준비 서면, 의견서. 다 보기 편해 하셨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까마득한 선배들 앞이라고 해도, 설혹 그 사람들 의견을 부정하는 거라고 해도 목소리 내는 걸 주저하지 마요. 틀리는 것도 싫어하시지만 업계 선배라고 눈치 보고 머뭇거리는 건 더 싫어하세요. 그러다 회의실에서 쫓겨난 어쏘 제가 한 다섯쯤 봤어요.”
“전 그런 짤 없는 부분이 정말 강 변호사님답다고 생각해요.”
동의한다는 의미인지, 탁 비서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어 물었다.
“노동법 말고, M&A에 도움되는 법 중 2타 있어요?”
“환경요. 좀 알아요. NGO들 사건 몇 번 수임한 적도 있고. 토양 환경 보전 법. 폐기물 관리법, 위험물 안전 관리법, 특히 잘 아는 편이에요. 안 그래도 영진건설에 걸린 계류 중인 소송 하나 있던데요.”
“그거 잘됐네요. 환경은 특히 건설, 제조업 이런 덴 100퍼센트 도움되잖아요.”
윤신은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넌지시 질문했다.
“특별 팀에 환경 법 전문 변호사도 계신데 제가 끼어들어도 될까요? 그 나이 지긋한 분.”
“지금까지 제가 한 말 뭘로 들었어요? 일단 지르세요. 아, 혹시 실측할 업체들 아세요?”
“업체요? 펌 내부에도 실사 조사 팀이 있던데 그 팀에 맡기는 게 아니었습니까?”
“마침 강 변호사님은 그 팀을 별로 신뢰 안 하세요. 회사가 법규 위반한 게 많으면 값을 후려칠 수 있잖아요. 아는 데 있으면 도 변호사님이 담당하겠다고 해 버리세요.”
좋은 생각이었지만, 그건 자신이 세헌의 기대치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냈을 때의 얘기였다.
“대체 얼마나 후려쳐야 만족하실까요. 뉴스 기사 좀 찾아보니까 강 수석님은 매수할 때 그거 전문이시라던데.”
“수석님은 전문이랄 게 없어요. 다 잘해요. 지난번 매각 자문 때 최종 인수가 프리미엄 얼마를 붙여 줬는지 들으면 깜짝 놀랄 걸요. 처음 인수 소식 나왔을 때랑 비교하면 거의 40퍼센트 가까이 웃돈 받아 내 주셨어요.”
“얼마나 우량 매물이었길래요?”
“2년 연속 적자 회사였어요.”
“가능해요?”
“경제 뉴스는 잘 안 보고 사시는군요? 곧 적응될 거예요.”
갸웃하던 고개를 겨우 끄덕인 윤신은 일반적인 잣대로 강세헌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애써 환경 관련 수치들을 실측해 줄 업체들을 떠올려 봤다. 생전 아버지의 인맥이었던 터라 실력 측면으로도, 정보 보안 측면으로도 믿을 만했다. 그는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불러와 탁 비서에게 적어 주었다.
“아버지랑 잘 아는 분이 업체 대표님이시거든요. 제가 먼저 연락은 드려 놓을게요. 강 변호사님이 허락하시면 실무진 접촉해 주세요.”
“그러죠. 염려 말아요. 저 일 잘하는 거 알죠?”
“하, 정말 고마워요. 번번이 이 은혜 어떻게 갚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펌에서 가능한 한 오래 일해 주세요.”
웃으며 인사한 탁 비서는 윤신이 준 메모지를 고이 챙겨 들곤 방을 나섰다.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묵례를 보낸 그는 탁 비서가 주고 간 도톰한 서류를 책상에 가득 차게 펼쳤다. 그러고는 시계를 확인한 뒤, 스톱워치를 맞춰 놓고 아주 꼼꼼하게 속독하기 시작했다.
이는 특별 팀 변호사들에게 전부 내려온 공통 서면이었다.
현재 대략적인 매수 계획은 세헌의 머릿속에 수립이 된 상태 같았다. 본격적인 자문 절차에 들어가기 전, 초반 회의를 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거래 구조를 검토하고, 법적 이슈들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영진건설…… 영진건설. 나랑 연결 고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느낌이 익숙하지.”
