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스한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갈대 무리, 바람에 유유히 물결이 이는 자그마한 연못과 시시각각 변모하는 구름의 모양.
차도헌이 출근한 지 세 시간가량이 지났다. 해열제를 한 알 먹은 후로는 내내 꼼짝도 않고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나름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는데,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내겐 한 폭의 그림 같아서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다.
아까까지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던 차는 다 식어버렸는지 머그 안에 고요히 담겨 있었다. 품 안에 안긴 쿠션과 몸을 감싸는 소파가 너무 포근해서,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이대로 꼼짝도 않고 누워있을 수 있었지만 내게는 차도헌이 내린 오늘의 임무가 있었다.
‘점심 거르지 말고 해열제도 잘 챙겨 먹어.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전화하고.’
현관을 나서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강조하던 차도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 미열은 해열제를 먹으면 단번에 나을 텐데, 그는 마치 내가 죽을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심을 거르기까지 한다면 그의 심기는 더 불편해질 게 분명했다. 오로지 차도헌을 위해 점심을 챙기는 내가 낯설었지만, 냉장고에서 꺼내온 점심 식사를 개봉할 적에는 이런 내 모습을 차도헌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도해영이 삼시 세끼를 꼬박 챙겨 먹을 줄이야.”
손에 들린 주황색 과채 주스는 생기를 가득 담은 채 병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귀찮으면 그냥 끼니를 굶었던 과거의 악습을 끊어내고, 간단하고도 건강한 방법으로 배를 채울 음식을 골랐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적막을 채우려 틀어놓은 TV에서는 이제 막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두 눈에 불을 켜고 차도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매체인 데다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내 신상을 공개하기까지 했지만 도리어 이번엔 또 무슨 헛소문을 퍼트릴지 궁금해지는 바람에 줄여둔 소리를 크게 키우며 화면에 집중했다.
[…첫 번째 소식입니다. 일주일 전 비공개로 진행되었던 차 그룹의 추모식에서 차도헌 대표이사가 보였던 폭력적인 모습이 논란이 되는 와중, 한 보도국에 따르면….]
“또 저 얘기하네.”
관전 모드로 화면에 집중하며 새콤한 맛이 나는 주스를 홀짝이기도 잠시, 나는 결국 리모컨을 붙잡곤 도로 소리를 작게 줄여버렸다. 이제 화면은 차도헌의 오랜 가족사까지 털어대며 그가 폭력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괴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어느새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갔다. 아마도 이건 속상한 마음과 비슷할 테다. 진실이 밝혀지기는커녕 마녀사냥만 줄곧 당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언론에 시달리는 차도헌이 나라는 오점 때문에 괜히 더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었으니까.
괜스레 울적해지는 기분에 옆에 놓인 커다란 쿠션을 잡아당겼다. 푹신한 쿠션을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채 숨을 들이쉬자,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듯 옅게 밴 차도헌의 페로몬이 숨결 사이로 섞여갔다. 나는 마치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듯 쿠션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모르겠지. TV에 비춰지는 냉혈한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걸. 차도헌은 결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대표이사가 아니라….
‘숨이 멎는 순간까지 너만을 사랑할게. 내 전부를 걸고 도해영, 너를 사랑할게.’
따뜻하고 다정한 알파일 뿐이라는 걸.
“…미쳤나 봐.”
발갛게 열이 오른 두 뺨이 나를 놀리듯 끝도 모르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세차게 손부채질을 해도 도저히 가라앉질 않는 열 기운은 꾹 눌러둔 차도헌의 고백마저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5년 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내게 설명해준 그는 그 당시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다. 누명과 의혹들을 벗어낼 의지조차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혐오했고, 그 과오가 이제 ‘도해영’을 불행하게 한다며 괴로워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누명을 오직 나를 위해 제자리로 바꿔놓겠다고 말했던 그는.
‘그땐 굳이 해명할 필요도, 나서서 결백을 입증할 필요도 없었어. 죽어버린 차서준처럼 어리석게 굴면서 언제 죽어도 아쉽지 않을 새끼처럼 살았어. 하지만….’
그 긴 시간을 손 놓고 보내던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도, 이제 와 그 모든 거짓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젠 지켜야 할 게 생겼어. 내 곁에서 평생, 아픔이 뭔지 슬픔이 어떤 건지 모를 만큼…,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전부 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자신의 곁에서 행복해질 나를 위해서라고….
내게 용서를 구하는 차도헌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비로소 지옥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차도헌을 만난 날부터 나는 제대로 숨 쉴 수 있었는데.
우리의 인연도, 우리의 각인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전부 다 차도헌이 내게 준 선물이었으니까.
다시금 두 뺨 위로 열이 올랐다. 속수무책으로 빨개지는 얼굴을 진정시키려 주스 병을 뺨에 대자 차가운 감촉이 열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차도헌이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차도헌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상대가 차도헌이라면, 이 감정이 사랑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노력해야 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차도헌의 페로몬을 잘 흡수해 몸을 정상 컨디션까지 올려보는 것, 그리고 차도헌을 진심으로 사랑해 메이팅을 성공시키는 것. 이쯤 되니 너무 고난이도의 문제만 남은 것만 같아 골이 지끈하게 울렸다.
저것들 중에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건강을 위해 점심을 챙겨 먹는 것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뺨을 식히던 주스 병을 움켜쥔 채 쉼 없이 들이키자 금세 반절이나 동나버렸다.
이 기세로 마저 점심을 다 해치우려 병 입구에 입술을 갖다 댄 순간, 짧게 스쳐 지나간 뉴스 화면에 불현듯 시선이 걸렸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어제저녁 오후 6시경, 불길은 건물 외부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익숙한 거리, 이제는 형체도 없이 까맣게 타버린 건물.
“…모란?”
한창 화재 사고 소식을 이야기하는 뉴스 화면 속에는, 분명 모란이 있었다, 까만 재밖에 남지 않은 저 건물은 분명 내가 수년간 지내온 모란이었다.
현장을 설명하는 취재 기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힘이 풀린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선명해질 틈조차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 어떡, 어떡해….”
달달 떨리는 입술 사이로 두려움에 물든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이미 다 타버린 재를 보는데도 활활 타오르는 열기는 피할 새도 없이 내 몸을 덮쳤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불길에 손끝 발끝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맞먹는 공포가 주체할 수 없이 몰려왔다. 귓가에는 불길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애들의 비명 소리가 낭자했고, 빠져나가기 위해 불에 그을린 나무 벽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듯 끼익거리는 괴상한 소음이 들렸다.
[현재 정확한 화재 원인을 수사 중에 있으며, 사건 발생시각 즈음 열다섯 명가량의 집단이 골목을 배회했다는 인근 건물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이번 화재 사고는 계획된 방화 범죄일 가능성을….]
사건을 알리는 기자의 목소리가 거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힘겹게 리모컨을 집어 다급히 음량 조절 버튼을 연달아 눌러대자 이내 화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연신 불에 탄 건물을 보여주는 뉴스 화면을 노려보며 나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내 온몸을 태우던 불길은 사라지고 지독하게 쓰디쓴 잿가루 냄새가 났다.
침착해져야만 했다. 이렇게 바닥에 엎어져서 두려움에 떤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었다. 나는 호흡을 천천히 고르며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모란은 입구에서부터 안쪽 룸까지 전부 다 동일한 나무 자재로 이어붙여 지어진 건물이다. 뉴스의 보도대로 건물 입구에서부터 불이 시작되었다면 쉽게 안쪽까지 불이 번졌을 거다.
대문을 받치는 나무 기둥이 무너지면 더 이상 입구로 달아날 수가 없다. 입구를 제외하곤 모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문은 욕탕의 반대쪽 출구와 이어지는 쪽문뿐인데, 예전에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욕탕에 물을 받아놓고 자살한 사건이 있은 후로 마담은 늘 영업이 끝나면 욕탕 문을 자물쇠로 잠가두곤 했다.
만약 화재가 났던 그날에도 욕탕 문을 잠가두었다면, 입구가 불에 탄 시점에서 이미 마담과 애들이 대피할 출구가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밤 장사의 사정이나 모란 건물을 잘 아는 고객이 불을 질렀을 가능성도 농후했지만 내 직감은 오롯이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 회장.”
그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벌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업소의 마담과 오메가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인 오후 6시에, 대피할 출구도 마땅치 않은 건물의 입구에 큰불을 낼만 한 사람은… 분명 황 회장일 터였다.
