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나운 노크 소리만큼 강렬한 누군가의 방문 의지는 왜인지 모르게 데자뷔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분명 차도헌을 이렇게까지 맹렬히 찾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방문객은 문이 부서질 때까지 두드려대겠다는 듯 현관문을 세차게 노크하는 것도 모자라 동시에 전화까지 걸고 있었다. 차도헌의 손아귀 안에서 곧 종이처럼 구겨질 운명도 모르고 열심히 웅웅거리는 핸드폰이 불쌍해졌다.
끝없이 쿵쿵대는 방문객의 거센 노크에 결국 차도헌은 낮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마냥 누워있을 수만 없어서 차도헌을 따라 침대에서 내려가자, 옷장을 열어 매끈하게 다려진 화이트 셔츠를 꺼낸 그는 별안간 오도카니 서 있는 내게 자신의 셔츠를 입히기 시작했다.
차도헌을 위해 맞춤 제작한 셔츠는 그에 걸맞게 차르르 윤기가 도는 명품 소재인 데다가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내 몸에 입혀지는 순간 그저 엄청난 오버사이즈 핏의 셔츠로 전락할 뿐이었다.
엉덩이를 말끔히 가리며 허벅지 위로 툭 떨어지는 밑단에서부터 단추를 채워 올리기 시작한 그는 손을 죄다 집어 먹은 기다란 소매도 말끔히 접어 올려주었다. 내게 셔츠 입히기를 끝내고서야 차도헌은 탄탄한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헨리넥 셔츠에 편한 슬랙스를 걸쳐 입곤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쉬고 있어.”
이윽고 그는 등을 돌려 방에서 걸어 나갔다. 여전히 문밖에서는 거친 노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차도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따라 나가려던 나는 휑하니 드러난 다리에 후다닥 옷장 문을 벌컥 열었다. 최대한 잠옷 같지 않아 보이는 무난한 무늬의 파자마 바지를 집어 든 나는 훌렁훌렁 바지를 꿰입은 채 말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나갔다.
“이사님! 왜 제 전화를 피하시는 겁니까! 출국이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연락을 안 받으시면 어떡하십니까!”
아… 윤 비서님이 있었지.
역시나, 차도헌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넣으며 현관문을 부술 듯이 두드린 인물은 다름 아닌 윤 비서님이었다.
“안 그래도 그거, 일정 좀 미뤄야겠는데.”
“안 됩니다. 저번에도 이사님 일정 때문에 두 번이나 미루신 거 잊으셨습니까?”
사람이 정중하게 화를 낼 수 있구나, 윤 비서님의 화법에 감탄하며 나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설전이 오가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예상대로 차도헌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인상을 잔뜩 구긴 채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윤 비서님을 노려보는 차도헌을 보고 있자니 그저 열심히 일할 뿐인 윤 비서님에게 대신 사과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서늘한 얼음판처럼 이어지는 대화를 듣는 내내 가슴 한켠에 윤 비서님의 편이 되어주고픈 마음이 불쑥 샘솟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며 소파 곁으로 다가섰다.
“도헌 씨, 어디 가?”
“아니, 안 가.”
“가셔야 합니다.”
“일정 미뤄.”
“이미 두 번이나 미룬 일정입니다. 이번에는 꼭 가셔야 합니다!”
다시금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해영이 두고 못 갑니다. 당장 어제-”
내게 노팅을 했다는 말을 가까스로 참아낸 차도헌은 날 선 창을 내려놓으며 휴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윤 비서님은 아니었다. 단숨에 맥락을 읽어 낸 윤 비서님은 차도헌이 내게 노팅을 했다는 사실을 귀신처럼 알아차린 상태였다. 윤 비서님의 눈빛은 더 이상 존경하는 상사가 아닌 마치 뭐를 보는 눈처럼 두 눈에 비난이 가득 담겼다.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 내게 어떻게 노팅을 할 생각을 했냐며, 같은 알파로서 정말 실망했다고 중얼거리는 윤 비서님에게 차도헌은 애써 화를 꾹 눌러가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계속 말했지 않습니까. 적어도 해영이 안정될 때까지는….”
차도헌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분위기가 돌연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윤 비서님은 나를 위해서라도 일정을 미뤄보겠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가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노팅을 한 것뿐인데 나 하나 때문에 중요한 일정을 미루겠다며 진지하게 회의를 시작하는 둘의 반응이 좀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난 괜찮으니까 다녀와, 도헌 씨.”
난 정말 괜찮았다. 차도헌이 걱정하는 것처럼 아프지도 않았고, 이 집은 가히 약국을 능가할 만큼 수십 가지의 억제제와 상비약이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차도헌은 정말 잠시 출장을 다녀오는 것뿐이었다. 그는 업소를 찾아오는 알파들처럼 오메가를 각인시켜놓곤 기약 없는 약속을 지껄이며 영영 버리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차도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다.
나조차도 모르는 순간에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은 믿음은 나를 더욱 씩씩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살면서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는데도 믿음을 가진 첫 대상이 차도헌이라는 건, 어쩌면 처음치고는 굉장히 완벽한 결과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출장을 나로 인해 미루는 건 원치 않았다. 괜찮다는 내 목소리에 차도헌은 애써 굳었던 얼굴을 피며 옆에 앉으라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나는 소파께로 걸어가 차도헌의 옆에 앉았다.
이번에도 차도헌은 윤 비서님의 앞에서 가감 없는 스킨십을 보였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곤 커다란 손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나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당장 눈앞에서 윤 비서님이 빼곡한 스케줄표를 내려다보며 쩔쩔매고 있는데 이렇게 늘어진 채로 앉아있으려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단단히 붙든 차도헌의 손을 떨궈내려 손가락을 잡아당겼지만, 미동도 없는 반응에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를 품에 쏙 껴안은 채 한참 침묵하던 차도헌은 돌연 확신에 찬 목소리를 냈다.
