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수십 명은 족히 수용 가능한 넓은 대회의실 정중앙에 20여 명 이상이 착석할 수 있는 타원형 목재 탁자가 위치했다. 프로젝터를 정면으로 한 각각의 좌석에는 특수 충전재로 제작된 중역용 의자가 가지런히 채워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와 태블릿 PC가 놓인 채였다.
임원진들 자리 후면에는 어쏘 변호사들과 직원들용으로 비치된 사무용 가죽 의자가 두 줄로 나란히 비치됐다. 그 옆에 있는 고급스러운 앰프와 전자 기기들 또한 내부 공간의 위용을 자랑했다. 파트너 변호사가 필히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회의인 경우 이곳에서 진행한다는 듯했다. 그들의 품격에 맞게 물품들을 값비싼 것들로 채워 넣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선에서 끝났다면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윤신도 주눅 들지는 않았을 터다.
복잡한 심경을 담은 그의 시선이 가장 상석 뒤쪽 벽에 걸린 추상 미술 그림들에 닿았다.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몇 년 전에 경매로 팔렸다는 기사를 본 거 같은데.’
해외 경매 소식으로만 접할 수 있는 저런 유명 작가의 그림들은 못해도 몇백억을 호가했다. 대표실도, 파트너 집무실도,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도 아니고 직원들만 쓰는 회의실에 비싼 그림을 여러 점 걸어 둔 심사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저 그림 속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이 움직이며 꼭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아주 중요한 분기점에 자신이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법정에 설 때보다도 긴장됐다.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감쳐문 윤신은 트랙패드를 움직였다. 그러자 정면 스크린에 윤신이 미리 간단하게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용 화면이 떠올랐다. 사건에 관한 증거물들, 그리고 쟁점 따위들이 가독성 좋게 구성되어 있었다.
아직 정식 출근 시간 전이었다. 혼자 이쪽으로 먼저 들어와서 테스트를 준비하는 윤신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이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장소가 꽤 심리적 압박을 주어서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틀 남짓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꼬박 새웠던 탓이다.
몸을 슬쩍 일으키자 눈앞이 핑 돌았다. 그냥 잠만 못 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모든 시간 동안 미친 듯이 활자를 읽고, 내용을 정리하는 데 썼더니 피로가 누적된 듯했다. 겨우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데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탁 비서였다.
그는 윤신이 부탁했던 서류들을 가져와 선배들이 앉을 자리에 한 부씩 내려 두었다. 그러고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을 윤신의 앞에 내어 주었다.
“드시고 하세요. 엄청 쓰게 내려서 정신 번쩍 들 거예요.”
마른세수를 한 윤신이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표정으로 묵례하곤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은혜 잊지 않을게요. 사무장님께도 일찍 나와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은혜라고 할 게 있나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건데요.”
“하지만 전 지금 정식 이 펌 소속 변호사가 아니잖아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저를 도와주셔야 할 이유가 없죠, 아직은요.”
탁 비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런데, 그 자료를 다 읽으신 거예요? A4 용지 만 장이 넘는 건데. 페이퍼 제가 준비해서 알아요.”
“솔직히 양이 너무 방대해서 다 읽진 못했고요. 분류를 나눠서 꼭 필요한 부분들만 선택적으로 속독했어요. 그래서 좀 걱정되네요.”
대답 뒤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탁 비서가 윤신의 옷차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양 소매를 걷어 올린 하얀 드레스 셔츠와 목에 어설프게 걸려 있는 넥타이가 공평하게 조금씩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어차피 한숨도 못 주무셨을 거고. 변호사님 샤워실에서 겨우 씻기만 하셨나 봐요?”
“네. 뭐 문제 있나요? 가끔 위아래 층에 밤 지새우는 분들 계시던데요.”
“그게 아니라, 앞으론 여벌 옷 가져다 두세요. 같은 거 두 번 입는 꼴 못 보세요.”
“강 수석님 말씀인가요?”
여부가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그 때문에 윤신은 좀 혼란이 일었다. 자신이 봐 온 세헌이라면, 어쏘 변호사들의 옷차림 같은 거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쏘 옷차림도 신경 쓰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기억력이 워낙 좋으시니까요. 누군가를 이틀 연속으로 보는데 그 사람이 어제오늘 똑같은 옷차림이다. 그럼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하는 본인이 어제 일을 오늘 또 하는 기분이 드시는 거 같아요. 하루가 반복되는 느낌? 예전에 다른 주니어분이 지적받으셨던 기억이 나서요.”
“단순 지적?”
“‘내 눈앞에서 꺼져.’라고 하셨죠. 그리고 계속 꺼지게 됐어요. 기업 상사 팀으로.”
듣고 있는 윤신의 표정이 꽤나 암담해 보였던지, 탁 비서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어, 다행히 해고는 아니었어요.”
“충고 고마워요.”
세헌 같은 바쁘고 까다로운 이들에게 충분히 있을 법한 징크스 같았다. 윤신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구겨 넣고, 셔츠를 최대한 단정하게 추슬렀다. 그러자 고맙게도 탁 비서가 제 넥타이를 건네주었다. 그걸 목에 두르고 매듭을 짓던 와중, 다짜고짜 제 타이를 풀던 세헌의 싸늘한 얼굴이 떠올라 괜히 더 꽉 조여 맸다.
그 모습을 본 탁 비서가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이며 흥미로워하는 눈길을 흘렸다.
“혹시 강 수석님 목 조르는 상상이라도…….”
“아뇨, 전혀.”
