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51)

07.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 룸 한 면의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던 세헌은 소리가 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열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몸을 균일하게 떨고 있었다.

화면을 보니, 탁 비서였다. 그는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 탁 비입니다.

“어느 쪽이야?”

인사말조차 없이 다짜고짜 본론만 묻는데도 탁 비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딸칵. 전자 기기로 추정되는 뭔가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이 이어졌다.

- 이거 수한그룹 등록 차량이에요. 실소유주는 둘째 며느리 비서실장으로 나오네요. 도이경 관장 수족요. 도 관장님이 평소 조용히 다니실 때 종종 쓰시는 거랍니다.

짐작대로였다. 윤신이 대화 끝에 눈물을 쏟았다면 발화자가 그에게 그럴 만한 계제를 줄 수 있는 대상이란 뜻일 테고, 세헌이 그의 인간관계를 보고받아 본 결과 누나 쪽이 유력했다.

다만 여성들은 키가 훌쩍 크거나 하지 않은 이상 체구로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혹여 연인일 수도 있겠다는 희박한 확률에 대한 확인을 요구한 것일 뿐 처음부터 세헌도 그녀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다른 건.”

- 변호사님께서 차량 조회만 요청하셔서, 거기까지만 했습니다.

“어제 충격적이네, 이상하네 했잖아. 내가 아는 탁 비라면 그걸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어. 게다가 아침까지 아주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

- 상대는 수한이에요. 더 자세한 걸 많이 알아내려면 품이 많이 들어요. 정식으로 펌에 요청을 하시든가, 아니면 수석님 조사원들을 쓰시는 게 나을걸요.

“품과 시간이 덜 드는 영역에서 뭐라도 건져 냈을 거야.”

정곡이었던지 탁 비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음성을 다시 이어 붙였다.

- 딱히 알아보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전에 도 변호사님 주변 조사를 펌 조사 팀에 요청했을 때 수한 둘째 며느리 관련해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나한테 제출한 보고서에 있는 얘긴가?”

- 아뇨, 그분이 요즘 외부 노출이 들쭉날쭉하대요. 그룹 행사에 잘 참석했었는데 그것도 뜸하고, 원래 갤러리에 거의 매일 출근했었는데 최근엔 결근이 잦았다고도 하고요.

“도윤신이랑도 관련 있어?”

-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어요. 도 변호사님과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안이었다면 조사팀이 수석님 드릴 보고서에 올렸겠죠?

누나의 일신상 문제인가. 그걸 알게 된 윤신의 반응이 격해졌다면 일리는 있었다.

흐음. 한 손으로 진열대를 짚은 세헌이 잠시 말을 아꼈다. 그러자 탁 비서가 덧붙였다.

- 어떡할까요. 정식으로 펌에 더 조사를 요청할까요?

“아냐. 수고했어. 30분 뒤에 봅시다.”

- 네, 이따 뵐게요.

통화를 종료한 세헌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는 어젯밤에 목격한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부분들은 차치하더라도 누나가 직접 찾아와 서류 봉투를 주었다는 게 조금 미심쩍었다. 가족 간에 서류상 교통정리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 공산이 가장 컸다.

한데 한 가지가 걸렸다. 단순한 서류 정리라고 가정하면 그다음 윤신의 반응이 정상적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변호인 위임장은 아닐 거고.”

나지막이 혼잣말한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하곤 이내 재킷을 갖춰 입었다. 뒤이어 서류 가방과 차 키를 챙겨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집을 나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사고는 이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남매에게 일어난 일이 그냥 단순한 사건은 아닐 듯했다. 윤신은 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와 비슷한 모양새로 울었다. 최소한 머릿속을 가족의 사망 그 엇비슷한 충격으로 어지럽히는 일이 생긴 것임은 분명했다.

‘귀찮아.’

자꾸 윤신을 생각하는 게 짜증이 난 그가 큼지막한 손으로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마사지하듯 문지르는 사이, 승강기가 내려와 입을 벌렸다.

계기판의 숫자는 빠르게 내려갔다.

금세 지하 주차장 로비에 당도한 그가 투명한 중문을 빠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정면의 C동 전용 출입구에서 중문을 밀고 나오는 낯익은 얼굴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윤신이었다.

그는 걸음을 걷다 말고, 멈춰 서서 윤신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언젠가의 그날처럼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겨우겨우 웃고 있어서였다.

“뭘 쪼개. 신나?”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빈정거리듯 그러자 윤신이 바로 발끈했다.

