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세헌이 맡은 사건은 회사 소송으로, 기업 임원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의 소였다. 그는 기업인 원고 측을 대리해 정관을 어긴 임원에게 소를 제기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상법에 따라 사원 총회에서 선출한 대표인 전무 이사가 앉아 있었다.
법정의 정면 중앙에 자리한 재판장이 법정 경위를 향해 손짓했다. 경위가 증인의 이름을 반복해서 호명하자, 한 남자가 증인석으로 가 앉았다. 그사이 피고 측 대리인이 서면을 준비하고 있던 세헌을 훔쳐보다가, 시선이 부딪치자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방청석의 윤신과 탁 비서가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법정에서 마주쳤을 땐 정반대의 위치였는데, 윤신은 지금 세헌의 허락을 받고 그의 재판을 보러 와 있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본 세헌의 재판은 마치 빙판 위를 거니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주 매끄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분위기가 꽤 냉랭했다. 차디찬 한겨울에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난타전을 하는 느낌이었다. 기선제압은 세헌 쪽에서 한 것 같았다.
“원고 측 대리인, 신문하십시오.”
판사가 제안하자, 스리피스 슈트를 잘 차려입은 세헌이 증인의 앞에 섰다. 어딘지 고압적으로까지 보이는 차가운 눈매가 상대방을 또렷하게 직시했다.
확실히 키가 훌쩍 크고 인상이 날카로운 사람이 정중앙에 우뚝 버티고 서서 버티자, 실내의 모든 주의와 집중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옮겨 갔다. 이윽고 모양 좋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을 때, 재판정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그에게 쏠렸다.
“증인. 증인은 상법 제399조 1항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있습니까.”
세헌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식회사의 이사가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한 행위를 하거나, 그 임무를 해태한 때에는 회사에 대하여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이 내용도 본인이 아는 바가 맞습니까.”
“예.”
“가장 최근에 이 ‘상법 제399조’라는 말.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게, 원래 아는 법령이기도 하고, 또 워낙 기업 임원들 사이에선 기본적인 상식이기도 해서요.”
“최근, 이 단어를 어디서 들어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잘못을 짚어 주듯 세헌이 질문을 반복했다. 낮은 음성이지만 퍽 부드러운 어투였다. 피고 측 대리인의 얼굴을 힐끗 본 증인이 입술을 달싹이다 마지못해 응답했다.
“정 이사가 이런 법이 있다면서, 회의실에서 같이 담배 한 대 같이 피울 때 말한 걸 들었습니다. 정관을 어기면 책임이 있는 이사와 감사가 연대 배상 책임이 있다면서요.”
“그런데 여기서 정 이사란 분은, 피고를 지칭하는 게 맞습니까.”
“예.”
“두 분이 대화를 나눈 시기는 언제입니까.”
“올해 초쯤…… 명절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피고가 귀사에 큰 손해를 끼친 시점과 일치하네요. 사실 아무리 기업 임원진이라지만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상법 몇 조 몇 항 타령하며 대화를 하는 일은 흔치 않죠. 좀 더 뭉뚱그려서라면 모를까요. 보통은 사내 법조 팀장들이나, 혹은 송사에 연루된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이야깁니다. 피고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세헌의 말이 끝나자마자 피고 측 대리인이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추측성 유도 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판사가 세헌을 향해 준엄한 눈빛을 보냈다.
“인정합니다. 사실 관계로 신문하세요.”
그는 살짝 묵례하곤 다시 증인과의 신문을 이어 나갔다.
“자, 이쪽을 봐 주십시오. 바로 그 사실 관계를 입증할 현장 음성입니다.”
세헌의 밑에서 일하는 시니어 변호사가 증거 화면을 제시했다. 회사의 회의실 내부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진들의 동의를 얻어 전반적인 토의 내용을 찍어 둔 것인데 직원의 실수로 중간에 잠시 쉬는 동안까지 녹화가 함께 된 듯했다.
정확하게 상법 타령을 하며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피고의 모습을 모두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 세헌은 다시 증인석으로 다가섰다.
“증인은 피고와 입사 동기입니다. 단둘뿐이죠. 당시 외환 위기를 겨우 극복한 뒤라 나라가 많이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매우 어려운 시국에 치열하게 준비해 입사한 뒤, 아마 회사를 위해 몸을 갈아 가며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거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직급이 같은 피고와 증인의 연봉은 다르죠. 증인이 두 배가량 됩니다. 맞습니까?”