“이상하다. 다른 주니어분들은 다들 하던데요. 저도 종종 해요. 일을 엄청 시키거든요.”
이제 와 맞는다고 할 수가 없어 머쓱해진 윤신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두 분 어떤 사이예요? 보니까 강 변호사님이 꽤 편하게 대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아, 저요? 중학교 후배예요. 송 변호사님, 강 변호사님. 두 분 다 제 선배시죠.”
“어, 그래요? 그런 인연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요.”
“나이 터울이 있어서 셋이 같이 학교 다닌 적은 없어요. 예전에 송 수석님이 모교 후배들 중 요보호 아동 몇몇한테 재정 지원을 하셨어요. 저랑 강 변호사님은 감사하게도 그분 도움받아서 생활했는데 그때부터 재단 통해 서로 알긴 알았죠. 친하진 않았고요.”
거기까지 들은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보호 아동.
18세 미만의 고아란 소리다.
세헌의 가정 환경에 대한 소문도 여기저기에서 꽤 들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들이다, 해외 유수 대학의 교수다, 그 정도가 주류였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가 되기를 선택했을 땐 국내 유명 로펌 대표의 사생아란 이야기도 돌았던 모양이었다. 개중 어느 것도 본인이 인정한 적은 없는 걸로 알았다.
“강 변호사님 부모님이…… 안 계시나 봐요?”
질문하는 윤신의 표정이 매우 복잡했던지 탁 비서가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아, 이거 모르시나? 재벌가 사돈이신 데다 송 변호사님이 직접 데려와 강 변호사님한테 꽂은 분이라 이런 정보 빠삭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혹시 제가 말실수한 건가요?”
“그거 강 변호사님이 감추는 부분인가요?”
“썩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말씀하길 즐기지도 않으시죠.”
“그럼 실수하신 게 맞는 거 같네요. 전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그가 고맙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상사의 사적인 이야기를 쓸데없이 노출한 것에 대한 곤란한 기운이 제게까지 전해지는 바람에 윤신은 계속 이 질문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저, 이 테스트요. 다들 거치시는 건가요?”
탁 비서가 반색하며 답했다.
“이 정도는 기본 중 기본이죠. 관례라고 해야 할까. 어쏘 변호사 처음 입사하면 보통은 각 팀에서 모의재판을 열어 망신을 주거든요. 기 팍 죽이려고요. 그런데 강 변호사님은 그런 거 좀 귀찮아하셔서 재판까진 안 해요. 하셔도 밑에 시니어 변호사들한테 맡기시는 편이고요. 맞다, 오늘은 웬일로 참석하신다네요. 왜지?”
“한가해 미치겠나 보지.”
대화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난 진원지를 향해 돌아보았다. 멀리서 인기척이 조금 들리나 싶더니 문간에 예의 세헌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정갈하게 갖춰 입은 스리피스 슈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발끝을 따라 길게 지는 그의 그림자 모양마저 훌륭했다.
그의 뒤에는 사옥에서 오며 가며 몇 번씩 마주쳤던 같은 팀 시니어 변호사 몇몇이 줄줄이 서 있었다. 얼추 눈으로 세어 보자 팀 소속 변호사 일부인 10여 명 정도만 참석한 듯 보였다. 30대부터 50대까지 연차도, 세부 전문 분야도 다양했다.
자신을 심사하러 온 저들의 존재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들 칼같이 정갈하게 받쳐 입은 옷들과 표정에서부터 드러나는 냉철함이 윤신의 전신 근육을 바짝 긴장하게 했다.
저 노련한 이들마저 손바닥 위에 놓고 명령을 일삼는 세헌에게 왜 굳이 와 달라고 객기를 부렸던 건지, 뒤늦게 후회가 됐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탁 비서님. 저기, 브리핑 하는 동안 잠깐 회의실에 있어 주시면…….”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윤신이 탁 비서에게 손을 뻗자, 매정하게도 그는 윤신에게 ‘약속 지켜 주세요.’ 하듯 눈인사를 하고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하는 수없이 세헌에게 시선을 돌리니, 뭔가 영 마음에 안 차는 표정으로 제 쪽을 보고 있어 목구멍이 깔깔해졌다.
쿨럭, 마른기침을 토해 낸 윤신이 뭔가 말하려던 때였다. 세헌이 앞서 입을 열었다.
“4년 차, 넌 아무한테나 옆에 있어 달라고 조르는 게 취미야?”
“예? 그럴 리가요.”
“지금 내 눈으로 본 게 있는데 ‘그럴 리가요’?”
“아, 방금 그건 여기에 제 아군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라 그런 거지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물론 수석님이 적군이란 뜻은 아니고요.”
“확실해?”
“진짜 아닌데.”
“됐으니까 주루 방해하지 말고 나와.”
비켜 주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윤신을 지나친 세헌이 가장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움직이길 기다리며 공손한 태도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변호사들도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자리를 채워 나갔다.
그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 페이퍼를 보는 사이 나지막이 숨을 고른 윤신은 자꾸 들뜨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열심히 되뇌었다.
최선 다해서 열심히 준비했잖아. 실수만 안 하면 돼.
이윽고 ‘후.’ 하고 심호흡한 뒤, 입사 선배들의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도윤신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시니어들 대부분 윤신이 배포한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몇몇은 짧은 시간 내에 요점 정리를 잘해 두었다며 꽤 후한 평가를 내리는 듯했다. 추상 미술 그림 아래 비딱하게 앉은 세헌만이 앞에 선 윤신에게 또렷하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윤신이 뭔가 더 인사치레를 이어 가려는 기색이자, 그는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이를 바로 잘랐다.