자료들을 훑어보던 윤신은 인터넷으로 해당 건설 회사 대표의 이름을 검색했다. 대표 이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한참을 보며, 남자의 이름 세 글자를 곱씹고 있다 보니 그제야 왜 이렇게 모든 게 낯익게 느껴졌는지를 깨달았다.
분명 언젠가 누나와 근황을 교환하며 이 사람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남편이 외도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은 과연 영원한가.’ 따위의 추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냥 한가할 때 나누었던 잡담이었던지라, 그동안 머릿속에서 흐렸던 것 같았다.
〈공개하기엔 치명적이고 감추기엔 아슬아슬한 정보를 쥐고 계시면 돼요.〉
조금 전 탁 비서가 남기고 간 충고를 황급히 떠올린 그는 급한 대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받지를 않았다. 요즘 이런 일이 잦았다. 씁쓸한 숨을 삼키며 그녀의 비서실장에게 연락하자, 다행히 목소리가 바로 되돌아왔다.
- 변호사님? 어쩐 일이세요. 안 그래도 신년에 뵐 수 있을 듯해 연락드리려던 참입니다.
“누나 이제 나올 수 있대요?”
- 네. 편하신 날짜 알려 주세요. 장소를 잡겠습니다.
“일정 확인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누나 또 전화 안 받네요. 좀 괜찮은 겁니까?”
또 매형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아닐까 우려됐다. 그가 무척 조심스럽게 묻자, 상대방도 그의 긴장을 느낀 건지 나지막이 응답했다.
- 걱정하셨나 보군요. 지금은 잠시 친구분 접견 중이시라 못 받으신 겁니다. 옆방에 계신데 보고드릴까요?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저, 다름이 아니라 뭐 좀 여쭤보려고요. 누나랑 했던 얘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요. 영진그룹 3남 조원익 씨요. 누나랑 친분 있는 거 맞죠?”
- 조원익 사장이요? 네, 그분이 아니라 아내분과 관장님이 친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만나고 계세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다…….
“반만 맞았구나. 알고 전화드린 건 아니고요. 좀 확인 부탁드릴 게 있는데. 실장님이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오프 더 레코드고. 제 일에 관한 거예요. 말씀해 주시기 어렵겠지만 저한테 꼭 필요해서요.”
- 어, 그런 얘길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않고요. 제가 집무실에서 바로 다시 연락드리죠.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기다릴게요.”
어쩌면 자신이 세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들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쓸 만한 정보 같은 건 없지만, 제겐 한 가지 다른 변호사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누나의 존재였다.
통화를 잠시 종료한 윤신은 바깥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분주해 보이는 비서 팀 직원들 너머로 불 켜진 세헌의 방을 쳐다보다가, 재빨리 블라인드를 내렸다. 차락. 내외부가 차단되자 방 안에 훨씬 고즈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사이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응답하는 상대방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윤신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 * *
마침 시니어 변호사 한 사람이 세헌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닫기 직전,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신이 바통을 터치하듯 몸을 안쪽으로 기울였다. 시니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집무실로 들어서자, 새로운 인물의 느닷없는 등장이 황당하다는 듯 세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난 4년 차를 부른 기억이 없는데.”
“바쁘세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세헌이 들어와도 좋다는 듯 손을 까딱, 했다. 서류 한 부와 휴대폰을 한데 겹쳐 조신하게 들고 있던 윤신이 완전히 문을 닫고 그쪽으로 다가섰다.
“보내 준 자료 검토는 제대로 한 거야? 지금 이 방에 와서 노닥거릴 시간 없는 거 아니었나? 한 시간 뒤에 회의야.”
“일단 일독은 했고요.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긴지 우선 해 보라는 듯 다리를 척 꼬고 앉은 그가 윤신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세헌이었다. 괜스레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뜸 들이지 말라는 양 ‘딱.’ 소리 나게 핑거 스냅을 쳐서,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영진건설요. 부채 비율이 지난해랑 거의 비슷해요.”
“비율이 비슷하긴 해도 그게 거의 악성 채무야.”