“예.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그렇게 몸 바쳐 마음 바쳐 일한 회사가 동기만 연봉을 훌쩍 높여 주고, 본인은 번번이 동결했다면, 그리고 그게 업무상의 성과가 아니라 단순히 학벌 때문이라면. 인간의 자연적인 심리 법칙상, 고의적 임무 해태의…….”
“이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고 측 대리인이 반박했다. 세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가만히 직시했다.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반대 신문을 하세요! 법정은 추측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전 사실 관계를 토대로 신문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연봉이 차이 나는 것도, 피고가 본인 임무를 해태한 것도, 그래서 회사에 수백억 원대의 피해를 끼치고 사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어디가 제 추측입니까. 저도 궁금하군요.”
두 변호사 사이에 논쟁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판사가 바로 중재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 과정을 모두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윤신은 일부러 세헌이 처음 서늘하기 짝이 없던 장내의 기류를 아주 서서히, 감정적인 방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을 느꼈다.
이 건 자체는 이미 갑과 을의 싸움이라 굳이 피고 측의 약점을 쥐고 흔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간단한 소송이란 표현을 쓴 모양이었다. 다만 차별 대우에 분노한 피고가 회사에 고의로 큰 손해를 끼쳤다는 그 커다란 흐름을, 보편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재판부와 방청객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당장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고가 불쌍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윤신은 세상의 법칙이 그리 간단하게 굴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정말 놀랍게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백한 강자에게 이입하는 일이 잦았다. 을끼리 연대해 싸워 주지 않았다. 아마 세헌은 재판이 진행될수록 그것까지 이용하리라.
‘평생 열심히 일했을 텐데 한 번 실수로……. 마음이 안 좋네.’
윤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빈틈없는 모습으로 중앙에 선 세헌이 방청석을 한번 쓰윽,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구석에 있는 윤신과 시선이 부딪쳤다. 바로 눈인사를 보내자, 그는 언제 이쪽을 쳐다봤냐는 듯 눈길을 돌리곤 노련하게 신문을 이어 갔다.
왠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거부당한 느낌이라 억울했다. 윤신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확인한 윤신은 복잡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 그러고는 탁 비서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표현으로 눈짓을 보내곤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인적 없는 복도를 걸어 모퉁이 방향으로 걷고 난 뒤라야 전화를 받았다.
“네. 법무 법인 도국 도윤신 변호사입니다.”
조용히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그의 미간이 난감함으로 구겨졌다. 그러나 음성은 최대한 공손하게 꾸며 뱉어 냈다.
“그럼요. 말씀은 지난번에 누나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이번 주 주말은 제가 일정이 있어서 어렵고요. 다음 주나, 다다음 주……. 네, 그땐 괜찮습니다. 네. 네. 그러죠. 태산 호텔요. 다음 달 첫째 주 일요일 6시. 그렇게 알겠습니다.”
괜스레 기운이 빠져 벽에 등을 기댄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딱히 열이 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살갗이 닿은 자리가 뜨끈뜨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런 기미를 눈치채선 안 되기에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뇨, 아마. 누난 못 올 거예요. 저만 가죠. 상견례 자리도 아니고 이제 처음 얼굴 뵙는 건데요. 이미 사진을 받아서 제 쪽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뵐게요.”
짧은 통화를 마무리한 윤신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없었다. 기대도 없었다. 불신하거나 기피해서가 아니라 그게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적당한 때에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게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누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에 빠져 그렇게 일이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뭐든 상관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열려 있었다. 감정이 뜨겁든, 미지근하든 제 몫의 인연을 언제, 어떤 형태로든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다. 다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맞선을 보는 것까진 괜찮았다. 진짜 인연이라면 계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거니까. 하지만 이 만남을 원하는 게 매형이라는 게 계속 명치에 걸린 듯 거북했다. 이혼 말이 나오는 와중에도 누나가 직접 와서 사진까지 전해 주고 간 걸 보면 꽤나 공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일단 만나긴 만나야 되는데.’
그런데 만나서 느낌이 좋아도, 안 좋아도 걱정이었다. 전자라서 결혼까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누나가 차후 갈라설 때 자신의 상황이 난처해질 수 있었고, 후자라서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제반 상황이 불편한데 억지로 만남을 이어 가야 할 게 고역일 터다.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린애가 된 느낌이었다. 어른들이 꽁꽁 비밀을 감추고 일들을 진행해 나가고 있는데, 자신은 그 가운데 혼자 정처 없이 휩쓸리기만 했다.
