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0화 (11/51)

10.

자택 서재 랩톱 모니터 앞에 앉은 세헌이 스탠드 마이크의 스위치를 눌렀다. 곧이어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치자, 화면 너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십여 명의 시니어 변호사들이 단번에 자세를 고쳐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저들은 도국이 프로젝트 형식으로 맡고 있는 모 기업 인수 거래 자문 건의 담당 변호사들 중 매니저급 일부였다.

화면을 통해 직원들의 머리 뒤로 보이는 스크린을 가만히 주시하던 세헌이 입을 열었다.

“일요일에 당신들의 파트너를 서재 책상 앞에 앉게 만들었으면, 나한테 봉사의 보람 정도는 심어 줘야죠? 거기 있는 모두의 연봉에 보탬이 되는 얘기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변호사 중 가장 연차가 높은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안면에 세헌의 주말을 망쳐선 안 된다는 비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심호흡한 남자가 옆에 도열한 변호사들을 한 명씩 가리켰다.

“저부터 시계 방향대로, 대상 회사가 체결한 계약들의 주요 조건, 정관 및 이사회 규정, 단체 협약 및 보험 등 근로 규정, 동산·부동산 등의 자산 현황, 조직 인력 현황을 파악했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분야별 법률적인 측면을 정리해 현재 실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고요. 중간 점검 차원에서 오늘을 기점으로 몇 가지 보고드리는 편이 좋지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인쇄된 서류를 떠들어 보던 세헌이 담담히 대꾸했다.

“탁 비서가 나한테 퀵으로 보내 준 이 목록에는 인허가와 지적 재산권, 조세가 빠져 있네요. 그건 B팀인가?”

“아, 네. 각종 인허가 규정과 지적 재산권은 B팀에서 진행합니다. 조세 실사는 회계 법인이 맡아서 담당하는지라 내일쯤 따로 보고드릴 겁니다. 팀원들 모두 인수 기업에서 거래 종결 후 업체를 운영하기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 중입니다. 한데, 저희가 내부에서 정리를 마저 해야 해서요. 괜찮으시면 한 시간 후에 회의 재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서류를 덮고 ‘탁.’ 그 위에 손바닥을 내려친 세헌이 즉답했다.

“저도 오늘 추가로 받은 자료를 검토해야 하니 여유를 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

“25분 드리죠.”

삑.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곤 마이크 스위치를 다시 눌러 음 소거한 그는 화면 속에서 몹시 바쁘게 뛰어다니는 변호사들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서류와 만년필을 집어 든 채 저들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소파 쪽으로 가 앉았다.

편안하게 등을 기대어 자료들을 속독하는 그의 눈매가 매우 신중한 기색으로 젖어 갔다.

“걸린 분쟁 승·패소 가능성…… 의견서를 왜들 이렇게 지저분하게 써. 4년 차 페이퍼 안 돌려 봤어?”

읊조리듯 혼잣말하던 그가 해당 부분을 펜으로 체크하며 두툼한 종이를 뒤로 넘겼다.

그때였다.

사락, 종이 한 부가 그 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그걸 주워 든 세헌의 빼어난 얼굴 한 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노동 부분 법률 실사를 한 시니어 변호사가 제출한 자료였다. 임금 및 퇴직금의 체불 여부 그리고 비정규직 현황 따위의 정리 도표가 별첨되어 있었다. 거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다만, 우측 상단에 적힌 이름이 그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했다.

그는 혹여 오류가 있다면 피드백을 부탁드린다는 메시지와 함께 윤신의 이름과 내선 번호가 적힌 모서리 부분을 빤히 응시했다.

‘부팀장이 내 허락도 없이 도윤신한테 일을 시켰군.’

실체도 아닌 이름만 보고 있는데도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느껴졌다. 이 자체가 윤신의 흔적이기에 그럴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종이와 펜대를 내던진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사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세헌의 시간은 여느 때와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느려졌다가, 덜컹거렸다가 제멋대로였다. 그건 오로지 며칠 전 술집에서 일어난 윤신과의 사건 때문이었다.

어두운 테라스에 불어오던 서늘한 바람, 그 차가운 공기를 녹이듯 빈틈없이 맞닿은 서로의 몸, 자신이 고개를 기울이자 슬쩍 내리감던 깔끔한 눈꺼풀, 눈시울 위를 촘촘하게 채우고 있던 기다란 속눈썹, 키스 직전의 무드에 긴장되는지 살짝 달싹이는 붉은색 촉촉한 입술.

그리고 윤신의 보드라운 살갗에 닿았던…….

기억을 더듬어 가던 그의 단전이 서서히 갑갑해졌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퍼지는 짜릿한 감각 자극을 인식한 세헌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바지 위로 슬쩍 곤두선 형태의 질감이 눈으로도 감지됐다.

무심코 곧은 손을 뻗은 그가 지퍼를 내렸다.

지익. 야릇한 소리가 이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발기한 성기가 앞섶을 부풀어 오르게 만든 게 그의 시야에 잡혔다.

일순 어이가 없어져 절로 거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랫입술을 힘껏 감쳐문 그는 하체에서 손을 떼어 내고 윤신의 이름이 적힌 서류 뭉치를 굳이 다시 쥐어 소파 뒤로 내던져 버렸다.

타악!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탄탄한 몸을 슬라임처럼 늘어뜨렸다. 뒤이어 고개를 소파 등받이에 몸을 걸 듯이 기대 젖히곤 진정하기 위해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종종 윤신을 보며 어떤 은밀한 욕망을 느낀 적은 있지만, 그날처럼 분명하게 그의 아랫배부터 성적 탐욕이 치밀었던 건 처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도, 술기운에 그랬던 것도 아니다. 줄곧 유리병에 담긴 물처럼 속에 품고 있었던 감정이 끓어올라 이젠 차츰 억누르기가 어려워지는 것에 가까웠다. 세헌은 이런 데 서툴긴 해도 그걸 분별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입술 닿았던 거예요?〉

그 질문엔 아니라고 답했으나, 두 사람 모두 그의 혀끝이 윤신의 입술에 닿았다는 걸 알았다. 시의적절하게 미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세헌은 그보다 더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스스로에게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의 그는 윤신과 키스를 넘어서 섹스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틀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맹목적인 관심과 불편함이 어릴 때 죽은 제 동생 같은 아이에 대한 트라우마인 줄 알았다. 자신이 주변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남았던 아주 작은 생채기가,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잃고 몰래 울었던 윤신이 거슬리는 방향으로 발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더 윤신의 존재가 탐탁지가 않았다. 그를 통해 숨겨 왔던 제 약점을 직시하게 되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나 아니었다. 세헌은 그저, 도윤신 그 자체가 신경 쓰였다.

사고의 외연이 예전 일이 아닌 현재의 제 감정으로 확장되자, 그는 불현듯 자신을 퍽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 머저리를…….’

사념을 끊듯 머릿속의 문장이 완성되기 전에 서둘러 잘라 낸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겠지.’로는 모자랐다. 아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닌 듯하단 예감이 자꾸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그의 목구멍에 차올랐다.

이 이상 제 마음을 추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알 필요 없는 것들을 알게 되고, 들켜선 안 되는 것들을 들키게 될 터다.

결국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가 버렸다.

* * *

손목시계를 보며 집무실에서 급히 빠져나오던 세헌은 그 앞에서 대기하던 어쏘 변호사와 딱 마주쳤다. 하필이면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 이마가 찌푸려졌다.

“뭐야?”

“수석님, 클라이언트 미팅 가신다면서요.”

윤신은 이 상황을 탐탁잖아하는 게 분명한 세헌과 눈을 빤히 마주쳤다. 잠깐 시간을 내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쪽 눈썹만 흘긋하더니 이내 투명 인간이라도 본 양 차갑게 스쳐 지나갈 따름이었다.

곧 비서실 쪽으로 가 탁 비서에게 손짓하는 모습을 본 윤신이 이번엔 그의 앞을 정통으로 막아섰다. 손에 얌전히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이는 행위는 덤이었다.