“그렇긴 한데요. 성장 한계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실적이 제로는 아닙니다. 굳이 이 타이밍에 이만한 규모의 회사를 매각한다는 게 좀 미심쩍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따로 알아보니 그 구조 조정 뒤에 오너 3세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정보가 있어요. 조원익 씨요. 아마 수석님도 알고 계실 듯한데요.”
차분하게 응답하는 세헌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얼마 전에 영진 3세의 외도 상대가 바뀌었습니다. 영화배우요.”
신줏단지처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켠 윤신은 사진을 하나 찾아 세헌의 앞에 보여 줬다. 그가 화면 속 배우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전방의 윤신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서 도리어 제 쪽이 당황했다.
“안 놀라시네요.”
“놀라야 하나?”
“외도 상대가 남자잖아요.”
“아, 넌 외도 쪽이 아니라 남자인 쪽이 놀랄 만한 지점이었나 보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낸 그가 윤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윤신은 마른침을 삼키곤 가능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이 배우 관련한 투자가 매우 공격적으로 늘어났어요. 영화 제작사에 출처 세탁된 돈이 300억 가까이나 들어왔답니다. 더 들어올 예정이고요. 세간에선 사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대요. 조 대표는 아내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안답니다.”
“그럴 만도. 그 두 사람 오랜 친구잖아. 보통은 유부남끼리 사귄다고 생각을 못 하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하필 관계가 변한 이 타이밍에 건설을 매각하고 외도 상대 쪽으로 자금 흐름을 터놓는 게…….”
“수상쩍다?”
“네. 이게 자금 유동성을 확보해서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한다는 의사로 볼 수도 있을까요?”
흐음. 낮은 숨을 뱉어 낸 세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얼굴에 예상 밖이라는 기미가 그다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도 영 모르는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윤신에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설명해 주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듯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난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추정하고 있어. 뭐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은 건지 앞으론 이게 돈이 된다고 판단했나 봐. 본인 연애사와도 관련이 있겠지. 네 얘길 듣고 나니 흐리던 연관 관계가 확실하게 성립이 되는군.”
“지금은 침체기지만, 멀리 보면 건설이 더 전망은 낫지 않나요. 엔터는 너무 불확실해서요.”
“원래 머저리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잘 안 해. 당장 남이 주는 달콤한 말만 받아먹지. 중간이 꾼이 붙은 것 같아. 그런데 넌 조 대표한테 남자 애인이 생겼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도 못 찾은 걸.”
머쓱해진 윤신이 솔직하게 답했다.
“어,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치트 키?”
“너희 누나?”
“조 대표 아내랑 친구래요. 꽤 막역한가 봐요.”
그 두 문장으로도 대충 흐름이 유추가 되는지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를 고쳐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그는 윤신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하곤 이어 말했다.
“자, 4년 차. 우린 정보를 쥐었어. 동성 스캔들이라 영진 그룹에는 꽤 치명적이긴 한데 M&A 자체에는 아무런 타격을 못 줘. 웬만큼 서로 바닥 치지 않는 이상 어차피 공론화도 못 할 거야. 하지만 안 써먹기엔 매우 아깝고 찜찜하지. 이 정보를 어떻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영진건설의 값을 후려칠 수 있을까. 너라면 어떻게 설계할 거지? 구조를 짜 봐.”
그에겐 분명히 답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출한 대답이 본인이 틀어쥐고 있는 해설서와 일치하는지를 보려는 듯했다. 윤신은 1차 테스트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안에 들어오기 직전 어떤 방식이라야 ‘도국’이 이길 수 있을지를 끈질기게 고민했다. 강세헌이라면 어떻게 할지도 함께 생각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가격을 후려치지 않는 겁니다.”
“않는다? 돈 벌기 싫어?”
“물론 제일 처음에만요.”
그의 눈매가 꽤 의외라는 듯 가늘어졌다. 제 답변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질문마다 망설이지 않고 단박에 대꾸해서인지는 몰랐다. 윤신이 당장 생각해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영진 그룹은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영진건설도 중견 건설사예요. 일개 로펌이 스캔들로 흔들어 봤자 주가에 영향을 주긴 해도 그때뿐일 테니 방어할 겁니다. 매각 절차 앞두고 있으면 더더욱요. 그렇게 한 번 쓰고 나면 이 정보는 휴지 조각이 되죠.”