쓰러지지 않게 누가 좀 잡아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뜬금없이 저 법정 안에 있는 누군가의 수려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새 진짜 왜 이래. 의지할 인간이 그렇게 없냐. 하필이면…….”
당혹감으로 확, 얼굴을 붉힌 윤신이 애꿎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탁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손등으로 홍조가 인 뺨을 꾹꾹 누른 윤신이 그를 향해 다가섰다.
“어, 탁 비서님 왜 나오셨어요?”
“의지할 사람이 왜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요. 혼잣말.”
“나 해요. 나.”
“말씀만이라도 너무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윤신이 겨우 웃자, 그도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분위기가 이번 회차는 곧 끝날 것 같아요. 게임이 안 되네요.”
“그래 보이더라고요.”
“참. 송 수석님께서 아까, 나가는 김에 우리끼리 저녁 하자셨는데 제가 강 수석님께만 여쭤보고 깜빡하고 말씀 못 드렸어요.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으시다고 하면 식당 예약하게요.”
“세 분 동문끼리 뭉치는 자리에 제가 눈치 없이 끼는 거 아닌가요?”
“에이, 저라면 몰라도 어차피 강 수석님은 그런 유대감 전혀 안 느끼세요. 게다가 구획 짓기 시작하면 저도 방해꾼이죠. 변호사님 세 분에, 저만 비서인데요.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저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진짜 그 대답이 제일 어렵더라.”
썩 마음에 차지 않는 응답이었던지 그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알겠다는 듯 돌아섰다. 윤신은 통화하는 탁 비서를 뒤로하고 다시 재판장으로 돌아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원고석에서 의뢰인과 대화하고 있는 세헌을 응시했다.
그도 꽤 끈질긴 시선을 느꼈는지, 상대측 대리인이 증인을 신문하는 동안 잠시 쳐다봐 주었다. 그러나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져서 눈만 형형히 빛내는 모습을 정통으로 마주하더니, 바로 이마 사이를 좁혔다.
수학자처럼 이성적이던 그의 표정에 감성이 불순물처럼 섞였다. 매끈한 얼굴에는 정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넌 또 뭐가 문제야?
윤신은 차마 그의 말 없는 물음에 대꾸하지 못하고 먼저 눈을 피했다.
* * *
1차 식사 자리에서 파할 줄 알았던 모임은 2차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펌과 연락한 송 변호사가 사옥 내에 남아 있는 몇몇 다른 변호사들까지 부르는 통에 판이 훨씬 커졌다. 고급스러운 술집 객실 내에 왁자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처음으로 회식 엇비슷한 것에 참석하게 된 윤신은 내심 조금 놀랐다. 늘 딱딱한 분위기로 슈트를 갖춰 입고 일에만 파묻혀 있던 사람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노는 모습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술자리를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와중에 세헌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미희와 대화하는 데까지는 용납했지만, 그 이상은 견디기가 영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중간에 빠져나와 테라스형으로 된 흡연 공간에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재킷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조용히 그를 뒤쫓아 온 윤신이 재빠르게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여기요, 불.”
힐끗 옆에 모습을 드러낸 윤신을 가만히 쳐다만 보는가 싶던 세헌은 이내 고개를 기울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필터를 아슬아슬하게 물고 있는 입술이 붉었다.
“할 얘기 있으면 해.”
“원래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버티세요? 금방 가실 줄 알았는데 좀 의외라서요.”
“왜 평소대로 좆대로 안 하냐는 물음이라면.”
“그렇게 상스럽게 안 물어봤어요. 절 대체 뭐로 보시는 거예요.”
술이 꽤나 들어가서인가. 낯설게도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순순히 대꾸했다.
“별첨 계약서에 적혀 있어.”
“와, 그거 송 변호사님 작품인가 봐요? 선견지명이 있으신 건지. 변호사님을 잘 아는 건지.”
세헌은 답하지 않았으나, 윤신은 그의 침묵이 어느 쪽으로든 긍정임을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그들은 잠시간 입을 다물고 그 선선한 공기를 즐겼다. 세헌이 난간을 등지고 선 채 두 팔을 그 위에 기댔다. 후우, 그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뿌연 연기가 세상 빛을 보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그걸 꽤 안타깝게 보는 윤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와 자신이 함께 있는 이 순간 자체가 꼭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그 고즈넉한 정취에 빠져 있는데, 세헌이 느닷없이 거기서 자신을 건져 냈다.
