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로 위에 남은 건 오직 적막뿐이었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은 점차 도시와는 멀어지는 듯 낯설기에 그지없었다.
행선지를 알려주기는커녕 대화 한마디도 없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차만 몰아대는 강태산은 화를 참는 듯 턱을 다문 채 한적한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강태산의 분노가 내 피부 위로 닿아올 때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강태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차 안의 모습은 언뜻 지난날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이번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강태산의 분노는 분명 나를 향해 있었다. 운전 내내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건 그때처럼 몸에 도청 장치가 박혀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게 화를 내기 싫어서라는 걸, 그래서 분노를 삭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난 알 수밖에 없었다.
살기에 가득 찬 강태산의 두 눈이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그와 어디를 가더라도 걱정 하나 없이 따라가던 때가 있었다. 강태산을 그 누구보다 믿었으니까, 내겐 강태산만 남아있던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강태산의 곁에서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만 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불씨는 차도헌에게도 고스란히 옮겨붙을 테니까.
다시금 불쑥 몰려드는 불안감에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왜. 그 자식더러 데리러 와 달라고 하려고?”
내 질문에 강태산은 빈정대며 핸들을 확 꺾었다. 이제 그는 내가 표지판을 읽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거칠게 차를 몰아대고 있었다.
강태산은 간간이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차들을 앞지르기 위해 차선을 마구 변경해가며 질주해대기 시작했다. 강태산의 거친 운전에 바싹 마른 내 몸은 조수석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덜컹였다.
헐렁한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꾹 움켜쥔 채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질렀다.
“강태산, 너 대체-”
“번쩍거리는 것 좀 치워.”
강태산이 내 말을 뚝 끊으며 안전벨트를 붙잡은 손을 노려보곤 액셀을 짓눌러 밟았다.
“…볼 때마다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그리곤 귓가에 꽂히는 그의 날 선 목소리에 내 심장은 쿵, 내려앉아 버렸다.
내게 화를 내는 강태산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잘못은 나한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강태산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차도헌을 향한 사랑과는 달랐다. 피부로 와닿는 페로몬과 각인으로 연결된 육체, 단순히 그런 요건들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차도헌을 사랑했다.
처음 보는 강태산의 모습 앞에서 나는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안전벨트를 움켜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반지를 숨겼다. 손바닥 아래로 만져지는 반지의 촉감에 강태산의 분노를 이해하고야 말았다.
‘…사랑해, 태산아.’
서로에게 오직 서로밖엔 남지 않았던 그 날들, 쓰러져가는 옛날 시골집의 자그마한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어슴푸레한 붉은빛 노을을 맞으며 그에게 했던 고백은, 이제야 다시금 내 입 안 가득 씁쓸하게 차오르고야 말았다.
하염없이 쭉 뻗은 도로를 응시하던 내 입술 사이로 툭, 사과의 말이 새어 나갔다.
“…미안해.”
“아직 사과하지 마.”
내 사과에 돌아오는 강태산의 대답이 이상했다. 그는 내가 앞으로도 잘못을 저지를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아직’이라니?”
“메이팅. 아직 안 됐다며.”
“……뭐?”
강태산이 내뱉은 대답에 나는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돌연 심장이 말라비틀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안전벨트를 움켜쥔 손으로 가슴팍을 짓누르며 움츠러들었다.
“차도헌이 너 먹이려고 각인 푸는 약물도 다 만들어 놨는데, 이제 와서 너를 사랑한다고, 메이팅 하자고 그랬다던데.”
“…….”
“넌 그딴 헛소리를 믿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굴어댄 모양이다. 만약 네가 그 새끼한테 속아서 메이팅까지 되었으면 난….”
그 순간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강태산을 응시했다.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억세게 악문 강태산의 턱이 거세게 움찔대며 다시금 분노를 삼켜내고 있었다.
“…그랬으면?”
“안 됐으니 된 거야.”
“그랬으면 너는, 날 죽이기라도 할 거였어?”
이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까, 나는 헐떡이며 상체를 둥글게 말았다.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버석하게 마르는 기분이었다. 누가 손대면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게 될 만큼 아파서, 나는 주먹 쥔 손으로 가슴팍을 짓누른 채 헐떡거렸다.
“해영아.”
질주하던 차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강태산은 고속도로 옆쪽으로 이어지는 갓길에 차를 세운 채 웅크러든 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해, 해영아.”
“…….”
“너는 내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데….”