“이 서류 필요하시다고 해서 준비해 뒀습니다.”

“나한테 보고도 없이 내 법률 비서가 바뀌었나? 체계가 엉망이군.”

“실례지만 전 아직 변호사고요.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난 어쏘가 필요할 때 독대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아. 번호표 끊고 기다려.”

“잠깐이면 됩니다. 주차장까지 제가 탁 비서님 대신 보좌하겠습니다. 아래층에 운전 기사분 대기 중이에요. 가시죠.”

역정을 내듯 탁 비서를 쏘아본 그가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윤신에게 서류 가방을 넘겼다.

판판한 가슴팍을 턱, 친 물건을 겨우 받아 든 윤신이 앞서가는 세헌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한 보 뒤에서 걷다가, 승강기가 보일 때부터는 재빨리 움직였다. 뛰어가서 기계를 잡아 두곤 먼저 타시라고 안내하니 그가 제 쪽은 쳐다보는 것조차 하지 않은 채로 승강기에 탑승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고, 문이 굳게 닫혔다.

복도를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분주한 직원들이 사방에 보여 어색한 것 없이 괜찮았는데, 단둘이 되자 묘한 공기가 흘렀다. 지난주 술집에서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헌은 별로 이 상황을 의식하지 않는 건지, 넥타이 위치를 바로 잡기 바빴다.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눈치를 살피던 윤신이 먼저 입을 벌렸다.

“수석님, 저 실사시키신 선배님 오늘 혼내셨어요? 아까 탁 비서님이 걱정하시길래요.”

“혼났든 죽었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얘기했지. 넌 시키는 일이나 잘해.”

“혹시 제가 정리한 의견서가 별로였나요? 그래서 타박 들으신 건가…… 좀 걸려서요.”

하아, 낮은 한숨을 뱉어 낸 세헌이 그제야 윤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기판의 숫자는 착실하게 지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네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여기서 쟁점이 아냐. 내가 지시한 일이었냐, 아니냐가 골자지. 다신 시키지 않은 일 함부로 하지 마.”

“지난번에 앞으로는 지정해 주신 사건 회의 참석해도 된다고 하셔서, 도와도 되는 줄 알았어요.”

“적당한 사건을 물색 중이야. 지금 그 사건은 아니야.”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

풀 죽은 목소리가 거슬렸던지, 세헌이 날카로운 어투로 질문했다.

“4년 차. 내가 왜 이런 명령을 하는 걸까. 널 미친 듯이 증오해서?”

“증오하셨다면 절 이미 죽이셨을 것 같은데요.”

“잘 알고 있군. 내 팀에 기어들어 왔으면 그 순간부터 너는 내 거야. 네가 무슨 일을 할 시기도 내가 정하는 거고. 오늘 회의 중에 부팀장 개같이 깨지는 걸 다 같이 봤으니 다신 아무도 안 그러긴 하겠지만 차후 누가 뜬금없이 일을 시키면 내가 안 된다고 했다고 반려해.”

그의 설명은 궁금증을 모두 해소해 줄 만큼 구체적이진 않았으나, 적어도 핵심은 전부 담겨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일부러 불이익을 주려고 저러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지라 윤신도 납득했다. 제게 맞는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다.

다만, 자신에게 몇 가지 소소한 일을 맡기는 바람에 팀원들의 앞에서 대차게 욕을 먹은 시니어 선배에게 조금 미안했다.

머쓱해진 윤신이 품에 신줏단지처럼 안고 있던 서류 봉투와 그의 서류 가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사실 이쪽이 진짜 용건이라는 양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기…… 보채려는 건 아닌데요.”

“섭외 파트 일은 적당한 때가 되면 시킬 거야. 조르면 더 늦어져. 기다리는 법을 배워.”

“그게 아니고요. 저 진짜 선봐요? 이번 주 일요일이에요.”

커프 링크스를 꼼꼼하게 채우고 있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눈매가 평상시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채였다. 그뿐만 아니라 길쭉한 목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거칠게 파도치듯 한번 들썩거렸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윤신이 계기판을 올려다보느라 이 광경을 놓친 사이, ‘땡.’ 소리를 내며 승강기 문이 아가리를 벌렸다.

세헌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윤신의 말대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가 차 뒷문을 열어 주기에, 빠르게 다가가 올라탔다.

얼떨결에 거기까지 세헌을 따르던 윤신이 기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듯 눈짓하곤 반대편 좌석에 덥석 몸을 실었다. 이러리라곤 예측을 못했던지,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미쳤어? 난 지금 일분일초가 아까워. 내려.”

“이거 하나만요. 저 실은 지난 회식 이후로 쭉…….”

“듣기 싫어. 안 내려?”

냉정한 어투와 서늘한 눈빛이 마른 몸을 꿰뚫어 버릴 얼음송곳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온몸에 그것들이 틀어박히는 기분에 울컥한 윤신은 귀하게 붙잡고 있던 그의 서류 가방과 봉투를 거칠게 놓았다. 탁. 탁. 고급스러운 카시트 위에 물건들을 내팽개치고는 언제 차에 탔냐는 양 도로 내려 버렸다. 꽤 건방진 반응이었으나 세헌은 힐난하는 대신 모두 무시했다.

이제는 윤신도 어느 정도는 그의 대응 방식을 알아챘다. 그는 사람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강세헌은 지금 일부러 더 자신을 모른 척하는 것이다.

이쯤 되자 이 말만은 해야겠다 싶어졌다. 입술 위에 강세헌을 두기라도 한 듯 고른 치아로 여린 표피를 짓씹던 윤신은 별안간 허리를 숙여 도로 차에 고개를 밀어 넣었다.

“전 기회 두 번이나 드렸어요.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그렇게 공을 던지는 것처럼 제 할 말만을 토해 내곤 쾅, 문을 닫았다. 곧이어 기사에게 정중하게 묵례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솔직히 제 일 아니라는 식으로 구는 세헌에게 조금 섭섭했다. 입술에 그의 살갗이 닿았던 그날 이후 자신은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명백한 주동자 주제에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분한 윤신은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걸었다. 한데, 승강기 근처에 도착할 때쯤 뒤편에서 낮고 신중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와 멈칫했다. 의아해하는 사이 확, 어깨가 붙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세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수석님?”

“4년 차. 그날 일에 대한 해명을 원하는 것 같으니 해 줄게. 그 일은 내 실수야. 그리고 난 내 인생에 결함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이 대답에 꽤 황망해진 윤신이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제가 언제 해명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네가 원하는 게 해명이든 고백이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거완 별개로 날 너무 흔들지 말란 뜻이야. 점점 더 참기가 힘들어.”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최소한 강세헌이 지금 제게 흔들리긴 한단 뜻이다. 아울러 믿기진 않으나 자신 때문에 뭔가를 견디고 있고, 또 그게 힘들기까지 한 모양이다. 미로처럼 복잡한 그의 마음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친 건지 그 말을 듣자 더 내밀한 그의 심리를 아주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요동치는 제 심경을 다잡느라 아연해진 윤신이 뭐라 답할 기회를 놓친 사이, 세헌이 차분히 덧붙였다.

“내가 널 언제든지 자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이 일을 다시 공론화하지 말라는 뜻인가?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어. 알아들었으면 올라가 봐.”

그와 조금쯤은 거리를 좁힐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득달같이 또 협박성 경고였다. 대놓고 거절당해 본 적이 많지가 않아서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차갑게 차이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목구멍으로 삼킨 윤신은 이를 악물고 애써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네. 알아들었어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세헌이 조용히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내 돌아섰다. 탄력적인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그가 세단에 탑승하면서 윤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묵직한 배기음을 내며 차량이 주차장을 벗어난 뒤라야 경련하듯 떨리던 입꼬리를 끌어 내릴 수 있었다.

세헌이 남기고 간 말들을 곱씹자니 뒤늦게 열이 끓어올랐다.

