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탁! 사옥 주차장에 도착한 세단에서 고급스러운 슈트를 갖춰 입은 세헌이 하차했다. 그는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능숙하게 끼웠다. 그러고는 양 소매의 커프 링크스를 꼼꼼하게 채우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승강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탁 비서가 세헌으로부터 서류 가방을 넘겨받았다. 동시에 미리 잡아 둔 기계에 타라며 손짓했다. 가뿐하게 승강기에 올라탄 세헌은 통화 중인 상대방의 말을 잠시 듣는 듯하다가,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급하시면 송무 팀으로 보내시지 그러세요. 전 송사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 자문으로 인연 있는 사람들 송무 업무는 가끔 해 주는 거 알아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그러게 처음부터 변호사 쇼핑을 잘하셨어야죠. 뷔페 왔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되겠습니까? 비싸고 맛있는 것부터 손을 대는 게 기본입니다.”
이 의뢰인은 반도체 업체 대표로 투자 등의 자산 형성 과정에서 민사 소송에 연루됐는데, 도국과 비슷한 덩치의 타 로펌을 소송 대리인으로 선택했다가 1심에서 크게 패소했다는 듯했다. 세헌이 전화를 통 받지 않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며칠 동안 계속 사람을 보내 들들 볶기에 선심 쓰듯 얘기를 들어 주는 중이었다.
하나 연락이 닿았는데도 그가 영 심드렁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 내가 처음부터 강 변 수임하고 싶어 했던 거 알지 않습니까? 접촉도 했었고요. 다만 거기 대표랑 와이프끼리 잘 아는 사이라서, 사업하는 사람인데 나도 그 정도 신의는 지켜야지 해서 그런 거예요. 이제라도 내가 길을 잘 찾아가려고 그래요. 우리 좀 봅시다. 예?
미간을 구긴 세헌이 탁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탁 비서가 휴대폰 일정표를 보여 주며 적당한 날짜를 짚었다. 그걸 본 세헌이 대꾸했다.
“주말로 하시죠. 이번 주 토요일 12시에 직접 펌으로 방문하세요. 미팅을 잡겠습니다. 그 전에 자료를 여기로 보내시는데, 거기엔 이미 노출이 된 건 물론이고 법정에서 밝히지 않은 감춰진 정황과 증거들까지 전부 포함돼 있어야 합니다. 대표님이 재산을 어떻게 축적했는지 1부터 9까지 제가 다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락이 있으면 수임하지 않겠습니다.”
- 그래요, 그래요. 나는 강 수석만 믿을게요. 송달은 인편으로 하면 될까요?
“그러셔야죠. 아, 그리고 세 통 이상 걸었는데 콜백 없으면 전화하지 마세요. 못 받는 게 아니고 안 받겠다는 뜻이니까. 이 건은 처음에 저한테 오셨으니까 해 드리는 겁니다.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냉랭하게 쏘아 붙인 그가 통화를 마친 휴대폰을 휙, 넘기며 눈짓을 보내자 탁 비서가 그것까지 능숙하게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분이라면 나이 꽤 지긋한 분이라 한우 도시락 정도가 좋겠네요.”
“좋을 대로. 관련 자료가 아마 오늘 밤 중 인편으로 올 텐데 그건 보기 좋게 파트별로 정리해서 내일 정오까지 내 책상 위에 둬. 같은 사건 재판 속기록도 정오까지. 노는 어쏘 중 하나 시켜서 판례 뽑아 두고.”
“노는 어쏘요? 우리 펌에 그런 게 있었어요? 딱 한 분 빼면요.”
에두른 반문에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잘 아는 세헌이 바로 반박했다.
“도윤신 말고. 다른 팀 주니어 중에서 찾아. 정 없으면 인턴들 쓰든지.”
“도 변호사님을 로스쿨 학생들보다도 못 믿으세요? 아, 맞다. 그분 말 나온 김에 이거요. 도윤신 변호사님이 맡으셨던 사건 관련 추가 자료입니다.”
탁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듯이 낚아챈 세헌이 덧붙여 답하려던 바로 그 순간. ‘땡.’ 소리를 내며 승강기가 그들의 사무실 층에 도착했다.
앞서 나간 그는 도톰한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으며 제 집무실 방향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비스듬한 옆에서, 탁 비서가 뒤따랐다. 두 사람을 발견한 직원들이 세헌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무시하고 탁 비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더 나온 거 있어?”
“아뇨. 지난번에 보고드렸던 대로예요. 탈탈 털었는데도 변호사님과 공사 양쪽으로 다 엮인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관계만 정리해 왔어요.”
탁 비서를 통해 따로 조사해 보는 것은 물론이고 윤신과 비슷한 기수인 주니어 변호사들을 싹 다 소환해 면담해 봤지만, 건진 게 없었다. 같은 변호사여도 대형 로펌 변호사와 인권 변호사는 엄연히 필드가 달라서 다들 자세한 건 몰랐다. 알음알음 들은 소문으로 일이 꽤 야무진 편인 듯하다는 평가만 이어졌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세헌은 꽤 신중하게 앞 장부터 하나씩 넘겨 내용을 눈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 안엔 윤신이 맡았던 사건과 관련한 세부 기록들이 빼곡했다.