그리고 황 회장이 자신의 든든한 돈줄에 불을 지를 만한 이유는 근래 들어 단 하나뿐이었다.
차 그룹의 차도헌 대표이사를 꼬여낸 사창가 출신의 극우성 오메가, 도해영.
내 이름이 언론에 거론된 순간 뒷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세력을 자랑하던 황 파의 근간에 위협이 가해졌을 거다. 사창가 출신이라는 라벨을 달고 차 그룹과 단단히 엮여버렸으니, 차도헌을 깎아내리기에 혈안인 사람들은 내가 있었던 모란을 기어코 찾아낼 터였다.
아무리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하더라도 모란이 드러나는 순간 어둠 속에 숨어있던 황 파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 황 회장에게는 눈엣가시에 불과할 거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에는 차도헌과 윤 비서님, 단 두 개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 순간에 나는 어느 쪽에다 도움을 청해야 할까, 그보다도 내가 이 일에 손을 쓸 자격이나 있을까?
모란은 나 때문에 화를 입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 때문에 더더욱 위험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결국 이 일의 해결은 저 뒤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당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그들이 무사한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크게 다쳤거나 목숨을 잃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담과 모란의 오메가들을 지켜야 했다.
수없이 몰려드는 고민 끝에 내 선택은 윤 비서님이었다. 만약 내가 화재 사건을 운운하며 차도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는 황 파를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며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차도헌도 위험해지는 순간이 올 게 분명했다.
차도헌이 얼마나 힘이 있고 재력이 있는지를 떠나서, 그들은 인간만도 못한 자들이었다. 머리를 굴려 수를 쓰기보다는 칼로 배를 먼저 찌르고 보는 쪽이었다.
‘더 빨리, 더 많이 죽이는 놈이 가장 센 놈.’
황 회장을 비롯한 황 파의 조직원들을 대표하는 구호와도 같은 말이었다.
실례라는 걸 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장 이런 것밖엔 없었다.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꾹 누르자, 짧은 신호 대기음 끝에 윤 비서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도해영 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해요, 윤 비서님.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저 좀 어디로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도헌 씨 몰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지금 위험한 상황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오는 윤 비서님의 목소리에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다른 일이 있다며 윤 비서님을 속이고 모란 근처에 내려서 몰래 움직여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다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지….
머리가 터지게 고민하는 동안 재차 내 이름을 부르며 위급 상황인지를 묻는 윤 비서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해영 님, 혹시 지금 위급 상황이시면 대답하지 마시고 잠시만 대기해주십시오. 당장 위치 추적해서 가겠습니다.
“아뇨, 아뇨! 저 지금 도헌 씨 집에 안전히 잘 있어요. 하나도 안 위험해요. 그냥, 그냥 잠깐 확인만, 불이…, 모란에 불이 났대서, 제가 가서 괜찮은지 확인만 해보면 안 될까요?”
나는 최대한 명랑하고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아무 일도 아닌 척 연기를 했다. 어차피 윤 비서님은 차도헌에게 무엇이든 다 보고할 거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금방 들통 날 게 분명하니까, 차라리 사실대로 얘기하고 부탁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안 내리고 멀리서 보기만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너무 걱정이 돼서… 잠깐만 가서 제가-”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분명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걸 알았는데도 완연한 거절 앞에 나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나도 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아무 데나 쏘다닐 수 없다는 거. 내 행동이 차도헌을 까내리려고 눈에 불을 켠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나 같은 거 하나 때문에 애먼 사람들이 위험에 놓였다는 죄책감과 결국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송곳처럼 가슴을 푹푹 찔러댔다.
“바보 같은 부탁 해서 죄송해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
“그리고 도헌 씨한테도 제가 윤 비서님께 이런 거 부탁드린 거… 비밀로 해주세요. …분명 걱정할 테니까.”
울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바보처럼 또다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꾹 누르자 팔뚝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통화가 끊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의 정적 끝에 돌연 윤 비서님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새어 나왔다. 다급히 푹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곤 핸드폰을 집어 들어 귀에 갖다 댔다.
―그럼, 제가 도해영 님 대신해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모란에 들러 화재 사고에 관해 정보를 수집한 후에 제가 댁으로 찾아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보고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 정말요?”
―우선 이사님께는 도해영 님을 위한 여분의 해열제와 과일을 구매해 방문하는 것으로 말씀드려놓겠습니다. 모란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사님께 보고드릴 예정이니, 당분간은 마음 놓고 계시기 바랍니다.
“네, 네, 정말 감사해요, 윤 비서님, 정말….”
분명 내 부탁은 윤 비서님에게 큰 리스크일 터였다. 괜히 나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몇 번을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서야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열감이 느껴졌다.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온몸이 무거웠고 손마디가 잔뜩 부은 느낌도 들었다.
얼굴에 찬물을 연신 끼얹어 세수를 하니 후끈대는 기운은 좀 잦아들었는데 이번에는 오한이 나를 덮쳤다. 해열제 한 알을 목구멍에 욱여넣고 소파에 눕자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는 와중에도 나는 리모컨을 들어 뉴스 채널을 찾았다. 혹시나 모란에 대한 또 다른 보도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결국 TV를 껐다. 계속 정신을 붙들고 있다가는 몸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몸을 둥그렇게 말아 눕자 굳게 눈꺼풀이 감겼다. 하염없이 흔들리던 창밖의 갈대밭마저도 고요하게 멈춘 채였다.
***
해열제 때문인지 푹 잠이 든 것 같았다. 윤 비서님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깊이 잠들어버린 내가 한심하기도 잠시, 부엌에서부터 나는 달그락대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켜 소파에서 튕겨지듯 달려나갔다.
혹시 일찍 퇴근한 차도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엌에는 새까만 수트를 차려입은 윤 비서님이 있었다.
그대로 부엌으로 내달렸다. 중간에 넘어질 뻔한 나를 보며 윤 비서님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었지만 나는 고꾸라지기 직전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당장 대리석에 부딪혀 머리가 깨질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내겐 중요치 않았다. 푹 잠긴 목에서 새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윤 비서님, 어떻게 됐어요? 다들 괜찮대요?”
내 물음에 윤 비서님은 차가운 물 한 잔을 따라주며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마담과 오메가 10명 모두 다 무사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불이 내부에 다 번지기 전에 무너진 외벽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옆 업소에 물어보니 지금은 영업을 중단하고 다른 지역에서 잠시 대피 중이라고 하니, 많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대답에 나는 녹아내리듯이 테이블에 이마를 대며 엎어졌다. 걱정과 불안에 쿵쿵 뛰어대며 조여들던 심장이 확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윤 비서님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물컵을 내 쪽으로 밀며 마시기를 권했다. 그제야 내가 줄곧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컵을 집어 천천히 물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퉁퉁 부어버린 목구멍에 차가운 물이 넘어갈 때마다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몇 모금 마시다 포기하며 컵을 내려놓곤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혹시 누가 했는지도 알고 계세요?”
“예상하고 계셨겠지만, 황 파에서 살해를 위해 낸 화재인 것 같습니다.”
황 회장, 예상대로 불을 지른 사람은 황 회장이었다.
“인근의 업자들로부터 최근 황 파에서 모란과의 계약을 해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모란에 배치된 조직원들이 철수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배후에 거대 조직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언론에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 증거를 제대로 지우기 위해서였겠지, 아무리 수입이 좋다지만 모란을 계속 껴안고 있으면 분명히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앞으로도 황 회장은 수차례 위협을 가하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하니.
긴장이 풀려 테이블 위로 축 처져 있는데, 그런 내게 윤 비서님은 어렵게 운을 뗐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윤 비서님이 주저하듯 건넨 것은 반 이상이 타버린 누런 종이 띠였다. 영문도 모른 채 받아들자 종이 쪼가리에 대한 윤 비서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만… 도해영 님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제 이름이요?”
혹시 타다 만 업소 매뉴얼 페이지나 각서를 가져온 것 아닌가 싶어서 별다른 의심 없이 재가 후두둑 떨어지는 종이 쪼가리를 뒤집었다.
[19xx年 12月 30日 都瀣泳(도해영)]
하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매뉴얼 페이지도 아니고 조직에 얽매인 각서도 아니었다. 그건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날짜 옆에 내 이름이 적힌, 도저히 정체를 모를 낡은 종잇조각이었다.
