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윤주와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윤 비서님의 뒤로 따라 걸어온 두 남자는 자신들을 비서실 막내라 소개하며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바쁜 일정상 미리 떠난 윤 비서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린 그들은 이윽고 준비해온 옷을 내게 갈아입히고 가볍게 머리를 매만져주며 스타일링까지 마치고는, 리무진에 태워 차도헌이 예약한 호텔까지 나를 에스코트했다.
숨 가쁘게 흘러간 상황에 정신을 차리기도 잠시, 이미 나는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호텔 로비에 놓인 웅장한 분수가 조명에 반짝이며 쏟아지는 것을 구경하며 퍼 재킷의 부드러운 소매 끝을 매만지는데 곁에서 같이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다급히 내게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대표이사님께서 오후 회의가 미뤄져서 조금 늦으신다고 합니다. 이십 여분 후에 도착 예정이시니 미리 룸에 들어가 계시라고 전하셨습니다.”
차도헌 정말 바쁜 거 맞구나. 재차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올리는 그들에게 나는 괜찮다며 답해주고는 안쪽에 따로 마련된 VIP 전용 다이닝 룸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룸으로 들어가는 순간 익숙한 인영이 내 곁을 슥 스쳐 지나갔다. 큰 키에 듬직한 체형, 날렵한 이목구비와 깔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 분명 옷차림은 달라도 분명, 저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그대로 그를 따라 뛰었다.
“태산…, 태산아!”
이름을 외치며 뒤따라 뛰어가 손목을 붙잡자,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가, 강태산이라는 사실을….
“…해영아.”
강태산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나를 응시하는 갈색 눈동자도, 깊은 흉터 자국이 남은 눈썹까지도. 전부 강태산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태산도 나도,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그간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듯했다.
‘약 구해올게, 문 잘 잠그고 있어. 응?’
‘가지, 읏, 가지 마아, 강태산, 흐으, 가지 마―’
‘금방 올게. 해영아, 나 금방 와.’
자꾸만 품 안에 엉겨 붙는 나를 달래고 어르며 강태산은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알파의 냄새를 좇으려 아무 향도 나지 않는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 내게 몇 번이고 ‘금방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허름한 집을 나섰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도해영은 극우성 오메가야. 베타가 아닌 극우성 알파가 필요한.’
하지만 강태산은 결국 내게 오지 못했다. 히트에 허덕이는 오메가에게 알파가 나타났기 때문에,
‘당신은 도해영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주제도 모르고 강태산의 사랑을 바랐던 내가, 결국엔 강태산을 상처 입혔기 때문에.
강태산의 앞에서, 나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부러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꽉 막힌 목구멍 사이로 살가운 목소리를 내며,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안부를 물어가며.
“…잘 지냈어?”
짧은 한마디 안에 질문들을 욱여넣었다. 팔의 상처는 잘 아물었는지, 그 후로 황 회장이 너를 괴롭히지는 않는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도 나는 네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강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목이 붙잡힌 채, 어딘가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 순간 나를 덮쳐온 것은 깊은 후회였다.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건 오롯이 나라는 사실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강태산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꾹 다물린 입술 앞에서 나는 천천히 강태산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차라리 아는 척을 하지 말걸, 그냥 멀리서 걸어가는 뒷모습만 바라보다 말걸.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잠시였다.
“어이, 이쁜 형씨. 우리 형님 겁나게 바쁜 거 안 보이나? 어디서 수작질이여요, 앙?”
얼굴 앞으로 찌든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돌연 복도에 나타난 남자가 비아냥대는 말투로 내 팔목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이어 어깨를 뒤로 확 꺾어버리는 바람에 왼쪽 어깨가 뒤틀린 듯 고통이 치밀었다.
뒤로 꺾인 어깨에 들린 고개는 나를 차갑게 응시하는 강태산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금니를 악문 채로 고통을 참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강태산은 얼굴을 굳혔다.
“…용수야.”
“예, 형님!”
“너. 대가리가 너무 커진 것 같다.”
“에, 예?”
그 순간 내 팔을 붙잡았던 남자가 내 발밑으로 고꾸라졌다. 남자에게 억세게 붙잡혔던 팔은 이미 자유로워진 지 오래였다.
“네놈 새끼가.”
“혀, 형님! 죄, 죄, 죄, 죄송합니다!”
“어디에 감히 손을 대.”
“형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다물어.”
이윽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어진 남자를 향해 강태산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앞코가 뾰족한 구둣발로 명치를 사정없이 차대는 행위에도 남자는 억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착실히 강태산의 아래에서 버티고 있었다.
업소에 있을 때, 아니 그보다도 더 이전에. 고아원에서 내쫓겨 뒷골목으로 붙잡혀간 순간부터 줄곧 봐왔던 장면인데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태, 태산아, 그만….”
“…….”
끼어들 처지가 아닌 걸 알면서도 나는 강태산을 멈춰 세웠다. 발밑에 엎어진 남자는 정말 몇 번만 더 맞으면 장기가 죄다 파열돼서 죽어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꽉 막혀버린 목구멍 사이로 절로 새된 소리가 새어나갔다. 눈에 핏발이 설 만큼 발길질을 해대는 틈에 내 목소리를 못 들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지막지하게 이어지던 강태산의 발길질이 돌연 멈춰 들었다.
대신 강태산은 구둣발에 무게를 실은 채 남자의 머리통을 짓눌러 밟았다. 내내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로 침묵을 유지했던 남자는 체벌이 끝난 후에야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금 강태산에게 사죄를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차 빼 와.”
“예, 형님!”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난 남자가 절뚝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시금 찾아온 적막과 함께 바짝 당겨졌던 긴장이 풀어지자마자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섰다.
뒤늦게 욱신 올라오는 고통에 붙잡히지 않았던 반대쪽 손으로 조심스레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강태산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 굳어지기 시작했다.