동의하듯 그가 느긋한 시선을 보냈다. 계속해 보라는 의미임을 아는 윤신이 이어 말했다.
“물밑으로 프리미엄 제안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영진에서 가격을 써 내면 웃돈 얹어 배팅하겠다고 따로 협상을 하는 겁니다. 대신 조건을 우리한테 유리하게 거는 거죠.”
“그런 다음 나중에 장부 가치를 낮춰 입찰가를 후려친다.”
건설주는 정부 정책이나 규제에 따라 특히 쉽게 요동쳤다. 쉽게 말해 밖에서 작정하고 흔들면 기업의 가치가 반드시 동요했다. 계약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갈 즈음 태산의 힘을 빌려 이 패를 적절히 정치적으로 활용하면 영진건설 측도 어느 정도는 타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다른 입찰자들을 밀어낼 방법이야 세헌에겐 얼마든지 있을 터다.
세헌을 흉내 내며, 또 나름대로 사안의 특수성에 착안해 아이디어를 낸 건데, 그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이윽고 천천히 손을 끌어 내리고 정면을 직시했을 때쯤에는 눈가가 차갑게 변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인가 싶었는데,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잠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너 남 뒤통수치는 얘기 하면서 신나 보인다.”
“그냥 하나의 설계일 뿐인데요.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래. 알겠어. 이게 얼마큼 쓸모가 있을지는 내가 고민해 보지.”
“제 대답이 커트라인 정도는 되나요?”
“단순해. 착한 인간이 나쁜 짓 하려니 그 이상의 아이디어가 안 나오지. 꽝이야.”
대답과 함께 지그시 자신을 직시하는 눈가에는 조금 전 비치던 냉랭함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무색무취의 물체가 존재한다면 아마 이 순간 그의 눈빛과 성질이 엇비슷할 듯했다.
그런데도 윤신은 이상할 정도로 그의 차분한 동공이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힐난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왠지 멋쩍어서 분위기를 환기해야겠다고 느꼈다. 윤신은 그때까지도 얌전히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내밀어, 종이 앞부분을 짚었다.
“여기, 이거.”
세헌은 그걸 받아 들면서 눈으로 퍽 신중하게 내용을 살폈다.
“이게 왜.”
“영진건설 상대로 피소된 소송이 법원에 계류 중이던데요. 토양 환경 보전 법에 저촉되는 환경 이슈가 걸려 있습니다. 저도 껴서 해 보고 싶어서요. 환경 법은 알 만큼은 압니다.”
“이 소송 청구 금액은 인수 회사 측에서 지불해야 할 수도, 아닐 수도 있어. 법적으로 더 다투어 봐야 해. 맞는다면 이 부분은 영진건설의 채무로 간주하고 카드로 쓸 생각이야.”
“사이즈는 작지만 언론 보도로 엮어 볼 만은 해요. 똑같은 말이라도 환경을 오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작게 들리지만, 토양 내 잔류성 오염 물질 때문에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했다고 위기의식이 들게 하면. 또 다를 테니까요.”
언론을 상대로 비열한 말장난을 하는 건 세헌이 종종 쓰는 방식이었다. 여론 선동이야말로 그의 전공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걸 위해 언론사 중진들과의 주기적인 만남에 꽤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았다. 그는 여론전 과정에서 상대편에게 빈틈이 생기면 그야말로 야비하고 확실하게 파고들어 승기를 거머쥐었다.
윤신도 외부에 있을 때 그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한 큰 사건을 맡을 때마다 이런 술책을 쓰는 걸 아주 먼발치에서 봐 왔다. 일종의 벤치마킹 같은 거였다.
한데 이번에도 세헌은 자신이 제시한 방안이 썩 달갑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또한 정답이 아니었나 싶어진 윤신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몰아쉰 그가 내선을 연결해 빈 공간을 제 가라앉은 음성으로 채웠다.
