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끼익.
윤신을 태운 차량이 서초동 법조 타운 인근 주상 복합 아파트 공용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 고급 세단과 슈퍼 카 따위들이 사방에 촘촘하리만치 가득했다.
주차장 전용 통로로 향하는 출입문은 어느 갤러리의 입구처럼 웅장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길 지나치면 꼭 유명 호텔에서 꾸며 놓은 크리스마스의 로비처럼 화려한 홀이 나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아파트 초입부터 본 건물을 거쳐, 뒤편의 근린공원까지 전체가 꼭 하나의 작은 왕국 같았다.
한눈에 봐도 사치스러운 이 아파트는 법무 법인 〈도국〉 소유의 사택이었다.
〈도국〉은 변호사 400여 명과 변리사 100여 명, 그리고 지적 재산권 등에 필요한 기타 인력까지 정식 전문직 직원만 천여 명에 육박했다.
그들 중 희망하는 경우 직급에 맞게 층을 배정받아 이곳에 거주했다. 복지 차원으로 임직원 가족 단위까지 수용해 총 천 세대가 넘는 세 개의 단지가 거의 차 있다고 들었다. 제일 평수가 큰 A동의 로열층에는 강세헌 변호사도 살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윤신도 최근 이곳에 이사한 참이었다.
보조석에 두었던 서류를 챙기던 그는 내리려다 말고 그 안에서 제 이력서 사본을 꺼내 보았다.
‘진짜 이래도 되나. 살면서 한 번도 낙하산 타 본 적 없는데…….’
몇 주 전, 윤신은 누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매 사이는 워낙 다정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혼자서 두 자녀를 키웠고, 나이 터울이 있는 누나 이경은 윤신을 거의 아들처럼 돌봤다. 자연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세상에 단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녀가 결혼한 뒤로는 그렇게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여전히 윤신에게 누나의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제게 도국에 이력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을 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이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몸만 가면 된다는 첨언을 했을 땐 더더욱 그랬다. 제 인생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 적이 없었던 터라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강세헌 변호사도 그날 내 재판을 보러 송 수석님이랑 같이 왔던 건가.’
누나는 그가 매우 적은 수임료로 밤낮도 없이 일하는 것 대신, 부디 경제적 안정을 찾길 바랐다. 도국에서의 경력이라면 재판장에서도 힘이 생길 거라고 조언했다. 혼자 지내는 동생을 여러모로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도국이 어떤 로펌인지는 윤신도 잘 알았다. 돈이 되는 국내외 기업들만 상대하고, 일반인은 법률 상담조차 해 주지 않는 곳이었다. 입사하면 여태 해 오던 공익 성격이 짙은 사건들을 수임하지 못할 건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민 끝에 이 일을 수락했다.
그건 이런 부탁을 한 게 다름 아닌 누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말에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건 자신이 그저 순한 동생이어서도, 단지 두 사람의 유대 관계가 깊어서도 아니었다.
누나는 현명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윤신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대체로 동생의 자유 의지를 인정해 주었다. 그녀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조차 윤신의 입장에서 아주 신중하게 고민해 본 뒤 다른 방식은 어떻겠냐고 매우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그런 누나가 자신이 내켜 하지 않을 일을 먼저 권했을 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터다.
다만 그녀가 안심할 때까지 얼마간 버티다, 적당한 시기에 다시 나올 작정이었다. 그 정글 같은 펌에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뒤 사직한다면 그녀도 이해해 주리라.
“하아, 모르겠다.”
서류를 도로 봉투에 넣은 윤신은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며칠째 반복해서 보는데도 영 적응되지 않는 장엄한 주차장 로비 쪽으로 다가서는데, 때마침 차에서 내리던 웬 남자가 눈에 띄었다.
슬림하지만 탄탄한 게 확연히 느껴지는 뒷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조심스럽게 남자를 뒤따라 걷던 윤신은 출입구에 카드 키를 대는 이의 모습을 살폈다. 기다란 손끝의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 좋은 손톱이 인상적이었다. 매우 청결해 보였고, 한편으론 무척 까다로워 보였다. 또한 선이 날카롭지만 깨끗하게 떨어지는 옆모습이 퍽 미려했다. 그리고 은근하게 익숙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헉.’ 하는 소리를 속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강세헌이었다.
이렇게 빨리 그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세헌은 윤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앞을 향해 걸었다.
주차장 로비의 중앙으로 가면 세 갈래 길이 나왔다. 거기가 아파트 각 동으로 진입하는 교차로였다. 남자는 그곳까지 말없이 걸음을 내딛다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늘씬한 팔로 윤신의 앞을 척 막아 동선을 통제했다.
자신이 뒤에 있다는 걸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느닷없이 선로가 막혀 당황한 윤신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창백한 피부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난처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려는 제게 그가 말을 붙였다.
“우리 또 보네요.”
순간 ‘또’라고 묻기에 오래전 두 사람이 잠시 마주쳤던 일을 말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윤신은 금세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사이에 다른 사건이 한 가지 생겼다는 걸 재빨리 떠올린 덕분이었다.
“그러게요. 법정에서 뵌 뒤로…… 또 뵙네요.”
“잠깐 시간 괜찮습니까?”
대화를 제안하는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몹시 매력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자신은 그가 이 화려한 외모만큼 내면 또한 아름답지는 않다는 걸 대충은 아는 사람이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여태 귀동냥으로 들은 강세헌은 기회주의자였다.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또 무자비했다. 합법적인 형태라면 누구와의 어떤 물밑 거래든 수용하고, 때론 변호사 윤리를 어기고 편법마저 불사한다는 악질적인 소문도 돌았다. 그 덕인지 그는 게임에서 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윤신이 대답하는 사이 중문을 통해 로비로 내려오는 거주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로 마주 선 두 사람을 힐끗대며 주차장 쪽으로 이동했다. 이 아파트의 거주민인 이상 깊든 얕든 도국과 관계있는 사람들일 테고, 필연적으로 세헌이 누군지를 알기 때문인 듯했다. 윤신은 꽤 난감해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나 세헌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타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편 같았다.
