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51)

11. 

서류를 뒷장으로 넘기던 세헌은 손가락의 이물감을 느꼈다. 그의 검지에 악어 무늬 밴드가 돌돌 말려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윤신이 사무실에 쳐들어와 어젯밤 덴 자리의 밴드를 갈아 주고 간 거였다. 흰 바탕에 녹색 악어가 검은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물끄러미 그 위를 보던 세헌이 왠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그것을 벗기려고 하는데 마침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와요.”

나지막이 대꾸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몸을 반쯤 기울이는 이는 미희였다.

“강 변, 시간 좀 어때?”

세헌은 제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을 빤히 주시했다. 양손에 공평하게 하나씩 든 서류 봉투들이 아마 미희의 용건일 것이다. 그리고 꽤 중요한 것일 터였다.

“필요한 게 얼마큼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잠깐이면 돼.”

그가 완전히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자,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와 접견용 소파에 앉았다.

“세헌이 너 오전 중에 경영 컨설팅 담당자 접견했다며.”

“응, 오늘밖에 시간이 안 나서. 그런데 웬일이야. 월요일이 제일 바쁘잖아.”

“겸사겸사. 의무실에서 탁 비가 두통약 받아 갔다는 얘기가 있더라. 그것도 지난주 내내. 탁 비가 움직였으면 범인 너다 싶더라고.”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희가 꽤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강골이라 약 잘 안 먹잖아. 왜 그래? 그 회식 이후에 줄곧 그런 것 같던데. 도 변이랑 무슨 일 있었어? 그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

“걔랑 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오지랖 그만 피우고 일 얘기해. 손에 든 건 뭐야?”

“어우, 정나미 떨어져. 좋아. 자, 네 앞으로 온 두 가지 서류가 있어. 뭐부터 까 볼래?”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그녀가 봉투를 흔들었다. 왼손의 봉투는 매우 얇았다. 반대편 봉투는 상대적으로 두툼하긴 했으나 얇긴 마찬가지였다. 세헌은 왼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쪽.”

“도이경 씨한테 직통으로 위임장이 왔어. 너만 서명하면 돼.”

“직통으로? 송 수석한테?”

“응, 어제 저녁에 우리 집으로 직접 사람을 보내셨더라고. 너한테 바로 연락을 할까 하다가, 쉬는 날 방해하기엔 너무 간단한 거라서 오늘 넘기는 거야.”

그제야 몸을 일으킨 세헌이 접견용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팔걸이에 느긋하게 걸터앉아 미희가 내미는 서류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의 내용물을 꺼내 눈대중으로 살피는 그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대신 잠긴 음성 주파수가 실내 공기와 맞닥뜨렸다.

“해외 미술품 계약할 때 대리를 해 달라.”

“도 관장이 하는 일이잖아. 작품 관리.”

“그냥 순수하게 매입하는 거 맞아? 수한이 미술품들 탈세하는 데 이용한다는 거 업계에 모르는 사람 없어. 그래서 본사 내에 아예 전문 팀이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 더 자세한 건 본인이랑 대화를 해 봐야 알겠지? 문건으론 담지 못하는 게 많으니까. 이참에 따로 자리 마련해 달라더라고. 이경 씨가 널 한번 만나 보고 싶대.”

그의 짐작이 모두 맞는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미 오랜 기간 동안 그 일을 해 온 사람들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성도, 안전성도 보장받는 길일 텐데 굳이 왜 도국에 맡기려는 건지 납득이 안 갔다.

“좀 이상하지 않아? 이걸 왜 날 줘.”

“내 생각엔 동생 잘 봐 달라는 사인 같아. 강 변을 정확히 겨냥했고, 액수가 엄청 크더라. 나도 개인이 맡기는 건 단위로는 처음 본 착수금이었어. 성공 보수는 또 따로고.”

힐끗, 창문 너머로 윤신의 방이 비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세헌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미희가 세헌이 한 대로 창 너머 집무실을 관찰하다가, 이내 그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류를 보는 중이었다.

섬유에 적힌 글자들을 토대로 보이지 않은 이면을 읽어 내려는 건지 얼마간 집중하고 있던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봉투 끄트머리를 구긴 세헌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탁. 종이들이 흩날려 미희의 앞에 정확히 안착했다.

“안 해.”

“둘이 엄청 애틋하대. 도 교수님 워낙 바쁘셔서 어릴 때부터 누나가 거의 키웠단다.”

“그 애 어른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촌지야. 여기 꽂은 거로도 모자라? 송 변한테 있는 빚 청산하려고 들인 거야. 육아도 적성 안 맞는데 책임까지 요구하면 나도 판을 엎는 수밖에 없어. 정 아까우면 다른 파트너한테 넘겨. 아니면 4년 차, 쟤를 주든가.”

“도 관장은 꼭 너 주라던데?”

