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41/43)

2.

포근한 그의 품에서 설핏 잠든 사이로, 어둠에 젖은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잠에 축 늘어진 내 몸을 살살 흔들어 깨우던 손이 넉넉한 실크 파자마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잠결에 허우적대던 나는 그의 뜨거운 손이 내 엉덩이를 가볍게 그러쥘 때야 잠에서 확 깨고 말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엉큼한 손길에 놀란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댔다. 살이 조금 붙은 탄탄한 엉덩이를 두어 번 더 주무른 그의 손이 허리께로 올라와 골반을 바투 움켜쥐자, 어느새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고야 말았다.

“잘 잤어?”

“…자기 거…, 닿아.”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는 그의 것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심장이 놀라서 쿵쾅댈 만큼 섹슈얼한 방식으로 잠을 깨워준 그의 획기적인 방식이 빛을 발하는 듯했지만, 다시금 찾아온 수마에 사로잡힌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댔다.

“졸려….”

뜨거운 손으로 허리를 지분대며 목덜미 위로 입을 맞추는 그의 애정행각은 멈출 생각도 않는 듯,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꾸물대는 내 몸은 그의 손길에 착실히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더 잘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간지러운 숨을 불어넣는다. 그 달콤한 제안에 나는 잠결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널따란 가슴팍 위로 얼굴을 폭 묻었다. 차도헌의 품이 조금만 덜 따스했어도 이렇게 몸이 늘어지진 않을 텐데, 모든 건 다 차도헌이 내게 너무 다정한 탓이라며 나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어, 윤 비서.”

잠결 사이로 문득,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속삭이듯 통화를 하는 차도헌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마저도 내겐 전부 다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작게 몸을 움찔거리는 내게 다시 자라는 듯, 내 몸 위로 보드라운 시트를 덮어주며 등을 도닥이기 시작한 차도헌은 내 허리를 바투 끌어안으며 이마 위로 입술을 붙였다.

그렇게 나는 그의 뜨거운 품 안에서 정말 그렇게 푹, 아주 푹 잠들 뻔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도 모르고.

“병원 예약 좀 미룹시다. 한… 오후 두 시쯤. …그래, 어.”

…병원 갈 일이 있었나? 잠에 녹아 느릿하게 굴러가는 머리가 얕은 꿈을 헤집어대는 순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을 뒤늦게 떠올리고 말았다.

“-새싹이!”

그 순간 잠에서 확 깨버린 나는 짤막한 신음을 내지르며 우당탕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내려갔다.

“해영아, 조심!”

놀란 그가 외치는 목소리를 뒤로 곧장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다급하게 칫솔을 물고 세차게 칫솔질을 시작하는 내 등 뒤로, 어느새 나를 따라온 차도헌은 둥그렇게 부푼 내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어깨 위로 잘게 입맞춤을 남겼다.

입 안 가득 보글보글대는 거품을 뱉곤 물로 가볍게 헹구며 양치를 끝낸 나는 차도헌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들었다. 젖은 얼굴을 대충 닦아내는 내 급한 손길을 저지한 그는 마저 수건으로 물기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병원 오후로 미뤄뒀는데, 지금 바로 가고 싶어?”

“응. 오늘 눈코입 보러 가는 날이라며. 빨리 가고 싶어.”

다급하게 수건을 붙잡으며 마저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부드럽게 얼굴을 톡톡 두드려주는 차도헌의 손길을 받는 것도 좋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병원에 가고 싶은 마음에 내 모든 행동은 한없이 다급해졌다.

“빈속으론 안 돼. 뭐라도 먹고 가자.”

“배 안 고픈데… 그낭 가면 안 돼?”

바구니에 수건을 던져 넣으며 곧바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옷장을 활짝 열어놓곤 최대한 편한 옷가지를 찾아내는 내 곁에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차도헌이 있었다.

넉넉한 품의 면바지에 스웨터를 꿰어 입곤 당장이라도 현관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 내 모습에 그는 내 어깨를 단단히 그러잡으며 눈을 맞춰왔다.

“해영아, 뭐라도 먹고 가자. 응?”

나는 차도헌의 이 얼굴을 알았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매에 걱정으로 찌푸린 눈썹, 어쩌면 간절함마저 담긴 다정한 목소리까지.

“…알았어.”

그 앞에선 도저히 고집을 부릴 수 없을 정도였는지라 나는 백기를 팔랑이며 그의 굳은 입술 위로 짧게 입맞춤을 건네주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는 그의 듬직한 뒷모습은 분명 수백 번도 더 있었던 일처럼 익숙한 광경이었다.

능숙하게 식사 준비를 마친 그는 트레이에 한가득 식사 거리를 들고 와 거실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말간 죽그릇을 중심으로 갖가지 반찬이 놓인 한 상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며 수저를 쥐었다.

벌써 새싹이가 생긴 지 7개월이나 훌쩍 넘겼는데 입덧은 도통 잦아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차도헌이 자주 해주던 각종 한약재와 전복을 가득 썰어 넣은 고급 영양죽도,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스튜도, 이제는 냄새도 맡기 힘들 정도로 나는 심하게 입덧을 앓았다.

결국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건 미음처럼 으깨다시피 한 묽은 흰 죽과 새콤한 과채 주스 정도뿐이라, 안 그래도 마른 내가 새싹이를 품고 난 후로도 꼬박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도 못하게 되니 차도헌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다행히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내 식습관에도 착실하게 배는 불러갔다. 워낙 몸이 마른 편이라 언덕처럼 부푼 배가 유독 잘 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무궁무진하게 자라고 있는 새싹이를 보면 없던 걱정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나였다.