종이는 무척이나 낡아 보였다. 누렇게 진 얼룩과 꼬깃꼬깃하게 접힌 자국, 그리고 직접 펜으로 적은 듯 꾹꾹 눌러쓴 흔적까지.
길쭉한 띠처럼 잘린 종이는 나로선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답답함에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모란에서 발견된 낡은 종이, 정갈한 필체로 나란히 적힌 낯선 날짜와 내 이름. 정작 이름의 당사자인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이거… 대체 뭐예요?”
당황스러움을 채 씻겨내지 못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차라리 시간당 몸값이 적힌 매뉴얼 페이지나 빚 액수가 적힌 각서였다면 이렇게까지 심란할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윤 비서님마저도 과묵히 고개를 저으며 종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답을 알려주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내겐 이 종이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낼 시간조차 없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곧장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겨 잠옷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나를 응시하는 윤 비서님에게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부디, 내가 이것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는 차도헌에게 이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해영아, 몸은 좀 어때.”
약속처럼 일찍 귀가한 차도헌은 윤 비서님의 깍듯한 인사를 그대로 무시한 채 곧장 내게로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였으면 엄청 무안했을 텐데 윤 비서님은 익숙하다는 듯이 싱크대로 걸어가 아까 하던 일을 마저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같은 공간에 윤 비서님이 같이 있는데도 차도헌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해대며 내 상태를 살폈다.
“…열이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차도헌은 내 몸을 단단히 품에 가둬 안은 채 이마를 꼼꼼히 짚었다. 열이 오른 내 뒷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쥐며 나를 내려다보는 차도헌에게 부러 괜찮은 척 밝은 목소리를 냈다.
“방금 일어나서 그래.”
“점심 약 먹고 계속 잤어?”
“응. 원래 자다가 일어나면 열이 좀 오르잖아. 괜찮아.”
나는 웃으며 차도헌을 올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단 한시도 웃을 일이라곤 없었던 나는 완벽에 가까운 미소를 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차도헌은 걱정스러움에 굳어졌던 표정을 풀곤 내 이마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차도헌이 선사한 포근한 입맞춤은 냉장고 문이 탁, 닫히는 소리에야 끝났다.
“말씀하신 대로 해열제와 여분 상비약은 구급함에 채워 넣었고, 과일은 다 세척한 후 정리해 넣었습니다, 이사님.”
“수고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바로 퇴근하고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이사님, 도해영 님.”
차도헌과 내 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윤 비서님은 몸에 두르고 있던 에이프런을 풀어 가지런히 갰다. 이윽고 서류 가방을 집어 들어 조용히 퇴장하는 윤 비서님과 바통터치를 하듯 차도헌이 싱크대로 걸어가 손을 씻었다.
그런 차도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재빨리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는 종이를 더 안쪽으로 꾹 밀어 넣으며 나는 부디 이 종이의 정체가 내가 불안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길 바랐다.
차도헌이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다이닝 테이블로 걸어왔다. 나는 불안감에 깃든 표정을 숨기며 애써 웃어 보였다. 이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커다란 쇼핑백 손을 쑥 집어넣은 차도헌의 손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용기가 들려 있었다.
뚜껑을 열자 색색의 두툼한 회가 얹어진 초밥이 나왔다. 쇼핑백 안에서 연달아 세 개의 용기를 더 꺼낸 차도헌은 내 앞쪽으로 용기를 죄다 몰아두고는 앞 접시와 젓가락을 가져왔다.
“저번에 보니까 잘 먹는 것 같아서.”
“…너무 많아.”
“다 먹으라고 안 해. 이 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거, 맛있는 거만 골라 먹어.”
차도헌이 내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그러곤 큼직한 레몬 조각을 썰어 넣은 얼음 잔에 탄산수를 부어 앞에 놓아주었다.
식사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먹기는커녕 가만히 젓가락만 쥐고 있는 내 모습에 차도헌의 얼굴에 다시금 걱정이 몰려들었다.
이내 그는 젓가락을 집어 들어 살점으로 도톰한 매듭을 지은 사요리부터 시작해서 윤기가 도는 샤코까지 종류별로 내 앞 접시를 가득 채워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간신히 목소리를 내며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여 초밥을 하나 집었다. 먹음직스러운 한 점을 집어 들었지만, 꾹 닫힌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젓가락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초밥이 아니라 무거운 돌덩이를 집은 것처럼 힘겨웠다. 툭, 툭 자꾸만 초밥을 접시에 떨어트리는 내 모습에 차도헌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일순간 울음에 꽉 부은 목구멍이 단단하게 부어오른 것 같았다. 차츰 좁아지기 시작한 기도에 숨이 막혀오는 것도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새된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불분명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불에 타버린 모란도, 호주머니 안에서 계속 무거워져만 가는 얄팍한 종이도, 온몸을 압도하는 고통스러운 열감도.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은 전부 내가 감당 불가능한 영역에 놓인 것들이었다.
나는 차도헌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상태가 엉망이 된 건 오로지 열 기운 때문이라고, 빌어먹을 해열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나 아픈 것 같아….”
접시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번 터진 눈물은 닦을 새도 없이 줄줄 새어 나왔다. 저지할 수 없이 훅 오른 열기가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태우는 기분이 들었고, 두통에 시달리며 욱신거리던 뇌가 돌연 마비가 된 것처럼 저릿저릿하게 멈춰버렸다.
“도헌 씨가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약도 다 먹고 밥도 먹었는데….”
나는 테이블에 고꾸라져 이마를 댄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누가 목을 억세게 조르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안아 들며 차도헌은 눈물로 축축한 뺨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괜찮아, 해영아. 괜찮아….”
차도헌의 목에 매달리며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모자란 숨에 헐떡이다가도 타는 듯 고통스러운 심장을 움켜잡고 악을 질렀다.
어느새 침실로 걸어간 차도헌은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더니 협탁에 올려둔 억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버둥대는 나를 단단히 붙잡아 입 안에 억제제 두 알을 욱여넣고 내 등을 도닥이며 삼키라고 했다.
“삼켜, 응? 해영아, 이거 먹어야 해.”
다정하게 어르는 목소리에도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한 억제제에서 역한 냄새가 치밀었다.
다시금 욱 하며 토기를 삼켜내자 차도헌은 결국 내 턱 아래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힘겹게 약을 뱉어내는 내게 그것마저도 잘했다는 듯이 등을 토닥이며 입가를 조심스럽게 티슈로 닦아내고는 이내 약통을 열어 새 억제제를 꺼내 들었다.
“싫어, 싫어!”
약통에서 퍼져 나오는 악취에 차도헌의 팔을 밀치듯이 쳐버리고야 말았다. 이내 바닥 위로 떨어진 약통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도헌의 목을 끌어안으며 훌쩍였다.
“흐으… 안 먹을래, 먹기 싫어….”
식은땀에 젖어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도헌은 드러난 이마 위로 부드럽게 입술을 찍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안전하게 히트 보내려면―”
“약 먹기 싫어, 그냥 여기에다가, 도헌 씨가 박아주면 되잖아….”
차도헌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겨 엉덩이 뒤로 옮겼다. 어느새 푹 젖어버린 비부에 붙잡은 손을 어설프게 부비며 나는 눈물을 뚝 떨궜다.
“약 말고, 응? 나랑… 나랑 하자.”
“해영아, 너 아직 위험해서 그래.”
나와 절대로 섹스를 안 할 거라며 완강하게 구는 차도헌이 너무 미웠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괴로운데, 당장 이렇게 좋은 향을 풍겨대면서 자꾸만 약을 먹이려는 차도헌이 너무 미웠다.
진득한 페로몬을 좇아 차도헌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가쁘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차도헌의 체취로 가득 차오를 때까지 들숨만 쉬어대자 제대로 숨을 고르라는 듯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이어졌다.
허리를 옴짝거리며 차도헌의 목덜미에 허겁지겁 입술을 찍었다. 매끈한 살결을 욕심내어 한가득 깨물었다가 붉어진 자국 위로 혀를 빼 싹싹 핥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 손으로는 셔츠 단추를 풀고 다른 손으로는 뜨겁게 부어오른 것 같은 비부를 꾹꾹 누르며 끙끙댔다.
쇄골에 못 박혔던 입술을 아래로 미끄러트려 큼직하게 붙은 가슴 근육을 물고 빨았다. 이윽고 나를 저지하며 양손을 단단히 붙잡는 손에 나는 힘줄이 돋은 팔뚝 위로 잘게 입을 맞추며 차도헌을 올려다보았다.
