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객실 내부는 마치 견고한 범선 같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을 받으면서, 윤신은 끊임없이 세헌을 살폈다. 이렇듯 꽤나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건만 그는 조용히 식사할 따름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은 세헌이 정면의 윤신을 분명하게 직시했다. 물을 마시고 있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컵을 내려놓았다.
“하실 말씀 있으신 거죠. 하세요. 저도 다 먹었습니다.”
“먼저 거두절미하고 묻지. 송 변이랑은 무슨 사이야?”
질문의 의도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윤신으로선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입사 전에 호텔에서 세 차례 만났지. 이력서를 주러 한 번, 면담 두 번.”
“그렇습……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입술을 야릇하게 달싹이는 세헌의 표정이 오묘했다. 그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듯, 이어지는 그의 질문은 해가 중천에 뜬 점심시간에 묻기엔 조금 호색적인 데가 있었다.
“잤어? 객실에서 봤던데. 태산 호텔 스위트룸.”
오갈 데 없는 손으로 냅킨을 만지작거리던 윤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필연적으로 뺨이 조금 벌게졌다.
“대체 그게 무슨…….”
그건 당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진척될지 몰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하는 수 없이 선택한 장소였다.
앉아 있던 시간은 각각 두 시간여 남짓이었다. 그 자리에는 매번 누나의 비서실장도 동석했다. 송 변호사에게 로펌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앞으로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 일해야 할지 조언도 받았다. 윤신은 누나와 자신,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며, 여태까지 어떤 식으로 일해 왔는지도 밝혔다. 거기서 그들이 한 건 오직 대화뿐이었다.
다만 가정이 있는 업계 선배와 미혼의 후배가 함께 호텔에 들락날락하는 게 썩 좋아 보이진 않을 터라 윤신의 누나 쪽에서 정보가 새 나가는 걸 차단해 둔 상태였다. 일부러 꽁꽁 감춘 걸 알아낸 것으로 미루어 세헌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듯했다.
“이런 질문을 하시는 의도가 뭡니까?”
황당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은 윤신이 묻자, 세헌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위를 치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혹시나 둘이 사적으로도 엮인 건가 싶어 묻는 거야. 아무리 네가 도 교수님 아들이고, 수한그룹과의 연결 고리라도 송 변의 선택은 이상해. 한담, 태산, 대영……. 난 우리나라 웬만한 대기업을 거의 다 상대해 본 몇 안 되는 변호사야. 자연히 프로젝트별 비밀들을 많이 알고 있어. 그런 내 옆에 특정 기업의 사돈을 심어 놓는다? 의심스러운 게 당연하잖아.”
“누나랑 송 변호사님 간에 커넥션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는 수한을 위해 몸을 팔아 변호사님 정보 뜯어 가려고 하는 일종의 매개체고요?”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존재해. 아니야?”
“그분이랑 잤으면요?”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다소 흥분한 듯한 윤신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던 세헌이 이내 김이 빠진다는 듯 몸을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댔다. 제 얼굴에서 정확히 뭘 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그걸 통해 읽어 낸 건 진실이었다.
“안 잤구나.”
“이제라도 한 번 잘까요?”
“그럴래? 그럼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증거가 돼 주는 셈인데.”
제게 의구심을 가지는 데까지는, 논리가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의 말대로였다. 세헌은 워낙 많은 기업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의 입장이라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이자 어릴 때부터 본인을 경제적으로 후원해 줬다던 송 변호사까지 믿지 못하고 본인의 뒤통수를 쳤을 거라 의심하는 건 좀 이해가 안 됐다.
“그거로 뭘 하실 수 있는데요?”
“널 자를 명분이 되어 줄 수 있겠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는 그 때문에 윤신은 울컥했다. 단지 자신을 성적으로 겨냥한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세헌의 입에서 누군가와 잤냐는 둥, 그럼 널 자를 명분이 되겠다는 둥 못된 말이 나오는 게 섭섭했다. 매일 몰래 훔쳐보다 보니 일방적으로 내적 친밀감을 쌓게 됐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안 하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법한 질문을 충동적으로 던지게 됐다.
“수석님이랑 자면 어떻게 됩니까? 그땐 우리 둘 중 누가 잘리죠?”
모든 부분에서 늘 준비되어 있는 그조차도 예기치 못했던 물음이었던 것 같았다. 세헌이 뭔가 답하려고 즉각 입을 열다가,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세요?”
“개념 정리부터 다시 해야겠다. 안됐지만 난 잘리는 게 아니라, 자르는 사람이야.”
