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핏빛 멍-0화 (26/43)

핏빛 멍

0.

윤 비서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번 출장은 가히 ‘혼이 탈탈 갈려버릴 만큼 벅찬’ 일정이었다. 거기에 비행에 시간을 죄다 빼앗기는 비효율적인 이동 거리인 만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또한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

“-그럼 내용 정리해서 수정 요청 보내겠습니다.”

“가계약서 검토는 여기서 끝인가?”

“예, 이사님. 방금 미국 지사 쪽에서 보낸 M&A 인수 협상안 최종본만 검토하시면 얼추 오늘자 업무는 끝나십니다.”

“돌겠군. 파일명 끝에 최종본만 붙이면 끝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런 식으로 설렁설렁해서는 안 되지. 조항 빠뜨린 거 없나 샅샅이 확인하고 수정 사항 붙여서 메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내 지시에 윤 비서는 노트북 화면에 바짝 얼굴을 붙이곤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3일간 눈 붙일 새 없이 이어지는 바쁜 일정에 그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서류를 노려보는 내 상태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더 이상의 글을 읽어내지 않겠다는 듯 제대로 반항을 해대고 있었다.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피곤을 떨쳐내려는데, 돌연 옆에서 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피로회복제를 꺼내든 윤 비서가 병뚜껑을 따는 소리였다. 뚜껑을 연 갈색 병을 내게 건넨 윤 비서는 가방에서 하나를 더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생명수라도 되는 듯 피로회복제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먹는 윤 비서의 옆모습을 보자니 절로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도착까지 몇 시간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 눈 좀 붙여요.”

“아직 업무가….”

“공항 도착하면 바로 운전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나 태우고 사고라도 내면, 윤 비서가 다 책임질 건가?”

내 살벌한 목소리에 윤 비서는 곧장 스튜어디스에게 목베개를 부탁하더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라며 짤막한 인사와 함께 커튼 뒤로 사라졌다.

조용해진 비행기 안에 차츰 적막이 감돌았다. 더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을 것만 같아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곤 윤 비서가 건넨 피로회복제를 천천히 들이켰다. 깔끔히 비운 병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정 내내 멀쩡한 척을 했지만 사실 지친 건 사실이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거르며 무리하게 잡은 일정은 체력이 극도로 뛰어난 극우성 알파의 몸으로도 피로감을 느낄 만큼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피로의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많이 바빠도 식사 거르지 말고 힘내서 해.]

“…얼굴이라도 보여주지.”

해영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단순히 문자를 읽었을 뿐인데도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 발간 손끝으로 차근히 화면을 누르며 문자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일정을 더 압축했어야 했어. 어떻게 꼬박 3일을 넘도록 얼굴을 못 보냐고.

창 너머 보이는 컴컴한 하늘에 수없이 깔린 별이 쉴 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걸 다 따다 줘도 내 마음은 다 못 전할 텐데, 하는 생각에 맥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고 싶다, 많이.”

별이고 달이고, 널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 따다 주겠어.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윤 비서의 헛기침 소리를 무시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새까만 밤하늘을 비추는 창 위로 비치는 내 얼굴엔 행복에 겨운 웃음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윤 비서가 마저 업무를 마치고, 내일 있을 오윤주와의 소송 자료를 꺼내어 미리 훑어보는 중에 비행기는 어느새 인천에 도착했다.

“긴 비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사님….”

“비서가 늘어지면 어쩌자는 거야. 아직 업무 안 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하지만 이번 출장은 도저히 사람이 소화할 일정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잘됐네, 내 덕에 인간 급을 벗어난 업무도 경험해보고.”

“제발 다음부터는 부디 이런 일정은 삼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말투로 불만을 표출하는 윤 비서식 화법에 헛웃음을 뱉었다. 이 자식이, 기껏 쉬게 해 줬더니….

피곤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캐리어를 챙긴 윤 비서는 미리 대기시킨 리무진 뒷좌석을 열어 나를 태우곤 운전석에 털썩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은 일정이고 뭐고 죄다 무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바로 이어지는 일정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빠듯한 일정에 질주하듯 도로 위를 내달리며 운전하던 윤 비서는 돌연 핸들을 다른 쪽으로 꺾더니 정차선에 살짝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왜 이쪽으로 가는 거지? 이 도로로는 회사로 갈 수가 없는데.”