강태산은 달래듯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내 뺨 위로 입을 맞췄다. 거친 입술이 닿는 낯선 기분에 나는 몸을 뒤로 빼며 강태산의 품에서 물러났다.
강태산의 품에서는 더 이상 익숙한 체취가 나지 않았다. 옅게 묻어 있었던 차도헌의 페로몬이 사라지고 남은 곳엔,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피비린내가 났다.
“너한테서… 그 사람의 페로몬이 났어.”
나는 입술을 달싹대며 강태산의 눈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분명 몇 년을 봐왔는데도 자꾸만 낯선 기분을 들게 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강태산은 돌연 차도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 물어봤지, 정말 차도헌 그 새끼가 오윤주를 죽였느냐고.”
“…….”
“그래, 죽였어. 내가 봤거든.”
확고한 목소리로, 강태산이 내게 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은 강태산의 손이 익숙하게 내 손등을 매만지는 것을 뿌리치며 나는 물었다.
“어떻게…?”
“우연하게도 그날 나도 같은 식당에서 약속이 있었어.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신경 끄고 있었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차도헌이 있었어.”
“…그래서?”
“내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칼로 그 여자의 배를 찌르더군.”
…거짓말, 도헌 씨가 그럴 리 없잖아….
“도주하려던 그자를 붙잡고 경찰에 신고를 했어. 페로몬은 그때 묻은 모양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강태산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를 달래려는 듯 내 허리를 끌어안는 강태산의 팔을 마구 쳐내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눈가를 푹 적시기 시작하는 눈물은 나 스스로가 비참할 만큼 뜨겁기 그지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사이로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뿌리치지 못하도록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는 강태산의 품이 느껴졌다.
울지 말라는 듯, 등을 토닥이는 강태산의 손에 차츰 무게감이 실렸다. 내 몸을 토닥일 때마다 제 품 안으로 나를 구겨 넣으면서 강태산은, 다시금 눈물에 젖은 뺨 위로 입을 맞췄다.
“해영아, 내가 분명 차도헌 그 새끼는 위험하다고, 내가 말했잖아. 응?”
“…흐으, 읍….”
“이제 나랑 살자, 응? 해영아, 이제 그 새끼는 버리고… 나랑 살자.”
귓가에 닿은 강태산의 입술은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내 몸을 제 품에 한껏 구겨 넣은 강태산은 내게 더 큰 걸 바라는 듯, 끌어안은 채 내게 애원해댔다.
“해영아, 나한테 와.”
다시금, 강태산은 내게 애원했다. 귓가에 다정하게 사랑을 속살거리며, 내게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을 녹여내며.
꾹 다물린 내 입술 위로 차근히 강태산은 입술을 내리눌렀다. 뒤척이지도 못할 만큼 내 몸을 억세게 끌어안은 채 강태산은 내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내게 전부를 다 줄 것처럼 굴었던 과거의 강태산은, 내 전부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었다.
“…허락해줘.”
밭은 숨 사이로 강태산의 거친 손이 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은 닫힌 내 무릎을 억지로 벌려내고 있었다.
불쑥 몸 안에 차오른 역한 기분에 나는 몸을 뒤틀며 강태산의 어깨를 마구 밀어내었다. 당황한 얼굴로 응시하는 강태산의 앞에서, 벌벌 떠는 목소리로 거절을 표했다.
“태산아, 이건…, 이건 안 돼.”
강태산은 차츰 내 몸에서 손을 떼어내었다. 억세게 벌려진 두 다리는 이미 힘이 풀린 듯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다리를 오므리며 잘게 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
“그놈 때문이야?”
상처받은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강태산은 내게 이유를 물었다. 나는 반짝이는 반지를 손안으로 숨기며 대답을 피했다.
“각서라도 썼어? 그놈이 원하는 메이팅 때까지는 정결을 지켜야 한다고?”
“…강태산-,”
“그럼, 너한테 다른 새끼랑 배 맞대고 오면 때린다고 그랬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강태산이 내게 화를 냈다. 왜 자신과 섹스하지 않느냐고, 그 이유를 물으며 화를 냈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온몸에 열이 올랐다가, 다시 차갑게 이성이 돌아와 식은 몸이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강태산을 응시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강태산의 눈을 읽어내질 못하겠다, 내 앞에 있는 강태산은 내가 알던 강태산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를 향한 강태산의 애정은 늘 다정하고 부드러울 거라고, 업소에 찾아와 나를 돈 주고 산 더러운 알파들과는 달리 내 몸이 아닌 그냥 도해영을 사랑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큰 오만이었다.
“…내 몸이 그리웠어?”