앞 여밈이 없는 퍼 재킷을 단숨에 벗긴 강태산은 이어 실크 재질로 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내고는 한쪽으로 젖힌 채 내 어깨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소매 단추를 풀어내고 팔뚝 위까지 접어 올려 붉어진 팔목을 응시하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잠깐 놀라서 그래.”
괜찮다는 내 대답에도 강태산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결국 나는 강태산을 밀어내며 셔츠 소매를 내리고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주워 입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강태산은 화를 참아내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러곤 짙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도헌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최근 두어 달 동안 겪을 리 없었던 일이라 조금 놀랐지만, 예전에는 이 정도 일은 일상이었으니까.
“몸은. 아픈 건. 괜찮아?”
그리곤 강태산이 내게 물었다. 한 음절, 한 음절 감정을 꾹 눌러가며. 방금 있었던 일이 아닌, 자신과 헤어진 이후의 내 삶을.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태산의 물음 앞에는 최선의 답이란 없었으니까, 내가 차도헌과 행복하든 불행하든 강태산에게는 어느 쪽의 대답이라도 다 오답일 테니까.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내 앞의 강태산을 차근히 눈에 담아냈다.
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는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강태산. 손목에는 묵직한 시계를 차고 작업화가 아닌 구두를 신은 강태산. 예전보다 냉철해진 눈빛에 내내 굳은 표정이 조금 낯설기까지 한 강태산.
하지만 그 낯선 눈빛은 차츰 모습을 감췄다. 내 앞에서, 강태산은 예전처럼 옅게 웃어 보였다. 투박하지만 다정함이 깃든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이제는 다 괜찮다며 다독이는 듯한 눈빛으로.
이윽고 강태산은 내게로 손을 뻗었다. 주저하듯 멈칫, 하며 굳어버린 손을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내 볼을 쓸었다.
“…….”
하지만 찰나의 순간 곧바로 손을 거둔 강태산은 내게서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갔고, 그렇게 차츰 멀어지는 강태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치미는 울음을 삼켜내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여전히 내겐 유독 반짝였던 그날의 강물이 보였다. 노을을 녹여낸 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면서, 서늘한 바람이 일으킨 물결에 넘실대면서.
강물은 차츰 내게서 멀어져갔다. 한때는 나를 푹 적실 것처럼 넘실대던 강물은, 이젠 내게서 아주 멀리멀리 떠나가고야 말았다.
***
“해영아, 왜 안 들어가고 있어.”
까마득 멀어진 정신을 차린 건,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에서였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거대한 인영을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니. 다급히 옷소매를 끌어당겨 허겁지겁 뺨을 닦아냈다. 차도헌에게 울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복도에서 강태산을 마주쳤다는 것까지 죄다 털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몸이 얼었잖아, 먼저 들어가 있지 그랬어.”
“그냥, 혼자 있기 어색해서.”
차도헌은 서늘한 공기에 차가워진 내 뺨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굳히고 섰다. 그런 그의 품 안에서 나는 괜찮다는 답을 늘어놓으며 어쩌면 안도 비슷한 것을 느끼기까지 했다. 강태산이 형질이 없는 베타라 다행이라고, 만약 조금이라도 체취가 남는 알파였다면 차도헌에게 들통 나고 말았을 테니까.
허리를 끌어안아 다정히 품 안으로 당겨 안은 차도헌은 이내 나를 데리고 미리 예약해 둔 룸을 향해 걸었다. 그를 따라 룸 안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최대한 괜찮은 척 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마치 이 복도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처럼….
“…해영아.”
차도헌의 부름에 나는 헐겁게 쥔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을 줍기 위해 몸을 아래로 숙이려는데 그보다도 더 빨리 새 스푼이 내 앞에 놓였다.
고급 디너 코스는 그 명성을 자랑하듯 테이블 위를 휘황찬란하게 채우고 있는데, 나는 도통 식사에 집중하질 못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 연기해도 지금 내 모습은 분명 차도헌에게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애처럼 보인다는 것을.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미처 떨쳐내지 못한 채 나는 느슨하게 스푼을 쥐었다. 이름 모를 화려한 음식을 얕게 떠올리곤 입가로 가져가 멍하니 씹어 삼키는 내 앞에서, 차도헌은 어느새 손바닥만 한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고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부드러운 천 위에 놓인 두 개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어느새 내 손에서 다시금 탈출을 시도한 식기는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차도헌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곤 내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잡아 끌어당기더니, 손등 위에 입맞춤을 남기곤 케이스 안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보석이 정 가운데에 박힌,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 마치 도해영의 네 번째 손가락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가락에 꼭 끼워진 채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해영아.”
그의 입술이 내 이름을 불렀다. 차도헌은 반지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기며, 다시금 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바보인 나라도 모를 리 없었다. 왼손 약지, 반지, 입맞춤, 그리고….
“나와 결혼해줄래?”
청혼.
차도헌이 내게 청혼했다, 차도헌이 내게….
돌연 손등 위로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끝도 없이 방울져 내렸다.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꿈꿔본 적은 없지만, 달콤한 청혼 앞에서 울어버린 내 모습이 정말 바보 같다는 것쯤은 알았다.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눈물에 푹 젖은 볼을 북북 문지르자 차도헌은 내 손을 끌어가 다잡으며 애써 걱정을 지워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리 와, 해영아.”
이내 차도헌은 두 무릎을 모두 꿇어앉곤 두 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 차도헌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이윽고 넓게 벌린 품속으로 몸을 숨기듯 안겨들자 내 허리를 끌어안는 차도헌의 팔뚝이 느껴졌다.
차도헌의 품에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우느라 열기가 몰린 눈가를 식혀주려는 듯 시원한 바람의 내음이 나기도 했고,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탁 트인 초원의 향긋한 풀내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 차도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욕심내어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의 체취라면 분명히 내 눈물을 멈추게 할 테니까, 가슴에 뿌듯이 차오르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등을 도닥이는 따스한 손길에 굳었던 내 몸이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품에 쏙 안긴 나를 심혈을 기울이며 어르고 달래는 차도헌의 심장 소리를 훔쳐 들으며 나는 조심스레 그의 심장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이윽고 손바닥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쿵, 쿵 울렸다. 마치 심장을 꺼내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손안에서 묵직하게 뛰어대는 선명한 박동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을 떼어냈다.