“탁 비. 태산 쪽에 연락해서 사람 보내라고 전해. 오늘 오후 6시까지.”
용건만 간단히 전한 그는 우아하게 인터폰을 내려놓고 다시 윤신을 응시했다.
“여론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야. 만드는 거지. 환경 이슈 보도 자료 초고 한번 써 볼래?”
“그래도 돼요?”
“그거 보고, 맡길지 말지 결정하지.”
“감사합니다.”
인사한 윤신이 이쯤에서 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몸을 슬쩍 틀었다. 그 순간, 세헌이 아직 가지 말라는 듯 곧고 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나 묻자. 이 스캔들, 만에 하나 퍼지기라도 하면 너희 누나 친구 가정은 물론이고 연루된 사람들 인생이 죄다 박살 날 거야. 정육점 좌판에 고기 나열되듯 낱낱이 사람들 눈앞에서 전시될 거라고. 나 줄 때 찜찜하지 않았어?”
“수석님은 그런 식으로는 안 쓰실 거잖아요. 감추는 편이 더 가치 있으니까요.”
“내 앞에 가져온 네 기분을 묻는 거야.”
물론 남의 불행을 승리를 위한 발판으로 쓰라고 상납한 셈이니 마음이 매우 불편한 건 사실이다. 비서실장을 통해 얘길 들어 보니 누나가 조원익 대표 아내와 친분을 만들기 시작한 건 서로 처지가 썩 유사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데 거대한 기업을 상대로 개인이 싸우기는 쉽지 않고, 또 하필이면 그 이유마저도 비슷해서 공감대가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걸 건드리게 되는 격이라 몇 배로 더 편치 못했다.
하지만 이게 제 일이었다. 아주 자잘한 정보라도 도국이 이기는 데 일조하려면 공유하는 게 맞았다. 지난 기간 동안 자기 암시를 끊임없이 해 왔고, 이젠 마음의 준비도 완전히 끝났다. 윤신은 기왕이면 그냥저냥이 아니라, 제대로 버텨 볼 셈이었다.
세헌의 물음이 여전히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고 으레 떠보는 질문이라고 여긴 윤신은 가능한 한 평정심을 꾸며 응수했다.
“그 가정은 이미 균열이 한참 가 있어요. 아내분도 이혼 생각하시는 걸로 압니다. 도리어 이혼 소송엔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좋아. 거긴 그렇다 쳐. 하루아침에 타 기업에 잡아먹히게 될 영진건설 직원들 생각은 안 하나? 난 가능한 한 값을 후려칠 거야. 태산이 나한테 원하는 건 그거니까. 이 과정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해고될 거고…… 몇 개월 전의 너라면 그 사람들 생각부터 했을 거 같은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팀에서 일을 하는군. 그것도 자발적으로.”
“도국에 왔으면 도국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신 건 수석님입니다.”
할 말은 잃은 사람처럼 한일자로 입술을 감쳐문 세헌이 뒤늦게 몸을 조금 들썩였다. 끼익. 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브레이크가 걸리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오싹할 만큼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세헌이었다.
“내일 오전 8시 59분까지 네가 말한 크고 작은 두 갈래로 보도 자료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읽어 보고 부를게.”
“알겠습니다.”
꾸벅, 허리까지 깊이 숙여 인사한 윤신은 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중간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세헌이 제대로 일을 시켜 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쁜 것 같았다. 본인의 말마따나 도움이 됐다는 뿌듯함도 느끼는 듯했다.
윤신이 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는 동선을 꼼꼼하게 지켜보던 세헌은 이내 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의 중요한 쟁점들을 체크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돌연 신경질적으로 펜대를 휙, 던져 버렸다. 손끝에 날카로운 짜증이 여름철 땀처럼 흠뻑 묻어났다. 계속 윤신의 앞에서 무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혀를 입 안으로 씹는 그의 미간이 격랑을 맞닥뜨린 듯 흠씬 구겨졌다. 고개를 휙 뒤로 젖힌 세헌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한동안 소강상태인가 싶더니, 요즘 그는 또다시 머리가 아팠다. 기제는 윤신이었다.