“난 수한이 먹이 줘서 키우는 개가 아니야. 눈에 안 차면 도윤신이 아니라 도윤신 할아버지라도 내보낼 거야. 이건 돌려보내.”

설득의 여지가 없는지, 세헌의 눈을 들여다보며 가늠하던 미희가 떠보듯이 되물었다.

“진짜 돌려보내? 고민조차 안 해?”

“고민도 시간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정 보은을 하고 싶으면 이딴 잡일 말고 차라리 큰 건 달라 그래. 얼마 전에 우리 펌에 국세청장 출신 세무사 영입했으니까 조세. 혹은 요즘 펌 실적 괜찮은 국제 무역.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인수 합병, 또는 해외 투자도 괜찮겠군. 그런 거라면 일하고 돈 받아 가는 거니까 생각해 보지. 다음.”

그녀는 더 말해 봤자 긁어 부스럼만 만들어 내리란 걸 짐작하고 아쉬움을 삼켰다. 처음부터 그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다. 돈이라면 이미 부족할 게 없는 데다, 이런 호의를 받고 난 뒤 또 다른 무언가를 짐으로 지우리란 계산이 섰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해야 할걸. 네가 작년부터 계속 관심 갖고 있던 건설 회사 건.”

이번엔 오른쪽 손에 들고 있던 누런 서류 봉투를 세헌 방향으로 휙, 넘긴 미희는 다리를 척 꼬고 앉았다. 세헌이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는 동안 그의 모습을 꽤 흥미롭게 관찰했다. 활자를 읽을 때의 그는 늘 진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내용을 대충 숙지했다고 여겼을 때라야 그녀도 다시 입을 열었다.

“입맛은 좀 도니?”

부정하지 않은 그가 그녀를 마주 봤다.

“매수 자문 요청이네. 영진건설은 결국 회사를 매물로 내놓는 건가?”

“해외 수주도 영 신통찮고, 국내 부문은 성장이 막혔고. 소문은 돌더니 거의 확정인가 봐. 호시탐탐 노리던 데만 노 났지 뭐. 태산건설에서 냄새 맡고 자기들이 사고 싶다고, 매수 설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 최대한 후려쳐서 영진건설 똥값 만들어 달래. 탁 비한테 태산건설 측이랑 약속 잡으라고 할까?”

“자료부터 좀 훑어보고. 미팅은 그다음에. 내가 얘기할게.”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은 그녀는 세헌이 던져둔 수한발 자료들을 다시 봉투에 챙겼다. 그러고는 나가려는 듯 반쯤 몸을 일으켰다.

“오케이. 그러면 태산 쪽에 수임 의사만 일단 전달해 둘게. 그리고 도 관장님 제안은 내가 좀 더 고민해 보고, 처리하는 걸로. 바쁠 텐데 수고해.”

“송 수석님, 잠깐만.”

그는 어설프게 일어선 그녀의 앞을 손으로 막아 냈다. 자연스럽게 미희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세헌에게 할 말이 있음을 직감한 그녀가 턱을 괴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가는 사람을 다 붙잡고 웬일이실까? 일 얘기는 아닌 거 같고.”

“도윤신 말이야.”

윤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미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핑거 스냅을 딱 쳤다.

“아, 참.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도 변 지금 내 명령으로 아래층 잠깐 내려갔어. 마침 의뢰인이 펌으로 온다고 해서, 만나 보라고 했거든. 회의실, 면담실, 접견실 다 쓰고 있고 VVIP실은 개방이 안 돼서 지금 1층 카페에 있다. 네 어쏘 그렇게 취급해서 미안.”

“의뢰인? 난 새로 맡긴 사건이 없는데. 슬슬 내 사건에 쓰려고 했거든.”

“그게,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엄마 친구 막내아들이 사고를 쳤나 봐. 이거 해결해 줄 사람 도 변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 음주 운전 교통사고인데, 현장에서 사람을 쳤대. 서행했고, 사고도 그렇게 크게 나진 않았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세헌은 대충 상황이 감이 잡힌다는 양 미간을 슬쩍 구겼다. 윤신만 한 장기짝이 없었다는 건 그가 특화된 부분을 건드려야 하는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노인, 임부. 장애인, 혹은 어린이. 어느 쪽?”

“어린이.”

세헌이 차분히 마른세수를 하는 사이, 미희가 덧붙였다.

“게다가 뺑소니로 걸렸어. 얼마 못 가 되돌아오긴 했는데. 일단 도주를 하긴 했고. 도 변이 맡겠다고 하면 프로 보노 케이스로 돌릴까 싶어.”

“합의해야겠네. 사과가 돈보다 중요할 테고. 걘 그런 게 어울리지.”

“뭐 복잡한 사건은 아니니까 네 일도 충분히 병행할 수 있을 거야.”

“알겠어, 그건 그렇고. 아무튼 도윤신 말인데.”