“그럼 누구와 자도 저만 해고되는군요.”
“그렇게 되겠군. 펌을 관두고 싶으면 언제라도 얘기해. 도와주지.”
“전 안 관둡니다. 송 수석님과도, 강 수석님과도 절대 안 자요.”
이 대답이 그의 심경을 어떻게 긁은 건지 명확하게는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딜 긁긴 긁었다는 것이다. 세헌의 표정은 일견 평온했으나, 본능적으로 그 뒤에 감춰진 불쾌한 기분이 느껴졌다. 한데 화제를 바꾸는 것 외에 대처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두 분 나이 차는 좀 있지만,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들었어요. 엄청 편하게 지내는 관계고, 도국에 변호사님을 스카우트해서 이만큼 성장할 수 있게 지지해 준 게 송미희 변호사님이시라고요. 아닌가요?”
천만다행으로 어설프게 변경한 이 화두에 세헌이 본문을 덧붙여 주었다.
“네 친한 친구들은 그 누구도, 배신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하고 잘 지내나 보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난 친구 없어. 내겐 서로 꽤 능력을 신뢰할 만한 업무적 파트너가 있을 뿐이야. 그 사람이 나와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인 거고. 아, 혹도 하나 생겼다.”
눈짓으로 윤신을 스윽 가리키는 그의 태도가 우아했다. 저런 불신의 말을 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고상해 보여서 꼭 구도가 잘 짜인 예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만루 홈런 맞은 투수처럼 아연해져 침묵하고 있던 윤신이 제 목울대를 한 번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고는 작심한 듯 그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실례지만.”
“실례하지 마.”
“수석님은 도대체 어디부터 꼬인 거예요?”
“왜 꼬였는지 의견서라도 보내 줘? 서사시 한 편 나올 텐데.”
차가운 주파수의 대꾸였지만 제 태도에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전부터 느껴 온 것인데, 세헌은 이렇게 아랫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오가는 다소 직설적인 말들에 대해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는 듯했다. 최소한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윤신은 자신이 옳은 게 분명하다면 나이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에게 그걸 관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변호사 업계는 매우 수직적이었다. 여태 한 번도 대형 로펌에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그 상하 관계가 불편했던 이유도 조금은 있었다. 세헌과 제 직위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좋아서, 사실 윤신은 그의 이런 열린 태도가 매번 좀 의외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부분에선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관절 그는 유연한 사람인 건지, 꽉 막힌 사람인 건지. 몇 번을 봐도 헷갈렸다.
“진짜로 안 잤어요. 만족하세요?”
“글쎄. 더 답답해졌어.”
“제가 영 미심쩍으신 거죠?”
힐끗 그의 눈치를 살핀 윤신이 떠보듯이 대꾸하자, 세헌은 역시나 개의치 않고 받아쳤다.
“아니. 넌 내 의심을 받기엔 너무 단순해.”
“칭찬 같진 않은데…….”
“아니니까.”
일순 아랫입술을 지그시 감쳐물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빛을 교환해 주던 세헌도, 이미 올라탄 차에서 내리기가 여의치 않은 건지 담담히 설명했다.
“내가 하고 있는 마지막 의심이었어. 나도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늘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 특히 변칙과 변수는 네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야. 잊지 마.”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죠.”
“너 그때 네 입으로 말했지. 5년 전 저축은행 대표 이사 업무상 배임 사건. 검사 측은 동업자가 증인으로 절대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고. 어떻게 됐지?”
당시, 한 가지 확신이 생기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공판 검사는 세헌 측에서 동업자를 데려올 경우의 수를 아예 배제하고 재판을 설계했다. 결과적으로 이 갈고 제 손으로 직접 기소한 사람이 집행 유예로 풀려나는 굴욕적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세헌은 그 만에 하나를 지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빈틈없이 모든 의심스러운 점을 소거하는 건, 사실 변호사로서 아주 큰 장점이었다. 흘려 넘길 수도 있는 것들까지 모두 재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클라이언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솔직히 배울 만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했다. 철저히 의뢰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헌은 좋은 변호사의 교과서였다.
하지만 그저 업무적인 영역에서지, 윤신은 제 삶에서까지 그렇게 치열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랜 시간 의지해 온 친구라면 일단 믿어 주는 게 정상 아닌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데, 우리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사실은 ‘그렇게 정신적으로 고립돼서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한데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어떤 답이 나올지 전혀 상상이 안 돼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도 알아.”
“잠깐만요. 그럼, 이게 마지막 의심이라는 건…….”
