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에 피는 꽃
0.
“-그래서. 놓쳤다고.”
“죄… 죄송합니다, 이사님.”
텅 빈 병실, 해영이의 체취가 옅게 밴 곳에 무릎을 꿇어앉은 두 비서는 내가 분노할수록 공포감에 더욱 몸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합-”
“납치범이 강태산이라니…. 다들 내가 단단히 돌아버리는 걸 구경하고 싶었나 봅니다.”
날 선 목소리에 윤 비서마저도 기세가 꺾인 채 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어차피 해고할 거지만 한 번 물어나 봅시다. 왜 해영이가 도망쳤습니까? 그리고, 우성 알파의 몸으로 왜 도망치는 오메가를 못 따라잡았습니까?”
“그, 그것이….”
무릎을 꿇어앉은 두 사람은 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곤 바짝 긴장한 채 말을 시작했다.
“깨어나신 후에 이사님을 계속 찾으셨습니다. 당분간은 이사님의 사건 소식을 안 알려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도해영 님께서 뉴스를 보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뉴스 보도에 충격받으시고, 직접 이사님께 사실을 듣고 싶으시다며 달려 나가셨습니다.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지만 홑몸이 아니셔서 조심히 응대하다가 놓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논리정연하고 일목요연하게 사건을 설명한 두 사람은 진심을 다해 사죄하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그들이 설명한 사건의 흐름에서 돌연 튀어나온 낯선 단어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했습니까, ‘홑몸’이 아니라고?”
“그, 그것이…, 임신 사실 또한 도해영 님께서 이사님께 직접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저희는 비밀을 지켜드-,”
쾅-!
거세게 내리친 주먹에 쇠로 된 침대 프레임이 찌그러졌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몸을 곧바로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가자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윤 비서가 내 뒤를 따랐다.
“-방금 수색팀에 연락 넣었습니다.”
내겐 윤 비서의 빠른 일 처리에 만족할 시간조차 없었다. 여전히 등 뒤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비서진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급히 물었다.
“몇 주찹니까.”
“-예, 예?”
“해영이, 임신 몇 주차냐고!”
“저희가 알기로는 3주차에 막 접어드는-,”
분노한 만큼 내가 움켜쥔 병실 문고리는 손아귀 안에서 찌그러지고 있었다. 어서 빨리 해영이에게 가야 했다. 쓸데없이 여유를 부려가며 저 둘을 혼내고 있던 시간을 만회할 만큼 나는 미친 듯이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악연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는 거니? 내 아들.”
병실 문을 연 곳에는 형사들을 대동하고 선 이주미 여사가 있었다.
또각이는 구두 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을 울린다.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이끌며 병실 안으로 들어온 새어머니는 돌연 코를 찡그리더니 반지르르한 윤이 나는 모피 코트를 툭툭 털었다.
“오메가 냄새가 득시글거리는구나. 뉴스에 나왔던 그 사창가 오메가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결국 너도 네 형처럼 되어가는구나. 이게 다 그 더러운 피에서 나온-,”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이주미 여사의 말을 뚝 끊으며 그녀의 뒤로 따라온 형사들을 향해 물었다.
“용건이 뭡니까.”
“아, 예. 수사 진행 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우선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낸 보석금은 헛으로 받았습니까?”
이주미 여사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이번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였다. 그간 착실히 절차에 따라줬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물먹이는군.
“정식 소환 절차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언제부터 이 나라 법이 절차 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쳐도 된다고 했습니까?”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 건으로 온 게 아닙니다.”
사무적인 목소리에 이어 그는 내 면전으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기세등등한 표정의 새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얼마나 돈을 들여서 이 자들을 매수시켰는지 궁금해졌다.
“뭡니까, 이건.”
“5년 전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된 사건 기억하십니까? 당시에 놓쳤던 새 증거가 발견되어 어제 자로 재수사 들어갔습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미 새어머니 쪽에서 조작 증거를 내밀어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언제 풀까 했더니 이렇게 서두를 줄이야,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준비했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조작할만한 게 별로 없었나 보군.
“뭐 별거 없었나 봅니다? 이렇게 일찍 증거를 넘긴 걸 보니.”
“때가 중요하니? 나는 그저 부모로서 자식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도할 뿐이란다.”
이주미 여사는 태연한 낯짝으로 내 앞에서 ‘부모’를 운운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니 헛웃음이 터졌다.
“부모? 양심이 아예 사라졌나 봅니다?”
“뭐? 양심이 사라져? 너 부모 앞에서 지금 그게 무슨 싸가지 없는 말이니?”
“사람 잘 안 변한다더니 새어머니도 참 한결같으십니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고고한 부잣집 안주인 흉내는 왜 내십니까?”
“살인자 새끼 주제에 어디서 입을 놀려!”
얄팍한 입술을 파르르 떨어대며 소리를 지르는 이주미 여사를 응시하는 내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가고 있었다.
“살인자? 당신이 한 짓거리들도 떠벌리면 아주 재미난 결과가 나올 텐데… 자신만만할 수 있나?”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구치소 안에서나 하려무나.”