“나 알죠.”
이 바닥에서 몇 년 구른 사람치고 강세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뜬금없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윤신은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압니다. 도국 강세헌 변호사님.”
“안다니 잘됐군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하겠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귀하를 또 뵙게 된 걸까, 해서요. 여긴 도국의 사택입니다.”
직접 법정까지 자신의 재판을 보러 와 놓고 이제 와 왜 이런 걸 제게 묻는 건지 몰랐다. 혹시 자신이 누나의 입김으로 입사하게 된 게 못마땅하거나, 또는 짐작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로 자신을 떠보는 건가 싶어 최대한 에둘러 대꾸하게 됐다.
“또 마주칠 인연이었던 거 아닐까요.”
애써 다정한 어조로 눙치듯 응답하니, 그의 나른한 시선이 윤신에게 콕 틀어박혔다. 창백한 안면은 꽤 흥미로워하는 기색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인연이라. 나 그거 안 믿는데. 원인이 희미하잖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만난 건 명확한 원인이…… 있는 걸로 압니다.”
“도국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나랑은 그런 게 있으면 안 됩니다. 난 반대했어요.”
얘기가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송미희 변호사와 누나가 제 입사와 관련한 상황을 모두 정리한 걸로 전해 들었다. 몇 주 전 자신의 형사 재판을 그녀와 강세헌 두 사람이 함께 보러 왔던 기억이 제게 있기에 의심하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 한데 이미 사택으로 이사까지 한 마당에 도국의 간판인 그가 반대했다는 말을 들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윤신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세헌이 가만히 덧붙였다. 덤덤한 음성이었으나, 미묘하게 표정과 말투가 시니컬했다.
“재판은 잘 봤어요. 찰스 디킨스는 나도 좋아합니다. 〈위대한 유산〉의 그 문구를 활용한 건 아주 적절했어요. 변론에도 군더더기가 없더군요.”
“감사합…….”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윤신이 칭찬에 반사적으로 답하자, 그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감사 인사는 내 얘기 다 끝나면 하세요. 하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
“귀하에게 사감은 없습니다만, 내가 보기에 도 변호사는 대형 로펌 스타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저 밖엔 얼어 죽기 직전에 내몰린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구해 드리는 게 본인 가치관에 더 맞는 일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맥락에 허술한 구석이라곤 없어 반박하지 못했다. 도국에의 입사는 확실히 제 의지나 가치관과는 반하는 일이었다.
하나 세상일은 개인의 욕심대로만 돌아가 주지 않았다. 최소한 자신이 간절히 원해서 그 로펌에 들어가게 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걸 노련한 변호사인 강세헌이 짐작하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붙들고 말을 건네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이미 입사가 정해진 저한테 굳이 이런 말씀을 꺼내시는 이유는요.”
“난 인과 관계 없는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걸 매우 싫어합니다. 우리가 공적으론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요. 아주 가끔 이렇게 집 근처에서나 보죠. 우연히.”
이윽고 할 말이 모두 끝난 모양인지 그는 가볍게 묵례하곤 일방적으로 몸을 틀었다. 윤신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난데없이 서리를 맞은 터라 그에게 뭐라 항변하려던 윤신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세헌은 몇 걸음 더 내디뎌 A동 방향으로 진입했다. 투명한 중문을 통해 승강기를 타러 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이윽고 양문형 문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태워 짧은 여정을 떠났다.
세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혼자가 된 윤신의 얼굴 표정이 차분한 모습에서 기막혀하는 기색으로 슬며시 변했다.
‘표정, 말투, 싸가지……. 으.’
오한이 이는 것처럼 몸을 떤 윤신은 세헌이 사라진 자리와 정반대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C동. 저기가 자신이 가야 할 곳이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승강기를 잡아타고, 마침내 제집으로 돌아왔다.
윤신은 넥타이를 풀면서 누나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금세 응답했다.
- 네, 변호사님. 어쩐 일이세요?
“실장님, 저 윤신이에요. 뭐 좀 여쭤보려고요. 도국 강세헌 변호사를 아파트 주차장 로비에서 마주쳤어요. 그런데, 그분이 절 반대했다던데요.”
- 그게, 강 변호사님과 송 변호사님 간에 조금 의견 충돌이 있긴 했던 것 같습니다만…….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윤신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조금 전 로비에서 세헌은 적은 말로 아주 많은 의사를 제게 전달했다. 이곳은 도국의 사옥이다. 집 근처에서 우연히 보자는 건, 제 입사까지는 이미 끝난 얘기니 방관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리고 공적으로 부딪치지 말자는 건, 거기까진 참아 줄 테니 최소한 본인 앞에서는 절대 알짱거리지 말란 의미다.
윤신도 세헌 같은 성향의 사람과는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자신은 엄밀히 말하면 낙하산인 셈이니 실력주의자인 그의 눈에는 썩 차지 않을지 모른다. 하나 피차 유감이라 해도, 하늘 같은 파트너가 일부러 일개 변호사인 자신을 붙잡고 경고했다는 건 뭔가 의미심장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반기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예민하게 말이다.