“사람 코앞에 두고 결함? 내가 무슨 제 인생 에러값이야?”

넥타이에 키스 같은 걸 해 대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먼저 흔들어 놓은 게 누군데. 저 좋을 짓은 다 해 놓고, 실수?

언젠가부터 속으로 정하고 있던, 그에 대한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사디스트다.

“개새끼. 좆 까.”

윤신은 아직까지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던 친절한 승강기에 분연히 올라탔다.

* * *

탁상 달력을 들여다보는 윤신의 안색이 어두웠다. 내일이면 벌써 맞선 날짜였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여전히 평화롭게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었다면 훨씬 이 만남을 편하게 받아들였을 터다. 일단 만나 본 후, 인연이라 느껴지면 결혼하고, 아니면 정중하게 사과한 뒤 헤어지면 되는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자신에게까지 이런 도움을 요청한 걸 보면 누나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긴 하지만 꽤 몰려 있는 상황일 것이다. 이 혼사가 어그러진다면 어떤 방식으로 누나에게 불이익이 돌아갈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열띤 첫사랑이라도 빨리 해치워 버리고 와야 후회가 없을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였는데.

〈난 내 인생에 결함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

“생각할수록 열받네.”

키스 직전 눈을 감은 자신도 공범이지만, 시작은 확실히 세헌이 했다. 그걸 기억하면서도 제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던 그의 그 건조한 음성과 초연한 표정을 떠올리자 절로 울컥했다.

물론 그가 제게 손을 뻗든, 그러지 않든 모든 건 본인의 의사였다. 윤신은 그걸 진심으로 존중했다. 하나 중요한 때 모르는 척할 거라면 상대를 자꾸 헷갈리게 하는 건 분명히 과실이다. 타인에게 손톱만큼도 빈틈이 없는 그가 제겐 눈에 보이지 않는 여지를 자꾸 열어 주니, 불안할 때 마음을 의지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후우. 머리를 비우기 위해 숨을 몰아쉰 윤신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펌 내부 전산망에 접속해 필요한 자료들을 다운로드 하다가, 직원 명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헌의 이름을 검색하니 상단에 그의 학력을 비롯한 각종 법 학회, 위원회 등의 이력과 전문 분야 목록이 쭉 떴다.

‘기업 인수 합병, 지배 구조, 사모 투자, 증권 규제.’

최근 기록인 상단에는 거의 섭외 파트의 법률 자문 경력 따위들이 빼곡했다. 한데 점점 밑으로 내리자 의외로 가사 사건들도 있긴 있었다. 이런 부류들이 언젠가 본인이 말했던 프로 보노 건들이었던 모양이다.

“후견 사건도 있네, 유언, 유류분, 상속 재산 분할…….”

그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이혼으로 인한 재산 분할 소송이나, 친권자 확인 소송들도 맡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나 모두 오래전 일이었다. 만일 그가 누나 부부의 이혼 소송을 맡겠다고 한대도, 그건 십중팔구 매형의 의견을 대변하는 일이 되리라.

법정에서 세헌을 만나게 된다면, 솔직히 윤신은 도저히 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쪽이 어쩌면 더 나을 것이다.

누나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정말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제 선에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일의 형편을 정확히 모르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흐렸다. 첫 매듭짓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강세헌이 본인 정보원 공유는 당연히 안 해 주겠지. 그게 자산이니까.’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다는 건 그걸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마 변호사 윤리를 어기는 불법적인 루트도 기꺼이 활용하기에, 미희에게조차 본인 조사원들을 보여 주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누나 부부의 사정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상응하는 대가 혹은 제 패를 보여야 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빌어 볼까. 제발 도와 달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 그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눈빛을 떠올린 순간 이내 접었다.

“퍽도 도와주겠다.”

아무리 그가 능력 있는 변호사라도 한 개인이 수한만 한 대기업을 척지는 건 모험이다. 가뜩이나 수한과 교류가 많은 펌에도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게다가 이 소송을 이긴다 해도 세헌이 얻을 수 있는 건 약간의 금전적인 이득과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얻게 되는 인지도 정도일 텐데, 그는 이미 그게 넘쳤다.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걸 주겠다고 설득해야 했는데,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감이 안 왔다.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아주 미약한 짐작을 품고 있었지만, 낯 뜨겁게 사람 면전에서 넥타이를 통해 간접 키스까지 해 놓고 정작 세헌의 반응은 차가웠다.

〈어디 가서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알아듣니?〉

누나가 제게 했던 경고까지 함께 떠오르자, 더더욱 아무 담보 없이 세헌에게 다짜고짜 고민을 털어놓는 건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라면 언제든 수한의 편에 설 수도 있었다.

허무하게 화면을 종료한 윤신은 책장에 끼워 둔 책 한 권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위대한 유산〉이었다.

강세헌은 제 재판을 본 뒤로, 자신이 인용했던 이 책을 읽으면서 뭘 찾아냈을까.

책 속 주인공 핀은 노동자 계층이었으나, 막대한 유산을 받아 상류층에 편입돼 삶을 역전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삶은 금이 아니라, 또 다른 가치들이 빛내 주는 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락, 얼마 전 인덱스 스티커를 붙여 둔 어느 한 페이지를 펼친 윤신은 디킨스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눈에 담았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큰 요구를 할 수 있는 건 아냐. 하지만 생각하는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어.〉[1]

이는 꼭 계속 세헌을 시시때때로 생각하게 되는 제 마음 같았다. 종이를 열심히 뒤쪽으로 넘기자 이번엔 마치 그와 같다고 느껴졌던 문장이라 접어 둔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넌 내게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해. 내 가슴에는 부드러움이 전혀 없어. 동정심이나 감정 따위, 그런 바보 같은 것들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아.〉[2]

〈도윤신.〉

근사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던 그때의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을까.

책을 덮어 제자리에 넣어 둔 윤신은 풀썩,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한쪽 뺨을 딱딱한 테이블 매트 위에 기대곤, 그를 생각하느라 조금씩 달궈지고 있던 뺨의 열기를 식혔다.

힐끔 제 휴대폰을 쳐다봤지만, 손바닥만 한 기계는 여전히 울리지 않고 있었다.

* * *

거대한 담장 앞에 차를 정차한 윤신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땅을 내디딘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살펴 들어가세요.”

윤신은 수줍게 미소 짓는 제 맞선 상대에게 공손한 묵례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대문이 열린 뒤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라야 운전석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되돌아와 옷소매를 붙잡았다.

“도 변호사님, 애프터가 없으시네요? 전화로 말씀하시려고요?”

당황한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 그렇죠. 제가 맞선은 처음이라서요.”

“전 여러 번째니까 그럼 제가 할게요. 조만간 뵐 수 있을까요? 해 바뀌기 전에 또 뵀으면 좋겠어요.”

“실은 그게, 제가 도국에 입사한 지가 얼마 안 돼서요. 요즘 일 배우느라 조금 바쁜데. 상황 봐서 연락을 다시 드려도 될까요. 당장 며칠이 좋겠다 확답을 못 드리겠어요.”

“거절하시는 거예요?”

“약속을 못 지키는 것보단 애초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편이 나아서요. 꼭 연락드릴게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던지, 그녀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들어가더니, 조심히 가라는 듯 다시 인사했다. 윤신은 여자가 완전히 가시거리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차에 제대로 올라탔다. 집을 향해 주행을 시작하는 윤신의 안색에 긴장이 풀린 기색이 완연했다.

상대를 직접 만난 오늘에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다. 여자는 윤신이 수개월 전, 유명 스포츠 선수 살해 혐의를 입은 사실혼 관계 아내를 변호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다던 모양이었다. 직접 자신을 수소문해 혼담을 넣어 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조금 놀랐다.

마침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언론사가 수한그룹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것 같았다. 또 윤신의 아버지가 생전 존경받던 법조계 인사였다는 것도 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듯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건 이르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고 말도 잘 통했다. 또한 그녀가 제게 큰 호감이 있다는 게 전부 전달됐다.