다시 한번 힐끗, 윤신의 빈방을 쳐다보는 그의 눈매가 오묘했다. 사람이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 쳐다보는 세헌의 심사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하다는 양 미희의 표정도 함께 묘해졌다.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느낀 그가 불쾌한 기미를 감추지 않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걔 결혼에 대해서 들은 거 없어?”

“도 변 입사 전 면담할 때 여자 친구는 없다고 하긴 했어. 왜?”

“얼마 전에 걔 누나가 주선했다는 거 같아.”

금시초문이라는 양,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처음 듣는데…… 도 변 결혼하니?”

“선은 봤대.”

“슬슬 선 들어올 시기긴 하지. 걔가 딱 하나 아쉬운 게 소속이었는데 이제 그럴듯한 펌에 입사까지 했겠다. 잠깐만.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너희 그날 혹시 진짜로…….”

“그건 오해라니까. 그냥 걔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해서 그래.”

흐음.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는 아는 정보들을 모두 끄집어 되새겨 보는 모양이었다. 진지하게 미간을 좁히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듯했다.

계속 맞선에 회의적으로 나오던 윤신의 태도가 걸려 물어보긴 했지만, 처음부터 크게 기대하진 않았던 세헌도 이내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는 거 없으면 됐어.”

“응, 도 변 결혼 문제에 대해선 내가 아는 건 없어. 다만…….”

“다만?”

“결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 그 집 부부 불화설이 돌아. 도이경 씨 내외 말이야.”

재계의 부부들은 대부분 모종의 협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한데 그 두 사람은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몇 안 되는 경우여서, 별종 취급을 받았다. 일반인들이 꽤나 그들의 행보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결혼 행진곡이 다 울려 퍼지기도 전부터 여러 가지 근거 없는 소문들이 돌았다. 그걸 모르지 않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 집 불화설은 늘 있지 않았나? 그렇게 벌써 10년이 지났어.”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이번엔 좀 달라. 도 변 매형, 아니, 수한 홀딩스 유정원 대표 입에서 직접 나온 소리가 있거든. 자기 아내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그런대.”

생각할 거리가 생긴 그가 눈살을 슬며시 구겼다.

“감당하기가 어렵다……. 피해자처럼 얘길 하네. 진짜 피해자거나, 피해자가 되고 싶거나.”

“좀 이상하긴 하지? 유 대표 아내 잘 만나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긴 하지만 뼛속까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양아치인 건 너도, 나도 알잖아.”

“둘 사이 자녀가 둘이던가?”

“아들 둘. 둘 다 아직 초등학교도 못 갔어. 심각하게 틀어지진 않을 거 같긴 해. 일단 애들도 있고, 어리고, 특히 이경 씨가 워낙 야무져서 쉽게 경솔한 행동 할 사람 같진 않더라. 단지 아무래도 도 변이 우리 펌에 있으니까 이제 그 집 소문이 들리면 마냥 무시는 못 하겠더라고. 너도 참고해.”

“그러지. 알겠어. 나가 봐.”

수고하라는 듯 세헌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준 그녀가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계속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푹신한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정물처럼 앉아 사고 회로를 돌리는 동안 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져 내려 집무실로 스며들었다.

외부 창가 쪽 블라인드부터 내린 그는 내선을 연결했다. 탁 비서의 음성이 바로 들렸다.

- 네, 변호사님.

“좀 전에 송 수석이 위임장 하나 주고 갔어. 태산건설에서 온 건데, 영진건설 매수 관련이니까 팀 시니어들 시켜서 자료 긁어 와. 그리고 송 변이 도윤신 프로 보노 맡긴 게 하나 있을 거야. 걔 올라오면 의뢰인한테서 자료 받아 올 텐데 복사해서 나한테도 한 부 올려.”

- 알겠어요. 그런데 두통은 좀 괜찮으세요? 지난주 내내 고생하시더니. 도 변호사님 아니었으면 머리 아프신 것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잖아요.

계속 제 머리를 어지럽히고, 쪼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던 기제는 윤신이었다. 세헌은 지난밤 윤신과 했던 진한 키스를 떠올리며 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보드라운 촉감 위에 더 부드러운 무언가가 겹쳐지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했다. 마치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인 양 손끝으로 그 위를 쓸 때마다 몸 안에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일순 심장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어 미간을 구긴 그는 뒤늦게 대꾸했다.

“훨씬 나아. 신경 쓸 거 없어.”

- 그럼 자료만 정리해서 드릴게요. 다른 건요?

“됐어. 괜찮아.”

통화를 마친 그는 편안하게 소파에 기댔다. 미희가 주고 간 정보 때문일까. 2층 도서실에서 윤신을 마주쳤을 때의 일이 필연적으로 떠올랐다.