“나 괜찮아, 나 정말 하나도 안 아파….”
“…….”
간절한 애원과 동시에 훅 터진 내 페로몬은 당장 나 자신도 맡을 수 있을 만큼 진하디진한 석류 향을 띠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새콤하고 달달한 향내에 차도헌은 얼굴을 굳힌 채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해 주세요… 네…?”
작게 달싹이며 속삭이는 입술 위로, 차도헌은 참았던 욕망을 터트리듯 거친 키스를 퍼부어댔다. 내내 거두었던 페로몬을 폭발하듯이 방출한 차도헌의 체취에 허덕이며 나는 숨 가쁘게 입술을 맞부딪혔다.
한없이 부드럽다가도 거칠기를 반복하는 깊은 키스에 타액이 섞이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가 혀가 녹아서 뭉개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만큼 달고도 뜨거운 키스였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내 몸의 모든 구멍은 이미 흐물흐물하게 녹아서 차도헌의 성기를 전부 받아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차도헌은 내 고개를 단단히 붙든 채 입술만 쪽쪽 빨아대고 있었다. 울컥 치미는 답답함에 차도헌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어 떼어내고는 입고 있던 파자마 윗도리를 벗어버렸다.
툭, 옷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그대로 엉덩이를 들어 올려 헐렁한 파자마 바지와 드로어즈를 동시에 벗었다. 뒤늦게 차도헌이 내 팔뚝을 붙잡으며 저지했지만 걸림 없이 쑥 벗겨진 덕분에 금방 내 몸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온전한 나체가 되었다.
“도헌 씨, 빨리이….”
흥분에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만큼 절로 발음이 새어나갔다. 몸에 힘이 빠져 뒤로 툭 누워버린 자세에서도 나는 발을 뻗어 툭 불거진 차도헌의 앞섶을 뭉근히 부벼댔다.
매끈한 수트의 옷감 너머로 힘겹게 수납된 좆이 내 발짓에 차츰 두둑해져 갔다. 단단하게 열이 몰린 뿌리 부근부터 툭 불거진 귀두까지 천천히 문지르길 반복하자 발바닥에 차도헌의 발기한 좆이 선명히 느껴졌다.
집요하게 발을 놀리며 귀두 틈 사이를 꾹꾹 눌러대자 쿠퍼액이 새어 나왔는지 발끝에 젖은 느낌이 들었다. 짙은 색 원단만 아니었어도 둥그렇게 표시가 났을 거란 생각에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해영아. 그만.”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내가 부러질까 두려워 내내 무력을 사용하지 않던 차도헌이 결국 두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는 불끈 오기가 들어 벌린 다리 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어느새 다리 사이가 시트를 푹 적실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흐르는 액이 아까워 손바닥으로 죄다 훔쳐 모아 엉덩이골 사이로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곤 엉덩이 한 짝을 잡아당겨 벌리곤 애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구멍을 노출시켰다. 중지와 약지를 모아 기대감에 오물대는 입구를 느릿하게 문지르자 다시금 울컥, 하며 손바닥이 푹 젖어 들었다.
“도헌 씨, 섰잖아, 응? 나는 다 젖었구….”
두 볼이 상기되고 잇새로 나른한 숨소리가 새어나갔다. 속삭이며 유혹하는 내 목소리에 차도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삽입은 안 돼, 해영아.”
“그럼 다른 건 해 줄 거야?”
내 물음에 차도헌이 미간을 구겼다. ‘다른 거’라니, 심각해진 얼굴이 내게 되묻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설명보다 행동이 훨씬 더 빠르다. 나는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차도헌의 고간에 얼굴을 묻었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 앞섶을 젖히자 짙은 체향이 터졌다. 드로어즈 밴딩에 매달리듯 붙잡아 내리자 팔뚝만 한 좆이 퉁겨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절로 뿌듯해지고 든든해지는 차도헌의 잘생긴 성기를 잠시간 훑어보다 나는 그대로 번들대는 귀두를 입 안 가득 삼켰다.
“나 잘해, 해봐서 알잖아.”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좆 때문에 어물거리며 말을 뱉었다. 춥, 춥 사탕 빠는 소리를 내며 버거운 크기의 좆을 핥아대면서도 혹시나 차도헌이 밀어낼까 봐 필사적으로 허리를 끌어안아 매달렸다.
역시나 차도헌은 안간힘을 써가며 허리를 붙든 나를 가뿐히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자꾸 나를 거부하는 차도헌에 눈물이 울컥 터졌다.
늘 나만 발정 난 짐승이고 자기는 우아하고 고고한 극우성 알파처럼 굴어대는 차도헌이 미웠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나는데 가슴이 저릿해질 만큼 아픈 기분이 제일 싫었다.
두 눈을 깜박여 굵은 눈물을 뚝 떨궜다. 홀랑 옷을 벗어버린 건 난데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수치심에 내 허리를 끌어안은 차도헌의 어깨를 뒤로 확 밀었다.
그런데, 오히려 밀린 건 나였다.
거칠게 시트 위로 눕혀진 몸 위로 차도헌의 고개가 따라붙었다. 목덜미를 훑고 내려간 입술이 이내 꼿꼿이 솟은 유두를 살살 달래며 핥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 안아 제 쪽으로 당기면서 동시에 남은 셔츠 단추를 뜯어 벗어버렸다.
일순간 몰아치는 자극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금까지도 나를 밀어내던 차도헌이 도리어 갈급하듯 내 몸을 탐하고 있었다.
온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도 못 참겠다는 듯 과격하게 살결을 씹어대며 잇자국을 남기는 행위에 시트를 한가득 움켜쥐었다.
나 혼자만 몸이 달아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차도헌도 그만큼 내 몸을 원한다는 그 사실 하나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가슴을 물고 빨아대며 애무를 하던 차도헌의 혀가 배 위를 유영하며 내려가더니 이내 골반에 자리를 잡았다. 톡 불거진 골반 뼈를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이 애태우듯 느긋하게 중심부로 향하자 나는 허리를 움찔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차도헌의 입속으로 내 좆이 형체를 숨겼다. 단단한 입천장에 귀두가 부벼지고 입 안쪽 살로 뜨겁게 조여오는 자극에 나는 허리를 발발 떨어대며 사정을 했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입에 넣자마자 싸버린 내가 귀엽다는 듯이 차도헌은 내 정액을 꿀꺽 삼켰다.
나는 그대로 차도헌의 목을 끌어안아 입술을 부딪쳤다. 진한 내음이 느껴지는 입 안을 꼼꼼히 핥으며 질척하게 혀를 섞자 자연스럽게 차도헌의 두터운 허벅지 위에 올라탄 체위가 됐다.
기대감에 빠끔대는 구멍 위로 차도헌의 발기한 좆이 툭, 툭 문질러졌다. 키스에 푹 빠져 흐응, 응 신음을 내면서도 나는 손을 뻗어 좆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다물린 구멍 위로 귀두를 살짝 물려 그대로 내려앉았다, 아니, 내려앉으려 했다.
“도해영. 혼나, 아주.”
차도헌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위로 들어 올려 삽입을 피했다. 좆머리가 살짝 스쳤을 뿐인데 다시금 구멍에선 애액이 줄줄 나왔다.
나를 다시금 침대 위에 눕힌 차도헌은 언제 사정을 했냐는 듯 발기한 내 좆을 그러잡았다. 이윽고 적당한 악력으로 좆을 감싼 손아귀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당장 정액보다도 엉덩이 사이에서 애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묽은 쿠퍼액이 축축하게 젖은 소리를 내는 만큼 차도헌의 손길은 더욱 빨라지는데, 짜릿한 사정감보다도 허전한 아쉬움이 뱃속에 가득 차올랐다.
“으, 으으응, 응!”
그 순간 빠듯하게 아래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다급히 고개를 내려 아래를 살피자 기대하던 좆이 아닌 차도헌의 손가락 두 개가 물려 있었다.
물론 차도헌의 손가락이 일반 열성 알파들의 성기보다도 더 굵고 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 이거보다 더 크고 굵고 뜨겁고 꿈틀거리는, 차도헌의 좆을 원했다.
“싫, 으응! 시러- 아, 아흑!”