거기까진 다 좋았다. 다만 문제는 너무 모든 게 매끄럽고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렇게 서로 천천히 알아 가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식을 올렸으면 싶다고 초면부터 대놓고 이야기했다. 하나 이 상황에 누나를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윤신으로선 부담감이 컸다. 더 이상 매형은 제게 아군이 아니었다.

일단 만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어떡하지, 이제.’

감기가 온 것처럼 목구멍이 깔깔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애꿎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 윤신은 손아귀에 부드러운 촉감이 감기자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신호가 잠시 걸린 사이 널찍한 부분에 입술을 대 봤다. 당연히,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종이를 구기듯 그것을 괜히 쥐락펴락하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바로 타이를 내버려 두고 핸즈프리를 연결해 전화를 받았다. 누나의 연락이어서 마음이 급했다.

“누나?”

그녀와 직접 통화를 하는 건 제집을 찾아왔던 날 이후 처음이다.

- 윤신아, 지금 통화 괜찮아?

목소리가 많이 나아져서 다소 마음이 놓였다.

“운전하는 중이긴 한데, 서행하는 구간이라 괜찮아. 어떻게 연락했어? 혹시 그 댁에서 나 만났다고 연락 온 거야?”

- 응. 집에 오자마자 난리 났대. 여자 마음 그렇게 잘 홀리면서 왜 연애는 안 했니? 그래도 대학 땐 꾸준히 여자 친구 있더니, 변호사 되고선 누구 만난다는 말이 없더라.

“그거야 워낙 바쁘니까. 그땐 어렸지만 이 시점에 만나면 결혼 생각도 해야 하고. 부담돼.”

- 그래도 이제 슬슬 고려해야지. 말도 잘 통하고, 상냥하고, 그러면서도 남자답고. 너무 좋았다고 그런다더라. 잘됐어.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 내 반응도 좋게 나갔던 거겠지.”

제 반응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던지, 음성에 화색이 깃들었다.

- 마음엔 들어? 그럼 금상첨화고.

“나쁘진 않아. 결혼이야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사랑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아.”

즐거워하던 그녀는 좀 의외라는 듯 주파수를 조금 높여 응답했다.

- 한 번 만나고 어떻게 알아.

대충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대방의 탓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문제였다.

여자와 만나 대화하는 내내 윤신은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좋다, 싫다 따위의 감정을 수반한 게 아니라 정말 단순히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밀어내려고 하는데도 머릿속을 점령당한 듯 누군가의 존재가 뇌리에 가득 찼다. 앞에 맞선 상대를 앉혀 두고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게 얼마나 죄책감이 느껴졌는지는 말로 표현 못 했다.

그는 오늘의 이상한 기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찜찜함을 기억하는 이상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이성적인 감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기에 윤신은 평균 이상으로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냥. 느껴져. 일종의 직감 같은 거야.”

그건 누나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세헌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하기 복잡해서 윤신은 거기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 두 번, 세 번 만나면 달라질 수도 있어. 첫눈에 반짝거리는 것만 사랑은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런데 그냥 계속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만 들었어. 인연이 아니야. 애프터를 신청할 마음이 안 들었단 말이야. 그분에 대해서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

- 윤신아.

“찌릿한 느낌을 못 받아서 착각한다고 생각하지 마. 나 어떤 사람이 궁금한 느낌이 대체 뭔지, 나랑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알아.”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 너 혹시 따로 사귀는 사람 있니?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못 물어봤다.

이 물음을 들었을 때, 뇌리에 특정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면 안 됐다. 제겐 아직 연인도, 그에 가까운 어떤 상대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세헌이 생각났다.

못된 말만 하는 유려한 입술이라든가, 자신을 꿰뚫어 볼 기세로 직시하는 냉정한 눈매, 이따금 예고도 없이 닿아 오는 딱딱한 손가락 같은 것들이 회오리치듯 머릿속을 엉망으로 뒤집어 놓았다. 짧게 망설이던 윤신은 사실 그대로 답했다.

“없어.”

- 미안해. 이런 짐 지우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널 지켜 주고 싶은 마음에…… 어차피 넌 연애도 안 하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야. 정 마음에 안 들면 적당히 때 봐서 파투는 내가 놓을게. 그래도, 몇 번은 더 만나 봐. 응?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해 주지 않았다. 당장 어깃장부터 놓는 건 묘수가 아닌 듯해서, 그저, 복잡다단할 누나의 마음을 배려해 말을 돌렸다.

“잘 버티고 있는 거야? 또 그런 꼴로 나타나면 나 못 견딜 것 같아.”

계속 마음속에 꾹꾹 눌러 두고 있던 걱정을 꺼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 넌 네 걱정이나 해. 강세헌 변호사는 나도 몇 번 스치듯 본 게 전부라 잘은 몰라도 보통 차갑고 까칠한 게 아니던데. 그래도 넌 잘 버틴다면서. 송 변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긴 하더라고. 뭐,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건지도 모르지만.

회식 자리에서 미희에게 세헌과 있던 모습을 보였던 일이 절로 떠올랐다. 신중한 표정이 된 윤신은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만약에 지금 자신이 다른 이도 아닌 강세헌 때문에 좀 심신이 복잡한 상태라고 말하면 누나가 어떤 얼굴이 될까를 상상했다. 썩 반기지는 않을 듯해, 그도 말을 아꼈다.

“배울 게 많아.”

- 그럼 다행이고.

“저기, 누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도 변호사야. 큰 신뢰 못 주고 있는 거 알지만 그래도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 줘.”

귀엽다는 듯 픽 웃는 소리가 들려서, 윤신의 마음도 애틋함으로 녹아내렸다.

- 든든하네. 고마워. 그럼 이제 끊자. 운전 중인 거 같은데 집중해야지.

이 화제를 더 이어 가고 싶지 않은 누나의 감정이 전이됐다. 속으로 조금 반발하긴 했지만 언제나처럼 착하게 동의한 윤신이 먼저 끊으라는 듯 끝인사 했다.

“알겠어. 늦었다. 잘 자.”

- 응. 조심해서 들어가.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들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땀이 차는 듯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가 사방에 가득 드리운 것만 같았다. 두려웠는데, 잡을 게 마땅치가 않았다. 자신이 이럴진대 누나는 더할 것이다. 그래서 바로 싫다고,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차마 말을 못 했다.

단지 맞선을 보고 돌아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죄짓는 느낌이 휘몰아치는지 몰랐다. 상대방에게도, 세헌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하아, 무거운 숨을 고르는 윤신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애써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눈은 심란함으로 젖어 갔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이 모든 난관을 해결할 단 하나의 묘수가 존재하긴 하는데, 그걸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개체가 몹시 방어적이어서 더는 운을 뗄 엄두가 안 났다.

“해명이든 고백이든 나랑은 상관없다…….”

세헌이 자신을 붙잡고 했던 이야기를 곱씹자 사방에서 차들이 경적을 울려 대는 러시아워처럼 사고 회로가 더욱 복잡해졌다. 제 쪽에서 헷갈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정답과 오답의 경계가 확실한 그가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실수였다고 하면서도, 지금 제게 흔들리고 있음을 넌지시 피력했다.

어느 쪽이 그의 진심인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 일은 강세헌이 저지른 꽤 끔찍한 실수였으되, 동시에 그는 자신을 감당하기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다. 침묵하던 제게 그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던 말이 이 사실을 증명했다.

〈점점 더 참기가 힘들어.〉

‘대체 나의 뭘 참기가 힘든 건데. 키스는 확실히 하고 싶어 했었고…….’

설마 나랑 자고 싶나?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가던 윤신의 뺨이 벌게졌다. 혼자 너무 갔다 싶어져 보는 이가 없는데도 부끄러웠다. 설상가상으로 하필 그 순간 건너편에 사택 건물이 보여 자신도 모르게 차선을 변경했다. 당황한 나머지 아무 예고 없이 무턱대고 한 짓이라 옆 차선 운전자들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 댔다.