“거절당할까 봐 걱정돼서.”
차도헌은 낮게 웃으며 속삭이듯 농담을 던졌다. 내가 그를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태연히 내 앞에서 무섭다는 듯 연기를 해대는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내내 차도헌의 가슴팍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을 맞춰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차도헌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롯이 나만을 담은 짙은 색 눈동자에 두 볼 위로 다시금 열 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발갛게 열이 몰린 눈가를 쓸어주는 손길은 나를 향한 표정만큼 다정했고, 눈물에 푹 젖은 입술 위에 선사하는 입맞춤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줄곧 눈가를 적셨던 눈물은 멈춘 지 오래였다. 긴장이 풀려 밝아진 내 표정에 차도헌은 제 몫의 반지를 내게 쥐여주고는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오윤주와의 가짜 약혼반지가 끼워졌던 손가락은 자국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한 채였다.
아까 차도헌이 끼워줬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크기만 다른 반지를 꼭 쥔 채 다부진 손을 가볍게 그러잡았다. 그러곤 의미가 담긴 손가락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반지는 무리 없이 손가락을 통과하다가 툭 불거진 손마디에 걸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마저 주었다.
혹시나 아플까 싶어 차도헌의 표정을 봐가며 약간의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 손가락에 단단히 자리 잡은 반지에 차도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을 지은 채였다.
차도헌은 다시금 반지가 끼워진 내 손 위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촉, 촉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에 이제는 내 심장도 펑펑 뛰어댔다.
내게 꼭 맞는 반지였다. 언젠가 차도헌이 내게 남몰래 끼워줬던 헐거운 반지가 아닌, 오롯이 내게만 딱 들어맞는 반지.
그것도 차도헌과 같은 디자인을 한, 무려 청혼과 함께 받아버린 반지였다.
“…해영아.”
맞잡은 손에 나란히 끼워진 두 개의 반지를 줄곧 바라보며 멍해 있는 내 귓가에 문득 내 이름을 부르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아직 차도헌의 청혼에 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신은 늘 어려웠다. 적어도 지난날의 내 삶을 미루어 보았을 때 더욱 그랬다.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확신 근처에도 머무르지 못했으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차도헌은 제자리에서 빙빙 맴도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불확실의 경계에서 빠져나와 확신을 가질 때까지, 평생을 내 것이 아니라 부정하기에 급급했던 감정들을 돌이켜 이제 와 선명히 내 손에 쥐어볼 수 있도록.
“우느라 타이밍을 놓쳤어.”
내 변명에 차도헌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줄곧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던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들어 올려 도로 의자에 앉힌 차도헌은, 아까처럼 한쪽 무릎만 꿇은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확신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이 감정이, 차도헌을 향한 내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금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그러잡고 손등 위로 입맞춤을 남긴 차도헌은, 그 누구보다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다시금 청혼을 했다.
“사랑하는 도해영 씨. 나와 결혼해줄 겁니까?”
그런 차도헌의 청혼에, 나조차도 마음속 깊이 열망하며 바랐던 대답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응. 할래.”
달싹이는 입술 위로 뜨거운 키스가 퍼부어지는 동안, 파도처럼 밀려온 또 다른 감정이 금세 내 전신을 푹 적시기 시작했다.
그건 차도헌이 어쩌면 표현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만큼 나도 차도헌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강한 확신이었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조차도 차도헌은 나를 한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능숙한 한 손 운전 실력을 자랑하려는 듯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손등이고 손바닥이고 손끝이고 쉴 새 없이 입맞춤을 남기다가도, 신호가 걸릴 때마다 상체를 숙여 내 입술 위로 짙은 입맞춤을 남기며 행복에 겨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차도헌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생생하게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꿈은 아닌 듯했지만, 내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라 나는 몇 번이고 차도헌의 눈을 피해 허벅지를 꼬집어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 곁에서 운전 실력을 뽐내는 이 알파가 내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전히 내 손가락에는 반지가 꼼짝없이 끼워져 있는데도, 도망갈 일 없는 반지가 행여 빠질세라 나는 내내 손끝에 힘을 준 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암울한 사창가, 시궁창 같은 삶이라며 손가락질받던 나로서는 감히 바라지도 못할 일이었는데, 내 생에 이런 일은 전혀 없을 줄만 알았는데….
핸들을 여유롭게 움켜쥔 차도헌의 왼손 위로 캄캄한 밤하늘을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이 은은히 번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가로등이 빠른 속력에 휙휙 지나갈 때마다 차도헌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반지, 언제 준비했어?”
생각지도 못한 프러포즈를 받고 나니, 차도헌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차도헌은 내게 청혼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을 사랑해보도록 노력할게’라며 애매하게 대하기만 했었으니까.
언제 준비했냐는 물음에 차도헌은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미루었다. 그 반응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후회의 굴을 파기 시작했다.
차도헌은 같이 지내는 내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바빴다. 그렇게 바쁜데 반지를 맞추겠다고 직접 주얼리샵을 방문했을 리 있을까. 게다가 이런 반지쯤은 윤 비서님을 통해 언제든 구할 수 있었을 테고.
내내 현실감 없이 부풀었던 마음이 약간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웃겼다.
아까까지도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해있던 내가, 지금은 차도헌이 반지를 직접 샀느냐 아니냐를 따지며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속이 좁았지?
“말하면 놀랄 것 같은데.”
차라리 아무런 답도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대답을 시작했다. 마치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듯 조심스러운 기색을 담은 목소리에 나는 오히려 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네 손에 반지 끼워줬던 날 기억해?”