날카롭게 성을 내며 이주미는 형사들을 향해 손짓했지만, 분노에 차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게 했다.
“25년 전. 기억하나?”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지 않고!”
“내 어머니 고현영을 죽였잖아. 당신 손으로.”
이주미는 웃었다. 내가 가엾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젓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데에 재주가 있나 보구나.”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나?”
“네 어미가 그렇게 가르쳤니? 싸가지 없게 어른한테 반말 찍찍 싸대라고, 응?”
“웃기군. 내 어머니 죽이고 대신 집안 안주인 노릇 하며 가짜 어미 행세하던 건 당신 아니었나?”
“……너, 너-!”
“아, 아니지. 당신은 안주인이 아니라 전부를 다 갖고 싶어 했잖아. 내 아버지 목숨 가지고 장난쳤던 건 즐거웠나? 호흡기 떼라고 협박을 제대로 하던데.”
“이 자식이-!”
뺨을 향해 새어머니의 손이 매섭게 날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무식하게 폭력을 써대는 꼴이라니, 가뿐히 붙잡은 여사의 손목을 움켜쥐며 나는 형사를 향해 말했다.
“25년 전 고현영 여사를 죽인 진범,”
“예?”
“여기 눈앞에 있으니 체포하십시오.”
당황하기 시작한 형사들의 모습에 나는 붙잡았던 이주미의 손목을 놓곤 뒤를 돌아 두 막내 비서를 응시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설명은 제 비서진들이 대신할 겁니다.”
호명되는 순간 그들은 빠르게 몸을 일으키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줄줄이 꺼내 든 자료를 형사들의 손에 쥐여주곤 브리핑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25년 전 고현영 여사 독살 사건의 증거 자료입니다. 잔에서 채취된 독성 시약은 목숨이 끊어진 후 입술에 옅게 묻어있던 청산가리 성분과 일치합니다. 이는 사건이 있을 당시에도 발견된 증거였으나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주미 여사가 명백히 독살 시도를 했는지에 대해 불분명하기 때문에 수사가 종결된 상황이었습니다.”
“하,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저번 주에 그 사건의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이주미 여사가 그 잔에 독약을 넣고 고현영 여사의 방으로 들어간 모습을 목격한 증언이 입수되었습니다.”
“뭐? 목격자가 있을 리 없잖아! 집사 놈들은 이미 내가 다 처리했-,”
흥분하며 소리를 빽 지르던 이주미 여사는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말실수를 둘러댈 작은 틈조차 없었다.
“유, 윤호야…, 어떻게 여길…?”
여사의 몸은 충격에 덜덜 떨려가기 시작했다. 이주미 여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총알, 차 그룹의 삼남 차윤호가 나타난 순간이었으니까.
“네 엄마는 결백해, 지금 네 배다른 동생이 나를 누명 씌우려는 거야, 윤호야, 엄마는 절대 아니야, 응?”
이주미는 빌고 있었다. 제 아들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며 아예 존재조차 없었던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차윤호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한참의 침묵 후에, 형은 담담한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다.
“어머니, 저예요. 제가 봤어요, 그날.”
“뭐…?”
“어머니가 잔에 약을 타는 것과 그 잔을 들고 고현영 여사의 방에 들어가시던 것을요.”
진실을 밝히는 차윤호의 목소리에 이주미 여사는 바닥에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짝―
매섭게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어머니, 저는-,”
“그때 넌 어렸어. 고작 여섯 살 난 애가 보긴 뭘 봤다고 이제 와서 운운해?”
“어머니!”
“네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니?”
적반하장으로 대응하는 자신의 어머니에 차윤호의 얼굴에는 짙은 실망이 번졌다. 이윽고 그는 재킷 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형사에게 건넸다.
“녹취 파일이에요. 어머니께서 이 사건의 목격자인 집안의 고용인들을 처리할 때 범행을 사주한 증거입니다.”
“차윤호!”
“그것 말고도 증거는 더 많아요. 준비되는 대로 서에 보내겠습니다.”
증거를 넘기는 차윤호의 담백한 목소리에 이어 철컥, 하며 이주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억센 비명을 지르며 버둥대는 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차윤호의 뒷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씁쓸해 보였다.
이주미 여사는 이번 일에도 절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녀의 아들인 차윤호도 알고 있었다. 그가 내미는 증거는 이주미가 선임한 몇백 억대의 변호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자식마저 저버릴 정도의 헛된 욕망이 어떤 결말을 불러일으킬지는 뻔한 일이었다.
다시금 적막이 가라앉은 곳에, 나는 벗어둔 재킷을 움켜쥐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듯 내 뒤로 따라오는 윤 비서의 뒤로 주저하고 있는 두 막내 비서진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비서, 김 비서. 해고 취소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습니까.”
“…예, 예?”
“자, 갑시다. 빨리 해영이 찾으러 가야지.”
이제 내게 남은 장애물은 강태산, 그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