“깨끗해요. 이제 의심 거두시죠?”
“시끄러워.”
“인력 낭비예요. 그거랑 시간 낭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시잖아요.”
“똑같은 거 두 번 얘기하기 전에 알아서 닥치는 게 좋을 거야.”
경고와 동시에 입을 꾹 다문 탁 비서 덕분에 주위가 조금 조용해졌다. 그는 눈대중으로 서류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부당 해고, 근로 기준법 위반, 산업 재해…….’
아직 피라미 수준이긴 하지만 윤신의 아버지이자 법무부 장관까지 역임했던 그의 은사가 산 삶의 궤적과 꽤 비슷했다. 부자가 둘 다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는 성정인 모양이다.
아버지를 닮았나 보군.
혀를 찬 그가 계속 전진하려고 하는데, 별안간 눈앞에 장애물이 불쑥 나타났다. 멈칫한 그가 고개를 들자, 길을 막아선 미희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우리 강 수석 출근 시간 칼 같네. 다른 파트너들이 본받아야 할 텐데.”
“아침부터 왜 이래.”
“너무 보고 싶어서 기다렸어.”
“유부녀 마음은 못 받아 줘. 업계엔 상도라는 게 있어. 비켜.”
“강세헌 짤 없네.”
비키지 않겠다면 자신이 돌아가겠다는 양, 그녀를 깔끔하게 지나쳐 간 세헌이 집무실로 향했다. 눈치껏 그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든 탁 비서가 앞서 뛰어갔다. 뒤이어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서류 가방과 휴대폰, 서류까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이윽고 방주인인 세헌이 사무실에 들어와 업무 환경이 세팅된 제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미희가 끼어들어 진로를 방해했다. 그는 이마 사이를 구겼다.
“송 수석, 할 말 있으면 질척거리지 말고 그냥 해. 나 월요일 아침에 제일 바쁜 거 몰라?”
“도윤신 변호사, 첫날 이후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한 번도 네 방으로 안 불렀지? 그래도 네 직속 어쏘인데, 일 안 시킬 거면 밥 한 끼라도 사 주든가. 너희 팀 젊은 애 귀하잖니.”
그 화두일 줄 알았다는 듯 세헌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나 식사할 시간까지 쥐어짜서 그 시간에 회의하는 사람이야.”
“에이, 바쁜 와중에도 할 건 해야지. 참고로 난 쇼핑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해.”
“프로 보노 적당히 시켰으면 됐지, 내가 걔 밥까지 떠먹여 줘야 해? 육아 취미 없댔지.”
“그럼 차라도 한잔 사 주면서, 응? 내가 널 좀 아는데. 대충 조사는 끝났을 거 알아. 쫓아낸다 소리 없는 거 보면 커트라인은 넘은 모양이고. 아직까지 그 애의 뭘 지켜보는 건진 모르겠지만, 사담을 좀 나눴으면 좋겠어. 짧게라도 좋아. 나도 도 관장한테 전할 얘기가 있어야지. 통화할 때마다 묻는데 할 말 없어 민망해 죽겠다. 많이 안 바라. 커피 한잔. 어? 커피.”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나가.”
“세헌아.”
“난 위아래, 앞뒤 다 없어서 선배한테도 소리 질러. 말로 할 때 나가.”
“하여튼 성질머리는 지랄 같아 가지고. 간다, 가.”
말 안 듣는 남동생 보듯 세헌을 주시하던 그녀가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조용히 뒷걸음질 치는가 싶더니, 재빨리 앞으로 걸어와 그의 책상 위에 커피 두 잔을 턱, 내려놓았다.
“좋은 소식 기다릴게!”
이럴 것까지도 짐작했다는 양, 그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 인사 하며 나가는 미희를 가만히 지켜보다 한 박자 늦게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이제야말로 책상 앞에 앉으려는데, 이미 출근한 건지 윤신의 방에 불이 밝게 켜져 있는 게 보여 멈칫했다.
곧이어 세헌은 얌전히 놓여 있는 책상 위 커피 두 잔을 가만히 직시했다. 미희가 남기고 간 말 중 걸리는 게 하나 있어서였다.
〈첫날 이후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한 번도 네 방으로 안 불렀지?〉
“한 달. 한 달…….”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곱씹다 일회용 컵 두 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방향을 틀어 집무실 밖으로 나온 그는 두 개의 사무실을 관통하는 자리에 위치한 비서실로 이동했다. 직원들은 세헌이 오는지도 모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미희가 이른 오전부터 그의 사무실에 다녀간 일을 화두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세헌이 박수를 ‘짝!’ 치자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한 탁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깜짝이야. 수, 수석님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탁 비, 너 도윤신 방으로 내가 지난주에 준비해 두라고 했던 자료들 싹 올려 보내.”
“두 건 다요? 지금요?”
“그럼 한 건은 내일 할래? 너 신나게 잡담하는 동안 여기 서서 기다리지 뭐.”
“실언했습니다. 바로 들여보내겠습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돌아선 그가 윤신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주변을 정리한 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있던 윤신이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곤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세헌이 처음 제 방에 방문한 것인 터라 내심 꽤 놀란 것 같았다.