하지만 내 귀에 들린 건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차도헌은 돌연 내 손에 오윤주와의 약혼반지를 끼워줬던 날을 짚어내었다. 내가 잠든 틈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반지를 끼워줬던 그날을.
낮은 한숨에 이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매만지던 차도헌의 손길, 그리고 차갑게 얼어붙은 금속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부드럽게 끼워지던 그 낯선 촉감.
손가락 위를 겉도는 헐렁한 반지 위로 내려앉았던 차도헌의 입맞춤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그날부터 이미 갖고 있었어.”
“…….”
“오더는 더 전에 했고.”
이제야 나는 차도헌의 짙은 한숨의 의미를 깨닫고야 말았다. 내 어깨 위로 쏟아졌던 뜨거운 입맞춤도, 내게 들킬세라 남몰래 헐거운 반지를 끼울 수밖에 없었던 간절한 마음도. 그 모든 것들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내 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채우다 못해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을 부풀려댔다. 당장이라도 내뱉어질 것처럼 목구멍에 걸린 그 말이 울컥대며 혓바닥 위로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랑해.’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말해 본 적 없는 말을, 지금 이 순간 차도헌에게 미친 듯이 하고 싶어졌다.
고개를 돌려 차도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도 없이 펄펄 끓어오르다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조여오는 숨을 고르며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리저리 널뛰는 마음을 다스려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금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댔다.
도로 위를 쌩쌩 달리던 차가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된 빌리지의 입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주차를 마무리한 차도헌이 안전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 순간 차도헌의 페로몬이 훅 끼쳐왔다. 겨우 진정시킨 게 무색할 정도로 다시금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벨트가 풀리고 어느새 질끈 감은 내 눈꺼풀 위로 얕은 입맞춤을 남긴 차도헌을 향해, 참아왔던 감정이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사랑해.”
“…….”
“사랑해, 도헌 씨를.”
마구 뛰어대는 심장이 아픈 것과는 다르게 나는 담백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질끈 감은 두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는 차도헌의 표정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있었다.
언제나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응시하는 차도헌의 눈동자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내 눈동자에는 차도헌이 있겠지.
쪽,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짙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스치는 입술 위로 속삭이는 차도헌의 고백과 차 안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 거기에 정신없이 오르는 열기까지.
휘몰아치는 감정과 자극에 이러다가 온몸이 녹아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영아, 도해영….”
“으응….”
“사랑해, 해영아. 사랑해, 너를….”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대던 차도헌은 다시금 참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나는 페로몬에 흠뻑 젖은 채로 헐떡이며 차도헌의 품에 매달렸다. 어느새 나는 운전석으로 넘어가 차도헌의 허벅지 위에 앉아 고간을 바투 붙이며 쏟아지는 열렬한 키스에 보답하고 있었다.
한없이 부드럽다가도 거칠게 이어지는 키스에 허리가 차츰 뒤로 꺾여오기 시작했다. 나를 제 품 안으로 욱여넣겠다는 듯, 갈급하며 끌어안은 차도헌의 몸이 서서히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품에 폭 안겨 반쯤 뒤로 구겨지다시피 차도헌의 키스를 받아내던 내 몸이 안착한 곳은 핸들이었다. 이윽고 고요한 밤을 깨울 작정이라도 하듯 빵- 하며 우렁차게 클랙슨이 울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건 나뿐이었는지, 차도헌은 손으로 내 등을 단단히 받치며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가슴팍이 맞닿을 정도로 나를 당겨 안은 차도헌이 셔츠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곤 허리를 뭉근히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자극만으로도 나는 허리를 떨어대며 성기를 세웠다.
한참을 차 안에서 뒤섞이며 서로를 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열기에 차 유리가 얼마나 뿌옇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도헌도 나도 끝없이 서로를 갈구하며 사랑을 속삭일 뿐이었다.
클락션이 빵빵 울려대도 전혀 상관하지 않던 차도헌은 낮은 차 천장에 내 머리가 콩, 부딪히는 소리에 돌연 이성을 되찾았다. 다급히 나를 제 품 안으로 구겨 넣으며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싼 차도헌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안 되겠다. 올라가자.”
나는 격렬한 키스와 달아오른 페로몬에 취해 멍해진 얼굴로 달싹이는 차도헌의 입술을 쫓았다. 촉, 촉 애교를 부리듯 이어지는 키스는 여기서 당장 일을 벌여도 괜찮다는 나만의 언어였다.
애써 욕망을 떨쳐내듯 짙은 숨을 내쉰 차도헌은 이마 위에 쪽, 소리 내어 입맞춤을 남겼다. 이윽고 한쪽 팔뚝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더니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차에서 내렸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완벽히 안긴 내 두 다리가 허공 위에서 달랑달랑댔다. 현관에 도달해 도어락을 누르는 동안에도 차도헌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나를 단단히 안아 든 채였다.
이윽고 도어락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센서 등이 켜진 현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기대감에 나는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로 차도헌에게 내 몸을 온전히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로 향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차도헌이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욕조에 물을 채우며 내 옷을 죄다 뜯어 벗긴 차도헌은 어느새 따끈한 물이 넘칠 듯 찰랑대는 욕조에 내 몸을 퐁당 빠뜨리고는 이내 제 옷도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잘 잡힌 근육이 몸을 움직여 옷을 벗을 때마다 꿈틀대는 것을 구경하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내 드로어즈 한 장만이 아슬아슬히 걸린 차도헌의 고간을 줄곧 응시하며 내 안의 기대감이 마구 부풀도록 놔두었다.
차도헌의 좆이라면 이미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봐왔지만 내 앞에서 옷을 한 꺼풀씩 벗어 내리기 시작한 몸에 단 한 장 남은 천 조각의 존재는 미치도록 자극을 줄 수밖에 없었다.
기대감으로 물든 내 열렬한 시선에 차도헌은 풋, 웃음을 터트리며 드로어즈를 내리려던 손길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는 드로어즈 밴딩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나를 씹어 먹어버리겠다는 눈빛을 하고선 여유를 부려대는 차도헌을 보면서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걸까?
