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8/43)

4.

“…겨우 맞춘 사이즈가, 또 줄었다고요!”

부드러운 치즈 크림을 겹겹이 채운 퐁실한 레드벨벳 케이크 위로 포크가 팍, 꽂혔다.

수트 피팅을 도와준 직원이 커튼 밖으로 다급히 달려가 보고 사항을 전달한 곳에는, 방금 막 딴 와인과 함께 디저트를 곁들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던 오윤주가 있었다.

…물론 방금의 소식으로 인해 그녀의 케이크는 한 입도 먹히지 못했지만 말이다.

피팅룸을 둘러싸고 있는 커튼이 열리자 라운지 소파에 앉아있던 그녀는 날카로운 힐을 또각이며 내게 걸어왔다. 내 허리에 겨우 걸려있는 넉넉한 품의 팬츠 수트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있었다.

“당장 식이 이틀 뒤인데….”

결혼식을 이틀 앞둔 웨딩 수트 피팅 현장, 분명 일주일 전까지는 완벽했던 웨딩 수트와 깡말라버린 신랑,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앞에서 얼굴을 굳힌 채 서 있는 오윤주.

그 살벌한 공기 속에서 나는 옅게 몸을 떨었다.

***

어쩌다 보니 4월의 신랑이 되었다.

“해영아. 나랑 결혼해줄래?”

차도헌이 선물한 두 번째 프러포즈가 정말 그 ‘결혼식’을 의미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본격적으로 꾸려지기 시작하는 일정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우리, 정말 결혼해?”

내게 청첩장 디자인을 골라 달라며 여러 장의 카드를 건네려던 차도헌은 내 물음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뜬금포와 가까운 질문이었지만 내겐 사활을 건 질문과도 같았다.

혼란스럽다는 듯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이 짙게 밴 얼굴 앞에 나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이미 이렇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식은 굳이 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결혼식, 안 하고 싶어?”

상처받은 그의 눈동자가 차츰 가라앉았다. 짙은 슬픔을 가득 담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지만, 그를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었다.

“…지금 마음은 그런 것 같아.”

“네 말은…, 식을 올릴 필요가 없다는 거지.”

“응. 그러니까 괜히 무리해서 준비 안 해도 돼.”

마음과 정반대인 말을 뱉는 내 목소리가 긴장감에 잘게 떨려왔다. 동장군처럼 얼어붙어버린 그를 뒤로, 불쑥이는 죄책감을 밀어내며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가 내 얄팍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길 바랐다.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나를 조금 미워하게 되더라도, 부디 그가 내 진심을 읽어 내리지 않길 바랐다.

나만큼이나 차도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년간의 상속 분쟁이 끝나다! 차 그룹의 젊은 오너 차도헌, 그와의 뜨거운 인터뷰 현장 속으로.]

올 초 재판이 끝나고 관련 법적 절차를 마무리한 차도헌은 차 그룹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속받았다. 최근 몇 주간은 대부분의 스케줄이 인터뷰 요청이었을 정도로, 서른이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그룹 오너 자리에 올라간 차도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도저히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매주 윤 비서님이 정리해서 보내주는 인터뷰 잡지와 신문 스크랩이 서재를 가득 채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막 도착한 잡지 표지에는 확인할 것도 없이 누가 봐도 잘난 내 알파가 있었으니까.

“…사진 잘 나왔네.”

서재 한편에 놓아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그의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를 곧장 펼쳤다. 마치 차도헌 단독 화보집마냥,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잡지의 반 이상을 채우고 있었다.

멋진 수트를 입은 차도헌의 사진 앞에서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끔찍한 상상은 마치 현실인 것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작년 염문설이 일었던 사창가 출신 오메가와 결혼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해당 오메가를 통해 사창업소를 관리했던 조직과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진실을 말씀해주시죠!’

시민들이 던지는 토마토와 계란을 맞는 그가 쏟아지는 카메라 부대 앞에서 온갖 거짓된 인신공격을 당하는 끔찍한 상황. 그저 나 하나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논란에 휩싸여 그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무서운 상상.