“변호사님, 지금 출근하십니까?”
“입대했어? 살살해라. 앉아.”
세헌은 간단히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와 윤신의 책상 앞에 섰다. 이윽고 미희가 주었던 커피를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매트에 올려 두곤 말간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자연히 윤신의 총명한 눈동자가 의문을 조금 담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건…….”
“커피.”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데요. 혹시 뭐 하실 말씀이라도…….”
“일단 그걸 마셔.”
“저 주시는 거예요?”
“어, 네가 마셔야 내가 덜 괴로워질 것 같다.”
꿰뚫을 기세로 빤히 보는 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윤신은 급한 대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댔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행간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누가 계속 잔소리할 거 뻔해서 말이야. 여하튼 난 할 도리 한 거야.”
그의 설명은 모호해서 여전히 정확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윤신은 더 묻는 대신 천천히 검은색 슬리브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컵을 제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감사하다는 듯 가볍게 묵례하자, 대충 끄덕인 세헌이 아예 접견용 소파 팔걸이에 몸을 걸치고 앉아 윤신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 세례를 일방적으로 받고 있는 관찰 대상자의 표정이 오묘했다. 세헌이 느닷없이 들어와서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터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제게 닿은 눈길이 너무 집요하고 강해서 좀 부끄럽고 멋쩍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을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꽤 예의를 벗어난 행위였다. 몇 번 마주치지도 못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늘 제게 무례를 범했다. 한데 행위의 주체가 강세헌이라서, 윤신으로선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변호사님 커피를 얼른 사 올게요.”
윤신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 세헌이 바로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건 됐고. 아직 계약서 쓰기 전이지. 너 연봉은 얼마 약속받았어?”
“제가 일은 4년 차인데 재조[5] 출신도 아니고, 작은 사건만 주로 해서 입사 시 가산 요소가 거의 없더라고요. 우리 펌은 3년 차부터 성과급제라고 하셔서, 2년 차 평균으로요. 일하는 거 보고 연말에 재협상을 하자고…….”
“낙하산이지만 업계 테두리는 유지하려고 애썼네.”
윤신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반쯤 열려 있던 출입문이 노크 소리와 함께 활짝 아가리를 벌렸다. 뒤이어 낯선 얼굴의 직원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각자의 손에는 자료 이동용 카트 손잡이가 쥐여 있었다.
그들은 카트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들을 접견용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올려 두더니, 평온한 표정의 세헌과 얼떨떨해하는 윤신을 향해 각각 인사하곤 방을 빠져나갔다.
딸칵, 문이 닫히자 어마어마한 서류의 양에 기가 질려 있던 윤신의 시선이 세헌에게 표창처럼 쿡 박혔다.
“수석님, 저게 다 뭘까요? 표정 보니 아시는 거 같아서요.”
“우리 펌 주니어 3·4년 차들이 맡을 만한 사이즈의 송사 두 가지야. 하나는 민사, 하나는 형사.”
파트너 변호사들이 하는 주요한 일들 중 하나는 사건을 따 오는 것이다. 전공 분야거나 돈이 되는 큰 사건들은 직접 맡기도 하지만 그보다 작은 사건들은 어쏘 변호사들이 단독으로 수임할 수 있도록 물려주는 일도 잦았다. 많은 로펌이 의사 결정부터 사건 수임까지 모든 것이 톱다운 구조였다. 그래서 어쏘 변호사들에게 파트너 변호사의 말은 곧 일종의 법으로 작용했다. 도국도 그렇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윤신은 눈앞의 자료들이 세헌이 직접 따 온 사건에 관한 서류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 자료들이군요. 둘 중 제가 맡을 사건이 있나요? 아니면 둘 다?”
세헌은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소송하고 싶어? 너 송무 팀이야? 그쪽이 체질엔 더 맞아 보이는데 보내 줘?”
난처해진 윤신의 입이 슬쩍 다물렸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
“돌대가리 아닌 이상 지난 한 달 동안 대충 펌 분위기는 읽었을 거고. 이건 네가 네 밥값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하기 위한 1차 테스트 과정이야.”
“테스트요. 네, 전 뭘 하면 될까요.”
“이틀 줄게. 글자 한 톨 남기지 말고 전부 숙지해. 그러고 나서 이 사건을 모르는 우리 팀 시니어들 앞에서 브리핑해. 걔들은 네 보고만 듣고 내용을 전부 이해해야 하고, 뭔가 물어봤을 때 네 정보에 오차가 있어선 안 돼. 할 수 있나?”
단시간 내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저 방대한 서류 양을 소화하는 데 이틀이란 시간은 촉박해도 너무 촉박했다.
“이걸 전부 이틀 안에요? 제가 봐야 할 프로 보노 자료들도 있는데요. 급하게 물려받은 거라 지금 재판 중이라서요.”
무조건 ‘네.’라고 대답하는 일에 훨씬 익숙한 세헌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일어나서 윤신의 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양팔을 뻗어 책상 위를 척, 짚고는 허리를 숙여 앉아 있는 윤신과 시선을 얼추 비스듬하게 마주쳤다.
