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43)

2.

자정이 넘도록 이어지던 수술은 새벽을 넘겨 겨우 끝났다. 수술실 복도를 서성이는 내 뒤로 몇 시간을 잠자코 대기하던 윤 비서가 잠시 커피를 사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열린 수술실 문 사이로 담당의가 모습을 비췄다.

“상태는 어떱니까?”

다급히 걸어가 묻는 내 목소리에 그는 차분히 수술 경과를 전달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응급실 도착 당시 출혈이 심해 쇼크 증상을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수술이 잘 끝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 환자의 몸이 많이 약한 상태라 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니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헌데….”

“혹시 해영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자상이 깊어 흉기가 아기집을 찢어낸 상태였습니다. 저희 쪽에서 최대한 노력을 해보았으나 이미 사고 당시에… 유산된 상황이었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인 그는 내게 유감을 표하곤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며 수술실로 돌아갔다. 텅 빈 수술실 복도, 옅은 녹색 등 아래에서 나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이 몸집을 불려갔다. 진작 물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사고 자체가 없도록 했어야 했다. 아무리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종일 놓아주지 않더라도 어느새 손끝에 작은 상처를 매달고 오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으면, 더더욱 이런 일이 없도록 온 힘을 다해 보호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결국 또 해영이를 다치게 만들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상상을 하게 만들 만큼 바싹 마른 몸으로 창백하게 얼어붙은 해영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짙게 올라오는 후회를 삼켜냈다.

깊은 잠이 든 해영이를 바라보며 나는 수없이 기도했다. 이게 하늘이 내게 주는 벌이라면 감사히 받을 것이다. 이번 일로 그동안의 삶을 속죄하라고 하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할 것이다.

해영이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목숨을 걸어 맹세할 테니 제발 해영이와 다시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며 잠들고 매일 아침 사랑을 속삭이며 잠에서 깰 기회를 달라고, 내 목숨을 다 바쳐 도해영을 지킬 테니 제발… 그의 의식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해영이는 꼬박 일주일이 넘도록 깨어나질 않았다.

“…이사님. 식사 준비됐습니다.”

등 뒤로 윤 비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온전히 해영이의 회복에만 집중된 특실의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 죽을 끓이던 윤 비서는 쟁반 위에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죽 두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아, 다 끓였습니까. …해영이가 깨어나면 좋을 텐데.”

내내 그러잡은 해영이의 손을 조심스레 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윤 비서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사님의 탓이 아닙니다. 강태산, 그자의 잘못만 있을 뿐입니다.”

“…….”

“그리고, 자꾸 식사 거르시면 도해영 님께서 많이 걱정하실 겁니다.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걱정하는 투로 목소리를 낸 윤 비서는 죽그릇 옆으로 수저를 내려놓더니 쟁반을 한쪽 팔에 끼운 채 정자세로 멈춰 섰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식사를 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것만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수저를 집어 들었다.

얕게 떠올린 죽에서는 고소한 향이 났다. 담백한 모양새가 딱 해영이가 좋아할 것 같아 꼭 윤 비서에게 레시피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맛있게 먹을 해영이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는 내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도저히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죽그릇에 꽂아둔 수저가 천천히 그릇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 멈췄다. 수저까지 따뜻하게 데울 만큼 포근한 김이 나는 그릇 앞에서 나는 버석하게 마른 얼굴을 거칠게 손으로 쓸곤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하게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무능하고, 쓸모없고… 해영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나는 해주지 못했다는 게…. 이런 알파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기 오메가를 지키지도 못하는 알파가….”

손 틈 사이로 새어나간 후회 짙은 목소리가 조용히 병실을 울렸다. 이불이 작게 부스럭대는 그 흔한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얼어붙은 병실 안, 머릿속에는 끝없이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

‘-해영아! 도해영!’

피범벅이 된 몸을 품에 끌어안았던 날,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몸의 무게에 몇 번이고 심장 위로 귀를 가져다 대며 초조해했던 그 밤.