“도해영,”
“사창가 출신 주제에 이제 와서 정조 지키는 꼴 보니까 우습지.”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자조적인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강태산의 눈빛을 바라볼 때마다 비참한 감정은 더욱 크게 몸집을 불려 내 숨을 옥죄어가고 있었다.
태산아, 나는, 우리가 했던 게 사랑인 줄 알았어.
“그럼 화내지 말고 돈부터 줘. 너도 알잖아, 나 돈 많이 주는 좆한테 더 잘해주는 거.”
툭, 뱉은 건조한 목소리 너머 얄팍한 흰 병원복 안으로 마른 몸은 핏기가 식어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굳는 느낌.
“도해영,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 들었잖아.”
그것도 모자라, 꽁꽁 얼어붙어 산산조각 나는 기분.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냉담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두 뺨을 눈물로 축축하게 적시는 내 꼴이 너무 우스웠다.
나를 죽이지 못해서 살려둔다는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너를 사랑했던 나 자신이 너무 우스웠고, 내게 상처를 줬으면서 오히려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한 강태산이 우스웠다.
내게 상처를 준 건 너잖아, 태산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나를 죄다 부풀려 놓은 것도 너였고, 그렇게 나를 들쑤셨다가 사라진 것도 너고, 이제야 겨우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나를 작정하고 무너뜨리고 있는 것도,
전부 다 너잖아, 태산아.
그런데 왜 오히려 네가 더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왜?
“다시 말해 봐, 도해영.”
“…….”
“아까 한 말, 다시 뱉어 보라고.”
나는 차츰, 네가 낯설어졌다. 분명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다시 마주한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은수가 죽었던 날 내게 손을 뻗었던 너도, 업소의 좁은 쪽방에 기어들어 와 우는 나를 끌어안았던 너도, 지해를 묻고 난 후에 오직 세상엔 너와 나만이 남았던 그 유일한 때마저도, 전부 강태산, 너였는데….
“왜, 막상 내 눈 보고 말하려니 못 하겠어? 이제 와 양심에 걸려?”
자꾸만, 왜 기억 속의 네 모습이 흐려져만 갈까, 태산아. 분명 너는 그러지 않았었는데, 비릿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면서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내게 화를 내지 않았었는데.
“울지 말고 대답해! 돈 주는 좆한테 더 잘해준다는 그딴 말, 내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지껄일 수 있냐고!”
강태산은 고함을 쳤다. 두 눈에 검붉은 핏줄을 툭툭 터트리면서, 붉게 열이 오른 목덜미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너는 내게 화를 냈다.
결국 너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모습으로 죄다 덮어씌워지고 말았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습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적어도 그런 눈으로는 날 노려보진 않았었는데.
어쩌면,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내가 오해했나 봐.
네가 주는 얄팍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을 만큼, 나 그만큼 불쌍했나 봐.
“내가 못할 게 뭐 있어.”
“……뭐?”
“이미 백번이고 천 번이고 했던 말인 거 너도 알잖아.”
“도해-,”
“나는 돈 주면 엉덩이 벌려주는 창놈이잖아. 왜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해, 내가 고객 받아낼 때마다 늘 문밖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도 너고, 접대 끝나고 정액 범벅인 내 몸 씻겨준 것도 너고, 그러다가 욕탕에서 내 위에 올라탄 것도 너잖아.”
“도해영!”
강태산은 핸들을 움켜쥐었다. 분노를 삭이려는 듯 턱을 앙다문 채 핸들을 뜯어낼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던 강태산은 이내 주먹을 움켜쥐곤 핸들 위로 거칠게 주먹질을 했다.
찢어지는 굉음과 같이 클랙슨이 울렸다. 강태산의 몸은 여전히 부들대며 떨리고 있었다. 다시금 핸들 위로 주먹을 내리꽂은 강태산은 운전석 문을 거칠게 열곤 차에서 내려버렸다.
쾅, 닫힌 문에 차체가 진동했다. 도로 위의 차들이 속도를 높이며 지나갈 때마다 작게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나는 갓길이 끝나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태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윽고 강태산은 무너져 내렸다. 아스팔트가 덜 덮인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강태산은 절규했다. 아무리 악을 써도 풀리지 않는 분노에 바닥 위로 주먹을 냅다 내리꽂기 시작한 강태산은 온몸을 들썩이며 다시금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강태산은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내가 차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감정을 죄다 끌어안은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차츰 강태산이 무릎을 꿇은 아래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저 잘못 봤다고 생각할 만큼 느릿하게 퍼지기 시작한 물기가, 눈물을 떨구려 두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뜬 순간 새빨간 피 웅덩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나는 발작하듯 차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너 미쳤어! 왜, 왜 이러는 건데, 왜!”