“잡스러운 거 생략하고 그냥 시작해. 다들 바쁜 사람들이야.”
입술을 달싹인 윤신이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빛이 들어오는 포인터를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 건은 공사 대금 청구 소송 건입니다.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원고가 피고에게 소장을 냈습니다. 피고이자 건축주와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실물 계약서로 남아 있지 않아서 구두 계약인 녹취록을 제출했습니다. 실제로 공사는 진행됐고요, 변제 기한이 지났는데 대금을 지급받지 못한 사건입니다. 소송 요건 모두 충족합니다.”
서류를 훑어보던 시니어 한 사람이 마이크를 켜고 질문했다.
“서면 정리는 깔끔하게 잘돼 있네. 변제 기한은? 통상 공사 대금 잔금은 건물 인도할 때 하는 게 일반적이야. 이 건의 경우 피고가 건물이 완전히 증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기한이 아직 안 됐으니, 돈을 줄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어떻게 해결할 거야?”
“공사가 중단된 게 벌써 6개월이 넘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건물주인 피고 측이 마무리 시공을 못 하게 만들었다는 정황이 있고요.”
스크린의 화면을 뒤로 넘긴 윤신이 증거를 제시했다. 실제로 소송당한 피고가 해당 토지 주변에 울타리 따위를 쳐 놓기도 하고, 건축 자재들을 망가뜨려 놓기도 했던 정황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인근에 야생 동물들을 통제하려고 취한 조치라고 주장하는 상태였다.
윤신은 포인트로 사진들을 짚어 주며, 덧붙였다.
“또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상황이 바뀌면 약정 기한도 그때부터 바뀌어 변제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판례가 존재합니다. 드린 페이퍼에 보시면.”
직접 쪽수를 확인하기 위해 윤신의 마른 손이 종이를 들려던 때였다. 세헌이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고 있던 펜을 데구루루 윤신 방향으로 굴려 행동을 저지했다. 뭔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기색이었다.
“잠깐.”
“변호사님?”
“그래서, 돈을 변제해 줘야 한다?”
“제가 이 사건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피담보 채권이 존재하고, 변제기가 도래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변제해야 합니다.”
대답을 들은 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 퍽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제 건너편에 있는 시니어 한 사람을 콕 찍어 가리켰다.
“자, 여기서 질문. 우린 원고일까, 피고일까. 아주 쉬운 문제야.”
서류를 황급히 눈대중으로 훑은 시니어가 자신감 있게 대꾸했다.
“원고입니다.”
‘들었어?’ 하듯 정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세헌이 이번엔 윤신에게 물었다.
“원고라는데. 왜? 발제자인 네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건이 아니라, 지급받지 못한 사건이라고 말했으니까.”
“…….”
“넌 어디 변호사야.”
“도국입니다.”
“우리 펌은?”
입술을 달싹인 윤신이 머뭇대다 겨우 음성 주파수를 토해 냈다.
“……피고를 대리합니다.”
“혹시 검사신가? 정의의 사도. 도윤신 변호사한테 딱 어울리는 옷이야. 아니면 판사일 수도 있겠군. 아, 이거저거 다 아니면 원칙을 자알 지키는 방청객일지도 모르겠네. 원칙, 좋지.”
그가 말을 이어 갈수록 마치 차가운 물을 뿌리기라도 한 양, 사위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비꼬는 것이 분명한 어투에, 자연히 다른 변호사들의 시선이 세헌과 윤신에게로 집중됐다. 하나 반박할 근거가 아주 없진 않은 윤신이 바로 답변했다.
“하지만 저한테 요구하셨던 건 변론이 아니라 이 사건 요약과 정리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 논리에도 휘말리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했던 거고요. 제가 펼친 원고의 논리를 우리가 근거 찾아 반박하면 되는 겁니다. 이 과정도 필요해요.”
“매우 필요하지. 그런데 너, 진짜 피고가 우리라고 생각해? 난 마음가짐을 묻는 거야. 누가 봐도 수십억 돈 떼인 사람이 억울하잖아. 어제 네 방에서 내가 본 정리문엔 그런 느낌이 충만하던데. 내 착각인가? 난 아직 안 읽어 봤지만 이 페이퍼도 그런 거 같고.”
순간 할 말을 잃은 윤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은 오차 하나 없는 정답이었다. 여태까지 윤신이 맡아 온 사건들은, 모두 이 원고와 같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런 피해자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고는 말 못 했다.
상대가 침묵하자 정면을 향해 있던 세헌이 몸을 슬쩍 옆으로 틀어 고개를 젖혔다. 그는 제 주변 시니어들을 쭉 훑어보고는 제일 먼저 눈길이 닿은 변호사들 두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질문했다.
“자, 거기 둘. 질문 하나 하지. 사건 내용은 서면으로도 대충 이해한 것 같고. 이 경우 피고가 어떤 대응 전략을 쓸 수 있을까? 어려운 건이 아니니까 정론으로 갑시다.”
지목받은 시니어들이 하나씩 응답을 이어 갔다.
“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공사를 했지만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단 걸 증명하는 겁니다. 건물 짓는 과정에서 반드시 몇 가지 허점은 드러날 겁니다. 하자가 생겨 보수 비용이 추가로 들었음을 입증하면 하자 담보 책임이 가능합니다. 이런 경우 공사 대금을 모두 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례가 있는 걸로 압니다.”
