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주말이 지나 출근한 세헌은 노트북의 전원부터 켰다. 뒤이어 탁 비서에게 커피를 한 잔 요청하고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내고 있는 와중, 여느 때와 다른 화면을 맞닥뜨리게 됐다.
그의 방에는 출입용 센서가 비치돼 있었다. 그가 회사에 없는 시간 동안에 출입하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카메라가 돌아가 내부를 촬영했다. 마음만 먹으면 직원 중 누구라도 집무실에 침입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파트너들이 쥐고 있는 정보의 유출 위험을 줄이고자 로펌이 정한 내부 방침이었다.
진짜 중요한 정보들을 사무실에 둘 만큼 어수룩하진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기본적인 청소나 정리는 해야 하니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낯선 사람의 침입을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의례적으로 설치해 둔 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 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았다. 다른 파트너들도 본인 동의를 얻어 모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새벽 3시?’
화면 우측 하단에 알림이 두 개가 떠 있었다. 보통 오전 6시경에 관리인들이 이곳 청소를 하는 터라 매일 해당 시간쯤에 정확히 하나의 알림이 뜨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제 카드 키가 꽂혀 있지 않은 동안,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다녀간 것이다.
이런 일은 지난해 한 번 이 안에 청소 도구를 놓고 간 직원이 다시 들어왔다가 나갔던 일 이후로 처음이다. 빠르게 내부 프로그램에 접속한 세헌이 3시경의 영상을 재생했다.
어둠 속에서도 흐릿하나마 형체가 보였다.
윤신이었다.
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 봐라.”
결의에 찬 기세로 방으로 들어온 윤신이 플래시를 켰다. 그러고는 그의 방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음량을 키우자,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나 혼잣말하는 음성 따위들이 세헌에게도 들렸다.
- 여기 이상하게 외롭다. 방이 주인 닮았나.
어이가 없어 그가 인상을 찌푸린 사이, 어둠 속에서 실낱같은 빛을 품고 책상 쪽으로 다가온 윤신은 탁상 달력을 살폈다. 그뿐만 아니었다. 본인 방 쪽을 향해 빛을 쏘고, 그 위로 손을 뻗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했다.
“여기가 놀이터야? 봐주니까 끝을 모르는군.”
으득. 이를 간 세헌이 내선 버튼을 눌러 바로 탁 비서를 소환하려던 때였다.
윤신의 곤란해하는 음성이 이어져서 그는 멈칫했다.
- 뭐 약점을 찾을 수가 있어야 그거라도 잡고 제발 좀 도와 달라고 물고 늘어지지.
물끄러미 화면을 보고 있자니, 예고 없이 제 방에 쳐들어온 침입자는 책상 위의 서류를 꺼내 보다 몇 분 안 돼 주변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간을 확 구긴 세헌은 이미 끝난 짧은 영상 화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늘하게 식은 눈동자에 복잡한 기미가 스쳤다.
도윤신이 바보도 아니고, 여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와 훔쳐 갈 가치가 있을 만큼 중요한 걸 두지 않았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들어와서 여기저기를 둘러봤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임을 알면서도 감행해야 할 이유가 있었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한 어떤 간절함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와 달라…… 뭘.’
툭, 툭. 책상 위를 내려치며 영상에 녹음된 말을 곱씹다 보니 며칠 전 집 근처에서 보았던 윤신이 울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릿속에 재생됐다.
세헌은 끝까지 내려져 있는 복도 쪽 창문 블라인드를 올렸다. 그러자 커다란 창 건너편의 윤신의 모습이 바로 드러났다. 한쪽 귀에는 수화기를 끼고, 또 반대편 귀에는 휴대폰을 낀 채로 손을 마구 움직여 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무척 바빠 보였다.
그러다 이내 한쪽 수화기는 내려놓고, 휴대폰의 통화에 열의를 쏟았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 건지 반쯤 몸을 일으키곤 말을 이어 가다가, 맞은편에서 쳐다보고 있는 세헌을 발견한 듯 공손하게 묵례했다. 세헌은 응답하지 않고 그저 윤신을 주시했다.
조금 당황한 듯한 윤신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거짓말 같은 건 별로 해 본 적이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걸 잘 아는 세헌은 여전히, 빤히 상대방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찔리시겠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서서히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음성이 새어 나갔으나, 윤신에게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의 입 모양을 보고 ‘뭐라고요?’ 하듯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취하는 모습을 본 세헌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이쪽에 집중해야 할지, 통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윤신에게 일이나 하라는 듯 손짓하고 블라인드를 다시 확, 쳐 버렸다.
시야가 차단되자 세헌의 시선이 책상 위 디케 여신상으로 강물이 흐르듯 이끌려 내려갔다.
“이걸 어쩐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좌는 일단 모른 척 넘어간다, 우는 만천하에 드러내서 족친다.”
디케상 한쪽 손에 들린 움직이는 저울에 손가락 끝을 댄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고는 여신에게 선택을 맡기겠다는 듯 동그란 물체를 쓰윽 밀었다.
끼익, 끼익. 채찍에 맞아 돌아가는 팽이처럼 모형은 열심히 좌우로 들썩였다. 어느 쪽의 무게가 더 나가는지 가늠하듯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다. 한데 일을 하나 싶더니 이내 체력이 방전돼 몇 번 움직이다 마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여신의 오른편 위치에서 더 기울어졌다. 그 형태를 보곤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족친다.”
오묘한 표정을 지은 그가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 위해 이번엔 좀 더 세게 건드렸다.