“아,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밤으로 잡혔던 이사진 회의가 내일 오전으로 미뤄졌다고 합니다.”

“그래? 내일 오전 일정은.”

“내일 있을 오윤주 부사장과의 미팅이 오늘 밤으로 당겨졌습니다. 아무래도 이사회 측에서 대표님의 비행 일정을 배려해주신 듯합니다.”

“언제부터 나를 배려해줬다고….”

쯧, 혀를 차며 뒤바뀐 일정에 나는 오윤주와의 소송 서류를 꺼내 들었다. 미리 비행 중에 체크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늦은 밤 도로를 질주하니 금세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오윤주가 미팅을 핑계로 자주 찾는 일식집 앞에 미끄러지듯 차를 댄 윤 비서는 빠르게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오윤주는 이미 도착해 있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밤도 늦었겠다, 빨리 끝내고 돌아갑시다.”

“예, 그럼 저는 주차 후에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가는 윤 비서를 뒤로하고 일식집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오윤주는 오늘도 가게를 통째로 빌려두었는지 불이 환하게 켜진 룸 하나를 제외하고는 죄다 어둡게 소등이 된 상태였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텅 빈 카운터 앞을 슥 지나며 불 켜진 룸 앞으로 다가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런데 룸 안은 난장판이었고, 그 안엔 오윤주가 피범벅이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오윤주 씨! 무슨 일입니까!”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오윤주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고통에 입술을 벙긋거리며 헐떡댔다.

“누가 이랬습니까, 오윤주 씨! 119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려는 내 팔뚝을 턱 붙잡은 오윤주의 손은 끔찍할 정도로 피범벅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배를 찌른 흉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계속 입술을 벙긋거리며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뒤로 빨리 신고를 하려는 내게 벌벌 떨리는 손을 힘겹게 움직이며 어딘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핸, 핸드… 폰-,”

그녀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은, 의자 아래에 떨어진 핸드폰이었다.

그 순간 선명한 직감이 덮쳤다. 나는 곧장 오윤주의 핸드폰에 박힌 자그마한 저장 칩을 빼내었다. 내 행동을 확인한 오윤주는 그제야 빳빳이 힘을 준 손끝을 툭 내려놓았다.

정적은 여기까지였다. 문밖으로 쏟아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도헌 씨, 당신을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이사님-!”

룸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뒤로 쏜살같이 따라온 윤 비서가 보였다. 내 팔을 뒤로 꺾어 단단히 붙잡아 연행하려는 경찰에 윤 비서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윤 비서를 응시했다. 흔들림 없이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나는 경찰들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 손에 쥐고 있던 자그마한 칩을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그 순간, 윤 비서가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사님, 대체 왜-!”

그 누구보다도 굳게 믿었던 상사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로 점철된 눈물을 흘리며 윤 비서는 상체를 바닥으로 엎어뜨린 채 어깨를 떨며 좌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몸을 일으킨 곳에는, 칩은커녕 먼지 한 톨도 없었다.

비서 하나는 잘 키웠군.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 갑시다, 차도헌 씨.”

미란다 원칙을 읊으며 내 두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경찰관은 자그마한 경찰차에 내 몸을 구겨 넣었다. 빠르게 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 안,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피범벅이 된 손을 내려다보며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지긋지긋하군, 5년 전에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에도 이 방법이 제대로 먹힐 거라 생각했나 보지.

그땐 아들을 떠나보낸 새어머니를 위한다고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가족을 위해, 기업을 위해 희생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내겐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 여자는 또다시 일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죗값을 곧 토해내야 할 터였다.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그렇게 만들 테니까.

***

“목격자 진술과 CCTV 영상도 확보가 되었고요.”

“…….”

“흉기에 지문 안 남기는 수법이야 이젠 뭐 흔하지만요, 예?”

“…….”

“허 참, 한마디도 안 하시겠다?”

내 취조를 맡은 담당 형사는 테이블 위로 파일을 내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아무리 묵비권이 있다 하더라도요, 신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더 불리해지는 거 모르십니까? 대답 좀 해보세요, 차도헌 대표이사님, 예?”