두 사람의 얼굴이 꽤나 가까웠다. 매끈한 피부 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세헌의 길쭉한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조금 음험해 보였다. 움찔한 윤신의 손이 붙들고 있던 일회용 컵을 더 세게 그러쥐었다.
“4년 차. 내가 메타인지가 굉장히 좋은 편이거든.”
“대충은 짐작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처음의 증언이 끝까지 유지되는 거야.”
“그것도 잘 압니다.”
“그 두 가지 다 잘 아는 새끼가 왜 이래. 너 목숨 걸겠다고 했잖아. 한 입으로 두말을 하면, 기억 상기 능력이 훌륭한 내가 혼란이 오지. 안 그래, 4년 차?”
〈제가 잘해야, 누나도 안심할 거라 목숨 걸 거예요.〉
제 입으로 직접 했던 말을 곱씹다 보니 윤신으로선 변명할 말도, 항의할 계제도 없어졌다.
“죄송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썩 마음에 차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헌도 납득할 만한 답변인 듯했다. 그가 슬그머니 허리를 곧추세워 윤신을 압도적인 구도로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에 크게 드러난 표정은 없었다. 다만 그 기저에 일견 오만으로까지 느껴지는 자신만만함이 전이됐다. 여태까지 온갖 방식으로 이끌어 온 승리만 하는 삶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터다.
그 덕분에 낮은 자리에서 그를 마주 보고 있는 윤신은 강세헌이야말로 남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판단을 잠시 했다. 외로움이나 굴욕감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 같았다.
그 순간. 왜인지, 그의 얼굴에 패배로 인한 아픔이 비치는 순간을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윤신은 굳이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이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속으로만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잡념에 빠져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세헌이 눈앞에서 핑거 스냅을 딱, 쳤다.
“이틀 후 오전, 이 시간. 대회의실. 추가 질문?”
“어, 그냥 수석님 앞에서 요약 브리핑만 하면 되나요? 시니어 변호사님들 질문받고요.”
“난 이 사건들 타 팀으로 토스만 해 준 거라 관심 없어. 안 가. 정답률은 100에 한없이 근접해야 하고, 네 입에서 답변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2초가 넘어가면 안 돼. 최종적으로 시니어들이 점수를 매기면 그걸로 네 가치를 판단할 거고, 괜찮을 시 연봉을 4년 차 평균으로 재조정해 주지.”
“안 괜찮으면요?”
“자신 없어?”
“아뇨. 저기, 그냥 변호사님도 와 주시면 안 되나요?”
세헌은 이 물음을 가장한 요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보였다. 이 테스트에 굳이 참석하지 않고 결과만 받아 보겠다는 건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가 가장 크긴 했으나, 이 경력직 신입에게 숨통을 열어 주려는 의도도 아주 조금은 있었던 터다.
“난 10분 단위 타임 시트로 일하는 사람이야.”
“압니다. 약간의 시간이면 돼요. 많이는 안 빼앗을게요.”
“이건 겁이 없는 거야, 싸가지가 없는 거야.”
“저도 변호사님의 스타일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거의 사옥에 계시는데도 너무 바쁘셔서 얼굴 뵙기가 힘들더라고요.”
일순 세헌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이윽고 매우 견고한 성문 안쪽을 엿보는 듯한 표정이 된 그가 냉랭한 어투로 반문했다.
“돌았구나. 감히 네가 뭘 해?”
“건방지게 가치 판단하겠다는 거 아닙니다. 다만 어떤 게 어필이 되는지를 알아야 그 부분을 수련하죠. 제가 썩 눈에 안 차시는 거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버티기로 결정한 이상, 전 강 변호사님을 모셔야 하고, 정말로 잘해 보고 싶어요.”
“후회할 텐데. 난 까다로워. 점수가 짤 거야.”
“후회는 인간이라면 다 하는 거고요.”
충분한 각오가 돼 있다는 의미 같았다. 본인이 그렇게 코너에 몰려 보길 원한다는데, 성질 나쁜 세헌으로선 재미있는 구경을 위해 약간의 시간을 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미묘하게 자꾸만 윤신의 태도들이 거슬렸다. 분명히 상대는 납작 엎드리는 저자세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그 이면의 꼿꼿함과 뻣뻣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 있는 그대로가 앞으로 제 속을 뒤집을 조짐이 보였다.
으득, 이를 간 그는 충동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곧게 뻗은 긴 손가락이 마치 갈퀴처럼 윤신의 단정한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뒤이어 보드라운 천을 그대로 당기는 바람에 마른 상체가 열없이 세헌이 선 방향으로 훅 딸려 갔다.
“윽, 변호사님?”
지금도 꽤 거리가 근접했는데, 세헌에게는 모자랐던 것 같았다. 고압적으로 윤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제 상체를 기울여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말간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서늘한 시선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허리춤부터 차오르는 긴장감으로 당혹스러워진 윤신의 뺨이 창백하게 식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제가 뭐 실수한 거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세헌은 침묵할 뿐이었다. 대신, 타이의 좁은 매듭 사이에 제 중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아래로 천을 끌어냈다.