“펌에 돌아가면 탁 비가 계약서를 줄 거야. 서명해. 물론 너에게 의지가 있다면.”
“진심이십니까?”
잠시간 뜸을 들인 세헌은 이내 가볍게 눈짓했다. 조금 풀이 죽어 있던 윤신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터다. 하지만 두 달여 간이나 붙잡아 주긴커녕 시선도 남기지 않던 세헌을 의식하느라 마음이 들쑥날쑥했던 것에 비하면 한고비를 넘은 것은 맞았다. 로펌의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촘촘해서, 두 달이 2년 같았다.
“감사합니다. 받아 주셔서. 저 정말 잘할게요.”
“넌 고민 안 해? 나에 대해서 따져 보라고 했잖아.”
“들어와서 그런 고민을 할 거면 애초에 안 들어왔어요.”
그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봐, 너 단순하지.”
칭찬한 것도 아니지만, 욕되게 하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은연중 안도한 윤신이 슬쩍 미소 짓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 얼굴에 서서히 의문이 깃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갑자기 아냐. 쭉 지켜보고, 데리고 있어 볼 만하겠다는 판단이 섰을 뿐이야.”
“얼굴도 잘 안 보여 주셔 놓고. 저만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잖아요.”
왜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건지, 윤신은 자신이 한 말인데도 내심 당황스러웠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으나, 그걸 설명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세헌이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도 묘하게 들렸던지 한쪽 눈썹을 흘긋하며 물끄러미 쳐다보기에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쿨럭, 헛기침한 윤신이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럼 저기,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세헌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진 모양인지 바로 응답했다.
“일단 짚고 넘어갈 게 있어서 따로 식사하자고 했어.”
“듣겠습니다.”
“4년 차. 알겠지만 난 파렴치한 짓을 가끔 해. 물론 꼭 그래야 할 경우에만.”
“압니다.”
“구체적으로 알아?”
“약점을 이용해 누군가를 겁박하거나, 내실 있는 회사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기도 하시죠.”
맞는다는 듯 눈을 마주쳐 준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넥타이를 좀 더 조이고, 소매의 커프 링크스 위치를 제대로 맞추는 등의 행동을 하는 모습이 꽤 능숙해 보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는 매 순간 근사했다.
“기업의 약점은 물론이고, 상대측 원고 혹은 피고를 포함한 그 주변뿐만 아니라 변호사, 검사, 꼭 필요하다면 재판 배속 판사 약점까지도 난 무조건 찾아내. 거래와 협상, 편법을 매우 좋아하고, 거짓말에 능숙하기도 해. 없는 증거를 만들어 낼 정도의 밑바닥은 아니지만, 있는 걸 못 본 척하는 일은 잦지. 안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면 범법은 아니니까.”
“앞으론 그걸 제가 따라 해야 한다는 건가요?”
손의 움직임을 멈춘 세헌은 딱 잘라 말했다.
“네가 그럴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바쁜 시점에 널 따로 데리고 나와 밥 먹을 일도 없었어. 넌 그냥 네 식대로 일을 해. 할 수 있는 일만 줄 거니까. 물론 가끔 내가 너한테 내 방식의 뭔가를 지시할 순 있어. 명령은 내가 했지만 만일 그게 대외적으로 발각된다면 모든 책임은 4년 차 네가 지게 될 거야. 난 네 사수지 보모가 아니야. 여기까지. 외웠어?”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다시는 내 판단에 대해 함부로 입 대지 마. 너한테 절대 같은 건 없어. 내가 그러겠다고 결정한다면 넌 나랑 자는 거야.”
대충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감이 왔다. 어쏘에겐 파트너의 말이 곧 법이라는 뜻인 듯했다. 다만 예시가 당황스러워 잠시간 침묵했다. 제 생각이 읽힌 건지 세헌이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그딴 표정 짓지 마. 네 아랫도리에 관심 없으니까.”
서로의 힘을 재 보듯 고요한 시선이 오갔다. 할 말은 하는 편이라 앞으로 꽤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이 고민을 아는 모양인지 세헌이 윤신의 눈길을 받아 주다가, 곧이어 말했다.
“이건 법에 저촉됩니다, 이건 도의에 어긋납니다, 이건 변호사 윤리에 위배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건방지게 이딴 소리 하는 꼴 난 못 봐. 방 빼야 할 거야.”
“틀렸다는 말 듣기 싫어하시는군요.”
“듣기 싫은 게 아니라 들을 이유가 없는 거야. 난 틀리는 일이 없거든.”
“명심하겠습니다.”
“뭐, 이게 처음으로 내가 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널 받아들이는 거.”