“제 모든 입장은 변호인을 통해서 전달하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이고, 참 나! 그렇게 대단하신 대표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그러셨나 모릅니다, 예? 쯧….”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정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수사에 휘말릴 게 뻔했다. 특히나 죄목은 살인미수, 언론이 매우 좋아할 만한 대서특필 감이니 어떤 대답을 하든 기사에는 죄다 부풀려 내보낼 게 불 보듯 뻔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침묵을 유지하는 나로 인해 결국 신문은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취조실에서 나를 내보낸 그들은 안쪽에 위치한 유치장으로 나를 옮겼다. 독방과 같은 곳에 나를 밀어 넣은 경찰관은 자물쇠를 세 개씩 걸어 잠그고는 나를 노려보며 사라졌다.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는 이런 취급을 받겠군….

찌푸린 미간을 꾹 누르며 몰려오는 두통을 떨치려는데, 철창 앞으로 새카만 구둣발이 다가섰다. 나를 조롱하러 온 또 다른 형사인가, 하는 예상은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순간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분노에 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거칠게 툭 내뱉은 비아냥조의 말투.

“고고하신 대표이사님이, 어째서 손에 피를 묻혔나?”

강태산,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입술 위로 조소가 걸렸다. 새어머니가 어떤 인간의 손을 대신 빌렸나 했더니, 악연이 이렇게 엮일 줄이야.

“자기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편인가 보군.”

“…….”

“새어머니나 그쪽이나, 나 하나 감방 보내려고 사람을 찌를 것까지야 있었나? 과하다고 보는데, 나는.”

재킷 안에 입은 새카만 셔츠를 응시하며 피식 웃음을 뱉었다. 오윤주를 처리하고 난 후에 갈아입은 모양이지. 과할 만치 깨끗한 두 손도 마찬가지일 테고. 증거 인멸에 능한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테니까.

지금 내 앞의 강태산은 처음 봤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과는 달라진 정갈한 정장 차림은 고사하더라도, 머리끝까지 가득 쌓인 분노가 찰랑일 때마다 언뜻 내비치는 살기 어린 눈동자가, 특히나 그랬다.

“나를 산 채로 묻었던 인간이 언제부터 그렇게 성인군자가 되셨나.”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하거든.”

그 순간 강태산은 얼굴을 굳혔다. 내내 비아냥대며 보였던 여유로운 태도가 무색할 정도로 돌변한 모습이었다.

강태산은 그제야 깊숙이 박아 둔 본심을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불을 지핀 듯 타오르는 날 선 살기 앞에서 나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새어머니랑은 언제 손을 잡았나?”

“…….”

“최대한 돈은 많이 받아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강태산이 철창 위로 주먹을 쾅 내리쳤다. 지이잉 울리며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철창 사이로 쑥 들어온 강태산의 손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더러운 소리 집어치워.”

“나보다 더 더러운 짓을 한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 일을 맡았다고 생각하나?”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르겠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움켜쥔 강태산이 철창 가까이 상체를 붙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조심해. 죽여버리기 전에.”

가까워진 거리만큼 강태산에게서는 진한 피비린내가 났다.

이건 단순히 살인 직후에 몸에 밴 끔찍한 체향이 아니었다. 피부 위를 타고 배어 나오는 비릿한 살기, 그것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살기가 강태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윤주처럼 칼로 찌르기라도 하려고?”

“…….”

“아니면, 마담 그 여자처럼 목 졸라 죽일 건가?”

이자가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변한 걸 해영이가 알게 되면 퍽 실망하겠어. …아니지, 앞으로는 얼굴을 마주칠 일도, 소식을 들을 일도 전혀 없을 테니 실망할 일도 없겠군.

셔츠를 바투 움켜쥔 강태산의 손을 붙잡아 떼어냈다. 멱살을 잡은 손을 순순히 떨어뜨리는 것을 보니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강태산은 철창 앞으로 얼굴을 붙이며 조급하게 묻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해영이는, 알아?”

“뭘 묻는 거지? 그 여자가 해영이의 친모라는 것? 아니면, 네가 그 친모를 죽인 것을 해영이가 알고 있냐고 묻는 건가?”

“잔말 말고 대답해, 해영이한테 마담이 친모라는 걸 말했냐고!”

호통을 치는 목소리가 유치장을 웅웅 울렸다. 그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관뿐만 아니라 파티션 너머로 업무를 보던 형사들마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목소리 줄여.”

“대답해, 당장.”

“안 했어. 충격받을 걸 뻔히 아는데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으니까.”

“…….”

강태산은 짙은 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한 발짝 뒤로 무르며 그는 재킷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거기! 실내 금연인 거 모릅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소란 피우는데, 자꾸 그러면 쫓아냅니다!”