황 회장의 시체를 들것 위로 올려 들고 나가는 구급대원들과 조직원들을 체포하는 경찰들. 그 광경 속에서 강태산은 해영이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저항도 없이 붙잡히고 있었다.

어깨가 뒤로 꺾이며 제압되는 동안에도,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그의 눈은 내 품에 안긴 도해영을 향해 있었다.

후회와 슬픔으로 짓이겨진 강태산의 얼굴 앞에서 나는 분노했다. 적어도 강태산,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되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너만큼은 도해영을 배신하면 안 되었다.

‘도해영 빚 얼맙니까.’

도해영을 데려오기 위해 업소를 찾았던 그날 밤, 무턱대고 도해영을 내놓으라는 내게 실소를 뱉던 마담의 모습.

‘걔는 못 데려가. 이 집 탑급이고, 쟤가 사라지면 조직이 날뛰어.’

‘도해영 빚 전부 갚는 조건, 거기에 당신이 원하는 만큼 액수 얹을 테니 저 애 조용히 넘겨.’

‘당신이 그렇게 나와도 안 돼. 난 저 애 지키려고 평생을 보냈어. 이미 충성을 바친 조폭 새끼도 있고.’

‘…충성을 바쳤다고. 돈으로 매수했나?’

‘아니. 더 큰 게 있지.’

‘…….’

‘사랑.’

그 단어를 뱉은 눈이 향한 곳은 업소를 지키고 선 한 조폭에게 가 있었다. 허벅지에는 칼을 차고 매섭게 얼굴을 굳힌 채 선 남자는 강태산이었다.

‘난 도해영이 필요합니다. 그 애가 없으면 내가 죽어.’

‘왜?’

‘내가 도해영에게 각인했으니까.’

오메가를 사랑하는 베타, 그리고 오메가에게 각인한 알파.

도해영을 위해 충성을 바치겠다는 두 남자 중 마담이 고른 건,

‘내 앞에서 맹세해. 해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겠다고.’

저버릴 수 없는 본능을 지닌 알파였다.

***

옅게 내쉬는 숨결 사이로 옅게 해영이의 페로몬이 퍼져 나온다. 코끝으로 해영이의 체취가 맡아질 때마다, 손안에 부드럽게 감싸 쥔 해영이의 여린 손이 이따금씩 잘게 떨리듯 움직일 때마다 나는 다짐했다.

조급하게 굴지 않겠다고. 해영이를 믿고 기다려보겠다고, 조금 더 푹 쉬고 싶을 테니까, 몇십 년이 지나더라도 분명히 깨어나 내게 선물처럼 내려올 테니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겠다고.

하지만 잠든 해영이의 곁을 지키며 나 자신을 향한 자책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만약 그동안의 일을 해영이에게 다 말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말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기다려보겠다는 안일한 마음이 불러온 결과가 결국 이것이라니.

마른 손등 위로 차근히 입맞춤을 남기며 고요하게 감긴 두 눈을 바라보았다. 가슴팍 안에 딱딱하게 자리한 두꺼운 것이 다시금 묵직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꺼내어 들자 옅게 사향 냄새가 퍼졌다. 낡은 헝겊으로 된 주머니 안에는 여러 권이 묶인 통장과 도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해영이 통장.’

이모란, 그녀는 강태산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내게 연락을 취했다. 업무가 끝나자마자 향한 곳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서 있는 그녀가 있었다.

‘태산이는 내가 해영이 엄마인 거 아직 몰라. 알게 되면… 그 애는 나를 죽일 거야.’

내게 통장을 건네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생을 다한 사람 같았다.

‘해영이한테,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이 말만 전해줘.’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가 바로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 태산이 속인 값은 지불해야지.’

그녀는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옅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해영이 곁에서, 우리 아가 행복하게 지켜줘.’

내게 마지막 부탁을 남긴 그녀는 내가 떠난 직후 자신의 예견처럼 강태산에 의해 살해당했다.

통장의 바랜 표지를 말없이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첫 장을 열어보았다. 26년 전 12월 30일을 시작으로 매달 30일에 같은 금액이 입금된 내역이 적혀 있었다.