“그럼, 일정 축소합시다.”
“예? 그게 무슨 말씀-,”
“3일 정도면 되겠지. 당장 일정 수정합시다.”
그렇게 차도헌은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윤 비서님으로 하여금 일주일 기간의 출장을 살인적인 스케줄로 압축하여 단 3일 안으로 수정해내는 기적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런 윤 비서님의 옆에 조심스레 다과 쟁반을 올려놓자, 혼이 나간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일을 마무리하던 그는 내가 준비한 커피와 과일 타르트에 감동을 받은 듯 일렁이는 동공으로 내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윤 비서님이 갑자기 변경된 일정을 차근히 수습하는 동안, 차도헌은 나를 부엌으로 데려가더니 억제제가 빼곡히 들어찬 찬장을 열어 보였다.
이윽고 그는 내가 덜 역겨움을 느끼는 억제제를 찾아내기 위해 하나씩 뚜껑을 살짝 열곤 손으로 약한 바람을 일으키며 냄새를 맡게 했다.
“이건. 괜찮아?”
“…아까보단 나은 것 같은데, 그래도….”
역한 냄새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하는 내 모습에 차도헌은 이래서는 영 안 되겠다는 듯, 다시금 윤 비서님 쪽을 응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나를 혼자 두고 당장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넘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게 억제제 뚜껑을 눌러 닫은 차도헌은 혹여나 손에 냄새가 배었을까 싱크대에서 거품을 내며 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야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미안해.”
내게 용서를 구하는 차도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가라앉은 차도헌의 기분을 북돋워주려 쪽,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얼굴은 죄책감에 푹 물든 채였다.
무거워진 차도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건 내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음을 어필하는 방법뿐이었다. 나는 테스트를 위해 테이블에 늘어놓은 것들 중에서 그나마 덜 역한 억제제를 집어 들어 뚜껑을 벌컥 열었다.
억제제 한 알을 입 안에 톡 넣곤 물과 함께 삼키는 내 입술 위로 차도헌의 입술이 꾹 내리눌러졌다.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에 나는 차도헌의 품에 안기며 옅게 웃었다.
그 순간 단숨에 내 몸을 가뿐히 안아 든 차도헌은 돌연 성큼성큼 부엌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쾅 소리를 내며 침실 문을 세차게 닫아버린 그는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곤 내 위로 올라타며 빠르게 셔츠를 풀어냈다.
차도헌은 자신이 없는 3일간 내가 억제제 없이도 지낼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듯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퍼붓기 시작했다. 가슴팍 위로 입술을 연신 찍어대는 차도헌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단단한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아마도 며칠간 그리워질 키스에 열렬히 응하며 밀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를 질척하게 부볐다. 입술 사이로 먹혀드는 신음이 부디 방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며 나는 차도헌의 사랑을 온몸에 듬뿍 담아내었다.
***
“아무래도 같이 가야겠어. 취재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면 다 고소 먹이면 되고, 당장 보디가드를 더 구해서-,”
“응석 그만 부려요, 차도헌 대표이사님.”
차도헌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현관에서만 10분을 보내고 있었다. 윤 비서님이 보든 말든 온 얼굴에 뽀뽀를 하다가 문득 열이 있는지 세심하게 이마를 짚어보기도 하고, 나를 품에 끌어안곤 왜 이렇게 말랐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자꾸 미적거리는 차도헌 때문에 애가 타는 건 윤 비서님뿐이었다.
“이사님, 제발… 이제는 가셔야 합니다….”
이러다간 정말 비행기를 놓칠 거라며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던 윤 비서님은, 정말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지는 차도헌의 멘트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응. 그럴게.”
“네 전화라면 회의를 중단하고서도 받을 테니까.”
“그럼 안 돼.”
“금방 올게. 사랑해, 해영아.”
“응. 잘 다녀와.”
오늘만 해도 벌써 백 번째가 넘는 고백을 받으며 나는 차도헌의 입술에 쪽, 입맞춤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진한 포옹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차도헌은 발걸음을 뗐다.
내게 뒷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뒷걸음질로 현관문을 열고 나간 차도헌의 모습에 터진 웃음은,
“…….”
탁, 닫힌 현관문에 이어 조용해진 집 안에 차츰 소리 없이 잦아들고 말았다.
텅 빈 현관 앞에 오도카니 서 있자 현관을 밝게 비추던 센서 등은 두어 번 깜박이다 이내 온전한 어둠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아까까지도 밝고 따스했던 현관이 급속도로 얼어붙어버린 것만 같아 나는 바닥에 남은 온기라도 주워보겠다는 듯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3일 뒤면 차도헌이 돌아올 걸 아는 데도 눈시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만약 집이 조금만 더 좁았으면 괜찮았을까, 허벅지 위로 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나는 물기 어린 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무릎을 끌어안았다.
집이 넓든 좁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이 집에 차도헌이 없다는 게, 앞으로 3일간 차도헌을 볼 수 없는 상황이, 혹여나 무언가 잘못되어 차도헌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애먼 생각에. 나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고만 싶어졌다.
분명 잘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울어버린 나 자신이 바보천치처럼 느껴졌다.
만약 차도헌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속상해할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눈물로 푹 젖은 얼굴을 씩씩하게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반기듯 센서 등은 다시금 환하게 불빛을 켜며 현관을 따스한 불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가 없는 3일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표라도 써볼까 하며 거실 쪽으로 발을 내딛는 내 등 뒤로, 돌연 벨 소리가 들렸다. 정갈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혹시나 차도헌인가 싶어 후다닥 달려가 활짝 문을 열어젖힌 곳에는,
“차도헌 허락 맡고 놀러 왔- 어머, 해영 씨 울어요? 왜, 누가 울렸어요!”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이던 케이크 박스를 뒤로 확 내던지고는 나를 답삭 끌어안은 채 등을 도닥이며 달래주기 시작하는 오윤주가 있었다.