“또 왜 따라 나왔어. 종일 같이 있었잖아. 이혼하자, 이제. 지겹다.”
“전 신선해요. 수석님은 제가 만나 본 적 없는 타입이거든요.”
탁 비서와 했던 대화를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돌려받게 된 격이었다. 대답을 듣고 기막혀하던 그가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담배를 쥐지 않은 한 손으로 윤신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길쭉한 손가락이 마치 화살 꽂히듯 옷 위를 누르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그렇게 접촉이 끝인가 싶었는데, 세헌이 다시 손끝으로 윤신의 가슴팍을 건드렸다. 이번에는 떼어 내지 않고 그대로 천천히 끌어 올려 도드라진 울대뼈를 지분거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왔던 길을 역행하듯 손의 행로를 바꿔 다시 천천히, 천천히 내려갔다. 명치쯤을 지나, 서서히 바지 버클 방향으로 이어지는 그 느릿한 움직임이 끔찍하리만큼 에로틱했다.
같은 남자에게 이런 식의 위기감을 느낀 건 그로부터 받은 게 처음이다. 그리고 세헌은 마주칠 때마다 제게 그런 감각을 선사했다.
마른침을 겨우 삼킨 윤신은 그의 손이 판판한 복부에 닿는 순간, 덥석 붙들었다.
살갗이 닿았는데도 세헌은 화내지 않았다.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담배를 입에 물고, 윤신의 목덜미를 잡아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수석님.”
당황한 윤신이 그를 불러 봤지만 허사였다. 세헌은 마른 몸이 제게 더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이끌더니, 서로의 위치가 꽤 근접해지자 담배를 비벼 끄고 ‘후.’ 하고 연기를 얼굴에 뱉었다. 쿨럭, 잔기침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윤신의 가시거리에는 오직 세헌만이 가득했다.
“간접흡연으로 죽이시게요?”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지. 위험 부담도 커. 나라면 절대 안 쓸 방법이야.”
“혹시 취하셨어요? 끝도 없이 드시는 거 같긴 했어요.”
“오늘 좀 여느 때에 비해 많이 마시긴 했어.”
“왜요? 오늘 변론도 좋았고…….”
그는 윤신의 말허리를 불쑥 잘라 냈다.
“너 때문에 머리 아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저 뭐 사고 쳤나요?”
“네가 나를 짜증 나게 해.”
“…….”
“요즘 두통도, 불면도 너무 심해. 다 너 때문이야.”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특별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일은 한 기억이 없었다. 바꿔 말하면 세헌이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윤신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언제나 노련하고 능숙한 그가 이 서투른 표현으로 감추고 있는 기저의 감정들이 전이되어서였을 것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제 목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바닥이 꿈틀거렸다. 그는 여린 살 위를 애무하듯 부드러운 피부 위를 지분거렸다. 자연히 마찰한 자리에 열이 일었다. 윤신의 체온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여전히 서로가 가까이 있어서, 그로부터 알코올 향에 섞인 알싸한 니코틴 냄새가 풍겼다. 그 위에 그가 종종 뿌리는 향수의 향기까지 덧대어졌다.
눈앞이 아찔해진 윤신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뒤이어 세헌의 몸을 포박하듯 난간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종종 그가 제게 하듯 품 안에 세헌을 가둬 말 그대로 사방을 봉쇄했다. 난간에 두 팔꿈치를 걸친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윤신을 주시했다.
“이건 하극상인가? 내 몸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위기감이 느껴질 만큼 절 더듬으시니까 그렇죠. 하극상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어입니다.”
그를 전혀 모르겠다. 협상을 하듯, 밀고 당기기를 하듯 본인이 다가와 놓고 물어보면 꼭 시치미를 뗀다. 그래서 이게 아니다 싶어진 윤신이 착각을 거두려고 애쓰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가까이 와 자신을 들쑤셨다.
다른 이도 아닌 강세헌이 일개 어쏘 변호사와의 관계에서 몸값을 높일 필요 같은 건 하등 없었다. 고로 제 쌓여 가는 오해들은 그의 과실, 혹은 무과실책임이다.