빵빵! 빵빵!

“헉…….”

아무리 서행하는 구간이라고 해도 사고 유발의 위험이 있었다. 죄송하다는 의미로 여러 번 깜빡이를 켜던 윤신은 심호흡을 하곤 건물 초입 방향으로 노선을 옮겼다.

이윽고 미끄러지듯이 지하 주차장으로 입성해 차를 세운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찬 공기를 쐬고 싶어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밖으로 나온 뒤, 화려한 사택 건물을 올려다봤다. 세헌의 집이 있는 층을 총구로 겨냥하듯 분명하게 시선 고정하고 그곳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러다 애당초 제 말을 듣지 않으려는 그에게 텔레파시를 쏘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져 이내 관뒀다.

길의 오른편 방향으로 향한 윤신은 종종 들르는 24시간 카페에 진입했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 앞에 놓고 카운터에서 보이지 않는 안쪽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거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곳인 데다 퍽 늦은 시간이라 전체적으로 사람이 없었다.

귓전에 감도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머그 컵을 매만지던 윤신이 휴대폰을 꺼냈다.

‘끝까지 전화 한 통이 없다 이거지.’

윤신은 그게 무엇이든, 어정쩡한 상태인 게 싫었다. 결국 그의 이름을 찾아 손가락을 굴려 보다가 굳게 마음먹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칼같이 쉬는 세헌이었던 터라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의외로 금세 응답이 들려왔다.

- 네.

“어, 받으시네요? 주말이고 늦은 시간이라 기대 안 했는데.”

- 일 때문에 건 거 아니야? 용건 핵심 열 글자 내로.

“일 때문은 아니고요, 사적으로 건 거예요.”

- 사적으로 걸었다. 게다가 열 글자도 넘었고. 그렇군.

“네. 그래서 말인…….”

그 순간.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말에 온점을 찍기도 전이었다. 황당해진 윤신이 제 휴대폰이 고장이 난 건가, 혹은 배터리가 꺼진 건가 우려하며 기계를 살펴봤지만 단순히 세헌 쪽에서 통화를 종료해 버린 게 맞았다.

울컥한 윤신이 바로 다시 그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몇 번 신호가 걸리는데도 받지 않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급한 업무상의 용무가 있는 것처럼 꾸며 전송한 뒤 다시 전화를 걸자, 이번에도 다행히 그가 목소리를 되돌려 주었다.

-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열 글자 내로.

손가락으로 자신의 할 말의 음절 수를 세어 본 윤신이 서둘러 답했다.

“우리 지금 좀 봐요!”

상대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 내가 널 왜 봐. 오늘 일요일이야.

“식사하셨어요? 안 드셨으면 같이 먹어요.”

- 먹었어. 너도 먹었을 시간 아냐?

“그럼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제가 사 드릴게요.”

- 마셨어. 이미 혈류에 카페인이 가득하시다.

“그럼, 오늘은 산책 안 하세요? 뒤쪽 공원 나무들에 눈 쌓인 거 되게 예쁘던데.”

- 난 생각하려고 걸어. 옆에 누구 있으면 방해돼. 할 얘기 그게 다야? 그럼 끊어.

또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조짐이 보이자, 윤신도 보다 직설적으로 공격 방식을 변경했다.

“이런 게 바로 여지라고요. 메시지 보냈을 때 저한테 일 얘기할 게 없다는 거 아셨을 거잖아요. 그런데 한 번 더 전화 받아 주셨고요. 수석님이 평소에 어어엄청 흘리고 다니는 헤픈 분이거나, 혹은 저한테 관심 있거나 둘 중 하난데. 전자보단 후자가 낫지 않아요?”

세헌의 외양은 남자인 자신이 봐도 아주 훌륭하긴 했으나 매력적일 뿐, 자신은 본질적으로 게이가 아니니 어떤 감정을 유발하진 못했다. 차곡차곡 잘 쌓아 올린 커리어가 부럽긴 하지만 어떻게 쌓았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기에 완벽하게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인데도 윤신은 자꾸 그에게 휘말렸다. 신경 쓰이던 마음이 진화한 모양인지 자꾸 얽히고 싶었다.

그런 욕망을 투영해 거침없이 묻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가라앉은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하게 귓전에 맴돌아서, 윤신은 내심 당혹스러웠다.

- 넌 자아도취가 취미지? 어쏘의 최소한도 양심과 진짜 일 얘기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걸었단 생각 같은 건 안 하나?

“안 해요. 제 용건이 일 얘기가 아니라는 건 저도, 수석님도 분명히 아니까요.”

두 번의 도움닫기를 기각당했다. 하나, 세 번까진 도전해야 자신도 후회가 없을 듯했다.

“수석님만 아픈 거 아니에요. 저도 변호사님 때문에 머리 아파요.”

그 어떤 말보다 그에게 직격타였던 모양인지, 대꾸 대신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무겁고 깊은 숨소리는 그에게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이 화두야말로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만한 계제라는 걸 인지한 윤신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혹시 저 오늘 선보는 거 까먹으셨어요?”

- 누굴 금붕어로 아나. 기억해.

“그런데 끝까지 전화 안 하시던데요.”

- 전화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어? 말을 하지.

“일부러 제가 걸게 만드신 거예요, 아니면 진짜 흥미 없으신 거예요?”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신이 더욱 몰아붙였다.

“저 지금 선보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내가 네 애인이라도 돼?’라거나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따위의 방어적인 답을 해 올 거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막상 세헌은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용기가 났다.

왜 하필 강세헌인지는 자신도 정확히는 몰랐다. 어쩌면 제 문제를 조금의 편견도 없이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필요하다면 잊어버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 실은 이렇게 등 떠밀려 결혼하는 거 싫어요. 걸리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관둔다고 말하면 누나가 주선 엇비슷한 걸 한 자리라 힘들어질 거 훤해요. 이럴 땐 어떡해요? 변호사님은 모든 경우의 수와 대응 방안을 같이 생각하는 분이잖아요.”

- 4년 차. 내가 10분당 상담료가 얼마라고?

“모든 걸 수임할 사건이라고 보지 마시고요. 변호사 윤리 규약에도 있어요. 제1조, 변호사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향상시키며…….”

말허리를 중간에 잘라 버린 세헌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해답을 내려 주었다.

- 좋아, 답을 주지. 간단해. 해외 연수를 가. 보통 5년 차쯤 가니까, 몇 달 당겨서 가면 되겠군. 가서 변호사 자격증도 따고, 몇 년 뭉개다 와. 다 해결돼 있을 거야.

“그 정돈 저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 당분간은 절대 한국 안 떠나요.”

- 왜. 네가 애국 열사라도 돼?

“누나 때문에요.”

- 그러니까 왜.

“자세한 건 말씀 못 드려요. 그냥 그런 게 있어요.”

누나의 경고를 어기고 털어놓은 뒤 상담받고 싶은 충동과, 아무 대응책도 없이 말만 흘려선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심란해진 윤신이 따뜻한 기운이 아직 올라오고 있는 머그 컵 주둥이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 온기를 만끽하고 있는 사이 세헌의 잠긴 음성이 이어졌다.

- 난 전부 털어놓지 않는 사건은 상담 못 해. 알아서 생각해.

“오늘 날씨 진짜 추워요.”

창밖을 내다본 윤신은 새카만 하늘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별은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청명하다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보이진 않으나 아마 이 말을 꺼낸 순간 세헌도 힐끗 창문 밖을 내다보았으리라는 짐작이 싹텄다.

“그리고 전 지금 옆에 누가 있어 줬으면 좋겠고요. 쓸쓸해요.”

- 선본 여잘 다시 불러.

“아니, 같이 사택 살면서 너무하시네요. 제가 그렇게 꼴 보기 싫으세요?”

- 네 모든 게 진심이라서 싫어. 난 깨끗한 인간들이랑은 기질적으로 안 맞아.

“저 양육 중이신 거 아니에요? 수석님의 어린양이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다고요.”