“아침부터 울까요, 그럼.”

“깍듯하게 인사부터 해. 싸가지 없이 이게 어디서.”

“어, 맞다. 죄송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석님. 식사는 하셨어요?”

그제야 허둥지둥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더 속이 뒤틀렸다. 왠지 저 얼굴을 보는 게 싫다는 느낌이 단전부터 끓어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감쳐문 세헌은 뒤늦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함께 공동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옆면의 유리를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반사돼 비쳤다. 무심코 윤신의 위에 눈길을 두던 세헌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얼굴은 왜 퉁퉁 부었어.”

이 질문이 꽤나 의외였던 듯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윤신이 세헌을 힐끗 살폈다.

“많이 부었어요?”

“내 질문이 먼저야.”

“배고파서 라면 먹고 잤어요.”

“라면 먹는 걸로 그렇게 부어? 체질 개선 좀 해야겠다. 수영 같은 건 어때. 혈액 순환에 도움 돼.”

“매일 좀비처럼 집, 로펌, 집, 로펌 하는데 운동을 어떻게 합니까. 가끔 컨디션 따라 그럴 때가 있어요.”

상황을 다 꿰고 있는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 대는 이 어설픈 거짓말이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부은 눈 보면 나까지 졸려. 한 번만 더 퉁퉁 부어서 나타나.”

“네에, 노력하겠습니다.”

몰래 흘기듯이 세헌을 본 윤신은 그 이상 반박하려 들진 않았다. 대신 정말 그렇게 많이 부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옆면의 유리를 통해 제 모습을 열심히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기다란 다리는 착실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어제 택시를 타고 귀가했던 탓에 윤신의 차 한 대는 아직 로펌에 있었다. 예비용으로 하나 더 두고 있는 것을 타면 되겠지만 그러면 회사에 두 대를 다 두게 되는 셈이라 차후 동선이 효율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헌의 모습을 훔쳐보듯 눈여겨본 윤신이 이내 결심한 듯 제 차 방향이 아닌 제 사수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저, 수석님. 저 옆에 좀 태워 주시면 안 되나요?”

걷다가 중간에 우뚝 멈춰 선 세헌이 윤신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한 황망한 기미가 장마철 바닥에 흥건한 물처럼 가득 묻어났다.

“뭘 해?”

“제가 어제 퇴근길에 졸음운전 하게 될까 봐 택시를 타고 집에 왔거든요. 그런데, 다른 차를 또 가져가게 되면 사옥 주차장 사정상 경제적이지 못하고, 또 마침 수석님을 뵀고…….”

그는 바로 윤신의 말을 잘라 냈다.

“택시를 다시 부르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펌에 연락해서 차를 보내 달라고 하든지. 방법은 많아.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 줘야 돼? 너 세 살이야?”

“되게 빡…….”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윤신이 입을 슬그머니 다물었다. 그러자 멈춰 있던 세헌이 윤신이 선 자리로 성큼 걸어왔다. 삽시간에 좁아진 거리 때문에 당황해서 퇴로를 찾는 사이, 그는 이미 서로의 간격이 5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이 다다라 있었다.

“끝까지 해.”

“빡빡하시다고요.”

뭐 이런 게 다 있지?

길쭉한 눈에 그런 기미가 가득했다. 이게 윤신의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듯, 세헌이 기가 막혀 하아, 깊은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이런 어쏘 변호사는 그의 생전 처음이었다. 출근하는 파트너를 붙잡고 차에 태워 달라고 부탁하는 주니어라니, 들어 본 일이 전무했다. 건방지다고 꼭 뒤에서 한 소리씩 들었던 어쏘 시절의 세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말을 안 섞으면 안 섞었지 파트너 변호사의 뒤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군 일은 없었던 터다.

“진짜 너 같은 새끼는 처음 본다. 내가 네 인사권 쥐고 있는 거 몰라?”

“압니다. 뭐 문제 있나요?”

“뭘 잘 모르나 본데 난 꼴 보기 싫으면 진짜 해고해. 소문도 안 듣고 사나?”

“저 변호사입니다. 부당 해고 재판 경험도 많고요.”

“난 흉부외과 의사로 보이나 보지?”

“공짜로 타겠다는 거 아니에요. 출퇴근할 때 직접 운전하시죠? 제가 운전해 드릴게요.”

점입가경이었다. 한결 가라앉은 어투로, 세헌이 설명하듯,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파트너들과 달리 출퇴근길에 기사를 쓰지 않는 건 내 시간을 방해받기가 싫기 때문이야. 왔다 갔다 하루에 15분씩 총 30분. 그건 내 거인 거라고.”