툭 튀어나온 뼈마디가 내벽을 꾹 누르며 들어오는 느낌에 허리를 퉁기며 신음이 쏟아졌다. 천천히 안을 누비던 손가락은 이내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팟을 제대로 누르며 자극하는 손길에 이어 차도헌은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꾹 눌렀다. 사정감이 몰려오면서도 동시에 드는 배뇨감에 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발악을 했다.
“흐으, 나, 나 쌀 것 같아, 으응! 응! 제, 발! 안, 하으, 으, 으으응-!”
결국 맑은 물을 싸지르며 손가락만으로 가버리고야 말았다. 흥건하게 젖어버린 배 위를 느릿하게 문지르다가 다시금 방광을 꽉 압박하는 손길에 내 좆에서 미처 내보내지 못한 물이 쪼르르… 소리를 내며 새어 나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나는 두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궜다. 쾌감에 절여진 몸은 그 여운에 이어 따끔따끔한 고통마저 느끼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채 색색 숨을 내쉬었다.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차도헌의 거대한 상체는 나를 안아주려 몸을 숙인 채였다.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짙은 입맞춤을 남기는 차도헌의 몸짓에 묵직하게 발기한 성기가 손에 툭, 닿았다. 나는 본능처럼 힘없는 손길로 힘줄이 불룩 솟은 기둥을 문질러댔다. 흥분에 낮은 한숨을 내쉬며 차도헌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내 손에 가볍게 좆질을 했다.
“…도헌 씨 거로…, 해 줘….”
열에 달뜬 입술로 힘겹게 웅얼거리자 차도헌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았다. 어금니를 악 다물며 삽입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윽고 새로운 체위로 이어졌다.
벌려진 허벅지를 손으로 억세게 모아 쥔 차도헌은 그대로 비좁은 허벅지 틈 사이로 귀두를 물렸다. 뜨거운 양물이 살갗을 파고드는 생경한 기분에 새된 신음이 새어나갔다.
“아, 하으, 아, 앙-”
두툼한 귀두가 먼저 허벅지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 이윽고 탄탄하게 올라붙은 불알이 내 엉덩이에 부딪힐 때까지 차도헌은 깊게 허릿짓을 했다.
두 눈을 감고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여대던 차도헌은 이내 고기 치는 소리가 날 만큼 빠르고 강하게 박아 넣기 시작했다. 두 발목을 모아 쥐어 한쪽 어깨에 올려놓은 채 허리 힘으로만 탁탁 박아 넣을 때마다 상반신을 덮은 완벽한 근육이 절경처럼 불끈댔다.
불끈하게 핏줄이 올라선 흉흉한 좆이 허벅지 사이를 드나드는 광경만으로도 나는 울컥, 정액을 쏟아냈다.
배 위에 질척하게 싸댄 내 정액을 손으로 훔친 차도헌은 이내 내벽 안으로 중지를 깊게 밀어 넣었다. 내 허벅지를 뚫어대는 좆과 스팟을 꾹꾹 눌러대는 손가락 덕에 좆이 두 개 달린 차도헌과 섹스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상상에 나는 다시금 쪼르르 물을 쌌다.
나는 이미 수도 없이 갔는데 차도헌은 여전히 사정하지 않은 채였다. 같이 가자며 내가 사정하지 못하도록 귀두를 틀어막지도 않고, 오히려 쌀 수 있을 때까지 마음껏 싸라는 듯 내 좆을 방치해뒀다.
아까부터 줄곧 쫄쫄 물을 싸대는 내 좆 위로 허벅지를 드나든 차도헌의 좆이 제대로 문질러졌다. 내내 뒤로만 오는 자극에 사정하길 반복했던 내 좆은 짜릿할 만큼 묵직하게 눌러대며 부벼지는 차도헌의 좆에 사정을 참지 못했다.
결국 나는 물이 새는 내 앞을 움켜쥐고 끅끅대며 울었다. 오히려 앞을 막아 쥔 내 손을 떼어내게 한 건 차도헌이었다. 허벅지를 모아 쥔 손을 떼곤 아까처럼 중지로 스팟을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아랫배를 꾹 눌러대는 행위에 나는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싫어, 하으응, 응! 으흑, 이거 싫어어-”
미친 듯이 몰아치는 쾌감에 이어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배뇨감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까지 튀기 시작하는 말간 물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이제는 너무 축축해서 몸이 부딪힐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났고 엉덩이 사이에서도 줄줄 흐르는 물이 질척이 아니라 아예 물웅덩이처럼 철퍽철퍽하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말 그대로 분수를 싸버린 나를 구경하며 차도헌은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묵직한 살덩이를 손에 쥔 채로 탁, 탁 소리를 내며 팔을 움직이는 차도헌에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흥분에 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차도헌이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반찬 삼아 자위를 하는 차도헌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흥분감이 몰아쳤다.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살살 돌려 매만지며 앓는 신음을 냈다. 아래에서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진한 정액이 투두둑 뿜어져 나왔다. 끊임없이 내 배 위로 질척한 정액이 쏟아지고 있었다. 따뜻한 사정액에 온몸이 뒤덮이는 동안 불현듯 오메가의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대로 내 배 위에 한가득 싸지른 차도헌의 정액을 손으로 훔쳐 올렸다. 좆물이 듬뿍 묻은 손가락을 거리낌 없이 입 안으로 집어넣으려는데 차도헌이 단단히 내 손목을 움켜잡아 막아냈다.
“이미 먹었어? 아직 아니지? 입 벌려봐, 해영아. 뱉어. 응?”
혹여라도 내가 자신의 정액을 먹었다면 위세척이라도 시킬 기세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느릿하게 두 눈을 끔벅였다. 이미 차도헌의 정액을 꼭 먹고 싶다는 본능에 사로잡힌 채였다.
저 진한 정액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받아 마시고 싶은, 그것도 아랫배가 단단히 부를 정도로 배불리 마셔대고 싶은 강한 욕구에.
오메가의 본능대로 내 손목을 붙잡은 손을 탁 뿌리치고는 엉금엉금 차도헌의 좆을 향해 기어갔다. 무지막지하게 핏줄이 오른 고간에 얼굴을 묻자 이미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차도헌이 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능은 전에 없던 괴력을 발휘하고야 말았다. 차도헌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자 여전히 죽지 않고 딴딴하게 올라붙은 탱탱한 불알이 입술에 닿았다.
입 안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뜨거운 살덩이를 가볍게 핥다가 밑기둥부터 혀를 내밀고 선단을 타고 올라갔다. 내가 주는 쾌감에 차도헌의 몸이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차도헌은 내가 정액 한 방울 먹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아까보다도 더 발기한 좆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차도헌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혀로 핥으며 손 틈으로 새어 나오는 쿠퍼액을 맛봤다. 차도헌은 흥분에 겨운 목소리를 겨우 참으며 나를 말리고 있었다.
“해영아, 이러면 너만 다쳐, 응? 그만. 해영아, 그만.”
혀가 닿지 않는 밑둥은 손으로 움켜쥐면서 흔들자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는 불알을 주무르고 혀끝을 세워서 귀두를 움켜쥔 손가락 틈 사이와 살짝 드러나는 귀두 아랫부분을 핥아대자 차도헌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차도헌이 한숨과 비슷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차도헌의 좆에서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정액이 분출되었다.
귀두를 틀어쥔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온 정액이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진한 정액이 맺힌 눈꺼풀을 깜박이자 질척하게 엉긴 정액에 곧장 눈앞이 뿌옇게 됐다.
허겁지겁 선단을 타고 흐르는 정액에 이어 차도헌의 손가락 사이에 고인 정액을 입 안 가득 담아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진한 체향에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꼴깍, 소리를 냈고, 차도헌은 끝끝내 참아내던 욕망을 풀어내고야 말았다.
엉덩이를 터뜨릴 듯이 움켜잡아 양쪽으로 벌린 차도헌은 그대로 좆을 박아 넣었다. 내벽이 꽉 차오른 듯 버거운 느낌에 삽입하자마자 내 가슴팍은 다시금 축축해졌다. 세차게 싸대는 물에 온몸이 축축하다 못해 미끌거렸고 이미 다 젖어버린 시트에 등허리가 질척해졌다.
“아앙, 앙, 좋, 좋아, 하응, 응, 으응!”
