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똑같았다.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사람을 써서 청소를 시켰다는 차도헌은 자신도 이 집이 오랜만이라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차에서 내릴 적에 내 몸은 그의 품에 단단히 붙들리고야 말았다. 걸을 수 있다며 내려달라는 내 목소리에도 도리어 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던 그는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할 때까지 내 몸을 안아 든 채였다.
이윽고 그의 몸이 소파 위로 부드럽게 자리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나를 앉힌 채 내 몸을 바투 끌어안은 그는, 천천히 내 가슴팍 위로 얼굴을 묻었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그는 작게 콩닥이는 내 심장 박동을 들으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부드럽게 허리를 어루만지며 가슴팍 위로 입맞춤을 남긴 그는 다시금 내 품 안으로 파고들 듯 내 자그마한 심장 위로 뺨을 댄 채 두 눈을 감았다.
“해영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
“…….”
“네가 있어서,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심장 한 켠이 아릿하게 통증이 일었다. 창 너머 노을빛이 찬란히 쏟아지는 아래,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굴었다.
노을빛에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박동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내 품 안에 얼굴을 묻은 그의 머리칼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춘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적막 사이로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얄팍하게 콩닥대는 내 자그마한 심장과는 다르게 느릿하게 뛰어대는 그의 커다란 심장은 그가 내쉬는 차근한 호흡에 따라 묵직한 박동을 내고 있었다.
이윽고 감긴 두 눈꺼풀 위로 그의 고백이 내려앉았다. 입술 위로 부드럽게 닿아오는 그의 입맞춤에도,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는 그의 몸짓에도,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도.
“사랑해, 해영아. 그 무엇보다도 너를….”
그 모든 곳에 그의 사랑이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욕심내면 안 될, 감히 내가 가져서는 안 될 사랑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의 머리칼 위로 차츰 어스름한 빛이 내려앉았다. 반짝이던 황금빛 노을이 사라진 창밖은 어느새 짙푸른 보랏빛으로 물든 채였다.
그 순간 작게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에 차도헌은 내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곤 포옹을 풀었다.
두 뺨 위로 옅은 열이 올랐다.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그는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매만져주며 물었다.
“뭐 먹고 싶어? 바로 장 봐와서 해줄게.”
돌연 무드를 깨버린 허기가 원망스럽다가도, 그와의 감정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식사를 직접 차려주겠다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음식 안 차려줘도 돼. 괜히 도헌 씨 번거롭잖아. 그냥 간단히 먹어도-,”
“너 아직 환자야. 당분간은 바깥 음식도 안 되고, 대충 끼니 때우는 것도 안 돼.”
부러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손수 음식을 해주겠다고 답하는 차도헌의 앞에서, 나는 지금이 약물을 가져올 수 있는 적절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의 품 안에서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는 척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약물은 분명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약물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벌 만한 장보기 거리를 떠올려야 했다.
“새우… 새우 볶음밥.”
“새우 볶음밥. 그리고.”
“그거랑… 어…, 아이스크림?”
길게 고민하는 사이로 그는 내가 말한 것들을 모조리 사 오겠다는 듯 두 눈에 불을 켠 채였다.
“아이스크림 무슨 맛. 아니다, 그냥 종류별로 다 사 올게. 새우 볶음밥이랑 아이스크림이랑 또.”
“…가지무침.”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을 아무거나 내뱉은 바람에 이상한 조합의 저녁 식사가 되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내내 끌어안고 있던 나를 소파 위로 조심스레 옮겨준 그는 도장을 찍듯 이마 위로 입술을 꾹 찍고는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외투를 챙길 생각도 않곤 차 키만 집어 든 채 현관으로 향한 그는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내게 당부하듯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기면 바로 전화하고.”
“응.”
“금방 다녀올게. 쉬고 있어, 해영아.”
“응, 조심히 다녀와.”
내 대답을 끝으로 다급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시동이 켜진 듯 차고 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실에 난 창 너머로 그의 차가 빠르게 빌리지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와 함께 이 집에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올라간 적 없는 2층, 그곳에 다다른 순간 텅 빈 복도 위로 아득히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목숨 잘 붙잡고 살게, 그쪽 앞길 안 막을 테니까….’