끼익, 끼익. 다시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저울이 천천히 운동을 멈췄다. 한데 이번에도 모형이 멈춘 건 더 기울어진 여신상의 조금 오른편에서였다. 세헌은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저울을 지켜보다가 긴 손가락을 뻗어 다시 그 위를 툭, 쳤다.
“신이 네 편이 아닌데, 도윤신.”
그는 자꾸 자신이 윤신의 감추고 싶을 뒷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게 마냥 간과할 만한 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 제 일들이 꼬일 조짐도 함께 느껴졌다. 이는 단순한 느낌이 아닌, 현실 감각에 입각한 냉정한 판단이었다.
하니 문제는 윤신이 아니라 선택권을 쥔 제 쪽에 있었다. 그냥 모든 걸 여태까지 타인에게 해 왔던 그대로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쉽지가 않았다.
자꾸 눈이 가는 이유가 뭘까.
뭐가 특별해서.
세헌이 미간을 구기고 있는 사이,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어.”
끼익, 그의 응답과 동시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세헌은 문 쪽을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의무실 내려가서 두통약 좀 갖다 줄래. 요새 골이 자주 땅기네.”
“머리 아프세요?”
방문자는 당연히 탁 비서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느새 통화를 마친 건지 윤신이 탁 비서에게 부탁했던 커피를 대신 들고 서 있었다. 세헌이 편안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곤 문간에 선 윤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일단 들어가도 될까요?”
“네가 언제부터 내 방에 허락받고 들어왔어?”
의미심장한 어투에 당황한 듯, 윤신이 뺨을 조금 붉혔다.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짐작건대, 정직한 성격의 윤신은 지난주 토요일 새벽 3시 제 방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세헌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선뜻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럴 만도 할 일이었다. 주인 없는 방에 함부로 들어와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는 건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으니까. 그리고 세헌은 그렇게 자비롭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음성이 윤신에게 꽂혀 들었다.
“일 얘기야?”
“아, 그건 아니고요.”
“그럼 그거 놓고 나가.”
한 차례 명령에도 윤신은 움직이는 기미가 없었다. 그 대신 말을 머뭇거렸다.
“저기, 수석님.”
세헌이 바로 잘라 냈다. 음성 끝이 조금 갈라졌다.
“놓고 나가라고. 내가 지금 얘기를 들을 상태가 아니야. 피곤하고, 너 보니까 신경질 나.”
그 말을 듣자마자 창백한 얼굴의 안색이 슬며시 걱정스럽게 변했다. 세헌에게 닿았을 때는 그게 촉감으로 치환돼 살갗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저 정직한 눈빛이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채울 족쇄로 되돌아오게 될 터다.
그의 내부에서 그런 본능적인 감각이 들끓었다.
“머리 많이 아프세요? 의무실 내려가서 제가 약 받아 올까요? 아니면 수액이라도 맞으시면 좋을 텐데요.”
제 두통의 원인은 윤신이었다. 다만 세헌에게 처방전이 없을 따름이었다.
“똑같은 얘기 세 번 하게 할래? 각자도생해. 귀찮게 굴지 마.”
예민하게 반응하자 그제야 윤신은 빠르게 책상 쪽으로 다가와 커피를 앞에 놓아두었다. 곧이어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공손했다. 마지막에 문을 닫기 전, 역시 좀 염려가 되는지 한 번 돌아보긴 했지만 세헌의 태도가 워낙 완고해 거기까지였다.
딸칵. 문이 닫힌 뒤 다시금 혼자가 된 세헌은 윤신이 남기고 간 일회용 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엄격하고, 어찌 보면 조금쯤 독선적으로까지 보이는 짙은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 위에 고정됐다. 표정이 안 좋았다.
그의 삶에는 언제나 논리적인 구조가 있었다. 그 어떤 것들도 빗겨 나가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진 게 없어서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깨쳐야만 했다. 한 번 제대로 된 승리의 맛을 본 뒤로는 그게 짜릿해서 이기는 방법들을 연구해 악착같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모든 일에는 시작도, 끝도, 원인도, 결과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꾸 윤신과 엮일 때마다 그런 구조들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세헌은 특별한 이유 없이 윤신이 거슬렸다. 그렇게 휩쓸리다 생전 안 하던 짓을 가끔 하게 됐다. 어물쩍 넘기듯 상대방을 제 영역 안으로 받아들였고, 이젠 심지어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시 빤히 디케상의 저울을 바라본 세헌은 검지를 세웠다. 그러고는 저울을 건드렸다.
끼익, 끼익.
기분 나쁜 쇳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침내 저울 모형이 여신상의 미세한 왼쪽에서 운동 에너지 발산을 중단했다.
“일단 모른 척 넘어간다…….”
이윽고 여신상 반대편의 칼끝을 툭, 건드린 그가 그제야 만족한 듯 서류를 활짝 펼쳤다.
* * *
로펌 A회의실 창문 너머로 윤신이 손님과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 기업체의 법조 팀 소속 변호사인 듯했다. 그 변호사의 오묘하게 붉으락푸르락하는 안색 때문인지, 밖에서 내부의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데도 안의 퍽 심상찮은 분위기가 외부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뒤통수만 보이는 윤신은 상대방의 태도와 정반대였다. 차분한 모양새로 앉아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제시하며 끈질기게 설득을 이어 나갔다.
이 모든 모습을 바깥쪽 테이블에 걸터앉은 세헌이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것으로 미루어 지구력은 확실히 있고, 지켜보니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답답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건 스타일 차이일 뿐이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 편이니 잘 가르치면 될 것 같았다.