결국 그는 윤신의 목에 얌전히 걸려 있던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헤쳤다. 단정하던 모습이 조금 흐트러진 모양새가 되자 그제야 마음이 찬 듯 휙, 가는 천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제야 윤신도 세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어쩐지 그도 정확한 이유를 찾지는 못한 것 같아서, 윤신은 왜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마른침을 삼키고,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애써 덤덤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앞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생기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세헌은 이 차분한 반응을 지켜보며 도리어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저 머릿속의 사고 흐름이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그간 윤신이 살아온 궤적을 대충 확인하고 나니 더욱 알기 쉬웠다. 평생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을 도윤신은 타인에게서 적대적인 감정을 느껴 본 일이 많지 않았을 터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본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니,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세헌 한 사람이 꺼려 한다고 해도 불편할지언정 크게 마음이 다치지는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스스로를 겨냥한 세헌의 감정에 그다지 관심 없다는 얘기다.
“더 마음에 안 들고.”
“혹시 제가 하는 모든 게 싫으세요?”
“그럴 만큼 관심 없어.”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건 제 마음을 소모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헌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떠난 부모님도, 어린 시절 그를 이곳저곳으로 내돌렸던 어른들도, 때때로 원수 취급 하며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저주를 퍼붓는 업무상의 관계자들도 모두 싫어하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했다.
그런데 윤신의 모든 게 이상하게 거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다기보단 눈에 매우 신경 쓰였다.
필연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한 기억이 꽉 찬 공간을 비집고 빛처럼 스며들어 왔다.
생전 명성에 비해 초라했던 장례식장, 다양한 군상의 조문객들, 단단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도이경 관장.
그리고 상주 완장을 찬 채 사람들 없는 자리에서 울던 누군가.
〈정말 죄송한데 잠깐만 같이 있어 주세요. 혼자 못 있겠어서요.〉
그날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짧은 시간을 공유했다.
도윤신은 그 일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뭘 고치면 될까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일순 윤신의 음성이 들렸다. 예전 일을 곱씹어 보던 그의 머릿속이 다시 현재의 문제들로 가득 채워졌다. 아슬아슬하게 풀어질 뻔하던 세헌의 얼굴도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관둘래?”
“아뇨. 죄송합니다.”
“시킨 일이나 잘해.”
세헌은 더 이곳에 있기 싫다는 듯 먼저 등을 보였다. 금세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기에 윤신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남은 할 말이 있었던 듯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윤신에게 정통으로 박히는 바람에 마른 몸이 움찔했다.
“테스트엔 나도 참석하지.”
말투는 쌀쌀맞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부탁을 수용해 주었다. 긴장하고 있던 윤신은 입술을 달싹이다 진심으로 답했다.
“고맙습…….”
그러나 그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돌아섰다.
타악. 문이 닫혔다.
“……니다.”
언제 봐도 근사하게 느껴지는 늘씬한 뒷모습이 삽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쉬운 대로 유리창 너머 그 잔영을 좇던 윤신은 반듯한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헌의 걸음걸이를 몰래 관찰했다. 그러다 그가 잠시 비서실 앞에서 멈춰 탁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하기에, 혹여 또 돌아보기라도 할까 봐 재빠르게 몸을 낮췄다.
쪼그려 앉은 채 애꿎게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다시 목에 매고 있자니, 조금 억울했다.
“더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실수한 거 있나. 없는데. 아니, 말 섞을 기회라도 주고 싫어하든가.”
한 달 가까이 방치해 두더니 불현듯 나타나서 한 말들은 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자신이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경위도 떳떳하진 않았고, 또 그냥 눈에 거슬리는 존재도 사람에겐 있기 마련이니 그의 불편함을 그런가 보다 여겼다. 윤신 역시 특별히 세헌이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그가 썩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심정이 묘하게 이해가 되는 구석도 있었다.
다만 곁에서 한 달 동안 지켜보니 그에게는 배울 점도 많았다. 업계에 도는 소문은 부풀려진 부분도 있는 모양인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일같이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향락에 빠진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사무실에 내내 틀어박혀 일했다.
종일 감당 못 할 양의 서류에 파묻혀 있었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의견서와 보고서 따위를 작성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사건의 담당자들 및 외국계 변호사들과 회의를 거듭했고, 더 짬을 쥐어짜 내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심지어 정시에 출근해 거의 매일 야근했다. 어쏘 변호사와 다른 게 있다면 주말에는 이틀 내내 칼같이 쉰다는 것 하나였다.
‘주말엔 데이트라도 하나. 장거리 연애? 재미 교포 여자 친구 있을 것 같은 이미진데.’
대수롭지 않게 속으로 혼잣말하던 윤신은 타이의 매듭을 마무리하며 의자에 앉다 멈칫했다. 조금 전 세헌이 했던 흉내를 내 좁은 틈새에 손가락을 끼워 넣어 쓱, 끌어 내려 보았다. 그처럼 능숙하게 묶인 부분을 풀려고 해 봤지만 마냥 쉽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살갗이 같은 자리에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애먼 생각만 불꽃 튀듯 떠올랐다.
‘닿으면 뭐.’
서둘러 손을 떼어 내고 자세를 고쳐 앉긴 했으나, 같은 남자의 손길을 의식한 자신이 창피해 몹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언젠간 적당한 여자랑 결혼도 하겠지?’