그때 분명 윤신은 이혼 판례집을 품에 안고 있었다. 자연히 누나를 만났을 때 울음을 터트렸던 모습과, 그날 이후 줄곧 심란해 보였던 태도, 그리고 눈에 서린 묘한 조바심과 억울함 같은 것들이 합쳐져 서서히 퍼즐이 맞아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지금 막다른 골목이거든요.〉

누나 부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게 그런 극단적인 표현까지 쓸 일인가. 대기업 2세의 이혼인 데다 워낙 외부로 사랑 넘치는 부부의 이미지를 구가했던지라 사회적으로 파장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남인 이상 진통을 겪더라도 갈라서면 그만인 일이다.

그러니 이는 둘 중 하나였다. 윤신이 당돌하긴 하나 속은 하염없이 나약한 샌님이거나,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부 간의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가 있거나.

머리를 뒤로 젖힌 세헌이 정결한 내부를 둘러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로펌 사옥 1층 카페에서 의뢰인을 만난 윤신은, 남자가 가져온 증거 자료들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미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얼떨결에 내려오긴 했지만 썩 내키지가 않았다.

세헌은 종종 자신들의 일을 쇼핑에 비견했다. 변호도 서비스업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매하는 자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판매자들이 안 팔겠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의뢰한 사건 같은 것들이 외부에서라면 절대 맡지 않았을 종류 중 하나였다.

솔직히 윤신은 이 자리를 박차고 올라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종이들을 넘겨 보다가, 곧이어 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내려오면서 막 말씀을 전달받아 가지고요. 정확히 내용 숙지가 안 된 상탠데. 그러니까 음…… 일단 음주 운전 후 도로에서 아이를 들이받았고, 도주를 하신 거네요. 차에 치인 아이를 두고. 현장도 훼손하셨고.”

말에 다소 힘이 실려 있다고 느낀 건지, 남자가 기어들어 가는 어투로 변명했다.

“너무 놀라서요. 어두웠고…… 그래도 돌아가서 신고를 했습니다. 녹취 스크립트가 있어요.”

남자가 서류를 몇 장 더 넘겨 뒷면을 펼쳐 주었다. 윤신은 그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119 대원과 통화한 내용이 문서화되어 적혀 있었다. 놀랐다는 말이 사실이긴 했던 모양인지 말에 두서가 없어 대원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물어본 정황이 서류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CCTV는요? 왜 증거 목록에 없죠? 요즘 대체로 있는데요.”

“거기가 경기도 외곽 국도인데요. 경찰이 외진 데라 없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요. 혹시 현장 사진 찍어 놓은 거 있으세요? 동영상이나.”

“경황이 없어서요. 하지만 차 블랙박스가 있어요. 여기. 이거 원본 드리러 온 거예요. 그런데 송 변호사님 말씀이 저한테 완전히 유리하진 않을 거라네요.”

메모리 카드를 받은 윤신은 일단 서류 봉투 안에 그것을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를 쭉 살폈다. 목격자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피해 아동의 어머니 연락처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 부분을 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 목격자가 도주 장면을 봤다는 거죠?”

“네.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봤고요.”

“목격자 이름이랑 연락처, 잘 받아 두셨어요.”

서류철에 끼워져 있는 아이 사진을 꺼낸 윤신이 그걸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환자는 전치 8주…… 골절이 있네요. 상태가 좋진 않군요.”

“워낙 어린 아이라. 살짝 쳤는데도 잘 부서졌나 보더라고요.”

그 답변을 들은 그는 남자를 차갑게 마주 봤다.

“아이 부모님 앞에서도 그러셨어요? 아이라서 뼈가 상대적으로 잘 부러졌을 거다?”

“아니, 사실이 그러니까.”

“명백히 귀책은 이쪽에 있어요. 미세한 양이긴 하지만 분명히 음주를 하셨고, 뺑소니로 오인받을 만한 몇 가지 행동 또한 하셨죠. 이미 그 상황에서 의뢰인께선 신뢰를 잃었다고요. 교통사고는 개인적 법익 문제기 때문에 무조건 합의가 최선이에요. 사과를 열심히 하셨어도 모자랄 판에…… 그러시면 안 됩니다.”

민사도 아니고 형사 합의서는 돈만으로는 안 나왔다. 정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마 1년쯤 전의 자신이라면 이 사고 당한 아동의 대리인이 돼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었을 터다. 송 변호사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걸출한 변호사들에게 부탁하거나, 본인이 직접 이 사건을 맡는 게 아니라 제게 손을 뻗은 듯했다.

“저도 억울한 부분이 있어요. 음주 정도는 정말 약했고, 서행했고요. 또, 다시 되돌아가서 직접 제 손으로 신고도 하고 아이도 부축했다고요.”

“다친 아이 부모님 앞에선 그런 거 안 들리고, 안 보여요. 억울해하지 마세요. 본인의 실수 때문에 사람이 다쳤잖아요. 애 앞길이 구만린데. 신체가 훼손됐고요.”

“원하는 만큼 합의액도 줄 거예요. 상식선에서요. 그 애네 집이 좀 어려운 거 같던데요?”