하지만 차도헌에게는 그 사실이 전혀 ‘다행’이 아닌 모양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못 먹지?”

죽을 몇 숟갈 입에 넣다가 말아버리는 내 모습에 차도헌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도저히 무언가를 씹어 넘길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억지로 한 술을 가득 퍼 올렸지만 결국 약하게 올라오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으며 그릇을 밀어버리고야 말았다.

달달한 포도주스를 홀짝이며 무릎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제는 맞닿은 허벅지에 부른 배가 뭉근히 눌릴 만큼 새싹이가 많이 자랐다. 이 불량한 엄마는 입맛이 까다로워 제대로 된 영양분도 못 주는데 건강하게 자라는 새싹이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해영아,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바로 말해. 뭐든 해줄 테니까.”

배 밑으로 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둥글게 아랫배를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천천히 퍼지는 따스한 온기에 나는 느릿하게 주스를 삼키며 차도헌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이따 가서 링거라도 맞아야 할까 봐.”

“링거?”

“의사 선생님도 종종 맞으러 오라고 했잖아. 저번에 맞았을 때 확실히 기운도 났고….”

뺨 위로 잘게 입을 맞추던 입술이 다시금 걱정에 굳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몇 모금 마시다 만 주스 잔을 내려놓으며 열렬히 차도헌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에서도 내 저조한 영양 상태에 주기적인 링거 투여를 권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지.”

단호한 목소리에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만은 다정함이 뚝뚝 흘렀다. 이마 위로 잘게 입맞춤을 남기던 입술이 부드럽게 얼굴선을 타고 내려와 입술 위로 안착할 즈음엔,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과 함께 달콤한 입맞춤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둥그런 동산처럼 부푼 배를 어루만지던 손은 이미 차도헌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 폭삭 안긴 채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자니 절로 온몸에 뭉근한 열기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깊어지던 입맞춤이 뚝 끊긴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서서히 달아오르려던 흥분이 애매하게 끊긴 곳엔 느닷없이 느껴질 만큼 죽을 가득 퍼 올린 수저가 있었다.

“한 숟갈 더 먹으면.”

“치사해.”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입술 위로 수저가 가까워졌다. 작게 벌린 입으로 죽 한 스푼을 몇 번에 나눠 삼킨 후에야 나는 차도헌으로부터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다.

“병원 가서 우리 새싹이도 보고, 링거도 맞고 오자.”

“으응.”

다시금 내게로 날아오는 수저를 밀어내며 나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정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차도헌의 손길에 뺨을 부비며 나는 어서 이 기나긴 입덧이 빨리 끝나길 기도했다. 뱃속에서 잠자코 잠들어 있을 새싹이에게도 넌지시 부탁을 건네는 것도 물론 덤.

“이제 새싹이 보러 갈까?”

간지러운 입맞춤이 쏟아지는 사이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 마구 내달리는 내 뒤로 걱정 어린 목소리가 따라붙는 것도 유하게 넘기며 나는 현관 바닥에 털썩 앉아 다급히 신발을 신었다.

금방 준비를 마친 그가 차 키를 찰랑이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부드러운 시승감과 함께 출발한 차가 도로 위를 매끄럽게 가로지를 때만 해도 나는 잔뜩 들뜬 상태였다.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

팍팍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이어지던 수저질이 울음에 먹혀들고, 웅크린 몸은 주체 없이 덜덜 떨려왔다. 신물 때문에 역한 구토감이 올라오는데도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으며 힘겹게 삼키는 내 모습에 차도헌은 착잡한 얼굴로 나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산모님께서 원체 마르기도 하고, 입덧이 아직 끝나지 않으셔서 그런지…. 지금 전체적으로 수치가 매우 불안정하세요. 이러다가는 모체가 태아를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그저 아기 얼굴 보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한 병원에서 내가 맞닥뜨린 건 죄책감이었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링거 팩보다도 더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려대면서 나는 부푼 배를 하염없이 쓸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간 산모님도 아기도 다 위험해져요. 힘드신 건 알지만 부디 아기를 위해서라도 노력해주세요.’

그제야, 비정상에 가까운 내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아기를 품어 둥그렇게 툭 튀어나온 배, 뼈마디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비쩍 마른 팔다리, 푹 꺼진 볼과 생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안색.

배 속에 품은 소중한 아기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건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손등에 붙은 동그란 지혈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어주는 손길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냉장고를 활짝 열어둔 채 정체도 모를 음식들을 죄다 꺼냈다. 갑자기 맡은 음식 냄새에 속이 메슥거렸지만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움켜쥔 수저로 가득 퍼 올린 음식을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으면서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꾸역꾸역 음식을 삼켜댔다.

“억지로 먹지 마, 해영아. 속 더 버려. 응?”

나를 타이르는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나는 굳세게 스푼을 쥐곤 양 볼이 터질 것처럼 음식을 밀어 넣었다. 두 뺨을 푹 적신 눈물이 턱 끝에 방울져 떨어질 때까지 억지로 음식을 삼키던 나는 결국 욕실로 달려가 먹은 것들을 다 게워냈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세면대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대체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잘못한 건 나잖아. 칫솔을 입에 물곤 겨우 세면대를 붙잡은 채 거울 너머 비치는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거울 속 도해영은 여전히 멍청하게 울고 있었다.

“해영아, 문 열어.”

“…….”

“도해영.”

잠가둔 문고리가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밖의 알파는 마음만 먹으면 문이고 벽이고 부술 수 있는데 고작 잠금장치가 걸린 문짝 하나를 믿고 욕실로 도망쳐 온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잠근 문을 열려다가, 그냥 문가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언뜻 화가 난 사람처럼 들렸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 화가 나겠지, 내가 모든 걸 다 망쳐버렸으니까. 소중한 아기를 품고서 멍청하게 굴어댄 건 나였으니까.