사랑이라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 취급 해 버릴 것 같은 그가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타이밍이 얼추 맞으면 그의 결혼식에 초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을 곱씹다 보니 별안간 왜 자신이 이런 무의미한 걸 궁금해하나 싶어졌다. 그는 이내 접견용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자료들로 시선의 위치를 옮겼다. 쌓여 있는 하얀 종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보니 새삼 아득했다.
“일단 이거부터 집중하자.”
급한 대로 아크릴 칠판과 소형 타이머를 끌어온 윤신은 그것들을 테이블 옆의 적당한 자리에 놓았다. 프로 보노 건으로 해야 할 일은 모두 보류해 두곤 그쪽으로 아예 자리를 옮겼다. 그는 산적한 서류들 중 민사와 형사 사건 위치를 분리한 뒤, 왼편부터 속독하기 시작했다.
사수가 자신을 평가하겠다는데, 보란 듯이 최고점을 받아 볼 생각이었다.
* * *
하루 내내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뻐근해진 목을 번쩍 바로 세운 윤신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듯이 안마했다. 근육이 바짝 굳은 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눈꺼풀도 조금씩 내리감기고 있었다.
“죽겠네.”
힐끗, 창문 밖으로 커피를 부탁할 담당 직원이 있는지를 확인하던 그는 어두워진 공간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1시였다.
로펌의 시간은 오전과 오후, 혹은 낮과 밤 따위로 분리되지 않았다. 변호사가 출근해 있는 시간, 출근해 있지 않은 시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녘이었으나 사옥의 곳곳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저 몇 시간여 전보다는 어두워진 공간들이 좀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자신이 있는 7층은 금융과 회사법 등 펌의 주 자금줄인 팀들이 쓰는 로열층 중 하나였다. 필연적으로 중견 변호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서 각 사건의 고비 때를 제외하면 다른 층에 비해서는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다.
윤신은 출근 이틀 만에 자신의 방 위치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다. 팀의 시니어 변호사들을 제치고 세헌의 맞은편 방을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치하라고 지시한 게 송미희 수석이었으니, 윤신으로선 그녀가 세헌의 지근거리에 자신을 두는 도박을 감행한 것이리라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세헌 쪽에서도 딱히 별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누나의 부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자신도 일단 순응했다.
“으, 도저히 안 되겠다.”
몸을 일으킨 윤신은 밖으로 나가 탕비실로 향했다.
끼익, 반쯤 열어 둔 문 틈을 통해 눈부신 불빛이 꼬리부터 도망치듯 외부로 빠져나갔다.
윤신이 복도 끝으로 걸어간 사이, 7층의 반대편 복도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밤 9시쯤 클라이언트 긴급 미팅으로 사옥을 비웠던, 세헌이었다.
두고 간 게 있어 사무실로 잠깐 되돌아온 그는 윤신의 방에 불이 여전히 켜져 있다는 것과 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을 한꺼번에 인지했다. 세헌은 반사적으로 빛을 따라갔다.
활짝 문을 열자, 아크릴 칠판 양쪽에 사건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둔 기록이 정면에 보였다. 연대기처럼 적어서 그 밑에 핵심들을 기재해 둔 모양새가 모범생들의 필기 습관처럼 가지런했다. 검사의 공판 준비용 서면들, 펌의 반박, 그리고 검사의 재반박 서류까지 모든 증거들과 쟁점들이 가능한 한 단순한 언어로 기재되어 있었다.
사건에 대해서 대충 이해하고 있을 뿐 상세하게는 알지 못하는 세헌에게도 흐름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잘 정리된 상태였다. 조금 부풀려 표현한다면, 이걸 숙지해 법정에 들어가도 변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윤신에게 준 시간은 겨우 이틀이었다. 수천 장의 서류를 혼자서 보고 이만큼 해냈다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B+?”
시험관처럼 점수를 매기던 그는 칠판을 가만히 주시하더니 채점 결과를 약간 수정했다.
“아니다, A-.”
느긋하게 방 안으로 입성한 그는 테이블 주변에 취합되어 있는 서류 한 부를 손에 쥐었다. 앞 장을 보니 각 사건 재판에서 쓰일 증거의 동의·부동의 의견들을 나름대로 작성해 본 듯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인드가 외부인이네. 이걸 어떻게 가르친다.”
나지막하게 혼잣말한 그가 뒷면을 좀 더 펼쳐 보려 하던 때였다.
따각따각. 누군가 다가오는 낮은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느낀 세헌이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기치 않았던 손님을 보고 깜짝 놀란 윤신이 머그 컵을 손에 힘껏 쥔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하고 온 모양인지 평소보다 얼굴이 어린아이의 보얀 살결처럼 희끄무레했다.
“강 변호사님?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외부 미팅 후 바로 퇴근하실 줄 알았는데요.”
“4년 차. 퇴근 안 해?”
“아, 네, 오늘은 여기서 밤새워야 할 거 같아요.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서 잠깐 씻고 온 겁니다. 그런데 저 계속 4년 차라고 부르실 거예요? 저도 이름이 있습니다. 이러다 다들 제 이름 까먹겠어요.”