진짜 제게 관심이 없는 게 맞나. 그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예상이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윤신은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냈다.
“앙드레 지드가 그랬다던데요. 해안을 잃을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대양을 절대 발견할 수 없다고요.”
세헌은 의외로 이 공을 제대로 받아 주었다.
“4년 차는 어떤 바다를 찾고 싶으신데.”
“저를 위기에서 구해 줄 바다요.”
그 말을 듣자 세헌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아주 없진 않은지, 한층 누그러진 주파수의 음성으로 되물었다.
“네가 처한 위험은 뭔데.”
“수석님부터 확실하게 해 주세요. 혹시 저한테 흑심 같은 거 있으세요? 저 지금 술김 아니고, 아주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놀랍게도 그는 비웃지 않았다. 그저 아주 진득하게 윤신을 마주 볼 따름이었다. 그래서 윤신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 공간을 제 음성으로 더 채워 나가야 했다.
“있으시냐고요.”
사람을 벌거벗기기라도 할 기세로 고집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세헌은, 이윽고 한 글자 한 글자 짓이기듯 대꾸했다.
그 목소리가 낮고, 또 낮았다.
“있으면.”
푹 잠긴 세헌의 단조로운 음성이 뚜렷하게 귓전에 꽂혀 들었다.
일순 움찔한 윤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돌려준 건 단 세 글자의 짧은 답변이었으나, 이를 되새기는 머릿속은 곧 터질 것처럼 가득 찼다. 그의 차분한 말소리가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마른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미친 체하고 묻고는 있지만, 차갑고 독선적인 세헌의 입에서 정말로 나오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어서였을 것이다.
“있으면…….”
그의 응답을 입 밖으로 내어 곱씹는 윤신의 안색이 슬며시 달아올랐다. 늘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그의 유려한 얼굴을 오늘따라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입술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있으시면……. 갖고만 계시지 말고 그냥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사정이 좀 급해서요.”
신중하게 이 말들을 곱씹던 그가 반문했다.
“너 게이야?”
“그런 고민은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막연히 이성애자겠거니.”
“본인이 동성애자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네 눈엔 나를 향한 그런 노골적인 의미의 관심도, 애정도, 성적 호기심조차도 없는데. 흑심은 품어도 된다. 급하다. 이거 재미있네.”
뺨이 후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애꿎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세헌의 눈길을 의식하게 됐다. 이 순간 미묘하게 달라지는 제 안색 하나하나를 야생 동물과 같은 직관력과 판단력을 가진 그가 간과할 리가 없어서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한 윤신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최소한 업무적 영역에서 경외감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끝내 이기기만 하며 사시나. 배울 순 없나. 가끔은 부럽다.”
아울러 때때로 좀 외로워 보인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좋은 점들도 있다, 종종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런 것들도 머릿속에 떠올렸으나 윤신은 일단 패를 감추고 말을 아꼈다.
실제로 자신은 세헌을 향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겐 세헌이 필요했다.
꼭 물리적으로 자신과 제 누나를 도와주지 않는대도 좋았다. 쓸쓸할 때 마음이라도 기대고 싶었다. 흔히 사랑은 밥 먹여 주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곤 한다. 윤신도 알았다. 밥을 먹여 주는 건 대체로 돈과 실체적 권력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 어떤 형태든 마음은 아무 힘이 없었다. 그래도 삶에는 그런 정신적 위로와 지지대가 필요한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지금이 그때였다.
윤신은 최근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유일하게 그런 충동을, 또 욕망을 세헌을 대상으로 느꼈다. 한데 그가 자꾸 자신을 헷갈리게 만들어 최초의 경계선을 넘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안 섰다.
“최소한 저를 자꾸 이렇게 몰아세우고 더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직도 이유 못 찾으셨어요? 말도 안 돼요. 이미 찾으셨는데 인정하기가 싫으신 거겠죠.”
조용히 침묵하던 그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누가 널 더듬어. 그냥 스친 거겠지.”
여기까지 함께 걸어와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 때문에 윤신은 결국 발끈했다.
“누가 스치면서 가슴이랑 목덜미를 막 문질러요?”
“증거 있어?”
물론 없었다. 만에 하나 이 주변의 CCTV에서 영상 같은 게 찍혔다 해도, 그가 옷 위에 묻은 먼지를 떨어주려 했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세헌이 말했듯 그 순간 일방적인 스킨십을 당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그 미묘한 공기가 존재했다. 그리고 윤신은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야릇한 감각을 느꼈다.