“입 다물고 가도 안 돼요? 밤새 혼자 있다 아는 사람 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좀 놓여서요.”

이 말이 세헌의 머릿속을 꽤나 어지럽혔던 건지 그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윤신은 침묵하는 그를 말간 얼굴로 지켜봤다.

조금 전 로비에서 세헌의 언제나처럼 잘 정돈된 근사한 모습이 시야에 드러났을 때. 솔직히 자신은 다소 동요했다. 그래서 인사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웃는 낯을 꾸며 내 그를 빤히 지켜보기만 했던 거였다.

왜 세헌을 보고 안도하는 기분이 든 건지는 자신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냥 묘하게도, 말도 안 되게, 가장 최전방의 안전지대처럼 느껴졌다. 누가 들어도 헛물켠다며 비웃을 일이다.

“어떻게 안 될까요?”

물끄러미 윤신을 보던 세헌이 반문했다.

“내가 기억에 전혀 없어서 물어보는 건데. 나 너한테 돈 빌린 적 있어? 떼먹었다거나.”

“그럴 리가요.”

“혹은 도 교수님께 나도 모르는 커다란 실수를 했다거나?”

“그러셨어요? 아버지라면 용서하셨을 거예요.”

“혹은 너희 누나를 소싯적 내가 찼다거나. 기억에 없긴 한데,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저야 두 분 사이에 그런 일들까진 잘 모르죠.”

“그래. 너한테 빚진 게 없으니 내 차에 널 태울 필요도 없는 거네.”

노련한 거절에 순식간에 말리게 된 윤신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을 아꼈다. 대신 팅팅 부은 얼굴로 편안하게 웃고는 세헌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걸 마주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 구겨지나 싶더니, 이내 별 추가 설명 없이 다시 윤신을 등지고 가 버렸다.

그의 늘씬하고 기다란 몸이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우아하게 고급 세단에 올라탄 세헌은 한번 힐끗 돌아보는 기미조차 없이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강 변호사님!”

반사적으로 따라가려던 윤신은 한 걸음을 앞으로 떼다가, 곧 관뒀다. 저렇게 싫다는데 굳이 쫓아가서 애원하는 건 스토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세헌에겐 아직 아닌 모양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까마득한 상사의 앞에서 넘쳤던 감도 있었다.

사실 그는 밤새 잠을 설친 제 사정을 모르니 배려해 줄 필요가 없기도 했다. 다만 알고 있대도 그가 이해해 줄 거라는 장담은 못 하겠다.

“그래, 가라. 가. 저러니까 친구가 없지. 인지상정을 기대한 내가 머저리지.”

한참 우두커니 서서 세헌의 차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있던 윤신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다가 시간이 서서히 빠듯해져 감을 느끼고 제 차 방향으로 걸었다. 기둥을 지나쳐 가려는 그 순간, 반대편에서 익숙한 모습의 차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고 멈칫했다.

제 시력이 갑자기 현격하게 떨어진 게 아니라면, 조금 전 봤던 세헌의 차였다.

놀란 윤신을 향해 클랙슨 소리를 ‘빵.’ 하고 울린 그가 묵직하게 차를 정차했다. 그뿐만 아니라 운전석에서 매우 신경질적인 손길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척, 땅에 기다란 두 다리를 디딘 그는 몇 미터 옆의 윤신을 똑바로 주시했다.

윤신은 얼떨떨했다.

“수석님 댁에 뭐 두고 가신 거 있으세요?”

그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수석을 향해 턱짓했다.

“타.”

“네?”

“타라고,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마음 바뀌기 전에 타.”

그가 돌아와 이런 말을 하는 맥락은 알 수 없으나, 윤신은 일단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눈치껏 조수석에 탑승해서 안전벨트를 매자, 세헌도 다시 차에 올라탔다.

영문을 모르는 윤신이 다시 운전을 시작하는 세헌을 끊임없이 힐끗거렸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지,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그가 고갯짓했다. 윤신은 바로 미끼를 물었다.

“왜 돌아오신 거예요? 그냥 가실 줄 알았어요.”

“그래, 나도 내가 그러실 줄 알았다.”