누나가 원하는 대로 몇 년간은 죽은 듯 버텨 볼 셈이었는데,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어요. 대형 로펌은 위계 서열이 엄청 확실하다던데요. 제 인사에 불이익을 주진 않을까요? 도국에서 강세헌 변호사 말은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 정 마음에 걸리시면 사모님께 말씀을 전할까요? 조치를 취해 주실 겁니다.
“아뇨. 그러다 말이 와전되면 입장만 더 곤란해질지도 모르고…… 일단 생각 좀 해 볼게요. 그건 그렇고 누나는요? 지난번에 만난 이후 또 소식이 뜸하네요. 잘 지내는 거예요?”
순순히 대꾸하던 상대는 별안간 잠시 뜸을 들였다. 답변을 망설이는 기미였다. 그러다가 이내 덤덤히 응답했다.
- 물론입니다. 저, 변호사님. 실례지만 중요한 용건이 끝나셨으면 이만 끊어도 되겠습니까? 급히 하던 일이 있어서요. 추후 필요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다시 연락 주십시오.
“아, 일하시는데 방해했나 봐요. 그럴게요. 고생하세요, 실장님.”
비서실장의 대답을 곱씹던 윤신이 공손히 인사하곤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분명 조금 전 누나가 잘 지내냐는 말에 대답을 머뭇거렸다. 게다가 이 화두가 지속될 걸 우려해 통화를 급히 매조지려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미심쩍은 기분을 애써 억누른 윤신은 침실이 아닌 서재로 먼저 들어섰다. 가로로 긴 책상에 걸터앉아 옆에 세워 둔 아크릴 칠판을 직시했다. 그 위에는 도국 소속 변호사와, 외국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중 일부 목록이 쭉 사진과 함께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펌을 좌지우지하는 주요한 인물들의 경우 미리 이들의 얼굴과 직위를 외워 두어야 탈이 없을 것 같아 정리해 둔 참이었다.
“강세헌 변호사…… 이력이 화려하네.”
아래부터 직급에 따라 시선을 끌어 올린 윤신의 눈동자에 대표 바로 아래 파트너 변호사들이 박혔다. 나이 지긋한 변호사들 사이에 홀로 젊은 세헌이 그중 하나였다. 영세한 규모의 법률 사무소라면 모를까 대형 로펌의 파트너치고 그는 눈에 띄게 젊었다. 강세헌이 변호사로서 얼마나 승승장구해 왔는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입증이 가능했다.
역대 최연소 한국대에 입학한 그는 동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도국에 입사했다. 이후 몇 년간 두각을 드러내며 주니어 어쏘 변호사[3] 과정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해당 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돌아왔을 때는 몸값이 한참 뛰어 있었다.
당시 상위 대다수 로펌이 그와의 계약을 타진했으나, 의외로 세헌은 모교 선배인 미희가 있는 도국으로 다시 돌아갔던 모양이었다. 이후 자본까지 출자해 매우 빠른 속도로 해당 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는 듯했다.
로펌에서 실력 있는 파트너의 한 마디는 절대적이다. 특히 어쏘 변호사에게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그가 자신을 겨냥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난 인과 관계 없는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걸 매우 싫어합니다.〉
딱 그럴 것 같이 생겼다. 그는 뭐랄까,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혐오할 것 같은 아주 냉정한 인상이었다. 숱하게 들어 온 말이 많았지만 설마 실제로도 그럴까 싶었는데, 직접 마주 서서 대화를 해 보니 소문보다 더 차가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싹텄다.
모두의 환영을 받고 입성해도 그곳에서의 일들이 골치를 아프게 만들 판에, 다른 이도 아닌 강세헌에게 제 첫인상이 영 나빴던 것 같아 난처했다. 다만 펌에서도 제일 몸값 비싼 파트너니 자신과 마주칠 일이야 그다지 없으리라. 게다가 피차 동도 다르니 출퇴근 시간만 겹치지 않는다면 부딪칠 상황은 적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느낌이 안 좋았다.
“난감하네.”
툭, 손가락으로 그의 사진 위를 건드린 윤신이 조용히 한숨을 뱉어 냈다.
* * *
미희의 집무실 접견용 소파에 방의 주인과 세헌이 마주 앉았다. 다리를 척 꼬고 앉아 상대방을 바라보는 세헌의 눈동자에는 황당해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 뒤로 텔레비전 모니터가 뉴스를 송출했다. 커다란 화면 속엔 수한그룹의 차남이자, 윤신의 매형인 남자의 매섭고 사나운 인상이 비쳤다.
기자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 수한 홀딩스의 유정원 대표가 오늘 오후 강남구 수한그룹 본사 대회의실에서, 최근 불거진 임직원 폭행 논란과 관련해 입장을 표명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삑. 리모컨으로 등 뒤의 화면을 꺼 버린 세헌이 돌연 찾아온 적막 속에서 입을 열었다.
“내 담당 어쏘를 대체 왜 내 면담도 없이 뽑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저조한 주파수로 내뱉는 그의 말에 미희가 어색하게 미소를 보였다.
“세헌아, 도 변 평판 들어 보니 애가 되게 야무지더라. 시작한 건 끝장 보고, 성격도 꼼꼼하고, 판례도 잘 찾고, 수사 기록 속독도 잘한다네? 게다가 까마득한 선배한테도 기죽는 거 없이 할 말은 한대. 너 그런 애들 좋아하잖아. 일 잘하고 깡다구 있는 애들.”
“물론 그런 애들 좋아하지. 내 말뜻을 알아 처먹기는 한다는 전제하에.”
“강세헌, 좀 열린 마음으로…….”
“열린 마음이길 바랐으면 내 의견을 먼저 물었어야지. 사택을 이미 줬던데?”
반박할 계제가 없어진 그녀가 입을 슬쩍 다물자, 세헌이 덧붙였다.