“좋아요. 다 아니라고 쳐요. 그럼 왜 자꾸 간 보세요?”
“바로 주워 먹기엔 독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끓이시는 거예요? 익긴 익었어요?”
“너무 궁금해하지 마. 나도 같이 궁금해하기 시작하면 답 안 나오니까. 그냥 덮는 게 너한테도 훨씬 나아.”
이 말을 듣자, 윤신은 계속 흐릿하던 것들이 분명한 형체를 잡아 가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잊고 있는 모양이지만, 자신은 그가 ‘그럭저럭’은 된다고 말했던 괜찮은 변호사였다. 아무래도 제 일이라 여느 때보다 객관적이지 못했을 뿐, 상황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통찰력과 사리 판단 능력 정도는 있었다.
“저 좋아하게 될까 봐 겁나세요?”
정곡이어서인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인지는 몰랐다. 계속 느긋하던 세헌이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그걸 마주하자 배 속이 들끓는 기분이 된 윤신이 손을 덜덜 떨었다. 그러자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그가 곧바로 위치를 전복해 마른 몸을 난간에 기대게 만들었다.
터억. 등이 딱딱한 면에 부딪힌 윤신이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이젠 제자리에 서게 된 그를 약간의 원망을 담아 직시했다.
“윽! 아프잖아요. 제가 아무리 남자라도 통증은 느낀다고요.”
“너 그때 왜 울었어.”
이 타이밍에 나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화두였던 터라 윤신은 말을 더듬었다.
“울, 누가, 울, 누가 울어요?”
“네 생년월일부터 읊어 줘?”
“수석님 대체 뭘 보신 거예요?”
“글쎄. 내 어쏘가 밤에 길모퉁이에 처박혀서 라면 먹는 거?”
“그걸 어떻게.”
반사적으로 반박을 시도하긴 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아무래도 세헌은 처음부터 제 어설픈 거짓말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제 모습을 봤다는 사실을 맥락에 끼워 넣으니 누나가 찾아왔던 이튿날의 일들이 다 이해됐다. 울고 있었던 자신이 마음에 걸려 그 주차장에서 차를 되돌려 왔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은 눈두덩과 충혈된 눈을 통해 속상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혹 운 건 아닐까 의심 정도는 할 거라고 짐작했으나 진짜로 알고 있었다는 걸 듣게 되자 감상이 남달랐다. 강세헌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싶어졌다.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처럼 구석에 구겨져서 질질 짜고 있던데. 그날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아? 밤잠을 다 설쳤어.”
그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뜬금없이 나온 이야기는 분명 현재가 아닌, 과거 시제였다. 세헌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의아해하던 윤신이 뒤늦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오래전 일인 데다 짧았던 순간이라 그가 기억할지, 못 할지 줄곧 확신이 없었다.
“수석님도 그 일 기억하고 계셨어요?”
“네가 자꾸 내 눈에 띄어. 아니, 네가 또 어디 처박혀서 울까 봐 너를 자꾸 훔쳐봐.”
“…….”
“내 머릿속에 일 말고 다른 게 낀 감각이 난 매우 불편해. 돌아 버릴 것 같다고.”
윤신은 몇 가지 퍼즐들이 이제야 완전하게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그도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제 재판을 미희와 함께 보러 왔을 때 계속 눈이 마주쳤던 모양이다.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두 사람의 치열한 시선이 오직 서로만을 향해 오갔다. 한참 동안 윤신의 창백한 얼굴을 직시하던 그가 돌연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입술을 짓이기곤 제 넥타이를 조금 헝클어뜨렸다. 숨이 조금 가빠 보이는 듯도, 얼굴이 달뜬 듯도 했다. 그러더니 타이의 부드러운 천 밑부분을 끌어다가 윤신의 앞으로 내밀었다.
“키스해.”
놀란 윤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서서히 물감 퍼지듯 안면에 붉은 기가 물들었다.
“갑자기 뭐, 뭘 해요?”
“이 위에, 키스하라고.”
“대체 제가 여기에 왜…… 입술도 아니고요. 좀 비겁하신 거 아니에요?”
“입 닥치고, 해. 명령이야.”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데, 왜 제게 좀 더 확실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거냐고 물을 순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은 모르긴 몰라도 세헌이 지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형태일 터여서 보챌 자격이 없었다.