“네가 일을 매뉴얼대로 잘하는데…… 왜 내 기분이 엿 같을까.”
줄곧 이렇게 움직여 주길 바랐다. 왜 그러지 않느냐고 여러 번 반복해서 책망하기도 했다. 도윤신은 아주 제대로 하고 있었다. 적응력이 좋은 건지 몇 번의 부침 끝에 이제는 그의 흉내를 그럴싸하게 내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덕분에 제 모습을 통해서는 눈에 보여도 모른 척할 수 있던 모든 것들이 거울을 비춘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수해서 더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왜일까. 기다렸던 일이 일어난 거였는데 막상 그걸 보고 있자니 마치 마음이 썩는 느낌이 들었다.
우습게도 자신이 진짜로 원했던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이제 와 싹텄다. 이런 갈팡질팡 못하는 감각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감정이라 혼란스러웠다.
“젠장.”
욕지거리를 잇새로 짓이기듯 뱉어 낸 그는 빠른 속도로 자신을 닮아 가는 윤신을 애써 뇌리에서 떨어내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 * *
오랜만에 택시로 퇴근한 윤신은 기사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 불투명한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든 건 탄산수 몇 병과 스낵, 두통약, 그리고 레몬 맛 캔디였다. 그것들이 모두 잘 들어 있는지를 눈대중으로 훑던 그는 개중 캔디의 포장을 까서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때, 쌩하고 찬 바람이 불어와 도톰한 재킷 옷깃을 여몄다. 벌써 한 해가 다 지나 12월의 말미를 향해 갔다.
“으, 추워.”
휴대폰을 쥐락펴락하며 걷던 그는 그나마 한가한 날짜를 정리해 메시지에 적었다. 자정이 이미 넘어 시간이 늦긴 했지만 원래 누나와는 새벽에도 종종 통화하곤 했던 터라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 면목이 없으나, 이젠 맞선에 관한 얘기를 꺼낼 타이밍이 됐다고 느꼈다.
새 프로젝트를 맡는 바람에 당장 이번 달은 다시 뵙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당사자에게 연락을 해 두었다. 그사이 누나와 이야기를 정리해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 의견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만나자는 약속을 누나 쪽에서 어영부영 미루는 사이 벌써 한 해의 끝이 다다라 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녀도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시기를 더 미루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윤신이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차였다. 왼편 좁은 도로에서 검은색 차량이 주차장 방면으로 달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동네에서 그렇게 보기 드물지 않은 고급 세단이어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데 차 번호판을 보고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세헌의 차였다.
“변호사님? 강 변호사님!”
뒤늦게 윤신이 손을 흔들어 봤지만 차는 무심히 그를 지나칠 따름이었다. 물론 세헌의 성격상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으나, 제 직감이 정말 못 봤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차장과 이곳의 거리,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로비까지의 이동 속도 따위를 빠르게 계산한 윤신은 일단 건물 출입구로 뛰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세헌이 사는 A동 건물로 진입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어 낯설긴 했지만 구조가 같아서 동선은 쉽게 짤 수 있었다.
윤신은 위층으로 향하는 승강기의 계기판들을 확인했다. 마침 지하 2층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승강기의 호수가 반짝거렸다.
버튼을 누르고 기계 앞에 서 있는 사이, 장치가 입을 떡 벌렸다. 안의 세헌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꽤 피곤해 보였다. 그를 향한 감정이 불분명하다고 느낄 때와 달리, 피로한 듯한 그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양문형 문은 열렸는데 사람이 한참이나 타는 기미가 없는 게 의아했던 것 같았다. 그가 뒤늦게 눈을 뜨고 정면을 봐 주었다. 그는 상대가 윤신임을 알아채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동을 잘못 찾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뇨. 여기 A동입니다. 반갑습니다.”
해저처럼 푹 잠긴 목소리를 곱씹던 윤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그제야 육중한 기계 위에 제 몸을 태웠다. 입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캔디를 혀로 굴리다가, 옆의 세헌을 힐끗 살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펌에선 일찍 나가시는 것 같더니.”
“태산건설 관계자들 만났어. 그런데 네가 여길 왜 타.”
