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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약육강식의 견본 같은 곳이다.
치열한 공방이 디케의 어깨 위에서 오가고, 정의의 사도와 진실의 수호자가 질서 있게 싸우기 시작하면, 끝내 만물을 관장하는 신이 보다 강한 자의 손을 들어 준다.
다만 이곳에서 강하다는 의미는 반드시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준비된 다윗이 상대를 얕잡아 본 골리앗을 이겼다.
변호인 도윤신은 이 엄숙한 장소의 그런 변칙적인 점이 좋았다.
“변호인, 최종 변론 해 주세요.”
형사 재판정 정면에 앉아 있는 판사가 변호인석을 향해 눈짓했다. 어두운 회색 정장에 깔끔한 드레스 셔츠를 갖춰 입은 윤신은 우측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묵례했다. 그러고는 중앙 통로 방향으로 나섰다.
따각. 따각.
허리를 곧추세우고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윤신의 생김새가 매끈하고 깔끔했다. 이 단정한 이목구비가 온순한 인상을 주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야무지고 단단했다.
잠시간 방청석을 둘러보는 선이 가늘고 창백한 얼굴에 이 경기장에서 원하는 결과를 거머쥐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좌·우 배석 판사님. 아울러 몇 달간 이 재판에 매달려 온 검사님과 심리를 지켜보기 위해 와 주신 방청객 여러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우선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당 사건은 유명 스포츠 선수가 사실혼 관계였던 애인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참혹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윤신은 그 가해자를 변호하는 중이었다. 사망자가 수년간 하계 올림픽에서 여러 차례 금메달을 휩쓴 국민 영웅이었던 탓에 언론은 물론 일반 국민의 관심도 지대했다.
처음에 이 사건을 뉴스로만 접했던 윤신은 치정이나, 금전적인 문제 따위의 비교적 흔한 갈등이 기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사 결과 몇 가지 소소한 갈등의 정황 증거들이 나왔고, 가해자가 변호인 선임을 거부하기까지 해서 그렇게 형세가 굳어 가는 모양새였다.
한데 어느 날 그가 정말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사건의 진실은 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해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참작의 여지들이 존재했다. 가해자는 아주 오랜 시간, 피해자로부터 일말의 존엄성마저 말살당할 만큼 심각하게 정신을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날로 윤신은 여자를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금 서 계신 곳의 시간이 밤은 맞는데, 거기 당신 혼자 있는 건 아니에요.
“이 사건에는 몇 가지 특기점이 존재합니다. 피고인이 매우 가학적인 정서적 폭력을 견디다 못해 우발적으로 둔기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여러 참담한 정황과 사실이 있습니다. 해서 본 변호인은 사실 심리 절차 동안, 피고인이 동거하는 8년 내내 인간 이하의 학대를 당해 온 다수의 증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판사를 향해 꼿꼿이 선 윤신이 논리적으로 변론을 이어 나갔다. 담담한 음성과 말투에는 의외로 감춰진 호소력이 있었다. 재판정 내의 모든 청중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가 제 일에 열중하는 동안, 방청석 끝쯤에 다리를 척 꼬고 앉아 있던 법무 법인 〈도국〉의 파트너 변호사[1] 강세헌이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고급스러운 슈트를 걸쳐 입은 모양새가 매우 근사했다. 누군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깎아 놓은 듯한 유려한 이목구비와 색이 짙은 눈동자에서 선명하게 비치는 오만한 기색이 퍽 조화로웠다.
세헌의 서늘한 눈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 어느 편을 향해서든 일말의 온정 같은 게 비치지 않았다. 이윽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첨예한 시선이 윤신에게 화살처럼 단단히 박혔다. 큼지막한 손으로 미끈한 턱을 쓱 훑은 그는 변호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눈대중으로 쭉 훑었다.
‘도윤신 변호사…….’
깨끗한 외모, 말쑥한 옷차림, 차분한 목소리와 정중함이 배어 있는 태도 따위도 꽤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세헌의 관심을 이끈 건 윤신이 스스로의 주장에 품은 확신이었다.
긴장을 삭이기 위해 억지로 꾸며 낸 착각이나 승리만을 좇는 쓸데없는 아집이 아니다. 저 변호인은 진심으로 제 의뢰인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게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온화한 얼굴 뒤에 감춰진 강인한 책임감과 프로 의식이 느껴졌다. 평가에 박한 편인 세헌의 눈에도, 변호사로서는 합격이었다.
다만, 제 밑에 두겠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노.’였다.
그의 이런 호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신의 변론은 막바지를 향해 갔다.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살해 행위는 범죄입니다. 처벌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 헌법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에 대해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판부에 호소합니다. 본 변호인은 8년간 남몰래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 온 피고인의 자력 구제 행위가 일반적 범죄 행위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재판장님, 혹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아십니까?”