자고로 동화 속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뜨거운 태양이었다. 차도헌의 드로어즈를 벗겨내기 위해 나도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수증기가 폴폴 올라오는 따뜻한 욕조는 푹 잠긴 내 몸을 투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작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방 소리를 내며 일렁여대는 수면은 마치 야릇한 베일과도 같았다.
욕조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천천히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내었다. 찰랑이는 수면 아래로 분홍색으로 물든 비부가 아른거리며 보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한 손을 내려 비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찰방이는 소리에 이어, 따뜻한 물에 진득이 녹은 몸은 얕은 손짓에도 차츰 젖어가고 있었다.
힘겹게 수납된 차도헌의 성기에 단단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드로어즈를 찢을 듯이 불룩해진 것은 이윽고 자유를 찾았다.
탄탄한 장골에 걸려있던 드로어즈는 군살 없이 푹 팬 아랫배의 복근을 드러내며 내려가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까딱하다간 드로어즈를 찢어버릴 정도로 팽팽히 발기된 좆이 허공 위로 세차게 퉁겨져 나왔다.
단단하게 솟은 성기가 꺼떡이며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다시금 침을 꼴깍 삼켜내었다. 차도헌은 신이 온 신경을 기울여 조각한 듯 완벽한 몸을 움직이며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욕조에 들어오자마자 엉덩이를 쥐어 잡고 무지막지하게 박아 올리길 바랐으나 차도헌의 손이 향한 곳은 내 앙큼한 엉덩이가 아닌 바디워시였다.
팔뚝을 타고 흐를 만큼 흠뻑 바디워시를 짜낸 차도헌의 손을 보자니 약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겉보기에 정액과 비슷한 액체를 가득 들이부은 차도헌은 두 손을 가볍게 문지르며 거품을 내더니 이윽고 내 몸을 차근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단단한 손이 내 몸 위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세게 움켜쥐면 오히려 더욱 미끄러져 나가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한없이 끈적해지며 자극을 주는 애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마른 어깨를 지나 내 가슴을 가볍게 문지르며 엄지로 발딱 솟은 젖꼭지를 살짝 퉁긴 차도헌은 이후로도 자잘한 스팟들을 자극해대기 시작했다. 몸 구석구석을 애무받는 기분에 발끝까지 짜릿해지고 있었다.
상반신을 어루만지던 차도헌의 손이 이윽고 다시금 바디워시를 흠뻑 묻히고는 내 하반신을 향했을 땐, 몰려오는 기대감에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하지만 엉덩이와 좆은 마지막 순서라는 듯이, 차도헌은 나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는 발끝부터 부드럽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거품을 묻힌 손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톡 튀어나온 무릎뼈를 간지럽히고 허벅지를 느릿하게 쓸며 이윽고 고간을 향했을 때,
“하으….”
나는 그 자극만으로 사정을 해버리고야 말았다.
애처롭게 발발 떨어대며 좆물을 뿜어내는 좆을 응시하던 차도헌은 그대로 거품이 잔뜩 묻은 손으로 내 좆을 그러잡았다. 이윽고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한 손아귀가 점점 압력을 줄수록 질척하게 들러붙는 감각에 나는 허리를 들썩이며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싸지 않으려 발악하는 나와 기어코 싸게 만들려는 차도헌의 싸움에서 당연히 패자는 내 쪽이었다. 여전히 강한 악력으로 내 좆을 쥐고 흔들면서, 좆을 쥐지 않은 손으로 엉덩이골 사이로 부드럽게 비부를 매만지다 이윽고 꾹 다물린 구멍에 손가락을 꾹 물렸을 때 나는 할딱거리며 두 번째 사정을 했다.
내 엉덩이를 툭툭 쳐대는 성난 좆은 한 번도 마음껏 정액을 분출해대지 못한 것에 비해 나는 차도헌의 손놀림에 두 번이나 싸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바디워시를 쥐게 만들었다.
욕심을 내어 펌프를 꾹꾹 눌러 양손에 바디워시를 흠뻑 적셨다. 팔뚝을 타고 줄줄 흐르는 액체를 허겁지겁 손으로 훑으며 거품을 낼 생각도 없이 나는 곧바로 차도헌의 어깨로 손을 옮겼다.
다부진 근육의 결을 감상하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아래로 내려간 손이 단단한 가슴팍과 수려한 복근을 지나 아까부터 자꾸만 내 팔뚝을 꾹꾹 찔러오던 성난 좆에 닿았을 때, 나는 환하게 웃으며 차도헌의 좆을 감싸 쥐었다.
바디워시로 흠뻑 절인 미끈한 손바닥 사이로 뜨겁게 박동하는 좆이 자꾸만 이리저리 미끄러졌다. 의도치 않았는데도 절로 빠르게 움직여지는 손이 아주 제대로 자극을 주는 모양이었다. 탱탱하게 올라붙은 불알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다른 손으로는 세차게 왕복운동을 해대자 차도헌은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번처럼 얼굴에 진득하게 정액이 흩뿌려지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안에 차도헌의 좆을 한껏 집어넣고 싶었다. 차도헌의 몸 위에서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고, 내 배 속 안에 차도헌의 짙은 정액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돌연 멈추자 차도헌은 탄식하듯 짙은 숨을 내쉬었다.
“팔 아파.”
그런 차도헌에게 나는 거짓말을 해댔다. 누가 나더러 차도헌의 좆을 흔들라면 밤을 새고도 하루 종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겐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차도헌에게는 꽁꽁 숨긴 채였다.
내 말에 차도헌은 옅게 웃으며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내게 깜빡 속아버린 차도헌의 입맞춤을 받아내며 나는 시커먼 속내가 더더욱 시커멓게 되도록 방치해두었다.
내 안에서 차도헌이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내 계획이었다.