“내가 분명히 싫다고 했잖아. 내 의견 무시하고 채용할 거면 최소한 나한테 보내선 안 됐어. 사이즈 안 나와? 걔 내 밑에서 일 못 해. ‘이건 법에 저촉됩니다.’, ‘이건 도의에 어긋납니다.’, ‘이 M&A로 잡아먹히게 될 상대 기업 직원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사사건건 훼방 놓을 거야. 나 어쏘가 눈 동그랗게 뜨고 덤벼서 내 시간 낭비하는 꼴 못 봐. 내보내.”
“그게 그렇게가 안 돼.”
“그럼 송무 팀으로 보내든가. 그나마 걔랑 잘 맞겠네. 난 못 데리고 있어. 일이 장난이야?”
꽤 완강하게 나오는 세헌을 지그시 보던 미희가 설득하듯 답변했다.
“강 수석, 아니 강세헌 팀장. 팀마다 주니어들이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그런데 너희 팀만 주니어가 없어. 펌에서도 제일 중요한 회사법 팀에 주니어 어쏘가 없다고. 왜게?”
“내 눈에 차는 새끼가 없으니까.”
“그래! 그동안 네 직속으로 보냈던 애들 다 백기 들었어! 너 성격 아주 지랄 같아서 주눅 들고, 울고, 관두고. 그 꼴만 몇 번째라 네 팀엔 어린 애들은커녕 내구력 있는 시니어들밖에 없는 거 알지? 도 변호사는 네 말대로 사이즈 나와서 받아들인 거야. 아니, 잡일시킬 주니어도 팀에 한둘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이 말에도 그가 용납할 수 없겠다는 듯 대꾸하려던 때였다. 미희가 손을 척 내밀어 그의 뒷말을 저지하더니 내선 인터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비서실에 연락했다.
“도 변 대기하고 있죠? 강 변 사무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해요. 10분 내로 보낼 거니까.”
그녀는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세헌을 향해 턱짓했다.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야.”
“세헌아, 일단 써 봐. 써 보고 얘기해도 안 늦어. 걔 엄청 똘똘해.”
“이래서라고. 나 도국에 꽂은 이후로 송 수석이 처음 데려온 낙하산이야.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데려올 가치가 있었단 뜻이겠지. 하지만 우리 펌에 파트너 변호사가 한둘도 아니고, 부서도 스무 개가 넘는데 굳이 싫다는 내 앞에 들이밀 정도는 아니야. 이건 본인 능력 외에 내 옆에 둬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정곡이었다. 처음부터 눈치 빠른 세헌에게 눈속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미희가 또 한 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그는 더욱 제 판단에 확신이 생긴 듯했다.
“표정 관리도 안 하는군.”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지 마. 내가 법정에서 간 보기 시작할 때부터 너도 우리 은사님 아들인 거 감 잡았잖아. 한국대 로스쿨에서 민사 소송법 강의하셨던 도 교수님. 많이 닮았더라.”
“난 그런 사감으로 일 안 해. 내가 얼마짜리 변호산지 몰라서 이래?”
“사감 아냐. 이건 판돈이 매우 커. 도 교수님 아들이라는 건 수한그룹 둘째 며느리 도이경 씨의 단 하나뿐인 남동생이라는 뜻도 돼. 너 예전에 이경 씨, 교수님 장례식장에서 봤었잖아. 기억하지?”
곰곰이 그날의 일을 떠올리던 세헌이 뜬금없이 입술을 꽉 감쳐물고 짓이겼다. 미세하게 불쾌함이 안면에 떠올랐다. 지금까지와의 반응과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강세헌, 왜 그러는데?”
“신경 꺼.”
“아무튼. 세헌아, 이건 네가 양보해야 해. 펌을 위해서야. 나 너한테 이런 부탁 웬만하면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만큼 중요한 일인 거라고.”
로펌의 이익 취득 구조상 대기업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이었다. 법률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건 개개인이 의뢰하는 자잘한 송사들이 아니었다. 기업들의 분쟁을 해결해 준다거나, 투자 혹은 매각 따위를 목적으로 법률 자문을 하는 등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수익이 생겼다.
특히 국내 기업 중 수한그룹의 총괄 회장은 도국의 대표인 미희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 덕에 로펌이 개업할 때부터 본사 내 많은 영역의 수임을 이곳에 맡겼다. 아울러 계열사의 프로젝트별 법적 자문도 일부 맡길 것을 추천하곤 했다. 그것들을 고려하면 펌의 입장에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구인 셈이다.
물끄러미 그녀를 마주 보던 그는 ‘탁.’ 소리가 나도록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찌푸린 미간으로도 이 순간의 심경을 다 표현할 순 없는 건지, 손짓에도 짜증이 깃들었다.
“수한이야? 아니면 도이경 관장 개인인가?”
“수한이 곧 도이경 아니겠니? 난 거기 특별 고문 변호사고, 우리 펌은 1년에도 수십 건씩 수한 계열사와 일을 해. 무시할 수 없어.”
“동생 안 받아 주면 수임이라도 끊겠대?”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런 수순도 각오해야겠지. 네가 본인 동생을 밑에 두고,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주길 원해.”
결국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가 학교인가? 내가 변호사가 아니라 교사 자격증을 땄다는 걸 나도 이제 알았군.”
“표면적 이유는 그런데, 너무 몸 안 사리고 일하니까 울타리 만들어서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아. 그런 측면에선 강세헌은 두루두루 괜찮은 방패긴 하잖니.”
“선생이 아니라 보모를 원하는 거였네. 육아에도 취미 없어.”
“그러지 말고 계산기를 돌려 봐.”