조용히 발끈한 윤신이 침묵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생각한 액수의 두 배를 준다고 하세요. 돈 싫어하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윤신은 계속 말이 없었다.

“변호사님?”

로펌에 귀속된 변호인인 이상, 늘 순백의 의뢰인만 맡을 수 없다는 건 세헌으로부터 이미 배웠다. 그 낮은 음성들을 떠올리며 겨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뒤늦게 답했다.

“아무튼 이쪽은 제가 만나 볼게요. 혹시 직접 사과를 원할 수도 있어요. 피해자 가족과 대면하시게 되는 상황이 오면 무조건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화풀이도 하게 두시고요. 때리면 맞으시고요. 머리끄덩이 뜯으면 당하세요. 그럼 정상 참작 여지가 좀 생기거든요.”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음주 운전에 뺑소니까지 하셨는데 그 정도도 안 하시게요? 합의금도 후유증까지 고려해서 넉넉하게 책정할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아, 알겠어요. 뭐든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좀 도와주세요. 저 큰일 할 사람이에요.”

“큰일, 이미 하신 거 같은데요.”

“네?”

“노력하죠.”

남자의 얼굴에 잠시간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윤신은 속으로 조용히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위임장에 서명하라는 듯 서류 파일을 꺼내 남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 * *

자료를 보따리처럼 품에 안은 윤신이 집무실 층 창가에 서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라서 그런 건지, 상대는 한참 기다린 끝에 겨우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안도한 표정을 지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법무 법인 도국의 도윤신 변호사라고 합니다. 교통사고 가해자 대리인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제가 한번 찾아뵐 수 있을까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상대방의 말을 잠자코, 또 신중히 듣던 윤신은 가당치 않다는 듯 답했다.

“그럴 리가요. 당장 합의부터 하자는 게 아니고요. 자녀분이 안전하게 치료받는 게 우선이죠. 좀 괜찮나요? 아직 덜 자란 아이 몸에 골절상을 입은 거라, 너무 걱정이 돼서요.”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그가 어설픈 자세로 서서 한 손을 뻗었다. 창틀을 건드려 삐걱거리는 창문을 겨우 열자, 냉랭한 겨울바람이 기다렸다는 양 들이닥쳤다.

“그럼요. 서류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겠습니다. 네, 전 오늘이라도 괜찮습니다. 아…… 그 시간에 가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출발하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네, 들어가세요.”

정중하게 전화를 끊고 난 그는 반쯤 열린 창문 너머를 조용히 응시했다. 청명한 공기를 폐부로 들이켜곤, 아쉬움 가득한 손짓으로 창을 도로 닫은 뒤 걸음을 내디뎠다.

한참을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비서실 앞이었다. 탁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인사하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도 변호사님, 자료 이리 다 주세요. 복사하고 바로 돌려 드릴게요.”

순순히 그에게 봉투를 넘긴 윤신이 지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응답했다.

“그 안에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도 있으니 영상 사본 좀 떠 주세요. 위임장은 보관해 주시고요. 그리고 피해 아동 부모님 두 분 프로필 좀 조사해 주실래요? 혹시 학연이나, 지연, 혈연 중에 제가 뭐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나 보려고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위잉,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파티션에 팔을 걸치고 있던 그는 본능적으로 세헌의 방을 쳐다봤다. 그 안의 주인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와 자세로, 펜대를 굴려 가며 서류에 몰두하느라 바쁜 모양새가 꽤 심각해 보였다. 그 모습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럴싸했다. 후천적으로는 취득이 불가능한 선천적 우성 유전자의 조합이 신기했다.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세헌을 빤히 쳐다보는 윤신의 긴 속눈썹이 별안간 꿈틀했다.

‘우린 사귀는 건가.’

그는 고개를 손바닥 방면으로 조금 더 기대듯 기울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아닌가.’

키스는 했지만 좋아한다거나 정식으로 한번 사귀어 보자는 등의 구체적인 고백의 말을 듣진 못했다. 제 마음에 아직 확신이 없는 자신도 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의사 능력이 있는 성인 두 사람인 이상 관계의 규정 없이도 얼마든지 신체 접촉부터 할 수 있는 일이라 어느 쪽도 등식은 성립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나.’

그의 생각이 궁금하긴 했으나, 이미 매우 버릇없게 보고 있는 제 인상에 굳이 뭔가를 더 보태 줄 필요가 없어서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어떻게 데이트 신청하게 만들지.’

강세헌이 뜨거운 연애 같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전에, 그런 걸 할 시간이 있는지조차도 흐렸다. 지난 몇 달간 거의 매일 사옥 내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그들은 진지하게 서로를 제대로 알아 갈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관찰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안목은 그저 사견일 뿐이라 정답은 못 됐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존재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또 그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자신은 세헌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다. 두 사람이 너무 반대라서 그런 것 같았다.