결국, 우리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겐 씻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거가 차도헌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을 거라는 것.

잠깐 염문설이 도는 것과 공식적으로 결혼을 발표하는 건 달랐다. 차도헌과 도해영, 출생부터 정반대인 두 사람의 결혼은 결국 차도헌을 불행에 빠뜨리게 될 테니까.

비록 내 거짓말이 그에게 상처를 줄지언정, 나 때문에 차도헌의 모든 것들이 공격받을 상황을 막을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이고 그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물론 요즘엔 식 없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연인들도 많아졌다고 하니, 차도헌만 동의한다면 나는 그와 조용히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법이 인정한 혼인 생활도 식만 올리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크게 다를 게 없을 테니까.

그렇게 빠르게 진행되던 결혼 준비가 내 한마디로 전부 취소되고, 감정을 추스린 차도헌은 이윽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되돌아갔다.

대신 우리에겐 암묵적인 룰이 하나 생겼는데, 절대로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결혼이라는 단어 자체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그를 그나마 덜 아프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언어를 몽땅 잊어버린 척도 할 수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언어를 잊은 척할 수는 있어도, 눈물은 참는 게 불가능한 것이었나 보다.

‘차도헌, 도해영’

사박이는 몽블랑 소재의 종이 위로 고급스럽게 금빛으로 나란히 각인된 우리의 이름.

그 아래로 정갈히 적힌, 아마도 그가 직접 썼을 문구.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운명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기를 약속합니다.’

여전히 그의 서재 데스크 한쪽에 자리한 청첩장 앞에서,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내 울음소리에 그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을 때도 나는 청첩장을 꾹 붙잡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왜 울어, 해영아. 응?”

부드럽게 뺨을 쓸어주며 달래는 그의 품 안에서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가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바보처럼 이렇게 그의 앞에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내 눈물로 청첩장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뺨을 마구 문지르며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내 앞에서 차도헌의 얼굴은 전에 없이 슬픔에 젖어 있었다.

“…말해줘. 결혼하기 싫다는 그런 거짓말, 왜 한 건지.”

청첩장을 움켜쥔 내 손을 감싸 쥔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론 피하지 말라는 듯 집요하기까지 했다. 더 이상 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나는 울음을 삼키며 힘겹게 대답했다.

“나 때문에, 도헌 씨가 구설수에 휘말리는 거, 싫어.”

“…해영아,”

“근데 나는, 출신도 이렇고, 이런 애랑 결혼하면 도헌 씨는 분명-,”

달싹이는 입술 위로 강하게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내 고개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맞춘 그는 언뜻 화가 난 사람 같기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응? 해영아, 도대체 왜….”

“나 때문에 안 좋은 얘기 계속 나올 거야. 내 과거가 분명 도헌 씨 발목 잡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결혼하면 안 돼.”

내가 내린 결론에 차도헌의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분명 내가 말한 것들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니 남은 건 수긍뿐일 터였다.

“결혼하자, 우리.”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달랐다.

“널 지키려고 이 자리까지 왔어, 해영아. 나는,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 없이, 오직 너만을 지키려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키스의 뒤에는,

“그러니 내 전부를 걸어 너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

“…….”

“우리 결혼하자, 해영아.”

세상 그 모든 이들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굳건한 마음이 담긴 세 번째 프러포즈가 있었다.

전부를 걸어 나를 지키겠다는 이 알파, 앞으로 수없이 펼쳐질 운명을 같이할, 내 알파.

이미 목숨을 내버릴 만큼 차도헌을 사랑하는 도해영이 그의 완벽한 프러포즈 앞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응, 하자. 결혼.”

그렇게 내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차도헌은 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랑으로 만들어주겠다며 불타는 열정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식을 해보이겠다는 그의 강렬한 열망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도움을 주겠다며 나선 사람은 오윤주였다.

‘해영 씨 예복은 내가 해줄 거예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돈 터치. 알겠어요?’