자신을 말하는 거냐는 듯 윤신이 스스로를 향해 손가락을 겨눴다. 세헌은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런 반응만으로도 윤신에게는 충분히 답이 됐다. 멋쩍게 미소 짓자,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 모양새를 보니 역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항해는 그다지 순탄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오늘을 기점으로 닻은 올린 셈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손해인 거 같은데. 딜을 새로 해야 하나.”
“저 육아하는 조건으로 송 수석님이랑 딜 하셨어요?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내가 계속 원했던 거. 일종의 자유.”
추상적인 대답이어서, 윤신이 직접 답을 찾아야 했다. 번뜩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있었다.
“혹시 배당 비율인가요?”
세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윤신에게 확신으로 다가왔다.
“고로 제가 돈이 된단 거네요? 돈 좋아하세요?”
“돈은 승리의 전리품이야. 싫어하진 않아.”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말씀같이 들려요.”
“남들 어질러 놓은 거 뒤치다꺼리하느라 쓸 시간이 없거든.”
돌연 입을 꾹 다문 윤신은 그가 본인을 태생적 을이라고 생각한다던 탁 비서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주 정확하게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복잡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앉아 있자, 할 말을 모두 마친 세헌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굼뜨게 뭘 하고 있느냐는 듯한 한심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말귀 알아들었으면 일어나. 볼 서류가 산더미야.”
그제야 윤신도 벌떡 일어서 그의 재킷과 제 것을 함께 챙기고는 객실의 문을 열었다.
* * *
법무 법인 도국 사옥 건물 옆에는 로펌 소속 사단 법인의 사무실로 쓰는 별관이 있었다. 윤신은 지금 그곳의 사회 공헌 팀 사무실에 와 있었다.
이 사단 법인은 10년 전 설립 허가를 받은 뒤, 정식 봉사 및 기부 단체로 기획 재정부의 승인까지 얻어 내 꾸준히 변호사들의 사회봉사를 독려했다. 이사장은 도국의 대표 변호사였고, 이사진은 송 변호사를 포함한 파트너 변호사 몇 명으로 구성됐다. 세헌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세헌은 매년 일정 금액을 기부할 뿐 활동 이력이 거의 없었다. 펌에서 수년을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별관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는 듯했다.
그는 이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할당된 시간을 윤신이 대신 채우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세헌이 직접 명령한 첫 번째 임무였다.
‘내 적성에 맞는 일 줬는데, 왜 단물 빼 먹히는 느낌이지.’
차분히 호흡한 윤신이 미려한 그의 얼굴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중년 여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 일은 매달 하루씩 이행하는 사업으로, 고령자, 저소득자, 경력 단절 여성 등 법이 규정하는 사회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해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였다. 유선 또는 인터넷 신청을 받고, 면담으로 진행했다. 여자와 눈을 마주쳐 준 윤신은 친절하게 설명을 계속 이어 갔다.
“어머님. 그…… 생활 근거지, 그러니까 사는 곳을 떠나서 한동안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분들을 부재자라고 하는데요.”
문의 내용은 그런대로 간단한 거였다. 여자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전 재산을 털어 1500만 원가량의 돈을 사업 자금으로 빌려주었는데, 채무자가 실종이라도 된 건지 긴 시간 연락 두절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경우 채무자에게 아파트 내 상가가 한 채 있었다.
윤신은 모니터에 관련 법의 내용을 띄워 보여 주었다.
“여기 보시면 민법 22조에 이 부재자 재산의 관리라는 게 있어요. 부재자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니까 생사가 확실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자산을 관리하기 위한 건데. 쉽게 말해 가족뿐만 아니라 채권자들도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관리자가 되어서 내가 빌려준 돈만큼 받을 수도 있게 되나요? 그 양반한테 아파트 상가에 가게가 하나 있어요. 1층 건물인데. 그게 본인 거예요. 그거 믿고 어디 도망은 안 가겠거니 하고 빌려준 건데 감감무소식일 줄은…….”
“그렇죠. 그렇다고 임의대로 재산을 처분을 할 수는 없지만, 관리를 하실 순 있게 돼요. 재산 관리인 선임을 청구하시고, 관리인으로 지명해 달라고 법원에 요구하세요. 그러면 그 건물을 또 다른 임차인에게 임대를 해서, 월세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회수할 방법을 찾은 듯하자, 중년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스쳤다.
“그럼 도국에서 해 줄 수 있어요? 변호사 총각이 해 주면 되겠네.”