“…….”

이제 차도헌은 더 이상 나를 보채지 않았다. 덜컥이는 소리를 내던 문고리도 잠잠해진 채였고, 문을 열어보라며 재촉하지도 않았다. 조용해진 공간에,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더욱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름도 못 지어주고 갑작스럽게 떠났던 아기와는 다르게 새싹이만큼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키워주고 싶었다. 내 생명이 몽당연필처럼 깎이는 한이 있어도, 사랑하는 그를 닮은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이랬다. 내가 또 모든 걸 망치고 말았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날들은 나로 인해 엉망진창이 됐다. 죄책감은, 그렇게 끝을 모르고 몸집을 불려 나갔다.

차가운 바닥을 짚고 일어나 잠금 고리를 풀었다. 문을 열고 나온 곳에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선 그가 있었다.

“…미안해.”

새된 신음처럼 새어나간 목소리는 허공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짙은 숨을 내쉰 그는 내 몸을 끌어안으며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었다.

“…잘래. 자고 싶어.”

그의 품을 밀어내며 나는 웅얼댔다. 오늘만큼은 그의 위로도, 그가 내어주는 따스한 품도, 내겐 그 어떤 것 하나 받을 자격이 없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둥그렇게 말아 누웠다. 이불을 꼼꼼히 여며주던 그의 손은 이제 발갛게 열이 오른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기 시작했고, 머리맡 위로 작게 들려오는 그의 한숨 소리에 나는 이불을 얼굴께로 끌어당기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해영아.”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나는 바보처럼 울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불안감에 짓눌려 밭은 숨을 쉬는 나를 품속으로 끌어당겨 안은 차도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행복하게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

“미안해.”

두 귀에 들린 건 분명 괴로움에 짓눌린 목소리였다.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내 탓인데, 차도헌은 바보처럼 자기 탓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그저 멍청하게 군 내 탓인데, 새싹이를 제대로 품지 못한 내 탓인데….

뜨거운 눈물이 금세 두 뺨을 흠뻑 적셨다. 입술을 꾹 깨문 채 흐느낌을 억누르려는 내 등을 부드럽게 얼러주며 그는 그랬다.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전부 다 내가 감내하고 싶어. 네가 아파하는 것도, 네가 힘들어하는 것도 전부 다.”

내 모든 아픔을 가져가고 싶다고, 내 모든 짐을 함께 나눠 들고 싶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틀렸다. 이미 그는 내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었다. 그저 모든 문제는 나일 뿐이다. 그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서 행복을 앗아간 것도…. 전부 다 나였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쉼 없이 웅얼거렸다. 멍청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새싹이를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도헌 씨 잘못 없어, 그냥 다, 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눈물에 젖은 얼굴이 끔찍할 정도로 축축해질 때까지, 기도를 틀어막는 울음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에게 사죄했고, 그렇게 우리의 밤은 뜨거운 눈물로 얼룩져갔다.

***

진이 빠질 때까지 울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될 만큼 열이 오르고, 갈라진 목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너무 지쳐 정신을 잃는 것처럼 그렇게 잠들어버렸다. 다시 두 눈을 뜬 곳에는 차분히 가라앉은 새벽의 공기가 있었고, 그 아래로는 부드럽게 흩어지는 두 명분의 호흡이 있었다.

모든 일이 악몽이길 바랐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그저 나쁜 꿈일 뿐이라고, 우리의 행복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오히려 나를 책망하듯, 그것들은 더욱 서슬 퍼렇게 내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배 속에는 비좁은 자궁 속에서 한껏 몸을 웅크린 채 굳어있는 아기가 있었고, 차도헌은 그런 나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속만 삭이고 있었으니까.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대론 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밤빛이 스며드는 천장만 줄곧 쳐다보다가 결국 부스럭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버렸다. 배 속 아기를 지키듯 아랫배를 단단히 감싼 그의 커다란 손이 오늘따라 내겐 버겁게 느껴져서, 그를 향한 나의 죄책감은 어쩌면 그의 애정보다도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침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나로선 처음 목격하는 그의 잠든 모습 때문이었다.

“…….”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잠든 그의 머리맡에 다가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잠에서 깬 내가 눈만 깜박여도 나를 살피며 뺨에 다정히 입을 맞춰주던 그였다. 몇 주 전 배 뭉침이 심해 구급차까지 불렀던 날을 기점으로 차도헌은 ‘수면’이라는 행위를 까먹은 사람처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나를 지켜보기에 바빴으니까.

그렇게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던 그가 오늘에서야 피로에 짓눌린 채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니 속상함이 밀려들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찬찬히 어루만지며, 이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그의 턱선 아래로 짙게 깔린 그림자만큼이나 어두운 한숨을 뱉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실 밖으로 나섰다. 하릴없이 거실을 산책 삼아 배회하는 것도, 이미 모서리가 너덜해져버린 임신 출산 백과와 태교용 동화책을 뒤적이는 것도, 어째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질없게 느껴지는 건지.

소파에 걸쳐놓은 그의 카디건을 집어든 건 어쩌면 그래서였을 거다. 탁 트인 거실도 몰려드는 고민을 달래기엔 서늘한 바깥바람보다는 못할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나는 반쯤 충동에 휩싸인 채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카디건 단추를 느릿하게 채우며 만끽한 이른 겨울 새벽의 정취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만족스러울 지경이었다. 두 뺨을 얼리는 차디찬 바람은 흐트러졌던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몸속을 가득 채우는 새벽의 촉촉한 공기는 나를 정화해주는 것만 같았다.