망설이던 윤신은 이내 결심을 내린 듯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계속 입술 위에 닿아 있어 살짝 홍조가 인 뺨을 실룩이다가, 이내 그의 타이 끝을 붙잡고 입을 닦듯 부대꼈다.
세헌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진지하게 관찰하나 싶더니, 윤신이 입술을 떼어 내자마자 그 위에 본인의 붉은 입술을 문질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혀끝을 내밀어 그 위를 길게 핥았다. 그러는 동안 윤신은 아무 저항도, 반응도 하지 않고 붙들린 포로처럼 그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타이 위에 키스하던 그가 이윽고 눈동자의 위치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아득해진 윤신은 턱을 바르르 떨었다.
하아, 진짜 민감한 살갗은 서로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거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창피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더 할 수 있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윤신이 색색거리는 호흡만 가다듬는 사이, 그가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름을 불러 왔다.
“도윤신.”
그가 이름 세 글자로 자신을 부른 건 처음이다.
왜인지 모르겠다. 매일 같이 듣고, 보는 제 이름인데 그가 만들어 낸 주파수로 들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이할 만큼 짜릿한 느낌이 강렬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스스로도 정확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자신이 황망해하는 사이 세헌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감아야 하나 그를 밀어내야 하나 양단간에 치열하게 고민하던 윤신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윽고 촉촉한 혀가 예민한 살갗에 아주 찰나간 맞닿았다.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강 변! 애들 놀라고 하고 파트너들은 이제 조용히 빠져 주…… 어머. 내가 방해했나?”
테라스 쪽으로 나온 미희가 두 사람이 거의 겹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뒤쪽으로 돌려 그녀를 확인한 세헌이 그제야 품 안에 가두듯이 감싸고 있던 윤신을 놓아주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분리됐다. 얼굴을 확 붉힌 윤신이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이곳의 공기가 꽤나 외설적으로 보였던지, 미희는 선뜻 더 다가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세헌이 담백한 태도로 해명했다.
“쓸데없는 오해 하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누가 뭐래? 좀 낯선 장면이라 그런 거지. 네가 누구 품에 가두고 있는 걸 다 본다? 도 변, 불쾌했으면 경찰에 신고해. 증인 돼 줄게.”
조용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윤신이 바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전 좋았는데요.”
그 순간. 두 사람의 오묘한 눈길이 윤신에게 박혔다. 세헌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미간을 구기고 제 쪽을 봤고, 미희는 아주 재미있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를 배려한 평범한 단어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나 관점에 따라 달리 들릴 수도 있겠다는 걸 뒤늦게 인정한 윤신이 부연 설명했다.
“불편하지 않았다고요. 강 수석님이 종종 이러셔서 적응됐어요.”
“세상에, 세헌이 쟤가 종종 그래? 놀라운 얘기투성이네.”
“4년 차. 헛소리를 할 것 같으면 말을 아끼는 것도 방법이야.”
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윤신의 어깨를 잡아 뒤편으로 몰아낸 세헌은 미희를 향해 마주 섰다. 조금 전엔 이름으로 불러 주나 싶더니, 다시 도돌이표였다. 윤신이 비스듬한 높이에 있는 그의 잘난 뒤통수를 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저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애꿎은 제 손을 그러쥐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헌은 뒤쪽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까먹기라도 한 양 미희에게 다가섰다.
“가지. 차는.”
“탁 비가 기사 준비해 뒀어. 네 차 타고 가면 돼. 아무래도 분위기 보니 내가 번지수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진짜 이렇게 댕강 자르고 가? 이럼 내가 미안하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어도. 이렇게 그냥 가는 거 도 변한테 예의 아냐. 상황은 정리해. 난 먼저 집에 갈게. 주말 푹 쉬고 월요일에 봐, 제군들.”
정말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두 사람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뛰어나갔다. 세헌은 그 모습을 지켜보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 계속 밀어붙일 땐 언제고 한 번 돌아봐 주는 기미조차 없어서 섭섭할 정도였다.
모퉁이를 돌아 세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윤신도 정신을 차리고 그를 다급히 뒤쫓았다. 그러고는 출입구를 빠져나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세헌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식으로 접촉한 순간 놀라 바로 떼어 냈겠지만, 지금의 윤신은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잡은 거였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강 수석님. 드릴 말씀 있어요.”