“맞습니다. 제가 예전에 엇비슷한 사건을 맡은 적이 있는데, 건물을 이 잡듯이 뒤져 1층 층계 일부가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던 걸 발견했습니다. 하자 부위를 확보하고, 위험성을 부각하는 언론 보도를 통해 판을 키웠습니다. 해당 시공사의 주가를 일시적으로 떨어뜨린 다음, 결국 승소했고요.”
대답을 듣고 난 세헌이 다시금 윤신을 향해 몸을 틀었다.
“도윤신 변호사.”
“네, 수석님.”
“넌 어떻게 해서 이길 생각이지? 시니어들이 말한 방법 제외하고 답해 봐.”
“지체상금으로 상계를 한다면요? 어찌 됐든 공사가 지연됐고, 손해금이 발생했을 겁니다. 채무 부담은 양쪽에 있긴 하거든요.”
“하지만 피고가 마무리 시공 못 하게 했다는 정황이 있다며. 이건 어떻게 무시할 건데.”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한 판국에 압박 면접 같은 세헌의 몰이가 계속되자, 나름대로 발휘하고 있던 순발력이 고갈되고 말았다. 열심히 대답할 말을 쥐어짜 내 봤지만, 이렇다 할 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윤신은 자신 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 이틀 줬잖아. 이건 아주 간단한 소송이야. 연차 있는 주니어들은 눈 감고도 해.”
“이틀을 주시면서, 꼼꼼하게 숙지해서 사건 브리핑을 하라고 하셨죠.”
가느다랗게 뜬 눈매에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한 실망스러워하는 기미가 서렸다.
“자, 그러니까 넌 숙제 내 준 것만 했다 이거군. 서류 달달 외우고, PPT 만들고, 요점 정리하고, 페이퍼 요약하고. 여기가 변시 준비하는 로스쿨이야? 이틀간 넌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어.”
윤신은 답하지 못했다.
“4년 차. 도국은 객관적인 변호사 필요 없어. 이기는 변호사를 원해. 시간? 모자랐겠지. 한데 클라이언트한테도 그렇게 말할래? 고객님 겨우 이틀 주셨습니다. 져서 죄송합니다. 원고에게 돈을 배상하셔야겠습니다.”
힐난을 듣는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세헌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가 자신을 테스트하겠다던 건 단순히 암기와 요약 기술이라고 1차원적으로 생각했다. 성격 나쁜 강세헌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제게 스트레스를 주려는 것일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가 그럴 리가 없는 일이다. 이 로펌은 이런 단순한 작업을 못 하는 사람이 애초에 발을 들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이런 숙제를 내 준 그 너머의 다른 목적을 읽어 냈어야 옳았다.
“입사한 지 한 달이 됐는데 넌 아직도 외부인이야. 더 기다릴까. 한 달 더 주면 돼?”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적당히 프로 보노 같은 거만 해도 돼. 검사 흉내 내면서 정의 찾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너 밖에서 하던 대로 해도 된다고. 그럼 네 마음도 편하고 여태까지 네가 시혜적으로 살아왔던 부잣집 도련님의 삶도 답습할 수 있겠지. 그런 걸 원하면 얘기해. 나도 마음 못 붙이는 어쏘 얼러 가며 일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페이퍼를 뒤로 확, 던져 버렸다. 나풀나풀 그의 머리 뒤로 떨어진 종이들이 벽면의 그림들을 부분부분 가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맨땅에 하나씩 안착했다. 이틀 고생의 결과물을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세헌 때문에 윤신은 꽤 울컥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평정을 가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더 듣지도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네가 말했잖아. 약간의 시간이면 된다고. 본인이 했던 말을 자꾸 잊네. 안 좋은 버릇인데.”
“아직 형사 사건이 남아 있습니다. 업무상 과실 치상죄입니다.”
나가려던 모양인지 몸을 반쯤 일으키던 세헌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스크린 화면을 형사 사건 요약본으로 바꿔 놓는 윤신을 고요하게 쳐다보았다.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신은 꽤 분한 듯 속눈썹을 살짝 떨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억울하긴 했으나, 그가 지적하는 부분을 이해하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말만 앞설 뿐, 아직 대형 로펌의 업무 스타일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제 마음속 본질을 탓하는 것이다. 윤신은 덤덤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테스트에 참석해 주시겠다면서요. 그건 수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직 제 시간입니다. 전 할 말이 남았거든요.”
“똑같은 일 반복될 텐데.”
“멍청했으니까 혼나야죠. 다만 제가 한 데까진 마저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시니어들이 침묵하며 눈치를 살폈다. 세헌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무슨 생각인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다리를 척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턱짓했다.
“해 봐. 이번엔 무슨 역할이셨을지 기대되는군.”
입술을 꽉 깨문 윤신이 손아귀에 쥔 포인터를 더욱 힘주어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발표를 이어 나갔다. 그런 모습을 세헌이 아주 신중하게 관찰했다.
아슬아슬한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며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았다.
* * *
뚝, 뚝. 매끈한 턱을 타고 떨어지는 물기들이 세면대 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젖은 얼굴로 세면대 앞 거울을 쳐다본 윤신의 눈가가 충혈돼 있었다.
〈어차피 이 펌에서 아무도 네 이름 안 불러. 다들 낙하산이라고 부르지.〉
놀랍게도 그때 그가 준 건 힌트였던 모양이다. 세헌 정도 위치의 파트너라면 주니어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할 자잘한 일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는 제게 한 달이나 업무 명령이라곤 입도 뻥끗한 적 없었다. 자신이 일을 못해서 계속 방치해 두는 게 아니다. 그건 윤신이 아직 도국의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왜 자꾸 4년 차, 4년 차 하나 했더니.”