무지막지하게 박아 넣는 행위에 미친 듯이 스팟이 쳐올려졌다. 배 안을 가득 채운 좆이 닿으면 안 될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엉덩이 사이에서는 사람을 때리는 것 마냥 퍽퍽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너무 좋아서 눈물이 줄줄 날 만큼 앙앙대던 신음은 비명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언제부터 줄곧 물을 싸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츰 귀두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강하게 내벽을 쳐올리는 차도헌의 몸짓에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허공에서 흔들리는 좆을 움켜쥐었다.
방향을 모르고 이리저리 쏟아지던 물줄기가 이내 차도헌의 복근을 향했다. 내가 싼 물에 차도헌의 몸이 점차 번들번들해졌다.
“좋아, 아으응, 좋, 윽, 하응, 아! 아앙!”
“후, 해영아, 도해영-!”
차도헌은 차츰 빨라지기 시작한 허릿짓에 성대를 으르렁대며 내 이름을 불렀다. 정신없이 목을 끌어안아 입을 맞추자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숨이 막힐 만큼 키스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온 절정의 순간에, 차도헌은 돌연 내 몸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잔뜩 성난 좆을 흔들며 눈앞에서 자위를 하는 차도헌에게 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도헌 씨이, 나 얼굴에….”
제발 얼굴에 싸달라는 부탁에 차도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입술에 귀두를 부볐다. 혀를 빼어내어 슬금슬금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정액을 싹싹 핥아냈다.
“눈 감아.”
거친 목소리와 함께 이윽고 뜨끈한 정액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차도헌의 손이 내 얼굴을 훑었다. 눈물과 내가 싸댄 물과 차도헌의 정액이 이리저리 엉겨 붙어 질척해진 얼굴을 다정히 쓸어준 차도헌 발갛게 부은 눈가에 키스를 했다.
촉, 촉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두 눈을 감았는데도 밝게 비추는 햇살에 잠에서 깨어 버렸다. 뒤척일 기운도 없이 부스스 눈꺼풀을 떠올리자마자 보이는 건 차도헌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잘 잤어?”
아직 정신이 몽롱한 사이로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차도헌은 더 자라는 듯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내 몸을 잡아먹듯이 품에 파묻었다.
히트가 끝나 열감이 걷히고 찾아온 개운한 기분에 더불어, 포근한 향기가 나는 보송보송한 거위 털 이불에 둘둘 말린 채 널찍한 품에 안겨 시원하게 몰려드는 차도헌의 페로몬을 맡고 있자니 방금 깬 것이 무색하게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다시금 까무룩 잠에 빠져들 뻔했으나 하늘은 내가 다시 잠들기를 허락하지 않은 듯싶었다.
“…저기, 도헌 씨.”
“응, 해영아.”
“이거 좀 치워줘.”
팔뚝만 한 크기의 위용을 자랑하는 차도헌의 그것이 아침의 사정으로 인해 더더욱 몸집을 키우며 내 가냘픈 아랫배를 묵직하게 눌러대고 있었다.
내 부탁에 차도헌은 낮게 웃으며 끌어안은 몸 사이로 푹신한 이불을 구겨 넣었다. 덕분에 줄곧 내 배를 압박하던 것으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잠에서 깨버린 시점에서 또 다른 고통이 넘실대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히트가 끝나고 맞이한 개운하고 산뜻한 기분은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나는 신음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잘 누워있던 내가 갑자기 몸을 확 웅크리며 불규칙한 숨을 내쉬자 차도헌은 다급히 이불을 마구 헤쳐내곤 이리저리 몸을 살피며 물었다.
“왜, 왜 그래 해영아, 응?”
내 팔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보며 혹시 뼈가 부러졌는지 확인하는 차도헌에게 나는 끙끙대며 새된 목소리를 냈다.
“…너무 아파….”
“어디가 아픈데, 어디가 부러진 것 같아?”
“아니, 그냥 온몸이….”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쑤시다 못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누가 내 몸을 반으로 접어 똑 부러트린 것마냥 허리가 아팠고 허벅지 안쪽은 쓰라리다 못해 근육이 찢어진 것 같았다. 엉덩이는 멍이 든 것처럼 얼얼했고, 손목과 발목은 뼈가 아작이 난 것처럼 삐그덕댔다.
게다가 입술은 죄다 터져서 미친 듯이 쓰라렸고, 저 무시무시한 걸 온종일 받아낸 덕에 뒤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데다가, 부어버린 성기는 드로어즈에 스칠 때마다 따끔거려 절로 몸이 움찔댈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히트를 차도헌과 같이 보낸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간 억제제를 꼬박꼬박 먹은 데다가 히트 기운이 있을 때면 약으로 해결을 보곤 했었으니까.
극우성 알파와 보내는 히트는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차도헌을 노려보며 따져 물었다.
“왜 도헌 씨는 멀쩡해?”
어제 정신을 놓을 만큼 해댔는데 어째서 차도헌의 드로어즈는 아까보다도 더 두둑해지는 걸까. 이 정도면 아주 양심이 없는 거 아냐?
아까부터 줄곧 걱정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던 차도헌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누구는 아파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고 끙끙대는데, 자기는 저렇게 멀쩡하다 못해 기운이 쌩쌩 돌아 얼굴이 반질반질하다니 억울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히트에 정신이 없었더라도 정도를 지켜가며 매달릴 걸…. 차츰 떠오르기 시작하는 어제의 기억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어. 아침 가져올게.”
차도헌은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켜주더니 푹신한 베개를 침대 헤드에 얹어두곤 등을 기대어 앉게 했다. 그렇게 부축을 받으며 쿠션에 등을 대고 앉자 문득 저 멀리 구석에 박힌 파자마 잠옷이 보였다.
그 순간 잊었던 어제 일이 떠올랐다. 윤 비서님이 건네준 용도를 모를 종잇조각, 아직 차도헌에게는 밝힐 수 없는 의문의 것.
혹시나 옷가지를 세탁한다며 차도헌이 파자마를 가져가면 안 되기에 늘어졌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냐, 좀 걸어볼게.”
내 결연한 목소리에 차도헌은 웃으며 이마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내내 드로어즈 한 장 걸친 차림이었던 차도헌은 바닥에 떨어진 내 파자마 바지를 주워 입고는 방에서 걸어 나갔다. 내가 입었을 땐 바닥에 좀 끌릴 정도로 큼직한 바지였는데 차도헌이 입으니 종아리가 드러나는 7부 바지가 되어 있었다.
차도헌이 방을 나가자마자 후다닥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에 낑낑대면서도 나는 파자마 윗옷 호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어 종이를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종이는 얌전히 호주머니 안에 자리해 있었다.
종이를 꺼내어 다시 차곡차곡 자그마하게 접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숨길 곳을 찾았다. 이따 차도헌이 출근한 후에 다시 꺼내 살펴볼 생각이었다. 협탁 뒤편 틈 사이로 종이가 보이지 않게 잘 쑤셔 넣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널브러진 파자마를 주워 입곤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방에서 걸어 나갔다. 누가 내 몸을 부수고는 대충 뭉쳐둔 것처럼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고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딘가 정말 좀 잘못된 것 아닐까 하는 고민과 함께 삐걱이며 힘겹게 의자에 앉는데, 차도헌이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밥 먹고 병원 가자.”
아니나 다를까 차도헌은 데운 우유가 담긴 머그를 건네며 병상행을 강요했다.
원래 재벌들은 조금만 아파도 바로 의사를 찾나? 게다가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 앞에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데?
‘어제 이 알파와 잠자리를 가졌는데 몸이 아파서요. …아뇨, 스팽킹 같은 건 안 했는데 그냥 좀… 아뇨, 강제로 한 건 아니고요, 서로 동의하에, 네….’
절로 눈앞에 그려지는 어색한 상황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안 가도 돼. 그렇게 병원 갈 만큼 안 아파.”
내 단호한 투에 차도헌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켜켜이 쌓인 퐁실한 팬케이크를 내려놓으며 앉았다. 평소라면 내 거절에도 병원에 가자고 계속 말을 붙였을 텐데, 아무 말도 없이 팬케이크를 먹기 좋게 써는 차도헌에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금방 완성된 따끈한 팬케이크 위에는 큼지막하게 잘린 버터가 열기에 사르르 녹고 메이플 시럽을 두어 번 둘러 윤기가 흘렀다.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에 우선 입을 축이려 앞에 놓인 머그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따듯하게 데운 우유는 퉁퉁 부은 입술을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쓰라림을 남겼으며 목구멍을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게 선연한 고통을 선사했다.