그 말에 윤신이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 펌에선 이런 개인적인 사건을 수임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 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아는 변호사님께 말씀을 드려 놨거든요. 가서 제 이름 대시면 돼요. 잘 도와주실 거예요.”
“도국에서 해 주면 참 좋겠는데·…….”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이 펌에 들어오기 전에 함께 일했던 법률 사무소의 주소와 사무장 연락처를 적어 준 윤신이 아주머니에게 내밀었다. 못내 아쉬운 듯했지만 상대방은 이내 고맙다는 듯 몇 번이고 허리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윤신은 더 도와줄 수 없는 아쉬움과, 그래도 어느 정도의 도움은 주었다는 뿌듯함이라는 상이한 감정을 느끼며 다음 상담자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한번 정독하긴 했으나, 정확한 내용의 숙지를 위해 한 번 더 훑었다.
“별거 중이고. 남자가 장기 미취업자네.”
체크해 둔 법령을 모니터에 띄운 윤신은 내선 인터폰을 들었다. 그는 다음 상담자가 들어와도 좋다고 언질 했다.
수 초 후, 노크 소리와 함께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실행력 있게 본론부터 꺼냈다.
“대충 작성하신 서면은 봤습니다. 아내분이 잠시 별거하기로 해 놓고 기한이 지났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질 않는다고요. 얼마나 별거하신 거예요?”
“8개월 정도 됐어요. 원랜 서너 달 정도만 따로 살아 보자고 했거든요.”
“음, 예정보다 기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네요. 혹시 문서 같은 형식으로 두 분이 하신 약속에 대해서 남겨 둔 게 있나요?”
남자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건 없고. 아, 녹음본이 있어요. 당시에 이혼을 하네 마네 좀 갈등하던 때라서 제가 혹시 몰라 그 사람이랑 한 대화를 전부 녹음해 뒀거든요. 그게 아마 예전에 쓰던 휴대폰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녹취 같은 게 법적으로 효력이 있나요?”
“다행히 당사자 간의 녹취는 증거력이 있어요. 별거 계기는요?”
“제가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공부를 오래 해서요. 고생, 고생을 하는데도 성과가 없으니까 갈등이 계속 쌓였어요. 그래서 일단 시간을 갖고, 마음 추스른 뒤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한 거였고요. 이제 전 정리가 다 끝나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와이프가 감감무소식이에요. 짬짬이 하던 아르바이트도 관두고, 휴대폰 번호도 바꿨더라고요.”
“서류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아내가 일방적으로……. 남편분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예요? 상담 신청서에 대충 적혀 있긴 한데, 너무 추상적으로 기재돼 있더군요.”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처가 식구들은 별거하기로 했으면 끝난 거 아니냐면서 이혼 조정 얘기를 하더라고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거기까지 들은 윤신은 아까 전 다른 상담자에게 그랬듯 화면에 띄운 법령을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모니터를 주시하는 상대방에게 이어 설명했다.
“들어 보신 적 있을 텐데. 부부간에는 동거 의무가 있어요. 게다가 처음 약정하신 별거 기간이 4개월이라면, 그 두 배가 지난 지금 아내분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계신 게 맞아요. 이 동거의 안에는 정신적인 의미와 육체적인 관계까지 포함하고 있고요.”
“둘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거죠?”
윤신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아내 쪽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남편은 이행했네요. 이혼 의사가 없다면 잘하신 거예요. 만에 하나 의견 조율이 안 돼서 소송까지 가게 된다 해도 남편분께서 가정을 지킬 의사가 분명하다는 걸 입증할 증거가 있는 셈이니, 부인께서는 그 소송을 이기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다만, 이런 경우 전 일단 대화를 권해요. 법을 어겼으니 집으로 들어오라고 강제적으로 권하면 아내분은 더 반발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십중팔구 관계가 더 어그러지더라고요. 변호사 사무실이 아니라 부부 상담 센터 쪽을 우선 추천해요. 현재 거주하는 동네에도 괜찮은 곳이 몇 군데 있어요.”
그가 최대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더 진솔하게 설득하려던 때였다. 바깥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낯이 익은 변호사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헌의 밑에 있는 시니어 변호사였다. 그도 마침 이곳에 볼일을 보러 와 있었던 모양이다.
윤신이 잠시 기다려 달라는 듯 남자에게 눈짓하는데, 그사이 시니어가 입을 열었다.
“도 변, 강 수석님이 급히 찾으신다는데. 본관으로 바로 가 봐야겠어. 10분 주신다고 했어.”
“마침 이분이 마지막 상담이라서요. 정리하고 가겠다고 말씀 전해 주세요.”
