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에 남는 것
1.
사고의 순간은 마치 각인된 것처럼 내 손아귀 안에서 몇백 번이고 되감겼다. 끝에 다다르는 순간 처음으로, 다시 다다른 끝에서 결국 처음으로.
깊숙이 몸을 찌른 칼이 바닥 위로 낙하하는 순간, 전신을 타고 빠져나가는 혈류를 따라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는 감각. 코 밑으로 맡아지던 피비린내, 두 뺨을 흠뻑 적시는 눈물과 칼끝에서부터 차근히 퍼지던 고통.
뭍 아래로 먹힌 비명을 쉴 새 없이 웅얼대는 틈으로 박동에 맞춰 쏟아지는 핏덩이는 끝없이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 오롯이 아픔과 슬픔만이 남은 곳은 고요한 수면과 같았다가도, 몰아치는 거센 파도에 하염없이 휩쓸리는 소용돌이 같았다.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몸, 그 위로 흩날리는 물결에 기억은 차츰 뭉툭해졌다. 상처를 헤집어대던 흉기도, 선명하게 맡아지던 짙은 피 냄새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모든 것들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듯 점차 사그라졌다.
그렇게 몸 안을 가득 채우던 모든 날 선 감각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해영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나를 끌어안는 강한 품이, 두 뺨 위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결국 그 모든 고통의 끝에는 차도헌, 그가 있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눈꺼풀 뒤로 아릿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흐릿한 시야 속 그는 내 손을 붙잡은 채 안도와 슬픔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목이 막혔다. 한마디도 꺼낼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혔다. 뜨겁게 열이 오른 눈가는 창백하게 질린 두 뺨을 흠뻑 적실만큼 눈물로 얼룩져 갔고, 말라비틀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괜찮아, 해영아. 괜찮아….”
나를 끌어안는 차도헌의 품이 너무 아팠다.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팔도, 머리칼 위로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입맞춤도, 차분히 등을 쓸어내리는 따스한 손도 전부 다 이전과 같은데, 나는 너무 아팠다.
몸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아플 일은 없을 테니까. 커다랗게 뚫린 구멍 사이로 모든 게 빠져나가서, 그래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불길이 타오르고 난 곳에 남은 건 잿더미뿐인 것처럼.
내 안의 모든 것들도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기……, 아기 아직 있지…?”
잘게 떨리는 손바닥이 아랫배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딱딱하게 만져지는 붕대 안쪽으로 느껴지는 건 고통뿐인데도 나는 바보처럼 굴어댔다.
“도헌… 도헌 씨, 나…, 나 엄마는……?”
“…해영아.”
“우리 아기 생겼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나 엄마…, 엄마 보고 싶은데….”
속살거리듯 새어 나간 소리에 차도헌의 얼굴이 차츰 굳어져 갔다.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다정하게 쓸어주면서도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를 향한 눈빛에 담긴 절망만이 내게 답을 줄 뿐이었다.
“…아니라고 해줘… 응…?”
“…….”
“도헌 씨… 제발….”
차도헌의 품 안에서 나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울음을 토해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은 결국 홍수처럼 터져 내 숨통을 조르기 시작했다.
“너도, 아기도, 마담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게 귓가에 들린 그의 대답은 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바보처럼 숨을 부여잡고 살아남은 건 나뿐이라고, 마담도, 아기도, 전부 다 죽었다고.
“…흐윽… 거짓, 말….”
질식할 만큼 몸집을 부풀린 슬픔은 나를 짓뭉개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낸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걸까.
그럼 차라리 처음부터 주지 말지 왜 하늘은 내게 모든 것들을 줬다가 도로 앗아가는 걸까, 내겐 없다고 생각했던 엄마도, 얼결에 갖게 된 아기도, 다 처음부터 내게 주지 말지.
차라리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슬플 일은 없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맞닿은 눈빛 너머 슬픔이 담긴 곳에, 붉게 짓무른 눈가 위로 조심스럽게 차도헌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울음을 달래듯 부드럽게 품 안으로 당겨 안는 그 몸짓에 나는 더 불안해졌다.