담뱃불을 붙이려는 강태산을 막아선 경찰관은 엄포를 놓곤 다시 저 앞쪽으로 사라졌다. 나지막이 욕을 읊조리며 담뱃갑을 구기는 강태산을 응시하며 나는 짧게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당연한 걸 묻고 있군.”

“끈질기게 포기 못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불쌍해서 말이야.”

“입 닥쳐. 지금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내 앞을 막아선 두꺼운 철창을 구둣발로 툭 찬 강태산은 구긴 담뱃갑을 재킷 안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목소리를 냈다.

“도해영 놔 줘.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됐잖아.”

“고생은 내가 아니라 그쪽 옆에서 한 거고.”

“각인 트라우마 있는 애한테 헛짓거리 한 새끼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짐승처럼 달려들어선 싫다는 애 목에 이 박아대니 좋았나?”

그 순간 나는 철창 앞으로 달려들었다.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강태산의 멱살을 움켜쥐자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수갑 줄이 철창에 걸렸다. 강태산의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이 실릴수록 두 손목 사이로 이어진 수갑 줄에 눌린 철창이 서서히 휘어지고 있었다.

“입 닥쳐, 강태산.”

“착각하나 본데, 그쪽은 도해영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저 페로몬에 흥분해댈 뿐이지.”

“입 닥쳐!”

분노에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감과 동시에 힘겹게 버티던 수갑 줄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나는 강태산의 멱살을 한 손으로 그러잡아 철창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 힘에 못 이겨 질질 끌려온 강태산의 얼굴이 철창에 문대졌다. 나를 노려보는 강태산을 마주한 채 타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며 천천히 읊조렸다.

“그거 알아? 도해영은 얼마 전까지도 악몽을 꿨어. 제발 때리지 말아 달라고, 서비스해 줄 테니 살살 해달라고.”

“…….”

“매일같이 그런 잠꼬대를 해대는 애를 다시 그쪽 곁으로 데려가겠다고? 이제 겨우 지옥에서 벗어난 애한테 이번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고통을 선사해주겠다고?”

분노가 섞인 목소리, 그 말미에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이 비집고 차올랐다. 끔찍한 악몽에 몸을 뒤척이며 우는 해영이를 떠올렸을 뿐인데 내 몸을 휩싼 괴로움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렬하게 타올랐다.

“도해영을 사랑해? 그 애에게 평생 행복만을 주고 싶나?”

“…….”

“그럼 포기해. 그게 당신이 도해영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니까.”

내내 움켜쥔 멱살을 거칠게 놓으며 차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쾅, 소리를 내며 철창 위로 주먹을 날린 강태산은 그대로 등을 돌리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정말!”

내가 수갑을 끊어먹은 사실을 알게 된 경찰관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그, 그럼 다음 신문까지 좀 대기해주십쇼.”

애써 두려움을 숨기며 수갑을 채운 경찰관의 뒤로 윤 비서의 모습이 비쳤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한 그는 경찰관이 저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저장 칩에서 오윤주 부사장이 남긴 녹음 파일을 찾아냈습니다. 이주미와 강태산이 함께 일을 꾸민 사실도 거론되어 유리한 증거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터트리려 하는 자료는?”

“두 건입니다. 이사님의 형을 늘리기 위해 불기소처분된 5년 전 사건을 다시 들쑤시기 위한 조작 자료와 황 회장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그… 영상입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더러운 수작을 쓰는군.

믿었던 만큼 일 처리를 말끔하게 끝낸 윤 비서에게 수고의 말을 건네는데, 아까부터 줄곧 좋지 못한 그의 표정이 걸렸다.

“고생했습니다, 윤 비서. 그런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합니까? …혹시, 오윤주가 죽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오윤주 부사장은 방금 봉합 수술을 끝내고 특실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조만간 정신이 들 거라고….”

“그런데?”

“아까 저녁에 도해영 님께서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고 합니다. 막내 비서진에게 이사님 직통 연락처가 없어 제게 계속 연락이 왔었습니다. 늦게 확인해서 죄송합-”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다시금 철창 위로 쾅, 내려친 주먹에 수갑 줄이 으깨지듯 끊어졌다. 가루가 되어 부서진 사슬을 짓밟으며 거칠게 내뱉었다.

“당장 돈 준비해. 이럴 때 쓰라고 재벌로 태어난 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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