그 아무도 내 예복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그녀는 꼬박 한 달간 유명 디자이너들을 불러 모아 진행한 기나긴 디자인 회의 끝에,

‘그야말로 해영 씨 맞춤 웨딩 수트인 거죠. 마른 몸이 부각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실루엣은 살리고, 은은하게 빛나는 고급스러운 크림색 원단이 화려한 멋을 살리고요.’

잔잔한 펄이 들어가 조명 빛에 따라 은은하게 반짝이는 크림색 웨딩 수트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해영 씨, 자꾸 이렇게 마르면 어떡해요. 이러다가 식 올리는 날에는 버진로드 걷다가 옷 다 벗겨지는 거 아니에요?”

넉넉하게 남은 허리의 옷감을 사이즈에 맞게 조심스럽게 접어보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특히나 옷맵시가 잘 드러나는 밝은 빛깔의 수트인 데다가, 당장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식 일정에 아무래도 수선은 빠듯해 보였다.

그녀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차츰 혼을 내는 뉘앙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요, 요즘 귀찮아서 식사 거르고, 내가 보낸 한약도 안 먹고 그러죠! 사실대로 말해요!”

“아닌데, 나 요즘 엄청 먹어요. 도헌 씨한테 전화해볼까요?”

“좋아요, 지금 당장 전화해요. 해영 씨 얼굴 반쪽으로 만든 사람, 내가 아주 가만 안 둘 테니까.”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진지한 기색을 내보이는 그녀의 앞에서 나는 백기를 들어 올리며 다시 피팅룸 안으로 들어갔다. 쉽게 입은 만큼 쉽게 벗겨지는 수트를 조심스레 벗어두곤 넉넉한 품의 니트와 편한 팬츠로 갈아입고 나오자, 거울에 비친 내 몸이 부쩍 많이 말랐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로서도 억울할 지경이었다. 당장 일주일 전에 최종 사이즈를 맞춘 예복이 오늘이 되어서야 허리가 반 뼘이나 줄어버리다니. 그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챙겨 먹은 것에 대한 보답이 내게 내려오려다가 별안간 하늘에서 뚝 사라진 기분이었다. 나는 진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오윤주와 웨딩 수트 디자이너 여러 명이 모여 내 예복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이로, 나는 라운지로 걸어가 털썩 소파에 앉았다. 보드라운 쿠션 사이로 푹신하게 몸을 눕히자 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애써 잠을 떨구기 위해 나는 이 상황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이상하다, 요즘 정말 많이 먹는데. 섹스가 아무리 격한 운동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살이 많이 빠지나…? 하긴, 그렇게 하는데….

잠들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느릿하게 눈꺼풀이 감기는 사이, 또각이며 걸어오는 굽 소리에 화들짝 졸음이 날아가 버렸다.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당장 수선이 가능은 하지만 최상의 핏은 안 나온대요.”

“저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돼요, 윤주 씨.”

“안 돼요, 해영 씨 건강 위해서라도 살찌워야 돼요. 그리고-,”

그녀는 일주일 전 내 사이즈에 맞춰 특수 제작한 마네킹에 입혀둔 수트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포기 못 해요. 그 완벽한 핏을! 내 눈으로 봤는데!”

“…저도 케이크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살을 찌워야 한다며 주장하는 그녀의 옆에서 나는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저 숨만 쉬어도 살이 빠지는 체질인 내가 그녀의 말마따나 저 수트에 몸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장 입에 뭐라도 집어넣어야만 했다.

“아니, 그걸로는 안 돼요. 더 고칼로리로 가야죠.”

내 앞에 케이크 접시가 놓아지기도 전에 오윤주는 돌연 내 손을 덥썩 잡고 소파에서 내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냐는 내 물음에도 대답도 않곤 무자비하게 차를 몬 그녀가 도착한 곳은 고급 디저트 가게가 무려 한 블록을 가득 채우는, 그야말로 유명 디저트 거리였다.

***

“오늘 이거 다 먹고 가는 거예요. 알았죠?”