‘도해영.’
‘약물 제대로 완성될 때까지는 내가 그쪽 목숨에 해 안 끼치게 살 거야. 그니까, 그런 눈으로 나 보지 마.’
당장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그날의 기억은 점차 꿈결처럼 옅어져만 갔다.
이제 복도에는 두 명의 도해영이 있었다. 각인을 풀어내기 위한 약물을 개발해낸 차도헌에게 상처를 받은 과거의 도해영과 차도헌을 위해 그 약물을 스스로 먹겠다는 지금의 도해영.
“…이게 맞는 거야.”
과거의 내 모습을 마주 보고 선 채 나는 부러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자, 내가 꼬아놓았던 우리의 운명을 원래대로 돌이켜 놓겠다는 다짐이었다. 차츰 옅어지는 과거의 내 모습을 지나쳐 걸어간 복도의 끝, 그곳엔 약물이 있는 그의 집무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오랜 시간 쓰지 않았는데도 깔끔하게 정리된 집무실의 전경이 펼쳐졌다. 벽면을 덮은 높은 책장과 소규모 회의실, 그리고 투명한 칸막이가 쳐진 한쪽에는 그의 개인 사무 공간이 있었다.
나는 이끌리듯 그의 자리로 걸어갔다. 깔끔한 성격을 보여주듯 잘 정리된 책상 위에는 서류 몇 장과 만년필만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를 조심스레 매만지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자리 옆으로 실험실을 연상하듯 길게 이어진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신약 개발에 대한 보고서와 약물의 안전성 실험 결과지가 나란히 쌓여 있었고, 그 한편에는 금고 크기의 투명한 저온 보관고가 놓여 있었다.
자그마한 유리병 10개가 일렬로 나란히 꽂힌 보관고. 그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투명한 액체는 나와 차도헌의 각인을 끊어낼 수 있는 약물이었다.
메이팅이 되는 순간 모든 건 되돌릴 수 없어진다. 각인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찰랑이는 소리가 나는 자그마한 유리병 두 개, 손안에 붙잡은 마지막 기회를 꾹 움켜쥔 채 나는 조용히 방에서 걸어 나왔다.
***
그가 준비한 저녁 식사는 완벽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디저트도 완벽했고, 식사가 끝난 후에 내 몸을 조심스레 씻겨주던 그의 손길도 완벽하기에 그지없었다.
부드러운 거품을 푼 욕조, 찰랑이는 따스한 물 아래로 내 몸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 물 위로 피부가 드러날 때마다 잘게 입을 맞추며 웃어 보이던 그의 모습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가는 따뜻한 드라이어 바람에 차츰 옅어져만 갔다.
차도헌은 드넓은 침대가 무색하리만큼 내 몸을 바짝 끌어안은 채 누웠다. 가볍게 등을 도닥이는 다정한 손길이 새벽을 꼬박 넘길 때까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잠든 척을 하며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차츰 그에게서 고요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품 안에서 진하게 맡아지기 시작하는 페로몬은 그가 잠들었음을 일러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팔을 푸르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부스럭 소리 하나 내지 않았는데도 잠에서 깬 차도헌은 도로 내 몸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왜, 해영아.”
잠기운이 묻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목말라서. 물만 금방 마시고 올게.”
“누워있어. 가져다줄게.”
그는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만류하며 내 뺨 위로 입맞춤을 남기곤 상체를 일으켰다. 내 몸 위로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며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 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너무 오래 누워만 있어서, 좀 가볍게라도 걷고 싶어.”
“그럼 같이 가.”
“안 그래도 돼. 도헌 씨 그동안 나 때문에 잠도 잘 못 잤다면서.”
차츰 걱정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부러 밝게 웃어 보였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주며 다정히 눈을 맞춘 나는 부디 그가 나의 얄팍한 변명을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금방 다녀올게.”
그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곤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걱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하는 차도헌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침대 위로 눕히곤 뺨을 쓸어주자, 그는 표정을 풀고 내 손바닥 위로 입을 맞췄다.