차도헌이 방심의 틈을 내보인 사이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손을 뒤로 뻗어 여전히 발기한 채로 번들거리는 좆을 가볍게 감싸 쥔 채, 그대로 나는 차도헌의 좆 위로 내려앉았다.
“하으, 아, 아….”
기대감에 빠끔이는 구멍에 귀두를 물린 후부터 일은 수월했다. 알파를 받아낼 준비를 마친 오메가의 몸은 그 무엇보다도 뜨겁고 말랑했으니까.
툭 불거진 귀두를 제대로 삼켜냈다는 것을 느낀 후로 나는 무게를 실어 차도헌의 좆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이리저리 헤집어대며 묵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내벽이 환호성을 지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 안에 좆이 먹혔다는 사실에 차도헌의 얼굴은 당황 그 자체였다. 이윽고 나는 허리를 앞뒤로 뭉근히 문지르며 차도헌의 굳은 입술 위로 촉촉 입을 맞췄다.
“후…, 해영아, 그만,”
내벽이 꾸물거리며 좆을 끊어낼 듯 압박하는 자극에 차도헌은 짙은 신음을 내쉬고 있었다. 허리를 단단히 붙잡는 대신 욕조가 부서져라 움켜쥔 손은, 분명 내 엉덩이를 붙잡고 미친 듯이 올려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바디워시에 미끌거리는 두 상체는 내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마찰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푹푹 내벽으로 파고드는 차도헌의 거대한 좆에, 단단한 복근 위에서 잔뜩 부벼지는 내 좆까지. 앞뒤로 오는 자극에 눈물이 절로 줄줄 샜다.
“응, 으응, 좋아, 너무 좋아-”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차도헌의 좆에 만족한 듯한 신음이 절로 새어나갔다. 이렇게 자꾸만 차도헌의 몸 위에서 미끄러지다가는 위험한 곳까지 좆이 밀고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더욱 아찔하게 흥분이 올라왔다.
좆이 드나들 때마다 내 배는 불룩해졌다가 홀쭉해지기를 반복했다. 차도헌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던 한 손을 내려 아랫배를 더듬거리며 매만지자, 줄곧 나를 뜨거운 눈으로 응시하던 차도헌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내 모습이 차도헌을 더욱 발정하게 하는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보라고 할 수밖에.
“흐으…, 도헌 씨 거, 여기까지 들어와….”
몸을 답삭 붙이며 불룩해진 내 아랫배를 차도헌의 복근 위로 뭉근히 부볐다. 뜨겁게 달아오른 차도헌의 귓불을 혀끝으로 살짝 핥아 올리며 나는 신음성이 섞인 목소리로 재차 속삭여댔다.
“배 속이, 으응, 가득 찬 것 같아….”
그 말이 차도헌의 눈을 제대로 돌아버리게 만들었는지, 조금만 더 오래 움켜쥐었다간 분명 박살이 났을 욕조에서 손을 뗀 차도헌은 그대로 내 엉덩이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몸짓은, 내가 위에서 허리를 들썩였던 것은 장난 축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격렬하고도 과격한 것이었다.
“하아, 아! 아앙, 앙, 앙-!”
차도헌의 격한 피스톤질에 일은 거친 물살이 온몸을 때리는 듯 철썩 철썩댔다. 끝도 없이 커져 가는 좆에 마구 눌리는 내벽은 느끼는 지점을 주먹으로 퍽퍽 때리는 것처럼 전율을 일게 했고,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절로 숨이 막히고 눈앞이 뿌옇게 달아오를 정도로 나는 쾌감 속에서 허우적댔다.
“아, 아윽, 앙! 아, 하으! 으, 응- 응!”
“사랑해, 해영아, 후, 사랑해-”
이성을 잃고 내 구멍에 좆을 미친 듯이 욱여넣으며 과격히 허릿짓을 해대던 차도헌은 정신없이 신음이 터져 나오는 입술 위로 키스를 퍼부어대더니, 돌연 내 안에서 성기를 쑥 빼내고는 핏줄이 두둑하게 오른 붉은 살덩이를 거칠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발딱 일으켜 차도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성을 반쯤 붙잡은 탓에 내 볼 위로 좆을 부벼대는 차도헌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애원했다.
“해영이 안에, 해영이 배 속에 싸주세요… 네?”
그 순간 차도헌의 눈빛에 스친 고민을 읽어냈다. 나는 차도헌의 품 안에 엉겨들며 날렵한 턱을 붙잡고 입술을 마구 붙여대며 섹스가 끝나면 꼭 약을 먹겠다는 약속을 해댔다.
돌연 몸이 거꾸로 뒤집혔다. 어느새 물이 다 빠진 욕조 바닥을 짚고 엎드린 나는 허리를 억세게 움켜쥔 손아귀에 이끌려 뒤로 질질 끌려갔다.
그 순간, 끝도 모르고 커지는 좆이 내 몸 안에 아예 박혀드는 것처럼 거칠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차도헌은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솟은 좆으로 내벽을 퍽퍽 쳐올리며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 아아! 앙, 앙-!”
엉덩이만 치켜든 채로 개처럼 박히기 시작하자 장기가 꽉 눌리면서 오는 야릇한 감각이 배 속 가득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좆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욕조 위로 물을 흩뿌리고 있었고, 절정에 달한 듯 차도헌의 몸짓이 전에 없이 격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차도헌이 내 몸 안에 토정하는 게 느껴졌다. 울컥울컥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진한 향내의 정액에 온몸이 물드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온몸이 녹아버려 그대로 차도헌에게 흠뻑 흡수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기나긴 토정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차도헌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 안에 깊이 박힌 차도헌의 좆이 끝없이 울컥대며 정액을 뿜어댈 때마다 나는 온몸을 발발 떨며 물을 싸댔다.
“도해영, 해영아….”