‘슬슬 써 봐?’
심사숙고하는 태도로 팔짱을 척 낀 그가 윤신의 모습을 계속 주시하던 그때였다.
스윽. 그의 팔꿈치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힐끗 돌아보니 탁 비서가 머그컵에 든 따뜻한 커피를 내밀고 있었다. 세헌은 그걸 받아 들어 차분히 향과 맛을 음미했다.
“갑자기 나와서 뭐 보시나 했더니. 도 변호사님이에요?”
“4년 차가 아니라, 4년 차의 협상을 보는 거지.”
“도 변호사님 주신 저거 대체 얼마짜리 정보예요?”
“알면 다쳐.”
“엄청 비싸군요.”
“글쎄 관심 끄고. 저 변호사 얼마 쥐고 왔어?”
아예 옆쪽에 자리를 잡은 탁 비서가 성실하게 대꾸했다.
“정확한 건 저도 아직 몰라요. 그런데 아까 잠깐 차 드리러 들어갔을 때 들은 걸로 보면 수천만 원대일 모양이에요. 위로금에, 피해자 쪽 지난 몇 달간 생활비, 앞으로 반년간 취업 준비비, 그리고 약간의 입막음비라고 해야 할까. 공개 사과나 소 취하는 별도고요.”
그는 잠자코 탁 비서의 말을 들으며 차를 마시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슬쩍 보이는 윤신의 하얀 뺨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천만 원대라…… 꽤 센 건으로 군데군데 찌른 거 같던데 알고도 그 정도 들고 온 거라면 4년 차를 아주 우습게 봤다는 뜻이군.”
“우리가 수한그룹 사돈 영입했다는 소문 업계에 다 났어요. 낙하산이니 무능력할 거라고 판단한 것 같더라고요.”
그런 취급을 당해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을 텐데, 의외로 윤신은 아주 차분하게 상대를 응대하고 있었다. 세헌의 눈길이 마치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듯 흥미로워하는 기색으로 슬쩍 변했다.
“쟤가 얼마나 튀겨 볼 수 있으려나.”
“수석님은 어디까지 생각하세요?”
“글쎄. 합의금은 정해진 규격이 없으니까 대리인이 받아 주기 나름이겠지. 만약 4년 차가 의뢰인 인생을 역전시켜 주는 대신 저 변호사가 가져온 수천만 원대에서 소박하게 해결을 본다면, 나한테 따로 보고하지 말고 송무 팀으로 보내. 낙제생이라고 딱지도 붙여 주고.”
“합격 마지노선은요?”
“열 배.”
탁 비서가 몸을 슬쩍 모로 틀더니 가볍게 웃었다.
“이게 마지막 테스트였나 봐요. 변호사님이라면 얼마나 받아 주실 건데요?”
“나도 계산은 안 해 봐서 모르겠다. 내가 저 방에 들어갔다면 윽박질러서 한 수십억 원쯤?”
이 대답을 듣고 무척 깜짝 놀랐는지 옆에서 몸을 들썩이는 기척이 세헌에게도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경박스럽게.”
“대체 뭘 주신 거예요? 이미 저쪽 제시액도 비슷한 범죄 합의금 평균액에 비하면 이례적일 만큼 굉장히 많은 액수예요.”
그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와…… 단순한 프로 보노인 줄 알았는데 꽤 큰 건이었구나. 어쩐지, 강 변호사님이 뜬금없이 웬 프로 보노를 다 가져가신다 했어요. 이미 예전부터 쥐고 계셨던 정보였던 거죠? 낯익은 사람이 그 사건 피의자였던 거고요. 맞죠.”
“몇 년 전에 송 수석 도와서 송사 준비하다 우연히 건졌던 거야. 그땐 영락없이 버리는 패일 줄 알았는데 이걸 이렇게 써먹을 줄은 나도 몰랐지. 늦은 감이 있지만 돈값은 하겠군.”
그러면 그렇지, 하듯 수긍하던 탁 비서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도 변호사님 기대 이상이지 않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살면서 내 기대 이상을 보여 준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거든.”
“주신 거 잘 받아먹고 소화하잖아요. 솔직히 처음엔 되게 완고한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유연해서 놀랐어요. 진짜 저걸 써먹네요. 비서실에서도 내기했거든요. 인권 변호사의 독야청청 고고한 자존심 세우느라 절대 못 할 거다, 아니다 할 수 있을 거다.”
“넌 땄어?”
“제가 다 따게 생겼습니다.”
잠시간 탁 비서를 향하나 싶었던 그의 시선이 어느새 다시 회의실 너머의 윤신에게 고정됐다. 세헌의 신중한 옆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탁 비서가 대체 윤신의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는 양 함께 저 안을 관찰했다.
“미더운 거예요, 못 미더운 거예요? 본인 조사원 통한 자료까지 주신 걸 보면 신뢰가 가는 거 같기도 하고, 굳이 그거까지 줘 가면서 편한 길에 발 들일지 안 들일지 확인하시려는 거 보면 그 반대 같기도 하고요.”
“믿지도, 안 믿지도 않아. 단순히 4년 차에게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야. 아이큐가 지구인 평균이 되는지, 못 되는지.”
“박하시긴. 2차 테스트도 무난히 통과했으니까 칭찬도 좀 해 주시죠.”