“참견하려는 건 아닌데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네. 부르실 때 바로 가는 게 좋을 걸. 그 뒤에 팀 회의가 있으셔.”
“회의요? 처음 듣는데요.”
“전체 회의는 아니고. 기업 상사인데 전문 분야별로 우리 팀 시니어 몇 명이 일단 붙었어.”
오는 길에 시간을 확인했던 바로는, 별관부터 본관까지 보통 걸음으로 정확히 9분가량이 걸렸다. 시니어가 이야기를 전달받고 난 뒤 흐른 시간도 고려해야 하고, 자신이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도 추가로 소요될 테니 전력으로 뛰지 않으면 빠듯했다.
“어, 저 그럼 죄송한데 혹시 마무리해 주실 수 있나요? 부탁드립니다. 별거 후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록 아내분이 귀가하지 않고 있대요. 현재 친정 식구들하고만 접촉이 가능한 상태인데, 이분께선 이혼 의사가 없으시답니다.”
모니터를 가리키며 간단히 설명하자 경력이 많은 시니어도 바로 사건 파악이 된 건지 알겠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윤신을 위해서 귀찮은 일을 감수하고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받은 명령이 세헌의 부름이기 때문일 터다. 뭐가 됐든 고마웠다. 윤신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저분도 저희 펌 변호사시거든요. 저보다 경력도 훨씬 많으시니 잘 도와주실 거예요. 정말 죄송한데 먼저 실례합니다.”
천만다행으로 상담자가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윤신은 접견실 내의 두 사람에게 다시 공손하게 인사하고 민첩하게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면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분……. 될까 모르겠네.”
점점 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턱에는 숨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7층 대회의실이 북적거렸다.
기업 상사 사건 소송 관련 회의를 앞두고, 팀의 변호사들이 준비로 매우 분주했다.
모 사모 투자 전문 회사가 컨소시엄 계약[6]을 한 상대 기업에 대하여 주식 교환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제기한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해당 소송 대비 회의였다. 본래는 송무 팀으로 가야 하는 사건이었으나, 클라이언트와 잘 아는 사이인 미희가 중간에서 다리를 놔 직접 세헌에게 부탁해 넘겼다는 것 같았다.
별관에서 돌아온 윤신이 숨을 헐떡이며 회의실 앞에 섰다. 세헌이 사무실에 없기에 이쪽으로 온 건데, 이곳에도 그의 그림자는 안 보였다. 윤신이 선배 변호사 한 사람을 붙잡고 그가 어디 있는 건지 물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내 거두었다. 모두들 너무나도 바빠 보여서였다. 여긴 전쟁터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생각보다 활력이 넘쳤다.
“재무제표 이거는 보기 좋게 폰트 좀! 넌 이 새끼야, 가독성이 이게 뭐야! 우리 건 두고, 강 수석님 건 다시 뽑아. 가독성 안 좋으면 안 읽고 던지시는 거 몰라? 4분 줄게. 뛰어! 그리고 수석님 드릴 회사법 최종 정리하신 분! 회사법 최종!”
“그거 내가 했어! 브리핑도 내가 할 거야. 우리 팀 주니어 몇 명 더 뽑자고 누가 건의 좀 넣어라. 이런 잡일 좀 시키게. 우리가 회의 준비할 짬밥이냐?”
“판례! 판례, 판례!”
“뽑고 있습니다! 탁 비서가 가지고 올 겁니다!”
물끄러미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던 윤신은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자신이 사건을 브리핑 하던 때와는 또 다른 공간 같았다. 그는 이곳에 들어온 이후 계속 그런 감정을 느꼈다. 똑같은 자격증을 따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뭔가 자신과는 서 있는 세계가 달라 보였다.
늘 대형 로펌은 변호사들이 살찌는 곳이고, 대한민국 사법 권력의 거대한 한 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삭막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레짐작했던 것보다는 이들의 일이 훨씬 건강하게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도와주어야 하나, 그런데 세헌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나, 그래도 된다면 이 기업 상사 소송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도대체 뭐부터 해야 하나, 자신이 설 자리가 맞기는 맞나.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윤신이 일단 서류 배포라도 돕기 위해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 마른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옷 위로도 상대방의 보드라운 살갗이 느껴졌다. 헉, 하는 소리를 삼키며 뒤를 돌아보자 기다리던 세헌이 서 있었다. 사무장이 그의 반걸음 뒤에서 뒤쫓으며 급히 서류 봉투를 건네다가, 물건을 받아 든 그가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짓하자 꾸벅 인사하고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강 변호사님? 어디 다녀오세요? 사무실에 안 계시던데요.”