윤신은 싸움을 즐기지 않았다. 단지 매듭을 푸는 걸 좋아해 변호사가 됐다. 상성이 완전히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갈등을 쌓기보단 적당히 웃어 보이고 그 자리를 피하는 편이었다. 결코 세헌에게 하는 것처럼 꼬박꼬박 따라가 달려들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맨 처음부터 그를 향해 줄곧 느꼈던 불편함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곳으로 감정이 전도될 수도 있다는 어떤 동물적인 감각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난 이상하게 당신이 의지가 되는데.’

그라면 늘 그랬듯이 오만하고, 때론 까다롭게 굴면서 또 한편으론 한 번씩 제 말을 들어 주고, 또 힌트도 줘 가며 초연한 태도로 저 자리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윤신이 뺨을 실룩거리며 세헌의 섬세하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살폈다. 그러다 골치 아픈 부분이 있는지 지그시 깨무는 그의 붉은 입술에 시선의 끝이 닿았다.

같은 남자와 키스를 한 건 처음이다. 한데 싫거나 거북하긴커녕, 짜릿했다.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매끈한 뺨에 서서히 홍조가 올라왔다.

바로 그때였다. 복사를 모두 마친 건지 어느 틈에 탁 비서가 파티션 방향으로 돌아와 윤신에게 자료와 사본 한 부를 함께 돌려주었다.

“도 변호사님, 여기요.”

그걸 받아 든 윤신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속삭이듯 물었다.

“고마워요. 참, 강 변호사님이 저한테 일 시키란 말씀 안 해요? 팀 사건들은 다 훑어봤고, 앞으로 그것들 중에 본인이 지시하시는 건은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셨거든요. 기다리라고는 하셨는데, 애가 자꾸 닳네요.”

“안 그래도 오전에 명령 내려왔어요. 이건 기존에 하시던 게 아니라 새 사건 같아요. 아마 곧 매수 자문 한 건 들어가실 거 같더라고요.”

“매수요? 누가 어딜 판대요?”

“영진건설요. 팔 거라는 소문 듣고 태산건설이 거길 매수하고 싶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림 그려 달라고 요청했나 봐요. 수석님이 구조 짜는 걸 잘하시거든요. 아무래도 상장 기업 대상 M&A라 전문가가 많이 필요해서, 지금 선수들 타 팀에서 뽑고 계세요.”

“선수들? 우리 팀에서 맡는 거 아니에요?”

탁 비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한 전문 분야가 워낙 많으니까요. 엄청 대규모로 진행돼서 우리 팀이 다 달라붙어도 감당 못 해요. 특히 조세 같은 건 취득세, 양도세, 등록세, 온갖 세금이 다 걸리니 할 일이 태산이라서요. 차라리 각 팀에서 차출하는 게 훨씬 나아요.”

“일종의 특별 팀 형식인 거네요?”

“네. M&A는 보통 그렇게 하세요. 타 로펌이랑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요. 거기 도 변호사님이 소속되신 거예요. 노동법 전문이시죠? 자료는 곧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건 거의 개인의 업무였거나, 집단이라고 해 봤자 몇 명의 변호사가 필요한 규모가 다였던 터라, 이런 대형 협업이 낯설었다. 이제야 진짜로 도국에 소속된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탁 비서와 눈을 마주쳐 준 그가, 내친김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왠지 잘 아실 거 같아서 여쭤보는 건데. 12월 31일요. 무슨 날인지 혹시 아세요?”

“12월 31일? 연말이잖아요. 올핸 주말도 아니라 못 쉬어요.”

“강 수석님 방 탁상 달력에 X 자가 쳐져 있더라고요. 생일은 아니던데. 첫 공판일 뭐 그런 거예요? 아니면 부모님 기일이라든가.”

“아아, 강 수석님. 제가 알기로 둘 다 아닐 텐데. 그냥 휴일이에요.”

선뜻 해석이 안 된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쉬는 날을 그렇게 미리 표시해 뒀다는 거예요?”

“음, 사실 정확한 건 몰라요. 매년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쉬세요. 저도 그 이상은 잘. 한 해 동안 고생하고 그날 하루 푹 쉬시려는 거 아닐까요? 이듬해 심기일전도 하고요.”

“탁 비서님이 모르는 것도 있어요?”

“그러게요. 전 그 이상 더 알려 드릴 게 없네요. 사실 저랑은 거의 일 얘기밖에 안 해요, 송 수석님이랑은 사적으로도 꽤 가까운 사이니까 한번 여쭤보시든가요.”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었다. 조언 고맙다는 듯 서류 사본을 흔들어 보인 윤신이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왠지 아쉬운 느낌에 바로 방향을 틀었다. 세헌의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네.” 하고 답하는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매우 공손하게 문을 연 윤신은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서류에 눈을 박고 있던 세헌은, 방문자가 문을 열고도 아무 말 하는 기미가 없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끼익’ 소리가 나도록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 자세를 고쳤다.