“왜…, 어떻게 왔어요?”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나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오윤주가 어째서 여기에… 게다가 차도헌의 허락을 맡고 왔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차도헌 멀리 출장 갔다면서요. 이 넓은 집에 해영 씨 혼자 있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서 왔어요.”
“…나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럼 내가 뭐, 차도헌 보러 왔겠어요?”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내게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럴 일은 목에 칼이 박혀도 절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스시 잘 먹는다고 들었는데, 겨울이라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다른 거 사 왔어요. 전골 좋아해요?”
나는 그제야 오윤주의 뒤로 묵직한 쇼핑백을 든 채 대기하고 있는 수행 비서를 발견했다. 실례한다며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내게 부엌이 어디 있냐고 묻곤 빠른 손놀림으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분명 오윤주는 내게 ‘전골’을 사 왔다고 했는데… 쇼핑백에서 끝없이 나오는 음식들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종류의 찬에 이어 담백하게 조리한 도미찜과 너비아니 구이가 테이블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에 질세라 윤기를 가득 머금은 소갈비 찜과 노릇하게 구워진 육전이 상에 올랐다.
하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테이블 가운데를 넓게 비워둔 곳에 돌연 금빛으로 번쩍이는 탕기가 자리하더니, 이내 가지각색의 약재와 버섯, 해산물이 맑은 육수에 소복이 잠겨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고급 궁중음식 사이에서 당당히 메인을 차지한 신선로가 바로 오윤주가 말한 ‘전골’이었다.
차도헌이나 오윤주나, 심지어 윤 비서님까지도, 어째서 그들은 죄다 나를 못 먹여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구는 걸까. 물론 내가 평균 체중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수행 비서를 돌려보낸 그녀는 한식이 와인과 잘 어울린다며 이번에도 경쾌하게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윤주 씨, 너무 고마운데… 이건 저한테는 좀 과한 것 같은데요.”
오윤주는 대체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도대체 나는 그녀가 베푸는 친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분명 오윤주에게 내 존재는 그저 차도헌의 목숨줄에 불과했었다. 첫 만남부터 그녀는 내 앞에서 대놓고 차도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내게 차도헌과의 각인 유지를 부탁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녀는 당장 며칠 전, 돌연 내가 정말 다치지 않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었다.
‘해영 씨한테 위험한 거라면서요. 하지 마요, 쌍방 각인. 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해볼게. 해영 씨는 여기서 빠져요.’
내게 쌍방 각인을 강요했던 것에 사과까지 한 그녀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 목숨을 염려했었다.
“나한테 왜 잘해줘요?”
알아야 했다. 그녀의 친절이 내포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지.
내 앞에 차려진 호화스러운 고급 궁중식이 날카로운 덫에 끼워진 향긋한 치즈 조각인지 아닌지 판단을 해야 하는 건 나였다. 지금 내 곁엔 내가 덫에 기어들어 가고 있다 하더라도 구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줄곧 차려놓은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와인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며 나는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해진 건지, 아니면 나중에 내 뒤통수칠 게 미안해져서 이러는 건지.”
“…….”
“내가 아는 오윤주 씨는 이유 없이 굴어댈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말 좀 해줘요,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대답을 재촉하는 내 목소리에, 맑은 다홍색 립스틱이 칠해진 그녀의 매끄러운 입술은 줄곧 유지하던 침묵에 마침표를 찍듯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영 씨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벌가와 사창가는 먼 세계가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 것들보다도 더 밀접하게 엮인 관계죠.”
갑자기 사창가를 언급한 그녀에 당황했지만 나는 차근히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 재벌가와 사창가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 나는 사창가를 밥 먹듯이 찾는 고위 재벌 인사들의 명단을 머릿속으로 쭉 나열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건 그 반대의 경우에요.”
“무슨….”
“인간은 절대 한 단계씩 추락하지 않아요. 종이 한 장 차이로 기업의 생사는 결정되고,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남죠.”
그녀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감정을 내리누른 눈매가 과거를 되짚어보듯 아득해지고 있었다.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장례도 같이 치르고, 내 복수도 도와주겠다고 했던 애였어요. 우리 엄마는 일찍 하늘나라 갔거든요, 나만 혼자 남았는데 더 이상 살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수면제 먹고 눈 감았더니 그 애가 119를 불러서 내 눈을 억지로 뜨게 하더라고요.”
“…….”
“진작 나는 살려놓고, 그 애는 허망하게 갔어요. M&A 때문에 미국에 간 사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죠. 믿을 수가 없어서 비행기 티켓을 끊었어요.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 애는 장례는커녕 방치되어 있었죠, 사창가 지하실에.”
밭은 숨을 몰아쉬며 나는 테이블을 움켜쥐었다. 붉게 도드라진 뼈마디가 선명히 비추는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며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이미지를 몰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사창가의 어두컴컴한 지하, 눈꺼풀을 내리감은 채 허옇게 질린 시신들. 수많은 오메가들의 목숨을 앗아간 지옥 같은 곳엔 은수와 지해, 그리고 그녀의 친구가 숨죽어 있었다.
“부도가 난 회사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돌려막기 식으로 사채를 끌어와 쓴 집안 어른들이 그 애한테 남긴 건 빚뿐이었어요. 압류딱지가 붙은 집에 들이닥친 사채업자들이 그 애가 오메가인 것을 발견하곤 사창가에 넘겼고, 몇 달 못 버티다가 목숨을 끊었대요. 나는 이렇게 살려두고… 그렇게 그 애는 먼저 갔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짙게 배어나는 고통은 내가 겪은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그들이 죽는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미리 알았다면 내가 어떻게든 했을 텐데.”