“새싹아, 우리 밤 산책 잠깐만 다녀오자.”

습관적으로 아랫배를 둥글게 어루만지며 나는 더더욱 카디건을 여몄다. 현관문을 몰래 열고 나온 것처럼, 조용히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간 곳에는 모던하게 꾸며진 빌리지의 깔끔한 산책로가 있었다.

누가 한 번도 밟지 않은 것처럼 새하얀 보도블록 위로 느긋한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가벼운 산책처럼 시작한 걸음은 차츰 숨을 헐떡일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모양새가 되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마다 심어진 가로수와 산책로를 비추는 밝은 가로등 같은 것들이 양옆으로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새싹이를 품고 이렇게 빨리 뛰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야트막한 언덕길 아래로 힘차게 뛰어 내려가는 뜀박질은 내게 해방감마저 가져다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악!”

잘못 내디딘 발걸음에 내 두 다리는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그대로 풀려버리고 말았다. 속도가 붙어 제어조차 불가능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그저 아랫배만 두 손으로 끌어안은 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곤 닥쳐올 비극을 준비했다.

하늘에 있는 마담이 만약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제발 내가 잘못되더라도 아기만큼은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부러지고 목이 부러지더라도, 내 얄팍한 뱃가죽 아래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우리 새싹이만큼은 부디 안전히 살아남게 해달라고.

만약 내게 크게 다쳐서 죽는 날까지 고통 속에서 살게 되더라도 제발 얄팍한 목숨줄만은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이제는 내가 죽으면 차도헌도 죽으니까, 그런 일은 생기면 안 되니까….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언덕길 아래로 굴러떨어져야 할 내 몸이, 누군가의 품속에 안겨 단단히 붙들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거친 숨이 도통 내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패닉에 빠져있던 내가 겨우 정신을 붙든 건, 꽉 내리감은 두 눈을 천천히 떠올렸을 때였다.

놀란 심장을 추스르며 확인한 곳엔 차도헌이 있었다. 외투도, 신발도 없이 잘 때 입었던 편한 복장에다 아예 맨발로 뛰쳐나온 그는 조금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화난 얼굴.

“도해영.”

그가 내뱉은 단 세 음절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제야 내가 다시금 얼마나 또 멍청하게 굴어버렸는지 알아버리고 말았다. 몸도 멀쩡하지 않은 임산부가 위험한 언덕길을, 그것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는 꼴이라니. 살면서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져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은 많았지만 오늘보다 더한 날은 없을 테다.

“…너, 도대체 여기서 뭐 해.”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곤 그의 눈을 피했다. 비록 거짓말이 부부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정말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늦은 새벽에, 그의 카디건을 훔쳐 입고 몰래 나올 만큼 내게 긴박한 상황이 뭐가 있을까. 아프다고 하면 그를 또 걱정시킬지 모르니, 차라리 갑자기 초밥이 너무 먹고 싶어져서, 그래서 편의점에서 파는 초밥 도시락이라도 사 먹으려 나왔다고 말하면 그의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까?

“하….”

입술을 꾹 말아 문 채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로, 그의 잇새에선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실을 요하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동안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도저히 돌아가질 않는 머리로 조각난 변명들을 힘겹게 이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차도헌은 내게 변명의 기회 따위 주지 않았다. 내게서 거칠게 등을 돌린 그는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빠른 걸음으로,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 너머 이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형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어둠 속으로….

“…도헌 씨?”

그렇게, 차도헌은, 나를 내버린 채 홀로 떠나가 버렸다.

***

환영을 본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실 차도헌은 아직 집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거야. 방금 나를 붙잡아준 건 멍청하게 뛰다가 넘어지려는 임산부를 도와준 낯선 남자일 거야.

그러니 방금 나를 길가에 버리고 간 사람은 차도헌이 아닌 거야, 내가 잘못 본 거야….

“도헌 씨….”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세워둔 얄팍한 거짓말에 결국 무너져 내리는 건 나였다. 어둠에 짓눌린 작은 속삭임은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이제 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정말 그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나는 웅크린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홀로 남은 길가에 그대로 쪼그려 앉은 채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바보처럼 멍청하게, 그를 뒤따라 쫓아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차디찬 길거리에 내버려진 채.

“흐, 으윽…, 도…, 도헌 씨…….”

숨죽여 틀어막은 울음 사이로 입술은 그를 서투르게 불렀다. 짙은 어둠이 깔린 길가엔 이젠 그의 모습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멍청한 나는 그를 부르며 울었다.

내게서 등을 돌려 떠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찢길 만큼 아파오는데도, 마지막 순간에 마주했던 그의 냉랭한 눈빛에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도, 나는 바보처럼 그가 내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는 나를 이미 버렸는데, 추위에 얼어붙은 나를 길가에 내버려두고 그렇게 떠나가 버렸는데….

오메가는 임신하면 버림받아. 오메가는 결국 다 죽어. 그 이야기는 분명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자만이었나 봐.

결국 내게 남은 차디찬 결말은, 이런 것이었구나.

이제는 내뱉는 밭은 숨결도, 그 사이로 터져 나오는 울음도, 죄다 어둠 속으로 스미듯 사라져갔다. 길가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이 짙은 칠흑의 그림자 사이로 스며드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아픔도 슬픔도,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싹 웅크린 자세에 부푼 배가 허벅지 위를 눌러오기 시작했다. 그 압박감에 나는 자세를 고치며 얄팍한 카디건을 여몄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혹여나 새싹이를 놀래킬까 봐 배를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다시금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

그때였다. 잠잠하게, 그간 기척도 없이 가만히 뱃속에 웅크려 있던 아기가 움직인 것은.