본인이야말로 매우 황당하다는 투였다. 때때로 그랬듯, 이번 역시 어울리지 않게도 스스로 이해를 못 하고 있는 듯 보이기에 더 물을 수가 없어지고 말았다. 얌전히 조수석에 자리를 잡은 윤신은 그가 곧게 뻗은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능숙하게 주행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생각해 보니 세헌의 말마따나 이런 경우는 그에게 처음일 것 같았다. 도국에서 일하다 보니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그곳에 입사하게 된 건지를 종종 느꼈다.

어쏘들은 물론이고, 기수가 한참 높은 동료 파트너들까지도 세헌을 몹시 어려워했다. 그가 도국의 간판 변호사였기에, 그게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의 팀원으로서 가까운 곳에서 보조해 주라는 명령을 송 변호사로부터 듣긴 했지만, 그렇대도 자신과 같은 일개 주니어가 그의 맞은편 방을 쓰는 건 서열상으로도, 펌 내 분위기와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제가 운전해도 되는데요.”

“넌 가능한 한 내 차 안에 아무것도 손대지 마. 내 물건에 남 지문 묻는 거 싫어해.”

윤신은 바로 착하게 제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두 손을 얌전히 얹었다.

“조수석에 어쏘 태우고 운전대 잡은 건 처음이시죠. 새로운 경험 하시네요.”

“했던 말을 자주 까먹네. 그거 안 좋은데.”

“아, 입 다물고 가겠습니다.”

“지금부터 쓸데없이 말 걸면 멱살 잡고 도로 한복판에서 끌어 내린다.”

세헌이 진짜로 끌어 내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윤신은 입도 착실히 다물었다. 한일자로 입술을 겹쳐 물고는 말없이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신호가 걸린 사이 그도 더는 못 견디겠다는 양 고개를 확,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눈빛이 윤신의 희멀건 얼굴을 아주 정확하게 겨냥했다.

“눈 안 치워? 눈두덩 퉁퉁 부어 가지고 음침해 보여서 기분 나빠.”

“그렇게 많이 음침해요?”

“거울이라는 인간의 발명품이 있어. 너 같은 애들 쓰라고 만든 거야.”

득달같이 휴대폰을 꺼낸 윤신이 카메라를 통해 제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충혈된 눈가와 부은 눈두덩은 누가 봐도 밤을 설친 사람의 그것이었다. 감이 좋은 세헌이라면, 앞뒤 상황은 모르더라도 울고 난 흔적이라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사고의 흐름이 그렇게 이어지자, 세헌이 가던 길을 돌아오던 조금 전 장면이 묘하게 설명이 됐다.

이상하네, 진짜.

곧 죽어도 강세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호칭은 붙여 줄 수 없었다. 그 반대는 손쉽게 가능했다. 그는 대체로 무례했고, 오만했고, 사나우며 모질었다. 그런데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매 순간 다음에 둘 수를 궁리하는 이 남자가, 제겐 왜 그다지 나쁘지 않을까.

윤신은 그가 별로 어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제게 잃을 게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도국에서 당분간은 버텨야 하기에 도리어 그 반대였다.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의외로 강세헌은 인내심도, 분별력도 있었다. 입사할 때도, 1차 테스트 때도, 그리고 프로 보노 사건으로 조언을 구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매우 냉정하긴 하지만 늘 작은 여지를 열어 주었다. 노력하면, 마냥 무시하지 않고 알아주었다. 틀린 부분을 차갑게 힐난하는 대신, 고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가르쳐 주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귀찮아하긴 하지만 들어 주었다.

그건 일견 쉬워 보이지만 세헌처럼 분 단위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겐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왜 누나가 제 보호자로 그를 낙점했던 건지, 곁에서 지켜보니 알 것 같았다.

〈웬만한 대형 로펌에선 수임해 주지도 않을 거야.〉

어제 들었던 그녀의 체념적인 음성을 뇌리에서 건져 낸 윤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강세헌이 맡으면 누나도 수한이랑 해볼 만하지 않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세헌인데.’

그녀도 자신은 신뢰하지 못하지만, 세헌이 나서 준다면 매우 든든하게 여기고 의지할 듯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를 설득하는 일 자체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대는 대기업이고, 상처가 크든 작든 반드시 어느 한 군데 다치긴 할 테니까. 그처럼 명망 있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굳이 뛰어들 필요 없는 아비규환의 판일 터다.

무엇보다 강세헌은 가사 소송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은 어지간해선 맡지 않는다. 그가 눈이 뒤집혀 달려들 매력적인 부분이 있어야 했다.

‘방법이 없나. 어떻게 해야 수임하게 할 수 있지.’