따스한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그의 가슴팍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불안감에 덜덜 떨리는 손 아래로 그의 심장이 쿵쿵대며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해영아, 괜찮아….”
품에 더 기대라는 듯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쥔 그의 손이 등을 쓸어내리듯 내려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괜찮아, 해영아. 괜찮아….”
다시금, 나를 끌어안는 차도헌의 품이 너무 아팠다.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팔도, 머리칼 위로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입맞춤도, 차분히 등을 쓸어내리는 따스한 손도 전부 다 이전과 같은데, 불안감은 나를 짓누르며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태우고 사라진 마지막 불씨가 그을리고 간 자국은 차도헌, 그였다.
***
끝없이 몰려오는 고통에 잠들지 못하는 내게 의사가 안정제를 투여해주었다. 약 기운에 거짓말처럼 바로 눈이 감긴 후로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다시금 눈을 뜬 곳엔 여전히 내 손을 감싸 쥔 채 곁을 지키고 있는 차도헌이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듯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만약 맞잡은 손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깰 게 분명했다.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붙잡힌 오른손 대신 왼손을 침대 옆 협탁 쪽으로 조심스럽게 뻗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목을 축이고 다시 물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찬 채였다.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내가 기억했던 모습보다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 더욱 선명해진 이목구비에 이전보다도 더 짙은 그림자가 진 만큼, 차도헌은 지쳐 보였다.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꼬박 3주간 의식을 차리지 못한 탓에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내겐 여전히 그날의 모든 순간이 선명한데,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사건처럼 여겨지는 것이 낯설다면 낯선 일이었다.
내가 잠들어 있던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차도헌은 그간 벌어진 모든 사건을 처리했다고 했다. 줄곧 어깨에 지고 있던 5년 전 형제 살인 사건의 누명과 얼마 전에 있었던 오윤주 살인미수 혐의도 벗었다고 했다.
‘만약 내 삶에 네가 나타날 줄 미리 알았다면… 5년 전에 진작 처리했을 거야.’
차도헌이 진작 포기했던 것들을 이제 와 전부 처리해야만 했던 이유는, 놀랍게도 ‘도해영’이었다.
‘그땐 그럴 이유가 없었어. 형제들을 죽인 게 차서준이라고 밝힐 이유가, 내 어머니를 죽인 자가 이주미 그 여자라는 걸, 그 모든 진실을 밝힐 만큼 내 삶에 간절하지 않았어.’
‘…….’
‘이젠 지켜야 될 게 생겼어, 해영아, 이제 내겐 목숨을 내걸고 지켜야 할 네가 생겼어.’
모든 것이 조작되고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삶, 언제고 빼앗길 자리를 두고 더러운 싸움을 해야만 했던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그가 이제 와 이 모든 것들을 처리해야 했던 이유가 나였다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지키고 싶어서.
“…틀렸어.”
잠든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전부 다 내 탓인걸….”
일이 이렇게 된 건 죄다 내 탓이었다. 그의 완벽한 인생에 나라는 오점이 끼어든 것이 문제였다. 만약 내가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라는 존재를 약점 잡혀 크고 작은 구설수에 휘말릴 일도, 조폭 집단과 범죄에 연루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웅웅거리며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차도헌은 곧장 눈을 떴다. 그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않곤 내 뺨 위로 작게 입을 맞추며 내 상태를 살폈다.
“미안, 잠깐 잠들었나 봐.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혹여나 열이 나는지 다정히 이마를 짚는 손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러 옅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지 그는 내 손등에 꽂힌 링거줄부터 시작해서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도헌 씨 전화….”
나는 소파 한쪽에서 울려대는 그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그는 전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기는커녕 화면 구석에 자리한 수신 거부 버튼을 꾹 누르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도로 소파 위로 내던져진 핸드폰은 잠시간 잠잠해졌다가 다시금 낯익은 발신자명을 띄우며 웅웅대고 있었다.
“받아. 회사 전화잖아.”
“괜찮아. 급한 전화 아니야.”
“윤 비서님 속 태우지 말고.”
이번에도 전화를 끊을 것처럼 구는 차도헌의 등을 밀며 가서 전화를 받고 오라고 부추겼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 안 아파. 멀쩡해. 도헌 씨가 잠깐 통화하는 사이에 안 죽어. 그러니까 다녀와.”