텅 비어버린 와인 잔 위로, 찰랑이며 그녀의 슬픔은 넘쳐흘렀다. 내 볼을 젖게 만드는 눈물만큼 담담했던 그녀의 목소리도 차츰 젖어갔다.
“해영 씨를 볼 때마다… 그 애가 생각났어요.”
“…….”
“그래서… 그래서 자꾸 해영 씨한테 정이 갔나 봐요. 불편했으면 미안해요.”
그녀는 옅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그녀의 앞에서 나는 테이블 위로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해영 씨가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그럼 나중에라도 시간 꼭 내줘요.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싶어. 난 해영 씨 좋아하니까.’
‘해영 씨, 부디 조심히 잘 지내요.’
그제야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이 이해가 됐다. 왜 내게 이러는지도, 왜 나를 각별히 대했는지도….
나도 지해를 볼 때마다 은수를 떠올렸으니까. 혹여나 지해가 은수처럼 죽어버릴까 마음을 졸여대며, 그 애를 살려보겠다고 갖은 수를 썼었으니까.
“나 안 죽을게요.”
슬픔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그녀에게 나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나랑 친구해요.”
“해영 씨….”
“윤주 씨 말대로 나 오늘 많이 심심했거든요. 나도 윤주 씨 심심할 때마다 놀러 갈게요, 나 윤주 씨랑 친구 하고 싶어요.”
꾹 참은 눈물이 터져 나오듯 오윤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까 그녀가 나를 달래줬던 것처럼,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 안 죽을게요, 윤주 씨. 나 안 죽을 테니까 울지 마요.”
그건 그녀를 향한 말임과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암시와도 같았다.
빚을 떠안고 고아원에 버려진 삶, 오메가의 몸으로 사창굴에서 다리를 벌리던 삶, 조직에 얽매여 황 회장으로부터 도망치던 삶.
죽을 날이 차고 넘친 내 불우한 삶에,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씩 생긴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죽어야 할 이유를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내 남은 빚이 다른 오메가들에게 이월될까 싶어서, 은수의 유품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까 봐, 내 장례를 치르면서 마담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내가 죽고 나면 강태산이 심심해할까 봐.
하지만 그 모든 이유의 마지막에는,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차도헌이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내 몸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할 차도헌의 모습에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나 안 죽을게요. 그러니까 윤주 씨, 울지 말아요.”
그 모든 이유에 핑계를 대며 나는 살아남아 보기로, 다짐했다.
***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내 제안에도 오윤주는 돌아가 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수행 비서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를 부축하며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조심히 가요.”
“잘 자요, 해영 씨.”
이윽고 그녀를 태운 차는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응시하며 서 있는데, 늦은 밤의 싸늘한 공기에 팔뚝을 쓸어대는 내 등 뒤로 돌연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낯선 이의 인기척이었다. 오윤주를 배웅한다며 현관을 활짝 열고 차고까지 걸어 나온 내 잘못이었다. 당장 이 집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 한 명도 없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두려운 기운에 온몸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어떡해야 할까, 내 뒤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따돌려야 할까. 차라리 핸드폰이라도 들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파자마 호주머니는 텅 빈 채였다.
미치도록 내가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부러 공포를 떨쳐내며 나는 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언젠가 강태산이 알려줬던 치한 퇴치법을 떠올리며 나는 등 뒤의 남자의 코를 주먹으로 쳐버릴 계획을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현할 새도 없이, 내 어깨 위로 무거운 천이 눌러 덮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은 두 명이었다. 물론 몇 명이 더 잠복해있을 수도 있다. 침착해야만 한다, 당장 업소에서 일할 때만 해도 내게 이런 납치는 흔하게 벌어지던 일이었으니까. 내 뒤에 서있는 납치범들의 기색을 읽으며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도주로는 많았다. 이 빌리지는 정문을 지나면 바로 시내와 이어진다. 어디로든 미친 듯이 뛰어가 경찰을 부르면 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교란이다. 나는 허벅지 밑으로 떨어지는 천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푹신한 털이 손에 감기는 순간, 나는 내 어깨에 걸쳐진 천을 세게 잡아당겨 뒤로 날렸다. 그리곤 현관 바깥으로 이어지는 정원을 향해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맨발인 것도 잊고 차갑게 얼어붙은 잔디를 마구 밟으며 뛰는 내 뒤로, 두 남자가 미친 듯이 속력을 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도해영 님! 밤이 춥습니다, 돌아오세요!”
그런데 납치범들이 이상했다, 그들은 내게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도해영 님, 그렇게 뛰시다간 다치십니다! 멈춰주십시오!”
내 몸이 다치면 안 된다고? 그럼 인신매매범인가?
“저희 차도헌 대표이사님의 비서진입니다! 저번에도 뵈었던-,”
그 순간 나는 마구 내달리던 다리를 멈춰 세우곤 정원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은 내가 내던진 두툼한 담요를 펄럭이며 허겁지겁 내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금 어깨 위로 두툼한 담요가 덮였다. 정원을 비추는 가로등의 밝은 불빛 아래, 나는 그제야 그들이 납치범이 아닌 며칠 전 호텔로 나를 데려갔던 두 명의 막내 비서진이었음을 기억해냈다.
그들은 차도헌의 중요한 일정에 같이 따라간 윤 비서님을 대신해서 나의 안전을 위해 이곳에 배치되었음을 설명하며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도해영 님.”
온몸을 감싼 두꺼운 담요로부터 밀려오는 온기에 더불어 몰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나 혼자 공포 스릴러 영화를 찍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것도 멀쩡한 사람 두 명을 납치범으로 몰면서 마구 달아났다는 것에 나 또한 사죄하듯 허리를 푹 숙였다.