윤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달싹였다. 세헌에게 뭔가 바라는 게 생기자, 조금 전처럼 계속 훔쳐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창밖의 바람을 타고 선율처럼 날아다니는 낙엽들을 내다보며, 분주한 아침의 풍경을 가득 눈에 담았다.

* * *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 윤신의 얼굴이 썩 진지했다.

프로 보노 사건과 관련해 세헌으로부터 받은 메모리 카드 안은 뭐랄까, 또 다른 의미의 금광 같았다. 다만 그 주변 곳곳에 금을 함부로 캐 갈 수 없게 지뢰들이 가득한 것처럼 보여서 선뜻 손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이 속엔 거래처들로부터 받은 눈먼 돈들의 흐름은 기본이고, 갖가지 배임과 탈세 혐의들, 그리고 자금 세탁과 부정 청탁의 정황들이 넘쳐났다. 그뿐만 아니라 입에 담기 불편한 가족들의 추문들도 꽤 됐다. 이걸로 흔들면 꽤 큰 스캔들로 번질 게 명명백백했다.

“어린 딸 손 빌려서 경매 사기…… 가지가지. 안 걸리고 산 게 용하네.”

이 정도면 카테고리가 다르긴 했지만 성범죄도 분명 처음이 아닐 듯했다. 증거 인멸의 역학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피의자의 치밀함들도 그것을 증명했다. 한심해하는 기색으로 남자의 사진을 보다가 이내 페이지를 뒤로 넘긴 윤신은 각종 권력 밀착형 혐의들까지 눈으로 꼼꼼하게 담았다.

“고위 공직자 뇌물 수수…… 상품권, 골프채, 리조트 이용권……. 아내에게 그림 및 보석 전달. 수억 원대네. 이 자금이 흘러간 후…… 집권 여당 원내 대표. 야당 다선 의원. 현직 장관까지.”

표식으로 된 연결 고리들을 쭉 이어 가다 보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얼굴들이 두더지 게임 하듯 하나둘씩 등장했다. 윤신도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다선 국회 의원들이나, 당의 지도부들도 있었다. 이것들만 털기 시작해도 대한민국이 시끄러워질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 정도면 아예 경찰에 넘겨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익숙한 정치인들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치듯 허공에 그림을 그린 윤신이 제 턱을 천천히 쓸었다. 금광은 금광인데, 이러면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그리고 세헌은 이걸 터트리는 정의의 사도가 되라고 준 게 아니라, 이것들을 쥐고서 제 의뢰인을 위해 뭔가를 얻어 내라는 의도로 준 것이다. 위험한 자료니까 은밀한 방식으로 쓰라고 했던 그의 충고가 그걸 증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정계까지 들쑤시는 건 위험할 듯했다.

게다가 그동안 이걸 사람들이 몰라서 파지 않았던 게 아닐 터다. 그만큼 정계와 재계의 카르텔이 포괄적으로 공고하다는 뜻이다. 한 손에 꼽히는 대기업도 아니고, 아무리 건실하다 하지만 아직은 중견 기업인 이런 업체에도 이만큼 공직자들과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한 같은 대기업은 훨씬 더하리라.

〈내친김에 그걸 어떻게 쓰고 싶은지도 보고 싶은 모양이네.〉

송 변호사가 주었던 힌트를 되새기며, 세헌의 방식이 무엇일지를 머리에 그려 봤다. 그는 협박이 전공이긴 하지만, 회유가 부전공일 만큼 거래에 능한 걸로 알았다. 소송까지 가지 않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수많은 사건 동안 그 능력을 십분 써먹었을 듯했다. 그라면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그 협상 과정에서 반드시 뭔가를 얻어 내려 할 것이다.

고민에 빠져 있던 윤신은 일단 제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걸리기 전에,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거두절미하겠다는 듯, 윤신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저 지난번에 연락드렸던 법무 법인 도국 도윤신 변호사입니다.”

- 네. 알아요.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중요한 말씀이면 지난번 면담 때처럼 제가 사옥으로 갈까요?

“아뇨. 그러실 건 없고, 혹시 지금 댁에 계시나요?”

- 지금요? 그렇긴 한데…….

“잘됐네요. 제가 지금 인편으로 자료 한 부를 보낼 건데요. 본인이 직접 확인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체크해서 저한테 다시 회신해 주세요. 그럼 그걸 토대로 작전을 짜려고요.”

- 어떤 자료인데요?

“재직하고 계신 회사와 관련된 비리들이에요. 이걸로 합의금 협상을 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의뢰인께서 동의하신다면요.”

