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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온점-0화 (22/43)

불안의 온점

0.

쾅, 소리와 함께 호텔 스위트룸 객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윽고 혀를 끌끌 차며 모습을 드러낸 건 황 회장이었다.

“강태산이, 네놈이 기어이 일을 크게 벌였구나.”

“…회장님.”

황 회장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강태산은 빠르게 리모컨을 들어 올려 틀어놓았던 TV의 전원을 껐다. 하지만 황 회장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에게 손짓해 TV의 전원을 다시 켜게 했다.

강태산이 다급하게 껐던 TV 뉴스 화면에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추모식에서 도해영이 언급되자 보도 카메라를 부수어버리는 차도헌의 모습과 이후 그의 품에 안겨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는 도해영의 모습이 연달아 줄기차게 나오고 있었다.

“우리 해영이 이름이랑 얼굴이 말이야, 응? 대문짝만하게 TV에 실리다니 참 신기해, 안 그러냐 강태산이?”

“…….”

“강태산이 네 놈 덕에 줄곧 꽁꽁 숨겨온 모란도 곧 방송을 타겠어, 응? 우리 해영이가 또 잘나가는 모란 출신 오메가니깐 말이야.”

걸걸대는 목소리로 말을 끝낸 황 회장은 가래를 모아 카펫 위에 뱉더니 끌끌대며 웃었다. 이윽고 옆에 있는 부하로부터 리모컨을 건네받은 황 회장은 들고 있는 리모컨으로 강태산의 이마를 툭 툭 때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태산아. 이 바닥에는 일의 순서가 있는 법이라고, 응?”

강태산은 황 회장과 약속한 3개월을 어겼다. 황 회장은 자신의 밑에서 세 달간 일을 잘 마치면 도해영을 차도헌 그 새끼로부터 구하는 데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강태산에겐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그래서 강태산은 물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 회장의 밑에서 일하는 놈들 중 황 회장에게 원한을 품은 조직원들을 불러 모아 세력을 갖추고, 모란 쪽 조폭들도 흡수해서 몸집을 불렸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정보를 언론에 넘겨 현금을 끌어 모았다. 정재계 인사들이 조폭에게 수주해 벌인 범죄 행위부터 모란의 오메가들로부터 얻은 정계 인물들의 스캔들까지.

그중 차 그룹의 대표이사 차도헌과 사창가 출신 오메가 도해영의 염문설에 대한 정보의 값이 가장 거금으로 매겨졌다.

강태산은 부러 스스로를 위안했다. 현금 다발로 가득 찬 케이스를 내려다보며 이것은 자신이 도해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되뇌었다.

절대로 도해영의 존재를 언론에 팔아넘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벌인 일은 오히려 차도헌으로부터 도해영을 구해올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강태산은 생각했다.

강태산의 시나리오 속 차도헌은 기사가 터진 후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도해영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접근한 오메가이며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식의 정정 보도를 낼 인간이었다.

분명히 차도헌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도해영을 버릴 것이다.

[도해영 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차도헌 대표이사가 나타난 순간입니다. 차도헌 대표이사는 도해영 씨의 신변 노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재킷으로 도해영 씨의 얼굴을 가린 채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하지만 강태산의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차도헌은 아수라장이 된 오피스텔로 걸어 들어가 도해영을 데리고 빠져나갔다. 끝도 모르고 쫓아오는 취재 차량을 피하며 도로에서 질주하기까지 했다.

차도헌은, 도해영을 버리지 않았다.

“강태산이, 응? 일을 그르쳤으니 책임을 져야겠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황 회장은 리모컨으로 강태산의 이마를 툭툭 치던 것을 멈추고는 리모컨을 강태산의 머리통에 세게 내리꽂았다.

산산이 깨진 리모컨의 부품이 비가 내리듯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태산은 고개를 숙인 채 어금니를 질근 깨물었다.

“내일부터 모란 사업줄 끊어라.”

