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7/43)

1.

“…도해영 님, 정신이 드십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얕은 물결에 허우적대듯 몽롱했던 정신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듯 피부 위로 서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담당의를 부르겠습니다.”

힘이 빠진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리는 그사이를 못 참고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흐릿한 시야 너머 병실을 바글바글 채운 의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환자분께서 깨어나셨다고요. 잠시 여기 보세요, 네.”

눈꺼풀을 위로 지긋이 당기는 손길에 이어 환한 불빛에 시야는 더더욱 뿌옇게 흐려져 갔다. 자그마한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내 눈을 들여다보던 의사는 손전등을 내려놓곤 양쪽 귓가에 번갈아 가며 손가락을 퉁겼다.

“동공반사도 이상 없으시고… 소리는 어때요, 잘 들려요?”

“…….”

담백한 어투로 묻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입술 밖으로 대답을 내놓기엔 꽉 부은 목이 너무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차츰 맞춰지기 시작한 초점에 시야는 비교적 선명해진 채였다. 그에 적응하듯 천천히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그런 나를 관찰하듯 잠시간 응시하던 담당의는 차트를 펄럭이며 마저 진단을 이어 나갔다.

“우선 검사 결과 다행히 건강상 문제는 없으시고요. 페로몬 수치도 괜찮습니다만, 임신 초기임을 감안하면 그래도 최대한 안정을 취하셔야 하고요.”

내 상태가 괜찮다는 결과에 병상 옆에서 장승처럼 서 있던 김 비서님과 이 비서님은 그제야 걱정을 떨친 듯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윽고 병실 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담당의의 뒤에 서 있던 두어 명의 의료진이 내게 다가와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조심스레 빼내어 새 바늘로 갈아 끼우고, 다 비운 수액 팩을 교체해주며 생기는 작은 소음을 제외하곤 가히 적막과 가까울 지경이었다.

두꺼운 바늘이 꽂힌 듯 손등이 욱신거렸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이는 것이 처음인 사람처럼 나는 서투르게 눈동자를 굴려 홀쭉한 내 배를 응시했다. 이윽고 볼펜을 딸각이며 차트 위로 내용을 체크하는 자그마한 소리 뒤로, 울음에 꽉 막힌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아기는요? 배가 너무…, 아팠는데….”

뿌옇게 차오른 눈물만큼 날 선 통증에 감정은 서서히 침몰하듯 무너져 내렸다.

‘바깥쪽으로 보이는 면에 적힌 건 아기 이름과 태어난 날짜에요.’

‘그 안쪽 면에는 산모 이름을 적고요.’

불에 그을린 종이는 다시금 불길을 머금은 채 손목 위로 짙은 화상을 남겼다. 기어코 타지도 않고 살아남아 다시 내게 돌아온 그 얄팍한 종잇장은, 내 손목에 선연한 불길을 남겼다.

“아기…, 살아 있어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나는 링거가 꽂힌 손을 움직이며 낡은 띠지를 감았던 왼쪽 손목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불길에 타오르듯 홧홧했던 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아기집도 튼튼히 자리를 잡았고, 수치도 정상입니다.”

겁에 질린 나를 달래듯 다정한 투로 답한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곤 함께 온 의사들을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한껏 촉각이 예민하게 곤두서다가도, 도리어 감을 잡을 수 없을 만치 정신이 두루뭉술하길 반복했다. 충격에 정신을 잃었지만 내 몸은 무사하고 아기는 건강하다, 그 간단한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하는 데도 내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무의식적으로 주삿바늘이 꽂힌 손으로 배를 문지르던 나는 다시금 조용해진 병실에, 입술을 달싹이며 아까부터 내내 보이지 않던 누군가를 찾았다.

“…도헌 씨는요?”

그 순간 나는 두 비서의 당황한 기색을 읽어냈다. 목이 너무 말라 잔기침을 토해내는 내게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면서도 그들은 차도헌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답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는 참을성을 벗어내고 재촉하듯 다시금 물었다.

“도헌 씨는 어디 있어요?”

“도, 도해영 님, 그게 말입니다…….”

“저녁 비행기로 온다면서요, 그럼 올 때가 지났는데….”

나는 분명 간단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대답도 못 하고 쩔쩔매며 허둥지둥하던 그들은 내 표정이 굳기 시작하자 이내 합심하듯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날씨 사정으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내일 도착하신다고 하셨-,”

“예, 어제저녁에 도착하시자마자 이사회 보고로 회의에 참여하셨-,”

정반대의 대답을 늘어놓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헌 씨한테 무슨 일 있는 거죠?”

“아닙니다, 대표이사님께는 아무 일도 없으십니다!”

“그럼 TV 틀어 봐요. 뉴스 채널로.”

“그, 그것만은 안 됩니다!”