고작 전화 받는 걸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 상황이 차도헌에게도 웃기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내 이마 위로 짧게 입맞춤을 남기곤 병실을 떠났다.
원래부터 병실이 이렇게 넓었나.
덩그러니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자니 내내 그가 앉아있던 텅 빈 소파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지는지 금방 오겠다는 그의 다짐은 통화가 15분을 넘긴 상황에서 깨지고야 말았다.
너무 오래 누워만 있어도 좋을 건 없을 테니, 그가 자리를 비운 틈에 조금 걸어 보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링거대를 붙잡고 한 걸음 내딛자 참을만한 약한 통증이 아랫배에 일었다. 길게 늘어진 링거줄을 정리하는 동안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고통에 스스럼없이 걸음을 내디뎌 밖으로 나섰다.
그저 병실 문을 열고 나왔을 뿐인데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내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는 병실과는 다르게 서늘한 복도의 공기가 주는 시원함에 이끌리듯 기나긴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처 없이 이어지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병원의 옥상에 꾸며진 하늘정원이었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은 얇은 병원복 차림으로도 반길 만큼 오랜만이었다.
자그마한 별 두어 개가 박힌 짙은 색 밤하늘, 그 아래로 어둠에 잠긴 도시는 추위에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난간까지 걸어가 시선을 멈춘 곳에는 도시 외곽에 번지는 자잘한 불빛, 그곳에는 잠들지 않는 사창가가 있었다.
야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난간을 짚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어느새 물기 어린 눈가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다시금 그날의 기억은 눈앞에서 선명해져만 갔다. 복부를 헤집던 뜨거운 칼날의 고통보다도 나를 찌른 순간 강태산이 보였던 그 표정이, 너무나 선명하다가도 흐릿해지길 반복했다.
그 모든 기억이 악몽이길 바랐다. 어쩌면 내 모든 삶이 악몽이었으면 했다. 사창가에서의 모든 기억이, 마담과 나눴던 시간과 강태산과 나눴던 감정이, 차라리 전부 다 악몽이었으면 나았을까.
선명하게 자리 잡은 두려움은 정도를 모르고 몸집을 불렸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 안에 깊숙이 들어박힌 감정은 상실감, 고통, 두려움, 이런 것들뿐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안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 것처럼, 차도헌도 잃을까 무서웠다.
타오른 불길에 모든 것을 잃은 나를, 여전히 잿더미 위에 서있는 나를 끌어안은 차도헌도 같이 타버려 재가 될까 봐 무서웠다.
불안감이 차오를수록 나의 불행을 내뱉는 목소리들은 핏대를 세워가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두려움에 눈물을 떨굴 때마다 선명해지는 속삭임 사이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해영 씨는 차도헌의 목숨줄이에요.’
그건 나의 존재를 들어 차도헌의 역린을 설명하던 오윤주의 것이었다.
‘두 사람, 메이팅만 성공하면 정말로 차도헌의 목숨은 해영 씨 손 안에 쥐게 되는 거니까.’
아… 아―
그제야 나는 내 안에 가득 차오른 두려움의 이유를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알파 차도헌에게 있는 단 하나의 허점, 그의 중요한 목숨줄을 함부로 손에 쥔 역린 같은 존재.
그건 바로 도해영이라는 오메가였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나라는 존재는 그의 삶에 있어 그저 걸림돌일 뿐이라는 걸,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애초에 차도헌을 잃을까 두려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내가 차도헌의 목숨줄을 쥐게 될 이 상황이, 나로 인해 그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워질 이 잘못된 관계가 문제였다.
내가 잘못되더라도 차도헌은 괜찮아야 했다. 내가 죽을 것처럼 아파도 차도헌은 멀쩡해야 했고 내가 칼에 찔려도 차도헌은 고통 한 점 느끼지 않아야 했다.
그 모든 게 불가능해지는 순간은 메이팅뿐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진실된 사랑의 결실. 쌍방 각인을 한 연인의 영혼이 오롯이 연결되는 순간, 알파와 오메가의 운명은 오로지 서로를 향해 묶여 하나가 된다.