“오해해서 죄송해요, 제가 예전에는 워낙…, 그런 일을 많이 당해서요.”
멋쩍게 웃으며 담요를 움켜쥐는 내게 그들은 괜찮다며, 날이 추우니 어서 귀가하라며 나를 호위하듯 둘러싼 채로 정원을 걸었다.
서늘하게 얼어버린 잔디를 사박사박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내가 맨발로 뛰쳐나갔다는 사실에 연신 사죄를 빌고 있었다. 그들을 납치범이라 오해한 것도, 그래서 냅다 잠옷 바람으로 줄행랑을 쳐버린 것도 다 내 탓인데 자신들의 잘못이라며 사죄하는 비서진들의 모습에 도리어 내가 더 미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예전이야 허술한 업소 뒷구멍으로 도망을 칠 때마다 칼 든 조폭들이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황 회장은 나 하나 잡겠다고 지해와 강태산의 몸에 위치 추적 센서를 박아 넣는 잔인한 기행을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당장 대문 밖으로는 경호원들이 24시간 진을 치고 있고, 차도헌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모여 사는 빌리지 자체에서도 입구서부터 경비를 삼엄하게 두고 있었다.
그제야 내 삶이 범죄와는 퍽 멀어졌다는 사실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내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은 더 이상 납치범이나 인신매매범의 것이 아닌, 그저 잠옷 바람인 내가 추울까 담요를 덮어주려 다가선 비서님들의 기척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그럼 푹 쉬십시오, 도해영 님.”
정원에서 현관 앞까지 나를 안전히 데려다 놓은 그들은 임무를 마쳤다는 듯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이었다. 두 비서는 내게 편안한 밤을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현관문을 굳건히 닫아 주었고, 그렇게 그들의 근무는 여기에서 끝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아침이 되자,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정원 한가운데에 장승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기함을 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왜, 왜 아직도 여기에 계신 거예요!”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도해영 님.”
어제처럼 파자마 차림으로 뛰쳐나간 내게 그들은 어디선가 꺼내온 두툼한 담요를 크게 펼쳐 내 어깨 위로 둘러주곤, 내가 만약 감기에 걸리면 자신들이 해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며 외투 입기를 간절히 부탁할 뿐이었다.
“혹시 두 분 업무가 저 감시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혹여나 발생할 위기상황으로부터 도해영 님을 안전히 대피시키기 위한 상시 대기 업무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들려오는 대답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이런 철옹성 같은 안전지대에서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기길래 이들이 현관 밖에서 24시간 동안 보초를 서고 있어야 하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아무래도 차도헌에게 이런 과보호는 필요 없다고 말해줘야겠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세요, 날이 이런데 밖에서 계속 있으면 춥잖아요.”
“아닙니다! 저희가 어떻게 감히 두 분의 댁에…!”
“그럼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드세요. 네?”
내 제안에 화들짝 놀란 그들은 안 된다며 쩔쩔매다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문을 활짝 연 채로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에 결국 주춤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아닙니다, 도해영 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내내 안절부절못한 채로 거실에 서 있던 두 사람은 결국 부엌에까지 따라오더니 내가 할 일을 빼앗아버렸다.
데일 염려가 있는 뜨거운 것과 깨질 위험이 있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며 내 손에 들린 찻주전자와 쿠키가 가득 쌓인 접시를 빼앗아간 그들은 이내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가 테이블에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윤 비서님도 이렇게까지 나를 얄팍한 유리잔처럼 취급하진 않았는데, 그들의 과한 보호를 받고 있자니 절로 어색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이러다간 버릇 잘못 들겠는데…. 차도헌의 출장이 3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찻잎이 제대로 우러나와 향긋한 차를 홀짝이고 있자니 차츰 온몸이 노곤해졌다. 분명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졸린 건지, 아무래도 이건 전부 나를 과보호하는 차도헌 때문이다. 찻주전자 하나 옮기는 것도 못 하게 하니까 내가 이렇게 게을러진 거 아냐.
졸음을 애써 밀어내며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곤 오물오물 베어먹고 있는데 왜인지 마주 앉은 이들의 동공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눈빛은 분명 윤 비서님의 것과 비슷한….
“역시나, 듣던 대로 정말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십니다.”
“…네?”
“그간 수많은 분들의 수행 비서로 일했지만 이런 대접은 처음입니다.”
나는 그저 바깥이 추우니까 들어와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 한 것밖엔 없는데, 감동을 받은 듯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막내 비서들의 눈길을 받고 있자니 절로 부담스러워졌다.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아닙니다, 도해영 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저희는 알파라 추위를 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고….”
“알파는 사람도 아니래요?”
물론 평생 난방을 켤 일 없을 정도로 체온이 후끈한 차도헌 또한, 이 겨울에도 심플하게 수트 차림으로만 다니는 데다가 외투를 챙기는 이유는 그저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덮어주기 위해서인 것을 떠올려 보니… 정말 알파들은 추위를 안 타는 것 같기는 했다.
“근데, 알파셨어요? 하지만 페로몬이….”
하지만 알파라고 말한 것과 다르게 그들에게서는 어떠한 체향도 맡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성 알파라도 페로몬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혹시, 메이팅 하셨어요?”
“예, 그렇습니다.”
설마 하며 물어본 질문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메이팅을 한 알파라니, 이 사회에서는 흔할지 모르겠지만 암흑가에서 살았던 내게 있어서 메이팅을 마친 알파들을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때요?”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간 질문이었다. 이런 건 분명 사생활의 영역인데 바보같이…, 나는 다급히 말을 수습하며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도헌 씨랑 저랑… 그… 아직 안 돼서요.”