차도헌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줄곧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사정에 꽉 물린 구멍 사이로 질금대며 새어 나온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정을 하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은 차도헌 덕에 내 엉덩이에서는 정액으로 가득 찬 질척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힘없이 붙들린 채 흔들리고 있던 나는, 별안간 피스톤질을 멈춘 차도헌에 눈꺼풀을 깜박이며 쾌감에 겨운 눈물을 떨궈냈다. 이제 사정이 끝났는지 울컥이는 느낌도 사라진 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몸속에 가득 퍼지는 뜨거운 기운에 정액을 가득 담아 불룩해진 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전에 없이 크기를 키워가는 차도헌의 좆은 내 몸을 망가뜨릴 것마냥 부풀어만 가고 있었고, 이제는 정말 숨이 덜컥 막혀오기 시작해 나는 욕조 바닥을 주먹으로 마구 쳐대며 발버둥 쳤다.
차도헌은 그런 나를 더더욱 제 품 안으로 구겨 넣으며 몸 안으로 성기를 더욱 밀어 넣었다. 고통에 허우적대며 울부짖는 나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은 차도헌은,
“사랑해, 해영아.”
이윽고 내게 노팅을 하고야 말았다.
“해영아, 도해영, 사랑해, 사랑해….”
이성을 잃은 채 목덜미에 이를 박아대며 차도헌은 내 허리를 붙잡아 제 품 안에 구겨 넣었다.
“도헌, 하윽, 도헌 씨, 나, 나 아파, 흐으-!”
“해영아, 해영아….”
“제발, 윽, 나 좀 놔 줘… 차도헌, 제발….”
목구멍을 비집고 들끓는 비명을 내지르며 미끄러운 욕조 바닥을 붙잡으려 허우적댔다. 하지만 차도헌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버둥대는 내 몸짓은 거대한 품속에 가뿐히 먹혀들 뿐이었다.
알파에게 잡아먹히는 게 이런 느낌일까, 차도헌의 아래에 처박힌 채 나는 질끈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물을 뚝뚝 떨궈댔다.
내 안에 깊이 박힌 포악한 것이 점점 크기를 키워갈수록 사지가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차도헌이 나를 갈급하듯 끌어안을 때마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맹렬히 퍼지는 고통에 숨이 가빠졌다. 할딱대는 입술을 쫓으며 차도헌은 내 고개를 억세게 틀어쥔 채로 키스를 퍼부어댔다. 숨이 모자라 욱욱거리며 고개를 피하는 내게 벌을 내리듯 차도헌이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엉덩이를 세차게 내리쳤다.
얼얼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차도헌이 하라는 대로 착실하게 혀를 섞어주고 꽉 눌린 배 속이 터지지 않게 숨을 나눠 골랐다. 아까까지도 발악을 하던 내가 얌전해진 게 마음에 들었는지 차도헌은 퉁퉁 부어오른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듯 어루만지며 어깨 위로 쪽쪽 입술을 찍어댔다.
노팅시 알파의 성기는 씨를 쏟아내기 위해 최적화된 외형으로 변한다. 절대로 오메가의 몸에서 빠지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모양은 빠지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고 ‘더 집어넣는 행위’와는 별개의 것이었나 보다.
차도헌은 허리를 뭉근히 돌리며 추삽질을 시작했다. 느릿하게 뒤로 빠지는 몸짓에 잔뜩 좁아진 내벽이 득득득 긁히듯 마구잡이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허겁지겁 내 허리를 붙잡은 팔뚝을 마구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차라리 거기에서 오는 고통이 더 나았을까.
“잠, 잠깐, 도헌-, 으윽, 욱!”
빠져나간 깊이보다도 더, 전에 없이 깊게 내 안으로 욱여넣는 차도헌의 좆에 나는 신음을 내지르며 욕조 위로 얼굴을 문댄 채 엎어지고 말았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쾌감에 나는 허리를 벌벌 떨며 발정하고 있었다. 엉덩이만 곧추세운 자세로 엎어진 내 허리를 움켜쥔 차도헌은 안을 거칠게 짓뭉개다가도, 내가 죽을 듯이 헐떡이자 한쪽 손을 뻗어 더 이상 나올 것 없는 내 성기를 세차게 흔들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욕실을 웅웅 울리고 있었다. 예전에 업소에서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혼 없이 뱉어냈던 ‘나 지금 임신할 것 같아요’라는 멘트는 지금 이 순간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도헌의 정액을 가득 품어 불룩해진 아랫배가 단단하게 발기한 귀두에 눌려 자극될수록 찌릿 하며 올라오는 쾌감에 머리가 망가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배 속에서 치밀어오른 뜨거운 기운은 이윽고 좁은 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와 허벅지를 타고 끈적끈적하게 방울져 떨어졌다. 내가 싸고 있는 것과 차도헌이 싼 것이 한데 섞여 질척하게 볼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욕조 위로 세차게 물줄기를 뿜어대고 있는 성기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이제는 내 몸에 심장이 두 개가 생긴 것만 같았다. 하나는 원래 갖고 있는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미친 듯이 내 안에서 몸집을 불려간 채 쿵쿵 박동을 해대는 차도헌의 좆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차도헌의 목소리가 차츰 아득해졌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쾌감에 굴복한 채 나는 축축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제 세상에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 배 속에 가득 들어찬 차도헌의 성기. 내 몸을 터트릴 듯 힘차게 박동하는 차도헌의 것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정신이 든 건 내 몸에서 진하게 피어오르는 차도헌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얼마나 페로몬을 퍼부어댔으면, 내 몸에서는 더 이상 석류나 체리 냄새가 아닌 비가 내리는 숲속에서 초콜릿을 먹는 것 같은 낯선 체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희뿌연 시야에 보인 건 어쩌면 당연하게도, 차도헌이었다.
“해영아.”
차도헌이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내던진 채 내게 달려왔다. 내가 아플까 봐 꽉 껴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주변만 맴돌고 있는 차도헌을 보고 있자니 조금 시트콤 같기도 했다.