“그래. 계속 그렇게 문간에 걸쳐 있어. 딱 네 인생 같다.”

“제가 애매하다는 겁니까?”

“왜, 찔려?”

“솔직히, 네.”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불쑥 안으로 들어온 윤신이 문을 닫고 세헌의 책상 방향으로 이동했다. 서류를 품에 고이 안은 채로 그의 옆에 서서 세헌이 보고 있던 서류들을 훔쳐봤다. 팔짱을 척 낀 뒤 다리마저 꼬고 건방진 자세로 앉은 그가 이 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내 공간에 들어왔으면 용건부터 얘기해. 도둑질하지 말고.”

“누가 도둑질을 했다고요.”

“뭐 훔쳐가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의미심장한 어조에 일순 흠칫한 윤신의 뺨이 미약하게 발그레해졌다. 마치 지난번 자신이 이 방에 몰래 들어왔던 일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털어놓아야 한다는 마음과 지금 두 사람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데 그걸 굳이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양단간의 갈등이 정직한 마음을 흩트려 놓았다.

“저기, 수석님.”

고심 끝에 진실을 털어놓을까 입을 열어 봤으나 세헌이 이 화두를 쑥 잘라 냈다.

“하려던 얘긴 뭐야. 내 일을 방해했으니까 그에 상응하는 중요한 애기여야 할 거야.”

그처럼 고압적인 어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다. 사실 오래전 매형에게 그런 비슷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매형 쪽이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고 있던 이양된 권력에 기반한 거만함이라면, 세헌 쪽은 오직 제 능력치로 일구어 낸 자신감이라는 게 달랐다. 어떤 게 맞는다, 틀리다 할 순 없는 거지만 제 눈엔 세헌의 것이 더 합리적이어 보이긴 했다.

순순히 서류에서 눈을 뗀 윤신이 이번엔 세헌을 빤히 봤다. 그 시선을 즐기는 건지, 불편해하는 건지 그가 마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으로 응수했다.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민망해지는 건지 몰랐다. 결국 윤신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저 오늘 좀 일찍 퇴근해서 병원 가려고요.”

차포 다 떼고 본론만 꺼내자 세헌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픈 게 너야, 남이야.”

“제가 아프면 걱정은 되세요?”

“남이구나.”

얕은수가 다 읽힌 윤신이 그를 지그시 쏘아봤다.

“왜 공세가 잘 안 통하죠?”

“체급이 다르니까.”

부정할 수 없었던 터라, 말을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 먼저 말씀을 안 하셔서 이번에도 제가 또 하는데. 밤에 잠깐 만날래요? 제가 커피 사 드릴게요.”

“이게 어디서 시건방지게. 만날래요?”

곰곰이 자신이 한 말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단어들을 곱씹은 윤신이 영 확신이 없는 기색으로 반복해 물었다.

“만나…… 주실래요?”

“바빠.”

즉답한 그는 더 들을 것도, 할 이야기도 없다는 듯 다시 서류에 집중할 태세를 취했다.

당황한 윤신이 품에 고이 안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두 팔로 그 위를 턱, 짚어 그의 관심을 제게로 끌어왔다.

식탐 있는 사람을 싫어한다던 그는 어젯밤 몇 날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제게 키스했다. 덕분에 윤신은 아직도 그의 혀가 제 입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얼얼한 느낌이 좁은 공간에 꽉 들어차 있었다. 혀 위의 돌기들이 몇 번이나 부딪치면서 까칠한 표피가 모두 뭉개져 미끄덩한 질감만 남은 듯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그는 천연덕스럽게 딴청이다.

“쓸데없는 오기 생기게 하는 데 1등인 거 아세요?”

“칭찬으로 듣지.”

“진짜 안 봐요? 우린 뭐 데이트 같은 거 안 해요?”

“내가 왜 너랑 데이트를 해.”

“와…….”

예상한 그 이상의 대답에 윤신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듯 탄성을 토해 냈다. 물론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데이트의 이유를 찾자면, 막상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게 선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어제 그 늦은 밤, 그와 마음속 어느 부분이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조금쯤 연결됐음을 느꼈다. 그렇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거창한 감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분명히 존재했던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혹시 저랑 얘기하는 거 싫으세요?”

“아니. 좋아.”

“…….”

“뭐 불만이라도.”

“아뇨.”

“조금 전엔 매우 있어 보이던데. ‘와…….’ 감탄사 내뱉으면서.”

“아니라고요.”

좋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거라고는 짐작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단어였던 터라, 윤신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사고 회로가 얼어붙은 배수로처럼 단단해져서 무슨 대답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당혹감을 애써 감추는 사이 그가 손가락을 까딱, 하며 접견용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가리켰다.

“4년 차. 저 블라인드 치고, 방문 잠그고, 이리 와 봐.”