하아. 허탈해하는 숨을 몰아쉰 세헌의 눈이 복잡한 기미로 젖어 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기민하게 알아챈 미희가 덧붙였다.
“너 같은 기업 사냥꾼 입장에서 수한 사모 남동생 데리고 있는 거?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이 바닥 정보력 싸움이잖아. 관점에 따라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굴러들어 온 거라고. 자기 동생 있는 덴데 우리한테 큰 건을 맡기면 맡겼지. 나쁘겐 안 해. 안 그래?”
거기까지 들은 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결국 수한의 청탁인 거네. 그것도 협박성.”
“대가성이라고 해 두자. 연봉 조금 쥐여 주는 대신 우리가 얻는 게 매우 클 테니까.”
윤신에 대한 판단을 떠나 긍정적인 면만 따지고 본다면 그의 입장에서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거래이긴 했다. 전 인류에게 거의 예외 없이, 가족은 약점이다. 고로 그는 수한의 약점을 거머쥐게 되는 셈이다. 당장 수확할 열매는 없을지언정, 멀리 보고 씨앗을 뿌려 두는 계기 정돈 되어 줄 터다. 세헌이 도 교수의 제자이기도 하니 상호 간의 명분도 확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썩 마음에 차지가 않았다. 외려 찜찜했다.
왜 하필 자신이었을까.
누나라면 동생의 올곧은 성향을 결코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적합한 교사도, 보모도 못 됐다.
“살아남는 방법……. 그쪽 요구 사항은 그게 다였어?”
“한 가지 더. 네 밑에 두되 대형 로펌 시스템에 적응할 때까지 몇 달간은 프로 보노[4] 정도의 케이스만 중점으로 맡겨 달래. 섭외 사건은 아직 서툴 거라고.”
“역시 동생을 아주 잘 아는군. 그럼 나한테 보낸 게 더 수상한데.”
“네 실력을 아는 거지. 매년 파트너 변호사들 어느 정도 봉사량 채워야 하는데, 넌 한 번을 안 채웠으니 마침 잘됐잖아. 당분간 네가 해야 할 시간을 그 애한테 할당하면 어때. 무료 법률 상담이나, 프로 보노들로. 도 변 타율도 괜찮겠다, 기록은 네 이름으로 올리고 소송이나 실질 상담은 도 변이 들어가면 되지 않나?”
“매년 기부하면 됐지 구질구질하게 마음에도 없는 봉사까지 해야 돼?”
미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됐지만 펌 내규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몰라?”
“규정을 바꿔.”
“만에 하나 바꾼대도 넌 해야 돼. 남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라고. 너 지난번 구조 조정 케이스, 실업자가 예상보다 많이 생겨서 너무 여론이 나빴어. 대외적으로 도국이 반성하고 있단 느낌을 줘야 한다고.”
이렇게까지 해서 도윤신을 고용해야 하나 싶었던 세헌은 입을 감쳐물었다. 물론 미희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도국에 큰 미련이 없었다. 어디로 갔어도 자신은 이만큼 성과를 일궈 냈을 터였다.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관두면 그만이다.
다만 한 가지.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던 까마득한 모교 선배 미희에게 갚을 빚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남과 의리나 우정, 부채감 따위의 관계로 얽매이는 일을 혐오했다. 감정이야말로 일종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이 부탁을 들어주면, 그간의 빚들을 모두 청산하고 관계를 제로로 돌릴 수도 있을 듯했다.
“도련님 모시기는 내 업무 목록에 없어. 선배가 타협안을 제시해 봐. 들어는 보지.”
“네 배당 비율을 좀 늘려 보자. 섭섭하진 않을 거야.”
“돈으로 해결하겠다. 육아가 얼마나 힘든 건 줄 모르는군.”
미희는 발끈했다.
“너 우리 펌에서 제일 잘 버는 변호사야. 이미 너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책정돼 있다고. 배당률 높이겠다고 한 것도 내가 아버지 설득하느라 정말 애쓴 거란 말이야. 파트너 변호사 직함 공짜 아니다? 펌에 투자하라고 주는 비싼 직함이지.”
“남의 돈 떼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돈 가지고 생색내는 거 안 창피해? 배당은 됐어. 로펌도 운영을 해야지. 어쏘들 월급도 주고.”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앞으로 펌 내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움찔한 그녀가 건조한 손을 쥐락펴락했다. 금세 땀이 차올랐다. 이 추상적인 조건을 세헌이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는 몰라도, 아주 효과적으로 쓰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짐작해서였다.
“나 지금 오케이하면 세헌이 너한테 말리는 거지?”
“협상은 아쉬운 게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나 간 보는 건 별로 도움 안 될 거야.”
“날도둑놈.”
그는 바로 그런 대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관두든지.”
동시에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좋아. 알겠다고. 하지만 모든 일이라는 단어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니까…….”
“구체적인 건 서면으로 보내지.”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그를 보던 미희가 별수 없다는 양 이내 핑거 스냅을 딱, 쳤다. 처음부터 꽤 파격적인 조건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그나마 충격이 적었다. 협상에서 밀린 그녀는 애써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세헌이 침착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일단 몇 가지 테스트 좀 해 보고, 쓸 만하다 싶으면 하나씩 가르쳐 볼게. 우수한 인력은 늘 필요하니까.”
“프로 보노로만 처박아 두진 말고 너희 팀 일도 섞어서 시켜. 서류는 곧 작성해서 보낼게.”
그는 그럴 거 없다는 듯이 바로 저지했다.
“아니, 아직 보내지 마. 수한 사모가 날 지목했으니 내가 안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도윤신이 여기서 일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 일단 한두 달 지켜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다시 얘기해. 계약서는 그때 쓰는 걸로 하지. 그동안은 월급 정도만 챙겨 줘.”