그것도 그런 것이, 정신을 잃은 틈으로 한 조각씩 기억이 나는 장면으로 보아 우리의 섹스는 단순히 욕조에서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퍼뜩 의식을 차릴 때마다 나는 각각 다른 장소에서 차도헌의 좆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무려 거실 소파에서, 부엌 테이블에서,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이 방 침대에서 내 배 속을 들쑤셔댔다.
뻐근한 팔을 겨우 움직여 포근한 거위 털 이불 위로 확인하듯 배를 더듬자, 정액으로 부풀었던 아랫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내 몸이 다 흡수해버린 건지 차도헌이 빼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깡마른 팔다리에 배만 볼록하게 나온 내 모습을 나름 걱정했었는지라 안심하며 손을 툭 떨궜다.
그런 나를 응시하는 차도헌의 얼굴은 짙은 죄책감에 물들어진 채였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통째로 되돌려 노팅을 했던 상황을 깡그리 없애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해영아.”
차도헌은 다시금 신음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곤 내 앞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사죄하듯이 고개를 숙인 채로, 내게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나는 딱 붙은 입술을 겨우 떼어가며 다 쉰 목소리로 차도헌을 말렸다. 차도헌의 모습이 마치 노팅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전부 다 없던 일로 하자는 것만 같아서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삐걱이는 몸으로 침대 아래로 반쯤 굴러 내려가다시피 하며 나는 무릎을 꿇은 차도헌의 앞에 마주 꿇어앉았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린 차도헌은 저처럼 무릎을 꿇은 나를 보곤 얼굴을 굳히며 조심스레 끌어당겨 안았다.
딱딱한 땅바닥과 별다르지 않은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된 나는 차도헌과 마주 본 채로 속닥였다.
“후회해?”
“해영아, 나는-”
“나한테 노팅한 거. 후회해?”
내 물음에 차도헌은 수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중히 대해도 모자랄 마당에….”
후회는 안 한다면서 짙은 후회가 담긴 목소리로 차도헌은 다시금 내게 사죄를 구했다.
“아픈 너한테 짐승 새끼처럼 했던 내가 너무-,”
“난 좋았는데.”
자책의 굴을 파는 차도헌의 말을 뚝 끊으며 나는 간단한 소감을 뱉었다. 내 말에 차도헌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 나는 말 그대로 그날 밤이 ‘좋았다’.
일회성으로 한번 쓰고 버려지고 마는 오메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평생 소유되는 오메가가 되는 것만 같아서 기뻤다. 노팅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차도헌과 오롯이 닿을 수 있어서 좋았고, 나를 끝없이 갈구하는 차도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을 뿐이었다.
“무릎은 프러포즈할 때만 꿇어도 족해.”
나는 차도헌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런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은 차도헌은 내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나를 눕힌 차도헌이 내 발등 위로 입맞춤을 남겼다. 경건한 것에 입을 맞추는 것마냥 입술을 내리누르는 차도헌에 절로 부끄러워져 붙잡힌 발을 쏙 빼내자, 차도헌은 반대쪽 발등 위에 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말했다.
“해영아.”
“응.”
“사랑해. …그 무엇보다도, 내 심장보다도 더.”
다시금 들려오는 차도헌의 고백이었다. 나는 울컥이며 뛰어대는 심장을 느끼며 차도헌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사랑해.”
살짝 벌어지는 입술 틈으로 작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고.
***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꼬박 이틀간 극우성 알파를 받아낸 바람에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 나를 위한 차도헌의 배려였지만, 내겐 깃털로 몸을 간지럽히는 것과 다름없는 스킨십이었다.
허리를 잘게 바르작대며 품에 파고드는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차도헌은 입술 위로 쪽, 쪽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기 시작했다. 달콤한 키스가 한없이 깊어지길 내심 바랐지만, 차도헌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드러난 이마 위로 도장을 찍듯 입맞춤을 꾹 내리누른 것을 마지막으로 입술을 아꼈다.
뚝 끊긴 뽀뽀 세례가 아쉬웠지만 가까이 붙은 단전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더 입술을 맞붙였다간 차도헌의 것이 제대로 본 모습을 드러낼 것임이 분명했다. 이유 있는 스킨십 중단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차도헌의 가슴팍을 앙, 깨물었다.
가슴팍 한 번 깨문 나는 차도헌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잇자국이 남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차도헌은 나를 죄다 짓씹어놓은 채였다. 설마 손가락도? 하는 생각에 두 손을 눈앞에 펼쳐 보자 빼곡히 자리한 붉은 자국들 사이에서 순간 잊고 있던 반지에 시선이 빼앗겨버렸다.
격한 섹스에도 빠지지 않고 굳건히 손가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지를 보자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다. 차도헌의 탄탄한 가슴팍 위에 보란 듯이 척 왼손을 얹어놓은 나는 밝은 햇살 아래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반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반지는 차도헌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듯 깔끔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둥근 테로 된 금빛 링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다이아가 꿍 박힌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장식 없이 심플한 디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볼수록 더 고급지고 예뻐 보였다.
내가 한참 반지만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차도헌은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이런 쪽에는 안목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들면 말해, 수백 개고 사들고 다시 청혼할 테니까.”
“안 돼!”
하지만 그 제안에 나는 펄럭이며 세차게 반기를 들어 올렸다. 누가 뺏어가기라도 한다는 마냥 오른손으로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감추듯이 감싸 쥐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거 아니면 안 돼. 이것만 평생 낄 거야, 죽을 때까지!”
그런 내 반응에 차도헌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가 했더니만, 차도헌은 나를 품에 가득 안아 넣으면서 ‘나도 너 아니면 안 돼.’라며 속삭였다. 그런 차도헌 덕에 두 볼 위로 따끈하게 열이 몰렸다.
웅웅, 웅-!
하지만 언제나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다. 세차게 울려대는 전화에 차도헌은 얼굴을 굳히며 수신 거절을 누르길 반복했지만, 전화를 거는 자와 거절하는 자의 싸움은,
띵동, 띵동-, 쾅쾅쾅!
직접 찾아온 이로 인해 더욱 극에 치닫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