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헤맬 뿐이었다. 얼마나 멀리 와버린 지도 모를 만큼,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까먹어 버린 사람처럼.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꽤 오랜 시간을 서성인 것 같았다. 얼핏 눈앞에 보이는 환상들은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지길 반복했고, 불온전한 내 몸의 형체는 바람에 휘청이는 촛불처럼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깊은 물 속에서 건져지듯 갑자기 돌아오는 정신에 두 눈을 떴을 때 내가 돌아온 곳은 거짓말처럼,
“…모란?”
사창가가 늘어진 좁디좁은 겨울밤의 골목이었다.
이 한겨울에 얇은 후드와 반바지를 입곤 맨발에 슬리퍼라.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도 이런 꼴로 다닐 때라면 확실히, 그를 만나기 전의 아주 먼 과거일 터였다.
놀랄 건 없었다. 종종 나는 꿈속에서 그때로 돌아가곤 했었으니까. 차도헌을 만나 180도 바뀐 새 삶을 살아가는 중에도 나는 꿈에서 이곳을 헤매곤 했다.
혹여나 보고 싶은 얼굴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의 기억은 끔찍했지만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리웠으니까.
“들어가면… 다들 있을까?”
손목에 끼운 편의점 봉투가 허벅지께에 스치며 사부작 소리를 냈다. 예전에는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이제 와 뭐가 낯설다고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혹여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정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마담도 없고 은수도 없고, 심지어 강태산마저도 나타나지 않을까 무서워서. 텅 빈 복도 중간에 웅크려 앉아 멍하니 소화기만 노려보다 그렇게 허무하게 잠에서 깨어나게 될까 봐. 그럼 이 꿈은 그저 악몽에 불과하게 될 테니까.
“그쪽, 여기서 일해?”
그때였다. 까마득 멀리 도망갔던 이성마저 돌아오게 할 정도로 차갑게 날 서린 목소리가 들린 건.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억센 손에 붙들린 몸이 뒤로 질질 끌려갔다. 그동안 꿨던 꿈에선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나리오라 잔뜩 당황한 와중에도 나름 저항을 해본다고 이리저리 발버둥 치고 있는데, 남자는 작게 혀를 차더니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내 몸뚱어리를 단단히 붙들어버렸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납치 상황이라니. 도대체 이 끔찍한 꿈에서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거냐며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그 순간 냅다 몸이 거칠게 돌려 세워졌다.
“대답해. 여기서 일하냐고.”
서늘한 눈빛,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 당장이라도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것 같은 짙은 눈매만큼이나 무섭도록 꾹 다물린 입술.
“…도헌 씨?”
내 악몽 속에 차도헌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알파 페로몬도, 날 향한 매서운 눈빛도, 전부 다 차도헌이었다.
“네가 날 어떻게 알지?”
차도헌은 내게 따지듯 물었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수상쩍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내겐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얼굴이라,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안겼다.
“윤 비서를 해고시켜야겠군. 조사 파일에 ‘미친 오메가’라는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는데 말이야.”
다짜고짜 안겼는데도 밀어내지도 않고 차도헌은 불퉁한 목소리만 내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낯선 오메가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차도헌은 자신의 체향만 깔끔하게 갈무리할 뿐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안개 속을 헤맸던 내가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바보같이 어딜 헤매고 있었던 거야, 내가 돌아갈 곳은 딱 한 곳일 뿐인데.
“…보고 싶었어.”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을수록 차도헌은 더더욱 뻣뻣해지고 있었다. 내 몸을 밀어내려 억세게 어깨를 쥐었다가도 금방 손에 힘을 풀어버리는 식이었다.
‘그쪽이 도해영인가?’
내게 냈던 모진 목소리도,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눈도, 사실은 나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두려움이 걷히고 진실만이 남은 내 시야엔 더 이상 그의 모습이 무섭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차도헌만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알파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있지, 차도헌 씨.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앞으로 두 달 뒤에 우리는 사랑에 빠져.”
미친 사람이 하는 말을 선심 써서 들어주겠는 듯, 묘하게 웃음기를 머금은 차도헌의 얼굴 앞에서 나는 밝게 웃어 보였다.
우리에게 앞으로 생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이때의 차도헌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한데.
“우리, 얼결에 쌍방 각인도 되고 메이팅에도 성공해. 내년 봄이 되면 우리 결혼도 한다? 나 도헌 씨한테 프러포즈 두 번이나 받았거든.”
지금은 반지 자국조차 없는 새하얀 왼손 약지를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자 차도헌은 헛웃음을 뱉었다.
“내년 봄에 결혼이라, 퍽 빠르군.”
“웃기지, 근데 혼인신고는 더 빠르게 했어. 도헌 씨가 하도 졸라서.”
차도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내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대는 오메가로 보이겠지만, 어떡해. 전부 다 사실인걸.
“우리에게도 선물처럼 아기가 생겨. 태명은 새싹이고 이제 막 8개월이 돼. 내가 기억하는 건 병원이 마지막인데, 그 후로는 어떻게 됐을지… 잘 모르겠어.”
마주 선 그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내내 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굴다가 왜 새싹이 얘기 꺼낼 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안 울려고 했는데, 걱정이 묻어나는 그의 표정 앞에서 자꾸만 눈시울에 열이 몰렸다. 눈꺼풀 사이로 스미듯 눈물이 새어 나올 때마다 그의 얼굴이 자꾸만 흐릿해져만 가서, 이렇게 또 눈앞에 뿌옇게 흐려지면 또 길을 잃을까 무서워서.
나는 손등으로 세차게 눈가를 비비며 부러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잠에서 깨어나면 다 잘 되어있으면 좋겠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으면 좋겠고, 나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차도헌이 너무 보고 싶어.”
“…….”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 해줬단 말이야, 그러니까-,”
훅 끼치는 온기에 덜컥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언제고 나를 지켜주던 커다란 품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으니까.
그제야, 잊어버렸던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밝히듯 커다랗게 떠올랐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마구 헤집으며 겁먹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는 것.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언젠가는 버려질까 봐, 말없이 나를 두고 떠날까 봐, 두려워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차도헌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있었으니까. 도해영이 ‘차도헌’을 사랑하는 것처럼, 차도헌도 ‘도해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왜 까먹고 있었을까.
“사랑해.”
“…….”
“사랑해, 해영아.”
나를 끌어안은 품, 부드럽게 눈가를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까지. 아득한 꿈결 사이로 뿌옇게 바랬던 시야는 선명해져 갔고, 입술 위로 내려앉는 달콤한 입맞춤에 옅은 웃음이 터져나갔다.
부디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나는 간절히 바랐다.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 싶었으니까, 그가 있는 곳으로, 우리 아기가 있는 곳으로. 어서 가고 싶었으니까.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첫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볼이 발갛게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걱정할 건 없었다, 이제 두 눈을 뜨면 뿌연 안개도 악몽도 아닌,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이 있을 테니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잠에서 깨어나면,
“잘 잤어?”
그곳엔 사랑하는 나의 알파와 사랑하는 우리의 아기가 있을 테니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