붙여넣기 한 듯 동일한 페이지가 반복되는 통장을 빠르게 넘기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통장의 가장 마지막 장, 마지막 줄, 가장 최근에 입금된 12월 30일이었다.

12월 30일, 이날은 그녀가 내게 연락해 이 통장을 건넨 날이었다. 어둠이 가라앉은 병실에 자그마하게 적힌 글씨를 차근히 읽어낸 순간,

[생일 축하해, 우리 아가. 엄마가 늘 사랑해.]

허공 위로 새어 나온 착잡한 숨은 이윽고 울컥하며 솟구치는 눈물이 되고야 말았다.

“…네가,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영아.”

12월 30일은 해영이가 태어난 날이자, 그와 동시에 이모란이 죽음을 맞이한 날이었다.

친모의 죽음을 해영이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강태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더욱.

“늘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야.”

심란한 마음은 파도처럼 몰려온다. 잠든 해영이의 볼을 쓸어주며 짙은 숨을 내뱉는 사이로 못다 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에 그치지 않고 쾅, 하며 거칠게 문을 열고 들이닥친 이의 분노 섞인 목소리 또한 내 죄책감에 불을 지르는 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해영 씨 칼 맞게 그냥 놔뒀다면서요! 도대체가, 차도헌 씨 제정신이에요?”

벌컥 열린 병실 문 사이로 해영이와 같은 무늬의 환자복을 입은 오윤주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뭡니까, 갑자기.”

“해영 씨 걱정돼서 왔어요. 왜요, 내가 못 올 데 왔어요, 지금?”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오윤주의 기색에 나는 입을 다문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복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오래 서 있으면 아픈지 오윤주는 배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그럭저럭 살 만하네요.”

비스듬히 선 오윤주의 뒤로 앉을 의자를 가져다 준 윤 비서의 친절에 털썩 의자 위로 착석한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해영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빨리 떨어지기 시작하는 수액 투여 속도에 밸브를 매만지자 바늘이 꽂힌 해영이의 손등이 작게 움찔댔다. 조심스레 머리칼을 한 번 쓸어주곤 익숙한 듯 이마 위로 입을 맞추자 오윤주는 작게 혀를 차며 불퉁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따뜻한 차를 내온 윤 비서가 오윤주에게 찻잔을 건네곤 다시금 자리를 비워주었다. 하지만 오윤주는 천천히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넘길 새도 없다는 듯 잔을 그대로 쥔 채로 목소리부터 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찌른 그 남자가 해영 씨한테도 그랬다면서요. 나 안 믿겨요, 지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가 뭐예요, 지금. 막말로 차도헌 씨도 뒤통수 맞은 거잖아요. 그 사람이 해영 씨를 해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속이 탄다는 듯 내내 들고 있던 찻잔을 단번에 쭉 들이켠 그녀는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랑 대화했을 땐 분명, 해영 씨를 정말 목숨 다 내놓고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어떻게 보면 좀 사랑에 미친 사람 같았다고나 할까. 차도헌 씨 얘기 꺼내니까 눈이 확 돌았던 것도 그렇고.”

“강태산 앞에서 내 얘길 했습니까?”

“그 결과가 이거잖아요, 지금.”

오윤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키면서 경쾌하게 웃어댔다. 억울하고 화가 날 만도 한데, 어이없이 범행에 휘말려 상해를 입은 사람치곤 놀라우리만치 태연한 얼굴이었다.

“나야 건강하니까 칼 맞아도 금방 꿰매면 끝이지만… 안 그래도 몸 약한 해영 씨가 이렇게 되니까 마음이 많이 그렇네요.”

다시금 얼굴 위로 걱정을 한가득 띄운 채 해영이를 줄곧 응시하고 있는 오윤주에게 해줄 말은 종결된 사건의 경위를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자는 모든 죄를 자수하고 수감된 상태입니다. 조직도 아예 폭파시킨 모양이고.”