“…아, 아…….”

살려달라는 것처럼, 같이 살아남자는 것처럼. 얄팍한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힘찬 태동에 나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새싹아, 내가 미안해….”

내가 멍청하게 생을 포기하고 싶다고 마음먹을 때, 내 아이는 오히려 내게 생명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바보 같은 내가 삶을 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아이는 그런 나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어 다시금 이 세상의 품에 안겨주고 있었다.

길거리인 것도 잊고 나는 카디건을 헤집어 파자마 상의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행위에 화답하듯, 새싹이는 두어 번 더 힘차게 발차기를 해댔다. 전신으로 울려 퍼지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나는 허겁지겁 새싹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살아볼게, 바보 같은 생각 안 하고, 흑, 흐윽…,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손등으로 뺨을 마구 문지르며 눈물을 닦아냈다. 씩씩해져야 하는데, 새싹이 건강하게 낳으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해져야 하는데, 나는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그를 떠올리며 더 울기 시작했다.

바보, 아기 발차기 하는 것만 보고 가지…, 우리 새싹이가 잘 크고 있다고 방금 인사했는데, 왜 그것도 못 보고 그렇게 나 버리고 갔어, 왜, 왜 새싹이랑 나 버리고 그렇게….

“…이 밤에 어딜 그렇게 가려고.”

돌연, 차갑게 얼어붙은 몸 위로 두터운 겉옷이 단단히 입혀졌다. 한숨이 짙게 섞인 목소리도, 나를 향한 그의 눈빛도,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두 손도 전부 다 환영 같아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뺨 위를 푹 적시는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내 몸을 그대로 끌어안는 그의 품에 그제야 막 악몽에서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내가 더 잘할게,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우리 아기 이제 막 움직였단 말이야, 나보고 죽지 말라고, 튼튼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방금 막 움직였단 말이야…….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 내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철푸덕 앉아있던 몸은 어느새 그의 따뜻한 품속에 온전히 안겨든 채였다. 그는 그 익숙한 온기에 다시금 울컥이는 눈물을 참고 있는 내게 눈을 맞췄다.

“왜 그랬어.”

“…….”

“이 새벽에 말없이 도망갈 만큼…, 내가 너를 많이 힘들게 했니.”

단시간 사이에 퍼석하게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붉게 충혈이 된 눈은 내게 이유를 물었고, 거친 입술은 무어라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굳게 다물린 채였다.

그런 그의 붉은 눈을 바라보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단순한 행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삐걱이며 돌아가는 머리를 재촉해 겨우겨우 그의 말을 해석해내야만 했다.

도망가다니, 확신을 주지 못했냐니.

나는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차도헌은 내가 그를 떠난다고 오해하고 있었구나. 내가 그를 떠난다는 그런 일은 나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인데, 오히려 버림받는 입장이 되는 게 내게는 더 익숙한데.

그제야 나는 내게 보였던 그의 행동들을 겨우 이해하고야 말았다. 언덕에서 나를 붙잡았을 때 상처받은 얼굴로 내게서 등을 돌렸던 것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 외투가 들려 있었던 것도.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통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이유를 물었던 것도.

“…미안해.”

내 짤막한 대답에 돌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붉게 충혈된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은 금세 턱 아래로 방울져 떨어지고, 날 끌어안은 그의 몸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 해영아…, 더 이상 너 없이는…, 숨을 쉬는 것도, 하루하루 사는 것도 전부 의미 없으니까, 제발….”

턱을 억세게 악문 채 슬픔을 짓씹고 있는 얼굴 앞에서, 나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눈물로 가득 찬 그의 붉은 눈만큼 내 심장을 미어지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저 미안하다는 대답이 자신을 떠난다는 것으로 들릴 정도로 상처 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내게 그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

“나 도망 안 가.”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눈물로 푹 젖은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 것뿐이었다.

“도망 안 가. 내가, 내가 어떻게 그래.”

그에게서 도망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벗어나고 싶은 건 바보처럼 구는 나 자신일 뿐이었으니까.

그냥 가끔은, 사실은 꽤 자주. 나는 내가 너무 미울 때가 많아서, 그래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차도헌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너무 싫을 때가 많으니까.

“…미안해, 말 안 하고 나가서. 나는 그냥….”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순 없었다. 차도헌이 속상해할 게 분명하니까. 그는 내게 이 세상의 빛이고 하늘이고 내가 선뜻 탐내지도 못했던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안겨주었는데, 내가 여전히 다른 보통의 오메가들처럼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아마 많이 실망할 것만 같아서.

“저번에 도헌 씨가 사다 준 초밥 있잖아. 그게 갑자기 먹고 싶어서, 그래서 우선 편의점이라도 가보려고…, 그래서 그랬어.”

내가 내뱉는 건 죄다 하찮은 거짓으로 범벅된 바보 같은 말이었는데도 그는 연신 내 뺨 위로 입술을 붙여댔다. 얼굴을 푹 적신 눈물을 다정히 쓸어주면서, 오히려 그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곤 내 눈가 위로 잘게 입맞춤을 남기고 있었다.

“왜 밤에 혼자 나갔어, 응? 나 깨우면 되잖아.”

“도헌 씨 간만에 자는데 깨우기 싫어서.”

“하…, 해영아, 너는 대체….”

많이 속상한 듯,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그는 얄팍한 살결 위로 쉼 없이 입술을 내리찍으며 사랑을 속삭였고, 연신 깊은숨을 들이쉬며 내 체취를 맡았다.