화들짝 놀라 컵을 다급히 내려놓자 내 앞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도톰한 팬케이크가 둥실 떠 있었다. 고작 액체를 마시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저걸 삼킬 수나 있을까? 차마 입술을 벌리지 못하고 어물쩍대자 차도헌은 내 입가로 들어 올렸던 포크를 내려놓곤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나는 걱정이 돼. 네가 아파도 참는 것 같아서.”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넘겨 준 차도헌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볼을 쓸며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건 욕심이겠지. 하지만… 혹여나 네가 보낸 신호를 놓쳤을까,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당연한 것들을 모르고 넘길까. 늘 전전긍긍해.”
“…….”
“내 곁에선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할 수만 있다면 네 모든 고통도 불안도 다 내가 대신하고 싶어.”
담담한 고백이었다. 어쩌면 내게는 과분할 만큼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차도헌과 눈을 맞췄다.
분명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런 감정들은, 내가 결코 바라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독이 든 달콤한 열매처럼 분명 언젠가 나를 괴롭게 만들 테니까, 기어코 나를 힘들게 할 테니까.
그럼에도 그것들을 조심스레 하나둘 꺼내어보는 순간들이 있었다. 늘 내 안을 채우는 감정들을 두려워했던 나는 오롯이 나를 향한 차도헌의 눈빛과 목소리 앞에서, 내 몸을 푹 적시는 그 감정들을 담담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 차도헌의 입술 위로 입맞춤을 남겼다. 가볍게 맞닿고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조그마하게 진심을 내보이면서,
“고마워.”
한 번 더 입술을 부드럽게 내리눌렀다. 이번에는 길게, 두 눈을 꾹 내리감은 채로.
포근한 체향이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듯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을 끌어안는 손길도, 가볍게 나누는 호흡마저도 전부 다 달콤해서 나는 가만히 웃음을 삼켰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이 살랑대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맞추자 차도헌은 조심스레 머리칼을 쓸어주며 이마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이제 밥 먹자.”
그러곤 다시금 포크로 팬케이크를 쿡 찍어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는 좀 괜찮지만 여전히 입술이 부어있는 관계로 얼굴 앞에 둥실 떠오른 케이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벌려 자그마하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부은 곳들을 피해가며 열심히 오물오물 씹자 입 안 가득 포근한 바닐라 향이 차올랐다.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에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팬케이크는 금방 사르르 녹아버렸다.
퉁퉁 부은 목에도 부담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팬케이크를 꼴깍 삼키자마자 나는 시럽이 묻은 입술을 혀로 훑으며 감탄사를 보였다.
“맛있어.”
나름 팬케이크의 안전성을 확인한 나는 포크에 매달린 나머지 조각을 한입에 다 밀어 넣고 열심히 오물거렸다. 차도헌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내 볼에 입술을 붙이며 쫍,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댔다.
그렇게 차도헌이 건네는 팬케이크를 수차례 받아먹자, 어느새 접시의 반을 비운 채였다. 평소라면 한 조각 썰어 먹고 말았을 텐데 이렇게 음식을 많이 먹은 건 거의 처음이었다.
배가 불러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늘어져 앉은 내게 차도헌은 잘했다는 듯이 시럽이 묻은 입술 위로 다시금 짙은 입맞춤을 남겼다.
나를 다 먹인 후에야 차도헌은 뒤늦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이 폴폴 나던 커피는 잠잠할 정도로 식어버린 채였다. 온전치 못한 몸 상태에 평소보다 천천히 식사가 이루어진 탓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눈동자를 도록 굴리는데, 그 순간 어쩌면 내가 커피를 식게 만든 것보다도 더 큰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늦은 거 아니야?”
시곗바늘은 분명 1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늘 해도 뜨지 않는 꼭두새벽에 출근하는 그가 이 시간까지 집에 있다는 건 크나큰 문제였다.
내 심각한 반응과 상반되게 차도헌은 여유로웠다.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오전 반차 썼어.”
“반차? 도헌 씨 대표이사인데 막 못 쉬어? 꼭 반차 써야지만 쉬는 거야?”
까다롭네…. 중얼거리는 내게 차도헌은 푸흣,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편히 다리를 꼬았다.
손마디가 툭 불거진 거친 손이 짙은 흑색의 머리칼을 시원스럽게 쓸어 넘긴다. 이내 잘난 이목구비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만큼 매혹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예 가지 말까?”
“…대표가 그렇게 막 땡땡이쳐도 돼?”
능글맞은 목소리에 반해 하염없이 순진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차도헌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리며 내 몸을 끌어안아 허벅지 위에 앉혔다.
허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끈적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파자마 안으로 쑥 들어와 허리를 지분대는 손이 차츰 아래로 내려가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
“잠, 잠깐만-, 도헌 씨, 나가봐야 하는 거 아냐?”
내 물음에 차도헌은 쇄골 위로 촉, 촉 입술을 내리찍으며 흥분에 젖어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좀 더 늦어보지 뭐. 나 대표이산데.”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섹시한 알파가 나를 꼬시는 순간이었다.
드러난 맨다리를 느릿하게 훑으며 허벅지 안쪽을 매만지는 손길에 일순간 온몸이 바짝 굳었다. 긴장감에 딱딱해진 몸을 달래듯 이리저리 입술을 붙이던 차도헌은 정말 끝까지 갈 기세인지 딱 붙은 드로어즈 위로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더더욱 열기를 가했다.
“잠, 잠깐만-!”
차도헌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사람처럼 다급히 입술을 찍어대는 동안 불현듯 내 귀에 선연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징징징 울려대는 소리가 전화 소리임을 안 순간 나는 차도헌의 어깨를 밀며 저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차도헌은 흔들림 없이 나를 끌어안은 채 내 몸을 지분거렸다. 분명 웅웅웅 세차게 울리는 진동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텐데, 제게 걸려온 전화를 깔끔히 무시하며 오롯이 내게만 집중한 채였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흥분한 알파를 진정시킬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것도 그 품에 옴짝달싹도 못 하고 안겨있는 내가 차도헌의 날아간 이성을 대신 붙잡아 줄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에 퍽 어깨가 무거워졌다.
차도헌의 목을 끌어안은 한쪽 손을 등 뒤로 뻗어 핸드폰을 가져오려 했지만, 그럴 틈 하나 남기고 싶지 않다는 듯 차도헌은 뻗은 내 손을 단숨에 붙잡아 단단히 손깍지를 꼈다.
결국 나는 회유책을 던졌다. 내 목덜미 위로 입술을 붙여대는 차도헌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부디 애처롭게 울려대는 전화를 받도록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도헌 씨 전화 오는데―”
“괜찮아. 중요한 연락 아니야.”
그 순간 뚝 끊기는 전화에 차도헌은 그것 보라며 테이블 쪽으로 여유롭게 눈짓을 하고는 다시금 입술을 붙이며 진한 키스를 해오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달래듯 밀고 들어오며 시작된 깊은 입맞춤에 차츰 나른하게 몸이 풀리는 순간,
웅-, 웅웅웅!
전화가 끊겨 잠시 잠잠해졌던 핸드폰이 다시금 전에 없이 세차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줄곧 진동음을 무시하며 내게 입을 맞추던 차도헌은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에 결국 낮은 욕설을 읊조리며 거칠게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자칫 손에 조금만 힘을 더 주었다간 아예 핸드폰을 부술 만큼 거세게 움켜쥔 그는 불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윤 비서입니다. 오늘 출근-,
휴대폰 너머 다급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윤 비서님이었다. 차도헌은 미간을 구긴 채 윤 비서님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지금 이사님 앞으로 몰린 결재가 너무 많습니다만… 참석하실 회의도 두 건이나 있으시고, 제출할 소송 자료도 확인을….
윤 비서의 목소리가 길어질수록 차도헌의 표정은 끝도 없이 험악해지고 있었다.
―12시까지는 꼭… 복귀해주십시오, 이사님. 부탁드립니다.