두 사람은 굉장히 당황한 듯 내내 말을 더듬고 있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병상에서 내려와 직접 TV를 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붙잡아 말리지도 못한 채, 뉴스 채널을 찾아 버튼을 꾹꾹 누르는 나를 쩔쩔매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름 모를 오락 채널을 두어 개 지나 도착한 뉴스 채널엔, 내 예상대로 그의 얼굴을 커다랗게 내건 채 연신 보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제저녁 9시경, 차 그룹의 차도헌 대표이사가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오 그룹의 오윤주 부사장으로, 용의자인 차도헌 대표이사와는 약혼 관계로 알려져 있어 세간에 더욱 충격을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떠한 경위로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현재 경찰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목격자 진술 또한….]

사건을 알리는 기자의 목소리를 뒤로, 뉴스 화면은 구급차에 실려 가는 오윤주의 모습과 경찰에게 붙들린 채 끌려가는 차도헌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두 눈으로, 두 귀로 듣고 있는데도 나는 한참 동안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언어로 된 뉴스를 듣는 것처럼,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적힌 화면을 보는 것처럼….

“저게 무슨 소리예요…?”

“도해영 님-,”

“도헌 씨가…, 우리 도헌 씨가 그럴 리 없잖아요,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그런 걸 도헌 씨가-,”

차츰, 나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 머리가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지기 전에 나를 단단히 붙잡은 두 비서진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침대 위로 옮겨진 나는, 다시금 몸을 침대 아래로 미끄러트리곤 비틀대며 병실 문가 쪽으로 향했다.

“내가 가볼래요, 내가 가서, 도헌 씨 봐야겠어요, 도헌 씨한테 가서-,”

“진정하셔야 합니다, 도해영 님. 지금 몸 상태로는 안정을-”

“누명이잖아요, 도헌 씨가 그럴 리 없잖아요!”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의 차도헌이 TV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갑을 찬 손에 묻은 붉은 핏자국은 이윽고 선연하게 내 입술 위로 맴돌며 비릿한 피 냄새를 냈고, 아득히 몰려오는 공포감에 파랗게 질린 손끝 아래로는 축축한 핏덩이가 만져지는 듯했다.

‘내 아버지 죽인 그 새끼한테 복수해야 하니까요.’

돌이켜보면 늘 슬픔이 찰랑이던 눈으로,

‘해영 씨를 볼 때마다… 그 애가 생각났어요.’

내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오윤주의 모습은,

‘자, 여기 차도헌이에요.’

가장 마지막 순서에 놓인 포크에 푹, 찔렸던 과일처럼.

[흉기에 복부를 찔린 오윤주 부사장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아직까지 의식 불명 상태로….]

검붉은 피를 흘려대며 죽음에 스러져가고 있었다.

“…도헌 씨가…, 정말 그랬어요?”

붉어진 눈가에 차츰 눈물이 차올랐다. 건조하게 마른 두 뺨이 눈물에 젖어가는 동안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판판한 아랫배를 문지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왜…?”

다시금 입술 위로 축축한 피 냄새가 맴돌았다. 그 순간 울컥, 올라오는 토기에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도망치듯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해영 님!”

온몸이 욱신대는 것만 같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내 뒤를 바짝 쫓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있는지, 미로처럼 이어지는 병실 복도를 마구 내달리며 거친 숨이 새어 나오는 틈으로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왜, 왜-”

흐느끼는 숨에 짓이겨진 슬픔이 턱밑으로 차올랐다. 어지럽게 꼬이기 시작한 뇌가 터질 것처럼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온몸에 치미는 고통에 차츰 꺾이기 시작한 다리에 이어 쿵, 소리와 함께 몸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미처 바닥 위로 쓰러지기 전에 내 몸은 단단한 품에 안긴 채 허공 위로 쑥 들렸다.

“도해영, 네가 왜 여기에-,”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안아 든 몸에서는 옅은 페로몬 향기가 났다. 옷자락에 흐릿하게 남은 차도헌의 페로몬을 좇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 내 몸을 재차 고쳐 안은 남자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헌, 도헌 씨….”

달리는 남자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차츰 사라져가는 페로몬을 좇으며 헐떡이듯 숨을 들이켰다. 선연하게 맡아지는 피 냄새 사이로 옅게 새어 나오는 향을 맡으며 나는 눈물을 뚝, 떨궜다.

“정말 죽였어…? 윤주 씨, 정말 죽였어?”

달달 떨리는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욕을 읊조리는 남자의 거친 목소리에 묻히고야 말았다. 분명 매우 옅었지만 품에서 차도헌의 페로몬이 맡아졌는데, 마치 그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에 서서히 불안감이 치솟기 시작했다.

달아나기엔 너무 늦었다. 내 몸을 꽉 붙든 손은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을 거세게 주고 있었다. 남자의 품에서 버둥대며 발악하던 나는 이윽고 비좁은 곳에 밀어 넣어졌고 이내 쾅, 하며 거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헐떡이며 몰려오는 두려움에, 그제야 나는 낯선 차 안의 조수석에 앉혀졌음을 깨달았다. 뒤이어 반대쪽 차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는,

“도해영, 눈 뜨고 봐. 내가 누군지, 보라고.”

“…….”

“내 앞에서 그 새끼 이름 말하지 마.”

이를 악문 채 화를 참아내는 강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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