그에게 매달리는 건 늘 내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몸을 내 품 안에 구기듯 안긴 그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으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색색 들이쉬는 숨 사이로 그의 짙은 페로몬이 내 안을 가득 채우듯 부드럽게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오 분도 안 되는 그 시간의 상처가 이제야 다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순간 느꼈던 극한의 공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서 멀어져갔고, 서로를 갈구하며 단단히 엉겨 붙은 우리는 같은 박동의 호흡을 내쉬며 다시금 온전해졌다.

“…미안해, 몰래 나가서.”

아직 울음이 가시지 못한 목소리가 웅얼대며 새어나갔다. 어쩌면 그의 심장 박동보다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개미 더듬이만 한 목소리를 냈는데도 차도헌은 귀신같이 알아듣곤 눈물로 푹 젖은 눈가에 부드럽게 입맞춤을 남겼다.

“내가 더 미안해.”

그는 끌어안은 내 몸을 조심스레 쓸어주며 더더욱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내 언제 얼어붙었냐는 듯 내 몸은 그의 뜨거운 품속에서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널따란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색색 작게 숨을 내쉬며 그의 페로몬을 폐부 깊숙이까지 들이쉬기를 몇 차례 반복하던 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사랑해, 해영아.”

눈물로 가득 차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담담히 내뱉는 그의 고백조차도 내겐 여전히 너무나도 완벽해서, 나는 그의 어깨를 바투 끌어당겨 안으며 답해주었다.

“나도, 나도 사랑해.”

그 순간, 다시 배 속이 퉁 울렸다. 맞닿은 배에서 움직임을 느낀 그는 다급히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고, 간신히 울음을 그쳤던 내 두 눈은 다시 시작된 새싹이의 발차기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을 맺기 시작했다.

“우리 아기, 잘 크고 있대….”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아 배 위에 얹어주었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새싹이의 태동에 그의 눈시울은 다시금 타오르듯 붉어지기 시작했다.

“…바보, 아까 5분만 늦게 가지…, 도헌 씨 첫 번째 태동 놓쳤단 말이야….”

아쉬움이 가득 들어찬 내 목소리에 그는 내 배를 둥글게 어루만지며 옅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바보네….”

이제 그는 집채만 한 상체를 구겨가며 배 위로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있었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새싹이의 움직임이 두 귀에도 생생히 들리자 그는 여기가 길바닥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듯 한참을 나를 끌어안은 채 태동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은은한 달빛 아래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그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잔뜩 집중하느라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을 장난치듯 꾹꾹 눌러보고, 그의 잘생긴 눈썹뼈도 부드럽게 쓸어주며 그의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아보았다.

이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배 속의 아기가 차도헌을 쏙 빼닮을 것이라는 걸.

강하게 뛰어대는 심장도, 생명력이 듬뿍 밴 활기찬 태동도. 온전히 무너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강인한 힘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게 선물처럼 내려온 두 차 씨들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칼 위로 몰래 입맞춤을 남겼다. 괜스레 쑥스러워 손가락으로 입 맞춘 그 자리를 마구 헤집으려는데, 태동을 듣느라 내내 숙이고 있던 그의 고개가 단숨에 들어 올려졌다.

“가자.”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내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내 몸을 그대로 들쳐 안은 채 언덕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에게 들쳐 안겨진 채 어딘가로 운반되기 시작한 모양새가 되자 나는 미처 당황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가?”

“집에 가서 초밥 먹어야지. 윤 비서 시켜서 사오게 할게.”

나를 안은 채 언덕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내가 쉽게 내뱉은 거짓말에 아닌 밤중에 고생할 윤 비서님을 떠올리자니 그렇게 죄책감 드는 일이 없을 지경이어서,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지금 새벽이야, 도헌 씨.”

“지금은 안 당겨?”

워낙 심한 입덧 때문에 내 식욕이 그새 줄행랑을 쳐버렸을까 봐, 내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내 논점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그 가게가 열지도 않았을 늦은 시간인 데다가, 이 밤에 다짜고짜 윤 비서님에게 업무를 내리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됐다.

“나중에 먹어도 돼. 응? 지금은 너무 늦었어, 도헌 씨.”

“그 초밥이 먹고 싶어서 깼다며. 내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넘겨. 윤 비서 통해서 구해올 테니까-,”

“아냐! 안 그래도 돼, 급한 일도 아니잖아. 그리고 새벽에 이런 일 윤 비서님한테 부탁하는 것도 실례야.”

“그게 왜 급한 일이 아니야, 네가 먹고 싶은 게 생겼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더 있어?”

어느새 집에 도착했는지, 단호한 그의 목소리 뒤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곧장 안방으로 향한 그는 포근한 이불 더미로 내 얼어붙은 몸을 단단히 싸매더니 그대로 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럼 내가 다녀올게. 잠깐 눈 붙이고 있어.”

“도헌 씨!”

내 외침에도 차도헌은 물러설 생각도 없이, 그대로 내 이마 위로 입맞춤을 남기곤 사라져버렸다. 이 새벽에 초밥을 사 오겠다며 집을 나선 그를 미처 붙잡지도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 안방에 남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차도헌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엔.

추위에 얼어붙었던 몸이 따스한 집 안의 온기에 찬찬히 녹아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밀려오는 느슨한 졸음에 나는 그가 두텁게 둘러준 이불을 바투 잡아당겨 끌어안곤 베개 위로 스르르 머리를 뉘었다.

“…이따가는 뭐라도 좀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부디 초밥이 되었든 다른 음식이 되었든, 차도헌이 사 온 음식을 제대로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잠결 사이로 코끝을 간질이는 그의 시원한 페로몬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떠올리자, 그곳엔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 중인 차도헌이 있었다.

“…언제 왔어?”

몰려오는 잠기운을 힘겹게 몰아내며 상체를 세워 앉자 등 뒤로 쿠션을 받쳐준 그는 내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며 부어오른 눈가를 조심히 쓸어주었다.