- 묻어는 줄게. 임직원 복지 차원에서.

“그러지 말고 살려 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 집 앞 카페에 있어요. 지난번 마주쳤던 데요.”

젠장,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뱉어 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하나 휴대폰을 잠시 떼어 낸 사이 한 말인 모양인지 정확하진 않았다. 윤신이 기계를 귓전에 댄 채로 머그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식기를 깨끗하게 닦을 때의 뽀드득거리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침묵이 이어졌다.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통화가 끊겼나 싶어 화면을 보았으나 그런 건 아니었다. 세헌은 지금 고민 중인 것 같았다.

“변호사님, 저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10분? 15분?”

- 한 시간.

“지금 댁에 계신 거 아니에요?”

- 댁에 계셔. 그래도 한 시간.

제 할 말만 마친 세헌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아연해진 얼굴로 새카매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윤신은 눈살을 살짝 구겼다.

어차피 내려올 거라면 좀 더 좋게 얘기할 순 없는 건가, 싶어졌으나 금세 이렇게 까칠한 그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인식하곤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성질머리는 더러워 가지고. 나니까 수거할까 말까 고민이라도 해 주지. 운 좋은 줄 알아.”

툭, 화면을 건드린 윤신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발걸음이 조금 들떴다. 세헌이 마실 만한 음료를 미리 주문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승강기에서 내린 평상복 차림의 세헌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입으로는 한 시간을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정작 제 쪽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집을 빠져나왔다.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 종종 거니는 길목을 따라 몇 분 걸어가자, 언젠가처럼 창문 너머 바형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윤신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때처럼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뚜벅뚜벅 그 앞으로 다가가니, 예상보다 마주침이 훨씬 일렀던지 윤신이 벌떡 일어나 세헌을 반겼다. 그 순진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또 속이 뒤틀렸다.

목구멍을 타고 차오르는 짜증을 겨우 삼킨 세헌이 건물을 빙 돌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음료를 미리 주문해 두었던 건지, 금세 머그 컵 하나를 픽업대에서 받아 온 윤신이 손을 흔들었다.

“이거, 드세요. 제 거보다 샷 하나 더 넣었어요. 쓴 거 즐겨 드시는 거 같아서요.”

테이블 위에 컵을 올려 두는 윤신을 물끄러미 보던 세헌이 마지못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초대자인 윤신이었다.

“제 예상보다 빨리 내려오셨네요.”

“그럼 더 기다리든지. 그렇게 할래?”

어이없다는 듯 세헌을 보던 윤신은 이내 그를 향해 기울어져 있던 몸을 슬쩍 틀었다. 그러고는 이미 다 식은 제 몫의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투명한 유리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정갈한 슈트를 잘 차려입은 윤신과, 도톰한 니트를 걸쳐 입은 세헌의 모양새가 퍽 대조적이었다. 또다시 고요가 흐르자 이번에도 윤신이 균열을 깼다.

“겨울밤에 마실 나오면서 그게 뭐예요. 뭐라도 걸치시지.”

“동네 나오면서 뭘 또 걸쳐.”

“제가 멋있게 딱, 재킷 벗어 드리면 좋을 텐데.”

“그거 좋군. 벗어.”

“저도 차로 왔다 갔다 해서 겉옷이 없어 가지고 추워요.”

“그래, 너의 그 얄팍한 존경심.”

“티 나요?”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윤신도 픽 웃었다. 그러고는 넌지시 질문했다.

“뭐 하고 계셨어요?”

“일.”

“집에서도? 오늘 오프잖아요.”

“난 차에서도 일해. 꿈에서도 일하고. 집에서는 당연히, 일하고.”

“지금은 저랑 커피 마시고 계시니까, 고로 저를 위해 시간을 냈다는 거네요.”

그는 부정하는 대신 사실 관계를 조금 비틀었다.

“일종의 프로 보노 중인 거지.”

“그럼 좀 성실하게 임하실 순 없어요? 왜 자세하게 안 물어보세요. 저 선봤다니까요.”

“결론이 정해진 얘기는 안 궁금하니까. 네 입으로 말했지. 이변이 없는 한 어차피 순리대로 결혼하게 될 거라며. 내가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 없는 판에는 흥미 없어.”

“이변을 일으킬 용기가 없는 거겠죠. 아니면 피곤을 감수할 만큼 관심 있지 않거나.”

이 말에 세헌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온 신경이 다 긁힌 듯 예민해진 표정으로 윤신을 지그시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윤신은 마주 봐 주지 않을 이유가 없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해저처럼 깊은 동공은, 아마 자신만을 가득 담고 있을 것이다.

“4년 차. 너 대체 왜 이래? 어느 날부턴가 이상해. 난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하지 않아. 무슨 꿍꿍이로 계속 옆구리 찌르는 건데.”

끊임없이 세헌을 은연중 떠보고 있다는 걸,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런 응답을 읽어 낸 건지 그가 덧붙였다.

“난 사람을 꽤 잘 봐. 넌 나 안 좋아해. 적어도, 그런 의미로는.”

그의 말은 어떤 각도에선 정답이다. 하지만 한 가지 함정이 존재했다. 강세헌을 향한 제 감정이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단편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또 유일하게 그에게만 그런 방식의 감정이 열려 있기도 했다.

이 뭉뚱그린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던 윤신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관심은 있어요. 또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가끔…… 좀 헷갈릴 때도 있어요. 사람 잘 보면 그것도 아시겠네요.”

굳이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 건, 제 말이 맞기 때문일 터다.

지그시 자신을 보는 세헌의 시선이 불을 떼는 것처럼 느긋하게 달궈지는 게 감지됐다. 나른한 그의 눈빛과 긴장한 제 것이 부딪쳤을 때, 심장을 슬쩍 쥐어짜는 듯한 야릇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은 나지막이 이어 말했다.

“가능성이 있는데 뭘 해 보기도 전에 제가 쏙 결혼해 버리면 우리 둘 다 손해 아니에요?”

“그게 왜 내 손해야.”

“정 억울하시면 저만 손해인 걸로 하든지요. 전 손해 보기 싫어요.”

“좋은 집안에 보내 주겠다는데 뭐 그렇게 싫은 게 많아. 결혼도 비즈니스야. 최대한 활용해.”

“하지만…… 계속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고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설명은 차마 잇지 못하고 윤신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헌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나 싶더니, 이내 마음에 안 든다는 양 머그 컵에 손을 뻗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손에 든 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덤덤히 내뱉었다.

“누나가 수한으로 들어간 순간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원망은 결혼을 허락한 네 아버지와 하겠다고 한 누나한테 해. 난 네 하소연 들어 주는 일기장이 아니야.”

길쭉한 손가락이 다시 머그 컵 손잡이에 단단히 감겼다. 그는 차분한 음성을 모두 외부로 토해 낸 끝에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댔다. 그 순간, 윤신이 혼잣말하듯 조용히 반박했다.

“이럴 거면 저한테 키스는 왜 했어요? 혀부터 대고 많이 급하셨나 봐요.”

툭. 세헌은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으려다 윤신의 말 때문에 삐끗해 손잡이 끝을 놓쳤다. 그 바람에 휘청거리던 컵이 트레이 위로 추락하듯 떨어졌다.

타악! 속절없이 딱딱한 면에 부딪친 물체가 팽이처럼 흔들렸다. 급기야 컵의 주둥이에서 새카만 색 액체가 넘실거리더니, 결국 그의 애꿎은 손등 위로 쏟아졌다.

손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은 세헌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읏, 뜨거워. 젠장.”

덩달아 놀란 윤신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열심히 그의 살갗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기 시작하자 세헌이 그대로 천을 낚아채듯 빼앗아 가 제 손 위를 훔쳤다. 그럼에도 윤신은 혹여 덴 자리가 없는지 그의 크고 딱딱한 손을 덥석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길쭉한 검지와 중지 사이의 계곡이 붉어진 걸 확인하곤 그 위를 제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어떡해요. 괜찮으세요?”

