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녹은 자리
1.
긴장감이 섞인 숨이 입술을 타고 새어나갔다. 눈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이 정오의 햇빛을 반사하는 동안, 나는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지도 못하고 옴짝대며 주저하길 반복했다.
“-못하겠어.”
조수석에 앉은 이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지만 결국 핸들에서 손을 뗀 건 나 자신이었다.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며 시동을 끄는 내 뺨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춘 입술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스스 하며 웃는 소리를 냈다.
“왜, 도로 주행도 잘 봤잖아.”
“그땐 전문가가 계속 내 옆에 있었잖아.”
“난 전문가가 아니야?”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 대꾸하는 차도헌의 앞에서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설마 자기가 운전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거야?”
차도헌, 그의 운전을 말하자면 준법과 범법 사이를 드나드는 도로 위의 무법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억 소리 나는 고급 세단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도로 위의 모든 차가 줄행랑을 치듯 피한 덕택에 그렇게 과격한 주행에도 딱지 한 번 날아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의 무자비한 주행 습관을 보고 배웠다간 안 될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윤 비서님한테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어.”
윤 비서님은 내 운전 연습을 도울 상대가 차도헌이라는 사실에 내리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아무리 존경하는 상사라 할지라도 그 과격한 운전에 한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반기를 들었던 윤 비서님은 차도헌의 매서운 눈빛에 ‘아무리 총알을 다 튕겨내고 불구덩이를 통과하는 모델이라지만… 아무쪼록 안전 운행하시길 바랍니다.’라며 말을 덧붙이곤 자리를 피했다.
“나 말고 딴 놈이랑 한 차에 타겠다고. 안 되지, 절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몸이 훅 들린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그의 몸 위로 올라탄 자세가 된 나는 목덜미 위로 가볍게 잘근대며 키스 마크를 남기는 차도헌의 입술에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으…! 잠, 잠깐-!”
“혼나는 데 잠깐이 어디 있어.”
가슴 위를 부드럽게 주무르던 손이 차츰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어느새 조금씩 새어나가기 시작한 페로몬이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나는 다시금 내 살결 위를 앙, 깨무는 그의 투정에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그제야 그는 장난스레 굳혔던 얼굴을 펴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내 심장 위로 뺨을 붙인 그는 가슴팍 위로 입술을 차근히 맞추며 목소리를 냈다.
“이다음엔, 또 뭐 해보고 싶어?”
“…도헌 씨 덕분에 해볼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내 볼을 간질이는 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주며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영화관 가보기, 수영 배우기, 면허 따기…. 머릿속에 그려놓은 리스트는 거의 다 달성 완료된 것들로 가득 찬 채였다.
한참 머릿속을 헤집으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문득 내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퍽 집요해졌음을 깨달았다. 허벅지 안쪽을 뭉근히 문지르며 느긋이 자극을 주는 애무에 이어 코끝에 맡아지는 그의 짙은 페로몬은 그가 매우 흥분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부푼 앞섶을 응시하며 나는 몸집을 불리는 흥분감과 기대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 어젯밤 내내 혹사당했던 몸은 만약 여기서도 일을 벌였다간 아예 며칠간은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없을지도 몰랐지만, 나조차도 이미 달아올라버린 걸 어떡해.
눈을 내리감은 채 정신없이 내 몸 위를 지분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쑥 장난기가 샘솟았다. 나는 돌연 짤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어깨를 뒤로 확 밀었다.
“아!”
“왜, 왜 해영아.”
내 짤막한 비명에 차도헌은 다급히 내 몸을 어루만지던 손을 확 떼고는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딱 제 덩치를 모르고 신이 나 주인을 깔아 눕혔다가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놀란 덩치 큰 강아지 같아서, 나는 그의 뺨을 쓸어주며 참았던 웃음을 흘렸다.
“나 하고 싶은 거 생겼어.”
내 말에 그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들어찼다. 다시금 지긋이 내 뺨 위로 입맞춤을 이어 나가기 시작한 그는 도로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뭔데?”
“차 망가뜨릴까 봐 걱정되는데….”
“괜찮아. 또 뽑으면 돼.”
“안 돼, 그럼 안 할 거야.”
대체 내가 이 차로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하는 차도헌의 얼굴 앞에서 나는 천천히 그의 가슴팍을 매만지던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우리… 이 차에선 아직 안 해봤잖아.”
이윽고 그의 버클을 능숙하게 푸는 손길에 차도헌은 이마를 내 어깨 위로 기대며 낮은 신음이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게, 아직 비닐도 다 안 뜯었는데.”
옅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 뒤로, 어느새 내 옷을 벗겨낸 차도헌이 드러난 가슴 위로 입술을 묻었다. 달아올라 잔뜩 솟은 돌기 주변을 잘근 깨무는 자극만으로 나는 짙은 페로몬을 흘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뜨거운 체온이 맞닿은 곳에는 오롯이 속삭이는 사랑이 있었고 짙은 애정이 있었다.
그렇게 겹쳐진 몸은 떨어질 틈을 보이지 않고 끝없이 뜨거운 열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내 페로몬으로 가득 채워진 차 안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나름대로의 새 차 시승식은 끝이 났다.
***
매일 아침, 차도헌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며 잠에서 깼다. 서늘한 바람이 몰고 온 공기에 이어 온몸을 적시듯 시원한 비 냄새가 나면,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잠에 푹 젖은 목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혔다.