가운데 앉아 변론에 집중하고 있던 판사가 넌지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윤신이 공통점을 찾았다는 양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책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윽고 윤신은 몸을 틀어 눈길을 방청석 중심부로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말문을 닫았다. 제 쪽을 주시하고 있는 세헌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법무 법인 도국의 강세헌 변호사는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추종자가 많았고, 적은 더 많았다.
숨 쉴 시간도 아껴서 일할 정도로 바쁠 사람이 도대체 여길 왜 온 건지, 이해가 잘 안 됐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시종일관 물어뜯을 자리를 탐색하는 듯한 맹수 같은 그 눈빛이 솔직히 불편했다.
‘역시 나랑은 잘 안 맞겠어.’
윤신은 그의 의미도, 뜻도 모를 날카로운 시선을 가만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판사를 향해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사람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아무런 도움이나 동정의 손길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 죽어 간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2] 존경하는 재판장님, 두 분 판사님. 부디 이 사건의 피고인이 노지에서 쓸쓸히 얼어 죽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헌법의 인권 규정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변론을 마친 윤신은 변호인석으로 되돌아갔다. 판사가 심리의 마지막 절차인 피고인 최후 진술을 요청하자,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고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 윤신은 그녀를 향해 격려의 눈빛을 보내고는, 뒤이어 세헌의 옆에 있던 도국의 다른 파트너 변호사인 송미희 변호사와 눈빛을 짧게 교환했다.
이 상황을 고스란히 다 지켜보고 있던 세헌이 몸을 낮추고 미희에게 매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의 결이 매끈하고 깔끔했다.
“송 변, 저 변호사랑 아는 사이야? 지금 그런 눈치던데.”
“도윤신 변호사? 그냥 조금. 노동법 전공이고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대. 이 건은 무료로 변론하는 거 같더라. 그건 그렇고, 재판은 어떻게 봤어? 인재 같아 보이니?”
도국은 대한민국 5대 로펌에 속하는 대형 법률 회사였다. 송무 팀을 이끌어 가 줄 검찰 출신 인재는 늘, 또 많이 필요했다.
그 핑계로 이 공판을 참관하러 오자고 했던 게 펌 리쿠르트 최종 관리자인 미희였다. 눈독 들이고 있는 검사가 있으니 대표님께 추천하기 전 직접 같이 봐 줬으면 좋다고 하기에 겨우 짬을 낸 거였는데 재판은 세헌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시시했다.
“진짜 저 검사 영입하게?”
“왜. 세헌이 네 마음엔 안 들어?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아 보인다고?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양 나른한 한숨을 뱉어 내곤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가 침묵하자, 푹 잠긴 음성으로 덧붙였다.
“재고해. 무료 변론하는 변호사한테도 지는 저런 검사한테 억대 연봉을 지불할 순 없어. 송 변 도국에 나 영입한 사람이야. 날 창피하게 만들지 마.”
“평이 너무 짜다. 이 건은 애초에 도 변호사 쪽이 너무 잘 준비했어. 증거도 산적했고.”
“형사 소송법의 대원칙은 증거 재판주의야. 난 난무하는 증거를 어떻게든 무력화하고 판을 뒤집을 인재를 보러 오는 줄 알고 없는 시간을 쥐어짜 낸 거야. 차라리 저 변호사를 우리 펌으로 데려오는 편이 훨씬 수지 타산엔 맞겠군.”
“역시, 까다로운 네 눈에도 도윤신 쟤 괜찮지?”
그 대답은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지그시 미희를 보는 눈매가 퍽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다 행간의 의미를 이미 해석한 듯, 세헌의 시선이 법정 우측의 변호인석으로 향했다. 그녀가 진짜로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처음부터 검사 쪽이 아니라 저 변호사 쪽인 것 같았다. 약간의 반사 효과를 노렸던 모양이다.
실력 있는 변호사는 동류를 알아본다. 세헌은 첫눈에 윤신이 꽤 쓸 만한 변호사인 걸 눈치챘다. 하지만 도국에서 이 악물고 버틸 만큼 일신상의 성공이 간절해 보이진 않았다. 이렇게 온 언론이 집중하고 있는 사건을 맡고서도 세련되게 자신을 포장하기보단 시종일관 피고인을 우선시하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했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변호사이기까지 하다면 성과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도국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인재였다.
‘얼어 죽을 사람에게 동정의 손길이라.’
속으로 조금 전 들은 인용구를 곱씹은 그가 지그시 윤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너 같은 도련님들이나 내미는 거지.
마침 최후 변론을 마친 피고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던 윤신이 제게 닿는 따가운 눈길을 느낀 듯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단정한 얼굴에 세헌과 왜 자꾸 눈이 마주치는 건지 의아해하는 기색이 미세하게 스며 있었다.