일부러 이름 아닌 다른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면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자신을 그저 외부에서 4년을 구른 변호사로만 보고 있는 거였다. 꽤 굴욕적이었다.
창피당하지 않으려고 이틀 내내 최선을 다했다. 정말 노력했는데. 결국 그 안에서 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창피를 당하고 만 기분이라 엿 같았다. 제 잘못도 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의 계도 방법은 너무 무자비했다. 조금 전, 이틀 치 노력의 결과물을 거침없이 내던져 버리던 세헌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선연했다.
“사디스트.”
페이퍼 타월을 여러 장 꺼낸 윤신이 손을 닦았다. 그러다가 세헌이 제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기를 닦아서 입술에 옮겼던 일까지 함께 떠올랐다. 그는 애꿎은 얼굴의 물기를 벅벅 닦아 훔쳤다.
“내 머릿속 들여다보였으면 처음부터 좋게 좋게 가르칠 수도 있잖아. 사람 망신 주는 데 취미 있나?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렇게 개차반인가? 성질머리 더러운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둘 다? 아마도.”
거칠게 안면의 물기들을 훔치느라 인지하지 못한 사이, 어느 틈에 인기척이 들렸다.
처음엔 꽤나 귀에 달고도 익숙한 음성이라 듣기 좋다 싶었는데, 몇 초 사이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지금 여기서 들리면 절대 안 되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목을 겨우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응시하자, 탄탄한 몸에 걸친 재킷 소매를 걷어 올린 세헌이 나타나 세면대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엿 됐다.
얼굴색이 파리해진 윤신의 표정에 혼돈이 가득했다.
어디부터 들었지.
사디스트?
개차반?
“안타깝지만 사디스트부터 들었어.”
만년필 잉크가 묻은 손을 씻던 세헌이 질문하지 않은 말에 대꾸했다. 식겁한 윤신이 거울 속 그의 모습을 황망하게 지켜보았다.
“수석님 혹시 독심술 하세요?”
“나야말로 그걸 했으면 훨씬 일이 편했겠다만. 얼굴은 부드럽게 닦아. 준수한 외모는 네가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무기 중 하나야. 나중에 내가 적당히 활용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아껴 써.”
젖은 타월을 마치 그라도 되는 양 꽉 쥐어 본 윤신이 제 얼굴을 마저 닦았다. 곧이어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그를 말없이 주시했다. 그 관심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모양인지 제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가 그제야 힐끗 거울 속 윤신을 쳐다보았다.
깨끗하고 투명해서 물리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속내까지 비출 것 같은 유리를 매개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순간. 노골적인 험담을 듣고도 초연하던 세헌의 한쪽 얼굴이 찡그리듯 무너졌다. 그는 불쾌해하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이어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기분 나빠.”
“헷갈려서요.”
“나야말로 의미를 모르겠군.”
“병 주고, 약 주고. 하고 계시잖아요. 아깐 망신 주더니, 지금은 나중에 쓸 거라고 하시고.”
“이게 약이야? 너 되게 쉽구나. 헤픈 애들이랑은 안 맞던데.”
“사람 면전에서 꼭 그러시는 거 되게 사디스트 같은 거 아세요?”
“뒤에서 몰래 욕하다 걸리는 너보단 정직한 사디스트지.”
아. 조금 전 일을 떠올린 윤신이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화가 나서요.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넘어가 주시죠.”
“이 새낀 위아래가 없는 건지, 그냥 뇌가 없는 건지.”
더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세헌이 깔끔하게 씻은 손을 페이퍼 타월로 훔쳤다. 그러고는 윤신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하나 윤신이 그의 앞을 곧장 막아서는 바람에 행동이 중단됐다.
“원하는 걸 정확히 제시해 주셨다면 제가 낸 결과물도 달랐을 거예요. 제가 단순하게 접근했던 것도 맞지만, 변호사님이 하신 게 그냥 꼬투리였던 것도 맞아요. 너무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세헌은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법정이 원래 그래. 증거를 제출하면 서로 꼬투리, 꼬투리, 꼬투리. 그걸 누가 더 그럴싸하게 입증하고, 또 반박하느냐에 승소와 패소가 갈리지. 그러게 내가 들어가는 게 별로 도움 안 될 거라고 했잖아. 충고를 듣지 그랬어.”
“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니 유비무환의 가르침으로 뼈에 새길게요.”
“글쎄. 넌 딱, 꾸준히 말 안 들을 타입인데. 기대도 안 해. 어제 얘기했지. 시키는 일이나 잘해. 나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언젠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했다가. 또 어느 때엔 시키는 일만 하냐고 혼냈다가. 세헌이 하는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키는 것만 할까요. 시키지 않은 일도 할까요? 변호사님의 진심을 모르겠어요.”
“그것도 테스트야. 답은 네가 찾아.”
의뢰인들은 종종 거짓말을 한다.
가지고 있는 정보 중 가장 중요하거나, 혹은 위험한 것들 몇 가지를 틀어쥐고 줄곧 감추다가, 결정적인 순간 상대측에게 들켜 변호인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잦았다. 또 이랬다, 저랬다 본인의 일인데도 논지를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혼란을 주는 일도 숱했다.
아마 그런 종류의 혼돈을 주면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다만 속에 뭔가를 담아 두는 데 능숙하지 못한 자신이 그런 힘겨루기를 할 상대로 세헌은 내공이 너무 높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윤신은 애써 그를 향한 의문들을 압축하듯 억눌렀다.
그러는 동안 세헌이 덧붙였다.
“이제 좀 비키지 그래.”