이제 눈을 뜨면 내 앞에 그가 있었다. 변하지 않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차오르는 행복에 허우적대며 몸을 가누질 못했다.
행복했다. 차도헌과 메이팅이 이루어진 후의 내 삶은, 도저히 그를 만나기 이전의 삶을 그릴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불안하지 않은 삶, 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삶이 주는 온전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와 함께하는 매일이 선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도헌은 내게 전부가 됐다.
메이팅 후에 단단해진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늘 크고 작은 아픔을 달고 살던 몸은 그가 주는 사랑 아래 차츰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앙상하게 마른 갈비뼈와 툭 불거진 척추뼈가 늘 선명히 보였던 몸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서서히 살이 붙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정상 체중에 가까워진 몸에 늘 창백했던 뺨은 혈기가 돌아 장밋빛으로 물들기까지 했다.
몸이 건강해진 만큼, 그간 늘 달고 살았던 억제제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됐다.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늘 불규칙했던 히트 사이클도 그와 메이팅을 하고 난 후엔 정확한 주기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규칙적이 되었다.
그렇게 내게 일어난 모든 긍정적인 변화에는 전부 내가 사랑하는 알파, 그리고 나의 운명의 짝인 차도헌이 있었다.
그와 메이팅을 맺고 보낸 첫 일주일간은 사랑에 푹 빠져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도해영에게 차도헌이 있다는 것, 차도헌에게 도해영이 있다는 것.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 이것뿐이었다.
밤을 새고도 모자랄 만큼 사랑을 나눴다. 서로의 체취를 오롯이 맡으며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눈을 뜬 곳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또 사랑에 빠졌다.
그와 메이팅이 되고 나서 일주일이 넘도록 나는 평생 그의 곁에서 몸을 붙이고 있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짝의 품에 안겨 그저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창 너머로 햇살과 달빛이 비출 때마다 그저 하루가 지났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메이팅을 하고 이 주차에 접어드는 날, 내내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 그의 품에 붙어있던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 건 차도헌이었다.
“그동안 못 했던 것들, 해보고 싶었던 것들, 다 해보자.”
차도헌은 그동안 내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죄다 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듯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커다란 셔츠만 달랑 한 장 걸친 채 그의 가슴팍 위로 등을 기대어 앉은 나는 그가 준비해 준 카탈로그를 펼쳐 들었다. 이런저런 실내외 취미 활동을 비롯해 빼곡히 적힌 내용을 훑는 동안, 나는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의 품 안에서 바보같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난 시간, 그 사창굴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었구나 싶어서…. 빚을 청산하는 일에만 급급해 몸과 마음이 썩어 문드러져도 그냥 꿋꿋이 살아남아야만 했던 우리의 삶이, 너무도 속상하고 안타까워서….
뺨을 적신 눈물을 훔치며 나는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내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는 차도헌은 가만히 내 등을 쓸어주며 온기를 내어주고 있었다.
“…나, 영화관 가보고 싶어.”
아주 오래전, 은수와 함께 딱 한 번 가봤던 영화관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과거의 상처를 하나둘 꿰매기 시작했다. 황 회장이 호출을 해올 때마다 긴 시간 타야 했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었던 공포감을 떨쳐내곤 이제는 두려움 없이 혼자서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게 됐고,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여행을 대비해 수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포기해야만 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리스트를 지워 나갈 때마다, 빠르게 아무는 상처만큼 저 멀리 미뤄둔 거대한 산의 모습은 차츰 선명해지고 있었다.
***
차 안에서 사랑 가득한 시간을 보낸 후에도 줄곧 욕실 안에서까지 이어지던 긴 시간은 손끝이 쪼글쪼글해질 때야 끝났다.
방금 씻고 나와 물기가 어린 몸 위로 보송한 타월이 감싸졌다. 내 몸을 부드럽게 안아 든 차도헌은 욕실에서 그대로 걸어 나가 안방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는 동안, 나는 수건을 그대로 몸에 두른 채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갔다.
내 머리를 말려주려 드라이어를 준비하던 차도헌이 드레스룸 안으로 쏙 들어 가버린 내 뒤를 따라왔다. 그와 내가 입을 옷을 꺼내 준비하는 내 등 뒤로 다가선 그는 수건이 흘러내려 드러난 어깨 위로 입술을 맞추며 다정히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간지러운 입맞춤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준비된 옷을 그의 품 안에 안겨 주었다. 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워진 봄 날씨는 가벼운 캐시미어 니트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 되었다.
그는 내가 골라 준 옷을 입곤 새 수건을 든 채 내 앞에 섰다. 여전히 푹 젖은 그와 내 머리칼에선 물기가 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는 다 말리고 가자.”
급하게 옷을 입기 시작하는 내 앞에서 그는 가볍게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주며 물기를 없애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머리를 온전히 맡길 새도 없이 나는 다리를 확 쪼그려 바지를 입었다.
나조차도 왜 이리 마음이 급해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미뤄온 시간만큼 ‘그’도 상처를 받았을 생각에 더더욱 마음은 다급해져만 갔다.
종종 내게 강태산의 소식을 전할 때마다 만약 내가 원하면 함께 그의 면회를 가자고 말했던 차도헌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나는 줄곧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늦출 수 없었다.
“도헌 씨, 괜찮으면 우리….”
이제는 리스트의 가장 끝자락, 내내 할 수 없을 거라고 미뤄두기만 했던 그 일을 해 보일 때였다.
“강태산, 보러 갈래?”
강태산, 그와의 온전한 이별을 해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