너무 정직해서 상대방의 내면까지 꿰뚫어볼 것 같은 그 순한 낯빛이, 이상하게 세헌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거기까지 확인한 그는 미간을 구기고 조용히 재킷을 챙겼다.
“대충 본 것 같은데 난 먼저 일어날게.”
“잠깐만. 강 변, 그럼 도윤신 쪽은 어때?”
그러면 그렇지, 하듯 세헌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쟤부터 보여 주면 내가 바로 어깃장 놓을까 봐 일부러 검사로 밑밥 깐 거 같은데. 저 변호사는 더 반대야. 난 정의로운데 하필이면 똑똑한 애들 딱 질색이야. 꼭 사고 치거든. 간다.”
“야, 그렇게 한 번 보고……. 펌으로 들어가? 강 변!”
재판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소리 낮춰 속삭이듯 대화하던 두 사람이 삽시간에 완전히 분리됐다. 대꾸도 없이 바로 지나치는 세헌을 끝내 붙잡지 못한 미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법정을 뒤로하고 긴 다리를 거침없이 뻗은 그는 금세 엄숙한 내부에서 빠져나갔다.
세헌이 굳게 닫힌 문을 뒤로하고 승강기 방향으로 걸어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저거 도국 강세헌 변호사 아냐? 이 사건이랑 관련 있나?”
“무슨 꿍꿍이야? 여긴 왜 왔지?”
“법원 건물 들어오는 거 찍은 사람 있어? 풀 샷으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세헌을 발견하더니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무턱대고 늘씬한 몸을 둘러쌌다.
대형 로펌은 송사를 다루는 송무보다는 기업 활동에 의견을 제공하는 섭외가 주 수입원이었다. 개중 금융과 회사법 자문이 높은 수임료의 양대 산맥이었는데, 이 두 분야는 성질이 달랐다. 전자는 분석적인 사고가, 후자는 탄력적인 사고가 요구됐다. 세헌은 둘 다 뛰어나게 소화하는 손꼽히는 인재였다. 아울러 갖가지 송무에도 능했다. 언론 노출을 최소화하고는 있지만,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그를 아는 건 퍽 당연한 일이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세헌에게 다가오려 발을 뗐다. 그러자 잠시 기다리라는 양 손짓해 보인 그는 기자들이 쏟아 내는 질문을 잠자코 들었다.
“도국 강세헌 변호사님 아니십니까. 일반 형사 사건은 거의 안 맡으시는 걸로 아는데, 오늘 여긴 왜 오신 거죠?”
“최근 맡은 기업 구조 조정 대리 때문에 도국의 여론이 나빠진 걸 의식하신 행보, 맞습니까? 얼마 전엔 해직자들이 모여 사측과 도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기도 했다던데요!”
“아니면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시려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피고 측 변호인과도 합의된 이야기인 건지 알려 주십시오!”
그의 눈에 띄는 외모와 신랄한 말투는 언론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다. 때때로 필요하면 저들에게 기꺼이 먹이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경청하던 세헌이 조용히 해 달라는 듯 우아하게 손짓하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제가 오늘 이 법정에 방문한 건, 그냥 사적인 이유입니다. 도국 소속으로 한 공식 행보가 아니니 이 일을 추측성 기사로 다시 접하게 된다면 법적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밟혀 둡니다. 여기까집니다. 더는 알려 드릴 게 없으니 비켜 주시죠.”
간략하게 답한 후 이쪽으로 오라는 듯 운전기사에게 손짓하자, 한 남자가 다가와 수풀을 헤치는 것처럼 길을 열어 주었다. 세헌은 기자들을 지나쳐 승강기 앞에 섰다.
마침내 양문형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기계에 올라탔다.
“강 변호사님, 이렇게 그냥 가시는 겁니까?”
“한 말씀 해 주세요, 강세헌 변호사님!”
문밖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들을 모두 무시한 그는 닫힘 버튼을 직접 눌렀다.
지잉. 문이 닫히자마자 무표정하던 안색이 짜증스럽게 무너졌다. 세헌은 타인이 제게 보이는 관심을 무척 싫어했다. 아울러 제 귓전에 꽂히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시끄럽기만 한 목소리들을 혐오했다. 그러나 자의와는 반대로 종종 불특정 다수에 의해 이런 일에 시달렸다.
“인간들 목소리 주파수를 도윤신 정도로 맞출 순 없나?”
뜬금없는 그의 말에, 세헌의 눈치를 살피며 무겁게 침묵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움찔하며 답했다.
“예?”
“하, 내가 지금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입 닫고 갑시다.”
“예, 변호사님.”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물끄러미 계기판을 올려다보던 세헌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