“안 그래도 방금 뉴스 봤어요. 협박, 폭행, 살인에 도주까지 완전 흉악범으로 보도되던데… 뭐, 정도 이상으로 맞는 내용이긴 했어요.”

해영이를 찔렀던 그날,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던 중 강태산은 도주에 성공했다. 전국에 내려진 수배령에 경찰견까지 풀어가며 이어지던 강도 높은 수색에도 손끝 하나 내보이지 않았던 강태산은 도주 3일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 발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강태산의 모습에 오히려 도시는 불안에 잠겼다.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도주했다는 그의 증언을 믿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강태산은 자신의 도주의 이유를 들어 제 손으로 조직을 없앴다고 재차 강조했다. 언론에도 제대로 나가지 않을 말을 반복해서 하는 강태산의 행동의 이유에는 도해영이 있었다.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외치지 않으면 강태산은 영영 도해영에게 사죄할 수 없을 테니까. 한순간의 분노로 도해영을 잃은 강태산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삶의 이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강태산, 그 사람 만나봤어요?”

오윤주의 질문에 나는 침묵했다. 죄다 연소되어 사라져야 할 분노는 다시금 불씨를 태우며 호흡 안으로 뜨거운 열기를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매 순간, 매초, 나는 불쑥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움켜쥔 채 왜 그랬어야만 했냐며 격분을 토해내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그렇게 마주한 강태산의 목을 두 손아귀로 움켜쥐어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아가면서.

강태산을 찾아가 죽이고픈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를 찾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강태산, 그에게 용서의 빌미조차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를 찾아가는 것은 결국 강태산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를 주는 셈일 터였다. 분명 강태산은 나를 통해 해영이에게 전할 말이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당시의 상황이 전부 찰나의 실수였다는 식의 변명만 늘어놓을 테니까.

“안 찾아갈 건가 봐요?”

단 한 번도 그를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그를 향한 분노를 잠재워본 적도 없었다. 도해영에게 온전한 불행을 안겨준 이에게 변명의 순간을 선사할 만큼 나는 관대하지 못했다.

“…사죄할 빌미를 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잡은 손등 위로 붉게 도드라진 뼈마디를 부드럽게 연주하듯 쓰다듬자 다시금, 해영이의 손끝이 작게 까딱였다.

“해영 씨 깨어나도 안 갈 것처럼 구네요.”

“…만약 원한다면 데려가야겠지만, 솔직한 바람으로는 그럴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 마음 이해해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오윤주는 이내 침묵했다. 차츰 정적이 가라앉은 곳에, 담담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일찍 진범을 밝히지 그랬어요.”

그녀 또한 얼마 전 검찰에 넘어간 이주미의 허위 증거 조작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왜 이주미가 만들어낸 누명으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었는지 묻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나는 짤막하게 답을 뱉었다.

“말했지 않습니까. 그땐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구태여 진실을 밝힐 만큼 나는 삶에 간절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작되고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삶, 단순히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생은 절로 혐오감이 들 만큼 역겨웠을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젠 목숨을 내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는데, 옆에 자잘한 쓰레기를 놔두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답에 오윤주는 웃었다. 말속에서 지칭한 쓰레기가 누군지 단번에 이해한 오윤주의 뒤로, 질릴 만큼 숨통이 긴 쓰레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웃긴 그림이구나, 도헌아. 이젠 아주 본처와 첩을 대놓고 같이 끼고 살겠다는 거니?”

“여기가 어디라고 오십니까.”

“네 죽은 형만큼 더러운 피는 어디 못 속이겠구나.”

구두 굽을 또각이며 병실로 들어온 이주미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침대 위를 노려보았다. 절로 불쾌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부러 분노를 눌러가며 교활한 새어머니를 차분히 응시했다.

“법원에서 내린 접근 금지 명령을 어기고 들어올 만큼 중요한 안건이 있습니까?”

“엄마가 아들 있는 곳에 못 올 이유가 있니? 온 김에 네가 꽁꽁 숨겨놓은 창놈 좀 깨워서 목소리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나가십시오. 당장.”