그는 잡힌 본인의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넌 상사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우리 입술 닿았던 거예요?”
세헌은 득달같이 반박했다.
“안 닿았어.”
“하지만 분명히 혀가…….”
“안 닿았다고.”
“저 눈 감고 있었다고 속이시는 거 아니죠? 설마. 그럼 진짜 인간도 아니지.”
“내가 인간도 아니다. 그게 드릴 말씀이야?”
“보세요. 닿은 거 맞잖아요.”
버럭 소리친 윤신은 뒤늦게 당장 급한 게 이게 아니라 다른 쪽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인지했다.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별로 본인이랑 관계없다고 여겨지시면 그냥 듣고 흘리셔도 되는, 실제로도 변호사님 인생엔 별거 아닌 얘기기도 하고요.”
“판단은 내가 해.”
“저 다음 주 일요일에 선봐요.”
일순, 동요를 감추지 못한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정확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어서 그 모습이 윤신의 시야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한데 정작 세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흐르는 물처럼 침묵을 지켰다. 조바심이 난 윤신이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이어 말했다.
“아마 별 이변이 없고,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라면 약혼도, 결혼도 순리대로 하게 될 거예요. 매형이 원하는 혼처라면서 누나가 제안했고, 이건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란 얘기거든요. 게다가 전 누나 말을 아주 잘 들어요. 바꿔 말하면 저한테 시간이 별로 없단 뜻이죠.”
떠보는 듯한 어투에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동안 같은 남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윤신으로선 지금 발전의 가능성 하나만 보고 최대치의 용기를 낸 거였다. 자신이 세헌을 종종 의식하고, 그는 자신 때문에 때때로 혼란을 느낀다는 작은 사실 관계만이 오직 비빌 언덕이었다.
진짜 속마음은 잡아 달란 뜻이었으나 두 사람이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차마 그렇게까지 직관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붙잡을 마음이 있다면, 아직 뭔가 제대로 서로의 마음속에 빚어지진 못했지만 지금이어야 한다고. 제겐 시간이 없다고. 분명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재고 따지면서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 모든 걸 눈으로는 열심히 전했다.
그런 윤신을 세헌은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나 이내 여유롭게 받아쳤다.
“네 시간이 없는 걸 왜 나한테 얘기해.”
바짝 긴장이 들어 있던 마른 어깨가 삽시간에 조금 풀려 흐물흐물해졌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예요?”
“더 있어야 돼?”
“못 알아들으셨으면 됐어요.”
“실례지만 난 아주 잘 알아들었어.”
그의 분명하고 냉정한 어투 때문에 움찔한 윤신은 차분히 눈을 깜빡였다. 이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입증하듯, 세헌이 건조하게 덧붙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맞선이나 잘 봐. 네 매형이 원한 혼처라면 4년 차의 허접한 커리어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물론 우리 펌에도 도움이 되겠군. 건투를 빌어.”
탁, 세헌은 제 손목을 붙든 윤신의 손길을 뿌리치고 지나갔다. 응원인지, 인사인지, 조롱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응답만 남기고 떠난 그는, 어느 틈에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졌다. 뒤늦게 윤신이 살펴 가시라는 듯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통로를 벗어나 완전히 밖으로 나온 세헌은 뚜벅뚜벅 걸었다.
주차장 한구석에 그의 차가 보였다. 펌 소속 운전기사가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사이 차체 앞으로 다가간 세헌은 뒷좌석에 타려다 말고 힐끗, 술집 출입구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윤신은 없었다.
그제야 콰앙, 차체를 내려치는 손길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이런 씨발.”
〈저 다음 주 일요일에 선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웃는 얼굴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열이 치밀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나 세헌은 이런 감각에 매우 취약했다. 누군가를 향한 독점욕을 느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 통제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그는 뒤늦게 차에 올라탔다. 바깥에서 문을 닫아 준 기사가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 카시트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필연적으로 윤신의 말을 곱씹게 됐다.
〈저 좋아하게 될까 봐 겁나세요?〉
힐끗, 서로의 입술이 겹쳐졌던 제 넥타이를 내려다본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뒤이어 몹시 날카로운 손짓으로 타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조수석에 내동댕이치듯 던져 버린 후, 잡념을 밀어내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데 무슨 짓을 해도 윤신의 음성은 떠나지 않고 자신을 괴롭혔다.
도윤신을 다시 마주친 뒤로 제 모든 게 꼬여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