“그러는 넌 어딜 들어가.”
“선배님들 다들 너무 바빠 보이셔서요.”
“저게 얼마짜리 송사인 줄은 알아? 넌 아직 낄 군번이 아니야. 그나저나 10분 줬잖아. 너 늦었어, 안 늦었어.”
그제야 죄를 인정하듯, 윤신이 머쓱하게 답했다.
“4분 늦었습니다. 진짜 열심히 뛰었거든요. 그런데 체력의 한계를 좀 느껴서…….”
그의 잘생긴 눈썹이 슬쩍 구겨졌다. 그러나 본인도 잠시 자리를 비웠던 덕에 윤신의 지각이 어느 정도는 허용 범위였던 듯했다.
“일단 따라와.”
미련 없이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낸 그가 손가락을 까딱, 했다. 앞서가는 세헌의 뒷모습을 조용히 보던 윤신은 그의 체온이 닿았던 제 어깨 위를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손바닥으로 짚어 봤다. 여전히 그가 주었던 부드러운 기운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 안에 입성한 세헌은 서류 봉투를 던져두고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아주 조금, 숨결에 흐트러진 기운이 남아 있는 윤신을 빤히 주시했다.
“4년 차.”
“네, 수석님.”
“너 어딜 싸돌아다녀. 자리 안 지켜? 내가 너 먼저 찾아다니게 만들지 마.”
“아, 별관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무료 법률 상담 스케줄이 매달 넷째 주 금요일이라서요. 그런데 그게 오늘이더라고요.”
그는 답이 없었다. 그저 냉정한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팔짱을 척 꼈다. 집요하고 끈질긴 눈길이 부담스러워진 윤신이 괜히 복도로 난 창문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거의 매일 내려가 있던 블라인드가 오늘은 끝까지 걷어 올려진 채였다. 그 차이를 인지하고 다시 세헌을 봤을 때, 그는 여전히 같은 기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차 싶어진 윤신이 바로 말을 고쳤다.
“자리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한 시간이면 떡을 치는 일의 꼬박 세 배를 쓰고 와 놓고. 별관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대충 자문만 해 줘도 될 걸 오지랖 피웠겠지. 사단 법인 일은 아무도 너처럼 성실하게 안 해.”
“저 어떻게 하는지 보셨어요?”
“봤겠어? 난 종일 사옥에 붙어 있었어.”
그만큼 제 행동 패턴이 뻔하다는 뜻일 터다.
“그게, 성의껏 하려고 한 거예요. 다들 곤란한 분들이시잖아요. 아울러 변호사님 이름으로 기록이 올라가는 일인데 대충 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싶어서요.”
“그래, 감동적이야. 눈물이 날 것 같다. 앞으로는 밤새우고 내일 와.”
“아닙니다. 시간 분배 잘하겠습니다.”
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세헌은, 그 이상 윤신을 탓하진 않았다. 그는 팔짱을 풀곤 한쪽 손을 뒤편으로 뻗었다. 잠깐 내려 두었던 서류 봉투를 다시 집어 들더니 윤신의 앞으로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든 윤신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이게 뭡니까?”
“네가 맡을 사건.”
“헉. 저 사건 주시는 거예요?”
신뢰와 같은 무거운 감각들은 서서히 직물을 짜듯 공들여 만들어 내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믿어 보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저절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첫 씨와 날을 직기에 놓고 천을 짜기 시작했다.
윤신은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하얀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를 증명하듯 양 뺨에 발그레하게 홍조마저 올랐다.
꿈과 현실의 기로에 서 있는 윤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헌의 뺨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곧이어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놀랍게도 심리적으로 조금 몰리는 모양새였다.
이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신은 서류 봉투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사건의 내용들을 눈대중으로 쭉 훑었다. 이윽고 고개를 번쩍 든 순간, 정면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의외로 세헌이 먼저 피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석님?”
“프로 보노야. 네가 정리해.”
“정말 이거 제가 해요?”
“여기 와서 프로 보노 몇 건 해 봤잖아. 지금 보는 것도 두 건 있고. 뭘 새삼.”