“이거 안 놔?”

“아프세요? 제가 연고라도 사 올까요. 편의점에 있을 텐데. 아니면 댁에 구급…….”

“인내심에 한계 오니까 손 놔. 말했지, 참기 힘들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윤신이 해석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능한 한 부정적으로 사고 체계를 재구성해 봤지만, 아무래도 아까 전 자신이 차 안에서 했던 상상과 상통하는 게 맞는 듯했다. 덩달아 창피해진 윤신이 세헌의 손을 잡은 채로 얼떨떨하게 수 초를 흘려보내자, 이윽고 그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저리 비켜. 나오는 게 아니었어.”

손수건마저 던지듯 내버리고 일어난 세헌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트레이에 컵들을 치운 윤신은 그를 뒤따라갔다. 이제야 그가 했던 말들이 정확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그는 확실히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그런 스스로가 낯설고, 또 불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자신도 그 엇비슷한 걸 느꼈으니까, 알 수 있었다.

윤신은 이제야 아주 조금이지만 그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빨리하자 지하로 내려가 실내 아케이드의 통로를 통해 아파트로 들어가는 세헌의 늘씬한 뒷모습이 금세 보였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불쑥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내보이며 제 위치를 알렸다. 사람이 따라오는데 쳐다봐 주지도 않느냐는 의미였는데, 바로 각하당했다. 아쉬운 대로 허리를 곧추세운 윤신은 그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혹시 펌이 맡은 사건 중에 법정 관리 같은 거 있으면 저 좀 끼워 주시면 안 돼요? 단기간에 품 많이 들어가는 건들요. 그럼 어느 정도 시간을 벌 텐데요. 제가 애프터 신청을 바로 안 하고 미뤘거든요. 이런 마음으로 또 보는 게 그분한테 너무 실례인 거 같아서요.”

‘다음에.’라는 모호한 말로 다시 보자고 약속을 걸어는 놨으나, 계속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식적으로 잠시 몸을 피할 핑계가 생기면 어떨까 싶었다.

“당장 우리 펌이 맡고 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아직 보여 준 것도 없는 주니어가 어딜 법정 관리를 넘봐. 안 돼.”

“연차가 다는 아니죠. 변호사님이 바로 그 예고요. 도국 같은 규모 로펌에 수석님 연차 파트너 없잖아요. 노사 관계 일지 문건 정리 같은 거라면 저도 잘할 수 있어요. 법원에 제출할 신청서 같은 것도 깔끔하게 잘 쓸 자신 있고요. 그게 아니라도 우리 팀 사건 중 제일 할 일 많은 거라면 아무거나 좋아요.”

“난 문제 하나 내면 답 열 개 찾아오는 애들이랑 일해. 아직 네 유전자는 고지식한 인권 변호사에 가까워. 사회적 성공, 큰 보수, 막대한 성취감. 이 세속적 지향점 중 하나라도 네 욕망 카테고리에 생기면 그땐 큰 걸 맡길 생각이니까. 밑바닥부터 밟아서 차근히 올라와.”

“전 진짜 간절해요.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요. 매일 밤샘해야 하는 업무가 필요합니다.”

고요한 거리를 거닐던 세헌이 그제야 멈춰서 윤신을 돌아봤다. 무표정하던 그의 미려한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던 윤신이 제 앞의 세헌을 마주 응시했다.

“네가 처한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으니 일을 달라. 그건 상대를 기만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게 거짓말이랑 뭐가 다른데. 넌 이미 솔직하지 않잖아.”

정론이다. 윤신은 당신의 말이 모두 맞는다는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헌이 신중한 조언을 보탰다.

“충고 하나 하지. 그런 미봉 방식으론 아무것도 해결 못 해. 핵심이 본질이고, 본질이 핵심이야. 넌 맞선 싫어할 타입 아니야. 인연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니까 왜 그 결혼을 하는 게 싫은지, 그 문제부터 풀어.”

“어떻게 풀면 되는데요.”

“말했지, 너 요즘 이상해. 내가 너 같은 종자들 눈에서 본 적 없는 울분 같은 게 생겼어. 게다가 네 유일한 장점이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건데, 그것도 희미해.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뭘 알고 하는 말도 아닐 텐데, 세헌의 지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고들어 왔다. 한 가지는 눈앞의 세헌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누나가 처한 상황이었다.

하나 후자는 혼자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한 거대한 크기의 갈등이라는 것과, 오롯이 제 일이 아니라는 것이 골칫거리였다. 계속 이 말을 해도 되나, 누나를 곤란하게 만들게 되는 건 아닐까, 머뭇거렸던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수석님. 실은, 있잖아요.”

“그게 뭔진 말하지 마.”

“왜요?”

“부탁 들어주고 싶을 거 같으니까. 난 귀찮아지기 싫어.”

“…….”

“자, 프로 보노 끝.”

어스름한 모퉁이에 윤신을 내버려 두고, 또 그는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자꾸 등만 보이는 세헌 때문에 억울한 기분이 든 윤신이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천천히 제 손을 끌어 내렸다. 딱딱하게 뼈가 도드라진 단단한 손목을 지나, 살갗이 보드라운 그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움찔한 세헌이 밀어내려고 하자 더욱 힘주어 붙들었다.

“4년 차.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렇게 잠시 머물러 있던 윤신은 대꾸 대신 천천히 세헌에게로 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어깻죽지와 가슴팍 부근을 향해 얼굴을 숙이고, 매끈한 이마를 부딪쳤다.

“가장 큰 약점은 약점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제가 결함이 될까 봐 무서워하신 순간. 수석님은 이미 결점 생긴 거란 말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안기듯이 기댔다. 마른침을 삼킨 세헌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기척이 고스란히 전이됐다. 윤신은 눈을 차분히 감았다.

마음이 힘들 때 혼자라서 외로웠다. 그런 제 눈앞에 마법처럼 세헌이 나타났다. 어쩌면 자신이 그를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도윤신.”

제 이름을 부를 때 가라앉은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도 좋았다. 등 뒤로, 안아 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며 손을 달싹이는 기척이 사랑스럽다면 그는 믿을까.

그런 생각을 거듭하자, 세헌의 품에서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처음의 작정이 모두 스러졌다. 윤신은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숨만 삼키는 사이, 세헌이 돌연 서로의 몸을 억지로 떼어 냈다.

자신을 뿌리치고 가능한 한 멀어지려는 듯 뒷걸음질 쳐서 얼마 간의 사이를 벌린 그가 윤신을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자신을 보는 세헌의 표정이 서서히 묘하게 변했다. 어딘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너 한 20년 혼자 짝사랑했던 여자한테 차였어?”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 윤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오늘 선은 봤지만.”

그리고 윤신은 그 누구도 짝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아니면 크게 사기라도 당했나? 아버지 유산을 전부 날렸다든가.”

“아버진 유산이 별로 없어요. 엄마 유산이랑 누나가 도와준 돈 보태서 집 한 채 샀어요. 그게 제 노후라고요.”

이 대답을 들은 세헌의 안면이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런데 왜 또 울 것 같지?”

“제가요? 전혀 아닌데.”

두 손으로 뺨에 손을 얹은 윤신이 그대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우려와 달리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눈앞이 이상하게 서서히 안개가 낀 듯 흐려지긴 했다. 조금 전 세헌이 꺼림칙한 대상을 대하듯 제게서 멀어졌을 때, 약간 마음을 다쳤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좋게 생각하든, 나쁘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게 어제 같은데. 왜 이렇게 동요하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가 보는 지금 제 표정이 그 기분을 드러내듯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몇 번 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 민얼굴을 훔치던 윤신이 손을 떨어뜨렸다.

“수석님이 밀어내시니까 그렇잖아요. 속없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상처는 받아요.”

“그래서 이런 표정이 나온 거라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해요.”

“…….”

“저 왜 이러죠? 변호사님 감정이 너무 신경 쓰여요. 진짜 저 계속 차실 거예요?”