세헌이 종종 그러듯 한 번쯤 어깃장을 놓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홀린 듯이 움직여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윤신은 블라인드를 내리기 전, 혹여 이상하게 보일까 봐 창문 너머를 엿봤다. 다행히 직원들은 저마다의 일에 열중하느라 이쪽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문을 잠그고, 마침내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는 와중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세헌이었다.

어느 틈에 그가 다가와 윤신의 마른 몸을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기울여 기다란 목 위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머리를 뒤로 젖혀 세헌의 어깨에 하중을 기댄 윤신이 뒤로 두 팔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이리 오라고 말하더니, 그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바로 몸을 겹치는 행동에 세헌의 안달이 묻어났다. 그 덕분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듣진 못해 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얼굴 보고 싶어요.”

가쁜 숨을 삼킨 윤신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려던 차였다. 세헌이 목덜미를 잡아 앞을 보게 고정했다. 곧이어 셔츠 깃 안쪽을 길쭉한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그가 만지는 곳곳이 달아오르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당황한 윤신이 차오르는 흥분감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데, 귓전에서 세헌의 낮고 울림 좋은 음성이 흩어졌다.

“누가 먼저 말하게 될 것 같아?”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나, 맥락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좋아한다거나, 혹은 그 이상의 깊은 감정을 먼저 표현하게 되는 쪽이 누구일지를 재 보자는 것이다. 키스까지 해 놓고도, 그는 여전히 재고 따져 볼 모양이다. 너무나도 그다웠다. 세헌의 몫까지 초조해진 윤신은 묻지 않으려던 질문을 던지게 되고 말았다.

“저기, 우리 사귀는 건 맞아요? 그것부터 확실히 해 주셔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가 갑자기 왜 이런 물음을 건네는 거냐는 듯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내가 그러자고 얘길 안 했나?”

“안 하셨어요.”

“그럼 네가 하면 되겠군. 난 들은 걸로 할게.”

“저도 아직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난 그냥 들은 걸로 하겠다고. 네 생각은 잘 알았어. 나랑 사귀고 싶은 거잖아.”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사실이 아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세헌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관계의 규정을 원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가 말한 방식이었으면 했다.

아무래도 그는 일부러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도록 만든 모양이다. 얼떨결에 제 쪽에서 먼저 사귀자고 말하고, 그가 그런 자신을 받아 준 격이 된 터라 윤신이 분한 기색을 감추며 분연하게 선언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수석님보다 먼저는 안 좋아해요.”

“다시 얘기해 봐. 또박또박.”

자신의 단언이 그의 심사를 제대로 건드렸던 모양이다. 매끈한 이목구비가 거칠게 깎은 목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힐끗 본 옆면의 시야로 그걸 확인한 윤신이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여는 사이, 그가 힘주어 몸을 밀어붙였다.

“수석님보다 먼저는 안 좋…… 윽!”

탄성을 뱉어 내는 윤신의 귓전에 그의 음산한 음성이 꽂혔다.

“절대 나랑은 안 잘 거라고 했던 얘기. 네 입으로 지껄인 건데, 기억해?”

그건 그와 처음 식사를 같이하며 나누었던 얘기 중 일부였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은 단순히 도국에서 절대 미끄러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뿐이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때 그 말은!”

“넌 절대 나랑 하기 싫은 게 많은가 봐, 응? 그럼 우린 사귀고 있지만 아직 서로 좋아하진 않는 건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끝내 상대를 무력화하는 강세헌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제 마음의 크기가 더 작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았다. 아울러 그와의 관계를 똑똑하게 활용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감정의 균형을 잃으면 그때부터는 세헌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 질곡이 하나씩 생길 것이다. 윤신은 그런 식으로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는 변호사님이 먼저 말씀하시게 될 겁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난 승부욕이 강해. 반드시 네가 먼저 말하게 될 거야.”

딱 잘라 선언한 세헌이 주저 없이 윤신의 머리채를 확,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손아귀에 힘을 줘 잡아당겼다. 통증을 느낀 윤신이 옆으로 얼굴을 틀면서 심호흡했다.

그와 동시에, 음험하게 눈을 빛낸 그가 키스했다.

“읏! 으음.”

아득한 입 속에서 내전을 일으킨 그의 혀가 윤신의 것과 질척하게 엉켜들었다. 서로의 혀끝이 거친 불꽃이 튀는 것처럼 강하게 겹쳐졌다.

뜨거운 공기가 두 사람의 몸을 사로잡아 감싸 안았다. 조용히 함께 침몰해 가듯, 혹은 같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빠듯하게 맞닿은 서로의 몸이 접촉한 채로 끊임없이 부대꼈다.

윤신은 그의 탄력적인 허리춤을 좀 더 강하게 쥐었다. 그럴수록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몸을 들썩이며 최대한 그에게 보조를 맞췄다.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

까다롭고 오만한 강세헌이 상사로도, 연인으로도 쉽지 않은 상대일 거라는 건 이미 충분히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차피 내친걸음이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리면, 우산이 없는 자신은 그 비를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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