“지금까지 한 건 펌에서 뺑뺑이 돌린 사건이고요. 이건 변호사님이 직접 주신, 프로 보노죠. 누 끼치지 않게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는 양 눈살을 구기고 있던 세헌이 별안간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다른 팀에서 넘겨준 프로 보노 두 건은 다시 해당 팀에 송환해. 앞으로는 내 명령만 듣고, 내가 주는 것만 해. 넌 내 팀이야. 내 허락 없인 차출도 안 돼.”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세헌은 책상에서 일어나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아기 새처럼 자신만 보고 있는 윤신을 냉정하게 스쳐 지나갔다. 대화가 일방적으로 끊길 조짐이 보이자 내심 당황한 윤신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턱, 붙잡았다. 뼈가 도드라진 딱딱하고 단단한 손목에 낯선 손바닥 표피가 닿았다. 그 순간, 세헌이 확 고개를 돌렸다.
붙들린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꽤 신경질적이었다.
놀란 윤신이 손을 떼어 내곤 꾸벅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손대지 말라고 하셨는데.”
세헌은 제 큼지막한 손으로 반대편 팔목의 붙잡힌 자리를 닦듯이 가볍게 매만지곤 답했다.
“궁금한 거 있나? 나 회의 들어가야 돼. 30초 내로 질문.”
“저기, 강 변호사님.”
“25초.”
“아직 5초 안 됐거든요.”
“10초.”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가 숫자를 계속 마구잡이로 줄이는 바람에 괜스레 초조해져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끌어 올리자마자 세헌의 날렵한 눈매가 자신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왠지 그 눈길의 끝이 제 눈이 아니라, 입술에 닿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그…….”
기분 탓 아닌 거 같은데.
“시간 끝.”
“30초 안 지나지 않았나요?”
“그게 질문이야? 지났어, 방금.”
흘긋 시계를 향해 턱짓한 그는 기다란 다리를 거침없이 뻗어 방을 나섰다.
타악. 문이 닫혔다.
삽시간에 주인은 사라지고, 손님만 남겨진 주객전도의 상황에서, 윤신은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건 이 안을 좀 더, 관찰하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단상이었다.
두 달쯤 전 여기 처음 들어와서 세헌을 기다렸을 땐 너무 긴장해서 자세하게 살피지 못했다. 이제 와 같은 자리에 혼자 있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그날 그의 책상 위에서 보았던 〈위대한 유산〉이 떠올랐다. 그가 정말 그 책을 자신 때문에 다시 읽었던 건지, 확인하고 싶은 의미 모를 충동이 일었다.
‘어떡하지.’
창문 너머 비서실을 슬그머니 살핀 윤신은 뭔가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의 준비 때문인지 탁 비서도, 사무장도, 사무 보조 직원들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었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게 서류철을 품에 끌어안은 윤신은 세헌의 책상 위를 넘봤다. 그러나 그 위엔 노트북 두 대, 판례집 몇 권이 놓여 있을 뿐 그 책은 없었다.
‘하긴 아무리 바빠도 두 달이면 짬짬이 읽고도 남았겠지.’
괜히 서운한 기분을 느끼며 돌아서던 윤신의 눈동자에 책장에 꽂힌 〈위대한 유산〉이 비쳤다. 그는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가 두 권 중 상권을 꺼내 안을 펼쳐 보았다. 세헌은 책을 깨끗하게 읽는 편인지 안에 밑줄을 쳐 둔 자리도, 인덱스 스티커 따위를 붙여 놓은 곳도 없었다. 아쉬움을 삼킨 그가 다시 책을 넣어 두려던 찰나였다.
툭. 아주 얇고 길쭉한 금색 선으로 된 책갈피가 책 아래에 걸렸다. 그걸 끌어 올려 해당 쪽을 펼치자, 익숙한 글귀가 윤신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사람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아무런 도움이나 동정의 손길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 죽어 간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7]
자신이 법정에서 인용한 문구였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얼굴이 뜨뜻해졌다. 손등으로 뺨을 눌러 보던 윤신은 빠르게 책을 넣어 두곤 도망치듯 그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맞은편의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곳에 온 뒤 단 한 번도 내려 본 적 없던 창의 블라인드를 끌어 내렸다.
완벽하게 바깥세계와 차단된 뒤라야,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정말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이 상황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럴싸했다.
대문호가 쓴 아주 유명한 책일 뿐이고, 거창한 의미는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매일 일에 파묻혀 쥐어짤 시간조차 없는 그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만든 듯해, 그게 살짝 기분이 묘했다.
조금 전, 세헌의 시선이 제 입술에 정확히 닿았던 순간을 본능적으로 되새긴 윤신이 입술을 질끈 감쳐물었다.
“대체 왜…….”
왜 내가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창피한 기분이 들지.
조금 전 강세헌과 닿은 자리라곤 손목밖에 없는데 마치 키스라도 한 느낌이다.
난감함이 조금 섞인 긴 숨을 내뱉던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