“아닙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편히 물어보셔도 됩니다.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것을 물어 죄송스러운 내 마음과는 반대로, 그들은 이미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듯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열정적으로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
가득 우린 차가 동이 날 때까지 이야기는 시들 틈도 없이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건 오늘이 첫날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함 하나 없이 즐겁게 이어지던 대화였다.
두 사람은 정말 사랑꾼 그 자체였다. 어떻게 만났고 어떤 순간에 운명의 짝임을 알아보았는지, 신혼여행으로 무려 휴가를 한 달씩이나 넉넉하게 준 차도헌에 대한 미담도 빠뜨리지 않으며 그렇게 한참 이어간 대화의 끝에, 요즘 김 비서님의 아내가 엽산을 꾸준히 챙기고 있다는 시점에서 대화는 돌연 임신 정보 공유 파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점차 내게 다른 세상처럼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임신이란 곧 자살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행복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벌써 아기 신발을 수 켤레나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낯선 감정이 불쑥 들었다.
정말 바쁜지 아침에 온 문자 이후로 잠잠한 핸드폰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옆에 놓인 쿠션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나와 차도헌의 미래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며칠간은 아내 몸에서 제 페로몬이 맡아져서 조금 놀랐지만, 임신 초기에 알파 페로몬이 부족해서 유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몸이 자연스럽게 변하는 현상이라 하더라고요. 요즘 철야가 많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내 귓가에 돌연 김 비서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말에 나는 찻잔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계속 페로몬이 맡아진다고요…?”
“예.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간 원래 체향이 아닌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이 나오는데, 이는 대부분의 오메가들이 겪는 임신 초기 증상이라고 합니다만….”
굳어버린 내 얼굴에 두 사람은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얼굴이 굳은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곧장 체면이고 뭐고 팔을 들어 올려 곧바로 코를 바짝 갖다 댔다.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대며 내 살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기이한 행위에 두 비서님들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당장 그런 그들의 반응보다도 내게는 더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알파 페로몬이 계속 맡아진다고요…?”
나는 더듬대는 목소리로 방금 했던 질문을 또 뱉으며 반대쪽 팔뚝을 들어 올렸다. 살결 위로 깊숙이 코를 문댄 채 얕은 숨을 반복적으로 들이쉬자, 부정할 수조차 없게 선명히 맡아지는 것이 있었다.
차도헌의 페로몬, 분명 내 몸에서는 차도헌의 페로몬과 정확히 같은 체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차도헌이 내 페로몬 불균형을 치료하기 위해 내 몸에 흠뻑 페로몬을 묻혀두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확연히 옅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피부 겉에서 맴도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태는 아니었다. 차도헌이 떠난 후로도 내 몸은 마치 차도헌 본인이라도 된 것 마냥 진한 체향을 뿜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떠나기 직전까지 내게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하더라도 며칠이 넘도록 그의 페로몬이 내 몸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다른 증상은요?”
“임신 초기 증상 말씀이십니까? 개개인마다 증상은 다르지만, 제 아내의 경우에는 몸이 좀 붓고 잠이 많아져 자주 피곤해하곤 했습니다.”
애매한 대답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아닐 수도 있다. 내게서 차도헌의 페로몬이 맡아지는 걸 제외하면 다른 증상은 딱히 없었으니까. 그러니 섣부르게 생각해서는 안 됐다.
당장 며칠 전에는 노팅이 있었고, 그 전에는 내 히트가 있었으며, 사실 그걸 따지기도 무색하게 우리는 수도 없이 몸을 겹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두려움을 내리누르며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닐 거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저 기우일 거라고, 나는 열심히 나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예!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드디어 내려진 임무에 두 눈을 반짝이는 두 비서님들을 향해 나는 부러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저, 임테기 좀 사다주세요.”
“임신 테스트기… 말씀이십니까?”
순간 얼굴 위로 드러난 당황을 말끔히 숨긴 비서님들이 곧장 약국으로 출동했다. 쏜살같이 다녀온 비서님이 건넨 묵직한 봉투에는 테스트기가 제약사 종류별로 두세 개씩 들어있었다. 한껏 긴장한 내 얼굴에 두 사람은 잠시 바깥에 정찰을 나가야 한다는 거짓말과 함께 자리를 비워주었다.
부스럭거리는 봉투에 손을 쑥 집어넣자 비슷한 크기의 박스가 이리저리 손에 챘다. 뭐가 좋은지 어떤 게 더 정확한지 알 리가 없는 나로선 무작위로 하나를 집은 채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서에 따르면 5분, 단 5분이면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 이리저리 몰려드는 복잡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설명서에서 하라는 대로 일련의 과정을 끝내자, 채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선명하게 떠오르는 두 개의 줄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왜 벌써…?”
아직 제대로 긴장을 풀지도 못했는데, 눈앞에 바로 나타난 결과에 무서우리만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를 붙잡듯 설명서 구석에 깨알같이 적힌 오차 가능성에 나는 거실로 달려 나가 테스트기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연달아 진행한 두 개의 테스트기마저도 선명한 두 줄을 내보일 뿐이었다.