여자는 윤신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 합의요? 전 회사의 내부 고발자 같은 게 아니에요. 제가 당한 일을 법적으로 증명만 하면 돼요. 그리고 지금 같은 무기한 대기 발령이 아니라 정상적인 형태의 복직을 하고 싶어요. 지난번 접견 때 저희 대표님이 증거 인멸한 정황들 거의 잡혀 간다고 하셨잖아요.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실정법의 한계상 받은 만큼 속 시원하게 갚아 주지 못할 거예요. 재판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여러 가지 괘씸죄가 보태진다 해도 초범이라 처벌의 문이 턱없이 낮습니다.”

- 강제 추행은 초범도 실형 선고되는 경우 있다던데요. 지난번 고소장 써 주셨던 변호사님께서 그러셨어요.

“증거가 아주, 확실하면요. 하지만 그것도 처벌할 법 자체가 세지가 않아요. 선택의 문제예요. 잠깐 괴롭게 만들든지, 혹은 그 대신 다른 형태의 보상을 얻든지요.”

무엇보다, 크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로 상황이 종료되면 자신이 손쓰지 못할 때 은밀하게 인사 보복과 같은 형식의 대갚음이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여자는 업계에서 이미 이단아가 됐기 때문이다.

그때 가서 이미 끝난 사건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계속 쫓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이 말을 어떻게 완곡하게 설명해야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다소 격해진 어투로 짧았던 정적을 깼다.

- 일관되게 진술했고, 정확하게 상황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이거로는 피해를 입증하기 부족하니까 그냥 제가 당한 일에 대해 돈으로 배상받으란 건가요? 지금 그 말씀 하신 거죠?

“합의금을 지급한다는 건 해당 죄에 대해서 피의자가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합의로 진행한다고 해서 피해 사실이 삭제되는 게 아니에요.”

- 수임료도 못 드리는 사건이라, 재판까지 하기 귀찮으신 건 아니고요?

“대리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혀 귀찮지 않아요. 저한테도 이 사건이 아주 소중해요.”

- 그럼 그 사람을 벌줘야죠. 성격 좋은 척하더니 이렇게 뒤통수치실 수 있어요? 이번엔 좋은 변호사님 만났다고 믿었는데…….

점점 잦아드는 의뢰인의 목소리에 울분 같은 게 느껴졌다. 눈을 지그시 감은 윤신은 어떻게 해야 진심이 전해질까 고민하다, 겨우 음성을 뱉어 냈다.

“정 재판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진행할게요. 다만, 복직을 원한다고 하셨죠. 본인이 결백하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으니까 그러신 걸 거고요. 그걸 다른 방법으로도 할 수 있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아니, 대체 얼마나 받아 주시겠다는 건데요. 한 몇천만 원쯤 돼요?

“그보다 더 드릴 수도 있어요. 합의금뿐만 아니라 공개 사과 같은 형식도 가능할 거예요.”

그의 이 말이 바로 이해가 안 됐던지, 그녀가 침묵했다. 거칠어졌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게 귓전으로 실시간으로 전이됐다. 아마 숨을 고르며 생각을 곱씹는 듯했다. 그러다 역시 도통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양 날카롭게 반문했다.

- 법이 약해서 처벌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큰돈을 주고, 사과도 한다고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연락드린 거예요. 법은 못해도, 제가 보내 드릴 자료가 그걸 해 줄 수 있거든요. 의뢰인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요. 한번 검토해 봐 주실 수 있을까요?”

그제야 상대도 이성을 일부 되찾고 윤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인지한 것 같았다. 처음 통화를 시작했을 때 그가 했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는 듯,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는 보채는 대신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변호사님의 제안을 충분히 검토해 보고도 제가 재판을 원한다고 하면요?

“그럼 당연히 그렇게 진행해야죠.”

이 자료들을 활용하지 못했을 시 세헌에게 낙제점을 받을 게 뻔했다. 하나 의뢰인이 끝내 정공법을 원한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윤신이 모니터에 띄워 둔 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상대가 한결 차분해진 주파수로 넌지시 물어 왔다.

- 제가 변호사님을 믿어도 될까요?

천만다행히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윤신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는 안쓰러워하는 한숨을 삼키면서 대꾸했다.

“억지로 노력하실 필요 없어요. 믿게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 조금 전엔 말을 함부로 해서 죄송해요. 좀 울컥해서요.

“이해해요. 괜찮습니다.”

- 보내 주신 자료에 제가 아는 부분을 확인해 달라고 하셨죠?