“데리고 일 시킬 건데 어떻게 그래.”
“내 클라이언트는 내가 선택해. 그런데 느닷없이 도 관장이 나타나서 날 낙점한 이 상황이 매우 찝찝해. 송 변한테 진 빚이 있어 참는 거야. 이 이상은 나도 타협 못 해.”
“세헌아.”
“내가 관뒀으면 좋겠어? 그럼 그냥 이 자리에서 얘기해. 방 빼고, 내 출자금 회수하고, 위임받은 건들 수거하고. 이 모든 게 하루면 정리돼.”
세헌은 후진이 좀처럼 없는 타입이라, 한번 한다면 무조건 이행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다면 미희로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걔 좀 예쁘게 봐줘라. 우리 로스쿨 직계 후배고, 존경하는 도 교수님 아들이다.”
“난 쓸데없이 누구 존경 안 해. 나를 존경하면 모를까.”
“우리가 봐 온 유일하게 멋있는 어른이었잖아.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피해자들 대변하다 돌아가신 것마저 얼마나 일대기가 완벽하니. 우리가 훨씬 부자일진 모르지만, 적어도 너랑 난 평생 못 하는 일을 하신 거야. 이렇게 마음의 빚도 조금이나마 갚자.”
“내 쪽은 딱 하나 있던 거 지금 막 털어서 이제 아무한테도 진 빚 없으니 송 변이나 많이 갚아.”
싸늘하게 답한 그는 더 이상 나눌 대화는 없다는 듯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미희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비서가 안내해 준 세헌의 사무실로 들어온 윤신은 조심스럽게 접견용 소파에 앉았다. 비서에게 눈인사하자, 남자가 마주 인사해 주면서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혼자가 되자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곳은 얼핏 본 다른 파트너들의 집무실보다도 훨씬 공간이 넓고 쾌적해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 초라한 예전 사무실 쪽이 훨씬 마음 편했다.
누난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왜 하필이면 강세헌이야.”
자신이 좋아하는 유태인들의 속담이 있었다.
당신은 의지의 주인이 되어라. 그리고 양심의 노예가 되어라.
세헌은 이 잠언의 전자는 지키되, 후자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종족이었다. 직접적으로 만나 인연을 맺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사실 로스쿨 시절부터 선배 강세헌에 대한 소문은 귀에 따갑도록 들어 왔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도시 전설이었다.
슈트를 갖춰 입은 뱀.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쓰레기.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건 그가 늘 승리를 거머쥔다는 거였다.
그의 방식은 합리적일 때도 있었고, 저열할 때도 있었다. 요컨대 노선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리 첩보는 취미고 그걸 활용하는 건 특기였다. 증인, 변호사, 검사, 기업 관계자들을 막론하고 상대측 약점을 캐내서 천연덕스럽게 압박했다는 등의 소문들을 특히 숱하게 들었다. 놀랍게도 대다수의 후배들은 그를 비난하면서도 그처럼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윤신은 판단을 보류한 나머지 소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소수 인종인 자신이 이 방에서 그를 기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송 변호사에게 듣기로 누나가 세헌을 강권했다는 것 같았다. 물론 그에게 배울 점들도 있을 터다. 이긴다는 건 강하다는 거니까. 하지만 정반대인 그들이 서로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하필이면 얼마 전 그가 눈에 띄지 말라고 직접 경고까지 했던 탓에, 이 잘못된 만남이 어떤 식으로 진척될지 알 수 없어 조바심이 크게 일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주변만 살피고 있는데, 돌연 책상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띄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혹시 나 때문인가.’
윤신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가려던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자신이 줄곧 기다리던 맹수가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눈매가 오늘도 여전히 차가웠다. 윤신은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주니어 어쏘 도윤신입니다.”
그는 맞은편 소파가 아니라 본인의 집무용 책상에 걸터앉아 윤신을 보았다.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 하기에 눈치껏 자리를 잡자 지그시 시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윤신이 난감함을 애써 감추며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아주 나른하게 벌어졌다.
“우리 자주 보네.”
말이 짧아졌다. 본능적으로 서열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 윤신이 더욱 몸을 낮췄다.
“공적으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던 말씀 이행 못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건 벌써부터 한 마디를 안 지는군. 구만리가 깝깝, 하다.”
“죄송…….”
“됐어. 먼저 몇 가지 묻지. 지금 이 상황,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인과가 있는 건가?”
도국 내 많은 부서 중 자신이 하필이면 그의 팀으로 들어오게 된 이 그림이 꽤 수상쩍고, 미심쩍고, 그래서 찜찜하다는 기색이 세헌의 잘생긴 눈썹에 드러났다. 윤신은 차분히 말을 골랐다.
“납득 못 하실 것 같습니다.”
“못 하실 것 같다. 어째서.”
“저와 수석님 두 사람이 아니라, 제삼자인 저희 누나의 의지라서요. 누난 제가 여기서 일하길 아주 간절히 원해요. 수석님껜 운 나쁘게도 전 말 잘 듣는 동생이고요.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고, 그게 다입니다.”
거침없이 대꾸하는 윤신 덕분에 세헌의 표정이 묘해졌다.
“중간에 누나가 걸려 있는데도 있는 패를 다 까는군. 대화에 방어가 없어. 도국이랑은 안 맞아도 썩 쓸모 있는 변호사인 줄 알았는데, 생각을 고쳐야겠다. 너, 실격이야.”
“필요에 따라서 완급 조절도 하긴 합니다.”
“숨긴 조커는 없는 거 확실하고?”