나는 부러 태연한 걸음으로 방에서 나왔다. 부엌까지 유유히 걸어 나온 나는 조용히 1층 손님방 안쪽에 딸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쪽에 난 창으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쳤다. 한쪽에 자리한 욕조에 걸터앉은 채 파자마 주머니에 넣어둔 약물을 꺼내어보자 투명한 액체가 달빛에 반짝이며 작게 찰랑이는 소리를 냈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우리가 각인하기 전으로, 우리가 만나기 전으로, 우리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때로….
‘…해영아.’
귓가에 아련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감은 두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맞춤과 허리를 당겨 안는 단단한 품,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속삭임과 오롯이 나만을 향했던 페로몬, 그리고….
‘사랑해, 도해영.’
매일 밤 잠든 내게 고백하던 차도헌의 목소리, 내가 사랑하는, 알파의 목소리.
축축하게 젖어버린 두 볼이 마를 새도 없이 눈물은 끝없이 새어 나왔다.
욕심이 났다.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 너무나도 욕심이 났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가져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나 같은 게 함부로 욕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해영은 차도헌의 메이트 상대가 될 수 없다. 내가 욕심낸 결과가 그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나는 더더욱 그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으니,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뿐이었다.
자그마한 유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냄새를 맡아볼 것도, 조금 맛을 볼 것도 없이 나는 그대로 입 안에 약물을 전부 털어 넣었다. 몇 모금에 나눠 삼켜 들어간 약물은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데 심장은 타들어 가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서로 만난 적 없던 때처럼, 우리가 각자의 삶을 그저 살아가고 있을 때처럼, 내가 다치더라도 차도헌은 손끝 하나 아프지 않을 테고, 내가 죽더라도 그의 목숨은 온전하게 남을 것이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꼼꼼히 얼굴을 닦았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하며 아프게 뛰어대는 심장을 가다듬은 후에야 나는 그가 있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도헌은 내가 침대 위로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울었어.”
등을 도닥이며 걱정스런 목소리를 내는 차도헌에게, 나는 괜찮다며 작게 고개를 젓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그와 내 몸이 완벽하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겹쳐졌다. 마치 완전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맞닿은 두 심장이 비슷한 속도로 쿵쿵대며 뛰어대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세게 감은 채 눈물을 참았다. 내 마른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그의 심장 위로 입을 맞췄다.
“…사랑해.”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이젠 정말 가까워진 이별의 시간 앞에서 나는 못다 할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사랑해, 차도헌.”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채 나는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였다. 갈래로 찢어지는 심장이 고통스럽게 울컥일 때마다, 나는 더더욱 그의 가슴 위로 키스를 남겼다.
“당신을… 많이 사랑해.”
만약 하늘이 내게 영원의 순간을 고르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고를게.
당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수천 번이고 이 밤을 떠올릴게.
“사랑해….”
내 입술 위로 포근한 입맞춤을 남기는 그의 몸을 갈급하듯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깊어지는 어둠 사이로 그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
방 안쪽에 딸린 욕실 너머로 작게 물소리가 들렸다. 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쓸자 아직 가시지 않은 그의 온기가 만져졌다.
그제야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창가를 응시했다. 어느새 푸르스름해진 새벽빛이 방 안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분명 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바보. 바보 도해영.”
몰려오는 허탈감에 침대 매트리스 위로 머리를 푹푹 박았다. 나 자신이 이토록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없었다.
어젯밤은 내게 남은 그와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잠든 차도헌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며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얼마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지, 잠을 잘 때 느슨하게 풀리는 그의 페로몬이 얼마나 좋은 향기를 내뿜고, 나를 끌어안은 그의 품이 얼마나 넓고 따뜻한지… 그의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바보.”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차도헌의 모습들을 놓친 기분에 허망함이 몰려왔다.
시트 위로 짙게 밴 그의 페로몬을 들이쉬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의 자리는 온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욕실에서는 줄곧 물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내가 깨어난걸 모르는 차도헌에게 나름 서프라이즈를 해주고픈 마음에 무거운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나누던 포근한 잠기운이 내려앉은 침대 위를 마지막으로 한번 슥 어루만지곤 방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갔다.