그사이 아케이드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헌이 윤신의 손을 덥석 쥐고 보다 으슥한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

어둑어둑한 그늘 아래 가까이 선 두 사람의 손이 여전히 닿아 있었다. 한 박자 뒤늦게 이 상황을 인지한 윤신은 자신이 아닌 그가 먼저 시도한 스킨십인데도 거부당할까 봐 내심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풀려고 하자, 세헌이 바로 끌어당겨 저지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번엔 깍지까지 꼈다. 자연히 서로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겹쳐졌다.

“뭐 하시는…….”

윤신이 그의 의중을 물으려는 찰나였다. 세헌이 깍지를 풀더니, 이내 커다란 한 손으로 윤신의 뒤통수를 지탱하듯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받쳐 안고 확, 마른 몸을 제 쪽으로 당겼다. 두 개의 몸이 빠듯하게 겹쳐졌다. 바스락거리는 윤신의 재킷이 세헌의 스웨터 위에 부대꼈다. 서로의 거친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꽂혀 들었다.

그의 의지로 안긴 순간 깨달았다.

계속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가 체온으로 자신을 위로해 주는, 그런 시간 말이다.

누나를 제집 앞에서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윤신은 줄곧 너무나도 서럽고 두려웠다.

누군가는 별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제겐 그렇지가 못했다. 누나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제 가족이었다. 그녀의 아이들도 그걸 채워 주진 못했다. 목이 졸린 자국을 본 순간,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까 봐, 또 잃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어디에 말할 수도 없어서 조바심만 점점 더 심해졌다.

“따뜻해요.”

목소리에 조금 물기가 묻어났다. 세헌도 느꼈는지 바스러뜨릴 기세로 힘껏 안아 주었다. 그뿐 아니라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곧은 손가락들을 밀어 넣고 천천히 쓸어 주었다. 몸에 가득 감도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윤신이 숨을 몰아쉬었다.

“저 왜 안아 주시는 겁니까? 이러시면 저 착각한다니까요.”

“네 얼굴 보기 싫어서.”

지극히 그다운 대답이라 픽 웃음을 터트린 윤신이 축 늘어져 있던 양손을 겨우 끌어 올려 세헌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자신의 모든 게 진심이라서 싫다던 그야말로, 매 순간 제게 진심인 걸 아는지 모르겠다. 다만 자신이 감추지 않는다면 세헌은 필사적으로 숨겼다. 겨우 그의 감정이 외부로 드러났음을 입증하는 이 체온이 너무 소중해서, 윤신은 그의 옷자락을 힘껏 쥐었다.

“또 뿌리치시는 거 아니죠.”

“안 해.”

“해가 서쪽에서…….”

“안 떴어.”

“사실 그건 저도 알아요.”

바람 빠지듯이 픽 웃은 세헌이 윤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에 쪽, 하고 입 맞췄다. 깜짝 놀란 윤신의 몸이 그의 품에서 뻣뻣하게 굳은 사이, 다소 허탈해하는 음성으로 토로했다.

“하, 이래서 묻어 두려고 했던 건데. 난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 싫어.”

짐작건대 서로의 감정이 아직 균형적이지 못하다는 말인 듯했다. 윤신도 적극적으로 부정하진 못했다. 확실히 이 무대는 세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심리적으로 더 상대방을 의지하고 있는 건 윤신 쪽이었다.

그의 말을 대충은 이해했지만, 정확한 함의를 물어봐야 할 타이밍 같았다. 윤신은 아주 넌지시, 그를 떠보듯이 조심스럽고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부터 제가 외로워하면 옆에…….”

“말하지 마. 안 해 줄 거야.”

“있어 주실 수 있어요?”

듣지 않겠다는 그에게 뒷말을 빠르게 뱉어 내고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동시에 세헌의 한숨 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었다.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지만, 그는 답해 주지 않았다. 초조해진 윤신이 덧붙였다.

“이미 패 까셨으니까 못 물러요. 항소심은 뒤집어도 전 못 뒤집어요. 제가 지금 막다른 골목이거든요.”

“아니, 넌 막다른 골목 가 본 적 없어. 눈앞에 있는 손톱만 한 불행 때문에 세상 무너질 거 같은 애송이지. 까 보면 별것도 아닐 거 뻔해.”

발끈한 윤신이 세헌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말 다 했어요?”

“이제 그만할 거야. 다른 거 할 거거든. 줄곧 키스하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참았어.”

셔츠 위에 어설프게 걸려 있는 넥타이를 확, 당긴 그가 윤신을 벽으로 능숙하게 몰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더라도 그의 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구도로 밀어붙이고는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엔 지난번 술집에서와 달랐다. 확실히 살갗이 겹쳐졌고, 그걸 눈뜬 윤신이 모두 보았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몇 번이나 얄팍하고도 야릇하게 스쳤다.

한계까지 치솟은 긴장감을 억누르느라 숨을 삼킨 윤신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말을 해야겠다고 슬그머니 입술을 벌린 바로 그 순간, 세헌이 그대로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수석님, 읏!”

지금까지와 달리 몹시 농밀하게 겹쳐진 입술 때문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윤신이 반사적으로 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세헌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입술이 보다 잘 맞물릴 수 있도록 그가 기울이는 반대 방향으로 제 얼굴을 비스듬히 했다. 매끈한 표피들이 몇 번이고 마주쳤다. 세헌은 윤신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공평하게 감쳐물었다.

이윽고 슬그머니 입술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응, 응…….”

두 개의 젖은 살덩이가 질척하게 얽혔다. 혀 위의 돌기들이 촘촘하게 빈 공간을 채워 가듯 엉켜들었다. 미끄덩한 타액들이 서로의 혀끝이 부딪칠 때마다 뒤섞였다.

타악. 몸을 들썩이던 윤신의 등이 문을 닫은 상점에서 세워 둔 기다란 현수막에 부딪쳤다. 곧 쓰러질 듯하니 도와 달라는 양 세헌의 옷을 당기자 그가 그대로 팔을 잡아끌어 더욱 어둡고 으슥한 위치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는 마른 몸을 벽에 기대게 한 채 끊임없이 젖은 입술을 탐했다. 키스가 서투른 윤신이 숨이 막혀 몸을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세헌은 놓아주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읏, 숨, 숨 막……!”

세헌의 목을 와락 끌어안은 윤신이 잠깐 놓아 달라는 듯 손끝으로 애원했다. 입술의 보드라운 느낌과 살덩이의 야릇한 촉감, 그리고 달콤한 타액까지 집요하고 꼼꼼하게 맛보던 그가 겨우 살갗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의 얼굴은 가까이에 있었다.

깊게 내쉬는 한숨이 상대방의 입술 위에서 흩어졌다. 그는 쪽, 쪽, 턱 주변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서로가 분리된 짧은 시간마저 허투루 쓰지 않았다.

“침 다 흐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윤신이 수치심을 느끼고 입을 슬쩍 다물었다. 그러다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세헌을 응시했다.

“육탄 공세가 본인 방식이에요? 좋아한다, 뭐 그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시면 어떡해요. 같은 남자랑 이러고 있는데 저도 마음의 준비라는 걸 해야죠.”

그러자 세헌이 듣기 싫다는 듯 윤신의 턱을 덥석 붙들었다. 동시에 윤신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몇 달 전, 그의 방에서 만났을 때도 세헌은 이렇게 턱을 쥐고 제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때도 어쩌면 지금과 같은 충동을 느꼈을까. 그날을 되새기고 있자니, 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내 방식은 상관의 명령이야. 입 벌려.”

순응한 윤신은 슬쩍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그가 어둡고 따뜻한 동굴 속으로 거칠게 제 혀를 욱여넣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서로의 살덩이가 다시 질척하게 겹쳐졌다.

그는 윤신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화답하듯 의지할 곳 없는 마른 손이 세헌의 목을 더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서로를 탐닉하는 짙은 키스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가장 어두운 새벽이 올 때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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