결국 이건 신이 알파와 오메가에게만 내린 유일한 선물이자 끔찍한 족쇄였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너만을 사랑할게. 내 전부를 걸고 도해영, 너를 사랑할게.’
‘…….’
‘우리, 메이트 맺자.’
신의 사랑이자 찬란한 황금색 태양 빛을 넘칠 만큼 손에 쥐고 살아온 알파, 그리고 신에게 버림받아 축축한 어둠에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온 오메가.
그런 오메가에게 알파는 사랑을 속삭였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나의 불행한 운명이 그에게 가져다줄 고통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그렇게 자라난 깊은 공포감은 곧 현실이 될 모습을 눈앞에 그려내고 있었다. 깊은 자상을 입은 내 옆으로 숨이 꺼져가는 차도헌의 모습이,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차도헌이 너무도 선명하게, 내 안에 고통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돼,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시한폭탄은 언제고 터지기 마련이다. 나조차도 외면한 내 불행의 무게를 차도헌이 짊어지게 할 순 없다. 그는 나를 진흙탕 같은 삶에서 빼내어 숨 쉬게 해주었는데, 내 불행에 그마저도 잠식시킬 수는 없었다.
차도헌의 삶을 위해서라도, 내가 사랑하는 알파, 차도헌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와의 모든 것을 끊어내야만 했다.
“-해영아!”
등 뒤로 다급한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난간을 붙잡은 손을 놓고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데 미처 몸을 돌릴 새도 없이 등에 그의 가슴팍이 닿았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쿵쿵대며 거세게 뛰어댔고,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팔에 힘을 준 채 더더욱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안도를 내뱉는 그의 숨, 그 안에 짙게 밴 사랑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울면 안 돼, 지금 여기서 울면 그가 모든 걸 알아차릴지도 몰라.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팔뚝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불안을 달래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차도헌은 작게 웃으며 내 머리칼 위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감기 걸리겠다. 들어가자.”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포옹에 몸을 맡겼다. 옅은 호흡 사이로 맡아지는 차도헌의 페로몬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기억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 안을 가득 채우던 그의 페로몬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욕심을 내어 그의 체취를 맡았다.
사랑하는 내 알파, 내 모든 걸 다해 사랑하는 차도헌….
당신을 놓아줄게. 당신을…, 놓아줄게.
기나긴 꿈에서 깨어날 시간,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때였다.
***
“해영 씨!”
병실 문이 벌컥 열린 사이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실 한편에서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는 차도헌을 그대로 쌩하니 스치며 쏜살같이 달려온 그녀는 내게 격한 포옹을 선사했다.
“오늘 퇴원이라면서요! 몸은 좀 어때요, 이젠 괜찮아요? 아픈 건 다 나은 거예요?”
“네. 와줘서 고마워요, 윤주 씨.”
“세상에- 얼굴 반쪽 된 것 좀 봐요, 바람 불면 날아가게 생겼잖아요!”
내 얼굴을 움켜쥔 오윤주가 마른 두 뺨을 매만지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한참을 내 얼굴을 조물거리며 대놓고 차도헌의 험담을 했다.
“해영 씨가 이렇게 반쪽이 됐는데 저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하루 다섯 끼를 수라상으로 차려주지 못할망정!”
“나 잘 먹어요. 도헌 씨가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요.”
내 대답이 신뢰를 주지 못했는지 오윤주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해영 씨, 그냥 우리 집에 와요. 내가 잘 챙겨줄게, 약속해요.”
돌연 나를 데려가겠다는 오윤주의 폭탄 발언에 차도헌은 짐을 챙기던 것을 멈추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여전히 내 뺨을 쓰다듬고 있는 오윤주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 그는 등 뒤로 나를 숨기며 으르렁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 친구 걱정하는 거잖아요.”
“해영이가 불편해하는 거 안보입니까?”
“그쪽이 잘못 본 건 아니고요? 우리 해영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쵸?”
차도헌이 대놓고 적의를 보인 만큼 오윤주도 대놓고 그를 향해 비아냥대고 있었다. 점차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차도헌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그를 막아섰다.