부엌에 도착하자마자 까치발을 들어 찬장 위로 손을 뻗었다. 커피를 내리기 위한 모든 준비물을 꺼낸 나는 차근히 그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볶은 원두는 그라인더 안에서 곱게 갈리는 소리를 냈고, 물이 다 끓은 전기 포트에서는 짙은 수증기가 몽글몽글 퍼져 나왔다. 그가 늘 아침에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것을 따라 하며 소복이 쌓인 원두 가루 위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자, 이내 여과지를 통과한 짙은 색 커피가 컵 안으로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
향기로운 커피 내음이 퍼지는 사이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는 드러난 목덜미 위로 차근히 입을 맞추며 아침 인사를 해왔다.
“응. 좋은 아침.”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품 안에서 내 몸을 빙그르르 돌린 그는 뺨 위로 입술을 연달아 찍어댔다. 쉼 없이 쏟아지는 그의 간지러운 키스를 받으며 나는 부러 웃어 보였다.
내 앞에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나왔는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과 탄탄한 몸 위로 타월 한 장을 두른 차도헌이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푹 자도 되는데.”
그는 마주한 내 몸을 품 안으로 답삭 끌어안은 채 내 머리칼 위로 쉼 없이 입맞춤을 내리눌렀다. 얇은 파자마 너머로 그의 몸에서 퍼지는 뜨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나는 그의 팔뚝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조심스레 포옹을 풀어냈다. 오늘 그에게는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고, 만약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그의 입장이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일찍 나가야 한다며. 어서 옷 입고 와.”
오늘은 그의 새어머니인 이주미의 최종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어오는 차도헌에 나는 그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쿡, 누르며 답했다.
“차도헌 씨. 나도 뉴스 볼 줄 알아요.”
“당분간 보지 않기로 했잖아.”
“왜, 나름 괜찮던데. 아는 것도 많이 생기고.”
내 답에 차도헌은 걱정이 가득 들어찬 듯 미간을 좁히며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의식을 차린 후부터 차도헌은 혹여나 뉴스 보도로 내가 상처받을까 걱정된 나머지 ‘뉴스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전에도 내 신상이 언론에 밝혀졌을 때나, 모란이 불에 탔을 때나, 여러모로 뉴스를 통해 충격을 받은 전적이 많았던지라 차도헌은 병실에 있는 내내 내가 뉴스를 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곤 했었다.
하지만 그의 일정을 미리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뉴스에서는 앞으로 있을 그의 일정을 대문짝만하게 퍼트리는 데에 일등 공신이었고, 내 퇴원 바로 다음 날 이주미의 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역시나 뉴스 덕분이었다.
그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도가 언론이라니, 새삼 내가 사랑하는 알파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도헌 씨한테 좋은 날이잖아. 그동안의 누명도 다 벗겨지고, 도헌 씨 어머니 사건 진범도 밝히고.”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남겼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치지 못하는 그의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을 이었다.
“멋지게 입고 나와. 오늘 차도헌은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테니까.”
내 말에 그는 굳었던 표정을 풀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후로 이어지는 건 온 얼굴 위로 쉼 없이 쏟아지는 그의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드레스룸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던 나는 잠옷 주머니 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담긴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는 어젯밤 내가 마셨던 것과 같은 약물이었다.
포근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 위로 마개를 연 작은 유리병을 기울였다. 투명한 약물을 찰랑이며 삼킨 커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어때. 좀 괜찮아?”
다시 부엌으로 나온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옅게 풍기는 향수 사이로 물씬 풍기는 그의 페로몬에 나는 울컥이는 감정을 삼켜내며 웃어 보였다.
“멋있네, 도헌 씨.”
어두운 색 수트를 갖춰 입은 그는 느슨하게 풀어둔 넥타이를 조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깔끔히 머리를 넘긴 그의 모습을 보자니 언젠가, 그가 사창가 골목으로 나를 찾아왔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완벽한 알파를 만나게 됐는지. 엉킨 실처럼 꼬여버린 운명이 실수로 내게 준 선물이라고 밖엔 설명되지 않는 내 완벽한 알파, 차도헌.