테이블을 가득 채운 디저트 군단 사이로 큼지막한 케이크 한 판이 내 앞에 당도했다. 가운데에 새빨간 딸기가 콕 박힌 생크림 케이크는 마치 새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포근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이걸 다요?”

“우리 해영 씨는 입이 너무 짧아. 이게 뭐가 많다고 그래요?”

크게 한 스푼 듬뿍 떠올린 계절 한정 딸기 판나코타를 내 입 앞으로 내민 그녀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거 다 먹을 때까지 절대! 집에 안 보낼 거예요.’

활활 타오르는 의지가 담긴 눈앞에서 나는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달큰한 크림 사이로 팡 터지는 상큼한 생딸기 과즙은 바야흐로 디저트 대장정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였다.

“요즘도 차도헌 씨는 재택근무해요?”

“아예 1층 서재에 빔프로젝터 설치해서 화상 회의도 하던데요.”

“대기업 오너가 그래도 되나 몰라. 조심하라고 전해줘요, 나 아직 합의로 끝낸 거 앙금 안 풀렸으니까.”

쇼윈도 약혼과 함께 진행했던 기업간 계약을 파기하면서 한창 전쟁을 벌이려던 차도헌과 오윤주는 돌연 고소를 취하하며 법정 싸움을 마무리했다.

서로 물어뜯기 바쁘던 두 사람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무척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이것보다 더한 게 하나 더 있었다. 그건, 그 둘의 합의점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도해영을 사랑하는 차도헌과 도해영을 친구로 둔 오윤주, 그 두 사람은 오로지 도해영을 위해 사건을 마무리하며 평화를 지키기로 합의를 봤다는 것이 최측근인 윤 비서님의 해설이었다.

“케이크 어때요, 입에 맞아요?”

“부드럽고 맛있어요. 이러다가 정말 한 판 다 먹겠-, 잠깐!”

우유 크림이 보송하게 올라간 케이크를 오물오물 씹는 내 앞으로 별안간 새로운 디저트 접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윤주 씨, 혹시 또 시켰어요?”

“아직 한참 더 나와야 돼요, 파이류는 굽는 데 좀 걸린대요.”

테이블 한가득 디저트를 놓고 사라지는 직원을 뒤로 나는 메뉴를 훑고 있는 오윤주의 손을 막아섰다. 이 기세라면 이곳의 디저트를 몽땅 솔드아웃 시켜버릴지도 몰랐다.

“우리, 너무 많이 시키는 것 같은데요!”

“여기가 가짓수가 가장 다양해서 데려온 건데. 온 김에 다 먹어보고 가요.”

“그럼 피스로 시키면-,”

“내 가오 다 죽일 일 있어요? 해영 씨한테 달랑 빵 한 조각 사줬다는 소문 들리면 차도헌 씨도 열불 낼걸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런 거 여기 있어요. 말차 쿠키도 먹어 봐요, 스팀 밀크랑 같이.”

그녀가 입에 물려준 담백한 맛의 말차 쿠키를 한 움큼 베어 먹으며 나는 그녀의 손에서 메뉴를 빼앗았다. 뒤이어 막 구워진 베이커리를 들고 온 직원이 이제는 정말 컵 하나 올릴 자리도 없을 만큼 가득 들어찬 테이블 앞에서 우왕좌왕하자, 오윤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항복하듯 내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윤주 씨, 디저트 많이 좋아하나 봐요.”

얼음이 찰랑이는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는 내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꿀에 절인 피칸이 잔뜩 올라간 호박파이를 맛보던 그녀는 쉬고 있는 내 입에 마카롱을 물려주며 답했다.

“우리 아버지 생전에, 매일 제 사무실로 케이크를 한 박스씩 보내주셨거든요.”

“매일요?”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약 먹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약 대신 단걸로 해소하라는 울 아버지 덕분에 나 5kg나 쪘었다니까요.”

방금 막 나온 에클레어를 먹기 좋게 잘라 내 앞에 덜어주는 그녀의 모습 속에는, 단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윤주 씨 아버님 덕분에 제가 호강하네요.”