바닥에 주먹을 메다꽂는 강태산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막아섰다. 이미 피범벅이다 못해 살이 온통 너덜너덜하게 헤져버린 강태산의 두 주먹은 뼈가 죄다 으스러진 듯 원래의 모양을 잃은 채였다.
“왜, 왜….”
강태산의 두 손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미 짙어져버린 핏덩이는 눈물에 채 씻겨지지도 못하고 끝없이 붉어져만 가고 있었다.
“왜 이래, 응? 태산아… 아프잖아, 이러면 아프잖아!”
울컥이며 뜨겁게 치미는 핏줄기가 강태산의 손목을 그러잡은 내 두 손을 푹 적셨다. 어느새 피범벅이 된 손을 타고 새하얀 병원복 소맷단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핏방울이 잘게 튄 강태산의 얼굴 위로 느릿하게 눈물이 번져 들었다. 턱 아래로 고인 눈물이 쉼 없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다. 강태산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너야말로… 왜 그래, 해영아, 나는 너를 지옥에서 끌어올리려고,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데 너는 왜…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처럼 굴어, 응? 이제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그렇게 해줄 건데….”
강태산이, 울고 있었다.
죄다 바스러진 손으로 내 손을 움켜잡은 채 강태산은 애원했다. 더 이상 모란을 떠올리지 말아달라고, 업소에서의 일은 전부 다 잊어버리라고, 앞으로 도해영의 삶에 사창가는 없도록 자기가 전부 다 해결해줄 테니….
“다 잊어버려, 해영아, 응? 거기에서 했던 거,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 다….”
“…….”
“사창가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응? 단 한 번도 그런 데 안 가본 애처럼, 거기가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는 애처럼, 제발….”
강태산의 손이 더듬더듬 내 등을 끌어안았다. 서툴게 나를 끌어안은 강태산은 이윽고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바투 내 몸을 끌어안았다.
짙은 피 냄새가 나는 강태산의 품에서 나는 울었다. 왜 화가 난 줄도 모르고 되레 그의 속을 더 문드러지게 만들 말만 내뱉었던 나는 종래에 바보처럼 강태산에게 안긴 채 울고 있었다.
“다… 다 잊어버릴게, 태산아, 전부 다 잊어버릴 테니까….”
“…….”
“앞으로는 이러지 마, 응?”
강태산의 손목을 움켜잡곤 으스러진 손등을 내 볼 위로 부볐다. 울컥, 새어 나온 뜨거운 핏덩이가 한쪽 볼 위를 흠뻑 적시는 끈적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
“뼈가 부서지지는 않아 다행이네요. 금 간 건 금방 붙으니 걱정 마시고, 오늘은 찢어진 살 위주로 꿰매겠습니다.”
널찍한 호텔 스위트룸 거실은 한순간에 병원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올랐다. 상처 위로 소독솜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린 강태산은 걱정을 가득 담은 내 표정에 언제 얼굴을 구겼냐는 듯 미간을 말끔히 폈다.
치료 현장으로부터 멀찍이 앉아있던 나는 슬그머니 곁으로 걸어가 말을 붙였다.
“흉 안 지게 해주세요. 안 그래도 온몸이 흉터투성이인데, 손까지 그러면….”
나는 부탁조의 목소리를 내며 강태산의 오른쪽 팔뚝을 덮은 반팔 티를 죽 끌어 올렸다. 이윽고 어깨 위쪽부터 팔뚝 중간까지 길게 이어진 검붉은 색 흉터가 드러났다.
꿰맨 자국이 다 남은 데다가 군데군데 흉이 져서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 강태산의 상처에 의료진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최대한 흉터를 남기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에 나는 만족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도해영.”
“왜?”
“그렇게 걱정됐으면 내 옆에 있지 그랬어.”
“…….”
담담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로 대답을 피하는 내게 강태산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이 걸려 강태산의 상처를 죄다 꿰맨 그들은 빠르게 정리를 끝내곤 돌아갔다. 얇은 붕대가 감긴 강태산의 두 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고 있었다.
치료를 받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강태산은 내가 앉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옆에 툭 걸터앉은 강태산은 이윽고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베고 눕더니, 마치 낮잠이라도 잘 것처럼 두 눈을 내리감았다.