“네. 그걸 먼저 정리한 다음 우리가 뭘 받아 낼 수 있는지, 또 의뢰인께서는 얼마나 받아 내고 싶은지 머리 맞대고 고민해 봐요. 아, 자료는 직접 본인이 수령하셔서, 제가 보낸 인편으로 다시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그럼 쉬세요.”

통화를 마친 윤신은 내선으로 탁 비서를 연결했다. 그에게 미리 준비해 둔 자료를 의뢰인에게 보낼 것을 부탁한 뒤, 창문 너머로 눈인사를 했다. 탁 비서가 알겠다는 양 손을 흔들어 주는 걸 보면서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후우, 숨을 몰아내자 몸속 빈 공간을 채우듯 잡념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노트북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는 윤신의 눈가가 수심으로 젖어 갔다. 어떤 루트를 통해야 이런 치명적인 정보를 단기간 내에 뚝딱 구할 수가 있는 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적어도 인력 한 사람이 한 일은 아닐 터다.

한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킬 수도 있어 보이는 이것들을, 세헌은 늘 틀어쥐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을 것이다.

‘매형은 흠이 이것보다 훨씬 많겠지.’

수한그룹은 기업 운영을 그다지 투명하게 하지 않았다. 매형이 경영하고 있는 수한 홀딩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듯했다. 그래서 그 댁 어른들이 사회적으로 깨끗하고 청렴한 이미지의 아버지와 사돈을 맺는 데 매우 적극적으로 나왔던 것을 윤신도 기억했다.

그걸 모르진 않았던 아버지는 누나가 결혼한 뒤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재야로 가 사회 운동에만 매달렸다. 혹여 사돈댁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데 본인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결부된다면, 궁극적으론 모두에게 난처한 일이 될 거라고 판단해서였던 것 같았다.

며칠 전 집에 다녀간 이후, 누나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용기가 안 난 윤신도 메시지조차 남기지 못했다.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그녀를 돕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세헌의 말대로 자신은 주제 파악을 잘했다. 의지만 가지고 함부로 끼어들었다가 누나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 뭔가를 하겠다고 나설 엄두가 안 났다. 상황을 더 정확하고 자세히 알면 길이 보일 것도 같은데, 그때 매우 방어적이던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곧 죽어도 제겐 상세히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 제대로 얘기라도 해 주지.’

당장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배 속이 울렁거렸다. 허무한 기분과 불편한 감각이 뒤엉켰다. 엉망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심란해졌다.

누나의 입으로 직접 긴 싸움이 될 거 같다고 예고했으니 자신도 맥락을 파악해 가며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그게 그녀를 지키고, 자신을 지킬 방법의 일부였다.

* * *

탕비실 방향으로 나온 윤신은 복도 끝의 외부로 난 창문 앞에 우뚝 섰다.

새벽 3시의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즈음이라 다른 시간대의 새벽녘보다 더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지구의 하늘이 어두운 색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퍽 스산해 보였다. 심지어 윤신의 사무실이 있는 층은 사무실의 반 이상이 비워져 있어서 더욱 그랬다.

눈에 보이는 마천루들은 이곳 사옥처럼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다. 다들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며 뭘 얻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자신은 여기 서서 대관절 뭘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살면서 지금처럼 제가 선 자리가 위태롭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스스로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닌 데다, 심지어 누나가 10년 가까이 살 부대끼고 살아온 남편의 위해로부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란 걸 알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강세헌이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은 없나. 알고도 날 받아 준 거라면?’

세헌은 의뢰인이 그를 수임하기 전까지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지 누구의 편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아니, 100퍼센트 더 강한 쪽이었다.

매우 희박한 가능성에 고개를 가로저은 윤신은 사무실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자꾸 잡생각만 들었다. 집에 가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나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때꾼해진 눈을 깜빡이며 제 방에서 재킷과 가방을 챙겨 들고나오는데, 불이 꺼진 맞은편 세헌의 집무실이 돌연 눈에 들어와 박혔다.

비서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라 윤신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세헌이 제게 ‘위험한’ 자료를 넘기며 ‘출처’는 묻지 말라고 했던 얘기가 별안간 떠오르고 말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고양이가 어물전을 조용히 스치지는 못하는 것처럼 윤신의 두 다리가 그의 방 앞으로 저절로 향했다.