“잠깐만요, 강세헌 선배님.”
자리를 비켜 주지 않으면 밀고라도 지나가겠다는 듯 손을 뻗던 그가 돌연 멈칫했다. 곧이어 무슨 생각인지 윤신의 마른 몸을 예고 없이 벽으로 몰아붙였다.
타악! 대리석으로 된 벽면에 등을 부딪치게 된 윤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커다랗고 곧은 두 손이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마치 쥐어짜듯 힘 있고 단단하게 붙잡았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없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를 전혀 모르겠다.
“윽, 아파요!”
정면에 마주 선 세헌은 윤신보다 키가 훌쩍 컸다. 그 바람에 어두운 그림자가 희끄무레한 얼굴 위에 차양처럼 내렸다. 세헌의 표정은 여전히 건조할 뿐이었으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져 있었다. 그는 음산하게 속삭이듯 경고했다.
“이름 부르지 마. 선배라고도 부르지 마. 허락한 적 없어. 직함으로 불러.”
이런 부분은 사람에 따라 예민한 문제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윤신도 이름을 부르는 게 싫은 건 충분히 이해했다. 펌의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는데, 밖에서의 습관이 여기서 발현된 바람에 자신도 아차 싶었던 참이었다.
하나 선배라는 호칭에도 과잉 방어 하는 그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단순히 변호사 후배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학부도 로스쿨도 자신은 그의 직속 후배였다. 그런 의문이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기미와 뒤엉켜 얼굴에 떠올라 있었던지, 세헌이 손에 힘을 풀며 친절히 답했다.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그렇게 사적으로 관계 규정되는 거 별로야. 네가 날 부를 수 있는 호칭은 딱 세 가지야. 강 변호사님, 강 수석님, 혹은 강 팀장님.”
“며, 명심할게요.”
대답하는 윤신의 손이 조금 떨렸다. 손에 쥔 젖은 손수건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갔다. 힐끗 팔목 쪽을 내려다보았다가 그 순간을 눈으로 포착한 세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여전히 서로 간의 거리는 가까웠다.
“너 어제 나한테 그 동업자 재판장에 어떻게 데려왔느냐고 물었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그 때문에 윤신의 머릿속 기억이 어제의 그 순간으로 회귀했다. 고개를 차분히 끄덕이자, 그가 문장을 이어 붙였다.
“난 아무것도 안 줬어.”
“말도 안 돼요. 얻을 게 없는데 미쳤다고 거길 갑니까.”
“대신 나와서 사실 관계를 제대로 불지 않으면 하나뿐인 아들한테 경호실장이랑 붙어먹은 증거를 전부 보내겠다고 협박했지. 4년 차. 모성애는 늘, 나한테 기대 이상의 결과를 줘.”
세헌의 설명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윤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떤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대가를 줘 회유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했다는 얘긴가?
그들을 지키기 위해 당사자가 직접 사지로 걸어 나오도록 말이다.
상상 이상의 저열한 방식이었던지라 이미 기대치가 낮아 더 실망할 게 없었는데도 퍽 실망스러웠다.
‘이 쓰레기…….’
“꼭 그렇게까지 약점 쥐고 흔드셨어야 했어요?”
선명한 동공에는 진심을 담은 책망이 가득했다. 그 위를 지그시 주시하던 세헌이 일순 촉촉한 입술을 꽉, 짓이겼다. 마치 비속한 언어로 하는 최대치의 모욕을 듣기라도 한 양,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얼굴도 싸늘하게 식었다. 늘 동요가 적던 차분한 안면에 어울리지 않는 울컥함이 드리워졌다.
“넌 무슨 예수라도 돼? 고고한 척할 거면 종교 단체에 가지 대체 왜 들어왔어, 여길.”
“그런 의미가 아니라, 최소한의……!”
윤신이 힐난을 매조지려던 순간, 그가 며칠 전 제 방에 찾아와 그랬던 것처럼 목에 걸린 넥타이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압박하듯 확, 조였다.
“변호사님? 윽!”
“탁 비서랑 넥타이도 공유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군.”
“그걸 어떻게 아셨, 이건…….”
“해명하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냐. 입 다물어.”
당황한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세헌은 상대방의 당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아귀의 힘을 더욱 세게 가할 뿐이었다.
슬슬 가느다란 천이 아니라 그의 큼지막한 손이 주는 압박 때문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세헌의 딱딱한 손등이 목울대의 도드라진 부분을 짓눌렀다. 하나 점점 더 숨이 막힌 윤신이 몸을 비틀어 봐도 소용없었다. 그는 관대함이라곤 없는 사람같이 난폭하게 굴었다.
“일단 이거 좀 놔주세요. 허억, 숨 막혀요!”
“숨은 막혀도 귀는 열려 있을 테니까 잘 들어. 네가 ‘그렇게까지.’라고 말하는 바로 그게 내가 살아남은 방식이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도 해. 이런 거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난 너한테 가르칠 게 없어. 여긴 내가 원주민이고, 네가 이주민이야. 안 말려. 나가.”
“읏, 변호사님!”
“남아 있을 거라면. 그 경멸스럽다는 눈빛이나 좀 치워. 볼 때마다 기분 좆같아.”
‘눈빛?’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충고였던지라, 괴로워하며 버둥거리던 윤신이 행동을 멈추고 헛기침을 삼켰다. 호흡 조절이 안 돼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그를 망연히 응시하니, 세헌이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서서히 안색은 원래의 빛깔로 되돌아왔으나, 윤신은 그의 무도한 행동을 질타하는 대신 침묵했다. 심사가 복잡해져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욱 걸맞을 것이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금세 평정을 되찾은 그가 먼저 적막을 깼다.