타이밍이 알맞게 차도헌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가서 받고 오라며 그의 등을 살짝 미는 나를 뿌리치지 못한 차도헌은 결국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날 선 분위기가 사라진 병실에서, 오윤주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쾌활하게 웃으며 들고 온 쇼핑백을 건넸다.
“걱정 마요. 차도헌 씨랑 싸우러 온 거 아니고 해영 씨 퇴원 선물 주려고 온 거예요. 우리 해영 씨 괜찮은지 내 눈으로 확인도 할 겸.”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쇼핑백은 과하리만치 무거웠다. 이걸 정말 받아도 되는지 당황스러워 얼어붙어 있는데,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해영 씨 건강 챙기라고 한약 좀 지었어요. 몸에 좋은 건 죄다 달여서 만든 거니까 하루에 한 팩씩 꼭 챙겨 먹고, 아! 지금 하나 먹어봐요. 입에 맞는지 봐야 하니깐.”
쇼핑백 안에 손을 쑥 집어넣은 그녀는 커다란 한약 팩을 하나 꺼내어 포장을 뜯곤 컵에 따라서 건네주었다. 쓴 약초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검은 액체를 조심스레 홀짝이는 내 곁에서 그녀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선물 고마워요, 윤주 씨.”
“세 달치니까 금방 먹을 거예요. 그거 다 먹으면 말해요, 또 보내줄게요.”
나는 부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 달, 세 달은 내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고마운 만큼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녀가 다치게 된 건 전부 나 때문인데, 이런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오윤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날 그녀에게 있었던 사건의 뒤에는 내가 있다는 것을. 강태산이 그녀를 죽이려 했던 이유에 도해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였다.
“미안해요. 윤주 씨 사고… 정말 미안해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사과를 하는 내 앞에서 오윤주는 마구 손사래를 치며 내 몸을 강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게 왜 해영 씨가 사과할 일이예요? 다 내 시어머니 될 뻔한 그 인간이 사주한 짓인데.”
“나 때문에 윤주 씨-,”
“해영 씨 잘못 아니에요. 며느리 노릇 제대로 안 했다고 사람 시켜서 나 죽이려고 든 이주미 여사 잘못이지. 안 그래요?”
“그래도….”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해영 씨 잘못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해영 씨가 나한테 미안해할 건 내가 준 한약을 먹다 말고 내려놓은 이 상황이라고요.”
오윤주는 잔을 다시 내 손에 단단히 쥐여주며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유연하게 화제를 돌려버린 그녀의 표정엔 더 이상 내가 이 일로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선 오윤주의 앞에서 나는 꼴깍이며 한약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장난 섞인 목소리로 한 팩 더 먹겠냐며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차도헌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오윤주는 마치 교대라도 하듯 다음 일정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만날 땐 지금보다 몸무게 5kg 붙어 있어야 해요. 한약도 매일 챙겨 먹고!”
“고마워요, 윤주 씨.”
건강해지라며 엄포를 놓듯 인사를 남긴 그녀는 문가에 선 차도헌을 슬쩍 쳐다보곤 내게 장난스레 속삭였다.
“혹여나 차도헌 씨가 못살게 굴면 나한테 와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오윤주의 속닥거림을 제대로 들어버린 차도헌은 헛웃음을 뱉으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런 차도헌을 쌩하니 스치며 걸어간 오윤주는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보내곤 병실을 나갔다.
병원복을 갈아입고 오는 사이 어느새 짐을 다 싼 차도헌은 커다란 짐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도헌이 이리 와서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그런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그는 뜨겁고 커다란 품으로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완벽한 포옹을 선물해주었다.
널따란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깊숙이 안기자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목덜미 위로 자잘한 키스를 퍼부어댔다. 다정히 머리칼을 쓸어주던 손이 등을 타고 내려와 허리 위로 안착할 때까지 품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에 차도헌은 다시금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집에 가자.”
머리칼 위로 지긋이 입맞춤을 남기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해내기까지….
“응, 집에 가자.”
차도헌을 죽이지 않기 위해 도해영이 해야 할 유일한 일.
그건 우리의 각인을 끊어내는 약물을 마시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