탁 비서의 말이 대부분 맞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사실 세헌이 진짜 보려던 건 그가 보낸 출처 불명의 위험해 보이는 자료들을 윤신이 진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거였다. 그의 눈에 윤신은 아직까지도 도국 밖에서의 스스로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돈이 되는 사건을 따내려고 혈안인 다른 어쏘 변호사들과 달리 윤신만은 계속 프로 보노에 만족했다.
그래서 하얀 도화지 위에 색이 들어간 물감을 뿌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로는 그렇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진심이 맞는지를 보려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세헌치고는 상대의 성향과 기질을 배려한 꽤 소프트한 방식이었다.
“입술 앞까지 떠 줬어. 쟨 입만 벌렸고. 그런데 잘 씹고 있다고 칭찬까지 해야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 변호사님이니까요. 저분은 우리 펌에 동화될 용기를 냈어요. 그런데 수석님은 칭찬 한 말씀을 안 하시면, 사기가 안 오르지 않겠어요?”
“육아가 취미면 귀하가 데려다 키우든가.”
탁 비서는 그것도 좋겠다는 양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뒤쪽의 직원들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의 주파수를 낮춰 넌지시 물었다.
“저 이거 계속 묻고 싶었는데. 수석님이 관심 있는 쪽은 도 변호사님이에요, 아니면 저분 누나 쪽이에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전자는 남자고 후자는 유부녀 아니야?”
“요즘 좀 이상한 거 아시죠? 사적 호기심으로 뭘 알아봐 달라고 하시질 않나, 까마득한 후배 협상하는 거 보자고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 갑자기 중간에 나와 계시질 않나. 누구 궁금해하고 일일이 챙기시는 거 처음 봐요. 정말 왜 그래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세헌은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던 걸 멈추고 중간에 나와 이러고 있는 이 상황은 그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아마 그래서 자꾸 뒤쪽의 직원들이 제 뒤통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았다.
여전히 몇 미터 전방의 윤신은 열심히 상대방과 논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도무지 타협이 잘 안 되는 모양인지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데 시종일관 정중하던 윤신이 행한 약간의 그 불만 표출이 상대측 대리인의 버튼을 눌리게 만든 것 같았다. 중년 남자가 윤신에게 삿대질을 하며 씩씩거렸다.
이 모습을 본 탁 비서가 세헌에게 조급하게 물었다.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들어가 볼까요?”
“가만히 있어. 저 판은 도윤신 거야.”
차분히 커피를 마시는 세헌의 동공이 회의실 너머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1분 1초라도 저 안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양 입매가 완고했다. 탁 비서가 그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곧이어 매끄럽게 선이 떨어지는 미려한 얼굴에 여느 때와 다른 기운이 묻어 있음을 인지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어어엄청 챙기시네요?”
“쟬 보면 골치가 아파.”
맥락을 벗어난 뜬금없는 대답이 몹시 의외라는 듯한 기색이 탁 비서의 얼굴에 스쳤으나, 그는 이내 감추고 반문했다.
“왜요? 건방지게 강 변호사님 콕 찍어 낙하산 타서?”
“그것보단, 내 공격이 잘 안 먹혀. 저런 인종이 처음이라 낯설어.”
선뜻 해석할 수 없는 말이었던 모양인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세헌은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랬던 적 없었다. 이상하게 윤신에겐 가끔 그렇게 하게 되는 상황이 마뜩잖았다.
그는 여태까지 수백, 수천 가지 군상의 사람들을 상대해 왔다. 도윤신 같은 수준의 사람들은 손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정말이지 윤신은 이상했다. 전부 진심이었다. 자신을 경멸하는 것도, 의지하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신경 쓰여 하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도, 불편해하는 것도, 모조리 진짜였다. 윤신은 늘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 쓸데없이 아부하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숙이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조리 했고,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모든 게 너무 투명해서 도리어 공격 의지를 상실하게 됐다.
사회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헌과 첫 만남부터 영역 싸움을 걸어 오거나, 혹은 무조건 낮추고 한없이 기어들어 오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데 윤신은 둘 다이기도 했고, 둘 다 아니기도 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만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더 의아했다.
세헌도 함께 말이 없자, 생각을 거듭하는 듯하던 탁 비서가 조용히 목소리를 이어 갔다.
“다루어 본 적 없는 타입이라 껄끄러우세요?”
그 정도의 표현이 가장, 지금 이 순간 그의 기분을 표현하는 데 적확하리라.
“그런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수석님 지금 딱, 깨끗했던 사람들 더럽혀지는 거 찜찜한 표정이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세헌이 탁 비서를 다시 돌아보았다. 시종일관 관조하듯 나른하게 응답하던 그의 눈매에 돌연 신경질적인 기색이 묻어났다.
“누구나 다 나쁜 부분은 있어. 쟨 뭐 성자라도 돼? 세인트 도? 봐, 쟤도 똑같아.”
“이렇게요.”
“또 뭐가.”
“도 변호사님 얘기엔 이렇게 난데없이 방어적으로 나오신다고요. 유부녀가 아니라 남자 쪽이었네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뭐, 일단 응원하긴 하는데요. 쉬운 길은 아닐걸요.”
“창작 동요제 나왔어? 놀고 있…….”
세헌이 까칠하게 대꾸하고는 이만 제 집무실로 돌아가려 몸을 반쯤 틀었다. 이와 동시에 계속 화를 내는 듯하던 회의실의 상대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대한 침착하게 해명하고 있던 윤신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맞은편 자리를 향해 손짓하는 것으로 미루어 다시 앉으라는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중년 남자의 두툼한 손이 윤신의 목을 향해 거침없이 내려갔다. 멱살을 쥘 듯이 양손을 뻗는 장면이 바깥에 있는 두 사람의 시야에도 잡혔다.