“너한테 앞으로 얼마간의 말미를 줄게. 정말 내게서 뭔가를 뜯어 가고 싶은지, 너도 날 잘 연구해 봐. 정식 계약서에는 그때 서명하도록 해. 송 변호사한테도 얘기해 뒀다.”
탁, 탁. 손바닥 앞뒤에 남은 물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세헌이 윤신의 마른 어깻죽지를 가볍게 내려쳤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벽에 기대 있던 윤신은 차가운 대리석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외로이 버티고 있다가 왼편의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채였다.
〈그 경멸스럽다는 눈빛이나 좀 치워. 볼 때마다 기분 좆같아.〉
괴테가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이다.
딱히 그런 시선으로 본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세헌의 말은 아마 정답이었을 터다. 이곳에 들어온 후 자신은 줄곧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노련한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 한 달간 그는 제 눈에서 오직 경멸만을 읽었던 걸까.
짐작건대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누가 봐도 나쁜 짓을 한 게 그고, 당사자인 세헌마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윤신은 이상하게 그를 난도질해 놓은 느낌이 들어 조금 괴로웠다.
* * *
이런 말이 있다.
제일 좋은 변호사는 소송까지 가지 않게 만드는 변호사다.
윤신은 그 말에 대체로 동의했다. 거의 두 달 동안 매달려 있던 두 개의 프로 보노 사건을 성공적인 합의로 끝내고 나자 뿌듯했다. 하나 이런 공익 사건들이 체질에는 맞더라도, 이제 슬슬 몸풀기는 그만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다만 입사한 지 거의 두 달째. 세헌으로부터 여전히 아무런 명령도 안 내려왔다.
“본인을 연구해 보라더니. 뭐 얼굴이라도 보여 줘야 연구를 하지.”
자신은 명목상 세헌의 팀원이었으나 실제로는 그가 맡은 일을 도와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사건이 종결되자마자 새로운 프로 보노 사건이 제 방으로 위임됐다. 다른 시니어 선배들이 하던 케이스 두 건을 물려받은 거였다.
입사 전 마주쳤을 때처럼 우연에라도 기대어 대화를 나눠 보려고 출근 시간쯤 주차장과 로비 주변에서 서성인 적도 몇 번 있었다. 세헌의 퇴근 시간은 대중없지만 출근은 매일 같은 때에 하는 편이어서 상대적으로 부딪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전생에 두 사람이 절대 만나선 안 되는 앙숙이라도 되었던 건지 어찌 된 게 자신이 기다리기만 하면 번번이 그의 행보가 엇나가 타이밍을 놓쳤다.
힐끗, 창문 너머를 쳐다본 윤신은 본능적으로 맞은편 방에 눈을 고정했다. 차갑고 정 없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 주듯 창 전체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비단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나가듯 탁 비서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본래 자주 그러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바쁘게 일하는 걸 지근거리에서 보면서, 얘기 좀 하자고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째 한 달 내내 강세헌 소식만 기다리고 있네.’
당신은 대체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설마 이렇게 지치게 만든 다음 알아서 나가떨어져라 이건가?
사고를 이어 가다 가장 최악의 가정에 다다른 윤신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이 다 된 때였으나 다행히 비서실에 탁 비서가 남아 있었다. 파티션에 팔을 슬쩍 걸친 윤신은 세헌의 방 창문을 계속 훔쳐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기. 탁 비서님. 강 변호사님 아무 말씀 없으세요? 저 진짜 프로 보노 또 해요?”
탁 비서도 그 부분이 의문인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요. 없으시네요. 1차 시험 통과한 거 확실한데.”
그날 선배들의 앞에서 망신당했던 일을 떠올리자, 윤신의 뺨에 슬며시 홍조가 일었다.
“그게 통과라고요? 재시험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 변호사님 잘 모르시는구나? 그분은 진짜로 자비가 없어요. 통과 못 했으면 이미 다른 팀으로 보내셨을 거예요. 기다려 보세요. 2차 시험 문제 주실 테니까.”
“진짜 주시긴 줄까요? 한 달을 더 기다렸는데 아직도 함흥차사예요.”
탁 비서는 조바심 내는 윤신을 한 번,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세헌의 방 창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몸을 수그리고 입을 열었다.
“초조해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한 가지 더 알려 드리면요. 타 팀 어쏘들이 다 도 변호사님이 쓴 페이퍼 돌려 봤어요.”
“지난번 테스트 때 그거요? 어떻게요?”
“강 변호사님이 복사해서 돌리라고 했대요. 그럭저럭 괜찮다고. 앞으로 쟁점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라고요. 사실 변호사들은 거의 서류 작업을 하니까 누구보다 글을 잘 써야 하는 직업인데, 우리 펌만 해도 법률 문장 지저분하게 쓰는 분들 생각보다 많거든요. 참고로 수석님 어쏘 중에 단 한 번도 그런 칭찬 받은 사람 없어요.”
“그럭저럭? 그게 칭찬이에요?”
당일엔 그렇게 종이를 면전에서 던져 놓더니,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몹시 아연해진 윤신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매사에 좀 방어적이긴 하시죠.”
“그러게요. 가끔 뇌 어디 한군데가 흠집 나신 분 같아요.”
혼잣말처럼 뱉어 낸 그 대꾸가 아주 많은 의미를 내포한 문장처럼 들렸던지, 탁 비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한 박자 늦게 응답했다. 꽤나 신중한 어투였다.