“찾으면 그것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인상을 다정하고 상냥하게 만들어 주는 따뜻한 색 눈동자가 세헌을 정통으로 향했다. 반듯한 태도를 비추듯, 윤신의 눈매가 또렷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신뢰해도 된다고 얘기하는 대신 가장 정직한 마음을 담아 단정한 눈빛을 세헌에게 보냈다.
서로의 선명한 눈길이 길에서 만나 접촉하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윤신은 바로 그 순간, 줄곧 세헌을 둘러싸고 있던 차가운 기류가 미세하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걸 증명하듯 흔들림 하나 없이 책상에 앉아 있던 그가 돌연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두 팔을 척 꼬고 비딱하게 몸을 기대더니, 풍성한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시울에 동공을 박아 넣을 기세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제 생각엔 한 3분쯤 침묵이 흐른 것 같았다.
아니면 훨씬 더 짧았으나, 자신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세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이경 관장이 널 나한테 왜 보냈을까.”
예기치 못한 야릇한 적요가 깨져 안도한 윤신이 재빨리 대꾸했다.
“저한텐 경제적으로 독립하길 바란다는 핑계를 댔어요.”
그동안 무료 법률 상담의 창구를 늘 열어 두었던 건 물론이고, 수임료도 클라이언트의 사정에 따라 맞춰 최저로 받곤 했던 터라 벌이 자체는 시원찮았다. 하나 윤신을 낳자마자 돌아가신 엄마 쪽 유산이 조금 되어서 돈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누나도 필요하면 집이나 차 등을 지원하는 통에 더욱 그랬다. 세헌도 대충은 그 사정이 짚이는 모양이었다.
“알 만하군.”
“그런데 아마 실제론 아버지 때문일 거예요. 아버지께서 저 같은 변호사셨는데, 말년에 지방에 내려가 어려운 사람들 도우면서 지내셨어요. 그러다 몇 년 전 과로로 돌아가셨고요.”
두 사람의 유일한 매개체는 제 아버지였다. 오래전 그들은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날,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윤신은 가끔 뉴스에서 세헌을 볼 때면 어렴풋하게 그날 일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 순간은 자주 되새기기엔 너무나도 짧았으니까.
다만, 말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세헌이 그 마주침을 기억하고 있는지 떠보는 셈이 됐다.
난감해져 말문을 닫은 윤신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유감이야.”
저 미끈한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게 될지 내심 긴장했는데, 윤신은 조금 맥이 빠졌다. 세헌의 응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차라리 그때 자신이 보였던 부끄러운 모습을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제가 되자 왜 섭섭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하긴 벌써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다. 매년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데다 기억해야 할 일도, 사람도 많은 세헌이 그런 사건 정도는 흘려 넘기는 게 도리어 당연했다.
서운한 기미를 감추며 차분하게 답하는 윤신의 입술이 붉었다.
“저도 아버지처럼 될까 봐 겁나는 걸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더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을 배우길 바라는 걸 거고요. 누나 눈엔 이상만 좇는 제가 계속 아슬아슬해 보였을 테니까요. 아마, 강 변호사님이 본인이 아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해요.”
“넌 네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
“어떤 의미에서는요. 현실 감각 제로 수준은 아니고요.”
의외로 윤신은 세헌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냉정하게 주제 파악과 상대 파악을 잘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불쾌해하면서도 동시에 꽤 재미있어하는 기색으로 물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금세 그런 기미를 지우고는 덤덤히 답했다.
“내가 지난 몇 년간 전혀 안 했던 세 가지가 있어. 프로 보노 사건, 일반 고객의 형사 사건, 우리 펌의 사단 법인에서 하는 모든 봉사 업무. 넌 당분간 이것들을 하게 될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었던지, 윤신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세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꺼려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표정이 밝았다. 예상대로 그들의 업무적 상성은 별로 좋지 않을 듯했다.
“잘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 이해하는 재능도 있는 편이고요.”
“난 그런 돈 안 되는 재능 있는 어쏘 필요 없어. 재벌 사돈 도련님 모시고 일하는 취미도 없고. 좀 더 그럴싸한 출사표 없나?”
“저 판례 진짜 잘 찾습니다. 속독도 괜찮게 하는 편이고, 대인 관계도 꽤 좋아요.”
“또.”
“일일이 나열하기가……. 시키시는 모든 일을 잘할 자신 있습니다. 제가 잘해야, 누나도 안심할 거라 목숨 걸 거예요. 뭐든 맡겨만 주세요.”
“일단 써라? 자신만만하네.”
“이해타산에 매우 밝으신 거 익히 들어 압니다. 일방적 손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타산?
어이가 없어진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윤신이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라 비난하거나 타박하진 않았다. 대신, 이만 일어서라는 듯 손짓했다.
명령대로 차분히 몸을 일으킨 윤신이 공손한 태도로 인사하는 사이, 그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내 세헌은 윤신의 주변에 우뚝 서더니 느닷없이 매끈한 턱을 쥐었다. 접촉한 서로의 살갗이 부드러웠다.
수 놓이듯 조화로운 이목구비를 관찰하는 그의 시선이 꽤 집요했다. 촉촉한 기미가 있는 다정한 눈가에는 특히 오래 머물러 있었다.
뜬금없이 이러는 그의 생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윤신은 긴장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세헌의 팔을 붙잡았다. 윤신의 두 손이 팔목에 닿은 것을 힐끗 내려다본 세헌이 그 체온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턱에 닿아 있던 제 손도 떼어 냈다.
싸늘한 눈길은 덤이었다.
“건드리지 마.”
“하지만 변호사님께서 먼저…… 만지셨는데요. 전 방어권을 썼을 뿐이고요.”