윤신이 답이 없자 이번엔 세헌이 턱을 비스듬히 해 힐끗 옆을 보곤 이내 덧붙였다.
“왜 타냐고. 뭐 따로 할 얘기 있어?”
“본인 개인 정보에 대해서 되게 박한 거 아세요?”
“뭐가 알고 싶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요.”
세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본 윤신이 왜 안 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그는 또 다시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제 적극적인 태도가 싫진 않은 모양이다.
“4년 차 넌 왜 이 시간에 들어와.”
“내일 8시 59분까지 높으신 분께 제출할 게 있어서요. 계속 보다가 온 거예요. 집에 가서도 밤새워야 해요.”
위치 표시기를 통해 초조하게 숫자가 올라가는 모습을 주시하던 윤신은 제 말에 온점이 찍힘과 동시에 몸을 확, 틀었다. 그러고는 세헌의 딱딱한 몸에 제 전신을 살포시 기댔다. 그가 가만히 그런 윤신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정수리 위에 쪼듯이 입을 맞춰 주는 건 덤이었다.
한데 어리광에 다정하게 반응해 놓고, 막상 이 상황 자체는 썩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일이라 낯선 것 같았다.
“난 네 누나도, 아버지도 아냐. 번지수 잘못 찾았어.”
그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제 누나와 아버지는 세헌처럼 이렇게 제게 야멸치게 굴지 못했다. 처음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자꾸 섭섭하게 느껴져 큰일이다. 윤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정 결핍과 유사한 어떤 감각을 느끼게 돼 곤란했다.
“적응하시면 좋겠는데요. 전 어리광 좀 부리는 편이라서요. 막내거든요.”
“원하는 게 뭔데. 얘기해. 문 열리기 전에 빨리 해치우게.”
“껴안아 주시면 안 돼요? 요즘 수석님 좀 차가웠던 거 아시죠.”
안아 달라고 부탁하더니, 세헌이 움직이기도 전에 오른팔을 내민 윤신은 그의 허리를 직접 끌어안았다. 뒤이어 세헌의 앞을 가로막듯 상체를 기울였다. 창백한 그의 얼굴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음을 인지한 순간, 좀 더 깊은 접촉을 원하고 있는 제 안의 본능을 느꼈다. 마주한 세헌의 눈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석님은 원하는 거 없어요?”
“있으면.”
“하셔도 돼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순간, 그대로 윤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진하게 입술을 맞물렸다.
“읏, 응…….”
자유로운 한 손으로 윤신의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입꼬리 부분을 엄지로 꾹 눌렀다. 필연적으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젖은 살덩이를 밀어 넣고 서로의 혀를 얽었다.
추운 날씨를 잊게 할 만큼 따뜻한 체온이 서로의 입 안을 넘나들었다.
까칠한 혀들이 야릇하게 부대끼면서 질척한 타액이 함께 뒤엉켰다. 윤신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세헌이 그 깡마른 몸을 힘껏 안은 채로 끊임없이 아득한 입 안을 탐색해 나갔다. 몸을 들썩일 때마다 옷자락에 닿아 바스락거리는 봉투 소리가 기묘하게도 에로틱했다. 발밑부터 열기가 뭉근하게 끓어올라 서서히 전신을 데워 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땡.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윤신이 제 입 안에서 그의 혀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치고 있던 사탕을 세헌의 입에 쏙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떼어 냈다. 뒤이어 길게 연결되는 투명한 실선을 혀끝으로 훔치듯 삼키고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졸지에 사탕을 본인 입 속에서 굴리게 된 세헌은 꽤 황당해 보였다.
“내리셔야죠.”
“뭐지, 이건?”
“맛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너 나를 아주 가지고 논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 아, 참 이거. 어떻게 드리나 싶었는데 잘됐다.”
바스락거리는 봉투 안에서 두통약을 꺼낸 윤신이 세헌을 밖으로 밀어내며 그의 코트 주머니에 그걸 쏙 넣었다.
“또 약 드신다면서요. 아프지 마세요. 걱정돼요. 웬만하면 병원 가 보세요. 처방받은 약이 훨씬 잘 들어요.”
“…….”