말끔히 피가 씻긴 강태산에게서는 옅게 소독약 냄새가 났다. 살짝 젖어 곱슬거리는 짙은 색 머리칼에서는 꽃향기 같은 샴푸 향기가 났고, 그 뒤로 익숙하게 맡아왔던 강태산의 시원한 스킨 향이 코끝에 닿아왔다.
그 순간 본능처럼, 마치 각인된 것마냥 모란의 전경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분명 다 잊기로 했는데, 기억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강태산의 스킨 향 그 하나로 나는 눈 깜빡할 사이에 그를 처음 본 5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내가. 은수고 지해고, 그 애들을 어떻게 잊을까. 그 비좁은 쪽방에서 같이 살을 부대꼈고, 좋은 일 슬픈 일 힘든 일 죄다 함께했던 애들이었는데.
좁은 쪽방을 나서면 이어지는 바싹 마른 복도, 먼지 앉은 구식 소화기를 마주 보고 벽에 등을 댄 채 앉아 두 눈을 감으면 등 뒤로 들려오던 잠든 아이들의 나지막한 숨소리.
벽을 타고 내 등에 울리는 호흡들은 나로 하여금 내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곤 했었다.
그 애들이 살아 있어준 덕분에, 그 애들이 숨을 쉬어서. 잠든 애들의 숨소리에 맞춰 호흡을 내쉬면서 그제야 나도 살아있구나, 아직 살아있구나.
안도감도, 행복도 아닌 그저 평온함. 모두가 잠든 오후 다섯 시의 모란은 나에게 있어 숨 쉴 틈이 되어 주었었다.
“…태산아.”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속살대는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는 강태산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나는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사람이 죽으면, 더 쉽게 잊혀질 줄 알았는데….”
“…….”
“아니더라. 은수도 지해도… 여전히 선명해. 살아있을 때보다 더.”
그리고 아이러니할 만큼, 내게 그들보다도 더 선명히 남아버린 것이 있었다.
‘왜 안 자고 여기 있어?’
잠든 소리가 흘러나오던 복도의 끝자락에서부터 울려오던 마른 굽 소리. 느긋한 걸음으로 뮬을 질질 끌면서 나무 바닥 위로 굽을 부딪치며 걸었던, 그래서 구태여 얼굴을 살피지 않아도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던 사람.
“태산아, 있잖아….”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보냈던, 모두가 잠든 오후 다섯 시의 모란을 함께해주던 사람.
“마담은…, 잘 지내?”
종종 내 머릿속엔 불쑥 그날이 떠오르곤 했다. 늘 어두운 불빛 아래 무심결에 흑발이라고만 생각했던 마담의 머리칼이, 말려들어 간 암막 시트지 틈 사이로 비추던 노오란 노을빛에 밝은 갈색으로 타오르던 그날이.
“나… 마담 보러 가고 싶어.”
이제 와 왜 그 기억이 유독 선명했었는지를 나는 이해하고야 말았다. 나와 똑같은 밝은 갈빛의 머리칼이었으니까, 마담의 밝은 갈색 눈동자 또한 나와 같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강태산을 응시했다. 어느새 다 말라 구불구불해진 강태산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자 손바닥을 간지럽히듯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전히 두 눈을 내리감은 채 느긋이 숨을 내쉬는 그는 잠든 것만 같았다.
잠든 강태산에게, 나는 비밀을 속삭였다.
“있지, 태산아….”
“…….”
“나는 분명 고아였는데, 나한테… 엄마가 있었대.”
“…….”
“아주 가까이에… 나는 마담이 엄마인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목이 메어 꽉 잠긴 목소리로,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잠든 줄만 알았던 강태산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태산아, 나….”
“응, 해영아.”
“나…, 나 엄마 보고 싶어….”
마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각설탕을 죄다 놓여 넣은 마담의 다방 커피도 마시고 싶었고, 비좁은 복도에 나란히 앉아 담배도 피우고 싶었고, 그 앙상하게 마른 몸을 세게 끌어안곤 고아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다시 내 엄마가 되어달라고….
“나, 마담한테 데려다줘.”
눈물에 푹 젖은 두 볼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분명 강태산은 마담의 새 업장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의 상태론 운전은 안 되고 택시를 불러서 같이 타고 다녀오면 되겠다.
방에 들어가서 외투를 꺼내오려는 나를, 강태산이 막아섰다. 다친 손으로 내 팔뚝을 그러잡은 강태산은 슬픔에 젖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영아. 마담… 죽었어.”
이윽고 두 귀에 들린 말은 나를 산산이 부서지게 만들었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