그녀가 내 앞으로 밀어준 머그를 손으로 감싸 쥐며 나는 웃어 보였다.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잔뜩 올라간 스팀 밀크가 주는 달달한 풍미에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문득, 마담이 타준 다방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각설탕을 듬뿍 녹여 낸, 다디단 커피가.

이제 만날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마담이 그랬고, 긴 시간 업소에서 함께했던 아이들이 그랬고, 은수도, 그리고 지해도….

‘…지해?’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지해가, 저기 있었다. 카운터와 이어지는 쇼케이스에서 케이크를 꺼내 포장하고 있는, 단정한 셔츠에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는 분주하게 일하는 지해가….

나는 홀린 듯이 쇼케이스 너머를 응시했다. 살며시 숙인 동그란 밤색 뒤통수, 나보다 훌쩍 작은 아담한 키, 앵두같이 자그마한 붉은 입술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

지해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저 지해를 닮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한참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 깊이 하나둘 차오르는 감정은 그리움, 슬픔, 그리고….

“해영 씨 아는 사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눈가를 닦았다. 다행이었다, 많이 울지 않아서. 그리고,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 같아서.

“…아뇨, 그냥, 친구랑 많이 닮아서.”

고개를 작게 저으며 웃어 보였다. 따뜻한 머그가 주는 온기를 두 손안에 가득 담아내며 나는 다디단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달한 온기에 기대어, 오늘따라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하루라고 생각하면서….

***

“꼭 다 먹어요-”

부왕, 소리를 내며 빠르게 멀어져가는 오윤주의 새빨간 스포츠카를 뒤로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결혼식까지 남은 이틀, 내게 남겨진 임무는 이 많은 양의 디저트를 다 해치우는 것. 나를 이 세상 최고로 아름다운 신랑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며 간절한 마음과 함께 칼로리도 듬뿍 들어간 디저트 세트를 내 품에 안겨준 오윤주였다.

양손 가득 케이크 박스를 짊어진 채 드넓게 펼쳐지는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차도헌을 꼬드겨 같이 디저트를 해치울 계획을 세우는 사이로, 훅 끼치는 짙은 페로몬과 함께 불현듯 두 손이 가벼워졌다.

“-도헌 씨!”

“잘 놀다 왔어?”

그가 선사하는 입맞춤이 유독 달콤했던 건 아까 먹은 케이크 때문이었을까.

“달다, 해영아.”

코끝을 맞댄 채 장난스레 내뱉는 그의 입술을 다시 한번 베어 문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그 어떤 것들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 알파에겐 다디단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이 있었다.

“웨딩 수트는 잘 입어보고 왔어?”

“응.”

“디저트는 맛있게 먹고 왔고?”

“응.”

부스럭거리며 냉장고 안에 차근히 디저트 박스를 넣는 내 뒤로 줄줄이 질문이 따라붙었다. 냉장고가 이미 진귀한 신선 재료로 가득 찬 덕분에 힘겹게 공간을 내어 박스를 욱여넣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짤막한 단답만 내놓자, 그의 목소리에 질투가 담겼다.

“나 안 보고 싶었어?”

허리를 끌어안은 손으로 느릿하게 내 배를 쓰다듬는 그의 뜨거운 품 안에서 그제야 나는 냉장고 문을 쾅 닫고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까치발을 들고 쪽쪽쪽 입을 맞추자 그걸론 부족하다는 듯, 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은 차도헌은 가뿐히 내 몸을 들쳐 안았다.

“대답.”

“진짜,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그의 뺨을 쓸어주며 다시금 쪽, 입술을 붙이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차도헌은 깊게 입을 맞춰주었다. 틀어지는 고개 사이로 부드럽게 혀가 섞이고, 입술 사이로 교차하는 뜨거운 숨이 차츰 욕정에 불을 지필 때쯤 돌연 입맞춤이 끊겼다.

“열이 좀 있네.”