그는 비웃듯이 픽 웃었다.
“난 낯가리느라 나름대로 최대한 예의를 차리고 있는 건데.”
“이름 대신 4년 차라고 부르시는 게요?”
“어차피 이 펌에서 아무도 네 이름 안 불러. 다들 낙하산이라고 부르지.”
입사한 지 한 달째였다. 그동안 아무도 제게 먼저 알은척을 하지 않길래 처음엔 이 펌의 분위기가 서로 데면데면한가 싶었다. 한데 구내식당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제 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상황을 반복해서 맞닥뜨리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일종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낙하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까 싶긴 했어요. 탁 비서님이 그러시는데, 저 처음 출근한 날 사옥 전 층에서 제 프로필 돌려 봤다면서요. 역시 방을 옮겨 달라고 해야 할까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 그리고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면, 날 놀라게 만들어.”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가끔 도련님답지 않게 주제 파악을 잘할 줄 아는 게 흥미롭긴 해.”
말을 마치자마자 거침없이 걸음을 뗀 세헌이 윤신을 향해 걸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신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쩌다 보니 벽면에 등이 닿았다. 옆의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침내 그 앞까지 바짝 다가온 세헌의 커다란 손이 윤신의 시선이 닿아 있던 문을 날카롭게 닫아 버렸다.
타악.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겨지자 윤신은 이 방의 공기가 기이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예고도 없이 이러는 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 다른 때와 달리 지금은 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이쪽 일을 들여다봐 줄 바깥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리라.
긴장한 윤신이 물끄러미 제 앞의 세헌을 응시했다. 세헌은 그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 좋을 대로 손끝을 뻗어 풍성한 속눈썹을 건드렸다. 그 위에 물기가 조금 맺혀 있었던 모양인지 약지에 묻어난 수분기를 윤신의 입술 위에 꾹 눌러 닦았다.
“읏, 뭐 하시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나머지, 윤신은 머그 컵 손잡이를 놓쳐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강!
운동 에너지를 잃어 가는 팽이처럼 몇 번 비틀거리던 컵이 결국 모로 누워 새카만 색 커피를 쏟아 냈다. 쫄쫄 흐르는 액체가 두 사람의 발치를 적셔 갔다. 그걸 본 윤신이 바닥에 고인 커피를 휴지로 훔치려고 하는데, 세헌이 손을 앞으로 척 뻗어 동선을 통제했다.
“움직이지 마. 내 용건 아직 안 끝났어.”
“하지만 이거부터 닦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일의 우선순위는 내가 정해. 어쏘는 내 명령을 따르는 거고.”
독선적인 대답과 함께 윤신의 매끈한 턱을 쥐어 위로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아직 촉촉한 눈 주변을 보다 꼼꼼하고 신중하게 살폈다. 그 눈빛은 고집스럽고 끈질기기 짝이 없었다. 그 덕분에 윤신은 그의 눈길이 닿는 자리마다 신경들이 모조리 수축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느닷없이 나타나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
탐색당하는 기분이 들어 창피해진 마음을 속으로 애써 가라앉히는 사이, 세헌이 넌지시 질문했다.
“충혈됐군. 왜?”
“글쎄요. 피곤해서 아닐까요.”
“그게 다야?”
“뭐가 더 있어야 합니까?”
“나야말로 글쎄.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눈을 가늘게 뜬 세헌은 뿌리치듯이 턱을 놓아주었다. 다만 여전히 시선은 말간 얼굴 위에 틀어박힌 채였다. 저 날카로운 눈매를 잠시간 마주하고 있자니, 돌연 윤신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번뜩 떠올랐다.
‘혹시 예전 일을 기억하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지레짐작했지, 세헌은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적이 없긴 했다.
몇 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윤신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세헌이 그 옆벽에 기대선 채 꽤 한참 동안 곁에 있어 주었다. 서로 이름조차 몰랐으면서 말이다. 그는 상복 입은 제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아들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자신은 한참 뒤에 예전 신문 기사를 찾다가 그가 ‘그’ 강세헌이라는 걸 인지하게 됐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당혹감을 느낀 윤신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이 오묘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반전시키기 위해 머릿속에 있던 아무 말들을 모두 꺼내 입에 담았다.
“벼, 변호사님. 저 예전에 로스쿨 다닐 때 경영권 관련 범죄로 모의 법정 준비하다 판례를 하나 봤는데요. 저축 은행 대표 이사 업무상 배임이었거든요. 왜, 5년 전쯤 나라가 떠들썩했었던…… 다들 무조건 실형 예상했는데 결국 집행 유예로 만들어 내셨죠.”
다급히 또 다른 화두를 꺼내자 그가 이내 제 눈에 고인 물방울에 흥미를 잃은 듯 뒤로 몇 걸음 물러나 파티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안도한 윤신이 덧붙였다.
“줄곧 궁금했어요. 그때 해외에 숨어 있던 동업자 어떻게 데리고 나오셨던 거예요? 그 사건 좀 찾아보니까 검사 측은 동업자가 증인으로 절대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더라고요. 증언하면 본인이 한 치명적인 회계 실수도 드러나게 될 테고, 대표 대신 입건될 테니까요.”