오늘 차도헌의 무단 지각으로 인해 업무가 얼마나 밀렸는지 잔소리에 이어 남은 오후 시간 동안 끝내야 할 업무를 정리해서 보고한 윤 비서님의 애처로운 부탁을 끝으로, 내내 침묵을 유지한 채 머리칼을 넘기며 가만히 듣고 있던 차도헌은 ‘알겠습니다.’ 단 한마디를 뱉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자 차도헌은 짙은 한숨과 함께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듬직하다 못해 거대한 상체를 구기며 품에 안겨든 채로 숨을 두어 번 깊게 들이쉰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
누가 보면 회사가 아니라 어디 멀리 유배라도 가야 하는 사람처럼 보일 만큼 차도헌의 표정은 심란 그 자체였다.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어서, 나는 가만히 차도헌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냈다.
“바쁜 것 같던데. 무리하지 마.”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좋다. 네가 걱정해주니까.”
차도헌은 얼굴 위로 웃음을 만연하게 꽃피운 채였다.
***
차도헌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회사고 뭐고 통째로 빠질 기세였지만, 아까 윤 비서님과의 전화에서 슬쩍 들었던 내용으로 보아 아무리 차도헌이 대표이사라 하더라도 회사를 빠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혹시나 내가 어디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기로 손가락까지 걸었다. 차도헌은 일을 빨리 끝내고 같이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며 이따 윤 비서를 통해 나를 데려올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차도헌은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떠났고, 나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그의 퇴근까지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협탁 뒤에 구겨 넣은 종이를 빼내곤 후다닥 거실로 달려 나와 소파 위에 던져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얀 검색창과 낡은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고뇌했지만 마땅한 검색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19xx年 12月 30日 都瀣泳(도해영)]
“이게 대체 뭘까….”
날짜와 이름이 적힌 길쭉한 종이 띠…. 모란에서 발견한 걸 보아 분명히 업소랑 관련된 것 같은데….
아무리 인터넷이 찬란한 정보의 바다라지만 내가 들이미는 엉뚱한 검색어에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결과들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검색창과 씨름을 하다가 결국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소파 위로 늘어져버렸다. 꼬박 한 시간이 넘도록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더니 어질어질하게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소파에 웅크려 눕자 널찍하게 트인 창밖으로 유유히 흔들리는 갈대밭이 보였다. 그 적막한 풍경에 가만히 눈을 감자 울렁이던 속이 차츰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못 잔 잠을 이제야 몰아서 자는 건가 싶을 만큼 정말이지 요즘에는 머리만 대면 잠이 몰려왔다. 이전에 비해 부쩍 잠이 많아진 만큼 피곤함도 같이 줄어야 할 텐데, 기력은 오히려 이전과 비슷할 정도로 떨어지니 아이러니였다.
그렇게 편히 누운 채로 가만가만 숨을 내쉬자 서서히 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내 나 자신도 느낄 정도로 잠에 취한 숨소리가 색색대며 잦아들었다.
징, 지잉-
가볍게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퍽 깊은 잠을 잔 듯싶었다. 화들짝 놀라서 깬 건 테이블에서 웅웅 울리는 진동 소리 때문이었으니까.
당연히 차도헌이나 윤 비서님으로부터 온 전화일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핸드폰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걸려 있었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뚝 끊긴 전화에 이어, 화면에 수신된 문자가 둥실 떠올랐다.
[해영 씨, 나예요. 오윤주.]
문자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다시금 동일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의 신원이 밝혀졌음에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아들었다.
―해영 씨? 해영 씨 맞죠?
혹시나 발신자가 오윤주라며 거짓말을 했을 상황에 대비해 곧바로 전화를 끊을 준비를 하던 나는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윤주 씨. 오랜만이네요.”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해영 씨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전화부터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매끄러운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재차 사과한 오윤주는 내가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묻기도 전에 다급히 말을 붙였다.
―혹시 해영 씨가 나 오해할까 봐, 해영 씨 언론에 넘긴 거 나 아녜요. 정말, 정말 맹세코.
…아, 맞다.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짧은 탄식을 뱉었다.
아무리 차도헌의 저택이 24시간 철통 보안이 돌아가는 안전에 안전을 기한 곳이라도, 거기에 더불어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한 발짝도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다 하더라도, 당장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을 까먹고 있었을 줄이야.
몸 편하고 마음 편하면 팔자 늘어진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어쨌든 그녀로서는 내가 차도헌이 숨겨둔 오메가로 언론에 언급이 되는 순간부터 마음에 짐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차도헌이 극비로 숨겨둔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은 정말 몇 없었으니까.
도대체 누가 나와 차도헌의 관계를 언론사에 팔아넘겼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지만, 전화 너머로 다급히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녀가 하지 않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윤주 씨가 그랬어도 별로 상관 안 했을 것 같은데요.”
―너무해. 나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나름 고마운 마음을 담아 건넨 말이었는데 오윤주는 어딘가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서운한 기색도 잠시, 그녀는 단숨에 활기찬 목소리를 내며 내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해영 씨? 잘 지내죠? 오피스텔은 비운 거예요? 기자들이 해영 씨 어디 사는지 아니까 옮겼을 것 같긴 한데. 혹시 차도헌이랑 같이 지내는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차도헌이랑 같이 산다고요? 물론 예전에 내가 해영 씨한테 쌍방 각인 좀 유지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거 해영 씨한테 위험한 거라면서요. 나 그땐 정말 몰랐어요. 그렇게 위험한 건 줄.
걱정과 미안함이 담긴 오윤주의 목소리에 문득, 그녀가 내게 쌍방 각인을 부탁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최대한 차도헌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줘요. 혹여 약물이 완성되더라도 먹지 않겠다고, 계속 쌍방 각인을 유지하고 싶다고 설득시켜줘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오윤주는 내게 차도헌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사랑을 하면 죽는 오메가에게 부디 차도헌을 사랑해달라고.
‘다 줄게요. 뭐든. 다 말해요. 내가 거지가 되고 빈털터리가 될 정도로 요구해도 돼요. 가진 걸 다 줄게요. 상관없어요. 내 아버지의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전부를 다 해영 씨에게 줄게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그녀는 내게 부탁을 했었다.
―쌍방 각인 풀어요, 해영 씨. 굳이 나 때문에 유지할 필요 없어요. 내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해볼게. 해영 씨는 여기서 빠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번 일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밑에서 해영 씨를 노리고 있어요. 차도헌과 깊게 연관될수록 더 위험해질 거예요. 나는 해영 씨가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그런데 그녀는 이제 와 내게 쌍방 각인을 어서 끊어내라며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내가 위험해지지 않길 바란다면서, 차도헌과 관계가 깊어질수록 내가 위험해질 거라고….
나는 오윤주의 부탁에 한참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도헌과 쌍방 각인을 풀어내라니, 그 말을 다시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뻐근하게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나는 차도헌을 향한 이 감정이 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사랑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랑이 뭔지, 사랑이 어떤 건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차도헌과의 쌍방 각인이 끊어지면, 그러니까, 페로몬으로 얽혀버린 우리의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온다면….
“…미안해요, 윤주 씨.”
―해영 씨.
“못하겠어요. 그건… 못하겠어요.”
진심을 토해내는 사람처럼 심장이 헐떡대며 뛰어댔다. 핸드폰을 굳게 붙든 채 나는 밭은 숨을 쉬었다. 내가 내린 결론에 오윤주는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녀가 당황해하는 만큼 나조차도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놀라고 있었으니까.
난 사랑 같은 건 몰랐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내 삶에서 차도헌을 면도칼로 도려내듯 잘라내고 난 후에 남은 공허는 나를 아프게 할 거라고. 차도헌을 향한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세상에 그가 없는 날을 떠올려본다면 아마도 그건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일지도 모르겠다고….
―괜히 강요해서 미안해요. 난 해영 씨 선택 존중해요.
“…아니에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윤주 씨.”
내 답변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곤 잠시간 이어온 진중한 태도를 벗어던지곤 쾌활한 목소리로 단번에 대화 주제를 뒤집어버렸다.
―그나저나, 해영 씨 요즘 밥은 잘 먹어요? 우리 해영 씨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데. 오늘 당장은 안 되죠?
“오늘은… 도헌 씨랑 저녁 약속이 있어요.”
―아하, 금요일이니까 또 데이트 잡아놨겠구나. 그것도 모르고 괜히 들이댔네요?
“데이트는 아니고 그냥….”
―그럼 나중에라도 시간 꼭 내줘요.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싶어요. 난 해영 씨 좋아하니까.
마지막까지 활기차게 대화를 이끌어간 그녀는 전화를 끊기 직전에야 짐짓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부디 조심히 잘 지내요.
그 안에 담긴 걱정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주 씨도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오윤주와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