세면대 위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임신 테스트기를 응시하며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밀려오는 불안한 마음에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은 이윽고 대리석 위에서 손톱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차도헌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매일 밤 그의 품에서 잠들고 매일 아침 그의 입맞춤에 눈을 뜨는 하루가 숨 가쁠 만큼 행복했고, 이제는 하루 빨리 메이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만큼 열렬히 그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내게 임신은 그저 두렵고 끔찍한 자해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부른 배를 움켜쥐며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뱉던 업소의 오메가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목을 졸랐다. 미천한 오메가에게 임신은 허튼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진작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심장이 터질 만큼 행복한 순간, 간절히 바라던 소중한 선물이 찾아온 순간에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리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신발을 수십 켤레나 사 모았다는 김 비서님의 이야기는 분명 나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그건 감히 내가 꿈꿀 수조차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판판한 아랫배를 서툴게 문질러 보았다. 아직 겉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도 혹시나 배 속에서 자라날 무언가가 별안간 툭, 존재감을 드러낼 것만 같아 나는 곧바로 아랫배를 짚던 손바닥을 떼어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욕실에서 거실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을까, 힘없이 터덜터덜 거실로 걸어가자마자 소파에 쓰러지듯 털썩 몸을 내려놓았다. 스산히 밀려오는 냉기에 무릎을 끌어안으며 익숙한 자세로 몸을 웅크리자 다시금 차도헌의 페로몬이 내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렇게 숨을 죽인 채 덩그러니 앉아 있기를 몇 분, 현관문을 두드리는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두 비서진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체감상 욕실 안에서 보냈던 시간은 오 분 남짓 정도로 느껴졌는데, 실상 두 시간이 넘도록 그 안에 앉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도해영 님,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한참 동안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 내가 많이 걱정되었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괜찮냐는 물음에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 대기 자세로 서 있던 두 비서의 어깨가 더더욱 긴장하며 굳어지고 있었다.
“…테스트기가 틀릴 일도 있나요?”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푹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다짜고짜 내뱉은 질문에도 두 사람은 정성을 다해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진행하는 채혈 검사보다는 오차율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정확한 임신 여부는 병원을 방문하시는 게 더 확실하실 겁니다.”
“…….”
“산부인과에 진료 예약을 해놓을까요?”
그래, 이왕이면 확실한 것이 좋으니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진료 예약을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전화를 거는 두 사람을 막아서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도헌 씨한테는… 제가 오늘 임신 테스트 해봤다는 거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확실하진 않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내일 병원 간다는 것도요.”
“병원 방문의 경우에는 저희가 필수적으로 이사님께 보고를….”
“부탁드릴게요.”
강경한 내 눈빛에 그들은 잠시간 갈등하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헌 씨 며칠 후면 오잖아요. 제가 직접 말해주고 싶어요.”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임신 여부를 말해주고 싶다는 내 거짓말은 그들에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경건한 얼굴로 내 비밀을 지켜주겠다며 약속하는 두 사람의 앞에서 나는 불안한 마음을 숨긴 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내 마음에는 짙은 먹구름이 떴는데 바깥은 겨울날이라는 것치고 너무나 화창할 따름이었다.
“진찰실 안에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괜히 일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요.”
“안 되십니다, 어디를 가시든 꼭 동행하라고 명령받았습니다.”
“셋이서 우르르 갔는데 아니라고 하면 좀 민망할 것 같아서 그래요. 누가 보면 엄청 기대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정말, 나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오히려 무서워하라면 더 무서워했겠지,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반길 수 있겠어….
“테스트기가 틀릴 확률이 높다면서요.”
유명 산부인과 과장의 진찰실 앞, 조심히 다녀오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는 두 비서님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당장 어제 두 눈으로 확인했던 결과를 굳게 부정하며 발을 내디뎠다.
“분명 아닐 거예요.”
호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세 개의 임신 테스트기는 내가 부정을 할수록 존재감을 드러내듯 더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혈액 수치상 임신으로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아직 임신 극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초음파 검사는 5주 차부터 가능하시고요, 3주 후에 내원하시면 그때 아기집이 자리를 잘 잡았나 보실 수 있으세요.”
눈앞에 놓인 채혈 검사 결과지와 오메가 산모들을 위한 임신 출산 가이드북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임신이 됐다. 내 배 속에는 자그마한 게 자라고 있었다. 겨우 이제야 나는 사랑을 시작했는데, 더 이상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 아닌 그와 함께하는 매일을 꿈꾸며 살게 되었는데….
“임신 초기에는 특히나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페로몬 수치도 안정적이고, 검사 결과에서도 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워낙 몸이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에 음주, 흡연, 과격한 스포츠, 특히 성관계는 당분간 삼가주시고요.”
친절하게 주의 사항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의사의 목소리가 점차 아득해지고 있었다. 코트 끝자락을 세게 움켜쥔 손등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단백질, 엽산, 칼슘 섭취 꾸준히 하셔야 하고요. 특히 산모님께서는 저체중이신 편이라 산모님과 아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을 찌우셔야-,”
차분하게 이어지던 의사의 목소리는 돌연 중단되고야 말았다. 그녀는 바들바들 떠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울고 있는 나를 달랬다.
두서없이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고, 나도 그 애들처럼 결국에는 고통에 못 이겨 자살하게 될 거라고, 새된 목소리로 두려움을 쏟아내는 내 모습에 그녀의 표정은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간 상처를 많이 받으셨겠어요, 그래서 임신에 대한 두려움도 깊으신 것 같고요. 하지만 산모님께서는 절대 겪을 일 없는 극히 일부의 케이스입니다. 흔히 일어나는 증상도 아니고요.”
“…….”
“일방 각인 상태였던 지인분들과는 다르게, 도해영 산모님께서는 현재 쌍방 각인이신 데다가 페로몬 수치 또한 매우 안정적이니까요. 임신 초기 페로몬 부족 증상으로 고통스러울 일도, 그로 인해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할 일도 없어요.”
“…정말요?”
내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그녀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의심이 가득 담긴 내 목소리에도 그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당연하죠. 매일매일 기쁘고 행복하기만 해도 바쁠 만큼, 산모님께서는 아기와 함께 건강한 나날을 보내실 겁니다.”
내겐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며, 다음에는 꼭 남편분과 함께 내원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진심을 담은 위로에 나는 북받치는 감정을 힘겹게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할 만큼 차도헌이 보고 싶었다.