“…예?”

“꼬리를 잘라야 하지 않겠어, 응? 거기 있는 조폭들 다 철수시키고, 우리 모란이도 그간 받았던 사업금, 죄다 도로 뱉으라고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강태산은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자신 때문에 모란을 지키던 마담과 오메가들이 위험해질 것을 생각하니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강태산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황 회장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회장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그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지만 황 회장은 강태산의 호소에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이 선량한 조폭 놀음하면서, 창놈 새끼들한테 영웅 취급이라도 받으니 기분이 그렇게 좋았더냐?”

“…….”

“도해영이가 유독 네놈 새끼 아래에서 뻔질나게 허리 흔들어주던 것도 그 때문이었나? 아랫입 꽉꽉 조여주는 만큼 목숨 지켜달라고 앙앙거렸나?”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이어 다시금 강태산의 머리통 위로 황 회장의 걸쭉한 가래침이 툭, 들러붙었다. 아래로 질척이며 흐르는 침이 카펫 위로 방울져 떨어지기도 전에, 황 회장은 구둣발을 들어 올려 강태산의 머리통을 짓눌러 밟았다.

“그러게 강태산이, 뭐든 제대로 좀 하지 그랬냐, 응? 멍청한 조폭 놈이 일을 그르치면 착하디착한 애들이 대신 칼을 맞는 법인데 말이다.”

노기에 찬 눈동자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강태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강태산은, 어지러운 무늬의 카펫 바닥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세게 악물었다.

자신은 다른 조폭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강태산은 절대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약한 자들을 괴롭히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해주는 편이었으며, 처리 타깃을 놀잇감 삼아 마구잡이로 칼을 쑤셔대는 놈들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살상 방법으로 깨끗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한순간에 눈앞에서 농락당했다. 악랄하게 혀를 놀리며 자신을 짓밟는 황 회장의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강태산은 들끓기 시작한 분노에 의해 이성을 놓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강태산의 눈빛엔 차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결국 그의 내면에 깊게 자리했던 온갖 분노와 잔혹, 무자비한 살상의 쾌락과 비이성적인 감정들이 차츰 발화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어스름히 어둠이 내려앉은 사창가 골목, 새빨간 갓등과 노란 전등이 비추는 난잡한 거리에 돌연 새까만 정장 무리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단정한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둔기를 각각 손에 쥔 채로 모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담, 밖에 사람들이….”

프런트에 나가 있던 오메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마담의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쌕쌕대며 숨을 내쉬는 오메가와는 다르게, 보고를 받은 모란은 놀란 기색도 없이 한쪽 다리가 주저앉은 낡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란은 알았다. 지금이 바로 황 회장이 꼬리를 잘라 버리는 순간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황 회장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몸을 숨겼던 모란이 날 선 세상의 밑바닥에 온전히 버려지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민재야, 애들 다 데리고 쪽방에 들어가서 문 걸어 잠그고 있으렴.”

“마, 마담-”

“오늘은 영업 안 하니 다 같이 한숨 푹 자는 것도 좋지 않겠니?”

모란은 마주 선 오메가의 마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곤 두려움에 떨어대는 그를 향해 우는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서 가.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테니.”

그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문짝이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란은 곧장 오메가의 등을 밀어 쪽방에 집어넣곤 복도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뮬의 굽이 나무 바닥 위로 질질 끌리는 소리가 공허한 복도를 울리고, 그에 질세라 다시금 쨍그랑, 하며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모란은 원래 있어야 할 대문이 뜯겨져 나가 휑해진 문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죄책감에 물든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강태산과 마주 섰다.

“죄송합니다, 마담.”

강태산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마담에게 사죄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일을 그르쳐 생기게 된 결과였다, 도해영이 그렇게 된 것도, 모란이 이렇게 된 것도….