“난 남 살갗이 남의 의지로 내 몸에 닿는 거 싫어해. 나만 해도 돼. 넌 안 되고.”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물으려던 윤신은, 이내 순순히 사과했다. 짧게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지만 세헌을 상식으로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일었던 탓이다.
“죄송합니다.”
“상황은 대충 알겠으니까 일단 꺼져. 생각 정리 좀 하게.”
“제 사무실은 맞은편 방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 바른 인사는 몸에 밴 습관인지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인사한 윤신이 방을 나섰다.
딸칵. 문이 닫히고 난 뒤 남겨진 세헌이 창문 너머로 비서실을 가로질러 맞은편 방으로 향하는 윤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길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상냥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그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장면이었다.
윤신의 누나인 수한그룹의 도이경 관장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 흐렸다. 다만 중요한 건 이 판을 설계한 게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헌은 적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함정이 없을지를 따져 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수한그룹…… 하지만 올해엔 맡은 게 없는데.’
직원들과 인사를 마친 윤신이 완전히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세헌은 내선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그의 담당인 탁 비서에게 연락하자 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 건너편에서 그가 시선도 함께 맞춰 왔다.
- 네, 변호사님. 탁 비입니다.
“도윤신 쟤 학부 어디 출신이지? 로스쿨은 한국대라는 거 같고.”
- 동대 출신입니다. 전공은 사회 복지학이고요.
“사회 복지…….”
어디서 딱 저 같은 걸.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결과에 세헌이 혀를 찼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쟤 변시 몇 기야. 펌에 있는 동기들, 아니, 위아래 1·2년차 기수까지 싹 다 회의실로 올라오라 그래. 혹시 리쿠르트 팀 찍새 사옥에 있으면 걔도.”
- 알겠습니다. 지금 부를까요?
“당장 불러. 그리고 저 어쏘 인생 탈탈 털어서 정보 가져와. 기본 프로필부터 가족, 친구, 동기 전부. 여태까지 담당한 사건, 본인 관심사, 신발 사이즈까지 네 선에서 긁을 수 있는 건 다 긁어.”
- 그러죠. 특히 신경 쓸 점은요?
딱, 책상 위를 가볍게 내려친 세헌이 찰나간 궁리한 끝에 입을 다시 벌렸다.
“저 친구와 작고한 도 교수님이 여태까지 수임했던 사건들 중에 나랑 손톱만큼이라도 엮였던 게 있는지 꼼꼼하게 교차 확인해.”
창밖의 탁 비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 두 도 변호사님들은 거의 공익 사건만 하셨을걸요? 엮일 일이 없었을 텐데요. 게다가 그런 게 있었다면 수석님이 모르실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조사해. 놓친 실마리가 있을 수도 있어. 수한 도이경 관장 쪽도 같이 파. 나랑 크든 작든 엮였던 일이 있는지. 그리고 조사 중에 만에 하나 불편하게 엮인 사실이 드러나면, 도윤신한테 이튿날부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 일단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세헌이 창문 너머에 계속 시선을 집중했다. 그의 방은 볕이 잘 들어오는 남향이었다. 정반대 쪽에 있는 윤신의 사무실은 그렇지 못한 모양인지 불을 환히 켰는데도 상대적으로 어두운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또한 창문의 위치가 애매한 건지 세헌이 선 자리에서 책상에 앉은 윤신의 모습이 아주 잘 들여다보였다. 아마 상대도 그럴 것이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로 윤신을 한동안 관찰했다. 필연적으로 조금 전 윤신이 제게 남기고 간 맹랑한 말이 떠올랐다.
〈강 변호사님이 본인이 아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해요.〉
이 말은 표면적으론 칭찬처럼 보이지만 사실과 다르다.
도리어 모욕적일 만큼 명확한 비난이었다. 공경하고, 또 사랑하는 아버지와 세헌이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도윤신은 자신을 인정하되, 경멸하고 있다. 배울 의지는 넘치지만 곧 죽어도 자신을 존경하진 않을 것이다.
〈이해타산에 매우 밝으신 거 익히 들어 압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완급 조절도 한다더니, 제 앞에선 속내를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서 이런 머저리가 들어왔지?”
짐을 정리해야겠다고 여긴 건지 재킷을 벗은 유리창 너머의 윤신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뼈가 도드라진 팔목이 드러난 모습에 잠시 주의를 빼앗기고 있던 세헌은 마치 가파른 비탈면을 걸어가듯 눈길을 좀 더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옮겨 갔다.
목울대에 도착한 시선은 등정을 멈추지 않고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입술과 창백한 뺨, 콧잔등을 거쳐 눈동자에 닿은 순간, 그는 짜증스레 입술을 짓이겼다. 시선을 느낀 윤신이 이쪽을 보는 바람에 눈이 고스란히 마주쳤기 때문이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윤신이 곧 정중하게 묵례했다. 그걸 본 세헌은 바로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블라인드가 ‘차락.’ 소리를 내며 내려가고 서로의 공간도, 시야도 차단됐다. 완벽하게 혼자가 된 그는 순간 울컥 차오른 분을 감추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리모컨을 내던졌다.
파삭! 손바닥 반만 한 원격 제어 장치가 벽에 부딪쳐 튕겨 나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물체는 이미 반파된 배처럼 쪼개진 뒤였다.
“젠장.”
제게 가해지는 신랄한 비난은 익숙했다. 도리어 그것들이 자신을 이곳까지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대체로 무시하되, 때로는 시의적절하게 제 입장에 유리하게 활용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윤신의 말은 이상하게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왜 저 새끼 말은 열받지?
분리된 리모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헌이 이내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콱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