굳은 얼굴로 내 이마를 잠시 짚어본 그는 온도를 재어보듯 목덜미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좀 돌아다녀서 그런가 봐.”

갑자기 심각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 나는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내가 열이 난다는 것을 모를 만큼의 미열인데도, 차도헌은 나를 부엌 테이블 바 위에 앉혀두곤 약을 찾으러 거실로 향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 순간 테이블 바 위에서 기우뚱, 기울어지는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질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차도헌은 어쩌면 아까보다도 더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나는 서툰 애교를 부리듯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그의 가슴팍에 뺨을 부볐다.

“애교가 늘었어, 아주.”

그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머리칼 위로 다정한 입맞춤이 내려앉는 동안 나는 건강함을 어필하듯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약 먹을 정도는 아니야.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럼 저녁 먹고, 계속 열 안 떨어지면 약 먹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의 품 안에 폭 안겨 매미처럼 매달린 채 소파로 이동되었다. 내 몸을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눕혀준 그는 부드럽게 내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고, 영양제도 꼬박꼬박 먹는데 왜 이리 몸이 약할까.”

톡 튀어나온 깡마른 무릎뼈 위로 잘게 입맞춤을 남긴 그는 커다란 손으로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주며 완벽한 마사지를 선사해주었다. 노곤해지며 풀리는 피로에 절로 눈이 감기는 사이로, 나는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무려 두 시간을 꼬박 잘 줄이야.

“이상해, 나 요새 들어 잠이 많아졌어.”

내가 잠든 사이 그가 갈아입힌 파자마 소매를 매만지며 나는 작게 꿍얼거렸다. 아까 드레스 샵에서 틈날 때마다 졸았던 것도 그렇고, 하루의 반나절을 자느라 허투루 보내는 듯한 기분에 속상해졌다.

“원래 봄 되면 잠이 늘어.”

“그래도.”

아무리 봄이 됐다고 해도, 계절에 이리저리 휘둘려 잠꾸러기가 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저녁을 준비하는 그의 앞에서 나는 큰 다짐을 한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을 했다.

“다음부터는 나 꼭 깨워줘.”

“더 푹 자라고 품에 안고 토닥여줄게.”

“안 돼, 자기랑 보낼 일분일초 다 내가 자느라 막 허비하는 것 같단 말이야.”

보글보글 끓는 해물 전복죽을 작게 떠서 후- 식힌 그는 내 부탁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흘리며 내 입에 죽을 떠먹여 주었다.

“어때, 입에 맞아?”

“반칙이야. 왜 요리도 잘해?”

알알이 톡톡 씹히는 새우와 전복의 싱싱한 식감과 더불어 백미의 감칠맛이 차르르 도는 죽을 기쁘게 음미한 혀가 내게 ‘더, 더!’를 외치고 있었다.

“앉아 있어, 금방 차려줄게.”

그의 말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테이블 바에 착석한 나는 두 명분의 수저를 준비해놓았다. 정갈하게 담긴 밑반찬이 차르르 윤기를 내는 사이로, 포근한 김이 마구 올라오는 죽 그릇이 놓여졌다.

요즘 소화가 잘 안 돼 저녁 메뉴는 소화가 잘되는 메뉴로 바뀌었다. 수프나 죽 종류의 멀겋고 퓨어한 음식마저도 최고급의 맛을 내는 차도헌의 축복받은 요리 실력 덕분에, 매번 저녁상에 오르는 요양식마저도 최고로 즐기는 요즈음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디저트 임무가 시작되었다. 질리지 않게 종류별로 조금씩 조각을 잘라 늘여놓은 디저트 한상차림 앞에서, 나는 오윤주가 목격했다면 아마도 엄청나게 화를 낼지도 모를만한 기행을 펼치고 있었다.

“어때, 맛있어? 많이 안 달지?”

얼그레이 향이 담뿍 담긴 쉬폰을 내 입이 아닌 차도헌의 입 안으로 크게 떠먹여 준 나는 돌아올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내게 디저트를 먹일 때 오윤주의 마음도 이랬을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내 모습에 차도헌은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좋아.”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나는 도헌 씨 입맛 파악하고 싶단 말이야.”