“전 이제 집에 가서 남은 일 하려고요. 제 꿈 꾸시고요. 내일 봐요.”
그는 만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속성으로 작별 인사 하는 윤신을 조용히 관찰했다.
이윽고 서서히 승강기의 문이 닫히고, 세헌의 시야가 차단됐다. 손 인사 하던 상냥한 얼굴이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계기판을 힐끗 보니, 기계가 다시 밑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다만 세헌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였다. 그는 생각을 곱씹으며 원래 크기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동그란 사탕을 까득, 고른 치아로 씹었다. 상큼하고, 달콤하면서도 한편으론 화한 끝 맛이 목구멍 근처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꼭 도윤신 같았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더는 참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런 대책 없는 작정을 하게 된 건 정말이지 난생 처음인데.
까짓것 될 대로 돼라 싶어졌다.
“하, 씨발.”
미친 듯이 다른 호수의 승강기 버튼을 눌러 대던 그는,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던 기계에 올라탔다.
지잉. 문이 열린 순간 마치 튕기듯이 뛰어나갔다. 고민이 짧았던 데다 운도 따라서, 다행히 C동 연결 통로로 들어서는 윤신을 간발의 차이로 잡을 수가 있었다. 세헌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놀라 돌아본 윤신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수석님?”
세헌은 대답 대신 제집과 윤신의 집 중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가늠했다. 그러고는 손을 붙잡은 채 거침없이 정면의 승강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늦은 시간인지라 버튼을 누르자 금세 빈 기계가 올라와 아가리를 벌렸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탑승했다.
“수석님 왜 이러시는…….”
타악.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신을 벽으로 난폭하게 몰아붙이고 두 손으로 뺨을 쥔 채 입 맞췄다. 폭우가 내리듯 거칠고, 강렬한 키스였다.
“읏! 변호사님, 으음, 천천, 읏!”
털썩. 봉투를 떨어뜨린 윤신이 균형을 잡기 위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대로 세헌에게 매달리듯 입술을 맡기자, 그가 윤신의 입 안이 마치 제 소유인 양 거칠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승강기는 꾸준히 상승해 윤신의 집으로 향했다.
“풀어.”
슬쩍 입술을 떼어 낸 세헌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윤신을 좀 더 벽으로 몰아붙이면서 제 넥타이를 가리키듯 턱짓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풀어내자, 헝클어진 타이를 빼앗아 윤신의 올이 성긴 니트 안으로 넣고, 그대로 마른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겹쳐 그의 탄탄한 등을 감싼 윤신은 세헌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계속 키스에 열중했다. 허겁지겁 맞물리는 서로의 입술 위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정신없이 몰두하는 바람에 턱을 타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다시 한번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치열하게 키스했다. 마른 몸을 안아 든 채로 밖으로 나간 세헌이 능숙하게 걸어 어느 집 현관 앞에 섰다. 이에 박자를 맞추듯 그의 등 뒤로 손을 내뻗은 윤신이 손을 더듬어 현관을 열었다.
삐릭.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그대로 안으로 쓰러지듯 무너졌다.
깔리듯 바닥에 주저앉은 윤신과 그 위를 점령하듯 버티는 세헌의 뜨거운 시선이 마주쳤다. 달뜬 눈빛이 몇 번이고 키스하듯 공중에서 부딪쳤다.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온 뜨거운 입김이 상대방의 턱 주변에 흩어지는 느낌이 짜릿했다.
“저희 집 여기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 자리에서 네 본적 주소를 달달 외울 수도 있어.”
그 정도도 확인하지 않고 밑에 사람을 들이진 않을 거라고 이미 예측했다.
“저 새벽에 할 일이 좀 있는데. 어디까지 하실 거예요?”
“집에 콘돔 있어?”
“없어요.”
“그럼 콘돔이 없어도 되는 데까지. 싫으면 지금 거절해.”
“거절하면 안 하실 거예요?”
“아니, 난 무조건 해야겠어.”
감정적인 허기를 채우듯 상대방을 빤히 주시하던 두 사람은 입술을 다시 부딪쳤다. 세헌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이윽고 매우 조급한 손길로 서로의 옷가지를 벗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