구역 내에서 최고급 업소로 취급받으며 나름 안전하게 업장을 굴리던 모란이었다. 다른 업소와는 감히 견주지 못할 만큼 내부에 배치한 조폭의 머릿수나, 고위층 위주로 고객을 골라 받으며 관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모란의 배후에 황 회장의 압력이 단단히 들어가 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황 회장이 발을 뺀 순간부터 모란은 한낱 사창업소에 불과했다. 오늘부로 모란은 이전에 없던 취급을 받게 될 것이었다. 모란은 매일같이 다치고 죽어가는 옆 업소들처럼 각인과 임신, 폭행과 강간으로부터 자신의 오메가들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었다.

허리를 푹 숙인 강태산을 응시하며 마담은 떨어져 나간 문짝을 구두의 앞코로 톡, 찼다. 이내 새카만 문짝 위로 도금이 벗겨진 화려한 무늬의 금색 문손잡이가 데구루루 굴렀다.

“태산아.”

유유히 내뱉는 마담의 목소리에 강태산은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얼마 전 직급이 올라간 이후로 내내 제게 존칭을 사용하던 마담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태산을 향한 마담의 목소리는 오래전의 것과 같았다. 마치 강태산이 이 업소에 처음 발을 들였던 순간처럼, 모란이 강태산에게 도해영을 부탁했던 날처럼.

“참 아이러니하지 않니?”

“…….”

“모란을 망가뜨린 것도, 모란을 지킨 것도 전부 다 황 회장이라니….”

모든 것에는 양가감정이 존재한다. 모란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망가뜨린 황 회장을 경멸했다. 자신과 오메가들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잡은 황 회장을 그녀는 한시도 증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운명치곤 참 가혹해.”

하지만 정작 모란은 그들의 삶을 끔찍하게 만든 황 회장의 보호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사실만큼 무력하고도 괴로운 것은 없었다.

황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축축한 어둠뿐이었다.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암울한 저 밑바닥의 삶은 오롯이 모란과 강태산, 그리고 모란의 오메가들의 것이었다.

강태산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되돌려놓아야 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실수로 무너져 내린 모란을 지켜내야 했다.

강태산의 목표는 그렇게 하나가 더 늘었다. 황 회장이 끊어낸 모란의 사업 줄을 다시 붙잡아오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마담과 오메가들을 지킬 것.

그런 강태산 앞에, 마담은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렸다. 벌린 품은 언젠가 도해영을 보낼 때와 같았고, 마담의 얼굴에는 딱 그만큼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지 했는데….”

“…….”

“해영이 보낸 것처럼, 태산이 너도 이렇게 영영….”

마담의 담담한 목소리 끝에는 옅은 웃음이 어려 있었다. 강태산은 어색한 몸짓으로 거대한 덩치를 구기며 마담의 품에 안겼다. 마담은 매끈한 정장이 팽팽하게 펴진 태산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승진해서 멋진 옷 입고 다니는 우리 태산이, 오래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마담은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강태산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포옹을 풀고 다시 그녀와 마주 선 강태산은 맹세하듯 읊조렸다.

“전부 다, 되돌려 놓겠습니다.”

모란의 간판을 때려 부수는 황 회장의 부하들을 노려보며 강태산은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망친 모든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만약 황 회장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직접 황 회장을 죽이겠다고.

“그날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마담.”

강태산의 간절한 부탁에 모란은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에는 뒤이어 온전한 슬픔이 번졌다. 등 뒤에서 훅 끼치는 뜨거운 열기에 이어 불은 빠르게 번져나갔고, 나무로 짠 기둥이 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안에 갇힌 어린 오메가들의 비명 소리와 울부짖는 목소리가 불길과 재에 섞여 새어 나왔다.

강태산은 분노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황 회장의 부하들에게 달려들었다. 살이 터지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비명이 낭자한 사창가 골목, 불길에 먹혀 활활 타오르는 모란으로 달려가는 모란의 눈에는 오롯이 슬픔과 고통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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