“방금. 더 잘래, 아니면 지금 먹을래?”

그제야 나는 머리맡에 준비된 베드 테이블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쌓인 테이크아웃 용기에는 분명, 차도헌이 자주 사 오는 고급 일식집의 상호명이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어, 어떻게 사 왔어?”

“아직 입덧이 심하니까 담백한 횟감부터 먹는 게 좋겠다.”

내 물음에도 그는 영 딴소리를 해가며 베드 테이블을 몸 가까이로 옮겨주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도통 안 해줄 것 같은 그의 기색에 결국 초밥의 출처를 포기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쥐었다.

혹여나 내가 음식 냄새에 구역질을 할까 봐, 차도헌은 정말 조심스럽게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초밥과 함께 곁들일 이런저런 사이드 메뉴를 준비해 주면서도 줄곧 내 컨디션에 집중한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할 정도였다.

“어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응. 맛있어 보이는데.”

내 간절한 바람을 새싹이가 들어주었는지,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초밥이 모습을 드러내고도 꽤 한참 간 아무런 메슥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음식을 씹어 넘기는 것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도톰한 살점이 얹힌 초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싱싱한 횟감 사이로 간이 잘 밴 꼬들꼬들한 밥알과 매콤한 고추냉이의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부터가 대단한 발전이었지만, 헛구역질 한번 없이 수월하게 초밥을 씹어서 삼키기까지 한 나는 어쩌면 성취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도헌을 위해서,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테이크아웃 용기를 톡 두드렸다.

“맛있어.”

그제야, 그의 얼굴에 완연하게 서렸던 긴장감이 전부 녹아내려 갔다. 임신이 됐을 때부터 입덧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나만큼이나 속앓이를 했을 차도헌이라서. 내 뺨에 잘게 입을 맞추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읊조린 그의 목소리엔 분명 안도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먹다 힘들면 바로 멈추고.”

다정히 머리칼을 쓸어주며 몇 번이나 그는 내게 강조했지만, 그저 맛있다는 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이 새벽에 음식을 구해온 차도헌에게 더욱 미안한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괜찮다며 환하게 웃어 보이곤 곧바로 다음 초밥을 집어 올렸다.

걱정했던 것보다도 잘 씹어서 삼켰지만, 사실 고작 한 점 먹었는데도 속이 더부룩한 건 변하지 않았다. 우선 토하지 않고 무언가를 삼켰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나는 집어 든 것을 망설임 없이 입 안에 밀어 넣곤 차분히 씹기 시작했다.

물론 고비는 금방 찾아왔다. 갑자기 들어온 음식에 속이 뒤집힐 것처럼 아우성을 쳐댔고, 나는 온 정신을 음식을 제외한 다른 곳에 쏟아부으며 메스꺼움을 무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이런 미련한 짓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에조차 나는, 차도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번에도 먹은 것들을 다 게워내면 그는 분명 더 속상해할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쉬지도 않고 묵묵히 다섯 번째 초밥까지 삼키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데, 그 순간 다음 초밥을 향해 젓가락을 뻗으려던 나를 저지한 건 차도헌이었다.

아예 내 손에서 젓가락을 뺏어간 그는 내 빈손에 레몬 슬라이스가 동동 띄워진 잔을 대신 쥐여주며 눈을 맞췄다.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아냐, 나 아직 더 먹을 수 있-,”

“해영아.”

그 목소리에 나는 결국 그의 눈을 피하고야 말았다. 푹 숙인 고개가 하염없이 아래로 꺾이는 동안, 머리맡에선 그의 짙은 한숨이 들려왔다.

내가 바보처럼 굴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째서 나는 그걸 고칠 수가 없는 걸까. 이런 내가 너무 한심스러울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그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바보처럼 눈물이 나오는 것도 너무 싫어서.

“미안해.”

나는 앵무새처럼 그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미안해. 도헌 씨 고생시킨 것도, 새싹이 아프게 한 것도 다….”

작은 웅얼거림 사이로 천천히 먹먹한 울음이 스며들어 갔다. 또 바보처럼 울기 싫어서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그와 함께하면 할수록 자꾸만 커져 가는 것들이 있었다. 그와 나눈 사랑이 있었고, 선물처럼 내려온 아기를 향한 사랑이 있었고, 가족을 꾸린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도 더 커다랗게 몸집을 불리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건 턱없이 많은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이었다.

나는 종종 상상해보곤 했다. 만약 내가 조금이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다른 평범한 오메가들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법을 배우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법과 부모가 될 준비 같은 걸 배운, 지극히도 보통의 오메가였다면….

그럼 나는 차도헌에게도, 우리 아기에게도, 완벽한 메이트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우리 아기가 좁디좁은 자궁 속에서 괴로워할 일도 없을 거고, 혹여나 내가 픽픽 쓰러질까 봐 두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차도헌의 고생도 덜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여전히 모든 일에 서툴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모자란 오메가라서, 듬뿍 사랑만 주기도 부족한 나의 남편과 우리 아기를 마구마구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 안의 확신은 차츰 죽어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알파에게 걸맞는 완벽한 오메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한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려간 곳에 남아있는 건 차가운 현실이었다.

앞으로도 나로 인해 망쳐질 것들과 나로 인해 잃게 될 수많은 것들로 가득 찬 현실이.

푹 숙인 고개가 조심스러운 손길에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다시금 붉게 열이 오른 눈가를 다정히 쓸어주는 손길마저도 그의 슬픔이 묻어 나와서, 나는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굳힌 미간과 꾹 다물린 입술, 슬픔에 짓눌려 붉어진 눈동자와 가라앉은 눈빛. 어쩌면 임신한 후로 내가 가장 자주 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어두운 표정조차 다 내가 자초한 것들이었다.