“수석님도 뭐가 옳고 그른진 잘 알아요. 불편하지만 무시하는 거죠. 다만 본인이 태생적 을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본인한테 일을 시키고, 본인은 그걸 하고요. 그렇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용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게다가 여긴 약육강식의 세계고. 싸움에서 지면, 가치가 없어지잖아요.”
마음이 급하던 윤신도, 이 말을 들었을 땐 호흡이 뚝 멈춘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는 의미다. 언젠가 세헌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초연하던 그가 경멸스러워하는 제 눈빛에는 이례적으로 동요했던 이유가 계속 궁금했다. 아울러 줄곧 마음에 걸렸다.
탁 비서의 증언을 들으니 그 까닭이 이제 어느 정도는 짐작됐다. 하나 그게 제 입장은 아니기에 여전히 강세헌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나쁜 사람인 걸까.
아니면 약한 게 싫은 사람인 걸까.
심사가 복잡해진 윤신이 탁 비서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제 입이 어느샌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탁 비서님, 강 수석님 좋아하세요?”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좋아하죠.”
“그게 당연한 일이에요?”
“수석님도 좋은 점 있어요. 상벌이 아주 확실해요. 일을 잘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요. 개인사로 뭘 시키는 일도 전혀 없어요. 직장 상사가 그 정도면 최고 아닌가요?”
“강 수석님 두고 이런 평가 하는 분을 처음 봐서요.”
“도 변호사님한테 그런 말 해 준 사람들은 수석님 잘 모르잖아요. 그간 지켜봐 온 사람으로의 생각이에요. 이건 제 직감인데 도 변호사님 꽤 신경 쓰고 계신 거 같기도 해서요.”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의 신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세헌이 직접 제게 한 이야기들로 미루어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세헌은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그의 기분을 나쁘게도 만든다고 경고했다. 그게 남에게도 보이는 모양이다. 애써 사념을 털어 낸 윤신이 대답 대신 묵례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탁 비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제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려고요. 변호사님도 식사하셔야죠? 맛있게 드세요.”
“아, 맞다. 그래야죠. 같이 가요.”
“어딜 가요. 강 수석님이랑 드셔야죠.”
금시초문인 얘기라 윤신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저랑 드셔 주신대요? 언제요? 어디서? 왜?”
“말씀 전해 듣고 시간 맞춰 나오신 거 아니에요? 직접 전달하시겠다고 했는데?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 잠시만요.”
탁 비서가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내선 인터폰을 손에 쥐려던 그때였다.
벌컥.
건너편 방에서 이 화두의 주인공인 세헌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비서실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곤 ‘뭐야?’ 하듯이 미묘하게 짜증스럽고 미세하게 나른한 시선을 보냈다.
그 눈길의 끝이 날이 서 조금 따가워 보인다면 착각일까.
“점심 같이하지.”
사실 윤신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게 된 게 얼마 만인가 싶어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감정을 전할 새도 없이 세헌이 제게 휙, 차 키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은 윤신이 물체를 받아 냈다. 그와 동시에 열심히 끄덕이자 세헌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슬쩍 구기고는 앞서 갔다.
얼떨떨해하던 윤신이 탁 비서에게 먼저 가 보겠다는 양 눈인사하곤 그를 쫓아 뛰었다. 승강기 앞에서는 가속도를 높여 세헌을 추월한 뒤 하강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나란히 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적막이 불편해진 윤신이 먼저 정적을 깼다.
“수석님. 한 달 만에 저 부르신 건 아세요?”
“내 인지 능력을 묻는 건지, 계속 방치했다고 책망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둘 다 사양할게.”
“……그냥 대화를 시도한 거예요. 모든 사람이 상대를 떠볼 의도를 가지고 말하진 않아요.”
일순 승강기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착각인지 세헌의 눈매가 조금 유감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운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를 응시하던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혹여 무심코 던진 눈빛 때문에 또 그의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된 탓이다.
윤신이 설령 오해가 있었다면 해명할 셈으로 그가 선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지잉’ 하는 소리를 내며 승강기 문이 열렸다.
“오전 내내 통화해서 입 아파. 입 다물고 조용히 가.”
뱉듯이 대꾸한 세헌이 먼저 탑승하고, 곧이어 윤신이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난 뒤 계기판을 가만히 보던 윤신의 동공이 위치 표시기의 숫자가 내려가듯 천천히 하강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라 곡선이 뚜렷한 세헌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자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약한 게 싫어서 나빠진 사람인 게 아닐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윤신은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변호사님. 지난번에 저한테 하신 그 말씀 말인데요.”
“지금 이건 확실히 떠볼 의도가 있네. 기각.”
“저 아직 본론도 안 꺼냈거든요. 머리말의 ‘머’ 했거든요.”
“네 말이 머리말이든 맺음말이든 내 대답은 못 들으니까 그만 쳐다봐. 난 그림이 아니야.”
그의 나지막한 경고에, 윤신의 마른 몸이 움찔했다. 그가 제 시선을 모르리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또 의식하고 있으리라고도 생각 안 해서 당황스러웠다. 숨어서 발칙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양 창피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세헌이 관두라고 경고해서인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은 더욱 그를 좇으려 들었다. 윤신은 그게 곤란해 겨우 눈길을 돌리며 괜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딴청을 피우는 동안에도 기계는 충실하게 저지를 향해 질주했다.
여전히 승강기 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으나, 이제 세헌은 제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걸 인지한 순간 윤신은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 일에 대한 대화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겁쟁이.’
속으로 세 음절의 단어를 삼킨 윤신의 숨소리가 아득히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