왠지 지금이라는 생각이 물 끓듯 치밀었다. 나쁜 짓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세헌의 입을 통해 영영 진실을 듣지 못할 것을 알아 이게 최선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의 밑에서 파트너의 말이 법이라고 믿고 따라야 한대도 제 의뢰인을 구하는 데 쓸 무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손아귀에서 굴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는 데까진 해 보는 게 옳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도합 세 번의 사과를 속으로 곱씹던 윤신은 세헌의 집무실 문고리를 돌리고, 그 안에 조심스럽게 입성했다.

어두운 방 안의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윤신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벽을 비추니 그의 자격증들이 즐비했다. 그 옆에는 세헌의 눈높이와 맞을 만한 높은 행거에 그의 여벌옷과 타이 따위들이 빳빳한 비닐로 감싸여 있었다.

벽을 지나 그의 책장 구석구석까지 차례로 비춰 보던 윤신은 돌연 기묘한 쓸쓸함을 느꼈다. 보통 다른 변호사들은 방 안에 가족사진이라거나, 혹은 사적인 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소품들이라도 있기 마련인데 세헌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일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오직 한 가지 이질적인 게 있다면 저 책장에 여전히 꽂힌 〈위대한 유산〉이었다.

“여기 이상하게 외롭다. 방이 주인 닮았나.”

혼잣말한 그는 뒤늦게 정신머리를 챙기고 일단 업무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뭔가 자료의 출처에 관해 건질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적으로 회로를 돌렸다. 정말로 중요한 정보들이야 사무실에 대놓고 둘 리가 없지만, 그래도 아주 작은 단서 정도는 찾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한데 애초에 책상 위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서랍은 비밀번호 없인 열어 볼 수가 없게 설계되어 있어 당황했다.

“강세헌 상대로 너무 꿈이 컸네.”

허탈한 감각을 느끼며 이제라도 밖으로 나가려던 윤신은 책상 위에 있는 탁상용 달력을 발견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목적은 잠시 차치하고, 줄곧 제 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세헌에 대한 호기심들을 해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의자에 앉아 달력의 뒷장들을 하나씩 넘겨 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업무에 관한 게 다였다.

소득이 없어 아쉬워하는 찰나, 깨알 같은 크기의 제일 뒷장 일정 중 ‘X’ 자가 쳐져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건 뭐지. 생일인가.

“뭐 약점을 찾을 수가 있어야 그거라도 잡고 제발 좀 도와 달라고 물고 늘어지지.”

고개를 갸웃한 윤신은 이내 달력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플래시를 끄려는데, 세헌의 방에서 제 방의 책상 쪽이 매우 잘 보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제 방에서도 그러리라. 그의 집무실 창문 블라인드가 걷힌 적보다 쳐져 있던 적이 압도적으로 더 많아서 그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이 사람은 종종 날 봤으려나.

빛 위로 손을 뻗은 윤신은 세헌의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양새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러다 쓸데없는 상상을 했다는 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진짜.”

귓불을 붉힌 그가 이제야말로 기행을 종료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노트북 옆면에 꽂힌 서류들 사이에서 도톰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부분만 들떠 있어서 절로 눈이 갔다. 혹시나 싶어 그 속으로 길쭉한 검지를 밀어 넣었다. 반질반질한 촉감이 손끝에 닿았다. 아슬아슬하게 문지르듯 당겨 반쯤 꺼내 보니, 파일철이었다. 그 안의 내용이 낯이 익었다.

‘이게 왜…….’

자신이 오늘, 아니, 어제 오전 탁 비서에게 원본 보관을 요청해 두었던 사건 관련 자료들의 사본 일부였다. 꼼꼼하게 읽어 보고, 쟁점들을 직접 펜으로 표시해 둔 밑줄 따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론 애초에 그가 직접 맡긴 사건이니 충분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지난번부터 꽤 세세하게 사건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이 방의 주인은 프로 보노 같은 건 일절 맡지 않는 도국의 에이스 강세헌이었다. 일개 어쏘가 당일 확보한 자료를 이미 읽어 보았다는 건 조금 수상쩍었다.

〈너 건드렸다가 수한그룹한테 무슨 거대 청구서를 받으려고. 관심 없어.〉

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는 것 같은데…….

부끄러움으로 조금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훔치며 서류를 한 번, 책장에 꽂힌 〈위대한 유산〉을 한 번씩 훑어본 윤신은 최대한 원형을 되살려 파일철을 제자리로 꽂아 넣었다.

뒤이어 빠르게 문을 닫고 공간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바로 그 순간, 문 위 접근 센서에 반짝, 하고 붉은빛이 비쳤다가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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