“네가 왜 미안해해, 해영아, 응? 네가 왜….”

“그냥 다…, 내가 다 부족하니까….”

난 완벽보다는 허술함에 가까운 사람이고, 배운 것보다 배우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아직까지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졌으니까.

“나는 다 처음이잖아, 도헌 씨 만나고부터… 제대로 살기 시작했잖아.”

“…해영아,”

“무서워, 내가 다 망쳐버릴까 봐.”

나는 가족이 있어 본 적도 없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내가 배운 거라곤 끔찍한 사창굴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뿐이니까. 나는 이렇게 부족한데, 너무나도 부족해서 나조차도 이런 내가 창피할 지경인데, 이런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 수 있겠어.

그 사실이 자꾸 나를 속상하게 만들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들고, 무척 행복하다가도 불쑥 불안해지고 말아. 그래서 자꾸 그런 결론이 나나 봐, 내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새싹이에게도, 당신에게도. 내가 필요한 순간보다 내가 방해되는 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래서 도헌 씨한테 자꾸 미안한가 봐.”

그동안 꾹 눌러온 온갖 감정이 뒤늦게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다시금 두 뺨이 흠뻑 젖어가는 느낌에 허겁지겁 얼굴을 닦아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의 앞에서 또다시 나약하게 울어버린 내가 너무 실망스러웠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냥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미안해, 자꾸 바보처럼 울어서.”

도저히 멈춰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눈물에 결국 나는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굳어가는 그의 표정을 볼 자신도 없었고, 금방 울음을 그칠 자신도 없었으니까.

새하얀 시트 위로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이리저리 둥그런 자국을 냈다. 흐느끼지도 않고 그저 숨죽여 울면서, 나는 내 앞을 떠나지 않는 그의 그림자 따위에 안도했다. 그의 옷깃 대신 침대 시트를 꾹 붙잡으며, 부디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구는 나를 아까처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남몰래 되뇌면서.

“대체 왜…, 왜 그런 생각을 해.”

짙은 한숨과 동시에 터져 나온 목소리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나를 끌어안은 건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그의 품이었고, 머리칼 위로 수없이 내려앉는 건 그의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미안해하지 마, 네가 미안해할 일 아닌 거 알잖아. 너는 내 옆에서 행복하기만 해도 바쁜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해.”

눈물로 얼룩진 눈가 위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눈물길을 따라 차근히, 온 얼굴에 입을 맞추던 그는 품속으로 나를 당겨 안으며 읊조렸다.

“아픔도, 슬픔도, 전부 다 내가 하게 해줘.”

“…….”

“도해영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돼. 다른 건 다 내가 할 테니까….”

간절하게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버석하게 마른 그의 뺨을 쓸어주며 나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슬픔으로 짓눌린 그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커다란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두 팔로 단단히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커다란 심장 부근에서 짙게 풍기는 페로몬을 깊숙이 들이쉬어 보면서, 내쉬는 숨에 울음을 담지 않으려 나는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그 끝은 결국 눈물로 먹혀 들어갔지만 그래도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를 향해 사랑을 속삭여보았다.

“…사랑해, 도헌 씨.”

작게 내뱉은 고백 너머엔 그에겐 절대로 하지 못할 대답이 있었다. 그건 아마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이었고, 언제고 내가 늘 품고 있었던 대답이었다.

‘도헌 씨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더 나을 거야. 나는 많이 아파봐서 엄청 무디거든. 그러니까, 그냥 내가 다… 내가 아프게 해줘.’

나는 새싹이가 부디 강하게 뛰는 그의 심장을 닮기를 바랐다. 항상 나보다 모든 것이 두 배씩 큰 차도헌처럼,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죄다 모자란 나를 닮지 말고 부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도헌을 쏙 빼닮길 바랐다. 그래서 언제고 오늘날을 돌이켜볼 때 그가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했고, 새싹이가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럼에도 새싹이가, 정말 딱 한 군데만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새싹이를 통해 나를 기억할 한 가지 정도는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내 욕심인 건 알지만 정말 사소한 것 딱 하나만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무엇이 되든, 딱 한 군데만.

“…해영아,”

“…….”

어쩌면 눈동자를 닮은 것도 좋을 것 같아. 새싹이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해영아, 도해영!”

그의 외침은 마치 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금세 허공 위로 사라지며 이리저리 웅웅거렸다. 순식간에 흐려진 의식에 몸은 붕 뜨는 듯 한없이 가벼워졌다가도, 갑자기 숨조차 내쉴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길 반복했다.

언제고 세차게 울려대던 태동도, 힘차게 뛰어대던 박동도, 내 안에 살아 숨 쉬었던 모든 것들은 하나둘 생명력을 잃듯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너무 많은 걸 욕심냈나 봐. 가져서는 안 되는 걸 욕심내서, 그래서 하늘이 내게 벌을 주는 건가 봐.

하지만 자꾸 왜, 왜 당신 곁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 욕심이 나는 걸까.

차게 굳어버린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은 채였다. 두 귀를 거칠게 울리는 이명 사이로 파고드는 사이렌 소리에, 온 얼굴을 적시는 그의 눈물 아래에서 나는 움직여지질 않는 손으로 아랫배를 감싼 채 옅게 웃어 보였다.

건강하게 자라줘, 소중한 우리 아가. 널 위해 그 무엇이든지 다 해낼 테니까,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줘.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를 지킬 테니까.

사랑해, 우리 아가.

“…사랑해.”

부디 이 고백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의 품속에서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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