잠자코 질문을 듣는 듯하던 세헌의 안색이 미묘한 빛깔로 변했다.
그의 뇌리에 그 사건을 다루던 때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던 탓이다.
타인을 움직이게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엄청난 화술이나, 대단한 설득 기법이 아니다. 진짜 쓸모가 있는 건 바로 약점이다. 지킬 게 많은 사람은 스스로 강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예컨대 가족이나, 재산, 혹은 명예 같은 것들이 그렇다.
세헌에겐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이 없었다. 재산도, 명예도 지니고 있으면 편하다고는 생각하나 그게 간절하지는 않았다. 수호해야 할 게 없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상까지 올라오기 위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뭐가 다른가. 모두가 결과만을 기억했다.
“너 같은 부류들이 절대 안 할 짓으로.”
그리고 그의 밑에 있을 거라면 앞으로 윤신이 배워야 할 방법이기도 했다. 하나 세헌은 굳이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혹시 대가 제공하셨나요? 가장 쉬워 보이기는 하는데요.”
그는 무한한 상상의 영역에 맡기겠다는 양, 입을 다물었다. 매우 미려하지만 죄책감이라곤 하나도 비치지 않는 얼굴을 가만히 보던 윤신은 제 짐작이 맞는다고 지레 확신했다. 곧 씁쓸해하는 말투로 목소리를 뱉어 냈다.
“주셨군요. 여기는 제 생각대로 나쁜 짓 하는 곳이네요.”
“돈 버는 곳이지. 뭐가 됐든 내가 동업자를 법정으로 이끌어 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그래도 변호사가 하면 안 되는 짓인 건 맞잖아요. 그 바람에 동업자 쪽은 대표 이사 죄까지 전부 떠안고 실형을 선고받았어요. 그 사람 인생은요? 최소한 거기 세울 거라면 방법이라도 정당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은 죄만큼 형을 언도받은 거겠지. 난 그와 별개로 내 클라이언트를 구한 거고.”
“아뇨. 제가 알기로 괘씸죄로 거의 두 배를 받았어요. 그리고 수석님은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계셨을 거예요. 시뮬레이션 해 보고 거기 세웠을 테니 일종의 대타죠. 동업자한테도 죄가 있다는 건 꽤 좋은 방패가 돼 줬을 거고요.”
“그게 그렇게 안타깝나? 그럼 네가 히어로처럼 나타나 변호해 주지 그랬어.”
“전 그때 로스쿨…….”
날카롭게 랠리를 이어 가던 세헌은 돌연 윤신의 말허리를 불쑥 잘랐다. 이젠 익숙했다.
“그만. 너 딱 이럴 것 같더라. 이래서 반대한 거였는데. 난 너 같은 애들이 싫어.”
“…….”
“가련다. 4년 차는 걸던 목숨 마저 걸어.”
“강 변호사님?”
이곳에 홀연히 왔을 때처럼, 그는 또 갑자기 돌아섰다. 제멋대로라서 바람처럼 느껴지는 불손한 태도가 인생에 거칠 게 없어 보이는 세헌과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윤신의 방을 거침없이 벗어났다. 그러고는 본인 집무실에 들러 불을 활짝 켜고 뭔가를 챙기나 싶더니 이내 빠르게 가시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전방을 잠시간 밝혔던 건너편의 불빛이 다시 자취를 감추고, 세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윤신도 그제야 편안하게 의자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머그 컵에 담아 온 커피는 이미 다 식어 탁류처럼 제 방 이곳저곳에 얼룩을 남긴 상태였다.
윤신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괜히 그의 살갗이 닿았던 아랫입술을 만져 보다가, 기분이 이상해져 손을 떼어 냈다. 야릇한 공기가 민망해서 말을 돌린다고 한 건데, 이런 일에 서툴러서 적절히 통제가 안 되는 바람에 세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미치겠다.”
조용히 앉아 세헌과의 대화를 곱씹다 보니, 새삼 궁금증이 샘솟았다.
수수께끼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강세헌일 것이다. 윤신은 세헌처럼 다 갖춘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큰 키와 늘씬하고 탄탄한 몸 덕분에 스타일이 몹시 좋았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매력을 느낄 만한 수려한 외모를 갖췄다. 아울러 비상할 정도의 메타인지와 두뇌 회전, 대담한 성격에 뛰어난 언변까지 모자라는 게 없었다. 정말이지 그는 외적으로 완벽했다.
양손에 가진 게 저렇게 많은데. 대체 왜 저리 인류애를 잃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큰 결심을 하고 이곳에 온 거였으나 뭔가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부터 삐걱거렸다. 세헌과 자신은 애초에 가치관부터가 너무 달랐다. 그도 그걸 잘 아는 것 같았다.
〈너 딱 이럴 것 같더라. 이래서 반대한 거였는데.〉
쪼그려 앉아 금이 간 머그 컵을 주워 들던 윤신은 허탈한 음성으로 혼잣말했다.
“한 달 만에 잘리는 거 아니야?”
도국으로 갈 것을 완강하게 요구하던 누나의 얼굴을 떠올린 윤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