“정말인데.”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내 입술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남긴 그는, 쉬폰 위에 올라간 얼그레이 크림을 스푼으로 떠서 내게 먹여주었다.

채 크림을 맛볼 새도 없이 작게 벌린 내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은 그는 고개를 단단히 붙든 채 더욱 짙게 혀를 부벼댔다.

달콤하고도 야릇한 키스를 리드하는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얼그레이 향보다도 더 진한 그의 페로몬에 매료된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맛있다, 해영아.”

환하게 웃어 보인 그는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다시 스푼을 쥐었다. 그가 이번에 스푼 가득 떠올린 디저트는, 보기만 해도 혀가 녹아내릴 만큼 단 쇼콜라 무스였다.

“이렇게 맛있는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

진한 쇼콜라 무스보다도 더, 다디단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이 달콤한 크림과 함께 뜨겁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

스파르타식 디저트 대장정이 끝나고, 결혼식을 채 몇 시간도 남기지 않은 늦은 밤 소중한 3kg를 얻은 나는 지쳐 쓰러지듯 차도헌의 품에 안겼다.

“고생했어.”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는 차도헌의 품속으로 더더욱 엉겨들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오롯이 느껴지는 가슴팍 위로 이마를 대자, 열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뜨끈한 기운이 얼굴에 옮겨붙었다.

“기분이 어때.”

달밤에 푹 젖은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그의 맨가슴 위로 손끝을 가볍게 미끄러뜨렸다.

“안 믿겨. 전부 다… 꿈만 같아.”

속삭이던 입술은 웅얼대며 가라앉았다. 등을 찬찬히 도닥이는 그의 따뜻한 손에 자꾸만 울컥이며 눈물이 솟았다. 온전한 사랑의 결속, 꿈에도 그리지 못했던 순간을 앞에 두고선 나는 바보처럼 울기 시작했다.

아름답고도 견고한 사랑은, 내가 감히 바라지 못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바랄 수조차 없었고, 갖기 위해 욕심을 낼 수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그러던 내게, 운명 같은 사랑이 꿈결처럼 내려왔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를 구해준 태양, 내 운명의 짝, 내 알파, 내게 희망이라는 선물을 준, 사랑.

내게 사랑은 곧, 차도헌이었다.

눈물에 젖은 뺨을 조심스레 쓸어준 그는 달뜬 이마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애정을 듬뿍 담은 그의 스킨십에는 내가 울지 않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앞에서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 어제, 지해랑 닮은 사람을 봤어. 걱정했던 만큼 눈물도 많이 안 났고, 슬픔도 많이 옅어졌더라.”

어제 지해를 닮은 그 사람을 보며 내가 떠올렸던 건 어쩌면, 희망이었다.

줄어들지 않는 빚,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어둠속에 몸을 숨긴 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창가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우리들.

언제고 그곳에서 당당히 걸어 나가 바깥세상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나조차도,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범한 삶은 우리의 운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분에 넘치는 욕심이자 죄악이라고….

“그 모습을 보니까 우리도 어쩌면… 그렇게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그 애들도… 어쩌면 어둠보다도 더 빛이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나를 바투 끌어안는 차도헌의 품에 안긴 채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 속에서는 모두가 행복하게, 평범한 삶을 사는, 마치 꿈결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게 와줘서 고마워.”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짓밟혀있었을 거야. 빛이 얼마나 따스한지도 모르고, 햇살이 얼마나 눈부신지도 모르고… 나는 그대로 재가 되어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거야.

“내 삶에 빛이 되어줘서, 내 전부가 되어줘서, 고마워.”

마주한 호흡이 조심스레 섞였다. 깊은 입맞춤이 한참을 머무르다 떠난 곳에는,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더….”

우주가 있었다, 서서히 차오르는 달빛 아래 밤하늘을 닮은 그의 눈동자에는, 내 전부를 담은 우주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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