“어? 수석님. 저거 어떡…….”
탁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머그 컵을 던지듯 내려놓고 책상에서 벌떡 일어난 세헌이 그대로 정면의 회의실로 향했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윤신의 멱살을 흔들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변호사님?”
“강, 강세헌 수석?”
윤신과 상대 변호사가 한꺼번에 세헌을 알아보았다. 중년 남자는 어깨까지 흠칫했다. 세헌이 쥐고 있던 팔목을 거칠게 던지듯이 뿌리치자, 남자가 얼얼한 손목 부근을 손바닥으로 쓸며 난감해하는 어투로 변명했다.
“아니, 이 어린 친구가 너무 건방지길래 말입니다. 예의 바른 표정으로 살살 긁잖아요. 우리도 업계 룰이라는 게 있는데 어딜 주니어가.”
“그래서 이렇게 상도 없는 짓을 하나? 도윤신 내가 가르친 내 어쏘입니다. 태도가 건방져서 협상이 불가능하다면 도 변호사보다 훨씬 연차 높은 날 상대하면 되겠군요. 다만 당신 의뢰인은 지금부터 갖고 있는 걸 싹 다 잃을 겁니다. 얜 온정이 있고, 난 없거든.”
“그게…… 강 수석. 일단 진정하고.”
일이 크게 틀어지게 생겨 매우 곤란해하던 중년 남자는 지금까지 몰아붙이던 윤신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청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상황 파악을 충실히 하던 윤신이 천천히 일어섰다. 뒤이어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서더니, 세헌을 마주 봤다.
“수석님.”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어딜 끼어들어. 비켜.”
“압니다만…… 이거 제 사건입니다. 제가 해결하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그가 돌연 뭔가 깨달은 기색으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반사적으로 창가를 살폈다. 유리 너머에서 탁 비서가 조금 전 세헌이 두고 갔던 머그 컵을 슬쩍 들어 보였다. 문밖의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귀엔 ‘이건 도 변호사님 판이니 가만히 있으라면서요?’라고 빙글거리며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멱살을 틀어잡힌 도윤신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이 안에 뛰어 들어왔음을 뒤늦게 인지한 세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삶을 통틀어 그에게 거의 일어난 적 없던 일이었다.
그는 곧이어 제 답을 기다리고 있는 윤신에게 시니컬하게 반문했다.
“얻어터지면서?”
“아직 안 맞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강 변호사님이 경고하셨으니 앞으로도 안 그러실 거고요. 여기까지만 도와주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형용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된 세헌이 윤신의 어깨 위를 묵직하게 내려쳤다. 이 투박한 접촉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상대 변호사를 마치 경고하듯 지그시 쳐다보더니 결국 돌아섰다. 중년 남자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묵례하는 사이, 뒤 한 번 보지 않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탁. 문을 닫고 나온 그가 제 사무실 쪽으로 신경질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탁 비서가 뒤쫓으려다 그의 안색이 심상찮다는 걸 인식하고 멈춰 섰다. 그러고는 남겨진 머그 컵만 가만히 내려다보던 때였다.
세헌을 따라 내부에서 빠져나온 윤신이 멀어지는 늘씬한 뒷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마무리할게요. 컨디션은 좀 챙기면서 일하세요. 또 아프시지 말…… 강 수석님!”
충분히 음성의 파동이 닿을 만한 거리임에도 세헌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 방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비서실 쪽 방면에 덩그러니 남겨진 탁 비서와 윤신의 시선이 엇갈렸다. 먼저 입을 연 건 탁 비서였다.
“강 변호사님 어디 아프시대요?”
“며칠 전부터 컨디션 난조였던 것 같았거든요. 머리도 아프시다고 했어요. 약은 챙겨 드셨나 모르겠네요.”
“혹시 골치 아프시대요?”
“네. 두통약 달라고. 탁 비서님이 모르시는 거 보면 안 드셨나 보다. 그럼 괜찮으신 건가.”
친절하고도 진지한 빛깔의 눈동자가 투과하듯 윤신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그러다 곧 상냥하게 미소 지은 탁 비서가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소 마음을 놓은 윤신이 이어 물었다.
“저기, 그건 그렇고 뭐라세요? 계속 저 어떻게 하는지 같이 보시는 것 같던데요.”
“일단 본인 기준엔 차신 것 같아요. 조금 전 불미스러운 상황은 논외로 치고요.”
“다행이다. 실은 저 변호사가 제 연차 얼마 안 된다고 우습게 봐서 대화가 진척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살살 긁었더니 저러네요. 어쨌든 강 수석님이 도와주셔서 나머진 수월할 것 같아요. 끝까지 잘해 볼게요.”
“변호사님은 제가 여태 알아 온 강 수석님보다 더 많은 걸 몇 달 만에 이끌어 내시네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액면 그대로요. 도 변호사님이 여태 수석님이 본 적 없는 타입이라 핸들링이 쉽지 않으신가 봐요. 재밌다, 진짜. 우리 펌에서 꼭 오래 일해 주세요. 아셨죠.”
탁 비서는 산뜻하게 눈을 맞춰 주곤 그 이상의 부가 설명 없이 태연히 돌아섰다. 윤신이 이 대답을 해석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완전히 자리로 되돌아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복도 한구석에 우두커니 홀로 서게 된 윤신의 시선이 필연적으로 세헌의 방 쪽에 가 닿았다.