“네가 오메가 하나 만나더니 아주 머리가 돌아버렸구나. 그래, 그 대단하신 오메가 얼굴이나 한번 보자. 그 창놈 때문에 나랑 네 큰아버지를 다 감방에 넣은 것 아니니?”

이주미의 손아귀가 냅다 해영이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이주미의 팔뚝은 내 손아귀 안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더러운 손을 감히 어디다 갖다 대려고 그러십니까.”

“당장 놔! 어디서 감히-”

“말로 해선 못 알아듣겠습니까?”

허공을 가르며 묵직하게 날아간 손바닥이 이주미의 뺨을 걷어차듯 거세게 따귀를 날렸다. 둔탁하게 고기를 치대는 소리마냥 또 한 번 이어진 따귀에 이주미는 바닥 위로 널브러진 채 마구 고함을 내질렀다.

“네깟 놈, 진즉 숨통을 졸랐어야 했어. 네 어미 죽일 때 같이-!”

“닥쳐.”

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다시금 짝, 소리와 함께 이어진 따귀에 이주미는 부들대며 내 구둣발 위로 침을 뱉곤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당장, 그거 기사 내보내! 지금 당장!”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명령을 내뱉은 이주미는 거칠게 전화를 끊고는 내 발치 앞으로 핸드폰을 내던졌다. 이윽고 이주미의 핸드폰 화면 위로 커다랗게 헤드라인 뉴스가 떠올랐다.

[차 그룹 대표이사 차도헌 성관계 영상 유출, 충격 보도]

“죽은 어미가 안 가르쳐줬니?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야, 응?”

“…….”

“네 어미나 죽은 형이나, 더럽게 몸 굴리고 다니는 건 어디 가지 않더구나. 네 놈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일을 쉽게 만들어줄 줄은-,”

“영상 재생시켜.”

보도기사 아래로 딸린 동영상 위로 발끝을 쿡, 내리누르며 이주미에게 명령했다.

“영상 재생해. 당장.”

내 굳은 얼굴에 잠시 멈칫했던 이주미는 기고만장한 얼굴로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흐릿하게 모자이크된 어두운 영상 속에 무언가가 느릿하게 움직임을 자아내자 이주미의 얼굴은 일그러지듯 더러운 미소로 가득 찼다.

[고현영 그년 하나 죽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깟 거 이리 내! 내가 직접 그년 숨통 끊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차서준 그 새끼가 한 짓거리 죄다 차도헌한테 덮어씌우는 게 뭐가 힘들어, 검찰청에 돈 먹이고 증거 죄다 바꿔놓으란 말이야!]

이주미가 손수 올린 기사 아래에 첨부된 영상은, 기사의 제목과 달리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들어간 자폭 영상이었다.

“이게, 이게… 이게 아닌데-!”

이주미가 퍼트리려던 영상의 원본은 따로 있었다. 일전에 해영이에게 미약을 먹이고 집무실에 방치한 황 회장이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불법 영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에 폐기 처분된 상태였고, 기사에 올릴 영상은 내가 손 써둔 것으로 교체된 지 오래였다.

속임수용으로 남겨놓은 이미지를 제외하면, 그 속의 내용물은 범죄를 사주하는 이주미의 목소리로 꽉 들어차 있었다.

“내가 설마 이런 것 하나 처리 못 할 줄 알았나?”

“대, 대체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십 개의 범죄를 사주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지는 사이, 이주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내 바짓단을 붙잡곤 당장 기사를 내리라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이거 내려, 당장 내려! 당장! 당장 내려, 이 새끼야! 기사 내려!”

바닥에 엎어진 채 발광하는 이주미의 두 손목을 강하게 붙잡은 윤 비서는 준비해둔 수갑을 꺼내어 채우고 있었다. 온몸을 버둥대며 벗어나려는 이주미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어 들어 올리자 비틀대며 몸뚱어리가 따라 올라왔다.

“안 되지, 내가 왜 그래야 해.”

“…….”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나한테 감사해야 할 텐데, 내게 너무 큰 걸 바라네.”

드디어, 내게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 당신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옥을 선사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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