***
“오늘 늦은 저녁 비행기로 도착 예정이십니다.”
“…네?”
어제 병원에 다녀온 뒤로 줄곧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정신이 희뿌예진 것만 같았다. 질문을 해놓곤 대답도 듣기 전에, 내가 뭐라고 물어봤는지 까먹을 정도로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차도헌 이사님께서 돌아오시는 시간 말씀드렸습니다만….”
“아, 도헌 씨요? 도헌 씨 언제 와요?”
“오늘 늦은 저녁에 도착 예정이십니다.”
나 때문에 같은 말을 두세 번씩 반복해야 하는 두 비서님께 죄송했지만, 내가 온종일 정신을 놓은 채 멍해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산모님께서는 절대 겪을 일 없는 케이스입니다. 임신 초기 페로몬 부족 증상으로 고통스러울 일도, 그로 인해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할 일도 없어요.’
얼떨떨했다. 한편으론 먼저 간 애들에게 깊은 죄책감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오메가는 사랑을 하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알파에게 각인을 당하고, 임신을 하면 죽는 줄 알았는데….
한평생 진리라 여겼던 사실이 온전한 거짓으로 드러난 순간 이후로, 나는 줄곧 혼란스러워했다.
“매일매일 기쁘고 행복하기만 해도 바쁠 만큼….”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매일이 기쁨과 행복으로 넘치는 삶을, 내가 감히 욕심낼 수 있는 것이었는지.
혹시라도 잘못될까 차마 배를 쓰다듬지도 못했다. 내내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병원에서 준 임신 가이드북을 멍하니 읽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해영 씨, 얼굴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오윤주로부터 온 영상 통화였다. 비록 며칠 전에 그녀를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저도 마침 윤주 씨 보고 싶었어요.”
―어머, 웬일이에요? 해영 씨가 그런 말을 다 하고. 기분 좋은 일 있는 거죠?
웃으며 안부를 묻는 그녀에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병원에 동행했던 비서진들조차 아직 내 임신 여부를 모르는 상태였다. 그만큼 차도헌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요. 나 비밀 잘 지켜.
자꾸 말해보라며 장난스럽게 추궁을 해대는 그녀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 순간 적당한 말 돌릴 거리를 찾은 나는 협탁 뒤에 구겨 넣어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화면 앞에 들이밀었다.
“얼마 전에 발견한 건데요. 혹시 이거 뭔지 알아요?”
―어머, 출생 팔찌네요?
아무거나 둘러대며 꺼낸 질문에 돌아온 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출생… 팔찌요?”
꼬깃꼬깃하게 접힌 자국이 짙게 난 길쭉한 종이가 핸드폰 앞에서 너덜대고 있었다. 단번에 이 종이의 정체를 알아낸 그녀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내게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 설명해줄게요. 요즘에야 폴리 소재로 된 밴드를 쓰지, 옛날에는 종이로 썼거든요. 우리 엄마 유품에도 있어요, 내 출생 팔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자신의 모습이 보이도록 핸드폰을 올려두곤, 어디선가 정사각형으로 접힌 냅킨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뒤로 화려한 무늬가 넘실대는 병풍이 보여 어디인가 했더니 고급 일식집이었던 모양이었다.
냅킨을 편 그녀는 이윽고 종이접기를 하듯 길쭉한 모양이 되게 접어 올리기 시작했다. 접기가 끝나자 그녀의 손에는 내가 들고 있는 길쭉한 종이와 같은 길쭉한 띠가 들려 있었다.
―해영 씨가 갖고 있는 종이랑 같죠? 이제, 이걸 손목에 이렇게 감아요.
그녀를 따라 내가 가진 종이를 손목에 조심스레 둘렀다. 이윽고, 내 손목에는 연도와 날짜가 적힌 종이가 감겼다.
―바깥쪽으로 보이는 면에 적힌 건 아기 이름과 태어난 날짜에요.
[19xx年 12月 30日 都瀣泳(도해영)]
“…네.”
―종이가 길어서 남는 부분이 있죠? 그 안쪽 면에는 보통 산모 이름을 써요.
“산모, 이름이요…?”
―출생 팔찌에 산모 이름이랑 아기 이름을 같이 안 적으면 나중에 아기가 바뀌고 그런 사고가 있었다나 봐요? 뭐, 옛날이니까.
아, 나는 작게 탄식하고야 말았다.
나는 이미 종이의 반대편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모란.”
매캐하게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은 그 너머에는, 모란이 적혀 있었다.
어렴풋이 업소와 관련된 서류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잘못 관리된 장부 중 한 장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흘려보냈다, 이게 다른 것을 의미하는 줄도 모르고.
[19xx年 12月 30日 都瀣泳 牡丹.]
모란. 마담의 이름이었다.
―해영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해영 씨!
점차 정신이 흐려졌다. 뿌옇게 차오른 눈물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날카로운 통증이 이는 아랫배를 움켜쥔 손이 고통에 덜덜 떨려왔다. 핏기가 가셔 창백한 손으로 연신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면서 나는 헐떡였다.
“후윽, 윽….”
흐느끼는 숨에 짓이겨진 슬픔이 턱밑으로 차올랐다. 어지럽게 꼬이기 시작한 배 속만큼 뇌가 터질 것처럼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아가, 아가야….”
정신없이 웅얼대는 목소리가 헐떡이는 잇새로 새어나갔다. 나는 다시금 배를 문지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가야….”
왜 이렇게 아플까, 분명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 했는데, 매일매일 기쁘기만 해도 바쁠 만큼 행복해질 거라고 했는데….
윽윽대며 가쁜 신음이 방 안을 울리는 소리에 돌연 벌컥, 침실 문이 열렸다.
“도해영 님!”
아득히 울리는 비서진들의 외침을 뒤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