나는 손안에 쥔 커피잔을 잠시간 응시했다. 차도헌이 이 약물을 마시는 순간 우리의 각인은 완벽히 끊어진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바람대로, 각인이 끊어지면 더 이상 그는 억지로 내 운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잘못되더라도 차도헌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죽을 것처럼 아파도 그는 멀쩡할 테고, 내 몸이 칼에 찔려도 그는 고통 한 점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더욱 우리의 각인은 끊어져야만 한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고통 없이 살아가야 할 차도헌을 위해서, 나는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어야 했다.
“…커피, 마시고 갈래?”
머그를 받아 든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끝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울대는 그가 내가 내려준 커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맛있다.”
빈 머그를 보여주며 그는 내 뺨 위로 입맞춤을 남겼다.
“네가 해줘서 더 맛있나 봐.”
설거지를 핑계로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렁이는 감정을 참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지, 자꾸만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나는 그가 다 비운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이별의 시간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금방 다녀올게. 쉬고 있어.”
“응.”
현관 앞에서 한참 동안 끌어안은 채 입술 위로 수차례 키스를 퍼부었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듯 차도헌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밖에서 대기 중인 윤 비서님으로부터 온 전화가 두 번이나 울리고서야 포옹을 풀어낸 그는 내 볼을 가볍게 쓸어주며 웃어 보였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는 듯 아쉬운 얼굴을 한 그는 입술 위로 진한 입맞춤을 남기며 내게 속삭였다.
“사랑해, 해영아.”
어느새 그의 페로몬은 내 전신을 푹 적실만큼 짙어져 있었다. 숨결 사이로 부드럽게 퍼지는 그의 페로몬을 맡으며 나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겨우 참아냈던 눈물은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하염없이 쏟아지고야 말았다.
“나도….”
미처 답하지 못한 대답은 정처 없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갔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차츰 무너져 내린 마른 몸은 다시금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사랑을 토해냈다.
“…사랑해, 사랑해, 차도헌….”
그에게 미처 닿지 못한 나의 마지막 고백은 깜박이며 꺼지는 현관 센서 등 아래에서 자취 없이 흩어지고야 말았다.
“…로 가주세요. 네, 옛 주소요.”
빌리지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주소는 부러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택시는 사창가가 즐비한 도시 외곽에 도착했다. 골목 안쪽까지 들어간 택시는 철거 천막이 세워진 건물 앞에서야 정차했고, 나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무너진 모란과 마주했다.
화재의 잔해가 치워지지 않은 불타버린 건물은 철거용 천막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헐겁게 쳐진 천막을 헤치며 들어간 곳에는 잿더미가 된 모란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건물의 잔해만큼 서늘하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내 몸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몸에 밴 익숙한 위치를 따라 나는 눈을 감은 채 잿더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어두운 로비를 지나면 나오는 좁은 나무 복도, 그곳을 한참 걷다 보면 오메가들이 잠들어 있는 쪽방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마담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제야 눈앞에 모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오메가 애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쪽방 위로 몸을 뉘었다. 죄다 무너진 나무 바닥의 잔해 위로 둥그렇게 몸을 말아 눕자 손끝에 날카로운 조각이 닿았다.
한때 은수가 담겼던 자그마한 항아리는 손쓸 수조차 없이 깨져있었다.
“왜, 왜 이러고 있어….”
나는 몸을 일으켜 깨져버린 항아리를 맨손으로 쓸어 모았다. 이리저리 찔려 붉은 피가 배어나는 사이로 날카로운 조각이 깊숙이 박힐 때마다, 나는 더욱 갈급하며 은수의 조각들을 내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제야 거짓말처럼, 차츰 코밑으로 사향 냄새가 났다. 늘 마담에게서 났던 체취가 얼어붙은 공기 사이로 선명히 맡아지고 있었다.
품 안에서 해진 종잇조각을 꺼냈다. 나와 마담이 이름이 적힌 출생 팔찌를 손안에 쥔 채 나는 입 안 가득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날 차례였다. 얼룩진 내 운명에 나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 입술 사이로 터져나가듯 그의 이름이 쉼 없이 새어나갔다.
“차도헌, 도헌 씨, 내 알파….”
내 생에 가장 완벽한, 내 마지막 사랑.
“……사랑해.”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우리가 맺은 각인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