입을 꾹 닫은 채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다 보니 하얀 뺨이 희미하게 붉어져 실룩거렸다.
‘내가 가르친 내 어쏘?’
그러다 금세 바람이 빠지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본 적 없는 타입…….’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상극처럼 보이는 우리도 통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서.
윤신도 세헌이 늘 새롭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눈이 가는 한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꾸 신경 쓰이는 이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도.
어쩌면 그도 그런 걸까.
굳게 닫힌 세헌의 집무실 문을 힐끗 본 윤신은 이내 크게 심호흡하고 회의실로 다시 입성했다.
* * *
별관의 사단 법인 접견실에 앉은 윤신은 무료 법률 상담 관련 서류들을 훑어보며 고민에 빠졌다.
가장 최소한의 도덕을 법이 규율하는 것.
그건 윤신이 배워 온 헌법의 중요한 규칙이었다. 바꿔 말하면 제일 작은 단위의 도덕 외엔, 법이 구제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때로 세상은 인간에게 꽤나 많은 불합리한 것들을 선물하는데, 그걸 도울 방법이 헌법상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윤신은 마음이 아팠다. 지금 이 상담 자료들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건 소송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가족들 생각이 어떠려나.”
펜 끝으로 종이 위를 두드리던 윤신은 고민 끝에 내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다음 내담자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반쯤 몸을 일으킨 윤신이 상담을 하러 들어온 이에게 맞은편에 앉으면 된다는 듯 손짓했다. 정면에 앉은 이는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중반가량의 중년 남자였다. 인상이 매우 좋았다. 다만 얼굴에 마음고생의 흔적이 꽤 있었다.
“상속 때문에 오셨죠? 제출하신 의견서를 제가 좀 살펴봤는데요. 피상속인인 이모를 간호하시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하셨다고요.”
“네. 자식들이 아니라 조카인 제가요. 그런데 마지막에 유서를 남기지 않으셔서 재산이 모두 거의 연 끊고 지내던 자식들에게 돌아갔어요. 하지만 말년에 수년간 모신 건 저예요. 그걸로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에서 기여분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가 궁금하거든요.”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남자는 이곳저곳에서 귀동냥으로 듣거나, 혹은 찾아본 부정확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차분히 머리를 굴린 윤신이 느릿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음. 사실 기여분의 경우 유류분과는 관계가 전혀 없거든요. 유류분이란 건 상속을 받은 사람이, 다른 상속인을 위해서 남겨 두어야 하는 유산의 일부예요. 이건 애초에 자격이 있는 상속인들의 상속을 보장하기 위한 거라서요.”
남자는 바로 반박했다.
“전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이모님은 자식들이 아니라 제가 모시고 살았어요. 사촌들은 제 식구들 챙기느라 1년에 한 번 집에 올까 말까 했다고요. 기여도가 있는 제가 더 받을 권한이 있는 거 아닙니까? 생전에 재산은 다 저한테 물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혹시 육성이나 친필 증거들 같은 게 있나요?”
“아픈 분한테 어떻게 그런 걸 쓰라고 합니까. 그냥 구두로…….”
많이 안타까워하는 윤신이 음성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렇다면 자식이 무조건 먼저예요. 우리나라 상속법이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병원비로 빚을 많이 져서, 유산을 받으면 갚으려고 했어요.”
“이런 경우 공동 상속인끼리 협의를 해서 기여분을 달라고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촌분들이랑 가정 법원에서 다투어야 해요. 그리고 법정에서 다퉈서 기여분이 결정된다고 해도 유류분에서 공제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자식분들께는 어차피 일정한 양이 상속되거든요. 일단 이걸 한 번 읽어 보세요. 찾아보니 비슷한 케이스가 있더라고요.”
미리 찾아 두었던 대법원의 판례를 화면에 띄운 윤신이 모니터를 남자의 방향으로 돌려주었다. 최대한 간단하고 쉬운 말로 정리해서 적어 두어서인지, 남자는 꽤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는 동안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자, 탁 비서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신이 맡은 프로 보노 사건의 상대측 변호사가 사내에서 공개 사과와 함께 합의금을 맞춰 줄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는 듯했다.
여기도, 저기도, 법이 모든 걸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사건투성이였다.
그는 씁쓸한 숨을 삼켰다.
* * *
별관에서 돌아온 윤신은 본관 2층의 도서실로 향했다. 이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 낭비를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최소한 이 건물 내엔 없었다. 그 덕분에 내부엔 혼자였다.
원래는 업무상 필요한 자료를 사진으로 몇 장 찍어 가려 잠깐 왔던 건데 자신도 모르게 다른 방향으로 걸음이 이끌렸다. 책장들 사이에 대충 걸터앉아 이혼 소송 판례집들을 쭉 훑어보면서 시간을 보냈더니 벌써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손목시계를 확인한 윤신이 책들을 챙기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인사라도 할 생각으로 일단 복도 쪽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한데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본 순간 입이 안 떨어졌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세헌이었다.
그도 윤신을 발견한 건지 손에 책 두 권을 든 채로 걸음을 멈췄다.
“한가한가 봐.”
이 우연에 얼떨떨해하던 윤신은 미간을 슬며시 구겼다.
“수석님은 꼭 인사를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네, 저도 반갑습니다.”
“역시 우린 가능한 한 안 마주치는 편이 낫겠어.”
밖으로 도로 나가 버릴 기세로 그가 움직이기에 윤신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세헌의 어깨를 탁, 붙들었다. 본능적으로 행동을 저지하긴 했는데, 예전에 세헌이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던 뒤늦게 경고가 떠올라 난처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윤신이 바로 손을 떼어 내고 사과하려던 차였다. 역공을 가하듯 뼈가 도드라진 팔목을 덥석 붙든 세헌이 마주 본 책장들 사이로 윤신의 마른 몸을 몰아붙였다.
순식간에 책장에 등을 기대게 된 윤신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밀어낼까도 고민했으나 붙들린 한쪽 손은 손목을 쥔 세헌의 악력이 꽤 셌고, 반대편 손은 이혼 판례집을 들고 있어 움직이기 여의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지은 죄가 있어 필요 이상의 반응은 하기가 뭐했다.
“사람 몰아붙이는 건 습관이신가 봐요. 누구한테나 이러세요? 다들 오해할걸요.”
“괜찮아, 너한테만 하는 거니까.”
“그럼 제가 오해를 하죠. 괜히 궁금해지고. 수석님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고요.”
“예컨대 지나치게, 쳐다본다고 생각한다든가?”
“그건……!”
머릿속에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반박할 내용들이 있었으나, 선뜻 세헌의 앞에 꺼내 놓기는 꺼려졌다. 윤신은 차마 끝까지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적막이 이어지는 사이 세헌은 윤신의 한쪽 팔을 붙든 채로 다리 사이에 무릎까지 꽂아 넣어 모든 행동반경을 통제했다. 서로의 숨결이 너무 가까운 자리에서 부딪쳤다. 오갈 데 없는 시선을 어색하게 피한 윤신이 말을 돌리듯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보통 필요한 거 있으면 비서들 시키시잖아요.”
“책 기부.”
눈앞에 두 권의 책을 보여 준 그가 카트 위에 책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힐끗 표지를 살피자 앞면에 〈위대한 유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걸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용기를 낸 윤신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세헌이 자신을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윤신을 조금 겁먹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감쳐물고 있자니, 세헌이 자유로운 한 손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윤신의 눈두덩 위를 손끝으로 가볍게 훑듯이 만졌다.
“눈은 안 부은 게 훨씬 낫다. 덜 음침해 보여.”
“읏…….”
움찔한 윤신은 나지막이 신음했다. 눈꺼풀 위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예민할 거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부위였던 터라,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탄성을 터트린 제 꼴이 우습고도 황당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세헌이 이런 말을 꺼내 마음속까지 어지럽혔다.
“너 왜 이렇게 동요해. 이러면 나야말로 오해하지.”
“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알고 당하고 싶어서요.”
“내가 이러고 싶으니까겠지.”
“그러니까 보다 본질적인…….”
그는 윤신의 말을 불쑥, 끊었다.
“내가 자꾸 널 건드리게 돼. 그냥 지나치면 되는데, 널 보면 그걸 못 하게 된다고. 난 이 맥락이 없는 찜찜한 기분이 너무 싫거든.”
인과 관계.
그는 상황에 그게 반드시 따르는 걸 좋아했다. 행위자로 하여금 법적 책임을 지울 근거가 되어 주니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좀처럼 그게 없이 행동만 이어지게 돼 불편한 듯했다. 정해진 일정을 사는 그의 삶에 자신의 등장이 예외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죄송하게 됐네요. 그런데 그렇게 싫으시면 안 건드리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할 수 있으면 이미 했을 거야.”
세헌이 말하는 ‘그걸 못 하게 된다.’는 게 물리적인 접촉 수준이 아니라는 걸 윤신도 느꼈다. 그는 감정을 일부지만 제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자신도 그와 자꾸 부딪치면서, 서로가 말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영역들이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특별히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데도 본능적으로 그런 거여서, 딱히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
물끄러미 윤신의 하얀 얼굴을 직시하던 세헌이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듯 매끄럽게 눈동자를 떨어뜨렸다. 그의 시선 끝은 마른 한 손이 단단히 쥐고 있는 이혼 소송 판례집에 닿았다.
“됐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거 빌리러 온 건가?”
세헌의 눈길을 느낀 윤신은 책 위를 힐끗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좀. 읽어 볼까 하고요. 머릿속 복잡할 때 판례 읽으면 도움되더라고요.”
“이혼하시게?”
“저 아직 미혼입니다. 저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내가 관심 가지면 감당이나 할 수 있고? 나 되게 집요한데. 네 인생이 탈탈 털릴걸.”
“아직 못 받아 봐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이제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아파요.”
꽤 간절히 부탁하자, 그도 이제야 눈치챈 듯 잡은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여봐란듯이 더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거리가 너무 좁은 탓일까. 그로부터 아찔한 향기가 풍겨 오기 때문일까. 윤신은 괜히 가슴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함을 느꼈다. 어깨도 바짝 긴장했다. 그런 기분이 낯설어서 이번에야말로 팔을 비틀어 빼내려고 하니, 세헌이 의외로 순순히 결박을 풀어 주었다.
너무 손쉽게 풀린 손의 압박 때문에 허무했다. 그의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는 손목만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세헌을 바라보았다. 어느 틈에 그는 두 발자국 뒤로 가 윤신처럼 책장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제 쪽을 향해 마주 섰다.
“합의금은 얼마 따냈어. 왜 보고를 안 해.”
“서류 정리되면 하려고 했습니다. 상대측 제시액의 열 배요. 그쪽에서 소도 취하했고요. 아직 상황이 종결된 건 아니지만 제일 큰 산은 넘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두 손으로도 못 셀 만큼 연차 까마득한 업계 선배님이 멱살을 잡길래 솔직히 눈앞이 잠깐 하얘졌거든요.”
무엇보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계속 집행 유예 가능성이 큰 소송에만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승소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피해자가 입은 고통을 제대로 보상해 주지는 못한 채 할 만큼 했다고 자위했을 게 뻔했다.
세헌은 단 한 가지 명령으로 아주 여러 가지를 제게 가르쳤다. 자신은 정말 그저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다리 건너편에 있는 그가 도리어 정확하게 본 것이다. 법은 아주 뛰어나고 위대하긴 하지만, 진리는 아니었다. 아주 가끔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법령이 미비하는 근거로 피해자를 제대로 구제해 주지 못하는, 허점도 많은 제도였다.
진짜로 이기려면 다른 힘이 필요했다. 그건 제도권의 권력일 때도, 이번처럼 출처 불명의 정보력 그 자체일 때도 있었다. 또는 자신이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할 터다. 때때로 진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숨을 삼키는 윤신의 사념을, 세헌의 나지막한 음성이 깼다.
“4년 차.”
“네, 수석님.”
“수고했다.”
그의 덤덤한 목소리가 싣고 온 바람은 윤신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자신이 써 왔던 등식들을 모두 사장하고 오로지 이 로펌의 규칙을 따른 것에 대한 긍정적 평가인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치사에 자신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사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세헌은 금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온 김에 보고 싶은 책이 있는 건지, 상법 판례집들 쪽으로 이동했다. 책장의 빈 공간 너머로 우아하게 걷는 그의 모습이, 가볍게 흩날리는 넥타이가, 신중하게 책을 고르는 수려한 얼굴이 모두 그림처럼 윤신의 시야에 잡혔다.
왠지 그를 붙잡고 싶은 충동이 가슴속에서 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책장 몇 개를 사이에 둔 채로 세헌을 지켜봤다.
얼마쯤 지났을까. 책을 찾은 건지 세헌이 다시 나가려고 하기에 반사적으로 그를 불렀다.
“강 수석님.”
제 옆에 좀 있어 주세요.
그때처럼. 아니, 이번엔 조금 더 길게요.
차마 뒷말을 못 하고 한참 머뭇거리자, 이내 도서실을 벗어나려던 세헌이 돌아봤다. 그는 늘어지는 시간을 다시 쫀쫀하게 이어 붙이듯 낮고 탄력적인 음성으로 질문했다.
“묵비권 행사 중인가? 할 말 있으면 해.”
“저기…….”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먼저 올라가세요.”
이 허무한 대답에 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대꾸를 듣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억울해진 윤신이 바로 반박했다.
“그냥 몇 초 낭비한 것도 아까우세요?”
“어, 아까워. 너한테 쓰는 건 그 무엇보다 아까워.”
“네,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너 언제까지 건방 떠나 두고 보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간을 나서려던 세헌이, 이번엔 윤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의로 뒤돌아봤다. 그는 잠시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가 싶더니, 꽤 파격적인 제안을 꺼냈다.
“앞으로 내 사건 같이하게 될 거야. 탁 비한테 사건별 추이 보고받고 앞으로는 내가 지정해 준 사건 회의에 참석해. 그 전에, 지금 수임하고 있는 사건 재판이 있으니까 그거부터 참관해. 물론 너에게 의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내리는 명령이야.”
얼굴에 화색이 돈 윤신이 가슴팍에 판례집을 꼭 안은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돌연 미희의 말이 떠올라 넌지시 물었다.
“항소심인가요? 그거 좋아하신다길래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이마를 찌푸린 그가 이내 나지막이 답했다.
“아니야. 원심이야.”
“대체 사건을 한 번에 몇 개나 맡으시는 거예요? 몸이 안 남아나겠어요.”
“남아날 정도로만 일해. 오랜 고객이라 서비스 차원으로 맡은 간단한 회사 소송이야.”
“간단하든 복잡하든 천재지변이 와도 꼭 가겠습니다.”
“비장하시네. 천재지변 오면 판사도 법정에 못 오니까 집에나 처박혀 있어.”
쯧, 혀를 찬 그는 이제야말로 완전히 돌아섰다. 출입문이 한 차례 열렸다 닫히고, 어느 틈에 압도적인 정복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세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혼자가 된 뒤라야 윤신은 비틀거리다가 아무 데나 몸을 기대듯 걸터앉았다.
그는 매정하지만 상냥하다. 이 양극단의 평가를 아무도 이해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윤신은 세헌이 이 안에서 했던 말들을 하나씩 곱씹다가, 천천히 제 왼손을 올렸다. 뒤이어 그의 보드라운 살갗이 닿았던 눈두덩 위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왠지 그 매끈한 촉감이 느껴지는 듯해서 무의식적으로 서서히 끌어 내려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러 봤다.
마치 키스하듯 표피를 접촉하다 보니,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쿨럭, 몹시 당황한 그는 요란하게 기침했다.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증명하듯 피부 아래가 미친 듯이 화끈거렸다.
‘내가 왜 이랬지.’
사력을 다해 부정하려고 해 봐도, 성적 끌림이 맞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됐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세헌이 알게 되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본인은 해도 되지만, 타인은 해선 안 되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
퇴각하는 군인처럼 황급히 벌떡 일어난 윤신은 수치로 엉망이 된 얼굴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아나듯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타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문이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